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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대한민국/문제점 및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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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파벌싸움
1.1.1. 조계종1.1.2. 태고종
1.2. 훈민정음 불교 관여설1.3. 호국불교에 대한 비판과 의문
1.3.1. 반론
1.4. 황우석 사건 당시 전방위적인 황우석 옹호와 김수환 추기경 모함1.5.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 사건1.6. 공립 합창단과 갈등1.7. 기타 현대 불교의 사건사고
2.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불교의 문제점 및 비판을 담은 문서.

1.1. 파벌싸움

1.1.1. 조계종




한국 조계종의 본사인 조계사는 과거 조계종 내 분규가 일어날 때마다 투기장으로 전락한 흑역사가 존재한다. 승려 땡중들이 대웅전 기왓장을 뽑아다 던지고 유리조각을 수리검처럼 날리는 일대 활극(...)이 경내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조계사가 조계종의 본산이며 교구들의 통합회의가 열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는 고질적인 파벌 문제인데, 그 원인은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한국 불교의 25교구본사제는 일제 사찰령에 의한 31본산제로부터 유래한다. 31본산제는 본래 일제의 행정부가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제도였다. 이 때문에 해방 후 일제의 잔채청산과 자주교단을 설립하고자 한국불교는 31본산 제도를 폐지하고, 각 도에 교무원을 두는 교무제 실시를 결의했지만, 박정희에 의해 5.16이 발생하고 이후 1962년 통합종단이 발족하면서 다시 도별 교무제를 폐지하고 해방 전 본산제를 부활시켰다. 그것이 오늘날 25교구본사제도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절들은 이제 본사와 말사로 묶여 파벌이 되었고, 파벌 싸움과 비효율적인 교구운영과 의사결정제도가 겹쳐 한국 불교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

일단은 1999년을 마지막으로 대규모 싸움은 벌어지지 않지만 간간히 물리적 충돌이 벌어진다. 게다가 불교계 신문 광고란마다 주지 자리나 임원 자리를 놓고 선전광고를 띄우며 여론싸움을 한다.

1.1.2. 태고종

태고종 총무원 규정부 소환에 '조폭' 운운 셔터 내린 편백운
[이슈in] 둘로 나뉜 편백운스님-호명스님 집행부, 무슨 일 있었길래?
태고종도 파벌 싸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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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훈민정음 불교 관여설

이 주장은 현재 한국 최대 종단인 대한불교 조계종의 정식 인가를 받은 서적에도 실려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에서 펴낸 '한국불교사-조계종사를 중심으로'라는 책(2011년 2월 28일 1판 1쇄본 기준)에 실려있다. 대략 구성을 보면 이렇다.


신미대사의 한글 창제를 주장하는 법회. 2014년 10월 4일 정각원 토요법회. 2014년 10월 4일 조계종 정각원 토요법회다.

자세한 내용은 이쪽에서 확인, 물론 신미대사가 불경 언해에 깊숙히 관련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왕실에서 불경을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인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한글본 불경의 간행기에서 빠짐없이 신미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확고한 사실이다. 다만 훈민정음이 배우기 쉽다고 하더라도 불경에서 사용하는 각종 불교 용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과정은 신미가 집현전 학자만큼이나 훈민정음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예 불교계에서 훈민정음 창제 자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건 분명히 엄청난 논리 비약이다. 물론 한국 사학계에서도 환빠들의 주장과는 별개로 한국에 고유문자 자체는 있었다는 주장도 있고, 조선시대 실학자인 신경준도 저서인 '훈민정음운해'에서 한글 창제 이전에도 민간에서 쓰던 속용문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으나 훈민정음 창제 시 이를 참고했다거나 가림토의 원형이라는 주장은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속용문자는 제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쓰기 불편하다고 기록했다. 이 외에 1910년대까지 5진법에 기초한 결승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지만, 결승문자는 소수의 관념 이상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이두의 경우 사실상 중국과는 다른 독창적인 문자 기록법이긴 하지만.

