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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22:40:28

송양지인

1. 개요2. 사건 전개
2.1. 배경2.2. 진행2.3. 후일담
3. 의미4. 고사에 대한 전술적, 문화적 논의5. 여담6. 비슷한 사례들

고사성어
나라이름 송 도울 양 어조사 지 어질 인

1. 개요

고사성어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 송나라 양공의 어짊'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의미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대의명분 혹은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다가 타격을 받는다는 것이다.

2. 사건 전개

2.1. 배경

춘추 시대, 주(周)나라 양왕(襄王) 2년(B.C.650), 송(宋)나라 환공(桓公)은 병석에 누웠다. 태자 자보(玆父)는 인덕(仁德)이 있는 서형(庶兄) 목이(目夷)[1]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했으나 목이는 사양하였다. 환공이 죽은 뒤 자보가 공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바로 송양공(宋襄公)이다. 양공은 이복형인 목이를 재상으로 삼았다.

양공 재위 7년(B.C.643), 패자로서 군림하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승하했다.

이때, 송나라에는 운석이 떨어졌는데, 양공은 패자가 될 징조라고 좋게 보았고 야심을 품었다. 제환공이 세상을 떠날 무렵 제나라는 환공의 아들들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탓에 매우 어지러웠다. 양공은 제나라로 출병하여 환공의 아들 공자 소(昭)를 도와 제효공(齊孝公)으로 세우고 제나라를 아군으로 삼았다.

4년 후에는 송나라, 제나라, 초나라의 맹주(盟主)가 되었다. 목이는 '작은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것은 화근'이라며 걱정했다.

이듬해 여름, 양공은 자신을 무시하고 초나라와 통한 정(鄭)나라를 쳤다. 재상 목이가 결사반대했음에도 양공은 기어코 전쟁을 일으켰고, 그해 가을에 초나라는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으며, 결국 송나라는 초나라와 격돌하게 된다.

2.2. 진행

군대를 이끌고 출진한 양공은 초성왕의 초나라 군사를 홍수(泓水:하남성 내)에서 요격했다. 이때 초나라는 군세가 많았고, 송나라의 군세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마침 송나라 군대가 먼저 도착하여 강을 건너는 초나라 군대를 요격할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어떤 군대라도 도하하는 도중에는 병사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엄폐를 할 수 없으므로 매우 무력해지기 때문에 이때 기습하면 송나라가 매우 유리하게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양공은 초나라 군대 전군이 다 강을 건널 때까지 공격하지 않았다. 공자 목이는 강을 건너는 동안 적을 기습하면 이길 수 있다고 양공에게 진언했지만 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렇게 초나라 군대는 무사히 강을 건널 수 있었지만, 이제 막 상륙한 참이라 아직 진형을 갖추지 못했다. 진형을 갖추지 못한 군대는 훨씬 약하므로 이때를 노려서 공격하면 승산이 충분히 있었다. 재상 목이가 참다못해 양공에게 진언했다. "적은 많고 아군은 적습니다. 적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쳐야 하옵니다."

하지만 양공은 듣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군자는 어떤 경우든 남의 약점을 노리는 비겁한 짓은 해선 안 되오."

결국에는 양공은 초나라 군사가 전열을 다 가다듬고 진을 친 다음에야 공격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송나라 군대는 숫자가 적었는데 정정당당하게 싸웠으니 정정당당하게 졌다. 양공 역시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송나라에는 양공을 비난하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러자, 양공은 "군자는 사람이 어려울 때를 노리는 게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목이는 "전쟁은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승리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전시의 법도는) 평시의 법도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적에게 예의를 다 차려줄 거라면) 차라리 싸우기 전에 항복해 주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진문공도 떠돌던 시절에 바로 양공이 제위하던 송나라에 머물렀는데 전쟁에 패해 어렵게된 송나라 사정과 양공에 대한 이야기를 듣곤 어이없어하며 이 나라에 머물러봐야 가망은 없다며 주저없이 다른 나라로 가버렸다. 진문공은 춘추오패에 들어갈 정도로 유능하고 전쟁에서 지휘하여 이기던 명군인지라 송양지인 일화를 듣고 뭔 군주가 이리도 바보란 말이냐? 어이없었을 것이다.

2.3. 후일담

양공 자신도 이 전투에서 넓적다리에 화살을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재위 14년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고, 패자가 되려는 양공의 꿈은 어이없이 끝나버렸다.

양공의 후사는 그 아들 송성공이 이었다. 그나마 목이의 유능한 섭정으로 피해 복구를 하면서 나라를 유지하긴 했다.

