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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19:11:38

아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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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등장하는 전설 속의 왕이나 왕으로 서술된 실존인물
귀네드 국왕·웨일스인 웨일스 공 · 영국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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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프루아 드 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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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ad36><colcolor=#fff> 브리튼 제103대 브리튼인의 왕[1]
아서왕
King Arthur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Arth_tapestry2.jpg
왕호 아서왕
King Arthur ( 영어)
Y Brenin Arthur ( 웨일스어)[2]
Rex Arthur ( 라틴어)[3]
아서 펜드래곤
Arthur Pendragon[4]
출생 출생일 미상
콘월 틴타겔[5]
사망 미상, 미래에 부활할 왕
재위 5세기 말? ~ 537년경[6]
종교 그리스도교
아버지 우서 펜드래곤
어머니 이그레인
아내 기네비어

1. 개요2. 설명3. 무구4. 역사와 재구
4.1. 아서왕의 역사적 시대 배경4.2. 역사 속 아서왕의 후보4.3.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
5. 대중문화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대 브리튼 지역에서 웨일스인 콘월인의 선조인 브리튼인들을 이끌었으며, 잉글랜드인의 선조인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을 격퇴했고,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제국을 건설했다고 전해지는 전설 속의 인물이다.

2. 설명

신화 전설 속에 존재하는, 판타지적인 인물이다. 실존 인물인지 가상 인물인지 어느 한쪽으로도 단언할 수 없다. 만일 '아서왕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들'이 실존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들은 아마도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부터 6세기 초까지의 로만 브리튼 이후 시대에 활약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아서왕의 초기 설화들을 보면, 아서왕은 브리튼의 영웅으로 이민족의 침입에 맞서 브리튼을 방어하기 위해 군담(軍談)적 살신성인에 해당하는 공을 세우고 있다. 아서왕이 완전히 창작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측 역시 '당시 브리튼인들의 멸족과 망국에 대한 위기감, 구원자에 대한 열망이 아서왕 신화의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아서왕의 신화가 전 유럽에 널리 알려지며 유럽의 여러 영웅 서사들이 편입되었고 중세 유럽의 방대한 이야기군(群)이자 일종의 창작물인 아서왕 전설이 만들어졌고, 아서왕은 국왕으로서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원탁의 기사들과 함께 국가를 건설하고, 수많은 영웅들의 왕이자 중세 시대의 위인으로 활약한다는 내용으로 각색되었다.

아서왕 전설은 아서왕과 궁정에서의 원탁의 기사들의 이야기를 총칭하는 것으로, 중세 유럽 문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모델이 된 아서왕 본인은 고대 브리튼 시대의 인물로 전해지지만, 아서왕 전설은 중세인 12세기경에 쓰여 크게 유행을 했고, 오랫동안 서양 세계 음유 시인과 문학가들에 의해 널리 사랑받았고 오늘날에도 판타지 문학과 예술의 원류로 영감의 소재가 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서왕은 대중적 판타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7] 대표적인 성군의 이미지이자 영웅의 이미지로 존재하고 있다. 아서왕 전설은 켈트 신화를 바탕으로 로마 신화의 요소를 가지고 게르만 문화 영향을 받았으며 기독교 신화가 가미되어 중세 내내 각색되어 왔다.[8] 당대의 음유 시인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 이야기를 읊으며 다녔으며, 예전에는 따로따로 존재하던 독립된 전승에 나오는 영웅 이야기들이 모두 '아서왕 전설의 사이클'에 통합되었다. 아서왕 전설 문학(Arthurian Literature)은 기사도, 로맨스, 전쟁, 마법, 탐구, 비극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아서왕 전설은 거대한 신화적 성운의 상상적 중심에 놓여있는 이야기군(群)으로, 사실 아서(Arthur)라는 이름조차 그것이 실제 이름이라 하기가 어렵다. 아서는 켈트어 아츠(arz, 곰이라는 뜻의 단어)에서 온 것인데, ‘곰’은 켈트 문명에서 ‘’의 상징으로 쓰이기에 아서는 왕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아더왕과 아서왕이라는 표현이 둘 다 사용되고 있으며, 외래어 표기법의 표준 표기로는 아서이다. 아서는 인명으로 자주 사용되는 이름으로 예를 들어 소설 《 해리 포터 시리즈》에 나오는 아서 위즐리나 《 셜록 홈즈》를 쓴 아서 코난 도일의 이름이기도 하다. Arthur가 들어가는 맥아더(MacArthur)와 같은 경우는 관용어 존중의 차원에서 맥아서가 아닌 맥아더로 읽히고 있다.[9] 이름이 언급된 최초의 문헌은 웨일스어 문헌인 《어 고도딘(Y Gododdin)》으로 추측된다. 남아있는 사본은 13세기의 것이지만 원본은 가장 이르게 작성된 부분은 7세기, 대부분은 9~10세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아서왕에게 구체적인 생애를 부여한 것은 12세기에 라틴어로 저술된 몬머스의 제프리 브리타니아 열왕사[10]이며 이를 통해 아서왕은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브리타니아 열왕사 이전의 초기 설화에서 아서왕은 웨일스 지방의 켈트족의 영웅[11]으로 초자연적인 존재와 싸우는 신화적인 면을 가졌으며,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인기를 모으며 프랑스, 독일 등 대륙으로 전래되면서부터는 여러 지역의 원탁의 기사들이 추가되고 활약하면서 중세 기사도 문학의 원류가 되었다.

