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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7:19

개신교/논란/유명인사에 대한 사실 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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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찰스 다윈 유언 조작2.2. 칼 세이건이 죽기 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2.3. 성철 스님 유언 조작2.4. 사르트르의 최후2.5. 볼테르, 토머스 페인이 무신론자다?2.6. 사형대에서의 히틀러2.7. 캐시는 "Yes"라고 했습니다.2.8. 벤허의 저자는 본래 반기독교인이었다2.9.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는 해당 소설을 통해 자신의 삶을 회개했다2.10. 당신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2.11.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기독교인이다?2.12. 니콜라스 윈턴은 기독교인이라서 선행을 했다?

1. 개요

다른 종교의 신자 또는 사제, 혹은 무신론자인 유명인사들이 마지막에는 기독교로 개종했다면서 "이것 봐라, 너희의 정신적 스승들도 결국엔 우리 종교로 개종했다"라고 주장하며 기독교로 개종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주작 행위이다.

이는 개인의 죽음과 그 사람의 신념을 모독하는 일종의 고인드립으로써, 매우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이며, 십계명의 '거짓 증언하지 말라'를 어긴 셈이므로 교리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다.

2. 목록

2.1. 찰스 다윈 유언 조작

범인은 레이디 호프(Elizabeth Hope, 1842/12.9~1922/3.8)라는 여성이다. 1915년 그녀는 자신이 1882년에 찰스 다윈이 사망하기 전에 잠시 만나 그와 이야기를 했고, 그가 자신의 진화론을 사망하기 전에 부정했으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다윈의 유가족들은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반박했다. 정작 다윈이 죽을 당시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쓰러질 것 같소." 아내인 엠마가 증언한 유언이다. 흔히 알려진 "난 두렵지 않아" 라는 말은 죽기 며칠 전 아내인 엠마와 산책하면서 느긋하게 벤치에 앉아서 미소 지으면서 아내에게 하던 말이라고 한다. 죽어서 지옥에 가느니 뭐니 그런 게 두려운 게 아니며 자신의 신념으로 당당하다는 뜻이라는 게 정설이다.

유족들은 당당하게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고 믿었던 고인을 모욕한다고 분노했거늘, 소위 말하는 창조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끝없이 이 이야기를 확대 재생산하여 퍼트리고 있다.

그리고 다윈의 유언에 대한 위의 주장이 맞고 틀리고를 따지기 이전에, 진화론은 하나의 과학 이론이라서 다윈의 말 한 마디로 그가 긴 시간에 걸쳐 발견한 증거가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설령 그가 죽기 전에 그런 말을 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과학 이론은 과학자 한두 명의 권위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관찰과 해석, 반증을 통해서 검증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시로 세포 내 공생설로 유명한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1]는 말년에 9.11 테러 관련 음모론에 빠져 여러 망언을 하면서 놀림거리가 되었으나, 린 마굴리스 본인이 정신나간 소리를 한다고 해서 세포 내 공생설의 근거가 부정되지는 않았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집필하고 나서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병에 걸려 연구를 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큰 고통에 시달리다 죽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이것도 터무니없는 헛소리이다.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다윈에 대한 책자( 기독교계에서 까고자 쓴 책 빼고)를 보면 늘그막의 다윈은 평온했으며, 죽는 날까지 연구를 하면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는 유족들의 증언이 있다. 또한 이건 자기네 신을 소인배로 치부하는, 같은 기독교도들도 싫어할 말이다. 선하고 전능한 신이라는 야훼가 자기 업적(만물 창조)을 부정하는 인간에게 찌질하게 병을 줘서 고통을 가한다는 건 너그럽다는 야훼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기독교를 관통하는 교리는 사랑으로, 그것을 드러내는 존재가 신약성경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데 근본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믿지 않으면 병 주고 지옥 보내는" 무속신앙적인 요소까지 섞어가며 사실을 날조하여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참고로 다윈은 생전 왕립학회 회원으로서 연금까지 받으며 경제적으로도, 명예로도 부족함 없이 살았으며 사망 당시 25만 파운드[2]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3] 사망 이후에는 만장일치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고, 이걸 반대하던 창조설 언론이나 목사들은 그때에도 영국의 자랑을 모욕한다고 질리게 욕먹고[4] 데꿀멍하여 입을 다물 정도였다.

