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일본프로야구 시절 (1991~2000)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2001~2019)
4.1.
시애틀 매리너스
5. 현역 은퇴6.
국가대표팀 경력7. 연도별 성적4.1.1. 2001 시즌4.1.2. 2002 시즌4.1.3. 2003 시즌4.1.4. 2004 시즌4.1.5. 2005 시즌4.1.6. 2006 시즌4.1.7. 2007 시즌4.1.8. 2008 시즌4.1.9. 2009 시즌4.1.10. 2010 시즌4.1.11. 2011 시즌4.1.12. 2012 시즌
4.2.
뉴욕 양키스4.3.
마이애미 말린스4.4.
시애틀 매리너스로 귀환1. 개요
스즈키 이치로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아마추어 시절
리틀리그 야구단에서 에이스 겸 4번으로 활약하며 전국대회에 진출하는 등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중학교 시절에도 꾸준한 활약으로 지역 명문 야구 고등학교들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고, 후에 이치로의 인생의 스승으로 불린 나카무라 타케시의 지도하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야구명문 아이치공업대학 부속 메이덴 고교를 선택했다. 1학년 때부터 바로 주전 3루수를 차지하더니, 2학년 때 하계 코시엔 대회에서는 좌익수로, 3학년 때 춘계 코시엔 대회에서는 투수로 출전하며 한 번도 어렵다는 코시엔에 2번이나 출전했으나 모두 1차전에서 탈락했다. 한 학년 아래인 마쓰이 히데키와는 연습시합을 통해 이때 처음 얼굴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고교 3년간 536타석 269안타로 고교 통산 타율은 무려 .501이었지만, 지역대회까지를 모두 포함한 수치이기에 후에 그가 일본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에 남긴 업적과 비교해 엄청난 성적이라고 할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치로의 투수로서의 재능은 이러한 '평범한 유망주'의 타격 잠재력에도 미치지 못했고, 이것이 그의 운명을 갈랐다.
고교 시절의 '투수' 이치로 |
이치로는 어린 시절부터 응원하던 연고지 구단인데다, 롤모델로 삼은 후지오 야스하루, 타오 야스시가 몸담았던 주니치 드래곤즈 입단을 희망하고 있었고, 이치로의 아버지도 주니치가 3순위 정도에서 지명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주니치 내부에서는 '투수' 이치로에 대해 '몸이 덜 만들어진 데다, 프로야구 레벨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5순위로 지명할 만한 투수 자원 정도로 생각해 두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고등학교 때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하면서 투구 폼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투수로서는 힘들것 같다는 평가까지 받게 되었다.
그 와중에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도카이지구 스카우터였던 미와타 카츠요시가 투수가 아닌 야수로서의 이치로의 재능을 주목, 그를 높게 평가하여 당시 구단 편성부장을 맡았던 나카타 요시히로[1]에게 이치로를 지명할 것을 추천했고, 나카타 역시 이치로의 프리배팅을 보고 감명받아 영입을 결심하였다. 결국 고졸 시즌인 1991년 드래프트에서 타구치 소, 하기와라 준[2], 모토히가시 히로시[3] 등 즉전력 유망주를 1~3순위에서 차례로 지명한 오릭스가 주니치보다 앞선 4순위 지명에서 이치로를 선택하며 오릭스에 입단하게 된다.[4][5] 반면 주니치 드래곤즈는 주축 중간계투로 활약했던 1순위 오치아이 에이지[6]를 제외하면 이 해에 지명한 선수들이 전부 오래가지 못하고 몇년 만에 방출되면서 그다지 성공적이진 못한 드래프트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어쩌면 주니치를 피한 것은 이치로에겐 천만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니치에서 초반 몇 년 간을 투수로 조련되었다면 주니치가 이치로 대신 지명한 2순위 이하의 선수들처럼 두각을 보이지 못한 채 조용히 야구판에서 사라졌거나, 뒤늦게 야수로 전환하더라도 성장에 중요한 시기를 헛되이 보낼 수도 있었다. 다행히 애초에 타자로서의 재능을 눈여겨봤던 오릭스였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치로로서의 프로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이치로가 지명될 당시 주니치 감독에서 막 물러난 참이었던 호시노 센이치는 1군 데뷔와 동시에 충격적인 성적을 남긴 이치로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그를 눈여겨보지 못한 것을 후회했고, 이후 고졸 신인은 투수와 야수를 처음부터 정해놓고 지명할 것이 아니라 종합 운동능력을 보고 선택하되 입단 후에 선수를 실제로 보고 포지션을 정하는 게 좋다는 지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3. 일본프로야구 시절 (1991~2000)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
3.1. 오릭스 블루웨이브
1991년 입단 당시 포지션은 투수. 드래프트도 4라운드에서 지명된 평범한 기대치의 선수였으나, 프로에 들어가자마자 타격쪽으로 전향해서 큰 성공을 보았다.일본 시절 이치로의 타격폼 분석 |
특히 데뷔 초창기에는 특유의 '시계추 타법'으로 더욱 눈에 띄는 개성을 지녔다. 다만 이 시계추 타법을 못마땅해한 팀 고위층때문에 2군에서 일찌감치 호성적을 거두었음에도 1군에서의 풀타임 시즌이 늦어지게 되었다.
이는 특히 도이 쇼조 감독이 그의 타격폼을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2년간 2군에서 3할을 훌쩍 넘기는 타율을 기록했음이도 도이 감독은 홀대했다. 사실 이치로 본인도 2년차 시즌(1992년) 즈음에 하와이 루키리그에서 도이 감독이 원하는대로 타격폼을 바꿨다가 43경기 0.188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하며 원래 타격폼을 유지하는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게 된다. 그러다 1994년 들어서 감독이 오기 아키라로 바뀌고 난 3년차가 돼서야 1군에서 주전 선수로 출장할 수 있었다. 훈련만 열심히 하면 그 무엇도 간섭하지 않았던 오기 감독의 신임 아래 첫 풀타임 때부터 1번타자로 종용받기 시작했다. 등록명을 이치로로 바꾼것도 이 시기부터였고 타격왕 출신의 재일교포 타격코치이자 이치로란 등록명을 제안했던 아라이 히로마사의 지도하에 타격기술을 연마하였다.[7]
1994년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한 시즌 200안타라는 대기록을 세우고, 1995년 퍼시픽리그 우승[8], 1996년 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한다.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전신인 한큐 브레이브스의 일본시리즈 3연패(1975~77년) 이후 19년만에 우승을 안겨준 것. 이 3년간 퍼시픽리그 MVP를 3연패했고 일본프로야구 최고 권위의 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도 2년 연속(94, 95) 수상했다.[9] 일본 통산타율이 무려 .353으로 비공식 역대 최고 타율을 보유하고 있다. 공식 기준인 4000타수에 381타수 부족한 3619타수라서 때문에 공식 기록으로는 인정이 되지 않으나, 일본 통산 타율 1위인 레론 리가 .320, 2위인 와카마츠 츠토무와 3위인 장훈이 .319이니 거의 넘사벽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설령 위에 모자란 381타수에서 모두 아웃을 당한다 해도 통산 타율은 .3195로 역대 2위. 여기에 안타 3개만 치면 .32025로 역대 1위가 된다.
특히 1995년에는 홈런과 볼넷을 제외한 공격 전 부문을 석권한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이 당시 홈런 또한 1위 고쿠보 히로키와 단 3개차이인 25개였다.) 1994년부터 2000년까지 7년 연속 수위타자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었는데, 이것 또한 일본 신기록. 홈런을 제외한 나머지 기록들을 따져보면 가히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 노무라 카츠야, 오치아이 히로미츠와 같은 NPB의 전설적인 강타자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않는 통산 성적이라고 볼 수 있고, 타율만 본다면 이들을 월등히 넘어선다.