아서왕은 중세 유럽에서 예수 다음으로 가장 많이 회자된 인물이자, 수많은 영웅을 거느리고 있는 왕 중의 왕이고 수많은 무공을 세운 최고의 영웅으로 탈바꿈되었다. 때문에 중세기 문학·예술에서 이른바 영웅의 본보기, 기사도 정신의 원천으로서 아서왕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중세의 미덕으로 여겼던 기사도 정신의 이상을 이룬 것으로 존경받았던 아홉 위인(Nine Worthies) 중 하나로 칭송되기도 하였는데, 나머지 여덟 명은 헥토르, 알렉산드로스 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다윗, 여호수아, 유다 마카베오, 카롤루스 대제, 고드프루아 드 부용이다.[12]

3. 무구

아서왕 전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아서왕이 멀린, 호수의 여인 등 다양한 조력자에게서 구한 여러 가지 신비한 무기들이다. 그 유명한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비롯해 아서왕의 무구와 전설은 중세 기사도 문학의 서사 전개 방식에 중요한 소재로 작용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정통 판타지 소설 클리셰가 되고 있다.
Thou shalt receive the boon whatsoever thy tongue may name, as far as the wind dries, and the rain moistens, and the sun revolves, and the sea encircles, and the earth extends; save only my ship; and my mantle; and Caledvwlch, my sword; and Rhongomyant, my lance; and Wynebgwrthucher, my shield; and Carnwenhau, my dagger; and Gwenhwyvar, my wife.
그대가 말하는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리라. 바람이 불고, 비가 젖고, 태양이 회전하며, 바다가 에워싸고, 땅이 이어지는 한. 다만 오직 내 와, 내 망토, 내 검 칼레드불흐(= 엑스칼리버), 내 창 흐롱고머얀트, 내 방패 위넵구르투헤르, 내 단검 카른웬하이, 그리고 내 아내 그웬휘바르(= 기네비어)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서왕이 사촌 동생 킬후흐에게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하며 한 말. 영문 번역은 Lady Charlotte Guest에서 발췌.

4. 역사와 재구

4.1. 아서왕의 역사적 시대 배경

아서왕 전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시기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약화된 로만 브리튼 이후 시대로 로마 군단이 철수한 5, 6세기를 배경으로 하고있다. 영국사에서 이 당시의 역사서나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모든 사건은 이후의 사료와 고고학적 발굴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 앵글로색슨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역사 기록을 남길 정도로 문명화되는 8세기 말이 되면 이와 반대로 사료가 너무 많아져서 아서왕의 모델이 되는 여러 인물들을 추정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파일:Map_Gaels_Brythons_Picts.png
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 로만 브리튼)


브리튼 속주 로마군은 407년, 일부 수비군만을 남기고 갈리아로 출정을 떠나 갈리아를 점령했으나 이후 군사적 좌절이 계속되며 브리튼을 방치했고 410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로 편지를 보내 스스로를 지키라고 명령하며 로만 브리튼 시대는 막을 내렸다. 결국 갈리아의 브리튼 속주 로마군은 전멸당해 브라타니아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로마 본토 역시 게르만족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었다. 로마 군단이 철수한 힘의 공백 아래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은 야인(野人) 켈트계인 픽트족, 게일족, 스코트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 막심한 피해를 당하게 되었고 이후 주트족, 색슨족, 앵글로족, 프리시족 등 게르만계 부족들까지 북해를 건너오면서 브리타니아섬은 더욱 혼란이 가중되었다.