다윈의 종교적 입장을 정확히 단언하기에는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한 편이지만, 굳이 구분을 하자면 불가지론, 이신론 사이의 어딘가쯤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또한 다윈 자신은 자서전에서 기독교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적도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5] 이러한 루머는 참으로 악질적인 왜곡인 셈이다.

애초에 찰스 다윈은 기독교에 회의적이었다. 다윈의 자필 편지가 경매에 나왔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의 계시로서의 성경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리게 돼 유감스럽다. 그런 까닭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도 믿지 않는다."

이 편지는 다윈이 사망하기 2년 전에 쓴 것으로, 그가 (적어도 진화론을 연구하는 동안) 기독교를 믿지는 않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알리스터 맥그래스의 연구에 의하면 현대 과격한 무신론자 즉 신무신론자들이 주장한대로 무신론도 아니었고, 기독교인도 아닌 불가지론자였다고 한다.

2.2. 칼 세이건이 죽기 전에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당연히 이 역시 루머로, 찰스 다윈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처럼 사망한 지 오래된 인물도 아니기 때문에 쉽사리 부정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당장 칼 세이건의 임종을 지킨 그의 부인이 살아 있다. 루머와는 정반대로, 칼 세이건의 가족들이 그가 사망하기 전에 기독교에 귀의하라고 권하자 "증거가 있어야 믿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세이건은 무료로 상영하는 영화라고 해서 들어갔더니 지적설계 홍보 영화라서 그 자리에서 즉시 반박하는 강의를 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었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가 변심했다는 것이 큰 효과를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퍼뜨리는 거짓말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2.3. 성철 스님 유언 조작

조계종 종정을 지냈던 승려 성철의 실제 유언은 "참선 잘 하거라"였다. 성철은 불교를 부정한 적도 기독교에 귀의한 적도 없고 마지막까지 불자들에게 불도에 정진할 것을 당부한 것이다.

그러나 성철이 죽기 직전 친딸이자 비구니인 불필에게 '나는 지옥에 간다'[6]라는 식의 유언을 남겼다는 식의 근거없는 일화가 수많은 개신교 목사, 선교사, 개신교계 블로그 등을 통해 확대재생산되고 있으며 비슷한 꾸준글이 너무 많이 퍼져 누가 처음 퍼트린 거짓말인지 추적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극동방송 이사장인 김장환도 성철이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이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발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다른 승려가 아닌 유독 성철을 대상으로 이러한 거짓말이 끝도 없이 재생산되게 된 이유는 실제 성철이 MBC와의 인터뷰에서 "내 말에 속지 마라"라는 발언을 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말은 자신이 진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선언한 것도, 자신이 믿는 불교가 거짓이고 기독교가 진리라는 의미로 말한 것도 아니며, '내가 종정이라고 해서 딱히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 너무 뭔가를 기대하지 마라'는 의미의 겸손이 담긴 발언이라고 봐야 한다.

2.4. 사르트르의 최후

홍 모 목사가 쓴 "교회만이 희망이다" 라는 책에서 언급되는 이야기. "교회만이 희망이다_사르트르" 라는 검색어로 포탈에서 검색하면 쉽게 본 내용들을 찾을 수 있으며, 이 내용이 여러 교회 홈페이지에 걸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링크들 가운데 하나.

장폴 사르트르는 실존주의 철학자로 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야기로 유명하지만, 폐수종에 걸려 죽음이 임박하자 폭력적인 행동을 했으며 공포에 떨리며 죽었다는 내용으로, 말미에 한 프랑스 지방신문의 말을 빌려 "심판의 하나님을 만날 사실이 사르트르를 공포로 몰아넣어 그로 죽음을 그토록 거부하게 했다" 라는 말로 해석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낸다. 재밌게도 근본주의 개신교들이 쓴 이 이야기를 한국 가톨릭 교회에서도 매일미사에서(마일드한 문체로 고치긴 했지만[7]) 전재한 바 있다는 것.

그런데 사르트르는 폐수종에 걸릴 때부터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기에, 저 이야기의 진위의 출처는 사실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8] 아래는 당시의 사르트르의 장례식 행렬의 사진.