패자의 야망을 불태우기는 했으나 결과가 이따위로 끝났기 때문에 양공을 춘추오패로 놓는 사례는 같은 인덕에 미친 유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없다. 패배자로 놓으면 놓았지...

3. 의미

송양지인은 이렇게 쓸데없이 예의를 차린 탓에 온갖 헛된 짓을 벌이고, 그러다가 정작 실질을 망쳐놓아 낭패를 본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자기 몸을 망치는 어리석은 자비심을 비판할 때에도 적절하게 쓰이는 격언이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 예수가 "너희들은 돼지한테 진주를 던져주지 마라. 돼지가 진주를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들한테 달려들까 두렵다."( 마태오의 복음서 7:6)라고 말한 바와 뜻이 통한다.

한편 이 격언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일각에서는 군주론에 나오는 메세지와 비슷하게 "개인이 도덕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좋으나, 국가가 도덕적인 존재가 되려하는 것은 위험하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비슷한 예로 일본의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도 그의 소설인 아르슬란 전기에서 " 정의로운 사람이 이긴다는 생각은 힘이 센 사람이 이긴다는 생각보다 훨씬 위험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4. 고사에 대한 전술적, 문화적 논의

양공이 이렇게 어리석게 행동한 것은, 춘추 전국 시대 이전의 전술과 문화대로 행동하다가 춘추 시대의 전쟁이 본격화되는 환경에 걸맞지 않게 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우선 춘추 시대 초기까지 전쟁은 전차가 중심이 되었고[2], 때문에 전차 중심의 송나라군은 지형을 많이 가리는 전차의 특성상[3] 강가에서 전투를 벌일 수가 없어서 초나라군이 평지에 오기까지 기다렸고 추측하기도 한다. 반대로 초나라는 환경적 특성 때문에[4] 전차보다 보병 중심의 군대를 양성했고 양공과의 전투에서도 강을 도하했다는 점에서 보병 중심 편제가 어느 정도 확인되는 부분이다. 그리고 당시는 전차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전쟁의 중심이 전차에서 보병으로 옮겨가는 시점이었고, 송양공은 이 흐름을 타지 못해 구식 전차 전술을 고집하다가 큰 패배를 당했다는 해석이 있다

혹은 문화적인 해석을 하기도 하는데 원래 춘추 시대 이전의 전쟁은 일종의 의례적인 행동이었고 피해보다 명분적 의례적으로 승패가 갈리는 상황에서 양공이 의례적 절차를 위해 이런 삽질을 해줬다는 해석도 있다. 송(宋)은 상나라의 직계 후손으로 과거의 문화가 짙게 남은 곳이라 더욱 이러한 사례에 민감했다는 것이다. "전쟁은 속임수고 전쟁은 속임수로 성립하는 것이다" 라고 대놓고 말했던 손자가 등장하기 이전인 춘추 시대 말 이전의 전쟁은 귀족적 전통 위에서 수행되는 것이 사실상 관례였다. 귀족적 전통이란 선전 포고를 하고 약속된 장소와 시간에서 정정당당히 정면 승부를 벌이는 일종의 품위를 뜻했고, 그렇기에 그때는 기만술, 유인책, 속임수 같은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5] 고대 중국의 역사서인 <<좌전>>에는 "모두 진을 갖추고 싸우는 것을 전쟁이라 한다"고 정의했으며, 또한 "견고하게 준비하고 갖출 것을 다 갖춘 뒤에 힘과 기백으로 승부를 기른다" 라고 서술하고 있어 전쟁의 인식론이 춘추 시대 말 이전에는 어떠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6]

실제로 양공은 마냥 인자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춘추좌씨전에 따르면 양공은 인신 공양을 하는 제사를 벌였다고 한다. 다만 인신 공양은 송나라가 상나라의 직계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상나라부터 인신 공양이 아즈텍 제국만큼은 아니지만 규모가 매우 거대해서 주변국들에게 멸망했다는 설이 있을 정도의 동네라서 안 좋은 전통까지 그대로 이어받았은 것이기도 하다. 춘추 시대 초기에는 순장도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고, 포로나 죄수를 희생물로 삼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게다가 당시 기준으로 2천 년이 지나서 쓰여진 명나라 시대의(!) 나관중 삼국지연의에도 사람을 목 베어 군신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7] 이런 의식은 생각보다 오래 남았다. 그 순장도 무려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고(...)[8] 그러나 양공의 경우는 사실 인신 공양 제사와는 좀 다른 경우로, 양공이 가장 먼저 회맹을 주최하면서, 우선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불러 규합할 생각이었으나, 그 작은 나라들마저 송나라를 무시해서 지각한 제후들이 많았다. 이에 분노한 양공은 엄정함을 보이겠다며 제일 늦게 도착한 증나라의 제후를 삶아버렸다.[9] 비록 백여 년 후 손무가 왕의 애첩으로 같은 짓을 벌여 명성을 얻지만, 양공의 경우는 너무 성급했는 데다가 상대[10]가 안 좋았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도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목이는 이에 대해서 "가축도 제사에 따라서 크기를 달리하여 희생 제물로 삼는데 사람을 희생물로 썼으니 양공은 패자가 되기는커녕 제명에 죽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아무리 주나라 춘추전국시대에도 인신 공양 식인 풍습이 이어졌다지만 이건 너무했던 것. 이런 면에서는 진짜 과거 예법을 지키기 위해서 이런 삽질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5. 여담