영국 수도사 길다스(Gildas)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게른(Vortigern)이 425년부터 30여 년 동안 브리튼을 통치했다고 나온다. 보티건(Vortigern)은 길도(Gildas)와 비드(Bede)의 기록에서 처음 언급되었으며 여기선 왕이 아니라 참주로 나왔는데, 보티건은 고유 이름이기보다는 족장이나 왕을 뜻하는 보통 명사일 수 있다고 한다. 446년, 보티건은 브리튼인들이 야인 켈트계인 픽트족들에게 남침을 받게 되자 게르만계 주트족 용병들을 고용해서 이를 물리쳤다. 이후 용병들은 돌아가지 않고 브리튼에 머물었고 이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자 보티건은 주트족과 동맹을 맺고 영토를 분할하는 계약을 체결했고 이리하여 켄트 왕국이 세워진다. 이어서 색슨족들도 밀려들어 와 서식스 왕국, 웨섹스 왕국, 에식스 왕국을 건립하였고 이와 함께 앵글로족도 머시아 왕국, 이스트 앵글리아 왕국, 노섬브리아 왕국을 건국하여 앵글로색슨 7왕국이 세워졌다. 5세기 이후 앵글로족이 또다시 대규모로 브리타니아로 이주했고 시간이 흐르며 색슨족도 저지 독일어 대신 앵글로족의 고대 영어를 사용하며 앵글로색슨족은 함께 영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후에 9~10세기경 이들 주도로 통일 국가를 이루어 ' 잉글랜드'가 되었다. 앵글로색슨 7왕국의 건립은 4~6세기 300년 동안 유럽 전역에서 진행되었던 게르만족 대이동 물결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이 7왕국은 8세기가 되면서 3개의 왕국(노섬브리아, 머시아, 웨식스)으로, 9세기에는 하나의 왕국 웨식스로 통합되었다.

켄트 왕국이 세워지자 그곳에 살던 브리튼인들은 쫓겨나게 되었고, 이후 다른 게르만계인 색슨족과 앵글로족이 들어와 국가를 세우면서 브리튼인들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브리튼인들은 저항했으나 6세기경 그레이트브리튼섬에 페스트로 추정되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상륙하면서 크게 좌절되었으며, 이미 구 브리타니아의 수도 론디니움[17]은 전쟁터가 되어 수도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18] 전쟁은 7~8세기가 되어서야 어느 정도 정리된다. 로만 브리튼인들은 서쪽의 웨일스로 밀려났으며 대륙으로 건너간 브리튼인 일부는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라는 왕국을 세웠다. 동쪽에 남아있던 브리튼인들의 경우 앵글로색슨족의 지배를 받다가 동화되었으며 최후의 승자는 앵글로색슨족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아서왕 전설의 결말이 브리튼인들의 동족상잔과 아서 왕국의 몰락으로 끝나는 것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따라 아서왕 전설 역시 게르만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된다. 잉글랜드는 후에 노르만족의 침입과 지배를 받게 되지만 노르만족 역시 점차 앵글로색슨족에 동화되면서 잉글랜드의 지배층은 현대의 윈저 왕조에 이르기까지 앵글로색슨(게르만 계열)이었다. 예외적으로 튜더 왕조는 브리튼(웨일스) 계열이다.[19]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는 자신의 장남의 이름을 아서로 짓기도 했다. 그러므로 사실 현대 영국인과 영국 왕실은 앵글로색슨, 노르만, 브리튼의 피가 모두 섞였다고 볼 수 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nsbruck_1_262.jpg
1520년대에 만들어진 아서의 동상[20]

아서왕의 초기 모델은 이런 혼란스러웠던 브리튼의 상황 속에서, 이민족들의 침입으로부터 브리튼인들을 일시적으로나마 구원한 어떤 브리튼인 영웅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실제로 바돈 산 전투 등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한 세대 정도 극도로 위축되었던 정황이 기록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나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러한 인물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설에 근거해서 여러 인물들이 아서왕의 모델이 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겠으나, 그런 인물의 존재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확실하지가 않다.

아서왕의 시대를 살아간 길다스 사피엔스(500?~570?)의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21]이 당대 유일한 기록이나 어디에도 '아서왕'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서왕보다 2세기 후의 《브리튼 부족사》에서야 최초로 '앵글로색슨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사령관이 등장하지만 그러나 그마저도 '왕'이 아닌 전투 지휘관이며, 200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을 보면 그다지 신빙성을 가지고 있다 하기가 어렵다.

6세기경 바돈 산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앵글로색슨족에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 인해 적어도 100년 이상 앵글로색슨족의 공세가 위축되었다는 것은 실제 상황이다. 하지만, 이 당시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고사하고 전투가 벌어진 바돈산이 어디인지조차 알 방법이 전혀 없다.[22] 따라서 역사가들은 아서왕이 실제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료가 부족한 고대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6세기 중반 아서라는 지도자가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다'라는 이야기 자체는 완전 허구만은 아닐 것이다. 우선 브리튼인들의 6세기경 지휘관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앵글로색슨족의 공세를 100년 이상이나 늦춘 대승을 거두었다. 또 이 무렵 다른 기록에서도 '아서'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즉,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라 짓는 당대의 유행을 감안한다면 바돈산 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의 이름이 혹시 아서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심증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아서라는 이름은 켈트어 아츠(arz)에서 온 것으로 이는 왕이라는 뜻을 가지니 아무래도 어떤 특정인의 이름이기보다는 아서는 지도자, 왕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아서왕은 브리튼인들의 왕이면서, 동시에 지배층인 노르만족들에게도 전설의 왕으로서 1066년[23]부터 현대까지 영국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다만 아서왕의 이름의 무게가 부담되어서인지 실제로 영국 지역에서 왕명을 아서로 정한 왕은 아직까지 없다. 아서왕이 될 뻔한 인물로 헨리 7세의 맏아들 아서 튜더가 있지만 즉위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하였다.