불교 서적에 쓰였던 각필문자가 영향을 끼쳤다는 설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세종이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각필문자의 형태가 자형모양에 영감을 줄 수는 있지만 창제원리가 이미 상세히 기록된 훈민정음 해례본이 있는 상황에서 특정한 문자가 기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각필기원설, 각필기원 반박)

불교 측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 해례본의 공식 기록을 부정하거나 조작되었다면서 계속해서 정황상의 근거로 신미창제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정황상의 근거가 말이 안 된다.

불교 측에서는 숭유억불을 기조로 한 사대부들의 반발 때문에 세종대왕 훈민정음에 대한 승려들의 공을 지우고, 문종이 "세종이 신미를 안 것을 훈민정음 창제 3년 뒤"라고 인정하는 등 기록을 조작했다는 주장하지만, 세종과 문종 대의 왕권을 생각하면 일리가 없다. 세종은 한반도 왕조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고, 문종도 (나중에 3년상조차 다 못 치르고 2년 만에 붕어해서 그렇지) 오랜 대리청정으로 세종의 왕권을 그대로 물려받아 천하의 수양대군도 몸을 사릴 정도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아무리 숭유억불 기조가 강해도 이런 막강한 왕권을 가진 왕들이 사대부의 눈치를 보느라 역사 조작을 할 필요가 없다. 당장 왕권이 하락한 후대의 명종 때도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발에도 승과를 부활시키고[첨언],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병들의 공로가 엄연히 실록에 남아있다. 왕권이 약해지고, (이 성리학 서원으로 교체되는 등) 불교에 대한 차별이 훨씬 심한 후대에도 왕실에서 불교를 두둔하는 것을 막지 못하는 데, 세종 때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에 후대의 역사조작을 주장하는 측도 있는데 이도 말이 안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당장 왕이라도 함부로 못 보고, 왕이라도 함부로 수정할 수 없다. 실록 편찬 갖고 피바람 일으켰다가는 왕이라도 이런 꼴 난다. 그런데 일개 사대부가 이를 조작한다? 당장 다른 사대부에게 탄핵을 받아 귀양 혹은 처형 당할 일이다. 그리고 만약 조작을 했다면 신미대사라는 인물을 철저히 묻어버리지 실록에 남겨둘 리가 없다.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은 유실을 우려해서 백업의 예시로 들 정도로 여러 복사본을 만들어 보관했다. 만약 한 곳에서 몰래 조작하더라도, 다른 곳에 있는 조선왕조실록 판본과의 비교로 조작이 드러나야 한다.

신미대사 훈민정음으로 초기 불교 저서들을 저술할 수 있다는 이유로 신미가 훈민정음 창제에 관여할 정도로 훈민정음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하는데, 훈민정음과 한글은 원래부터 배우기 쉽게 만들어졌다. 당장 훈민정음에서 세종대왕이 사람들이 쉽게 배울 수 있는 글자로서 만들었다고 써 있다. 신미가 그냥 훈민정음을 배웠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불교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기록은 사찰 기록에도 없다. 아무리 숭유억불이라도 불교 측에서 자체적으로 하는 기록까지 일일이 감시할 수는 없는데, 당대에나 후대에나 승려들이 훈민정츰 창제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없다. 원각선종석보를 들고 오는 자들도 있는데, 원각선종석보 그 자체가 가진 문제[5] 등을 제외하더라고, 원각선종석보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렇게 중요한 서적이 있다면 실록이나 다른 불교 저서에 그 이름이라도 남아있어야 하는데, 원각선종석보는 그냥 생뚱맞게 나타난 위서이다.[6]

그리고 불교 측의 주장이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 양반들이 훈민정음을 업신여겼으니 양반으로 가득한 집현전에서 훈민정음을 만들었을 리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훈민정음을 만든 공로를 가로채고자 역사를 조작했다고도 주장하고 있다.[7] 즉 양반들은 업신여기는 훈민정음 창제의 공로를 집착해서 가로챘다고 주장하고 있다.[8][9]