만일 재상 목이가 이 전투에서 송나라 군대를 지휘했더라면 춘추오패에 목이의 이름이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송나라에서 목이는 예전부터 무능하다는 평을 받던 양공보다 훨씬 재능이 있었기에 ' 저 바보 같은 양공을 제거하고 당신이 공위를 이어야 한다'는 말을 많은 대신들에게 들어 왔고, 양공이 쓰잘데없는 전쟁을 벌이는 것을 막기 위하여 애간장을 태워야 했다. 비록 서자라서 계승권이 약하다는 점이 있었으나 양공이 후에 나라를 말아먹은 것을 보면 대신들이 얼마나 애간장 태우면서 재상 목이가 공위를 이어야 했다고 안타까워했을지 알만하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후대 역사가들은 설령 이 전투를 목이가 지휘했다 하더라도 이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심지어 송나라가 이겼다 하더라도 양공의 입지가 결정적으로 바뀌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양공이 춘추오패의 후보자에나마 이름을 올렸던 것은 송의 군사력 때문이 아니라 양공의 외교 능력 덕분이었다. 아무리 전쟁을 잘해봐야 군사력으로 초나라를 누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목이가 양공 대신 군주가 되었다면 패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이 역시 설득력이 없다.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송나라가 패자가 될 기회라도 엿볼 수 있었던 것은 양공이라는 인물의 특수성(...)에 있었지 송나라의 국력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목이가 군주였다면 패자가 될 기회 자체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거니와, 설령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목이의 성향상 패자가 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 문단에서 목이가 '저 바보 같은 양공을 제거하고 당신이 공위를 이어야 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라는 주장은 출처가 필요할 듯하다.

사실 이 전투가 있기 2년 전 초나라가 주최한 회맹에 참석한 양공이 억류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억류된 양공을 대신하여 송나라를 지키던 인재가 바로 목이였다. 더군다나 목이가 초나라의 함정이니 가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양공이 이 회맹에 참석하였다가 결국 이 사달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이 회맹은 송과 초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 군주들이 비무장으로 참석하는 행사였기 때문에, 맹주의 권위를 유지하고 싶었던 양공으로서는 '설마 전통적으로 지켜온 회맹의 규약을 깨기야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참석한 듯하다. 하지만, 초나라는 그 전통을 깨끗이 무시하고 양공을 억류해 버린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초나라가 전통을 무시하는 계기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다름 아닌 양공이었다. 이전 회맹에서 '주나라로부터 받은 작위가 높은 군주가 맹주가 되는 게 전통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송나라보다 국력이 강한 제나라와 초나라 군주 대신 맹주 자리를 차지한 것이 바로 양공 본인이었던 것. 양공의 도움으로 즉위한 제나라 군주는 이 '전통'을 쿨하게 지지했지만, 초나라 군주는 양공과 '그놈의 전통'에 이를 갈게 되었고,[11] 결국 후대에 와서 아예 작위를 무시하고 '왕'위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12]
다만 위 설명은 초나라가 왕이라는 명칭을 좀 더 독립적인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고, 위 사건이 비로소 칭왕 사유가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당시의 초나라 국군 성왕의 할아버지 무왕 때, 즉 위 사건으로부터 반세기도 더 전인 기원전 8세기 말에 이미 칭왕은 했기 때문.[13]

여하튼 초나라는 군주가 포로로 잡혔으니 송은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양공 대신 송나라를 지키게 된 목이는 춘추 전국 시대 최강국이던 초나라군의 공격을 여러 번 물리칠 정도로 군사적 안목도 상당했다. 이에 당황한 초나라에선 양공을 죽일 테니 항복하라는 요구를 했으나 송나라에선 "양공을 죽일 테면 죽여라. 우린 이미 목이를 새로운 군주로 세웠음."이라고 거부한다. 초나라에선 이젠 양공을 죽여도 아무런 이득도 없는 데다 아무래도 공식 회맹에 참석한 군주를 명분 없이 죽이는 것은 무리수라고 판단했는지, 결국 다른 군주들의 중재를 통해 양공을 풀어줬다. 이후 목이가 송나라의 군주로 등극한 것을 안 양공은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려 했으나, 목이는 양공을 다시 모셔와 군주직을 돌려줬다.