4.2. 역사 속 아서왕의 후보

아서왕 자체를 실존 인물로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아서왕과 뚜렷한 관련성을 가진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상 아서왕 혹은 그 모델이 되는 인물이 정말로 존재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단순히 전설일 뿐이라며 많은 역사가들이 역사상의 아서왕 및 그 모델의 존재를 부인하였고 아서왕은 오늘날에 이르러 신화적 전설 속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그렇지만 직ㆍ간접적으로 아서왕과 관련되어 있는 역사적 기록들 또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상의 인물을 전설 속의 아서왕에 대응시키려는 이런저런 설은 한동안 존재해 왔다.

역사상의 아서왕의 실체에 대한 설명 중에 유명한 것은 아서왕 전설이 브리타니아에 파견된 사르마티아 중기병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다. 중기병 자체가 '기사'의 이미지를 연상시킬 뿐 아니라 그들이 펜드래곤과 비슷한 용의 문양을 사용했다는 점, 땅에 칼을 꽂아놓는 관습이 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되었다. 또한 사르마트족의 전설에는 영웅이 죽게 되자 그의 검을 바다에 던지는 이야기[24]나, 아서왕의 '호수의 여인'을 연상시키는 '물의 여인'도 나온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사르마트족과 관련시킬 만한 전설은 초기 기록이 아닌 후대의 기록에 주로 나오며, 이는 켈트 신화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많이 있으므로 굳이 사르마트와 관련시킬 필요가 없다는 반론을 받았다.

그와 관련된 다른 유명한 설로는 '아서왕 = 로마의 군인 아르토리우스'설로, 루키우스 아르토리우스 카스투스(Lucius Artorius Castus)가 사르마트 기병 5,500명을 이끌고 브리타니아 북부의 하드리아누스의 성벽을 수비한 것이 아서왕 이야기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름의 유사성과 함께 그의 깃발이 펜드래곤이라는 점 등이 근거로 제시되었다. 반론으로는 그는 로마 제국이 아직 강성하던 시기의 인물이라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점, 그가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에는 그다지 눈에 띄는 활동을 한 적이 없다는 점, 그가 사르마트 기병을 지휘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다는 점 등이 있다.

또 다른 학설로는 로마의 기록에 '브리튼의 왕(REX BRITANNICA, a king of Britons)'으로 등장하는 '리오타무스'가 있다. 리오타무스라는 말은 브리튼어로 위대한 왕을 의미하므로 본명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의 요청으로 무려 1만 2천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이는 이 시대에 브리튼의 분쟁에서 동원되는 병력을 크게 상회하는 것이다. 리오타무스는 색슨족과 맞서 싸우는 입장에서 본토에서의 증원을 막기 위해서 로마와 협력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리오타무스는 로마 관리의 배신 때문에 로마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르군트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패배 후 리오타무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는 리오타무스가 퇴각한 방향에 아발론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었다고 나오기는 하지만 이 시대의 기록이 부족해 연구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신뢰하기는 어렵다. 이는 이 주장의 약점이기도 한데, 리오타무스가 존재했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서왕과의 관련 여부는 둘째 치고 우선 리오타무스가 누구인지부터 연구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서왕과는 다른 게, 아서왕은 로마와 협력한 것이 아니라 로마군을 무찔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그 외, 아서왕 전설에서 아서왕의 숙부로 나오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있다. 그가 실존했으며 아서왕의 모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는 길다스의 기록에 있는 바돈 산 전투 몬머스의 제프리의 기록에는 아서왕이 지휘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길다스의 기록에 의하면 색슨족 부대는 브리튼으로 너무 깊이 들어왔다가 함정에 빠져 바돈 산에서 포위 섬멸 되었다고 한다. 길다스는 바돈산 전투의 지휘관이 누구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길다스의 다른 기록을 보면 이 당시의 군 지휘관은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인 듯하다. 물론 바돈산 전투는 벌어진 정확한 시기도, 바돈산이 어디인지도, 그리고 싸운 것이 브리튼 인들인지 로마군인지조차 불분명하다. 하지만 최소한 색슨족이 브리튼인들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활동이 백 년 동안 위축된 점은 많은 역사학자들이 사실일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반면, 몬머스의 제프리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우서 펜드래곤의 형이라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바돈산 전투를 치른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가 곧 아서왕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지만, 길다스의 기록을 검토한 학자들은 아우렐리아누스가 활동한 것은 바돈 전투보다 앞선 시대라고 보았다. 또한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우스는 길다스의 기록 이외 다른 곳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가 실존했던 인물인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만약 그가 실존했다면 로마의 기록에도 나타날 텐데 그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25]