파일:attachment/sartre-funeral.jpg

그의 장례 행렬은 시신이 몽파르나르 묘지에 안장될 때까지 한 국가의 원수가 사망할 때를 방불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그는 유서 한 장, 신에 대한 언급 하나 남기지 않았다. 사르트르 학회에서조차도 이런 이야기를 찾을 수가 없으며, 사르트르가 폐수종을 알게 되었을 때의 일화를 영어로 검색해도 비슷한 이야기마저 나오지 않는 점은 더욱 진위를 의심스럽게 한다. 보부아르와 함께한 사르트르의 최후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하자. #

그나마 기독교와 관련 있다고 할 만한 사건으로는 사르트르가 실명하여 저술활동을 중단한 시점인 1974년에 조수로 들어왔던 '베니 레비'[9]가 사르트르의 사망 1개월 전에 자신의 인터뷰에서 사르트르가 메시아적 유대교[10]에 동감하여 정통 유대교를 포용하였다고 말한 사실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베니 레비는 랍비의 손자인 유대인이자 그의 종파가 바로 저 메시아적 유대교라는 사실이며, 그의 영향으로 메시아적 유대교를 받았다고 한들 유대교인들 전체 중에서 메시아적 유대교를 믿는 이는 겨우 2%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정통 유대교를 받아들였다는 주장은 믿기가 어려운 사실.[11] 동시대에 사르트르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사르트르 평전((Le)siecle de Sartre)에서도 도무지 기독교, 유대교 등과 관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2.5. 볼테르, 토머스 페인이 무신론자다?

파일:attachment/khd.jpg

인터넷 기사의 일부를 캡처한 것이다. 출처는 여기.

김 모 목사는 크리스천 투데이의 인터뷰에서 볼테르 무신론자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무신론을 조장하는 것은 감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볼테르의 종교적 스탠스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분명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게 무신론자라고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볼테르는 기독교 신자였으며 무신론자였던 그의 친구가 볼테르가 유신론자라는 이유로 절교를 선언할 정도였다. 예수를 성현 중 성현으로 찬양한 적도 있다. 다만 볼테르의 신론은 기존 교회의 신론과는 다른 범신론·자연신론·이신론 등을 취하고 있었으며, 신 자체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교회와의 갈등이 있었으며,
"나는 신을 숭배하고, 벗을 사랑하고, 적을 미워하지 않고, 미신(교회)을 혐오하면서 죽는다."

라는 유언을 남겼고,
"광신자와 무뢰한을 쓰러뜨리고 하찮은 열변, 가련한 궤변, 거짓 성경책들을 모조리 파괴하라! 지각 있는 자를 지각 없는 자에게 복종시켜서는 안 된다."

라는 말을 남겼다. 이것을 종교가 이성을 마비시켜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국제적인 혁명가였던 토머스 페인은 자신의 저서 '이성의 시대'에서 기독교의 성경을 비난하며 예언과 계시 및 기적을 비난하였으나, 그 책은 무신론적 관접에서 쓴 책이 아니며 기독교를 탈피한 새로운 이성적인 종교를 제시한 것이었다. 그도 볼테르처럼 자연신교였으며, 기독교의 인격신이 아닌 자연신, 범신론적 신을 믿었다.

덤으로 페인에 대한 거짓말은 김 모 목사가 처음 한 것이 아니다. 페인이 미국에서 죽을 무렵 죽기 직전인 사람을 회개시키겠다고 두 명의 목사가 쳐들어왔을 때 페인이 한 말은 "좋은 아침이군. 날 좀 내버려 두시오!" 였는데 해당 목사들이 '페인이 죽기 직전에 회개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 시작이라고...

게다가 이름도 틀려서 토마스 베인느라고 검색 하면 토마스 페인의 일대기가 나오면서 그가 신을 부인하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는 글들도 심심찮게 나온다. 그런 신앙 칼럼의 결말은 이렇다.
그러나 그는 죽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의 시대'가 출판된 장소에는 미국 성서협회 본부가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번 보십시오. 토마스 베인느의 책은 헌 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성경은 날마다 수천 권씩 인쇄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조금만 찾아보면 토마스 페인의 글들은 지금도 계속 번역되고 있고, 심지어는 철학 책들에서도 자주 인용이 되곤 한다. 실은 이름을 잘못 알아서 찾지 못한 거다 카더라

2.6. 사형대에서의 히틀러

유대인들 600만명을 학살한 히틀러를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사형언도를 받을 때 옆에 본회퍼 목사님이 방청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판사가 일일이 죄상을 심문하였습니다. 그리고 사형 언도를 내리기 전에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있는가?"