양공도 이에 감격하여 목이에게 일절 책임을 묻거나 견제를 하지도 않았으나, 결국 그렇게 양공에게 나라를 돌려준 결과가 '송양지인'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 대패로 인해 전국 시대 중위권 국력을 자랑하던 송나라는[14] 전쟁 피해 복구 및 국가 재건 이외의 일에 정신을 돌릴 여력이 없어졌다. 따라서 이때 송나라를 운영하던 목이는 그냥 재능 있는 중소 공국 재상으로만 기억되며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견해 또한 고대 중국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무시한 설득력 없는 주장으로 볼 수 있다. 군주가 천하의 암군이라도 신하가 그 군주에게 충성을 바쳐야 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군주제 국가에서는 언제나 어려운 질문이며 정답을 내리기 힘들다. 최소한 목이는 자신의 주군이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에 그에 영합하지도 않았고, 비록 받아들여지지는 않더라도 언제나 올바른 충언을 했다. 이미 결과가 나온 이후에 실패를 비웃는 것은 범용한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이익을 버려가며 절의를 지키고 올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따라서 위 견해에서 서술하는 논리의 결을 그대로 따라가자면 제갈량, 문천상과 같은 만고의 충신들도 '주군을 잘못 선택해 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멍청이'라는 평가를 면하기 힘들 것이다.

송양지인이나 수주대토 같은 고사는 사실 상나라(은나라)의 후예인 송나라에 대한 당대의 비하적 인식도 담겨 있다고 해석되고 있다. 비슷하게 망한 왕조인 하나라의 후예인 기나라 기우 같은 우스꽝스러운 고사성어가 전해지고 있다.[15]

송양지인의 해석을 하면서 이를 오해해서 정공법과 같이 병법/교범에 충실한 전략 전술을 폄하하는 경우도 있다. 교범에 따라 승리를 위한 원칙을 지키는 것과, 쓸데없이 정정당당하게 싸운다며 자비를 베푸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오히려 양공은 '도강하는 적을 먼저 공격한다'라는 병법에도 뻔히 나와 있는 방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비판을 받는 것이다.