이 외에도 잉글랜드 북부의 브리튼 왕국의 왕이었던 우리엔 레게드(Urien Rheged)나 전설적인 북부 브리튼의 왕 코엘 헨(Coel Hen)[26], 브리타니아 출신으로서 로마 제국으로 출병하여 아서왕 전설의 로마 제국 정벌의 모티브가 됐다 여겨지는 대립 황제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마그누스 막시무스[27] 콘스탄티누스 3세 등도 섞였을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했다. 또한 켈트 신화에서 발전해 나간 아서왕 전설이 중세를 거치며 앵글로색슨족의 대영웅 알프레드 대왕을 모델로 재구성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아서왕의 전설은 여러 시대, 여러 지역의 여러 민족의 설화와 역사적 기억들이 유입되어 섞여서 연상되는 인물이 너무 많다고 할 수 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서왕은 로만 브리튼인으로 로마화된 켈트족들의 지도자이고, 기독교인으로 추정된다. 당시 브리튼인들은 북유럽 다신교를 믿는 게르만족과 기독교를 믿지않는 로마화되지 않은 켈트족들과 대립하고 있었다. 아서왕 전설은 로마화된 켈트족의 신화로 켈트 신화의 바탕 위에 로마 신화의 요소가 얻어진 기독교적 신화이기도 하다. 아서왕의 모델 역시 로마화된 켈트족, 즉 브리튼인들의 장군에, 기독교인으로서 로마군 출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갈리아 전기가 쓰일 무렵과 아서왕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사이의 시간차, 골 지방과 영국의 기후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 당대의 무장 상황을 고려한다면 로마군의 제식 갑옷인 로리카 하마타( 체인메일)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당시 시대를 생각하면 중세를 배경으로 한 아서왕 전설에 나왔던 것처럼 플레이트 아머를 두른 이미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중세 당시에 아서왕 전설이 만들어지면서 아서왕은 브리튼의 민족 영웅에서 중세 영웅의 이미지로 탈바꿈되었던 부분이 있어서 다들 당연히 중세 시대의 복장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 그래선지 2000년대 이후 영화부터는 실제 아서왕 시대의 고증에 맞추어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아서왕 전설의 시기와 영국 역사를 쭉 비교해 봤을 때, 실재했다면 여러 정황상으로 로마 지배 시기가 끝나가던 때(5세기 후반~6세기 전반)가 가장 적절하며 그 시절에 실제로 영국을 통치했을 만한 강력한 군사 지휘관의 증거가 여럿 나온다. 그로 인해 그의 정체가 사실 로마군에 복무한 퇴역 군인이며, 로마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혹은 그 과정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가설이 힘을 얻기도 했다. 아서왕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인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서는 그를 '왕'이 아닌 군 사령관(dux bellorum)으로 부르며, '브리튼의 왕들 편에서 싸웠다'고 서술하고 있기도 하다. 엑스칼리버 전설의 경우 금속 제련 기술의 발달로 인해 품질 좋은 금속 검을 대량으로 보유했던 것을 비유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호수로 유해를 보냈다는 전설의 경우, 북유럽에서 죽은 이들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고 비유하는 이야기가 많아 같은 맥락으로 취급했다. 그 가설을 따르며 진상을 추적해 나가던 다큐멘터리에서는 여러 기록들을 조사해 가다가 마침내 아서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이는 헨리 2세의 사망 직후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사들이 수도원 묘지에서 아서왕과 기네비어 왕비의 무덤을 발견한 사건에 따른 것이다. 전설 속 인물의 무덤이 어떻게 발견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배경은 다음과 같다. 헨리 2세는 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해[28] 아서왕을 소설화하는 데 주력했으며, 신이 선택한 사람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헨리 2세는 웨일스 국경에 자리한 글래스톤베리 수도원의 수도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발론의 위치 추적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신화의 대부분의 내용은 구전으로 돌던 전설의 모음집적 성격이 짙다. 그래서, 주류 학계에서는 전설 속의 아서왕이 정확히 어떤 인물을 모델로 했는지 가려내는 일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한다. 위에서 설명한 인물들도 죄다 물증이 없는 추측에 싸인 설일 뿐이다. 참고로 아서왕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당대가 아닌 9, 10세기 윤색된 역사서로서 존재하는 연대기에는 그저 무슨 무슨 전투에서만 싸웠다는 기록만 있다. 중세의 최불암 시리즈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아서왕 전설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는 고고학자들이 소개되었다. 엑스칼리버의 정체를 거푸집에서 금속 검을 뽑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는 등 참고할 만한 고고학적 연구가 많다. 다만 마지막 영상의 글래스톤베리 유해는 진짜가 아니라 나중에 사라진 것으로 재연극에서 유해를 연기한 소품일 뿐인데 진짜인 것처럼 섬네일 낚시를 하여 비판받았다.