이렇게 이미 반박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지만 불교계에서는 전혀 포기하지 않고, 속리산에 신미한글테마공원을 조성하고[10]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를 만들어 한글의 신미 창제설을 유포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 영화는 감독이 스스로 불교계로부터 물질적 지원을 받아 만들었음을 시인했고, 제작 과정에도 불교계 인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1.3. 호국불교에 대한 비판과 의문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戰鬪活聚落主來詣佛所, 恭敬問訊, 問訊已, 退坐一面, 白佛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세존이 왕사성의 가란다죽원에 계셨다. 그 때 전사 마을의 촌장이 세존이 계신 곳으로 찾아가서 공손히 문안드렸다. 문안을 드리고 나서 한쪽에 물러나 앉아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瞿曇! 我聞古昔戰鬪活耆年宿士作是言 "若戰鬪活, 身被重鎧, 手執利器, 將士先鋒, 堪能方便摧伏怨敵, 緣此業報, 生箭降伏天" 於瞿曇法中, 其義云何?
구담이시여, 저는 오래 전에 어떤 늙고 덕 있는 전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만일 전사이라면 몸에 갑옷을 껴입고 손에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장사(將士)가 되어 선봉에 서서, 수단과 방편을 다해 원수인 적을 잘 무찌르면 그는 이 업보(業報)가 연(緣)이 되어 전항복천(箭降伏天)에 태어난다.' 이런 이치에 대하여 구담의 법에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佛告戰鬪活, 且止莫問此義.
세존은 전사에게 말씀하셨다. 그만두어라. 그 이치는 묻지 말라.

如是再三問,亦再三止之,猶問不已. 佛告聚落主
이렇게 2번 3번 묻자, 부처님께서도 2번 3번 그만두게 하셨는데도 오히려 질문을 그만두지 않았다. 세존이 촌장에게 말했다.

我今問汝, 隨汝意答. 聚落主! 於意云何? 若戰鬪活, 身被甲冑, 為戰士先鋒, 堪能方便摧伏怨敵, 此人豈不先起傷害之心, 欲攝縛枷鏁, 斫刺殺害於彼耶?
내가 지금 그대에게 물을 것이니 그대는 마음대로 대답하라. 촌장이여! 그대 생각에는 어떠한가? 만일 전사가 몸에 갑옷을 입고 전사의 선봉이 되어, 수단과 방편을 다하여 원수인 적을 잘 무찌르고자 한다면, 그 사람이 어찌 상해(傷害)하려는 마음을 먼저 일으켜, 저들을 결박하고 칼을 씌워 찔러 죽이려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為戰鬪活, 有三種惡邪, 若身若口若意, 以此三種惡邪因緣, 身壞命終, 得生善趣箭降伏天者, 無有是處?
싸움을 하게 되면 3가지 악을 짓게 되나니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것이다. 이러한 3가지 악한 인연 때문에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 전항복천과 같은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런 이치가 없느니라.

若古昔戰鬪活耆年宿士, 作如是見, 作如是說, 若諸戰鬪活, 身被甲冑, 手執利器, 命敵先登, 堪能方便摧伏怨敵, 以是因緣, 生箭降伏天者, 是則邪見。邪見之人,應生二處,若地獄趣、若畜生趣
.만일 옛날의 늙고 덕 있는 전사가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만일 전사들이 몸에 갑옷을 입고 손에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적을 향해 선봉에 서서, 수단과 방편을 다하여 원수인 적을 잘 무찌르면, 그 사람은 그 인연 때문에 전항복천에 태어난다'고 그러한 말을 하였다면, 그것은 삿된 견해이니, 이러한 삿된 견해를 가진 사람은 틀림없이 지옥이나 축생, 이 2곳에 태어날 것이다.

