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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6 22:44:15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파일:아사히 신문 로고.svg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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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 시바 료타로 미야자와 겐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츠오 바쇼 다자이 오사무 마쓰모토 세이초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모리 오가이 요시카와 에이지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류 이시카와 다쿠보쿠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노우에 야스시 미우라 아야코 아베 코보 다카무라 고타로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후지사와 슈헤이 시마자키 도손 나카하라 츄야 고바야시 잇사 세리자와 고지로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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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uby(芥川龍之介, ruby=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Ryūnosuke Akutagawa
파일:Akutagawa_Ryunosuke.아쿠.jpg
본명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川 龍之介)[1]
출생 1892년 3월 1일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쿄바시구
사망 1927년 7월 24일 (향년 35세)
일본 제국 도쿄부 기타도시마구
직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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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학력 <colbgcolor=#fff,#191919> 고토심상소학교 (졸업)
도쿄부립제3중학교 (졸업)
제1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 영문과 / 학사)
묘소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니치렌슈 지강지
부모 아버지 니하라 토시조
어머니 니하라 후쿠
양아버지 아쿠타가와 미치아키[2]
양어머니 아쿠타가와 토모
배우자 아쿠타가와 후미 (1919년 결혼)
자녀 장남 아쿠타가와 히로시
차남 아쿠타가와 타카시
삼남 아쿠타가와 야스시
장르 소설 번역
등단 라쇼몽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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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작품
3.1. 특징
4. 캐릭터화5. 창작물에서 언급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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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0807c1fa7560c68fcf7383c1a24f90아쿠58.jpg
人生の悲劇の第一幕は、親子となったことに始まっている。
인생 비극의 제1막은, 부모와 자식이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본인 소설가.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다이쇼 시대의 대표 작가.[3]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메이지 정신의 화신이라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다이쇼 정신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다.

작가로서의 활동 기간도 다이쇼 시대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10년이 조금 넘는 짧은 활동 기간 동안 많은 명작을 써내었다.

합리주의와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였고, 자살로 인해 문단에 큰 충격을 안긴 작가이다.

2. 생애

본래 성은 니하라(新原)이나, 12세에 외삼촌에게 입양되어 외가의 성인 아쿠타가와를 쓰게 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 누나의 요절로 인한 어머니의 발광 때문에 제대로 된 양육을 받을 수 없어서라고 한다. 양아버지인 외삼촌이 에도 시대 문예에 관심이 있어, 그에 영향을 받았다.

1913년,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다.

1914년, 고등학교 동창이던 구메 마사오(久米正雄), 기쿠치 간(菊池寬)[4] 등과 제3차 '신사조(新思潮)'를 발간하여 첫작품 〈노년〉(老年)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15년, '데이코쿠분가쿠(帝国文学)'에 대표작 〈 라쇼몽〉을 발표하고, 그해에 나쓰메 소세키의 '목요회'[5]에 참석하게 된다.

1916년, 제4차 신사조에 〈〉(鼻)를, 신소설에 〈참마죽〉(芋粥)을 발표하여, 나쓰메 소세키의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진출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기관학교에 들어가 영어교관으로 근무하면서 영어강의를 했다. 그러다 1년 뒤, 교직에서 물러났고[6], 오사카의 마이니치 신문[7]에 사우(社友)[8]로 들어가 본격적인 창작활동에 돌입하며, 해외 특파원도 겸 하는 등, 이 시기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서 가장 윤택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러나, 본래 늑막염, 위장병 등으로 병약했던 체질과, 어머니의 발광에 따른 신경쇠약의 악화[9]로 인해 요양생활을 하게 된다. 거기에 집안사정[10], 만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두 등 시대의 동향에 적응하지 못하여 회의와 초조, 불안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이 시점에 동료 문인이자 정신과 의사였던 사이토 모키치에게 진료를 받고, 조언을 듣기도 했다. 사이토 모키치는 아쿠타가와의 신경쇠약과 불면증을 걱정하며 수면제 바르비탈을 처방해줬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는 불행의 씨앗이 되었다.