특히 압권은 2000시즌으로 1994, 1995시즌의 엄청난 임팩트 이후 일본리그 수준을 뛰어넘은 실력탓에 점차 매너리즘[10]에 빠졌던 스스로를 반성하고 4할을 선언한 후 시즌에 돌입 .387 - .460 - .539 - .999 21도루 1도루실패라는 말 그대로 경이적인 성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치로가 메이저리그로 떠난 이후 오릭스에서 그의 등번호 51을 단 사람은 현재까지 아무도 없다. 영구결번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번호 세습조차도 무의미할 정도로 일본리그를 진작에 초월한 선수인 셈이다. 다만 정식 영구결번 제정은 이뤄지지 않는 상태인데, 등번호를 세습하는[11] 일본야구 문화도 그렇고, 2004년에 팀이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와 합병하여 오릭스 버팔로즈로 개명하고 오사카로 연고이전을 한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우선 팀 역사 자체는 기존 오릭스 구단의 역사를 이어가지만 연고지도 바뀐 데다 지금의 오릭스는 사실상 2005년 새롭게 만들어진 신생팀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보니 고베 시절에 뛰었던 이치로에게 오사카 연고구단 입장에서 영구결번을 주기 애매해진 듯.
4.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2001~2019)
이치로가 MLB에서 세운 기록들 |
이치로의 MLB 커리어 |
이치로의 시대 |
4.1. 시애틀 매리너스
영광의 시애틀 매리너스 시절 |
4.1.1. 2001 시즌
일본프로야구에서 제왕으로 군림한 이치로는 어린 시절부터 꿈이었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의 진출을 위해 노력했다. 일본 시절에도 MLB 스프링캠프에 참가해 그들의 플레이를 보고 겪었고, MLB를 대표하는 스타이던 켄 그리피 주니어와 대담을 갖기도 했으며[12], MLB 투수들에 적응하기 위해 타격폼 전면 수정에 들어가기도 했다.[13]결국 2001년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시애틀 매리너스가 이치로를 1400만 달러에 입찰하였고[14], 이치로는 3년 1500만 달러의 계약을 맺으며 MLB에 진출했다. 이때 이치로의 나이가 만 27세였다. 한편 자신의 일본 시절 등번호인 51번을 달기 위해 전임 51번이자 매리너스의 준 영구결번자인 레전드 투수 랜디 존슨에게 '51번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그의 허락을 얻어 51번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15]
베이스볼 아메리카는 화려한 일본 시절의 커리어를 반영해 이치로를 유망주 순위 9위에 놓았다. 비슷한 수준의 (역대) 톱급 유망주들의 성적은 메이저 리그 유망주 순위를 참조.
이후 이치로는 이치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MLB 진출 첫 해에 아메리칸 리그 타격 1위(타율 0.350)[16][17], 최다 안타 1위(242안타), 도루 1위(56도루)를 기록하고, 아메리칸 리그 신인왕과[18] MVP를 동시 석권[19]하면서 미국 전역에 신선한 충격을 불어넣는다.[20] 참고로 MLB 역사에서 데뷔 시즌에 타격왕과 도루왕을 동시 석권한 선수는 2명있었는데[21], 나머지 한 명은 그 유명한 재키 로빈슨이다.[22]
미국의 '이치로 신드롬'을 보여주는 광고 |
하지만 이 해 MVP 수상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OPS 등이 경쟁 후보였던 지암비, 브렛 분 등에게 확실히 밀리고 WAR에서도 둘과 많은 차이를 보였지만 이치로가 수상했기 때문이다. 이치로는 일본에서 건너온 신인이라 언론에서 주목도가 높았고 타격왕, 도루왕 두 개의 타이틀을 따낸 것 때문에 수상할 수 있었다.[23]
올스타 투표 1위 트로피를 수상하고 있는 이치로(AL)와 베리 본즈(NL) |
이치로의 3루 송구 |
사사키 가즈히로와 시애틀의 일본인 올스타 듀오 시절 |
4.1.2. 2002 시즌
2002년에는 같은 NPB 출신인 알폰소 소리아노에게 단 1안타차로 밀려 아쉽게 최다 안타 타이틀을 놓쳤다.4.1.3. 2003 시즌
2003년에도 버논 웰스에게 단 3안타 차이로 또 최다 안타왕을 놓쳤다...시애틀과 4년 4,400만달러에 재계약했다.
4.1.4. 2004 시즌
258안타를 치던 순간 |
2004년에는 1920년 조지 시슬러가 기록했던 257안타의 기록을 84년만에 경신하며 메이저리그 역대 단일시즌 최다인 262안타를 쳤다. 당시 60경기만에 121안타를 쳐내는 미친 활약을 보여줬다.
타율 역시 .372으로 압도적인 타격왕을 차지했지만 게리 셰필드, 매니 라미레스 두 약쟁이에게 밀려 외야수 실버 슬러거는 사실상 강탈당했다.
또한 세이버메트릭스상으로도 bWAR, fWAR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하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하며 MVP 유력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소속팀이 압도적으로 지구 꼴찌(…)를 해버려서 MVP 투표에서 표를 많이 받지 못했다. 특히 bWAR은 무려 9.2로 그해 5.6을 찍고 MVP가 된 블라디미르 게레로와 비교하면 3.6이나 앞섰다. 이 차이만 하더라도 이미 올스타급 이상의 타자 한명과의 차이다.
스테로이드 시대로도 손해를 본 대표적인 선수 중 한명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는 대약물시대로 리그의 평균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상황이라 저 WAR 역시도 손해본 상태에서 찍은 스텟이었으며[24] 만약 MVP 투표에서 포스트시즌 진출 비중이 많이 줄고 세이버메트릭스가 발달한 요즘 시대였다면 MVP를 수상해도 이상할게 없는 성적이었다. 거기다 세이프코라는 리그에서 손에 꼽히는 투수구장에서 답이 없는 팀과 뛴것도 손해가 컸다.[25] 만약 이치로가 와일드카드 시리즈 진출팀에서만 뛰었더라도 당시 MVP의 이름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었다.[26]
더 놀라운 것은 이 262안타도 이치로가 생각보다 타석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가 적었던 상태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당장 위의 시애틀의 주전 타선 라인업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시애틀은 리그 최하위권의 성적을 전전하고 있었고 출루율 역시 최악이라 그만큼 이치로에게 타석이 많이 돌아오지 못했다.
4.1.5. 2005 시즌
2005 시즌을 앞둔 이치로는 부족한 홈런을 늘리겠다며 호기롭게 시즌에 들어섰지만 정작 홈런을 제외한 모든 타격 스탯이 하락하였고 3할 3리라는 본인에게는 아쉬운 타율로 시즌을 마감 했다. 홈런 갯 수는 15개로 확실히 늘어난 모습이었지만 이치로의 MLB 전성기 2001~2010 시즌 중에는 가장 생산력이 낮은 시즌이었다.4.1.6. 2006 시즌
4.1.7. 2007 시즌
2007년 올스타 게임에서는 올스타 게임 역사상 최초로 인사이드 파크 홈런
한편 정규시즌 역시 3할 5푼이 넘는 고타율로 마감했지만 타격왕은 또다시 놓치고 만다.
시애틀과 5년 9000만달러라는 당시로는 특급 조건으로 계약을 연장했다.
4.1.8. 2008 시즌
4.1.9. 2009 시즌
2009 정규 시즌을 앞두고 펼쳐진 WBC에 참가하였고. 결승전에서 임창용을 상대로 일본의 우승을 결정 짓는 결승타를 치며 자신의 마지막 국제 무대를 화려하게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2009년 9년 연속 200안타 및 아시아인으로는 장훈에 이어 통산 2번째로 3000안타를 달성하였으며, 메이저리그 2000안타도 채웠다. 참고로, 9년 연속 200안타는 야구 초창기었던 때에 윌리 킬러가 1894~1901년에 기록한 8년 연속 기록을 깬 것으로 MLB 최초이다. 홈런과 같은 장타가 안나오던 시절 이전의 그때와는 달리 홈런이 많이 나오고, 변화구가 많이 개발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치로는 세계의 누구와도 비교해서 밀리지 않는 컨택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 된다.2009 시즌 역시 말까지 3할 5푼이 넘는 고타율을 유지하여 타격왕 수상하는 듯 했으나 또 콩라인을 타고 말았다. 그동안 엄청 아깝게 놓친 타이틀이 02, 03, 05년 안타왕과 07, 09년 타격왕 등이 있다. 이치로는 이때 1위와 매우 적은 차이로 2위를 했다. 5년동안 꾸준히 메이저리그 전체 2위에 오르는 기록을 냈지만 한번도 아메리칸 리그 1위에는 올라보지 못한 것이다...[28]
그당시 대약물시대를 거쳐오면서 약쟁이들 때문에 실버 슬러거 등 손해본 상들까지 생각하면 이치로로써 매우 아쉬울 수밖에 없는 사례들이다. 거기다 메이저리그에서 손에꼽는 극투수구장인 세이프코필드에서 내내 뛰면서 저런 성적을 낸거니...
