엘빈 존스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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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0221F><colcolor=#fff> 엘빈 존스 Elvin Jon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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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엘빈 레이 존스 Elvin Ray Jones |
출생 | 1927년 9월 9일 |
미시간 주 폰티액 | |
사망 | 2004년 5월 18일 (향년 76세) |
뉴저지 주 엥글우드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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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드러머, 퍼커셔니스트 |
활동 | 1948년 – 2004년 |
장르 | 모달 재즈, 아방가르드 재즈, 하드 밥, 포스트 밥 |
배우자 | 케이코 존스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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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재즈 드러머. 재즈 음악을 대표하는 드러머 중 한 명이며, 존 콜트레인이 가장 총애한 드러머였다.2. 상세
재즈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드럼 연주자 중 한 명.
― 테드 지오이아 (재즈 역사가) #
― 테드 지오이아 (재즈 역사가) #
현대의 드럼 연주자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
― 휘트니 발리엣 (재즈 평론가) #
― 휘트니 발리엣 (재즈 평론가) #
엘빈 존스는 대중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위대한 드러머 중 한 명이다. 그는 롤링 스톤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 23위에 선정됐고, uDiscoverMusic 선정 위대한 재즈 드러머 순위에서는 5위에 선정, 모던 드러머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는 5위에 선정, Drumeo 선정 위대한 드러머 순위에서는 12위에 선정, 드러밍 리뷰 선정 위대한 재즈 드러머 순위에서는 4위에 선정, 드럼 매거진 선정 역사상 가장 중요한 드러머 50인에도 선정됐다.
1991년에는 타악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1995년에는 모던 드러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1998년에는 다운비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2001년에는 버클리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2003년에는 미국 국립 예술 기금이 수여하는 재즈 마스터(Jazz Master) 칭호를 수상했다. #
3. 생애
3.1. 어린 시절
엘빈 존스는 1927년 9월 9일 미시간 주 폰티악에서 태어났다. 엘빈은 10남매 중 막내였는데, 그의 형인 피아니스트 행크 존스[1]와 트럼펫 연주자 태드 존스[2]는 후일 재즈계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엘빈의 아버지는 제너럴 모터스에서 목재 감사관으로 일했으며 침례회 성가대의 집사이자 베이스 싱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 태드와 행크가 음악적인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음악 수업을 위한 비용을 대줬다. 그러나 엘빈이 태어났을 당시에는 10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음악 교육 같은 사치는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다. 당시 누나[3]와 형들이 동생 엘빈에게 재즈에 대한 많은 지식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엘빈은 어린 시절부터 드럼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폰티악에 있는 집에서 서커스 밴드가 행진하는 것을 자주 봤는데, 이 광경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 6살 때, 엘빈은 처음으로 링링 브라더스 서커스단의 드럼 연주자들을 관람하기 위해 폰티악의 페어그라운드 센터를 방문했다. 이러한 어린 시절 경험은 집에서 들었던 다른 지역 라디오 방송과 함께 엘빈에게 드럼 사운드를 소개해줬으며, 후일 엘빈이 드러머로서의 경력을 추구하도록 만들었다.
엘빈이 13살이 되었을 때, 이미 독학으로 드럼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을 연습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14세에 이미 전문적인 공연을 했다. 엘빈은 자신이 발견한 모든 평평한 표면 위에서 드럼 연주를 했으며, 언제나 드럼 스틱을 가지고 다녔다. 지역 퍼레이드와 운동 대회에 참여했을 때에는 특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연주되는 음악 리듬에 몰입했다고 한다. 또한 집 안에서 발견한 다양한 물건들로 드럼 연습을 시작하기도 했다. 드럼이 없을 때마다 손이 닿는 곳에 드럼 연주를 했는데, 테이블, 벽, 즉 가만히 있는 단단한 표면 위에서 연습하는 것이 엘빈의 습관이 됐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폴 요더의 드럼을 위한 기본법'을 구입하여 타악기 연주자가 되는것에 관심을 보였고, 전문적으로 드럼을 연주하는 기초를 배우기 시작했다.
엘빈은 이 책이 다른 형태의 음악에도 채택될 수 있는 기술을 언급했기 때문에 '드럼 음악을 읽을 수 있게' 해주었고, 모든 음악 세계의 가능성을 열게 해주었다고 설명했다. 딩시 엘빈은 이 책을 보면서 막대기 한 쌍과 연습용 패드를 들고 앉았고, 이틀 후에 책에 있는 모든 연습을 마스터했다고 한다. 10대 초반에 엘빈은 조 존스(Jo Jones)와 섀도우 윌슨(Shadow Wilson)의 스타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있는 동안에 엘빈의 악기 연주자로서의 지식과 기술은 학교의 밴드 강사인 프레드 N. 웨이스트(Fred N. Weist)에 의해 가르침을 받으며 크게 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풀타임 드러머 커리어를 추구하면서 재즈 음악계에서의 자신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떠났다.
3.2. 초기 경력
1946년 18세에 엘빈 존스는 자신의 직업을 찾기 위해 보스턴으로 가서 미합중국 육군에 입대했다. 이곳에서 엘빈은 군 음악 밴드의 멤버로 3년간 복무했다. 드럼만 잘쳤기 때문에 연주자보다는 무대 관리자로서 복무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드럼 실력을 인정받아서 드럼 연주자로 승격됐다. 당시 오퍼레이션 해피니스(Operation Happiness)로 알려진 스페셜 서비스 쇼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여러 투어를 진행했다. 이 투어에서 엘빈은 점차 자신의 기술을 연마했으며, 무대에 대한 자신감을 키웠다.1949년 엘빈은 군 복무를 마친 후, 자신의 첫 드럼 세트를 사기 위해 누나에게 약간의 현금을 빌려 미시간으로 돌아왔다. 당시 재즈 아티스트 경력을 막 시작한 형 태드 존스와 행크 존스하고 동업을 했으며, 지역 디트로이트 클럽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디트로이트 클럽에서 공연을 하는 동안, 엘빈은 베이시스트 폴 체임버스(Paul Chambers), 피아니스트 토미 플래너건(Tommy Flannagan), 기타리스트 케니 버렐(Kenny Burrell) 같은 음악가들을 무대에서 만났다. 또한 빌리 미첼(Billy Mitchell)이 이끈 디트로이트 블루버드 클럽에서 홈 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한 엘빈은 당대 최고의 디트로이트 가수들 중 일부와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재즈 전설들과 연주를 시작했다. 후일 엘빈은 인터뷰에서 자신을 그들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으며, 좋은 우정이었다고 언급했다.