모키치의 진료에도 결국 심한 신경쇠약에 빠져 몇몇 지인들에게 편지와 원고, 그리고 〈나의 장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僕の将来についたぼんやりとした不安)이라는 내용이 담긴 유서 <어느 옛 벗에게 남기는 수기(或舊友へ送る手記)>를 남기고 1927년 7월 24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수면제 바르비탈 과다 복용으로 음독 자살하였다.

같은 소세키 문하의 친구이자 선배인 우치다 햣켄(内田百閒)에 따르면, 아쿠타가와가 자살하기 며칠 전 찾아갔을 때 그는 그 시점에서 이미 대량의 수면제에 취해 몽롱한 상태로, 깨어 있는가 싶으면 어느샌가 다시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11]

또한, 아쿠타가와는 죽기 직전 즈음에 가까운 지인과 친구들을 방문했으나, 결국 모두 만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는데, 7월 초에는 기쿠치 칸을 만나려고 두 차례 문예춘추사를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했고[12], 자살하기 바로 전날에는 한동네에 살았던 시인 무로오 사이세이(室生犀星)를 찾아갔으나, 그때 사이세이는 잡지 취재로 우에노에 나가 있었던지라 역시 만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이세이는 당시 아쿠타가와를 만나지 못했던 일을 두고 "만약 내가 외출하지 않았다면 아쿠타가와 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살을 말리고 싶었다"라며 만년까지 두고두고 후회했다고 한다.

죽기 전, 친구였던 구메 마사오에게 〈어떤 바보의 일생〉(或阿呆の一生)이란 작품을 건네었다. 해당 작품을 읽어보면 냉소적인 자세와 삶에 대한 열망이 어지럽게 교차되어 묘사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톱니바퀴〉는, 그가 만년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어떠한 것에 시달렸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사후 수면제를 처방했던 모키치는 큰 충격에 빠져 그의 빈소를 방문한 이후 한동안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사이토 모키치 문서로.[13]

영화화된 '남경의 그리스도'의 남자 주인공(여기서는 양가휘가 연기했다.) 오카가와 유이치로의 캐릭터 설정이나 결말부분도 아쿠타가와를 모티브로 하였다.

3. 작품

제목 발간 연도
노년
老年
1914년
선인[다이쇼4년]
仙人
1915년
라쇼몽
羅生門

1916년
참마죽
芋粥
손수건
手巾
담배와 악마
煙草と悪魔
오가타 료사이 상신서
尾形了斎覚え書
1917년
희작삼매
戯作三昧
목이 떨어진 이야기
首が落ちた話
1918년
게사와 모리토
袈裘と盛遠
거미줄
蜘蛛の糸
지옥변
地獄変
악마
悪魔
교토 일기
京都日記
가레노쇼
枯野抄
기독교인의 죽음
奉教人の死
쟈슈몬
邪宗門
마술
魔術
1919년


蜜柑
의혹
疑惑

무도회
舞踏会
1920년
가을
남경의 그리스도[15]
南京の基督
두자춘
杜子春[16]
애독서의 인상
愛読書の印象
아그니 신
アグニの神
도요새
山鴫
1921년
추산도
秋山図
상해유기
上海游記
덤불 속[17]
藪の中
1922년
장군
将軍
선인[다이쇼11년]
仙人
궤도차
トロツコ
야스키치의 수첩에서
保吉の手帳から
1923년
한 덩어리의 흙
一塊の土
1924년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
大導寺信輔の半生
1925년
난쟁이 어릿광대의 말
侏儒の言葉
점귀부
点鬼簿
1926년
어느 사회주의자
或社会主義者
겐카쿠 산방
玄鶴山房
1927년
신기루
蜃気楼
갓파
河童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
文芸的な、余りに文芸的な
아사쿠사 공원 - 어느 시나리오 -
浅草公園 ――或シナリオ――
시루코
しるこ
톱니바퀴
歯車
어느 바보의 일생
或阿呆の一生
서방의 사람
西方の人
어느 옛 친구에게 보내는 수기
或旧友へ送る手記

3.1. 특징

널리 알려진 소설의 대부분이 단편소설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단편과 장편의 기준이 모호했으므로 무조건 단편만 썼다고 할 수는 없으며 장편소설도 일부 미완성의 형태로 남아있다.