4.1.10. 2010 시즌
2010년에도 200안타를 달성하였다. 이로서 01년부터 10년 연속 200안타 달성. 이 연속 시즌 200안타 부문의 기록에서 2위는 Willie Keeler로 1894년!!!부터 1901년까지 8년동안, 3위는 웨이드 보그스의 7년으로 차이가 좀 난다. 이치로의 위대함이 다시 보이는 부분 사실 이치로 말고는 2010년까지 매시즌 200안타 기록을 이어오는 선수가 없다.
2010시즌까지의 MLB 통산 타율이 .331이나 된다. 단지 미국으로 건너와서는 장타율이 급락했다.[29] NPB에서 시계추 타법을 쓰던 시기에는 20개에 가까운 홈런과 5할 이상의 장타율을 매시즌 기록하던 타자였지만 MLB 스프링캠프에서의 쇼크 이후 타격폼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해 풀타임 1번 타자를 맡게 되면서 장타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컨택을 극대화시킨, 출루 자체보다는 공을 때리는 것에 집중하는 스타일로 전환했다. 볼넷으로 진루하는 경우가 상당히 적은 편이고 타율 대비 출루율은 낮은 편이다. 또한 볼넷을 고르는 것보다 안타를 때리는 극단적인 배드볼 히터였다.[30]
데뷔 2년차 때부터 미국의 전문가들의 입에서 이치로가 중견수로 옮겨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치로 정도의 재능이라면 중견수 수비를 하는 것이 팀에 이득이라는 논리를 주장했다. 실제로 이치로는 한 시즌 중견수로 뛰었는데 우익수 자리에서는 로베르토 클레멘테와 함께 역대 1, 2위를 다투는 괴물같은 수비력을 통해서 중견수 수비에서도 큰 호평을 받았다.[31] 간혹 이치로가 추신수를 싫어해서 중견수로 전환하지 않았다는 말도 있는데 해당 포지션에서 역대 최고를 논하는 수비를 갖춘 선수가 신인을 위해 자리를 옮긴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생각해보자. 이런 경우라면 신인이 수비 위치를 옮기는게 당연한 일이며, 결국 추신수는 중견수로의 컨버전에 실패했기에 트레이드 된 것.[32] 추신수 이적 이후 중견수로 전환한 것도 추신수를 비롯한 시애틀이 자랑하던 외야유망주들이 줄줄이 실패한 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마저도 대체자원이 영입되자 곧바로 우익수로 복귀했다.
도루는 2009시즌을 제외하고는 5위권 바깥으로 나가 본 적이 없고 성공률은 9시즌 중 세 시즌 말고는 항상 80% 이상에다가 2008 시즌엔 무려 92%였다. 다만 2008시즌을 기점으로 나이에 따른 스피드 저하와 부상 위험 때문에 자제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거기에다 10년 연속 골드글러브에 2000년대 메이저리그 올스타 외야수 부문에도 선정.
4.1.11. 2011 시즌
그러나 2011년 시즌 초반 타율이 2할 초반대에 머무는 부진을 보이다가, 결국 184안타, 타율 0.272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11년 연속 200안타에 실패했다. 11년 연속 올스타 게임 출전도 실패. 이러한 결과에 대해 배트 스피드가 느려졌다느니 장타력이 떨어졌다느니 발이 느려졌다느니 속구 대응력이 떨어졌다느니 이런저런 분석이 나오고 있으며 사실 나이가 들었기에 어쩔 수 없다. 정작 본인은 연속 200안타 기록에 대한 중압감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하다는 모양.
자기 관리에 관련해서 이치로 본인이 밝힌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치로는 경기 시작하기 직전에 하는 식사는 미국 진출 이후 안정기에 들어온 이후부터 무조건 페퍼로니 피자를 먹는다고 한다.
이는 이치로가 피자를 미친 듯이 좋아해서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몸의 리듬을 완벽하게 같은 상황으로 만들기 위해서라고 한다. 즉 뱃속에 들어가 있는 음식을 언제나 같은 것으로 해서 컨디션이 변할 요인을 통제하는 것. 그런데 원정경기가 많은 야구 선수 특성상 미국 전역 어디에서도 일정하게 판매하는 음식이 필요 했고 그 후보가 햄버거와 피자였는데, 햄버거만 먹어서는 아무래도 에너지가 부족하고 고기 상태에 따라서는 체할 위험이 있는 햄버거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피자를 선택했고, 미국 진출 10년 넘는 세월동안 이를 습관화시켜서 경기 전에는 무조건 페퍼로니 피자를 먹고 나서 경기에 임한다고 한다.
아울러 미국 진출 이후 홈경기 때에는 무조건 아내[33]가 만들어 준 카레만을 아침 겸 점심으로 먹었다. 아내가 없을 때를 대비해서 냉동실에 잔뜩 보관해 두었다가 데워 먹기도 한다[34] 2013년 10월 6일 가키노츠카이 방송 분에서 2010년부터 식빵과 국수로 바꿨다고 한다. # 그러고 보면 "결혼해서 제일 좋은 점이 뭐냐?"라는 질문에 "삼시 세끼 인스턴트가 아닌 밥과 국을 먹을 수 있다."라고 대답한 적도 있는데...
이것이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본인의 집착 혹은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메이저리그에서 높은 커리어를 내기 위한 개인의 섬세한 노력 중 하나라는 면에서는 호평을 받을 만하다.[35]
4.1.12. 2012 시즌
4.2. 뉴욕 양키스
뉴욕 양키스 시절 |
4.2.1. 2012 시즌
2012년 7월 23일, 시애틀 팬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치로가 뉴욕 양키스로 트레이드된 것. 이는 이치로 본인이 팀의 리빌딩을 위해 잭 쥬렌식 단장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하여 이뤄진 것이라고 알려졌다.[36]흥미롭게도 이치로의 이적 첫 경기가 시애틀 원정이었고,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으며 등장한 첫 타석에서 목례로 답한 뒤 안타를 때려내고 도루까지 성공하며 다시금 기립박수를 받았다.
8월 19일 對 레드삭스와의 홈경기에서 조시 베켓을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날렸다. 보기 드문 연타석 홈런인데 아무래도 양키 스타디움의 버프를 받는 것 같다. 또한 2011~2012 시즌에 연속으로 팀에 깽판친 조시 베켓을 향한 나름의 권선징악포이기도 한 듯.
결국 양키스가 지구 우승을 거머쥐고 MLB로 와서 11년 만에 처음으로 우승 세리머니라는 걸 해봤다고 한다(…). 실은 이적 첫 해에 시애틀이 지구 우승을 하긴 했는데 하필 이때가 9.11 테러가 벌어진 해라서 우승 세리머니를 자제하는 움직임 때문에 지구 우승을 하고도 조용히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시애틀 말년에 .260대까지 떨어지는 굴욕을 맛 봤으나 순수하게 양키스 이적 후에는 타율 .322를 기록했다. 시즌 통합 타율 성적은 .288로 전성기 포스에 비하면 8번도 치고 좌익수도 보는 등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지만, 이적 전에 90경기나 뛰고 2할 6푼대에서 허우적 대던 거 생각하면 많이 올린 편. 처음 이적시에는 다음 시즌 재계약은 힘들고 시즌 중간에 땜빵 정도로 끝날 거라는 관점이 지배적이였지만 시즌 중 성적도 좋고 플옵과 월드 시리즈 성적에 따라서는 가능할 것 같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실제로도 포스트시즌에서 롸동자나 커현이가 잉여가 되어가는 상황에서 데릭 지터와 함께 양키스를 이끌고 있는 상황을 연출하였다.
데릭 지터가 ALCS 1차전에서 부상으로 아웃되고 이적후 처음으로 1번 우익수로 남은 경기를 출장하였으며 .275의 타율로 팀내에서 상위급 성적을 기록하였는데...다른 선수들이 공수 양면에서 거하게 삽을 푸며 팀의 패배를 막지는 못했다.[37] 우승반지가 간절했던 이치로로써는 팀이 원망스러울만한 정도였다.