디트로이트에서 잠시 공연을 한 후, 엘빈은 1955년 베니 굿맨 밴드의 일원이 되기 위해 오디션을 보러 뉴욕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 오디션에서 불합격했다. 엘빈의 연주법은 스윙 시대의 스타일을 훨씬 뛰어넘어 발전했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은 엘빈의 혁신적인 연주를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비록 오디션에서 떨어졌지만, 2주 후 그는 베이시스트 찰스 밍거스가 지휘하는 다른 그룹에 합류했다. 당시 퍼커셔니스트(Percussionist)로 활동한 엘빈은 몇 달 동안 미국 전역에서 밍거스와 함께 투어를 했고, 이후 1년 이상 지속된 음악 쇼를 진행하기 위해 피아니스트 버드 파웰과 함께 했다.[4] 1956년에는 뉴욕시에서 연주를 했고, 1957년에는 트롬본 연주자 J.J. 존슨(J.J. Johnson)과 함께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며, 마일스 데이비스와 자주 협업했다.
이후 엘빈은 소니 롤린스, J.J. 존슨, 도날드 버드(Donald Byrd), 티리 글렌(Tyree Glenn), 해리 에디슨(Harry Edison), 폴 체임버스(Paul Chambers), 페퍼 아담스(Pepper Adams), 스탄 게츠같은 다양한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음반에 드러머로 참여했다. 1950년대에 엘빈의 가장 중요한 레코딩 중 하나는 소니 롤린스와 함께한 라이브 음반 'A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이다. 이 음반은 당시 신인이었던 엘빈의 뛰어난 드럼 스타일을 기록한 중요한 레코딩으로 남아 있다. 예를 들어, 우레와 같은 톰 롤, 폴리리듬의 사용, 극적인 색채 감각, 그리고 약간의 폭격과 같은 드럼 스타일을 들을 수 있다.
저에게 있어서 'A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은 훌륭한 음반이었습니다. 그 전에 제가 그런 종류의 표현을 가지고 연주할 수 있었던 유일한 때는 버드 파월과 작업했을 때입니다. 4분의 4나 8분의 1을 주고받을 때, 저는 구성에 관한 한 음악적 표현의 측면에서 항상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표현이 엄격한 패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것은 겹쳐서는 안 될까요? 모든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차이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상대방이 중단했던 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고, 그는 그 문구의 연속성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원하는 곳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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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니 롤린스와 함께한 녹음은 당시 일부 음악가들이 비판했던 엘빈의 스타일을 검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엘빈은 처음 경력을 시작했을 때, 그의 독특한 드럼 스타일 때문에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같이 연주하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엘빈은 긍정적이고 실용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느끼지만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젊은 사람에게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델로니어스 몽크와 마일스 데이비스 그리고 새로운 생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이번은 단순히 내가 그 경험을 할 차례였습니다. 그러나 나도 멍청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공연에서, 당신은 밴드 리더가 부르는 대로 그것을 연주하고 그것을 그대로 둡니다. 그 체계와 싸우려고 하지 마세요. 계속해서 당신의 연합 규모를 만들고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되도록 하세요. 그런 식으로 보세요.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인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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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존 콜트레인 쿼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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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빈 존스(왼쪽)와 존 콜트레인 |
엘빈 존스: 이 밴드는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인간관계에 완벽한 하모니 같은 게 있다면 이 밴드가 가장 가까웠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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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 특히
파로아 샌더스처럼 강력한 남자의 존재가 당신을 자극한다고 생각하나요?
존 콜트레인: 그래요, 밴드에 항상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해요. 옛날 밴드에서는, 엘빈 존스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알죠? 라시드 알리(Rashied Ali)[5]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전개되지 않았어요. (중략) 나는 그곳에서 엘빈의 천재성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는 매일 밤 꾸준히 연주하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고 원하는 모양을 갖추기까지 약 2년 반이 걸렸습니다. #
존 콜트레인: 그래요, 밴드에 항상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이 있어야 해요. 옛날 밴드에서는, 엘빈 존스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요. 알죠? 라시드 알리(Rashied Ali)[5]도 그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전개되지 않았어요. (중략) 나는 그곳에서 엘빈의 천재성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는 매일 밤 꾸준히 연주하기 시작해야 했습니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함께, 발전하기 시작하고 원하는 모양을 갖추기까지 약 2년 반이 걸렸습니다. #
1960년, 엘빈 존스는 드러머 빌리 히긴스(Billy Higgins)의 뒤를 이어 존 콜트레인 쿼텟(4중주단) 밴드에 합류해 음악계에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많은 레코딩과 투어에서 탁월한 연주를 보여줬기 때문에, 콜트레인이 신뢰하는 음악적 동반자가 됐다. 또한 엘빈은 존 콜트레인 쿼텟에서 리듬과 멜로디를 탐구했으며, 다양한 드럼 편곡과 연주 기법들을 시험했고, 자신만의 특유의 드럼 스타일을 확립했다. 그리고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McCoy Tyner)와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Jimmy Garrison)과 함께 전 세계를 누비며 강력하고 역동적이며 활기찬 공연을 할 수 있었다.