사실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자면 단편보다도 더 짧은 엽편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흔히 사람들이 그의 대표작으로 뽑는 〈라쇼몽〉, 〈귤〉 모두 일반적인 단편소설 분량인 원고지 100매에도 한참 미치지 못하는 엽편소설들이다.

순수 창작도 했지만, 많은 유명한 작품들 대부분이 고전 설화 등에서 소재를 가져와 근대적으로 해석한 후, 각색한 소설이 많다. 대표적으로 〈 라쇼몽〉, 〈두자춘〉, 〈코〉, 〈 지옥변〉 등이 있다. 지금은 모두 아쿠타가와의 걸작이자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지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말년에는 '가짜 꽃'이니 '인조물'이니 하는 식으로 비판받았던 듯. 마침 그 시기가 하필 작가가 작가 개인의 실제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사소설(私小說)이 차츰 대두하던 시기이기도 했고.

그의 작품 대부분이 어둡고, 암울하며, 인간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작가가 인간 내면의 이기심이나 모순된 심리 등을 염세주의적 관점으로 묘사해내었기 때문. 많은 연구자들은 아쿠타가와가 이런 경향을 가지게 된 이유를 어머니 후쿠의 발광과 첫사랑이었던 '요시다 야요이'와의 일화가 계기라고 지적한다.

아쿠타가와의 생모인 후쿠는 그가 태어난 후 7개월이 되었을 때 발광했으며 그녀는 그가 11살일 때 사망했다. 어머니가 미쳐가며 죽은 모습은 아쿠타가와에게 큰 정신적 충격을 안겨주었고, 광기의 유전으로 인해 자신도 언제 어머니처럼 미쳐서 죽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평생동안 사로잡히게 만들었고 결국 그가 자살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요시다 야요이는 재색을 겸비한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한다. 아쿠타가와는 그녀를 절실하게 사랑했고, 곧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허락을 받으러 가게 되는데,[19] 아쿠타가와의 양부모(외삼촌과 외숙모)가 극심한 반대를 하며 그녀가 집에 방문하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양어머니이자 외숙모가 유별나게 반대했다고. 이 사건은 아쿠타가와에게 있어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그 누구보다 사랑했고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 특히 양어머니가 자신의 행복을 본인의 이기심에 누구보다도 강하게 반대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해 처절하게 체험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다름아닌 친가인 니하라 가와 아쿠타가와 가의 불화, 정확히는 아쿠타가와의 친부 때문이었는데, 친부가 자신의 처제(아쿠타가와에게는 이모)인 후유와 눈이 맞아 불륜관계를 맺은 게 원인이 되어 친가와 외가의 사이가 심하게 틀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요시다 야요이의 집안이 하필이면 니하라 가와 친한 사이였던 탓에, 양부모가 요시다 가 자체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게 되면서 두 사람의 사이를 극력 반대했다고 전한다.

