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 사이토 모키치 [ruby(斎, ruby=さい)][ruby(藤, ruby=とう)][ruby(茂, ruby=も)][ruby(吉, ruby=きち)]|Mokichi Saito |
|||
|
|||
본명 | 사이토 모키치 (斎藤茂吉) | ||
출생 | 1882년 5월 14일 | ||
일본 제국
야마가타현
미나미무라야마군 (現 일본 야마가타현 카미노야마시) |
|||
사망 | 1953년 2월 25일 (향년 70세) | ||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 |||
직업 | 시인, 의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00><colcolor=#FFF> 학력 |
<colbgcolor=#fff,#191919>우에야마심상고등소학교 (고등과 / 졸업) 카이세이 중학교 (졸업) 제1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의학과 / 학사) 뮌헨 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 박사) |
|
활동 기간 | 1908년 – 1953년 | ||
묘소 | 아오야마 영원 | ||
부모 |
아버지 모리야 덴에몬구마지로 어머니 모리야 |
||
배우자 | 사이토 테루코 (1905년 결혼) | ||
자녀 |
장남 사이토 시게타 차남 키타 모리오 |
||
장르 | 시, 수필 | ||
데뷔작 | 아라라기 (1908) | }}}}}}}}} |
[clearfix]
1. 개요
일본의 시인이자 정신과 의사. 야마가타 현 미나미무라야마 군에서 태어났다.2. 생애
중학생 때부터 사사키 노부스나(佐佐木信綱)와 마사오카 시키에 감명 받아 단카를 지으며 시인을 지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실제로 1908년 이토 사치오(伊藤左千夫)의 문하생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1910년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 의학박사를 얻으며, 스가모병원, 나가사키병원 등에서 정신과 의사로도 활동한다.
의사로 활동하던 중 1913년 데뷔작 '적광(赤光)'을 냈는데, 데뷔작부터 큰 반향을 일으키며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 마사오사 시키 계열의 잡지인 아라라기의 젊은 주역으로 유명해지며 소위 '아라라기 파'라고 불리는 계열 문학 사조의 마지막 주자로 불린다.
시만 쓴 것은 아니고, 염주집(念珠集)과 같은 수필도 상당수 남겼다. 특히, 그의 수필들 역시 시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고평가를 받는다.
시인적으로도 인정 받았지만, 본업인 정신과 의사로서도 실력을 지녔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그는 자신이 정신과 의사인 것에 자신의 정체성을 더 두었는데, "단카는 본업의 소일거리"라 말하며 의사를 본업으로 보았던 듯하다. 상당한 워커홀릭에 환자들에 다정한 인물이었고, 수완도 좋았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의사적인 수완의 대표적 일화로 독일 뮌헨에 유학가며 정신의학서를 구입해 논문을 저술하려 했으나, 책을 보관하던 아오야마 뇌병원 화재로 전부 잃었던 일도 있었다. 화재 보험도 들지 않아 아오야마 뇌병원은 그야말로 파산 수준이었으나 성공적으로 재기시켜 화재 이전보다 병원의 규모가 더 커지는 등 실력 있는 의사이자 경영인이었다.
시인이자 정신과 의사였기 때문에 동료 문인들도 그에게 검진을 받았는데, 대표적인 인물들이 한국에서는 라쇼몽으로 알려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나가이 가후다. 특히, 아쿠타가와의 신경쇠약, 불면증, 우울증 등에 대해서 요양에 대해서 조언해주고 진찰하며 바르비탈 수면제를 처방하며 그를 걱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쿠타가와가 바르비탈 수면제로 음독 자살하자 큰 충격에 빠져 한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일기에서는 경악이라고 쓰며 빈소에 다녀온 이후 아쿠타가와의 얼굴을 볼 방법, 염치가 없다고 쓰기도 했다.
2.1. 성격
젊은 나이에 주목 받은 시인이자 수완 좋고 평판이 좋은 천재 의사로 불리는 인물이지만, 성격은 나쁘게 말해서 쫌생이에 이기적, 자기중심적이었다. 좋게 말해 줘도 최소한 성격이 좋지 않았던 듯 하다.환자들에게는 다정하고 온화한 의사로 알려져 있었고, 문단에서도 그에 대한 나쁜 평은 없었지만, 본업과 부업을 같이 일하며 불타버린 병원 등을 살려야 했던 상황에서 환자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야 하는 상황에 스트레스를 느꼈는지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매우 짜증과 분노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족들에게는 호통을 자주 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아내와도 성격이나 가치관, 양육 관련 문제로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 후배인 오타 미즈호(太田水穂)가 모키치의 작품을 비판하자 미즈호에게 "나에게 맞서 싸우려는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런 저급 노둔자(어리석고 우둔한 사람)류가 나의 논적이 될 순 없다"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상당한 쫌생이 기질도 있었는데, 유학 시절 근대 정신의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독일의 의사 에밀 크레펠린(Emil Kraepelin, 1856~1926)이 잘 모르는 젊은 의사였던 자신의 악수를 거절한 것은 "양놈자식!(毛唐め!)"이라며 말년까지도(...) 비판했고[1], 환자가 자신의 뺨을 때린 걸 기억해 어떻게 보복해 줄지 계속해서 망상했다며 수필 순간(瞬間)에 기록하기도 했다.
더불어 상당한 대식가에 먹보 였는데, 장어 문서에서도 나오듯 장어를 정말 좋아해 2차 대전 당시 일본 전체가 극심한 물자 부족을 겪고 있는 와중에도 사전에 대량으로 사서 쟁여둔 장어 통조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먹었을 정도였고, 장남의 맞선 자리에서도 긴장한 탓에 요리에 손을 못 대고 있던 상대 여성 앞에 놓인 장어를 보고 안 먹을 거면 달라고 하더니 순식간에 그 장어를 먹어치워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장어 외에도 단 것을 무척 좋아해 감기 걸렸을 때 손님이 찾아왔다가 그가 병중이라 호통치자 손님은 놀라 돌아갔지만, 이후 그가 남긴 카스테라를 먹으며 "내가 너무 심했다"고 반성했다고 한다.
그러는 와중에 편식도 있어서 미소국의 건더기에 대한 투정도 심했다. 아내가 대파는 넣어도 되지 않느냐며 반문하자 심사숙고에 들어갈 정도로 편식이 심했다. 이러한 일화는 다 본인의 수필 안에 들어가 있다.
3. 대중매체에서
3.1. 문호와 알케미스트
자세한 내용은 사이토 모키치(문호와 알케미스트)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여담
- 정치성향은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수필에도 딱히 이러한 철학이 드러나진 않는다. 행적을 보면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거나 숨겼다기 보단 그냥 정치에 관심이 없었을 듯하다. 실제로 아주 적게 있는 정치적인 말들을 보면 태평양 전쟁 때 전쟁을 지지하고 맥아더를 비난[2]하는 것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