4.3.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라는 주장

'아서의 포지션에 해당할 인물'들이 위와 같이 여러 명 거론되지만, 그들 중 확실한 물증이 있는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아서의 실존성을 주장하는 주요 전거는 『브리튼인의 역사』(9세기)와 『캄브리아 연대기』(10세기)다. 『브리튼인의 역사』에 ' 바돈 산 전투'가 기록되어 있고, 『캄브리아 연대기』에 '바돈산 전투'와 ' 캄란 전투'가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리튼인의 역사』는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초기 버전 같은 것으로, 우리나라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문헌이다. 따라서 사료로서 가치보다는 설화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이는 문헌이다. 반면, 『캄브리아 연대기』는 아서왕에 대한 기록이 지나치게 자세해서 문제가 되는데, 도저히 6세기의 인물의 행적을 이렇게 많이 기록하기 위해 필요한 선행 문헌(인용, 전거의 대상)이 『브리튼인의 역사』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즉 『캄브리아 연대기』의 상세한 아서왕의 행적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 처음 창조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오늘날 로만 브리튼 이후(sub-Roman Britain) 시대를 논할 때 역사학자들은 아서왕 이야기를 그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아서왕을 신화와 전설 속 인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언급해 줘봤자 “그런 역할을 한 사람이 있었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 자체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 해줄 말이 없다”고 말한다. 시간이 흘러가며 아서왕이 실존 인물인가에 대한 논의는 '전설 속 인물'이라는 결론으로 확고히 자리매김되었다. 지금이야 다들 아서왕에 대한 이야기를 전설로 인정하고 당연히 생각하면서 전설과 역사를 명확하게 구분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아서의 왕국의 강역을 지도에 표시하려는 시도들이 있을 정도로 신화와 전설을 역사와 혼동해 아서왕을 역사적 인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아서왕이 전설 속 인물이고 아서왕이 특정인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기에 '아서 후보'조차 존재할 수 없다는 학설과 주장은 문헌학에 근거를 둔다. 『브리튼인의 역사』와 『캄브리아 연대기』에서는 아서를 6세기 사람이라고 기록했는데, 정작 6세기 당대에 쓰인 길다스 사피엔스의 『브리튼의 파괴와 정복』에는 바돈 산 전투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아서라는 존재는 전혀 기록된 바 없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도 없다. 8세기 사람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에도 없다. 400년에서 820년 사이에 작성된 필사본 중 아서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29] 그래서 당시 '아서왕 완전 허구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아서왕'이 역사학자가 진중하고 중요한 연구를 할 시간을 빼앗고 현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주제 자체를 교과서와 역사책으로부터 추방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학자로는 나월 마이어스(Nowell Myres),[30] 데이비드 덤빌(David Dumville)[31] 등이 있다.

그렇다면 아서왕은 켈트 신화에서 유래한 신화적인 존재이거나, 9세기에 창조된 허구의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아서왕의 켈트 신화에 유래된 인물이라는 것은 거인 2명을 처치한 영웅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가 있다. 실제로 초기 아서왕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켈트 신화에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으며 아서왕 전설의 주요 소재 중 하나인 성배의 원전 역시 켈트 신화의 누아다의 황금 솥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아서왕 전설은 초창기에는 구전으로 전승되었으며 아서왕은 신의 후손으로 신화적 인물이었다. 마치 단군 신화와 같은 민족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후 몬머스의 제프리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의해 처음으로 아서왕의 생애가 문헌으로 기록되었고,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전 유럽의 관심을 받으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면서 아서왕은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되었다. 이후 중세 시대 내내 인기를 모으며 수많은 아서왕의 이야기들이 쓰이게 되었다.

일부에서는 아서왕이 허구적 인물로 로만 브리튼인이 아니라서 그 시대의 복장이나 양식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설이 구전되었던 시대에 따라 다른 것이어서 아서왕의 초기 판본들을 보면 중세 이전의 생활 양식들이 묘사되고 있다. 또한 아서왕 전설은 수많은 이본(異本)들이 있는 이야기라서 같은 인물이라도 이야기마다 다른 성격과 다른 스토리로 나오며 시대상 역시 로만 브리튼 시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다양하다. 중세 이후에 쓰인 아서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대부분이 한창때 중세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아서왕의 전설이 12세기 이후 중세 시대에 크게 유행했던 것에 기인했던 연유로 보인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실제 인물 쪽의 고증을 따르면서 주로 브리튼 시대로 소개되고 있다. 실제 아서왕이 생존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와 아서왕 전설이 유행한 시대는 500년 이상의 간격이 있다.[32]

5.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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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왕 전설은 웨일스 지방에서 신화로서 구전되던 내용을 토대로 12세기 몬머스의 제프리가 라틴어로 집필한 브리타니아 열왕사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후 중세 내내 다양한 이야기로 각색되어 오다 15세기 후반 토머스 맬러리가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아서 아서왕의 죽음을 출판했다. 아서왕의 죽음은 영국 최초의 산문이다.