또한 2012년에는 작년에 떨어졌던 수비폼이 확실이 돌아왔는데 UZR, DEF 등 모든 주요 수비 스탯에서 우익수 부문 리그 1위를 찍었다. 다만 작년의 주춤했던 수비가 감독들의 기억에 남아서인지 아쉽게 골드글러브를 수상하지 못했다. 특히 수상자인 조시 레딕에 비해 이치로가 UZR, DEF 등 모든 수비 스탯에서 앞서있는 상황이었고[38] 한번만 더 수상하면 외야수 골드글러브 수상 단독 2위까지 올라갈 수 있어서 더욱 아쉬운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3000안타에 대한 열망이 있는지 오프시즌에 양키스와 2년 계약에 합의하였다. 당초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더 높은 금액을 불렀지만 이치로 성격 상 금액에 연연하지 않고 양키스에 잔류했다.
4.2.2. 2013 시즌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류현진이 양키 스타디움에서 등판한 인터리그 경기에서는 류현진을 상대로 홈런 포함 2안타를 치고 호수비까지 선보이면서 경기 내용상 승리를 거뒀다.뒤이어 텍사스 레인저스의 다르빗슈 유와 양키스의 구로다 히로키의 선발 맞대결로 주목받았던 경기에서 9회 2사 끝내기 홈런을 날리고 이날의 진 주인공이 되었다.
8월 21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홈경기에선 1회말 R.A. 디키를 상대로 좌전 안타를 쳐내며 미일 통산 4000안타라는 금자탑을 달성했다. 팀 동료들도 덕아웃에서 모두 나와서 축하해주는 장면이 펼쳐졌다. 이것은 타이 콥,
하지만 피트 로즈는 자신도 마이너 리그에서 427안타를 더 쳤다고 하면서 이치로의 프로 통산 4000안타에 대해 일본에서 기록한 1278개의 안타를 인정하기 어렵다는듯한 늬앙스의 발언을 했다. 이처럼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NPB에서 뛴 기록 덕분이지 처음부터 MLB에서 데뷔해 활동했으면 4000안타는 꿈도 못꿨을 거다'라며 폄하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 경기수가 적어서 누적에서 손해를 보는 선수가 있듯이 NPB도 MLB보다 경기수가 약간 적어서 안타 누적이 약간 어려웠던 것도 고려해야한다. 거기다가 이치로는 일본에서 프로 데뷔 초기 2년간 팀 감독과의 갈등[40]때문에 1군 경기에 거의 못 나오고 2군 생활[41]을 했기 때문에 2년 가까이 날린 시즌도 있다는 것 역시 고려 대상이다. 처음부터 MLB에서 활동했다면 마이너에서 오래 있다거나 하면서 야구 인생이 달라질수는 있겠지만, 마이너리그 못지 않게 가혹한 걸로 유명한 NPB 2군 생활도 견뎌내고 첫 NPB 1군 풀타임 시즌부터 200안타 신기록으로 리그 최고 타자가 되었던 이치로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을 고려해 본다면 MLB에서도 3500~4000안타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고 4천안타를 넘기는 타이 콥이나 피트 로즈의 대기록에 도전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통산 4000안타를 달성하며 호프집 예약을 해둔 건 좋지만 순수히 2013년 성적만 따지면 좀 아쉽다. 특히 타석에서의 기량 하락이 심각한 수준. 원래부터 그다지 차이나지 않는 타율과 출루율 사이의 간극이 약점이었지만 타격왕을 차지할 정도의 높은 타율로 출루율을 올리던 그였다. 하지만 나이 때문에 타율이 수직 낙하를 해 2013년의 최종 타/출/장이 .262/.297 /.342 밖에 되지 않는다. 메이저 리그 평균은 .253 /.318 /.396 이다. 타율이 평균을 약간 상회하긴 하지만 출루율과 장타율이 리그 평균에 크게 뒤쳐지는 마당에 큰 의미를 가지진 못한다.
한마디로 타석에서는 평균 이하의 선수가 되었다. 대신 수비와 주루 센스는 여전히 훌륭해서 이를 무기로 양키스에 도움을 줬다. 다만 2013 시즌에 기록한 WAR는 1.1로, 수비 잘하고 주루 플레이 좋지만 공격이 안 좋은, 전형적인 나이 많은 백업 선수의 스탯을 기록했다. 물론 매우 적은 수준이라 돈값은 톡톡히 하는 활약이라고 할 수 있다.
양키스에서도 최상위급 수비를 보여주는 이치로 |
특히 수비는 UZR, DEF 등 모든 수비 스탯에서 최상위를 찍어 골드 글러브 수상이 기대되었으나 작년과 마찬가지로 또 이치로보다 수비 스탯이 떨어지는 선수가
주자를 묶어놓는 이치로 트릭플레이[43]
4.2.3. 2014 시즌
2014년 시범경기에서는 안타를 거의 못 치는 등 부진 하면서 세금과 이치로의 안타는 줄지 않는다는 명언이 있을만큼 화려하고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었지만 천하의 이치로도 세월 앞에서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입지 탓인지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를 시도한다는 소리가 계속 나오고 있다. 하지만 본인도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는지 시범경기 거의 막바지 몇 경기에서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팬들 역시 부정적인 시선과는 다르게 3000안타를 치고 은퇴하기를 바라고 있다.정규시즌에 들어와서는 백업으로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284의 타율과 102개의 안타를 기록하며 14년 연속 빅리그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했다. WAR는 0.3으로 대체선수 수준의 역할을 했는데, 앞으로 향후 몇년간은 이렇게 선수생활을 할 듯하다. 미일 통산 3000경기 넘게 출장한 상태로, 몇 년 동안 선수생활을 어떻게든 지속한다면 피트 로즈의 기록을 노릴 수도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마이애미에서 피트 로즈의 기록을 결국 넘어섰다.
돌아보면 전설적인 시애틀 시절에 비하면 확연히 저조한 활약이었지만, NJ.com에서 선정한 양키스의 2010년대 올스타 라인업에 백업 선수로서 선발되었다. 비록 전성기보다는 꺾인 기량이지만 전설의 황혼기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준 나쁘지 않았던 3년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4.3. 마이애미 말린스
마이애미 말린스 시절 |
4.3.1. 2015 시즌
2015년, 마이애미 말린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이로써 메이저리그 진출 후 처음으로 내셔널리그에서 뛰게 됐다.6월 15일 뉴욕 양키스전에서는 다나카 마사히로를 상대로 2안타를 치고 통산 안타 38위에 올랐다.
7월 30일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경기에서 덕 피스터를 상대로 2900안타를 달성했다. #
8월 15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즈와의 경기에서 상대 선발 하이메 가르시아를 상대로 2913안타, 프로 통산 4191안타를 달성해 메이저리그 역대 2위 타이콥과 동률을 이뤘다. 다음날인 8월 16일에 타이콥을 넘어 단독 2위로 올라섰다. 세인트루이스원정임에도 관중들의 기립박수는 덤. # 1위인 피트 로즈의 4256안타에 가까워졌다.
8월 26일 피츠버그와의 경기에서 역대 82번 째로 통산 10,000타석을 달성했고 시즌 11호 도루도 기록했다. #
10월 4일 필라델피아와의 2015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8회말에 중간계투로 깜짝 등판하여 한 이닝을 던지고 1실점을 기록하고 내려갔다. 메이저리그 진출 후 첫 투수 등판으로, 이치로 본인이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보고 싶다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애틀 때도 이런 요청을 한 적이 있지만 야수가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건 이미 승패는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울어져서 불펜 투수를 내느니 팬서비스도 겸해 불펜을 아끼려는 용도다. 게다가 불펜에서 몸을 풀거나 마운드에서 실전 피칭을 하다가 갑작스럽게 몸에 이상이 생기면 팀이나 선수 본인에게 손해라서 당시 주전 우익수인 이치로의 요구는 당연히 거절당했다. 마이애미에서는 백업 선수이다보니 가능한 일.