엘빈은 콜트레인과 함께 일하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연주 능력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밴드 리더로서의 존 콜트레인의 윤리와 아티스트로서의 그의 재능을 존경했다고 말했다. 엘빈은 더 나아가 밴드의 경험이 자신에게 다른 음악 세계의 취향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콜트레인과 마찬가지로, 엘빈은 왕성한 음악적 체력과 창의성에 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엄청나게 긴 솔로 연주를 폭발적으로 보여주는 타고난 재능이 결합되어 있었다. 존 콜트레인 쿼텟의 응집력과 창작력은 1960년 10월 스튜디오 세션에서 보여줬다. 당시 이들은 단 일주일동안 총 3개의 앨범을(' My Favorite Things', 'Coltrane Plays the Blues', 'Coltrane’s Sound')을 녹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특히 ' My Favorite Things'은 콜트레인의 대표적인 명반 중 하나로 꼽힌다.
콜트레인과 함께라면 여기 뉴욕에 일자리가 없다면
시카고나
세인트루이스,
멤피스 등 어디든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전국을 여행하고 스테이션 왜건에 쌓여 출발했습니다.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3,000마일을 가는 데 사흘 밤낮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직장에 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과 다른 점입니다. 하지만 그냥 무심코 지나치는 것보다 더 깊은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일할 시간이 되면 사람들을 가끔 보다가 일이 끝나면 모두 사라지는 오늘날과는 다릅니다. 이것이 콜트레인 그룹이 특별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특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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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밴드들과 달리, 콜트레인 쿼텟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어떠한 리허설도 하지 않았다. 콜트레인 쿼텟의 공연은 아무런 사전 연습 없이 자연스럽게 연주를 진행했는데도, 엄청난 명연주가 탄생했다. 그리고 엘빈과 콜트레인 모두 30분이 넘는 긴 세션 동안 자유롭게 자신들만의 솔로나 듀엣을 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졌다. 테리 그로스와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엘빈은 연주를 시작할 때까지 자신들이 무대에서 어떤 노래를 연주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콜트레인 쿼텟 멤버들 모두 콜트레인의 뒤에서 일제히 즉흥적으로 연주를 했다고 설명했다. #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엘빈 존스와 밴드의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는 자신들의 연주를 넓히고 심화시켰다. 콜트레인 밴드의 상호작용 수준이 나날이 발전함에 따라, 'My Favorite Things'의 레코딩은 스튜디오 녹음보다 라이브 공연이 훨씬 더 절제된 소리를 들려줬다.
당시 엘빈은 존 콜트레인과 함께 엄청나게 많은 음반을 녹음했다. 1960년부터 1965년까지 무려 30장이 넘는 콜트레인의 음반에 참여했으며 수많은 투어와 라이브에 참가했다.[6] 많은 명반들을 녹음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음반은 ' A Love Supreme'이다. 많은 평론가들은 이 앨범이 콜트레인의 최고작이자 드러머 엘빈 존스,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의 커리어에 결정적인 음반이라고 평하고 있다. 각 멤버들의 최고작일뿐만 아니라 대중음악 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또 다른 중요한 음반은 트럼펫 연주자 프레디 허버드(Freddie Hubbard), 색소포니스트 아치 셰프(Archie Shepp), 파로아 샌더스가 참여한 'Ascension'이다. 이 앨범은 단 하나의 40분짜리 곡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엘빈은 자신이 실현할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폭발적인 연주를 추진해 뛰어난 연주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1966년 1월 엘빈은 존 콜트레인 쿼텟을 떠났다. 콜트레인이 새로 영입한 드러머 라시드 알리의 음악 스타일과 성격은 엘빈과 완전히 상극이었다. 엘빈의 폴리리듬 스타일이 라시드 알리의 "다방향" 접근법과 충돌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심지어 알리는 건방지고, 예의가 없는 거친 성격의 사람이었으며, 사사건건 엘빈의 심기를 건드렸다. 알리는 후일 인터뷰에서 "'빌어먹을, 난 정말 드럼을 못치는 놈인가 봐, 왜냐하면 엘빈 존스는 현장에서 최고의 드러머니까'라고 당시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이것이 제 감정이었고, 저의 자아였고… 그리고 저는 거기에 있고, 매일 밤 엘빈 존스를 화나게 만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 그로부터 약 1년 반 후인 1967년에는 존 콜트레인이 사망했다.
존 콜트레인 쿼텟 활동 당시, 엘빈 존스는 1960년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재즈 드러머 중 한 명[7]이 됐다. 또한 그는 수많은 아티스트들의 음반에 사이드맨(Sideman)으로 참여해 많은 명연주를 남겼다. 60년대에는 블루 노트 레코드와 임펄스! 레코드를 중심으로 웨인 쇼터, 그랜트 그린, 조 헨더슨(Joe Henderson), 리 코니츠(Lee Konitz), 프레디 허버드, 래리 영(Larry Young), 케니 버렐(Kenny Burrell), 라산 롤랜드 커크(Rahsaan Roland Kirk), 앤드류 힐(Andrew Hill) 같은 저명한 아티스트들의 명반에 드러머로 참여해 탁월한 연주를 보여줬다. 당시 큰 명성을 얻은 엘빈은 자신이 밴드 리더가 되어 여러 스튜디오 앨범을 녹음했다.