6. 비슷한 사례들



[1] 자는 자어(子魚). 사마를 역임해서 사마자어라고도 한다. 중국 어씨의 시조 중 하나. [2] 실제로 손무가 군사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전차의 수를 기준점으로 삼고, 당대의 강대국의 표현을 '만승지국', 즉 1만 대의 전차가 있는 나라라고 칭할 정도로 춘추 시대 전쟁의 핵심은 전차였다. [3] 비슷한 전술을 쓰던 아케메네스 왕조 다리우스 3세 가우가멜라 전투 때 전차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평지의 땅을 다시 다졌다는 기록이 있다. [4] 양쯔강의 밀림에서는 전차를 끌 말을 기르기가 매우 힘들다. [5] 애초에 당시 군대의 주력이었던 고대 전차는 특성상 이런 복잡한 술수를 쓰기엔 기동력이나 지형 적응성, 가성비 등이 모두 부족하다. [6] 내용 출처: 손자병법(임건순 저) [7] 대표적으로 적벽대전 직전 오군이 채화의 목을 베어 제사에 썼다. [8] 그러나 이는 중도에 끊어졌던 것이 거란, 여진, 몽골 등 북방 민족들과의 문화가 뒤섞이며 일시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그래서 명나라도 청나라도 초기에만 있었지 이후에는 없어졌다. [9] 일설에는 죽이지는 않고 그냥 두들겨 패서 흘린 피만 바쳤다고 한다. [10] 엄밀히 손무는 군율의 엄격함을 강조하기 위해 했던 행위였고 당시 군주인 합려가 애첩들을 손무의 부하 신분으로 무장시켜서 배속시킨 상태였다. 하지만 양공은 국력 자체가 객관적으로 열국 중 강국 반열에 들지 못한 송나라 군주 신분으로 연합체를 만들어 맹주 역할을 할 야심을 갖고서도 본인에 대한 지지 표명이 필수적인 구성원들 중 하나라 어떻게든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군소 국가의 군주가 상대였다. [11] 다만 송양공이 그 전통을 악용하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어쨌든 주나라와 연관된 만큼 아주 무시할 거리는 안 되었다. 후일 초장왕 시기에 초나라가 은근히 주나라를 멸하고 주나라가 가졌던 자리를 차지할 야심을 보이자 주나라에서 "아무리 주나라가 쇠락했다고 한들 너네들이 대체할 수 있을 것 같냐"의 논조의 대답을 보였다. 실제로도 송양공 시절의 전인 제환공의 사례에서 보듯 주나라의 힘이 약해지긴 했어도 아직은 제후들이 좋든 싫든 주나라를 따르고 있었기에 초나라가 주나라를 대체 운운은 될 수도 없었고 또 그만큼 주나라를 존중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당연히 작위에 따른 전통도 무시할 수 없는 건 덤. [12] 그리고 애초 송양공은 회맹의 룰을 운운할 자격도 못 되었다. 저 사건 몇 달 전에 송양공이 주최한 회맹이 있었는데 이 자리에 평소 송양공을 영 미덥지 못하게 보던 증나라 군주가 늦게 도착하자 송양공은 그를 삶아 죽였다. 억류도 아닌 팽형에 처한 이 처사와 비교해 보면 초나라의 행위는 귀여운 수준. 더군다나 송양공이 주최한 회맹은 타국 군주들도 참여했다. [13] 칭왕에 불구하고 주나라의 종주국 지위는 인정하고 있었다. 후삼국 시대 왕건 견훤이 모두 칭왕은 하였으되 서로 간의 국서에서 신라의 명목상 우위를 인정하고 있었던 점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14] 다만 어디까지나 중위권은 중위권일 뿐이었고 주변국이 워낙 강력한 제나라, 초나라 등이었기에 국력에 비해 딱히 대단한 신세는 아니었다. [15] 참고로 중원으로부터 오랑캐 취급 받은 초나라도 각주구검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16] 유우와 공손찬의 케이스는 다른데, 송양공은 적의 병사에게 인자했다는 점과 유우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인자했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이가 있다. 기존 버전에서처럼 현대인의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 관점에서도 유우와 송양공은 평가가 달랐다. 송양공은 공자처럼 높이 평가하는 소수 의견도 있긴 했지만 저 행위는 기본적으로 '송양지인'이란 사자성어가 생겨날 정도로 어리석은 행위의 대명사로 통했다. 반면 유우의 저 행위를 어리석게 묘사한 당대 평가는 없었다. (정조는 시대가 천 년 넘게 차이 나고 다른 국가 사람이다.) 물론 유우 역시 칼을 들고 일어선 마당이니 잔혹함은 따를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존재하긴 한다 이 각주의 포인트는 적병에게 인자한 것과 백성에게 인자한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긴 하지만, 애초에 유우는 칼을 들고 일어선 사람이 아니다. 삼국지연의나 게임의 영향으로 유우가 유비처럼 '명망 있는 군벌'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유우는 조정이 임명한 대사마이자 유주목으로서 유주를 다스리고 있었다. 그것도 조조처럼 황제를 압박해 얻어낸 벼슬이 아니라 오히려 당대 힘있는 세력들이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을 거절하고 힘도 없는 조정에 충성을 다하던 충신이었다. 유우와 공손찬의 충돌은 군벌끼리 싸움이 아니라, 유우의 부하였던 공손찬이 유우의 명에 불복하고 제멋대로 원소를 공격하며 노략질을 통해 강제 징발을 하자 갈등이 생긴 것이다. 즉 상관이자 유주의 적법한 지배자로서 반란 세력인 공손찬을 진압하려고 한 것이지 무슨 유우가 거병을 하고 세력을 넓히려고 든 게 아니다. 애초에 유우가 공손찬을 응징하려고 한 것은 공손찬이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기 때문인데, 공손찬 하나 잡자고 백성들을 도륙할 리가 없다. 괜히 "공손찬의 피만 흘려야 한다"고 한 게 아니다. [17] 둘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송양공의 인의로 실질적인 득을 본 자는 적국인 초나라 정도밖에 없지만, 진목공의 인의로 실질적인 득을 본 사람들은 진목공의 신하들과 백성이었다. [18] 이 전투를 계기로 헝가리는 삼분할되어 버리기 때문. 이는 헝가리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오스트리아와 오스만의 지배를 받는 계기가 된다. 뻘짓 한 방으로 후손들을 두고두고 고생시킨 대삽질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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