ㅡ 잡아함 32권 908 전투활경(戰鬪活經)

한국은 과거 잦은 외침을 당하고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역사적 배경 탓에, 나라를 지키려고 싸우는 호국의 행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비난을 잘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국가와 민족을 지키려고 목숨을 걸고 싸운 그 행위 자체는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가 없지만, 문제는 이게 세속적인 논리에 비추어 볼 때만 정당성이 있을 뿐이고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도의 가장 기본적인 계율인 5계에서 불살계를 정면으로 어긴 행위가 맞다. 한 종교에 있어서 기본 교리를 어긴 행위를 벌이고 그 위반 행위에 대해 교리가 아닌 세속적 논리를 적용해 방어한다는 것은 그 종교의 정당성이 흔들리는 문제다. 교리를 위반 해놓고 '그 때는 어쩔 수 없었다.', '나라의 위기였다.'며 세속적인 논리를 적용해서 방어하면 해당 종교의 교리보다 세속적 논리를 더 우선시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 종교의 존속성이 흔들리는 문제다.

사람들을 교화하고 인도할 종교의 교리가 세속적 논리와 다를 바 없다면 종교로써 존속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상술된 세속적 논리를 통해 불교의 호국행위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불가 승려들의 해석이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 불가의 입장에서 해석한게 '불살계는 어겼으나 대업, 즉 업을 대신 짊어진 행위였다.'는게 호국불교의 승병 활동에서 벌어진 살인에 대한 해석이다. 그런데 석가모니도 언급하기 싫어할 정도로 괴롭고 슬프게 여긴 일인 데다가 일반 불교도라도 지켜야 할 불살계를 승려가 어겼는데 과연 대업으로 씻을 수 있는지는 의문.

지난 90년대 이후 근본불교에 대한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호국불교를 포함한 대승불교가 과연 불교의 본질과 합치하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도올 김용옥도 이런 근본불교의 시각에서 호국불교의 승병활동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있기도 하다.

오히려 세존은 불살생을 엄격하게 지켜, 석가족(샤카족)을 위해 싸웠던 사마동자(奢摩童子)를 내쫓았으며, 당시 궁술이 뛰어난 석가족을 감화해 국방의 의지마저 감퇴시켰고. 이는 석가족이 코살라 왕국 비유리왕의 침략에 무능력하게 대응하게 하여 멸망에 일조케 하였다.[11]

다음은 석씨 일족들이 사마동자를 내쫓은 일화다.
汝年幼小何故辱我等門戶. 豈不知諸釋修行善法乎. 我等尙不能害虫. 況復人命乎. 我等能壞此軍衆一人敵萬人.然我等復作是念. 然殺害衆生不可稱計. 世尊亦作是說. 夫人殺人命死入地獄. 若生人中壽命極短. 汝速去不復住此.
너는 왜 어린애로서 우리 집안을 욕되게 하느냐. 너는 우리 석씨가 착한 법을 수행하는 줄은 모르느냐. 우리는 벌레도 해치지 않는다. 더구나 사람의 목숨이겠느냐. 우리는 저 군사들을 다 쳐부술 수 있다. 한 사람으로 만 사람들을 대적한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했다. ‘하지만 무수한 중생을 죽이는 것을 계획해서는 안 된다’라고. 세존 역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사람을 죽이면 죽어서는 지옥에 들어간다. 만일 인간으로 태어나면 수명이 매우 짧다.’ 너는 빨리 떠나라. 여기 있지 마라.
ㅡ증일아함경 제26권.