3.4. 후기 경력
존 콜트레인 쿼텟을 떠난 후, 엘빈 존스는 듀크 엘링턴 오케스트라와 함께 유럽 투어를 하며 2주를 보냈다. 그리고 나서 파리에 있는 블루 노트 클럽에서 케니 클라크(Kenny Clarke)를 대신하여 연주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엘빈은 색소폰 연주자이자 플루트 연주자인 조 패럴(Joe Farrell)과 콜트레인 쿼텟의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과 함께 자신만의 트리오를 만들었다. 블루 노트에서 발매한 그룹의 데뷔 앨범 'Puttin' It Together'은 많은 사람들에게 엘빈의 가장 훌륭한 레코딩 중 하나로 간주되고 있으며, 엘빈 자신도 이 앨범을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앨범 중 하나로 꼽았다.그 후 몇 년 동안, 엘빈의 밴드에는 색소폰 연주자 데이비드 리브먼(Dave Liebman), 프랭크 포스터(Frank Foster), 스티브 그로스먼(Steve Grossman), 조지 콜먼(George Coleman), 트럼펫 연주자 한니발 피터슨(Hannibal Peterson), 루 솔로프(Lew Soloff), 피아니스트 칙 코리아, 얀 해머(Jan Hammer), 베이시스트 윌버 리틀(Wilbur Little), 진 펄라(Gene Perla)가 참여했다. 또한 당시 런던에서 크림의 드러머 진저 베이커와 함께 "드럼 배틀"에 참가했고 풍자적인 서부극 영화 자카리아(Zachariah)에 출연했다. 또 그는 아트 페퍼(Art Pepper), 토미 플래너건, 베니 월레스(Bennie Wallace) 같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녹음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엘빈은 아시아와 남미의 일부 지역을 포함하여 다시 유럽 투어를 시작했고, 클럽, 고등학교, 야외 콘서트, 진료소를 포함한 여러 장소에서 공연했다.
1980년대 초 엘빈은 자신의 밴드를 '더 재즈 머신(The Jazz Machine)'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엘빈의 쿼텟에는 색소폰 연주자 팻 라바베라(Pat La Barbera), 기타리스트 장 폴 비릴리(Jean Paul Bourelly,) 베이시스트 칩 잭슨(Chip Jackson) 같은 뛰어난 뮤지션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1990년에 엘빈은 일본 생활을 접고, 뉴욕을 다시 본거지로 삼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밴드 '재즈 머신'의 멤버에는 색소폰 연주자 팻 라바레라, 조슈아 레드맨(Joshua Redman), 소니 포춘(Sonny Fortune), 라비 콜트레인(Ravi Coltrane)[8], 피아니스트 케니 커크랜드(Kenny Kirkland), 베이시스트 레지 워크맨(Reggie Workman), 조지 마르즈(George Mraz), 앤디 맥클라우드(Andy McCloud), 트럼펫 연주자 월러스 로니(Wallace Roney), 니콜라스 페이턴(Nicholas Payton), 트롬본 연주자 델피아요 마살리스(Delfeayo Marsalis)가 참여했다.
말년이 돼서도 엘빈은 왕성한 활동을 했다. 엘빈의 협력자들은 초기 재즈 거장들인 얼 하인즈와 피 위 러셀(Pee Wee Russell)에서부터 웨인 쇼터와 같은 혁신가들, 그리고 후대의 거장이 된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까지 다양했다. 심지어 아카이벌 재즈 피아니스트 딕 하이먼(Dick Hyman)부터 스윙 시대의 베테랑인 클라크 테리(Clark Terry)와 일리노이 자케(Illinois Jacque), 탁월한 베이시스트 찰리 헤이든(Charlie Haden), 일본인 베이시스트 키쿠치 마사부미(菊地雅章)와 협연을 했다. 1993년에는 빌 클린턴과 힐러리 클린턴이 주재한 백악관 콘서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고령으로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불구하고 70대 중반까지 라이브 공연을 계속했고, 때로는 산소통을 들고 다니며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계속해서 많은 레코딩에 참여했으며 윈튼 마살리스, 마커스 로버츠(Marcus Roberts), 존 힉스(John Hicks), 데이비드 머레이(David Murray), 소니 샬록(Sonny Sharrock), 존 맥러플린(John McLaughlin), 조 로바노(Joe Lovano)의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했다. 그의 마지막 녹음 중 하나는 '더 그레잇 재즈 트리오(The Great Jazz Trio)'라는 이름으로 형 행크 존스와 함께 'Autumn Leaves'라는 앨범을 녹음한 것이다. 또 엘빈은 레코딩 녹음뿐만 아니라 업계의 젊은 인재들을 지도했으며, 자신의 기술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했다.
말년까지 평생 현역으로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다가, 2004년 5월 18일 뉴저지의 엥글우드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엘빈의 사망 소식은, 건강이 수개월 동안 악화된 후에 나온 것으로, 그의 심벌즈를 제작한 '아베디스 질지안 컴퍼니'의 예술인 홍보 담당 이사 '존 드크리스토퍼'가 발표했다.
4. 음악적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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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빈 존스가 드럼 천재였던 6가지 이유
엘빈 존스는 아프리카 드럼 연주의 폴리리듬 패턴을 자신의 공격적이고 다이내믹한 기술에 통합하여 현대 재즈 드럼의 표준을 세웠다. # 그의 프레이즈는 종종 다운비트와 바라인(barlines)의 표준화된 음악적인 제약을 피했다. 그루브는 거침없었고, 라이드 심벌즈 프레이징(Ride cymbal phrasing)은 전례가 없었다. 날카로운 멜로디 본능, 음악적인 색채와 질감을 만들고 모양을 만들어내는 능력, 개별적인 터치와 소리, 끝없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
탁월한 리듬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복잡한 리듬을 어렵지 않게 두드리는 드러밍 기술로 유명했다. 그의 다층적이고 리드미컬한 드럼 스타일을 결합하는 기술 덕분에 많은 비평가들은 그를 재즈 역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드러머 중 하나로 평하고 있다. 엘빈의 타이밍 감각, 음색, 레가토(Legato) 표현법 그리고 역동성은 재즈 음악에서 드럼 세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그의 프리-플로윙(free-flowing) 기술은 여러 상징적인 드럼 연주자들의 후기 커리어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점차 상승해 곧 절정에 다다라 폭발할 것만 같은 에너지를 한순간에 소진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유지하고 또 이어나갔다. # 뉴욕 타임스는 그의 스타일을 "파도처럼 밀려오는", "다각적인", " 화산같은"이라고 묘사했다. #
엘빈은 재즈 음악에서 드럼의 역할을 재정의했다. 오직 스탠다드 드럼 키트만을 사용하는 그의 혁신적인 기술은 오늘날의 재즈 드럼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즉흥적인 스타일은 아방가르드 재즈, 프리 재즈, 퓨전 재즈 운동에 기초를 놓는데 도움을 주었다. 드럼을 가로질러 광범위한 움직임을 사용하는 접근 방식은 그의 대표적인 드럼 스타일이었다. 종종 엘빈은 편곡 작업을 시작할때 간단한 패턴이나 테마를 도입함으로써 활동적인 상태로 즉흥적인 리듬을 만들었다. 베이스드럼에서 전통적인 4/4박자를 제거함으로써, 그는 "일정한 리듬의 흐름"을 만들었다. 또한 스네어드럼과 심벌즈로 일종의 불규칙한 리듬을 연주했다.