그는 합리주의 예술지상주의를 주장했다. "비상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선,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까지도 감수해야 한다.", "예술에 봉사하는 이상, 우리들이 작품에 부여해야 하는 건, 무엇보다 예술적 감격이어야 한다. 만약 인도적 감격만 추구한다면, 단순히 설교를 듣는 걸로도 얻을 수 있다."라고 본인의 저서에서 밝혔듯, 아쿠타가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다.[20] 그리고, "예술은 무조건 의식의 안에서 이루어진다."라는 말로 합리주의를 표방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만년에 들어서는 자신의 감정이나 경험, 심경 등을 소설로서 써내는 장르인 '사소설'의 경향이 짙은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어느 바보의 일생〉, 〈다이도지 신스케의 반생〉, 〈톱니바퀴〉 등이 있다. 지독한 신경쇠약이 자살의 이유라고 하며, 만년의 작품들에서 아쿠타가와가 자살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4. 캐릭터화

5. 창작물에서 언급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

6. 기타

동시대 한국 작가 중에 김동인이 이 사람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다. 특히 아쿠타가와의 대표작 지옥변과 김동인의 광염소나타, 광화사를 비교하는 연구가 상당히 활발하다. 작가로서의 김동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 아쿠타가와의 영향력을 들어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시절 만나 짧지만 깊은 영향을 주었던 문단선배 나쓰메 소세키와 똑같이 위장병을 앓았다. 술을 멀리하고 단 음식을 좋아한 식성도 같다.[22] 다만, 소세키는 위가 안좋은데도 음식, 특히 군것질 거리 절제가 안 돼서 병이 악화된 면이 없잖아 있다면 류노스케는 가난에 시달리며 제대로 챙겨먹질 못해 병이 도졌다.

단 음식 중에서도 쿠즈모치를 특히 좋아했으며, 도쿄 가메이도에 있는 후나바시야(船橋屋)[23]라는 가게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학생 시절부터 가게 가장 안쪽의 '지정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쿠즈모치를 먹었는데, 심지어는 중학 시절 학교 체육 수업을 째고(!) 나와서까지 후나바시야에 들러 쿠즈모치를 사 먹었을 정도로 좋아했다고.[24]

한편 아쿠타가와 자신이 쓴 <나츠메 선생님(夏目先生)>이라는 글에서 소세키와의 에피소드가 하나 언급되는데, 한 번은 동네에 불이 나서 소세키와 함께 불구경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경찰에게 직무질문을 받았다. 이 때 어디서 왔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집이 저쪽이니까 저쪽에서 왔다고 할 수도 있고요, 그런데 불은 이 쪽에서 났으니 이쪽에서 왔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라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이 말을 들은 경찰은 더 상대하다가는 귀찮아지겠다 싶었는지 그만 가보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니 경찰서까지 가시죠! 마침 흥미도 있겠다"라고 대답해서 경찰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했다고(...).

"장례식에서 우는 사람은 위선자다"라는 말을 했는데, 정작 나쓰메 소세키의 장례식에서 오열했더라... 하는 카더라가 있다. 정확한 진위여부는 판별하기 어렵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것도 결과적으로는 셀프디스(...)가 된 셈.

일본 문학사를 논할 때에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유명한 작가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인지도가 높지 않다.[25] 비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뿐만 아니라 그가 활발히 창작했던 다이쇼 시대[26]는 한국 기준으로 일제강점기였던 탓에 이 시기의 일본 작가들은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편이다. 사실상 일본 문학 전공자가 아니면 거의 모른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며, 그나마 유명하다고 할 만한 작가는 천 엔 지폐의 모델이기도 했던 나쓰메 소세키 인간실격으로 어느 정도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 정도. 오히려 90년대 일본문화 개방 이후 일본 서브컬처(만화, 라이트노벨 소설 등)에 만날 " 아쿠타가와상"이 언급되어 그 이름은 들어봤는데 무슨 소설을 썼는지는 모른다는 쪽이 더 많을 지경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국내 문인들을 통해 이름이 종종 오르내리던 적은 있었다. 대표적으로 김사량의 일본어 소설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으며, 오랫동안 잡지 사상계의 주필을 맡았던 김준엽 고려대 총장은 사상계의 주최로 동인문학상을 만들 때 아쿠타가와상을 언급하면서 우리도 이런 문학을 장려하는 시상식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27] 하지만 일본에서는 그의 작품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할 정도이고, 수많은 문호들과 예술가들의 작품에 그의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작품이 퍼져나간 나라에서는 천재, 수재 등으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현재까지도 활발히 연구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이와 별개로 아쿠타가와는 생전 조선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다. 제목은 <김장군>으로 김경서 장군 설화를 인용한 작품이다. 다만 나카지마 아츠시의 <호랑이 사냥>과는 달리 일제강점기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은 아니며,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나도는 전승을 이용하여 역사 인식은 국가와 민족별로 상대적일 수 있음을 강조하는 글이다. 따라서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이며 자국 중심적인 사관을 일정 부분 비판하는 뉘앙스도 들어있다. 링크