다만 타격 성적은 당연히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진작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지만 3천안타에 대한 본인의
하지만 수비로는 아직도 최상급으로 골드 글러브급 수비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10월 6일 42번째 생일을 눈앞에 두고 마이애미와 1년 연장계약을 맺으며 잔류에 성공했다. 정확히 말하면 2M에 1+1년이며 타석당 보너스가 붙어 있다. #
4.3.2. 2016 시즌
자세한 내용은 스즈키 이치로/선수 경력/2016년 문서 참고하십시오.2016년 8월 8일 콜로라도 로키스전 4번째 타석에서 7회초 3루타를 터뜨리며 개인 MLB 통산 3000번째 안타를 때려냈다. 메이저리그 역대 30번째로 3000안타 클럽에 가입.[45]
이치로가 콜로라도 상대로 3000안타를 치자마자 당시 세이프코 필드에서 LA 에인절스와 경기중이던 시애틀의 팬들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 멋진 장면도 연출됐다.
또한 성적도 눈에띄어 구단 MVP격인 제프 코나인상도 수상했다.
이러한 쏠쏠한 활약으로 시즌 후 계약 연장 옵션 실행은 물론 2018년 옵션까지 추가됐다.
4.3.3. 2017 시즌
자세한 내용은 스즈키 이치로/선수 경력/2017년 문서 참고하십시오.시즌 시작후 바로 3000안타를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으며 이때 무려 이때까지의 모든 안타를 여정을 담은 사진을 모두 손수 붙혀만든 기념물까지 수여받았다. 사실상 마이애미측에서도 이치로를 어느정도 구단 레전드로 대우해주는 듯하다.[46]
4.4. 시애틀 매리너스로 귀환
4.4.1. 2018 시즌
자세한 내용은 스즈키 이치로/선수 경력/2018년 문서 참고하십시오.3월 5일 시애틀 매리너스 복귀 소식이 보도되었다. 밥 나이팅게일 트윗
4.4.2. 2019 시즌
예상과 다르게 시애틀 매리너스와 마이너 계약에 합의했다. 일단 3월말에 일본 개막전 로스터에 포함되기로는 했지만 그 이후에는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일단 2월 23일 오클랜드와의 시범경기에 선발출장해 2타수 1안타 2타점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고 대주자와 교체되었다.
하지만 이후 시범경기에선 침묵중이고 타율이 1할대를 보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메이저에서의 생존은 장담하기가 힘든 상황. 급기야 3월 10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의 시범경기에서 2타수 무안타로 침묵해 타율이 1할대도 무너져 .091을 기록했다. # 3월 14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의 마지막 시범경기에서도 2타수 무안타 2삼진으로 타율 .080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최종적인 시범경기 성적은 25타수 2안타.
일단 3월 20-21일 도쿄에서 열리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와의 특별 개막전에는 선발 출장할 가능성이 높지만 미국 언론들은 일본에서의 경기가 이치로의 메이저 커리어의 마지막이 될것이라 보고 있다. 애초 이치로도 시애틀과 계약을 맺을 때 개막 2경기에는 메이저 로스터를 보장받는걸로 했기 때문에 본인이 더 잘아는게 아니냔 말까지 나오는중.
3월 20일 도쿄돔에서 열린 특별 개막전에서 선발출장했다. 첫타석은 2루 뜬공으로 물러났고 두번째 타석에서는 9구까지 가는 승부끝에 볼넷을 얻어 출루했고 대주자와 교체되었다. 도쿄돔에는 선수로서의 이치로를 마지막으로 볼 기회라는 인식에서인지 구름 관중이 모였고 이치로 자신도 결국 눈물을 보였다고. #
3월 21일 개막 2차전[47]에서는 8회 초 2사 2루 상황에서 땅볼로 물러나며 아쉽게 마지막 타석을 마무리했다.
은퇴와 관련된 MLB.com 기사는 Ichiro retires after emotional finale in Tokyo을 참조.
5. 현역 은퇴
"오늘 게임을 마지막으로 일본에서 9년, 미국에서 19년째에 돌입하게된 상황입니다만. 현역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거론되던 은퇴설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선수생활을 이어갔으나, 마침내 2019년 3월 21일 도쿄도의 모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가지고, 공식적인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50세까지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겠다는 말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서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일본에 복귀해서 선수생활을 이어나간다는 선택지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이치로는 없었다고 답변했다.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감독이 되는 것은 '절대 무리'(일본어로 불가능이라는 뜻)라고 답했다.
이 날 경기는 닛폰 테레비, ESPN에서 중계했으며, 이치로의 은퇴로 오릭스 블루웨이브 시절 선수들은 한 명도 프로야구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3월 21일 이치로의 은퇴는 다음날 거의 모든 스포츠신문의 1면을 장식할 정도로[48][49] 임팩트가 컸다.
처음부터 계약이 일본에서 열리는 개막전까지였다고 한다. 현역 연장이 가능할 정도로 잘 쳤다면 연장 계약도 가능했겠지만 스프링캠프에서 워낙 부진했던터라 본인도 결단을 한 듯.
은퇴 기자회견을 한 다음날 3월 22일,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여 시애틀로 가는 전일본공수 NH178편을 통해 출국했고, 이후 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트리플 A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또한 뉴욕 양키스를 비롯한 여러 팀 및 선수, 기자들이 트위터 등 SNS에 이치로의 은퇴를 기념하는 게시물들을 올렸다.
여담으로 CC 사바시아 역시 이치로의 은퇴를 기념하는 트윗을 올렸는데 사실 CC 사바시아는 이치로와 같은 년도에 데뷔해서 같은 년도에 은퇴하는 것이다. 거기다 더 놀라운 것은 같은 AL 리그에서 데뷔해서 은퇴한 것은 물론이고 둘 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성적을 올렸다는 것이다.[50] 다만 이치로 입장에서는 약간 달갑지 않을 수가 있는데 CC 사바시아는 29대 1로 자신의 만장일치 신인왕을 저지했으며[51] 우승반지를 먹을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던 2012년, ALCS에서 크게 털려 양키스가 탈락하는데 일조했다.[52] 거기다 후의 명전 투표에서도 표를 갈라 먹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2019년 9월 14일에는 이치로 데이를 갖고 시애틀 매리너스 역사에 큰 역할을 한 공으로 프랜차이즈 공로상을 수상했으며 홈에서 열리는 3연전 역시 모두 이치로를 기념하며 여러가지 행사가 열린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이치로 데이를 앞두고 그가 세계최고 배팅볼투수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9년 9월 18일에는 '동네 야구' 데뷔를 하기로 결정했다. 정확히는 일본의 사회인야구 중 '풀뿌리 야구'로도 불리는 '쿠사야큐'(草野球)의 팀인 ‘고베 치벤(KOBE CHIBEN)’을 결성하고 감독겸 선수로 활동한다고. 쿠사야큐는 정말 한국의 사회인야구와 같은 비선출들이 하는 동아리 야구 개념이다.
2019년 12월 1일 홋토못토 필드 고베에서 열린 동네야구 데뷔전에서 '투수'로 출전해 131구 16K 완봉승을 기록했다.
또한 2019년에는 국민영예상을 또 거절했다. 4번째 거절. 일본정부에서는 쭉 이치로에게 국민영예상을 주고 싶어 하는데 올해 은퇴를 선언했으니 다음 기회는 5년 후 명예의 전당 입성 때 정도인지라 아쉽게 된 상황.
6. 국가대표팀 경력
6.1.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6 WBC |
2006 WBC에 출전해 8경기 12안타 1홈런 5타점 4도루 타율 0.364 OPS 0.932로 활약하며 일본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6.2.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2009 WBC |
2009 WBC에 출전해 9경기 12안타 0홈런 5타점 1도루 타율 0.273 OPS 0.637로 2006년에 비해 매우 부진했으나 후술할 결승전의 활약으로 일본을 2번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 [53]
2009년 대회 당시에는 내내 부진했었다. 예를 들면 봉중근에게만 9타수 1안타로 매우 부진했다.[54] 그러나 결승전에서 봉중근이 내려간 뒤 불펜 투수들에게 3타수 3안타를 기록했고 특히 연장 10회에 임창용을 상대로 결승 2타점 2루타를 때려내며 일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역대 WBC의 명장면을 꼽을 때, 이 결승타는 아직도 회자될 정도로 명장면으로 손꼽힌다. 당시 결승전 자체가 게임 내용이 박진감이 넘쳤고 워낙 명경기인지라 그 끝을 맺는 결승타를 터트린 이치로는 당연스럽게 히어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결국에는 팀을 두 대회 모두 우승으로 이끌면서, 성공적인 커리어와 업적을 또 하나 쌓은 것임엔 분명하다.