그때 히틀러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지상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합니다. 나는 지옥에 가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할 것입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내 옆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천국 지옥에 대하여 알려 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솔직히 말합니다. 나는 지옥에 가는 것이 억울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내게 알려 주지 않아서 지옥에 가기에 나는 지옥에 가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할 것입니다."

그때 히틀러 옆에 그리스도인들이 조금 덜 편하기를 거절하고 전도하였더라면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600만명씩이나 죽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큰 일을 저지를 사람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금 덜' 편안하고 일하여야 합니다.

- 원문출처 겨자씨칼럼.[12]

일단 근현대 유럽사에 대해 아주 기초적인 지식이라도 있다면 이 일화는 전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히틀러는 사형을 당한 적이 없고 1945년 4월 30일 자살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역사 전공자나 알만한 정보도 아니고 네이버 검색만 해도 30초 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며, 2차 대전이나 히틀러의 기본적인 정보도 모르는 사람이 지어낸 100% 순 거짓말이다.

그리고 방청객으로 등장하는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1945년 4월 9일, 히틀러가 죽기 3주 전에 교수형으로 처형당해 이미 죽었다. 애초에 히틀러의 전범재판 자체가 없었던 일인데 본회퍼 말고 어떤 목사가 있었다고 해도 거짓말인건 달라지지 않지만. 아마도 나치독일에 저항하던 목사 본회퍼라는 이름만 대충 주워듣고 갖다 쓴 것으로 추정된다.

일화 자체가 순 구라인 마당에 더 따질 것도 없지만, 실제로 히틀러가 기독교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는 논란이 많은 부분이다. 아돌프 히틀러 문서에도 문단 하나를 할애해서 히틀러의 종교관에 대해 이야기할 정도인데, 요약하자면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은 아니더라도 기독교도가 대부분인 나치 독일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적극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성실한 교인은 아니었지만 세례도 받은 적 있고 기독교 신앙을 곡해해서 반유대주의 선전에도 써먹던 히틀러가, 천국 지옥이라는 기독교 신앙의 아주 기초적인 내용을 평생 한 번도 들어봤던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말이 되지 않는다.[13]

이렇게 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엉터리 일화라서 조금 오류가 적게 각색한 다른 버전도 돌아다니는데, 바로 본회퍼 목사가 옥중에서 꾼 꿈에서 히틀러가 신 앞에서 저렇게 말하는 내용을 봤다는 것이다. 이것도 물론 거짓인데 본회퍼의 마지막 기록인 옥중서신에는 저런 내용이 없다.

도저히 쉴드가 불가능한 수준의 엉터리 글을 올렸던 강 모 목사는 한참 후 글을 더 신중하게 쓰겠다고 사과문을 올렸다. 하지만 강 목사는 이후 역사왜곡이 듬뿍 담긴 글을 지속적으로 업로드하며 반성의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천도교 산하 보성사에서 인쇄되었던 3.1 독립선언서를 서울 상동교회에서 인쇄했다던가, 미나미 지로 총독이 "한국의 10만 명 기독교인들을 조심하라. 그들이 바로 항일 투쟁가들이다"라는 출처불명의 발언을 했다던가 #, 노르망디 상륙 작전 미군 프랑스군 사이의 전투였다고 하기도 했다. 논란이 된 글들을 대부분 삭제한 것인지 현재는 미나미 지로 총독 관련 거짓말의 링크만 남아있다.

이렇게 개신교인들이 역사왜곡된 일화들을 지어내고 퍼트리는 사건이 계속 벌어지는 이유는 어떤 사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아주 기초적인 자료조사나 팩트체크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을 진실성이나 정직함 같은 다른 모든 가치의 위에 두기 때문에 어떤 일화가 기독교 전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이 사실인지는 전혀 따지지 않고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2.7. 캐시는 "Yes"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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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벤허의 저자는 본래 반기독교인이었다

대략 요약하면 다음의 이야기다.
루 윌리스(Lew Wallace)는 철저한 무신론자였다.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멍에에 묶여 사는 것이 한심해 보여서 반기독교 서적을 펴내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꼼꼼하고 철저하게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읽으면 읽을수록 오류와 거짓이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영원한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루 윌리스는 회심의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완악했던 그의 마음은 녹아내렸고, 이제 그는 새롭게 변화된 마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완성된 책이 바로 오늘날까지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고전, 《 벤허》(Ben-Hur)이다.