2000년, 아사히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5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으며 2위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6위 마쓰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 #

2016년에 《문예적인, 너무나 문예적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예술에 대한 에세이집이 번역 출간되었다. 아쿠타가와 본인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담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사람은 일독을 권한다. 아쿠타가와에 대한 번역 서적이 얼마 없는 걸 감안하면 정말 보물 같은 책이다.

다자이 오사무,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와는 같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면서 자살을 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다만 자살방법은 각자 달랐다. 다자이는 투신자살, 가와바타는 가스, 미시마는 할복, 그리고 아쿠타가와는 전술하였듯이 음독.

다자이 오사무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이기도 하다. 다자이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구름 위의 존재다. 나는 그를 모방조차 하지 못했다.”라고 말했을정도로 아쿠타가와를 존경하였다. 실제로 다자이는 아쿠타가와를 보면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고, 아쿠타가와상을 받기 위해 계속 노력했으나 결국 받지 못하였다. 여담으로 다자이 오사무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아쿠타가와상의 첫회 심사위원이자 다자이가 떨어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의 추리소설의 제왕으로 꼽히는 마쓰모토 세이초 역시 어려서 여러 소설을 탐독하는 와중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제일 좋아했었다고 밝히고 있다.[28]

또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일본 문학에서 흔들리지 않는 정점“ 이라고 표현했다.

위에도 살짝 나와있지만, 그를 기리기 위해 고등학교 동문이었던 기쿠치 간[29]에 의해 1935년에 아쿠타가와상이 제정되었으며, 지금도 나오키상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두 개의 문학상 중 하나로 손꼽힌다. 주로 신인 작가의 등용문으로 인식되고 있다.

죽기 전 도플갱어를 보고 사망했다는 설이 있는데 말 그대로 문학계 혹은 일본에 구전되는 설 중 하나일 뿐 별로 신빙성은 없다.[30]

죽기 얼마 전에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꽃병을 깬 일이 있는데, 이 일에 대해 평소 아쿠타가와가 남들에게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을 걱정하던 기쿠치 칸은 평소에 꽃병을 좀 더 깼었더라면('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면'이라는 의미)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목욕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목욕을 거의 하지 않았고, 어쩌다 하더라도 목욕탕에 수건을 가져가지 않았다. 제1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이었던 법철학자 쓰네토 교가 자신의 수기 '오랜 친구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나마 극히 드물게 목욕을 하러 가는 와중에도 하도 목욕을 안 하다보니 수건 들고 가는 걸 까먹어서 안 가져갔던 것이라고. 또한 같은 수기에서 언급된 고교 시절의 일화 중에는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잉크병인 줄 알고 탁자에 놓여 있던 간장병을 집어들고 나왔다가 뒤늦게 깨달았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여성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호감을 가진 상대에게는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꼭 열렬한 연애편지를 보냈는데, 이 연애편지가 하나같이 오글거리는(...) 문장으로 도배된 것들이었다고. 특히 후에 아내가 되는 쓰카모토 후미[31]와 어느 정도 관계가 진전된 후 보낸 연애편지 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32]
후미쨩이 만약 과자였다면 머리부터 먹어 버리고 싶을 만큼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짓말이 아니예요.
위대한 예술가의 조건은 싸이코패스인가