신화상의 인물을 모델로 한 창작물에 해당하는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아서왕과 그의 용맹한 기사들, 강력한 마법사에 대한 로맨틱한 이야기는 중세 이후 서양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였다. 전 유럽을 아울렀던 상상력의 원천이자 판타지 문학에 영감을 불어넣으며 원류로 손꼽히는 만큼 오랜 시간 영화,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콘텐츠로 변주되어 왔다.

아서왕 전설은 여러 시대 특히 중세 시대에 내내 유행을 하며 수많은 내용의 첨삭이 발생했기 때문에 매우 많은 이본(異本)들이 존재한다. 이야기가 매우 방대하기 때문에 문헌마다 주제, 사건, 등장인물의 요소들이 제각각이다. 원래의 이야기는 웨일스 신화였으며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아서왕의 생애를 최초로 기록한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나온 이후 아서왕 전설이 널리 알려지며 여러 운문과 산문이 나왔다. 때문에 후대의 이야기들은 제프리의 판본을 시작점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제프리는 아서가 색슨족 등 이민족들을 물리치고, 브리튼섬은 물론 아일랜드·아이슬란드·노르웨이·갈리아까지 지배하는 제국을 세웠다고 썼다. 오늘날 아서왕 전설의 필수 요소로 생각되는 기본적 합의 사항들 역시 제프리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 예로는 아서의 아버지가 우서 펜드래곤이라는 것, 마법사 멀린, 아서의 아내 기네비어, 성검 엑스칼리버, 틴타겔성에서 아서가 잉태되었다는 것, 캄란 전투에서 모드레드와 결전을 치른다는 것, 그리고 아발론에서 안식을 맞고 다시 부활해 돌아올 것이라는 것 등이 있다. (여담이지만 나폴레옹을 저지한 웰링턴 공작의 이름이 아서 웰즐리다.)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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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1] <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따른 대수 [2] '어 브레닌 아수르'로 읽는다. 브레닌은 군주를 뜻하므로 영어 이름과 의미는 같다. [3] '렉스 아르투르'로 읽는다. 라틴어는 아서왕 관련 초창기 문헌에서 사용된 언어다. 극초기 문헌에서는 아서를 'Rex(왕)'가 아닌 'Dux Bellorum'으로 기록하고 있다. [4] 아서왕은 AD 5세기 브리튼 사람으로, 당시 브리튼에는 아직 성(姓)이라는 문화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펜드래곤'은 일종의 칭호라고 볼 수 있다. 펜드래곤이란 명칭의 출처는 대부분 창작물로, 동양에서의 ''의 개념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하게 쓰이고 있다. 처음 언급된 <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선 용의 머리라는 의미로 쓰였다. 브리튼인 웨일스의 상징이 붉은 용임을 생각하면 상당히 적절한 칭호라고 할 수 있다. [5]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서술을 따를 경우. <브리타니아 열왕사>는 아서왕의 일대기를 최초로 정리한 책이며 아서왕의 시대로부터 수 세기 후인 1136년에 기록된 문헌이다. [6] 웨일스의 더베드(Dyfed) 지방에서 발견된 <캄브리아 편년사(Annales Cambriae)>에서는 아서왕의 마지막 전투인 캄란 전투가 일어난 시기를 약 537년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캄브리아 편년사는 아서왕의 시대로부터 수 세기 후인 10세기 중반에 기록된 문헌이다. [7] 선왕의 하나뿐인 아들이 신분을 감추고 자라 바위에 박힌 전설의 신검 엑스칼리버를 뽑아 자격을 증명하고 왕위에 오르는 이야기는 지금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8] 아서왕의 전설은 12세기 이후에 큰 인기를 모으다 르네상스 시대가 오며 연극, 희곡에 밀려 관심에서 멀어지다가 19세기 중세주의, 낭만주의, 고딕 부흥 운동으로 부활의 시기를 거쳤으며 현재까지 문학과 다양한 매체의 소재로 활용되어지고 있다. [9] 실제 발음은 매카서에 가깝다. [10] 중세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책 중의 하나로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11] 한민족의 단군 신화처럼 아서왕이 처음 등장한 건 켈트 신화였다. [12] 구성을 보면 알겠지만 중세 시대를 산 인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세 시대에 '존경받은' 인물들이다. 대부분 중세 기사 문학에서 다루어진 것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그리스 로마 신화도 기사 문학에서 다루어졌다. [13] 다만, 와스는 갑옷과 투구에 고유의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다. [14] golden helmet on his head, on which was engraved the figure of a dragon [15] 카른웬하이(Carnwenhau)라고도 표기된다. [16] 기록에 따라 어디서는 단검(dagger)이라고 하고, 어디서는 단도(knife)라고 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불명. [17] Londinium, 현재의 런던 [18] "The last days of Londinium". Museum of London.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8 January 2009. Retrieved 31 March 2013. [19] 그래서 튜더 왕조 시기에 유독 아서왕과 튜더 왕가를 엮는 시도가 잦았다. [20] 고증에 맞지 않게 플레이트 아머를 착용하고 있다. 