또한 통합적인 방식으로 4개의 팔다리를 가지고 즉흥적으로 연주했다. 엘빈의 연주의 대표적인 고정관념은 그의 연주가 대부분 4분 음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많은 16분 음표를 사용했다. 그의 연주의 "유기적인" 특성의 많은 부분은 레가토 기법과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뿐만 아니라 때때로 같은 박자 안에서 4분 음표와 16분 음표 리듬을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만들어졌다. 재즈 심벌 리듬을 연주하는 독특한 방법을 구사했는데, 이 방법은 현재 많은 드러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다른 드럼 연주자들이 2와 4를 악센트로 하거나 4분 음표를 악센트로 하는 반면, 엘빈은 전형적으로 '스킵 노트(skip note)'를 악센트로 했다. 그래서 그의 전반적인 연주는 구르는 듯한 느낌, 극적인 역동성, 모험적인 리듬, 그리고 공격적인 반주가 특징이다. #
엘빈은 항상 작곡의 멜로디와 음악적 구조를 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엘빈은 "드러머는 피아니스트, 베이시스트, 그리고 호른 연주자들만큼 공연될 작곡에 대해 많이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가사를 아는 것이 음악 작곡을 형성하는 데 매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엘빈은 "이런 종류의 음악적 정보를 알고 나면, 음악적 형태와 함께 어떤 실질을 가진 음악적 드럼 부분을 구성하고 조정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
콜트레인 쿼텟 활동 당시 엘빈은 드럼 세트의 모든 부분이 음악의 전진 속도에 기여하는 독창적인 접근법을 개발했다.
왼쪽 다리를 몸의 나머지 부분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드럼 세트의 다른 부분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습니다. 두 다리, 두 팔, 열 손가락이 있어도 몸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그 모든 부분이 합쳐져 한 사람이 됩니다. 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럼 셋을 하나의 악기로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결코 드럼셋에 올바르게 접근하지 못할 것입니다.
#
엘빈은 여러 겹의 리듬을 사용해서, 더 자유롭게 흐르는 현대적인 스타일의 재즈를 위한 길을 닦으면서, 바라인(barlines)에 의해 강요되는 상자 같은 구조로부터 음악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도왔다. 25년 동안 엘빈과 자주 연주했던 색소폰 연주자 팻 라 바르베라(Pat La Barbera)는 이렇게 말했다
엘빈은 음악에 휴식의 형태를 가져왔습니다. 제가
버디 리치와 연주했을 때, 모든 것은 정말 무거운 스윙 느낌을 가지고 있었고, 저는 때때로 그것을 즐겨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엘빈은 정말로 시간을 느슨하게 했고, 제가 그와 함께 연주했을 때, 그 음악은 매우 열린 느낌이었습니다.
#
평론지와 언론들은 엘빈의 드럼 스타일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연의 리드미컬한 힘을 지닌 드러머 엘빈 존스는 그 자신과 색소포니스트
존 콜트레인의 60년대 클래식 쿼텟의 주요 멤버로서 현대 재즈 전통에서 드러머의 역할을 높였다. 솔리스트의 뒤를 따르기보다는 종종 함께 연주하고, 대담하고 과격한 악센트를 만들고, 단순히 시간을 지키는 것보다 추진력 있고 다리듬적인 흐름을 선호하며
존 본햄과
진저 베이커와 같은 록 아티스트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 AllMusic #
― AllMusic #
엘빈 존스는
존 콜트레인 쿼텟과 함께 그의 반년 동안의 활동에서 드러머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의를 바꾼 소수의 연주자들 중 한 명이었다. 엄청난 섬세함을 가진 흠 잡을 데 없는 타임키퍼인 존스는 그의 요소적인 힘으로 콜트레인을 성층권으로 밀어 넣었고, 네 팔다리 모두에서 박자를 분산시키고 변위시킨 것으로 가장 잘 기억된다.