속독이 특기였다고 한다. 일본어로 된 서적이나 잡지는 2~3명과 대화를 하면서 동시에 읽을 수 있었다고 하며, 어느 동인 잡지에 실린 7페이지 분량의 글을 책장을 휙휙 넘기는 것만으로 전부 읽었다는 엽기적인 일화도 있다. 또한 영문 속독도 가능해서 한 번은 오사카에 갈 일이 있었을 때 두툼한 영문 원서 4~5권 정도를 챙겨갔는데, 두께가 상당한 책들이었는데도 이걸 기차 안에서 전부 다 읽어버린 뒤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 책을 빌려 읽었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그와 교류가 있었던 의사이자 시인인 시모지마 이사오가 영문을 얼마나 빨리 읽을 수 있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이에 아쿠타가와 曰, 일반적인 영문학 책이라면 하루에 1200~1300 페이지 정도는 쉽다(!!)고.[33] 다만 친한 사이가 아닌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책을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사거나 상대방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문예가가 되고자 하는 제군에게 보냄(文芸家たらんとする諸君に与ふ)>이라는 소품에서 문예를 지망하는 중학생들에게 수학과 체조를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 훌륭한 문예가가 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해당 소품 중 "이는 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말이며, 또한 중학 시절을 유익하게 보내지 못했음을 한탄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에 대해 수학자 가타노 젠이치로는 아쿠타가와가 중학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수학은 그다지 잘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34]

공식적 및 비공식적으로 관동 대지진 자경단으로 참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쿠타가와 본인은 첫날 재일조선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자경단의 잔인한 민낯을 마주하고 질색해 바로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집에 들어가 칩거 생활을 했고 평생 자신이 자경단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후회하며 지냈다고 한다. 참고로 아쿠타가와 본인이 배속되어 있던 팀은 직접 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도 이후 관동대지진과 관련하여 본인이 남긴 기록 등을 살펴보면 학살을 목격한 것을 암시하는 부분은 있으나 실질적으로 그가 참여했다는 내용은 없으며, 그의 일기에서도 이런 학살에 참여하는 자들에 대한 야유를 담고 있는 기록들이 있다.

아들 중 3남인 아쿠타가와 야스시(芥川也寸志, 1925-1989)는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유명하며,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황국 사관을 부정하고 좌파 음악 운동에 관여하는 등 사회파 성향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소련에 불법으로 입국해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아람 하차투리안 등과 친구로 지내며 작곡활동을 했다. 또한 장남 아쿠타가와 히로시(芥川比呂志)는 배우로 활동했고, 2남 아쿠타가와 다카시(芥川多加志)는 아버지를 닮아 문학을 지망했으나, 도쿄외국어학교 불문학부 재학 중 징집되어 1945년 미얀마에서 전사했다. 세 아들의 이름의 한자 표기가 보통 인명 표기에는 잘 사용되지 않는 만요가나인데, 모두 친구들의 이름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장남은 기쿠치 간의 본명인 히로시(寛)에서, 2남 다카시는 서양화가 오아나 류이치(小穴隆一)의 이름자 중 '隆(다카시)'를, 3남 야스시는 쓰네토 교(恒藤恭)의 '恭(야스시)'에서 따 왔다.그리고 기쿠치 간은 본인 이름을 따서 지으면서 만요가나로 짓는 것에 대해 굉장히 짜증을 냈다고 한다.

세 아들 중에서 장남인 아쿠타가와 히로시가 자신을 제일 많이 닮았던 탓에 장남을 굉장히 아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아버지를 꼭 닮았다. 목소리도 꼭 닮았다고 하는데, 장남의 목소리를 두고 아내 후미는 아들과 남편의 목소리가 매우 닮았지만 남편의 음성은 아들의 것보다 조금 더 둥글둥글한 느낌을 주는 목소리였다고 회고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본인의 음성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들인 히로시의 목소리는 육성테이프가 제법 남아 있으므로 이것으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목소리를 추정하는 사람도 있는 편.