7. 연도별 성적
7.1. NPB
스즈키 이치로의 역대 NP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 | 경기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AR |
1992 | 오릭스 | 40 | 99 | 24 | 5 | 0 | 0 | 9 | 5 | 3 | 3 | 11 | .253 | .276 | .305 | .581 | -0.2 |
1993 | 43 | 67 | 12 | 2 | 0 | 1 | 4 | 3 | 0 | 2 | 7 | .188 | .212 | .266 | .478 | -0.6 | |
1994 | 130 | 616 | 210 | 41 | 5 | 13 | 111 | 54 | 29 | 51 | 53 | .385 | .445 | .549 | .994 | 8.2 | |
1995 | 130 | 613 | 179 | 23 | 4 | 25 | 104 | 80 | 49 | 68 | 52 | .342 | .432 | .544 | .976 | 10.2 | |
1996 | 130 | 611 | 193 | 24 | 4 | 16 | 104 | 84 | 35 | 56 | 57 | .356 | .422 | .504 | .926 | 7.8 | |
1997 | 135 | 607 | 185 | 31 | 4 | 17 | 94 | 91 | 39 | 62 | 36 | .345 | .414 | .519 | .933 | 6.4 | |
1998 | 135 | 558 | 181 | 36 | 3 | 13 | 71 | 79 | 11 | 43 | 35 | .358 | .414 | .518 | .932 | 5.1 | |
1999 | 103 | 468 | 141 | 27 | 2 | 21 | 68 | 80 | 12 | 45 | 46 | .343 | .412 | .572 | .984 | 5.7 | |
2000 | 105 | 459 | 153 | 22 | 1 | 12 | 73 | 73 | 21 | 54 | 36 | .387 | .460 | .539 | .999 | 5.7 | |
NPB 통산 (9시즌) |
951 | 4098 | 1278 | 211 | 23 | 118 | 529 | 628 | 199 | 384 | 333 | .353 | .421 | .522 | .943 | 48.3 |
7.2. MLB
스즈키 이치로의 역대 MLB 기록 | ||||||||||||||||||
<rowcolor=#c4ced4>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2001 | SEA | 157 | 738 | 242 | 34 | 8 | 8 | 127 | 69 | 56 | 30 | 53 | .350 | .381 | .457 | .833 | 6.0 | 7.7 |
2002 | 157 | 728 | 208 | 27 | 8 | 8 | 111 | 51 | 31 | 68 | 62 | .321 | .388 | .425 | .813 | 4.7 | 3.6 | |
2003 | 159 | 725 | 212 | 29 | 8 | 13 | 111 | 62 | 34 | 36 | 69 | .312 | .352 | .436 | .788 | 5.7 | 5.6 | |
2004 | 161 | 762 | 262 | 24 | 5 | 8 | 101 | 60 | 36 | 49 | 63 | .372 | .414 | .455 | .869 | 7.1 | 9.2 | |
2005 | 162 | 739 | 206 | 21 | 12 | 15 | 111 | 68 | 33 | 48 | 66 | .303 | .350 | .436 | .786 | 3.6 | 3.9 | |
2006 | 161 | 752 | 224 | 20 | 9 | 9 | 110 | 49 | 45 | 49 | 71 | .322 | .370 | .416 | .786 | 5.6 | 5.3 | |
2007 | 161 | 736 | 238 | 22 | 7 | 6 | 111 | 68 | 37 | 49 | 77 | .351 | .396 | .431 | .827 | 6.1 | 5.8 | |
2008 | 162 | 749 | 213 | 20 | 7 | 6 | 103 | 42 | 43 | 51 | 65 | .310 | .361 | .386 | .747 | 4.3 | 5.4 | |
2009 | 146 | 678 | 225 | 31 | 4 | 11 | 88 | 46 | 26 | 32 | 71 | .352 | .386 | .465 | .851 | 5.5 | 4.7 | |
2010 | 162 | 732 | 214 | 30 | 3 | 6 | 74 | 43 | 42 | 45 | 86 | .315 | .359 | .394 | .754 | 4.7 | 3.7 | |
2011 | 161 | 721 | 184 | 22 | 3 | 5 | 80 | 47 | 40 | 39 | 69 | .272 | .310 | .335 | .645 | 0.0 | 0.6 | |
<rowcolor=#fff>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2012 | SEA/ NYY | 162 | 663 | 178 | 28 | 6 | 9 | 77 | 55 | 29 | 22 | 61 | .283 | .307 | .390 | .696 | 2.2 | 1.7 |
2013 | NYY | 150 | 555 | 136 | 15 | 3 | 7 | 57 | 35 | 20 | 26 | 63 | .262 | .297 | .342 | .639 | 1.1 | 2.1 |
2014 | 143 | 385 | 102 | 13 | 2 | 1 | 42 | 22 | 15 | 21 | 68 | .284 | .324 | .340 | .664 | 1.1 | 0.9 | |
<rowcolor=#f9423a>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2015 | MIA | 153 | 438 | 91 | 5 | 6 | 1 | 45 | 21 | 11 | 31 | 51 | .229 | .282 | .279 | .561 | -0.8 | -1.1 |
2016 | 143 | 365 | 95 | 15 | 5 | 1 | 22 | 30 | 10 | 30 | 42 | .291 | .354 | .376 | .730 | 1.6 | 1.6 | |
2017 | 136 | 215 | 50 | 6 | 0 | 3 | 20 | 19 | 1 | 17 | 35 | .255 | .318 | .332 | .650 | -0.3 | -0.2 | |
<rowcolor=#c4ced4> 연도 | 팀 | G | PA | H | 2B | 3B | HR | R | RBI | SB | BB | SO | AVG | OBP | SLG | OPS | fWAR | bWAR |
2018 | SEA | 15 | 47 | 9 | 0 | 0 | 0 | 5 | 0 | 0 | 3 | 7 | .205 | .255 | .205 | .460 | -0.6 | -0.5 |
2019 | 2 | 6 | 0 | 0 | 0 | 0 | 0 | 0 | 0 | 1 | 1 | .000 | .167 | .000 | .167 | -0.1 | 0.0 | |
MLB 통산 (19시즌) |
2653 | 10734 | 3089 | 362 | 96 | 117 | 1420 | 780 | 509 | 648 | 1080 | .311 | .355 | .402 | .757 | 57.5 | 60.0 |
[1]
오릭스의 전신
한큐 브레이브스에서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중반까지 팀내 주포로 활약한 선수로 1961년 홈런왕을 수상했으며, 은퇴 후 한큐에서 장기간 코치를 역임하다 팀이 오릭스에 매각된 후엔 프런트로 전직하여 2001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계속해서 원클럽맨으로 일해왔다. 2009년
심부전으로 향년 74세에 별세.
[2]
1973년
도쿄도 출신의 고졸
내야수 유망주로, 입단 당시엔 강타자로써의 포텐을 주목받았으나 프로 입단 후 9년간 단 1안타에 그치면서 결국
오기 아키라 감독의 제안으로 2001년부터
투수로 전향했다. 투수 전향 이후 뒤늦게 재능이 개화하여
중간계투 요원으로 그럭저럭 활약해 줬으나 2006년을 끝으로 리빌딩을 위해 팀내 고참들을 정리한다는 구단 방침에 의해 오릭스에서 방출되었고, 이후
닛폰햄과
야쿠르트를 거쳐 2010년 은퇴했다.
[3]
1969년
가고시마현 출신의 사회인야구 유망주로 1991년
도시대항야구대회에서 소속팀의 준우승을 이끈 것을 주목받아 3순위 지명으로 오릭스에 입단했으나 입단 1년차에 1군에서 3시합 등판, 평균자책점 10.13을 기록한 것 외엔 계속 2군에 머무르다 1995년을 끝으로 방출되었다.