― 롤링 스톤 #
― 롤링 스톤 #
30년 이상 자신이 소유한 몇몇 주목할 만한 그룹의 리더였던 존스는, 최초의
비밥 이후의 위대한 타악기 연주자였다. 1940년대에 드럼키트를 순수하게 박자를 맞추는 기능으로부터 해방시켰던 재즈 모더니스트 케니 클라크(Kenny Clarke)와 맥스 로치(Max Roach)의 혁신을 바탕으로, 즉흥적인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리듬감 있는 박자를 일정하게 맞추면서, 후세대 드럼 연주자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 박자를 결코 잃지 않았다. 그는, 연주할 때, 심지어 그 박자를 여러 겹의 서로 맞물리는 폴리리듬들로 겹겹이 장식할 때에도, 언제나 느낄 수 있었다. 비평가이자 역사학자인 레너드 페더는 존스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의 주요 업적은 소리의 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즉 마디의 어떤 박자도 반드시 특정 억양에 의해 표시되지 않는 연속체의 창조였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전체 그룹에서 엄청나게 역동적이고 리드미컬하게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 뉴욕 타임스 #
― 뉴욕 타임스 #
엘빈 존스만큼 아프리카 재즈 드럼 연주의 특징을 환기시키고 기억에 남게 유지한 현대 음악가는 거의 없다. (중략) 존스는 키트의 한 부분에서 비트의 초점을 오랫동안 찾지 않거나 기존 재즈 드러머의 꾸준한 라이드 심벌즈 패턴이나 전통적인 록 연주자의 스네어 드럼 백 비트를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리드미컬한 느낌은 충격적일 정도로 강하지만, 항상 드럼 전체에서 끊임없이 분해하고 재조립했다. 마치 끊임없는 솔로처럼. 하지만 틀림없는 기본 리듬이 있다. 존스는 귀를 찢을 듯한 음량의 끊임없는 탄막이 아니라 채찍처럼 갈라지는 예측할 수 없는 억양과 강조로 불안한 힘으로 드럼을 쳤다. 종종 주제의 전환점이나 끝에서 연주되는 그의 감탄스러운 싹-심벌즈 사운드는 권투 선수의 라이트 크로스처럼 무시하는 타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고 존스의 일반적인 태도와 대조되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 더 가디언 #
― 더 가디언 #
그를 이 음악의 역사에서 빼버리면 갑자기 드러머가 리듬과 박자로 동시에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솔로이스트 뒤에 드럼을 두는 것보다 드럼이 함께 연주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한때 드러머들이 거의 배회하지 않았던 비트를 넘어 질감과 역동적인 상호작용으로 밀어붙이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엘빈 존스가 없었다면 주류 드러머들은 타임키퍼(timekeeper) 역할 이상으로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존스는 시간을 지키는 것이 주요 지시 사항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자신의 기교에 너무 현혹되어 스윙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플레이어들은 여전히 이 교훈을 놓치고 있다.
― 드럼 매거진 #
― 드럼 매거진 #
엘빈 존스의 스네어는 높게 튜닝되어 선명하고 공격적이며 메탈릭한 소리를 냈다. 탐과 베이스드럼은 앙상블로 튜닝되어 높게(특히 베이스 드럼) 활짝 열려 있었다. 그의 심벌즈는 일반적으로 크고(40년대와 50년대에는 20" 심벌즈가 큰 것으로 간주됨) 얇고 어두웠다. 이 소리들은 오늘날의 재즈 드럼 연주자들에게 스탠다드이며, 50년대에 드물지 않았지만, 60년대에 엘빈의 연주는 그것을 재즈 사운드로 고정시킨 것들 중 하나였다. 적어도, 40년대부터 60년대까지, 더 작은 심벌즈에서 더 큰, 더 어두운 심벌즈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었고, 엘빈의 인기는 확실히 그것의 주요한 요인이었다. #
5. 음반 목록
5.1. 밴드 리더 음반
<rowcolor=#fff> 발매 년도 | 음반 | 비고 |
1958 | Keepin' Up with the Joneses | |
1961 | Together! | |
1962 | Elvin!! | |
1964 | Illumination! | |
1965 | Dear John C. | |
And Then Again | ||
1966 | Midnight Walk | |
1968 | Heavy Sounds | |
Puttin' It Togetherd | ||
1969 | The Ultimate | |
1970 | Coalition | |
1971 | Genesis | |
1972 | Merry-Go-Round | |
1973 | Mr. Jones | |
Live at the Lighthouse | ||
Hollow Out | ||
1974 |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 |
Mr. Thunder | ||
1975 | Elvin Jones Live: The Town Hall | |
On the Mountain | ||
New Agenda | ||
1976 | The Prime Element | |
The Main Force | ||
Together | ||
1977 | Summit Meeting | |
Time Capsule | ||
1978 | Remembrance | |
Live in Japan 1978: Dear John C. | ||
Elvin Jones Jazz Machine Live in Japan Vol. 2 | ||
1980 | Very R.A.R.E. | |
Soul Train | ||
Heart to Heart | ||
1982 | Elvin Jones Music Machine | |
Earth Jones | ||
Love & Peace | ||
1984 | Brother John | |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Volume One | ||
1991 | Elvin Jones Jazz Machine Live at Pit Inn | |
1992 | In Europe | |
1992 | Youngblood | |
1993 | When I Was at Aso-Mountain | |
Going Home | ||
1994 | Tribute to John Coltrane " A Love Supreme" | |
It Don't Mean a Thing | ||
1998 | At This Point in Time | |
2004 | Momentum Space | |
The Truth: Heard Live at the Blue Note | ||
2018 | Live at Carnegie Hall | |
2022 | Revival: Live at Pookie's Pub |
5.2. 사이드맨 음반
<rowcolor=#fff> 발매 년도 | 아티스트 | 음반 | 비고 |
1955 | 마일스 데이비스 | Blue Moods | |
1956 | J. J. 존슨 | J Is for Jazz | |
태드 존슨 | The Magnificent Thad Jones Vol. 3 | ||
1957 | 태드 존스 | Mad Thad | |