1916년(다이쇼 5)부터 1919년(다이쇼 8)까지 햇수로는 4년간 요코스카에 있던 해군기관학교에서 영어강사로 근무하던 중인 1917년 8월 순양전함 콩고에 승선한 뒤 '군함 공고 항해기'라는 제목으로 체험기를 쓴 적이 있다.

이름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한자를 직역하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의미와 일치하며 실제로 이름인 류노스케(龍之介)는 용띠 해, 용의 달, 용의 날에 태어났다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 생애 문단에서 서술하는 바와 같이, 부친 니하라 토시조(新原敏三)와 모친 니하라 후쿠 사이에 태어나 원래는 니하라 류노스케였으나, 모친이 사망한 다음해인 1913년, 모친의 오빠 아쿠타가와 미치아키(芥川道章)의 양자가 되어 아쿠타가와 성씨를 칭하게 되었다. [2] 류노스케의 외삼촌이며 친 어머니의 오빠이다. [3] 쇼와 2년에 사망했지만 그의 대부분의 활동 기간이 다이쇼 시대이기 때문이다. 만일 오래 살았다면 "다이쇼~쇼와 시대의 문인"으로 불렸을 것이다. [4] 본명 기쿠치 히로시. 이 사람은 나중에 아쿠타가와상을 제정한다. [5] 매주 목요일에 소세키의 자택에서 열린 모임. 당대의 소설가나 학자가 참가하였으며 다양한 주제에 대한 회합을 가졌다고 한다. [6] 이전 버전에서는 반전(反戰) 소설인 무기여 잘 있거라를 소개하여 짤렸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해당 소설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929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다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모모타로를 재해석한 작품을 통해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드러내기도 했기에 평소 반전(反戰) 사상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높다. [7] 후에 마이니치 신문 오사카 지부가 된다. 도쿄에 있던 니치니치 신문(日日新聞)이 마이니치 신문 도쿄 지부가 된다. [8] 정식 사원은 아니지만 사원으로서의 특정한 대우를 받는 직책. 명예사원과는 조금 다르다. 友라고 번역한 것에서 보듯 영미권의 fellow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한국어로 하면 객원기자 같은 지위. [9] 자신도 언젠가 발광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에 평생 시달렸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불안감을 흡연으로 풀었는데 가장 심할 때는 흡연량이 무려 하루 9갑 반이 될 정도였다고 한다. [10] 매형이 방화, 보험금 사기에 연루되어 빚을 안고 도망다니다 철도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로 인해 매형의 빚은 고스란히 아쿠타가와 부부가 떠맡게 되었다고. 이는 만년의 소설〈톱니바퀴〉에서도 서술되어 있다. [11] 자살을 결심하고 서서히 수면제에 내성을 길렀던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12] 이때 문예춘추사 직원이 기쿠치에게 아쿠타가와가 왔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바람에, 결국 기쿠치는 아쿠타가와가 살아 있는 동안 찾아가 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13] 웹 게임 문호와 알케미스트에서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 사이토 모키치의 대사 중 환자를 떠나보내는 것이 힘들다는 뉘앙스의 대사가 있는데, 실제의 모키치가 아쿠타가와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고 칩거했던 일을 반영한 대사로 추정된다. [다이쇼4년] [15] 1995년 홍콩과 일본의 합작으로 영화화 되어 양가휘와 토미다 야스코가 주연을 