이 이야기에는 다양한 판본이 있다. 가장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것은 원래 루 윌리스가 반기독교적 목적을 갖고 글을 쓰다가 성경을 읽고 회심하여 다시 쓰게 된 책이 《벤허》라는 것. 그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루 윌리스가 자신의 차기작에 쓸 적당한 소재를 찾다가, 예수를 글감으로 통속적인 이야기를 쓰면 뭔가 나오겠다 싶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는 버전이다. 어느 쪽이든 최후에는 당초의 의도를 포기하고 새롭게 쓰게 되었다는 것은 동일하다.

이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본래 루 월리스가 매우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감동적인(?) 회심 이야기는 철저한 거짓이라는 것. 그러나 이 입장 역시 온전히 사실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잡지 《 Humanities》의 기고자(assistant author) 에이미 리프슨(Amy Lifson)은, 루 월리스가 신앙적 배경은 있었으되 그다지 깊은 관심이나 열정, 식견은 없는 상태였으나, 불가지론자인 로버트 잉거솔(Robert Ingersoll) 대령[14]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종교적 지식과 신학적 관심이 일천했는지를 깨닫고 부끄러워한 끝에, 결국 자신이 믿는 바를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공부하겠다는 마음으로 집필한 것이 바로 《벤허》였다고 전한다.

루 윌리스는 자서전 ‘나는 어떻게 벤허를 썼는가’와 1899년에 발표한 ‘첫 성탄’ (The First Christmas) 이란 글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당시 세계의 종교적, 정치적 상황들”(religious and political conditions of the world at the time of the coming)을 그렸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벤허의 서문에서 당당히 "아놔 나 잉거솔 대령한테 신학적으로 탈탈 털리고 뒤늦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거 쓰는 거임" 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끝난 얘기다(...) 즉 이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는 개신교인들은 정작 《벤허》는 읽어본 적도 없다는 것.

게다가 본디 루 월리스는 조직화된 개신교와는 인연이 없었다. 그와 개신교의 접점이라면, 신의 성품, 의 사랑, 그리고 예수의 사랑에 대한 이해 정도였다. 실제로 교회에 나가거나 했다기보다는, 개신교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개인적인 신앙과 신관(神觀)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할 듯.

즉, 기독교적인 사회 구조 속에서 자라서 배경적으로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명확한 종교적 관점은 없었지만, 소설 집필을 계기로 신앙이 강화된 사람을 두고 그를 마냥 무신론자가 회개한 것처럼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은, 극적이고 감동적인 효과를 꾀하는 거짓말이다.

2.9.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는 해당 소설을 통해 자신의 삶을 회개했다

대략 요약하면 다음의 이야기다.
로빈슨 크루소》 는 표면적으로는 한 선원의 무인도 생존기를 그리고 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는 곧 작가인 대니얼 디포의 자전적 이야기이고 이성의 시대의 인간고백의 성향이 짙다. 로빈슨 크루소의 표류는 작가가 경험했던 파산[15]과 고통이고, 무인도에서의 수도원과 같은 생활은 작가의 회개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막스 베버의 주장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가 청교도 윤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로 받아들여진다.

청교도인 디포는 채무의 개념을 죄와 동일시하였으며, 로빈슨이 당한 재난은 그 응보와도 같다. 로빈슨 크루소는 시민 계급의 개인이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서 잘못된 선택을 한다. 중류층의 보장된 생활을 버리고 모험적인 상인이 되는 죄를 지었으며, 노예 매매로 큰 돈을 벌지만 파산한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못한 그는 플랜테이션 농장을 세우지만 역시 파산한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그는 커다란 죄를 지은 것이다. 무인도에서 비로소 그는 회개하기 시작한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밤마다 대차대조를 하여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끊임없이 기도를 한다. 그는 28년간 무인도에서 살았지만 날짜를 정확히 세고 있었을 정도로 완벽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건 소설을 수박 겉 핥기로 읽었던가, 아니면 자기네들 전도 활동에 유리하게끔 억지로 왜곡한 것이다.