[4]
원래는 나카타, 미와타의 주장에 의해 3순위로 지명될 가능성도 있었으나, 당시 구단 내부에서 "3순위 이하도 즉전력으로 뽑아야 한다"라는 의견이 많았던 데다 주니치가 이치로를 상위지명할 거 같으니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의견까지 나오면서 상위 지명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5순위 이하로 지명될 뻔했다. 그러나 드래프트 직전에 미와타가 "4순위 이내에서 이치로를 지명하지 못하면 무조건 타 구단에 빼앗긴다"라고 강력히 주장했고, 때마침 다른 스카우터들이 오릭스 외 타 구단의 스카우트 정보를 알아본 결과 4순위 이내에 이치로를 미지명할 시
주니치에 뺏긴다는 결론이 나오면서 결국 이치로를 4순위로 지명하게 되었다.
[5]
그러나 미와타는 이후 1998년
아라카키 나기사가 자신을 1위로 강행지명한 오릭스의 지명을 거부한 가운데 구단 측으로부터 어떻게든 아라카키를 설득하라는 강한 압박에 괴로워하다 투신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미와타가 죽은 뒤 이치로는 당시의 인연으로 매년마다 미와타의 묘지에 성묘를 하러 갔다고 한다.
[6]
이쪽도 본래 1순위로
사이토 타카시를 지명했으나, 경합에서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에게 교섭권을 내주면서 대체 1순위로 지명된 것이었다.
[7]
도이 쇼조 감독은 이외에도 오릭스 감독 재임 시절 팀 컬러를 투수진 위주로 바꾸려 하던 과정에서 이치로를 제하더라도
부머 웰즈,
마츠나가 히로미 등등의 몇몇 선수들과도 불화를 일으켜 저 둘을 포함한 선수들이 팀을 떠나게 만드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오릭스 감독 이후 1996~1998년에 요미우리로 돌아와서 코치직을 역임하다 이후 2009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8]
이 시기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기에 고베를 연고로 한 오릭스의 우승은
2013년 월드 시리즈의
보스턴 레드삭스나
2017년 월드 시리즈의
휴스턴 애스트로스 처럼 한 도시가 대재난을 극복한 스토리로서도 주목을 받았다.
[9]
수상 횟수만으로 따지면
오 사다하루나
하라 타츠노리,
쿠도 키미야스 등 이치로보다 이 상을 더 많이 탄 인물들도 있으나 선수 신분으로 2회 이상 이 상을 수상한 이는 이치로 뿐이다.
[10]
어떻게 해도 계속 타격 1위를 유지하자 동기를 잃어버렸다고 인정했다. 첫 주전 출전인 1994년부터 일본리그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2000시즌까지 7년 연속 타격왕. 그것도 2위와 현격한 격차를 보이는 타격왕이었다. 이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동기부여를 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11]
근본적으로는 1, 2군 모두 등번호를 공유해서 영구결번을 계속 제정하면 남은 선수들이 사용할 등번호가 모자르다는 문제점 때문이다.
[12]
정작 그리피는
세이프코 필드의 투수 친화적 규격에 불만을 표하는 등 매리너스 프런트와 불화를 겼다 이치로가 영입되기 전에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로 온 호타준족 중견수
마이크 캐머런이 주전 자리를 먹으며 이치로와 MLB 최고 수비력의 외야 듀오를 결성했다. 이치로와 그리피가 같은 팀에서 뛰는 것은 그리피의 현역 말년인 2009년에야 실현되었다.
[13]
당시 이치로는 "공의 빠르기는 예상했던 정도인데, 볼의 무브먼트가 차원이 다르다"라는 말을 했다. 이는 그 이후 MLB에 진출한
마쓰이 히데키 또한 공감했던 부분이었다.
[14]
당시 포스팅 최고 금액이었다.
[15]
2001 올스타전에서 선발 투수로 나온 랜디 존슨과 대결한 적이 있다. 이때 이치로는 랜디 존슨을 상대로 안타+도루를 성공시켰다.
[16]
많은 사람들이 이치로에게 의문을 품을 때 당시 시애틀 감독 루 피넬라는 이치로에게 굳건한 신뢰를 보였는데, 이치로가 적어도 타율 0.280은 칠 것이라 확신했다.
# 물론 이치로는 0.280은 물론이고 0.350을 기록했다(…).
[17]
이치로의 데뷔 당시
볼티모어 오리올스 감독인 하그로브는 1998년 11월 미국 올스타 팀을 이끌고 일본에서 시범 경기를 가졌는데, 그때 일본의 간판 선수였던 이치로를 처음 보았다. 1998년에 이미 이치로가 MLB에서 뛰기로 결심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는데 당시 일본 출신 타자에겐 큰 결정이었다. 당연히 취재진은 하그로브에게 25살에 이미
퍼시픽 리그 최우수 선수상(MVP)을 세 번 받은 이치로를 보고 받은 인상에 대해 물었다. 하그로브는 솔직하게 "이치로는 주자로서 평균 이상이고, 우익수로서 평균 이상의 어깨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MLB 팀에선 4번째 외야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네요."라고 밝혔다. 물론 이는 1998년 얘기다. 2001년에 이치로는 아메리칸 리그 신인상과 MVP를 석권했다. 하그로브는 자신의 발언을 두고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래서 제가 스카우트가 아닌가 봅니다"라며 웃었다. 이후 하그로브는 시애틀에서 감독을 맡기도 했지만 둘은 잘 어울리지 못했다.
#
[18]
이때 이달의 신인상을 4번 수상했는데(4, 5, 8, 9월), 이달의 신인상을 4번 수상한 건 현재까지
마이크 트라웃,
애런 저지, 이치로밖에 없다.(당시 6월에도 .330을 치는 등 좋은 활약을 펼쳤는데, 평균 5점대를 찍던 조쉬 타워스라는 투수가 갑자기 6월에 1점대를 찍어버려 아쉽게 수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선수들은 모두 MVP 투표 2위 내에 들었다.
[19]
1975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프레드 린 이후에 2번째이다. 하지만 바로 전년의
사사키 가즈히로와 더불어
일본인 선수가 2년 연속 신인왕을 수상하자 NPB에서 뛰다가 온 선수를 과연 신인으로 볼 수 있느냐에 대한 의문이 기자단 사이에 나왔고, 이는 후에
마쓰이 히데키가 신인왕 수상에 실패하는 주 요인이 되었다. 또한 이후
다르빗슈 유,
다나카 마사히로 등의 선수들의 신인왕 투표에서도 불리한 점으로 작용했으며, 그나마 일본에서 뛴 시간이 가장 적은
오타니 쇼헤이가 2018년에야 일본 출신 4번째 신인상을 받았다.
[20]
한편 이때의 기록을 일본에서도 높게 평가해 총리가 주관하는
국민영예상을 주려고 했으나 이치로는 아직 갈 길이 남았다며 거절하였다. 최다 안타를 친 2004년에 또 한 번 주려고 했으니 이것 역시 고사하였다. 현역 생활을 마감한 2019년에 다시 한 번 고사했다.
[21]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이치로가 처음이다.
[22]
참고로 시애틀 측 역시 2년 연속 신인왕을 배출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그 전년 시즌 신인왕은 시애틀의 수호신이었던
사사키 가즈히로로, 같은 팀에서 2년 연속 일본인 신인왕이라는 기록을 써내기도 하였다. 참고로 그 후 이 둘 모두 매리너스 소속으로 같이 2년 연속 올스타 게임에도 같이 출전했다.
[23]
당시에는 지암비가 받아야 한다는 여론이 주였지만 약물로 밝혀진 이후 브렛 분이 받았어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24]
세부지표를 보면 요즘 시대였다면 두자리수 WAR도 충분히 찍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25]
타점은 바라지도 않는다 쳐도 당장 출루+도루수를 생각하면 팀이 평균만 됐어도 리그 득점왕도 노려볼만한 스텟이었지만 팀타선이 너무 답이 없어서...
[26]
사실 이치로는 2001년 시애틀, 2012년 양키스를 제외하면 한 번도 위닝팀에서 뛰어본 적이 없는 수준이라 그냥 커리어 전반적으로 손해가 상당했다.
[27]
실제로, 이치로가
인사이드 파크 홈런 기록을 한 며칠 뒤에 2007 한국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이택근이
인사이드 파크 홈런 기록을 세우게 된다. 하지만,
박노준 해설위원이
인사이드 파크 호텔로 말실수를 하는 사건이 터진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
[28]
지금도 메이저리그에서는 내셔널리그보다 아메리칸리그가 타고투저현상을 보이고 있는게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투수 타석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거기다 하필 약물시대로 리그 평균치가 폭발한 상황이니 세이버 적으로도 상당한 손해를 본 것이다...