1.3.1. 반론

불교의 계율은 율령이나 법령따위가 아닌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 재가인이 지키는 오계(五戒)와 사미승이 지키는 십계(十戒), 비구가 지켜야 하는 계본(戒本)은 석가모니가 정한 것이지만 유사시에 열고 닫을 수 있는 것이다.[12] 그 중에서도 반드시 들어가는 불살생계(不殺生戒) 또한 마찬가지다. 불살생계는 육식도 포함되어 있지만 성장해야 하는 어린아이(사미승도 포함) 라면 허용할 수 있으며 불음주계(不飮酒戒) 또한 음주가 죄가 아니지만 주사가 죄였기에 생겨난 것으로, 사분율의 약건도에는 석가모니가 "8가지 술을 마셔도 좋다. 취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 때나 마셔도 좋고 취한 사람은 마시지 말라. 오늘 받은 술을 내일 먹지 말라"라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니 계율을 곧이곧대로 지키자는 교조주의, 근본주의같은 위험한 주장은 석가모니가 계속 경계하던 바이다. 원래 석가모니는 계율보다는 계율을 지킴으로서 깨달음을 얻는 걸 강조했으므로, 깨달음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은 필요했다. 그 예가 타락죽 설화로, 석가모니는 그로서 중도의 길을 깨달았다. 만약 자이나교처럼 불살생 계율만 고집하다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아사하는 종교가 된다면 불교는 이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불교는 의도를 중요시하는 종교이며, 어떤 길을 걷든 간에 적멸만 이루면 상관없을 만큼 유연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계율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렇기에 불살생으로 보아서는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다른 수준의 얘기인 것은 맞지만 이처럼 불교에서의 계율이라는 개념 자체만을 놓고 봤을 때 위 주장처럼 "계율을 어기는 것을 세속적 논리를 이용해 방어한다"라는 표현자체가 어폐가 있다. 원래부터 불교의 계율은 의도와 맥락을 봐야 하지, 교조적인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계율을 어기는 것에 이유를 대며 합리화 하는 것은 계율보다 세속적 논리를 우선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종교의 정당성이 흔들리는 것이라거나 종교로써 존속할 이유가 없다는 식의 서술 또한 이를 이해하지 못한 너무 극단적인 주장이다.

그렇다면 불살생이라고 침략이나 선공이 아닌 방어적 목적의 싸움조차 허용이 안되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게 옳다. 먼저 달라이 라마는 시애틀에서 한 학생의 "총을 쏘려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에 "폭력 행위는 기억되어져야 하고, 용서는 범인에게도 이루어져야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을 쏘려고 한다면 자기 총으로 맞사격을 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단, 머리 같은 치명적인 부위가 아닌 다리 등을 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기사

중국에 맞서고 있는 티베트 불교 승려 타시 파상은 "승려가 되는 것과 레지스탕스가 되는 것이 둘 다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승려가 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매우 힘들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의무가 될 때가 있다. 중국의 지배 아래에 있게 되면 승려가 된다는 것의 의미가 없다. 그들은 내 종교와 내 수행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기사

반면 틱낫한 같은 경우는 "누군가가 세상의 모든 불교도를 죽이고 마지막으로 당신 혼자 남았을 때 그가 당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당신은 불교를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을 죽이는 것도 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그 사람이 나를 죽이도록 내버려 둘 것이다. 붓다의 가르침에 진리가 있다면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진리를 추구하는 자가 그것을 재발견하고자 할 때 다시 나타날 것이다."라고 답했다.

1.4. 황우석 사건 당시 전방위적인 황우석 옹호와 김수환 추기경 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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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황우석 사태 당시, 단지 황우석 불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 천주교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방해하려 황우석을 모함했다"는 음모론에 낚인 당시 은해사 주지 법타 스님 등 불교 신자들이 "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했던 천주교가 불교 신자인 황우석을 모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적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역시 황우석을 옹호했다.

사실 이때 황우석에게 낚였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 김수환 추기경의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김 추기경의 친일 논란은 사실무근이라는 쪽으로 판명이 났다. 항목 참조. 본래 이 항목에도 반론이 제시되어 있었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항목을 보는 것이 더 자세하다.[13]

이 당시 황우석과 불교계의 유착은 심각한 편이었는데, 당시 조계종 총무원장이었던 지관 스님이 공개적으로 "불교적 교리에 입각해 황우석 박사를 지지해야 하고, 황 박사의 연구성과를 경전으로 뒷받침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황우석 지지를 표방하고 나섰을 정도였다. # 뿐만 아니라 불교계 인사들이 황우석에게 연구를 위해 600여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하는 등 국내의 그 어떤 종교보다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황우석을 옹호했다. # 그 외에도 황우석을 옹호하는 불교계 언론의 낯뜨거운 작태를 지금도 쉽게 검색 가능하다. #, #