우선 작가 대니얼 디포 본인부터가 위 설명과는 맞지 않는다. 대니얼 디포는 종교적인 주제에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다른 하나인 《몰 플랜더스》 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해당 작품에서 수도원은 성추행이 난무하는 지옥이다. 굳이 말하자면, 대니얼 디포의 포지션은 부르주아지에 가깝다. 로빈슨 크루소는 그 당시 유행하던 계몽(Enlightenment) 정신에 입각해서 쓰여졌다. 즉, "이성이 승리한다" 는 것.

단적으로 말해, 로빈슨 크루소의 무인도 생활은 참회와는 매우 거리가 먼 계획적이고 지속 가능한 무언가였다. 물론 대니얼 디포가 청교도적 윤리관을 지니고 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채무를 죄악시한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런데 로빈슨 크루소는 그러한 관점은 그다지 참작하지 않고 쓰였다.

이제 작품 내로 들어가 보자. 위 이야기는 작가의 회개라는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만들기 위해 실제 소설과 어긋난 주장을 하면서도 이것이 소설의 내용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는 실제 소설에서 어떤 묘사, 어떤 설정, 어떤 내용이 서술되고 있는지 반드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로빈슨 크루소가 유일하게 성공적인 항해를 했을 때, 그의 취급 품목은 거울, 칼, 손도끼 같은 잡화를 원주민들의 사금과 바꾸는 것이었지 노예 무역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항해에서 해적의 습격을 받아 노예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브라질로 가서 농장을 시작하지만 노예를 쓰지 않았고, 농장이 커지고 나서야 주변 농장주들의 제의[16]를 받고, 몇 년 동안의 육지 생활에 좀 질려있던 로빈슨은 그것보다는 역마살이 도져서 일손이 부족할 정도로 잘 되고 있는 농장을 친구에게 맡기고 바다로 나간 것이다. 절대로 농장이 파산해서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간 게 아니었다.

더구나 무인도에서의 28년 후 영국으로 돌아와 생계를 걱정하던 중, 혹시나 해서 브라질의 농장이 어떻게 되었나 알아봤더니,[17] 농장을 맡긴 친구가 그야말로 유능하면서도 매우 정직한 친구라 그 28년 동안 농장을 엄청나게 발전시켜 놓았고, 로빈슨의 몫을 그대로 모아두고 있다가 보내주어 로빈슨이 그 막대한 재산 때문에 잠깐 기절할 정도였다.

덧붙이자면 또 로빈슨은 해적들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할 때 같이한 흑인 소년[18]이나 식인종이었던 프라이데이를 노예 취급하거나 함부로 다루지도 않았다. 물론 프라이데이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자신을 마스터(주인)라고 부르게 하긴 했지만 당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아예 사람 취급도 안 한 것과 비교해보면 이 정도면 엄청 인간적으로 대해준 것이다.[19] 즉, 로빈슨은 파산 따위 한 적도 없고, 자기가 노예가 되었던 적은 있었어도 노예 매매에 참여하거나 원주민들을 노예로 학대한 적도 없으며, 농장을 하면서도 자기가 직접 일을 했지 노예를 쓰지도 않았다.[20]

여담이지만 로빈슨 크루소는 항상 날짜를 정확히 센 것은 아니었다. 중간에 열병으로 혼수상태가 되었을 때의 날짜는 세지 못했기 때문.

덤으로 지은이 디포는 이 소설로 이름을 알렸지만 몇 해 안 가 남해거품사건으로 쫄딱 망해 비참하게 죽었다. 이런 개소리를 하는 이들은 디포의 늘그막과 최후에 대해선 입을 다물기에 더 비웃음을 들을 수밖에 없다.

2.10. 당신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세 아이를 기르는 한 어머니가 있다. 그녀는 결핵 환자이고, 아버지는 매독 환자이다. 첫째 아이는 맹인이고, 둘째 아이는 유산했으며, 셋째 아이는 귀머거리 벙어리고, 넷째 아이는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결핵 환자다. 그리고 이 어머니는 이제 다섯째 아이를 가졌다. 이 아이를 낙태시켜야 하는가?

...만일 당신이 여기에 "네" 라고 대답하셨다면...

당신은 방금 베토벤을 죽였습니다.