사실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감시하는 로마군이 중세식 플레이트를 입은 그림이나, 16세기 명나라식 무기를 쓰는 3세기 삼국지 등등 창작물에서 자주 나오는 오류다. 창작이 이루어진 시대에 고증이 제대로 되었을 리가 없고, 그냥 당시의 복장 등으로 묘사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아서왕 전설은 이야기가 쓰인 중세 당시의 인물로 탈바꿈되어서 쓰인 부분이 있어서 플레이트 아머를 입고 있는 것이 당연했던 것. [21] 길다스가 쓴 것인지도 확실치 않고 추정이다. [22] 일단 후보가 되는 지역은 여럿 있는 모양이다. [23] 정확하게 말하자면 브리타니아 열왕사가 쓰인 시기인 1136년부터이지만, 저자인 몬머스의 제프리 본인부터가 노르만인( 브르타뉴계)이었기 때문에 노르만 정복이 영국에 아서왕의 신화가 유행하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24] 심지어 두 번은 던지지 않고 던졌다고 속이려는 내용도 나온다. [25] 이 가설을 따른 작품이 ABE 전집에 포함된 영국 역사 소설 '횃불을 들고'인데 이 작품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와 그의 조카이자 기병대장인 새끼 곰 '알토스' 두 사람이 아서왕의 모델로 나온다. (해당 소설은 시공사에서 '횃불을 든 사람들'로 재발간되었다.) [26] 이 두 사람은 웨일스의 시와 전설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왕들이다. [27] 웨일스 전설에서의 로마로 출병하여 돌아오지 않았던 웨일스 왕 막센 올레디그의 모티브로 여겨지고 있다. [28] 정치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위해 신화를 이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29] Pryor, Francis (2004), Britain AD: A Quest for England, Arthur, and the Anglo-Saxons, London: HarperCollins, ISBN 978-0-00-718186-5. [30] Myres, J. N. L. (1986), The English Settlements,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ISBN 978-0-19-282235-2. "no figure on the borderline of history and mythology has wasted more of the historian's time" [31] Dumville, D. N. (1977), “Sub-Roman Britain: History and Legend”, History 62 (62): 173–92, doi:10.1111/j.1468-229X.1977.tb02335.x. "I think we can dispose of him quite briefly. He owes his place in our history books to a 'no smoke without fire' school of thought ... The fact of the matter is that there is no historical evidence about Arthur; we must reject him from our histories and, above all, from the titles of our books." [32] 탐정 홍길동같이 인물이나 사건만 빌려 와서 현대 감각으로 각색한 것이 엄청 유명해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 각색한 이미지 쪽이 오히려 유명해져 버린 것이 문제이다. 역사 덕후들의 분노 다만 현대인들이 볼 때는 500년 이상 차이가 나도 거기서 거기라고 보일 수도 있다. [33] 중세 시대 프랑스에서 궁중풍 연애 소설이 유행하며 프랑스 작가들이 많은 아서왕 이야기를 만들어냈으며 주로 자국의 기사인 랜슬롯 위주의 이야기가 많다. 랜슬롯은 현대의 관점에선 불륜과 국가 전복을 해낸 인물인데 상당히 미화적. [34] 한 명은 콜랑이라는 이름의 키가 5m이고 거대한 을 탄 거인 기사로 나온다. 최후는 목이 잘렸는데 목이 그대로 몸에 있고 대롱대롱 매달린 채... 쉽게 말해 끔살이다. 또 한 명은 산 미카엘성에 사는 식인 거인이다. 엑스칼리버로 거인을 베어 죽이고 거인의 보물을 백성에게 나눠줬다. [35] 본문에서는 웨일스(표기는 웨일즈)만의 문화로 한정하는 듯한데, 사실 웨일스는 브리튼족의 후손 중 하나일 뿐이다. 콘월, 브르타뉴도 브리튼족에서 갈라진 민족들이고, 잉글랜드도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튼족을 정복하면서 브리튼족이 앵글로색슨 사회에 편입되어 형성된 민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서왕 전설이 웨일스만의 문화로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아서왕이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틴타겔성은 지금도 브리튼족 문화권에 해당하는 콘월에 있다. 아서왕의 고향이 콘월인 것은 영국 왕가에도 영향을 미쳐 영국 국왕의 장남은 콘월 공작으로 불리며 그 부인의 공식 칭호는 콘월 공작 부인이다. [36] 이미 켈트 신앙은 로마 지배 당시부터 탄압을 받았으며, 4세기 말에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면서 브리튼 역시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37] 차라리 폭군에 더 가까운 군주는 현 영국 왕실의 머나먼 선조인 윌리엄 1세인데 그는 영국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학살을 저질렀고 이를 기록한 오데릭 비탈리스는 천벌을 받아 마땅할 행위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