황우석의 논문조작이 밝혀진 뒤에도 황우석을 지원하자는 ‘황우석팀 후원을 위한 범불교 국민연대’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 황우석을 옹호하는 현수막을 걸거나 # 전국 주지들이 공개적으로 황우석 지지를 표방하는 등 # 추태가 도통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불교계 내부에서도 "단순히 불교 신자라는 이유로 황우석의 잘못을 옹호하는 것이 맞냐?"는 반대 의견이 소수나마 나왔었다. 불교평론의 주간이었던 조성택 고려대학교 교수는 "한국의 불교인들이 그토록 시달려온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불교인들이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경전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4가지 준칙 가운데 하나인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는 준칙은 이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라며 불교계 주류 인사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황우석을 지지하는 사태에 대해 지적했고, # 동국대학교 윤리문화학과 허남결 교수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의 본질은 과학적 진실성과 연구용 난자의 공급을 둘러싼 도덕성 문제이지, 결코 개인의 성품이나 말솜씨, 그리고 그가 신심 깊은 불자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불교계 일각의 황우석 지지자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애써 알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 #

황우석은 사실은 원래는 가톨릭 신자였으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까지 있었다 # #…는 점으로 물타기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황우석은 애초에 정치계, 종교계 가릴 거 없이 온갖 곳들에 인맥질과 정치질을 하고 다니던 인물이다. 그러다가 천주교 개신교 쪽은 배아줄기세포와 관련된 생명윤리 문제 때문에 사이가 껄끄러워지니 불교 쪽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불교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것이다.

1.5. n번방 성착취물 제작 및 유포 사건

불경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던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승려가 흑악관, 소장요정, 남성복지부, 퍽코이라는 성인 사이트 4개를 개설, 운영하여 성인물과 박사방 영상을 유포하여 불교계에 큰 충격을 주고있다. 특히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운운하며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관음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이용자들이 무료로도 열람할 수 있고 VIP조차 소액으로 가입이 가능해 상당한 이용자를 끌어모았다는 점에서 악질적이다. 현재는 해당 사건의 책임으로 멸빈당했다고 한다. 증언에 의하면 상당한 컴퓨터와 모바일에 능통해서 불교 앱 개발에도 참여 했다고 한다. 과거 디지털교도소에 흑통령방 신동관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있었다.

'N번방 설계자'로 통하는 와치맨이 해당 승려의 배경으로 알려졌다. 왓치맨은 퍽코 사이트를 대대적으로 홍보해서 한달만에 음란물 사이트 이용자 수 3위로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일반인 불법 촬영을 주로 다루는 사이트라며 홍보했다고 한다.

"사찰을 찾는 대다수 신도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종교인이 그들은 고통을 대변하기는커녕,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해 돈벌이 수단으로 삼은 것은 불교계에 큰 상처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출처]라며 비평하는 관점도 있다.

1.6. 공립 합창단과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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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기타 현대 불교의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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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교리와는 상관이 약하거나 없는 차원에서 신자들의 잘못이나 한계점도 불교에서 존재한다. 앞서 있던 친일불교도 있고 후술할 여러가지 비행들이 계속 속출하고 있는 실상이다. 일광조계종같은 유사불교인들이나 비인가 사찰이 의심스러운 경우를 빼놓고 본다면 다음과 같다.
비인가 사찰이나 유사불교인의 경우 소위 정통파고 할 수가 없어 그다지 신뢰할 수가 없다. 스님이라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안 받고 설법하는 꼴이라 기독교로 치자면 이단과 같은 경우다. 한국불교의 주류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유사 포교당의 영업을 단속해야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