맡았다. [16] 1981년 TV 애니메이션화된 경력이 있는데, 한국에선 1984년 MBC에서 '천국에서 찾은 엄마'로 방영하였다. [17] 위의 <라쇼몽>과 함께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 라쇼몽>의 원작이 된다. [다이쇼11년] [19] 사실 오랫동안 두 사람 사이는 큰 진전이 없었다가 야요이에게 혼담이 들어오자 마음이 급해진 아쿠타가와가 곧바로 야요이와의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20] 그의 대표작인 〈 지옥변〉으로 확인할 수 있다. [21] 작중에서는 '국어선생님이 (도덕교육을 위해 선별되느라 인간적으로는) 좋은 글을 예찬하다 끝난다'고 표현한다. [22] 류노스케가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글 중에 자살 한 달 전에 쓴 팥죽(일본식 단팥죽인 시루코)이라는 수필도 있다. 도쿄의 팥죽맛을 칭찬하며 서양인들도 팥죽 맛에 감탄해 카페에서 커피를 홀짝이듯 팥죽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상상을 하며 즐거워하는 내용이다. [23] 1805년에 창업한 곳으로 쿠즈모치의 원조로 유명하다. 지금도 가메이도 덴진 신사 옆에 본점이 있으며, 도쿄와 사이타마현, 치바현에 지점이 몇 곳 있다. 아쿠타가와가 자주 들렀던 곳은 카메이도 본점. 또한 나가이 카후, 요시카와 에이지 등 다른 유명 작가들도 이 가게를 자주 찾았다고 한다. [24] 이때, 쿠즈모치를 급하게 먹고 학교로 다시 달려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입 가에 묻은 콩가루 때문에(...) 교사에게 들켜서 호되게 혼이 났다고 한다. [25] 그의 작품을 번역한 전집이 2010년에 제이앤씨에서 나왔기는 한데(전8권), 권당 19,800원부터 33,250원까지 나간다. 번역을 여러 사람이 작품별로 나누어 맡은 탓에 그 질이나 수준이 상당히 들쑥날쑥하다. 표기법도 통일되어 있지 않아서 일본식 고유 명사가 한국식으로 현지화 되어 있는가 하면 일본식으로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26] 1912.07.30 ~ 1926.12.25 [27] 재미있게도 일본문화 전면개방 이전에 일본 만화가 해적판이든 정발판이든 한국화 로컬라이징을 반드시 거쳐야 하던 시절, 아쿠타가와상은 "동인문학상"으로 로컬라이징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에가와 타츠야 골든 보이 해적판. [28] 세이초는 「어느 고쿠라 일기 전(傳)」으로 제28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는데, 소설 속에서 주요 주제가 되는 것은 모리 오가이의 일기. 실제로 세이초가 유년기를 보낸 곳인 고쿠라도 모리 오가이와 인연이 있는 곳이며, 세이초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모리 오가이를 자주 등장시켰다. 어느 고쿠라 일기 뿐 아니라 세이초 본인이 마지막으로 완성한 유작 「양상(兩像)」도 모리 오가이가 등장한다. 아쿠타가와 본인도 모리의 소설을 높게 평가했었다. [29] 당시 문예춘추사 사주 [30] 그의 자전적 소설 톱니바퀴에서 자신의 도플갱어를 봤다는 사람들을 언급한다. 문호와 알케미스트 애니판 심판의 톱니바퀴 후반부에서 류노스케의 도플갱어 비슷한 존재가 최종보스로 등장하는데, 이를 반영한 설정으로 보인다. [31] 아쿠타가와의 중학 시절 친구의 누나의 딸, 즉 친구의 조카였다. 그러나 친구가 누나랑 나이차가 많이 나는 늦둥이였던 모양인지 아쿠타가와와 후미의 나이차는 조카뻘치고는 얼마 안 되는 7살밖에 안 났다. [32] 아쿠타가와가 <라쇼몽>을 발표한 바로 다음 해에 보낸 것으로, 당시 아쿠타가와는 24세, 후미는 17세였다. [33] 참고로 이걸 하루 1200페이지에 10시간이라 가정하고 환산하면 1분당 2페이지를 읽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34] 아쿠타가와 본인은 중학 시절을 유익하게 보내지 못했다고 했지만 졸업할 때 다년간 성적 우수자 상장을 받았을 정도로 수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