케니 버렐 | Kenny Burrell | ||
태드 존스 앤 더 프레스티지 올스타즈 | Olio | ||
J. J. 존슨 | Dial J. J. 5 | ||
바비 제스퍼 | Tenor and Flute | ||
1958 | 아트 파머 | Farmer's Market | |
애런 벨 | After the Party's Over | ||
폴 체임버스 | Paul Chambers Quintet | ||
토미 플래너건 | Overseas | ||
소니 롤린스 |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 | ||
페퍼 아담스 | The Cool Sound of Pepper Adams | ||
이드리스 술리에만 앤 더 프레스티지 올스타즈 | Roots | ||
말 왈드론 | Mal/3: Sounds | ||
페퍼 아담스 앤 지미 네퍼 | The Pepper-Knepper Quintet | ||
페퍼 아담스 | 10 to 4 at the 5 Spot | ||
베니 그린 | Soul Stirrin' | ||
1959 | 스티브 레이시 | Reflections | |
태드 존스 | Keepin' Up with the Joneses | ||
행크 존스 | Porgy and Bess | ||
랜디 웨스톤 | Destry Rides Again | ||
커티스 풀러 | Sliding Easy | ||
아트 파머 | Brass Shout | ||
길 에반스 | Great Jazz Standards | ||
태드 존스 | Motor City Scene | ||
해리 루코프스키 | Stringsville | ||
1960 | 마일스 데이비스 | Sketches of Spain | [A] |
줄리안 프리스터 | Keep Swingin' | ||
1961 | 존 콜트레인 | Coltrane Jazz | |
존 콜트레인 | My Favorite Things | ||
Gil Evans | Out Of The Cool | ||
베리 헤리스 | Preminado | ||
존 콜트레인 | Olé Coltrane | ||
존 콜트레인 | Africa/Brass | ||
클리포드 조든 앤 소니 레드 | A Story Tale | ||
리 코니츠 | Motion | ||
1962 | 존 콜트레인 | Coltrane Plays the Blues | |
존 콜트레인 | Live! at the Village Vanguard | ||
유셰프 라티프 | Into Something | ||
프레디 허바드 | Ready for Freddie | ||
포니 포인덱스터 | Pony's Express | ||
존 콜트레인 | Coltrane | ||
맥코이 타이너 | Inception | ||
마일스 데이비스 | Quiet Nights | [A] | |
1963 | 존 콜트레인 | Ballads | |
존 콜트레인 앤 듀크 엘링턴 | Duke Ellington & John Coltrane | ||
존 콜트레인 | Impressions | ||
지미 우즈 | Conflict | ||
행크 존스 | Here's Love | ||
존 콜트레인 앤 조니 하트만 | John Coltrane and Johnny Hartman | ||
1964 | 존 콜트레인 | Coltrane's Sound | |
존 콜트레인 | Live at Birdland | ||
맥코이 타이너 | Today and Tomorrow | ||
길 에반스 | The Individualism of Gil Evans | ||
존 콜트레인 | Crescent | ||
앤드류 힐 | Judgment! | ||
웨인 쇼터 | Night Dreamer | ||
지미 포레스트 | All the Gin Is Gone | ||
1965 | 존 콜트레인 | A Love Supreme | |
밥 브룩마이어 | Bob Brookmeyer and Friends | ||
웨인 쇼터 | JuJu | ||
맥코이 타이너 | McCoy Tyner Plays Ellington | ||
그랜트 그린 | Talkin' About! | ||
조 헨더슨 | In 'n Out | ||
레리 영 | Into Somethin' | ||
로날드 커크 | Rip, Rig and Panic | ||
존 콜트레인 | The John Coltrane Quartet Plays | ||
Various Artists / 존 콜트레인 | The New Wave in Jazz | ||
1966 | 웨인 쇼터 | Speak No Evil | |
조 헨더슨 | Inner Urge Blue Note | ||
레리 영 | Unity | ||
그랜트 그린 | I Want to Hold Your Hand | ||
존 콜트레인 | New Thing at Newport | ||
존 콜트레인 | Meditations | ||
존 콜트레인 | Ascension | ||
얼 하인즈 | Here Comes Earl "Fatha" Hines | ||
1967 | 그랜트 그린 | Street of Dreams | |
존 콜트레인 | Kulu Sé Mama | ||
프레디 허바드 | Blue Spirits | ||
소니 롤린스 | East Broadway Run Down | ||
맥코이 타이너 | The Real McCoy | ||
자키 비어드 | Sunshine of My Soul | ||
1968 | 존 콜트레인 | Om | |
리 코니츠 | The Lee Konitz Duets | ||
레리 코리엘 | Lady Coryell | ||
오넷 콜먼 | New York Is Now! | ||
1969 | 페퍼 아담스 | Encounter! | |
바니 케셀 | Feeling Free | ||
파이니어스 뉴본 주니어 | Please Send Me Someone to Love | ||
존 콜트레인 | Selflessness: Featuring My Favorite Things | ||
1970 | 존 콜트레인 | Transition | |
길 에반스 | Gil Evans | ||
앨런 긴즈버그 | Songs of Innocence and Experience | ||
1971 | 존 콜트레인 | Live In Seattle | |
오넷 콜먼 | Love Call Blue Note | ||
지미 포레스트 | Black Forrest | ||
1972 | 조 퍼렐 | Outback | |
프랭크 포스터 | The Loud Minority | ||
1973 | 스탄 게츠 앤 빌 에반스 | Stan Getz & Bill Evans | |
맥코이 타이너 | Extensions | ||
빌리 하퍼 | Capra Black | ||
1974 | 엘렉 박식 | I Love You | |
존 콜트레인 | Live in Paris | ||
1975 | 존 콜트레인 | Sun Ship | |
파이니어스 뉴본 주니어 | Harlem Blues | ||
맥코이 타이너 | Trident | ||
1977 | 존 콜트레인 | First Meditations | |
스탄 게츠 앤 지미 롤즈 | The Peacocks | ||
아트 페퍼 | The Trip | ||
1978 | 치코 프리먼 | Beyond the Rain | |
레이 브라운 | Something for Lester | ||
존 콜트레인 | Brazilia | ||
1979 | 토미 플래너건 | Lonely Town | |
그랜트 그린 | Matador | ||
그랜트 그린 | Solid | ||
아트 페퍼 | Thursday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 | ||
아트 페퍼 | Saturday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 | ||
1980 | 토미 플래너건 | Tommy Flanagan | |
아트 페퍼 | Friday Night at the Village Vanguard | ||