2. 관련 문서


[1]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맞는 이유는 불교가 관여했기 때문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직접 만들었기 때문이다. [2] 훈민정음을 익혔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이 없다. 훈민정음은 창제 원리와 목적상 매우 배우기 쉬운 문자다. [3] 그런데 한글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모방이 아니라 세종대왕의 순수 창작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첨언] 이 승과 부활은 명종의 모후 문정왕후가 보우라는 승려를 총애하면서 불교의 권위가 높아져 문정왕후가 마련한 것이다. [5] 종이의 연대가 현대, 책의 형식이 세종대와 다르고, 쓰인 언어가 15세기 한국어가 아니며, 해례본에서 자음을 해부학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것과 다르게 제대로 설명도 못하는 등등. [6] 이미 위서라는게 널리 퍼져 불교계에서는 더이상 써먹지 않지만 2016년 '현대에서 만들어진 위서'이다 라고 뉴스에서 밝혀졌는데도 2019년에 나랏말싸미 홍보를 할때 불교언론은 신미창제설을 원각선정석보를 근거로 두었다.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현대'에 '신미창제설 근거로 된 조작된 위서'는 대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것인지 대중들은 어떤것으로 떠오르는지 일목요연 한데 말이다.( 2019년 이후에도 계속 한글 신미 창제설을 주장, 근거인 원각선종석보를 언급할때 '진위논란시비'로 마치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는 기사도 심심치 않게 볼수 있다.) [7] 시작부터 엉망인 주장인데, 조선실록에는 집현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세종대왕이 직접 창제했다고 나온다. [8] 사실 불교계 측은 조선왕조실록을 입맛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너무 크다. 문종실록에 기록된 신미 시호 우국이세를 근거로 한글창제근거를 두면 왜 조선왕조실록에 신미가 한글에 기여했다는 기록이 없느냐 하는 반론에 빠지게 된다. 이에 승유억불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조작했다 식으로 나오는데 여기선 아까 언급하듯 그렇게 번잡하게 역사를 기록하느니 차라리 조선왕조실록에 신미라는 존재 자체를빼버리는게 나은데 왜 문종실록에 신미가 우국이세로 기록되었냐는 모순에 빠진다. [9] 사실 여기까지 안와도 이미 신미창제설의 핵심이었던 원각선종석보가 현대에 만들어진 위서다. 그야말로 대중들에게 신미창제설로 사기치려는 서적인데 조선왕조가 숭유억불이라 한글창제의 공을 가로챘다는 정황증거로 신미대사 창제설을 주장하는 불교계는 대중들이 '원각선종석보가 현대에 조작된 위서이니 불교계가 신미창제설로 대중들을 속이려고 한 짓이다!'라고 비난하면 불교계는 정황 증거로 비난하지 마라고 반박 할수 있을까? [10] 원래 신미대사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 같이 있었으나 신미가 한글창제를 한 위인으로 또는 기여도가 높다고 포장하기 위해 신미대사 상을 세종대왕 상보다 몇배 더 크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글관련단체 비난과 요청에 의해(세종대왕 상이 작은것보다는 세종대왕과 신미를 같이 두어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 주되었다)에 세종대왕상을 철거하고 신미대사상만 남아있다.. [11] 물론 석가족의 멸망에 있어서는 왕족부터 수뇌부까지 코살라 왕국을 향해 야바위질을 한 것이라 세존도 이를 보고 인과응보라며 멸망을 방치한 것에 가깝다. 자세한 점은 마하나마 참고. [12] 사실 이 반론은 전형적인 대승불교의 논리를 따랐다. 상좌부불교에서는 석가모니가 정한 계율을 열고 닫을 권리, 즉 계율의 어떤 구절을 유효화하고 말고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본다. 혹시 석가모니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경지에 든 사람이 나타난다면 모를까. 그래서 승려는 자신이 수계한 모든 계율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어기면 참회하거나 율장이 정한 대로 벌을 받아야 한다. [13] 한국 천주교 불교와 갈등이 없지는 않지만, 이러한 갈등은 종교 교리를 가지고 일어난 갈등이라기 보다는 특정 지역들을 놓고 가톨릭 성지냐, 불교 성지냐의 영유권 분쟁에 가깝다. 최소한 한국 천주교나 그 구성원들이 천주교의 이름으로 한국 불교와 구성원들을 공격한 적은 없다. [출처] 불교닷컴, 조현성 기자 2020.04.18 조계종 승려가 'n번방·박사방' 영상 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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