[29]
메이저리그 진출 후에는 타율과 출루율에 비해 장타율이 확 떨어진 것이 눈에 보인다. 본인이 컨택을 위해 장타율을 포기했다고 말했었고 대신 도루개수와 안타개수는 일본 시절보다 늘었다.
[30]
이에 1번 타자로서 볼넷을 골라 출루를 최우선시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말이 있기도 했다. 그래도 클래식적 관점에서나 세이버적 관점에서나 일반 단타라도 볼넷보다 값진것이 맞다. 예로 단타라도 2,3루 혹은 엄청나게 발이 빠른 타자라면 1루로부터도 득점시키는 것이 가능하고 송구,포구 실책등 수비 실패로 베이스를 더 진루할 수 있는 변수도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볼넷은 이러한 좋은 변수들을 모두 차단시키며 한 베이스 진루하는게 전부다.
[31]
이를 통해 2007년 풀타임 중견수 시즌에도
골드 글러브 수상에 성공했다.
[32]
물론 찾아보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지구 라이벌
LA 에인절스의 경우
토리 헌터가 스스로 중견수자리를 넘긴 케이스도 있다. 단 본인의 의사가 우선이므로 이치로가 우익수를 원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33]
TBS 아나운서 출신 후쿠시마 유미코로 8살 연상이다. 아직 둘 사이에 애는 없다. 아마 나이가 있어서인지 자식은 앞으로도 없을 듯.
[34]
이를 두고,
마츠모토 히토시는 '
인도인이라도 그렇게 아침부터 카레를 먹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우스갯소리를 날리기도 했다.
[35]
비슷한 예로
웨이드 보그스의 경우 경기 전에 무조건 닭고기를 먹었다고 한다. 그 덕에 보그스의 부인은 닭고기 요리에는 반쯤 전문가가 되어 요리책을 출판할 정도였다고(…). 그런데 웨이드 보그스는 단순히 '비슷한 예' 라고만 하기에는 이런 징크스를 통한 일상 생활의 변수 통제를 거의 80개 가까이 만들어 놓은 선수라서 이치로 보다 훨씬 지독한 경우였다. KBO는 야구선수의 부인에게 있는 경우가 있는데,
박병호의 아내인 이지윤 전 아나운서가 그러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박병호가 먹는 식사에는 무조건 메인요리가 있어야 하며, 일주일 간 그 메인 요리는 다시 식탁에 들여놓지 않는다는 엄격함을 자랑한다고... 그래서 박병호는
이런 아내의 내조를 통해 괴물이 되었다.
[36]
한편 일본 웹상의 팬들은 이치로 하나만 바라보고 마이너 계약을 감수하며 메이저 리그에 도전한
가와사키 무네노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37]
주전 타자 4명의 타율을 보자면 스위셔가 .167, 에이로드가 .120, 그랜더슨이 .100 카노가 .075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38]
특히 DEF의 경우 1.5에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39]
실제로 NYY 중계진은 역대 3번째 프로기록이라고 코멘터리를 달았다.
[40]
타격 방식에 대해 의견이 달라서 충돌했다고 한다.
[41]
2군을 지배하다시피하는 압도적인 타격 성적을 냈다. 최소한 2년차에는 1군 풀타임 정도가 충분히 가능할 수준이었으나 감독이 잘 쓰지 않고 어쩌다가 백업 야수(대타, 대주자, 대수비용)으로 1군 콜업하면서 경기당 한두 타석 나오게 하고 내리는 정도로 기용했기 때문에 당연히 1군에서 적응이나 성장하기 어려웠던 형편이라 좋은 성적을 낼 수 없었다. 결국 감독이 바뀐 3년차에야 1군 풀타임 생활이 시작되었고 바로 200안타를 쳤다.
[42]
특히 수상자인
셰인 빅토리노와의 차이는 작년보다 더 큰 DEF에서는 1.3 UZR에서는 무려 7.3(!)이나 이치로가 더 높았다.
[43]
이런 수비들은 수비 스탯에 반영되지 않는다는점까지 생각해보면 이런 영리한 수비들 제외하고도 그 높은 수비 스탯을 찍고도
골드글러브를 못탄것이 아쉬울 수 밖에 없다.
[44]
당장 저때가 끝내기 상황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만약 정상적으로 수비하려 했다면 주자는 이미 홈에 들어왔을 것이다. 거기다 공이 튈 방향까지 예측한것은 정말 소름끼치는 수준이다. 거기다 구장은 기괴한 구조를 가진
AT&T 파크였고 이치로는 말린스 입단 이전까지 아메리칸 리그에서만 뛰어서 이 구장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45]
영상 마지막에 이치로를 포옹한 사람은
배리 본즈. 2016년 마이애미 말린스의 타격 코치로 있다가 시즌이 끝나고 짤렸다.
[46]
실제로 3000안타, 500도루 등의 마일스톤을 마이애미에 와서 달성하기는 했다. 하지만 뛴 시간이 너무 적기에 영구결번은 힘들다는 시각이다.
[47]
이 날은
키쿠치 유세이의 메이저리그 데뷔일이기도 하다.
[48]
심지어
한신 타이거스 기사를 웬만하면 1면에 싣는 데일리스포츠도 이치로를 1면에 실었다. 데일리스포츠의 응원팀이 아무리 한신이고 전적팀 오릭스가 비인기 팀라지만,
고베시에 우승반지를 가져다 줬고 무엇보다 아시아 최고의 야구선수를 무시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 날마저 1면을 한신으로 실었다가는 전국민이 분노한다
[49]
또한
주니치신문도 당초
주니치 드래곤스의 타카하시 슈헤이를 주니치스포츠 1면에 실었다가 최종판에서 이치로 1면으로 갈아엎었다.
[50]
거기다 등번호가 이치로는
51번, 사바시아는
52번이라는 우연도 있다.
[51]
당시 사바시아에 투표한 기자는 사바시아도 다른 년도 같으면 충분히 신인왕을 수상할만한 우수한 성적을 올렸으며 이치로는 이미 일본 프로에서 뛰었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결국 2년후
마쓰이 히데키가 신인왕 수상에 실패하는 주이유가 된다
[52]
정작 사바시아는 2009년 양키스에 오자마자
마쓰이 히데키의 대활약으로 반지 하나를 확보한 상태였다. 당시 이치로는 나도 반지 하나 먹어보자는 식으로 팀에서 거의 제일 잘치고 있었던 수준이었다(…).
[53]
여담으로 한국의 중계방송에서 다른 일본 선수들, 예를 들어
후쿠도메 고스케는 후쿠도메,
조지마 겐지는 조지마 등 성을 부르는데 비해 스즈키 이치로만 이치로라고 이름을 부르는데, 등록명 자체를 이치로로 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스즈키라는 성이 워낙에 흔하기 때문에
오기 아키라 감독이 특이하게 이름을 등록명으로 하길 권했고 이걸 메이저에서도 그대로 썼다. 물론 이치로라는 이름도 매우 흔하다.
[54]
1라운드 순위 결정전 3타수 무안타, 2라운드 승자조 경기 3타수 무안타, 결승전 3타수 1안타였다.
[55]
땅볼 타구 비율이 높기는 했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정말 땅볼만 쳤다고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이치로의 타격 자체가 컨택에 초점이 맞혀져있으며, mlb리그 기록에서도 내야안타 비율이 다른 선수들에 비해 상당히 높다. 그렇게 수많은 안타를 양산하는 걸로 메이저리그 기록을 세운 타입이다.
[56]
2009년 〈무릎팍도사〉에 나온
허구연이 밝히기를, 당시 이치로는 허구연에게 '봉중근은 스니키(지저분한) 패스트볼이라서 공을 알고도 못 치겠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치로 본인도 한국야구를 상당히 인정하고 있었다는 것. 재미있는 점은 봉중근이 가장 존경하는 선수가 바로 이치로이며, 실제로 이치로의 등번호인 51번을 달고 뛰었다.
[57]
봉중근은 원래 타자였으나 투구하는 모습을 보고 투수로 전향하였다. 그 때문에 국제대회에서 구르고 팀에서도 자주 굴렀지만 원래 타자였던 탓에 뒤늦게 과부하가 온 케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