토미 플래너건 | Super-Session | ||
1981 | 파로아 샌더스 | Rejoice | |
1982 | 토미 플래너건 | Confirmation | |
1983 | 베니 월레스 | Big Jim's Tango | |
1985 | 파이너스 뉴본 주니어 | Back Home | |
아트 페퍼 | More for Les at the Village Vanguard | ||
1987 | 류 솔로프 | But Beautiful | |
1988 | 제임스 윌리엄스 | Magical Trio 2 | |
존 콜트레인 | Live in Antibes | ||
1989 | 마커스 로버츠 | The Truth is Spoken Here | |
1990 | 케니 가렛 | African Exchange Student | |
1991 | 케빈 머레이 | Special Quartet | |
소니 샤록 | Ask the Ages | ||
1992 | 자본 잭슨 | Me And Mr. Jones | |
1993 | 행크 존스 | Upon Reflection: The Music Of Thad Jones | |
로버트 허스트 | One For Namesake | ||
1995 | 존 맥러플린 | After the Rain | |
1996 | 셜리 혼 | The Main Ingredient | |
1997 | 존 콜트레인 | The Complete 1961 Village Vanguard Recordings | |
1998 | 존 콜트레인 | Living Space | |
그렉 팩햄 | Into The Frying Pan | ||
조 로바노 | Trio Fascination: Edition One | ||
1999 | 마이클 브레커 | Time Is of the Essence | |
게리 르멜 | Moonlighting | ||
2000 | 제임스 윌리엄스 | Awesome! | |
스티브 그릭스 | Jones for Elvin - Volumes 1 and 2 | ||
스테파노 디 바티스타 | Stefano di Battista | ||
2001 | 빌 프리셀 | With Dave Holland and Elvin Jones | |
2002 | 행크 존스 | Autumn Leaves | |
2003 | 행크 존스 | Someday My Prince Will Come | |
2004 | 행크 존스 | Collaboration | |
2005 | 존 콜트레인 | Live at the Half Note: One Down, One Up | |
2007 | 프랭크 포스터 | Well Water | |
존 콜트레인 | My Favorite Things: Coltrane at Newport | ||
2009 | 존 콜트레인 | The Complete Copenhagen Concert | |
2015 | 존 콜트레인 | So Many Things: The European Tour 1961 | |
2018 | 존 콜트레인 | Both Directions at Once: The Lost Album | |
2019 | 존 콜트레인 | Blue World | |
2021 | 존 콜트레인 | A Love Supreme: Live in Seattle | |
2023 | 존 콜트레인 | Evenings at the Village Gate: John Coltrane with Eric Dolphy |
6. 여담
- 엘빈 존스와 그의 형인 행크 존스, 태드 존스는 모두 음악계에서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재즈 역사상 최고의 형제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셋 다 연주하는 악기가 다른게 특징이기도 하다.
- 이혼으로 끝난 첫 번째 결혼에서 두 아이를 낳았다. 이후 엘빈은 1966년 케이코(Keiko, ケイコ)라는 이름의 일본인 여성과 결혼했다. 케이코는 엘빈의 개인 매니저이기도 했다. 아내와 일본 나가사키현과 뉴욕시에서 살았으며, 1985년에서 1989년 사이에 부부는 대부분의 시간을 일본에서 레스토랑과 재즈 클럽을 운영하며 보냈다.
- 나이가 들면서 유순해졌지만, 전성기에는 상당한 다혈질이었다. 우유부단했던 존 콜트레인에게 화가 나서 그의 차를 부수기도 했다. 당시 콜트레인은 "나는 항상 새 차를 살 수 있지만, 엘빈은 한 명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 1990년대 중반 야마하의 후원을 받기 전까지 오랜 경력 동안 주로 Gretsch 드럼을 사용했다. 그의 드럼은 일반적으로 베이스드럼, 스네어 드럼, 하이햇, 2개의 미디움 탐, 2개의 로우 탐 및 심벌즈로 구성됐다.
-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했다. 드럼을 치다가 늘 땀을 흘렸고, 무대는 그의 연주에 때로는 흔들리기도 했다고 한다. #
- 1950년대에는 마약 의존증과 싸웠다. 스스로 인정한 바에 따르면 마약 의존증 때문에 자신의 드럼 연주의 질을 떨어트렸다고 한다. 경찰이 1959년에 그를 뉴욕의 한 호텔 로비에서 체포하고, 그의 주머니에서 헤로인을 발견했을 때, 엘빈은 6개월 동안 ' 라이커스 섬'으로 보내져서 치료를 받았다. 1963년 여름 엘빈 존스가 잠깐 존 콜트레인 쿼텟에서 빠지고 로이 헤인즈(Roy Haynes)가 그 빈자리를 매운적이 있다. 당시 독감에 걸렸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그는 켄터키주 렉싱턴에 있는 약물 재활 센터에서 재활을 하고 있었다. #
-
디지 길레스피가 엘빈 존스에게 자신의 밴드에 합류하라고 초대했지만, 거절하고 존 콜트레인의 밴드로 들어갔다.
#
엘빈 존스 "사실 콜트레인으로부터 밴드 초대를 받기 전날 디지 길레스피로부터 초대를 받았고 긍정적인 답변도 했기 때문에 나는 디지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한다고 콜트레인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로 뉴욕까지 와서 나와 함께 버드랜드에 출연했던 디지를 만나러 갔고 내가 콜트레인 밴드에 들어가는 허락을 받았다. 이런 일은 제대로 해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7. 관련 문서
8. 외부 링크
[1]
미국 국가 예술 훈장을 수여받은 거장 재즈 아티스트이다.
[2]
사상 최고의 재즈 트럼펫 독주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3]
큰 누나가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7~8살때부터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행크 존스도 그녀에게 피아노를 배워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4]
엘빈은 버드 파웰을 "가장 위대한 재즈 피아니스트"라고 평하기도 했다.
[5]
엘빈 존스의 뒤를 이어 존 콜트레인 쿼텟의 영입된 드러머.
[6]
워낙 많은 레코딩들을 녹음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음반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7]
60년대 당시 엘빈 존스는 재즈 매거진 다운비트에서 선정한 올해의 재즈 드러머 순위에서 거의 매년 상위권에 올랐다. 1965년, 1966년, 1968년, 1969년에는 1위를 차지했다.
#
[8]
존 콜트레인의 아들이다.
[A]
퍼커셔니스트로 참여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