각종 유머 사이트나 포럼에서도 자주 보이는 글이지만 이는 사실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이 낙태 반대론을 펼칠 때 써먹는 레퍼토리에 불과하다. 베토벤의 어머니는 이전 결혼에서 하나, 그리고 요한에게서의 첫째 아이는 출생 후 곧 잃었지만 셋째로 태어난 루트비히가 첫째로 생존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 증세도 알려지지 않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특수 사례를 일반론에 대입시킴으로써 일부러 틀리게 만들어 놓은 논리라는 것이다. 같은 논리를 적용하면 낙태를 하지 않아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났다고 할 수도 있다.

2.11.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기독교인이다?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

일단 위 문장은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말이 맞기는 하다. 이 외에도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부정하면서 그 유명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유독 신이나 종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이는 발언을 많이 했다. 이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기독교인이라는 주장이 종종 보인다. #

하지만 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의 야훼만을 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굉장히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종교에 대한 발언을 많이 한 것은 맞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은 범신론에 가까우며,[21] 아인슈타인은 오히려 기독교의 인격신에 대해서 부정하는 발언을 더 많이 했다.[22]
제게 있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을 나타내는 표현이자 그 산물입니다.
성경은 신성하지만 원시적인 전설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죠. 아무리 정교한 해석도 제 생각을 바꿔놓을 수는 없을 겁니다.
-1954년 당시 74세의 아인슈타인이 독일 철학자 에릭 구트킨드에게 보낸 편지 #

아인슈타인이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신은 범신론적 관점에서 우주의 법칙으로서의 신에 가까우며 기독교의 유일신 야훼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범신론에 대한 무지와 의도적 왜곡 때문에 아인슈타인 기독교인설은 꽤 널리 퍼져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애초에 유대인이었으므로, 야훼를 믿었더라도 기독교인은 아닌 유대교인이었을 것이다.

2.12. 니콜라스 윈턴은 기독교인이라서 선행을 했다?

니콜라스 윈턴 경은 홀로코스트 당시 나치로부터 669명의 유대인을 구출해낸, 영국판 오스카 쉰들러라 할 수 있는 위인으로 영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니콜라스 윈턴은 원래 기독교인이었으나 기독교에 실망하여[23] 신앙을 버리고 무종교인이 된 인물이다. 그러나 일부 목사들은 이런 사실은 쏙 빼놓고 이런 으로 니콜라스 윈턴이 기독교인이라서 사람들을 구하고 선행을 했다는 것처럼 왜곡해서 퍼트리고 있다.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도 이런 선행을 한 니콜라스 윈턴의 일화는 기독교적 배경이 없이도 이타적인 선행을 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는 사례인데 이를 정반대로 왜곡해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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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칼 세이건의 이혼한 첫번째 아내로 유명하다. [2] 2017년 3월 2일 기준 원화로 3억 5,714만2,857원에 달한다. 하지만 이것은 당시의 물가 반영이 이루어지지 않은 수치이다. 당시의 물가를 반영하면 그 값어치는 1000배가 넘는다. [3] 원래 다윈의 외갓집은 최고급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다. [4] 더 타임즈는 '영국의 자랑을 모독하는 얼간이들'이라고 목사고 뭐고 호되게 깠다. [5] 이에 대해선 찰스 로버트 다윈 항목을 참고할 것. [6] 유사한 글이 너무 많아 디테일은 그때그때 다르다. [7] "그에게는 돌아갈 고향, 특히 마음의 고향이 없었던 것이다." [8] 어느 정도 근거를 찾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계약결혼자였던(앞서서 인용된 글에서는 사르트르의 아내로 나오고 있다) 보부아르가 기술한 사르트르 말년의 실명과 다른 고통일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가 특별히 불행하게 죽었다는 증거는 크지 않다. [9] 일명 '피에르 빅터'. 철학자인 베르나르 앙리 베니와는 다른 사람이다. [10] Messianic Judaism, 유대교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아는 예수라고 인정하는 유대교 종파. 다른 종파들은 예수를 메시아라 인정하지 않는다. 유대교 항목 참고 바람. [11] 사르트르가 "The Jew lives", "He has a destiny. The finality towards which every Jew moves is to reunite humanity... It is the end that only the Jewish people know... It is the beginning of the existence of men for each other" 등을 언급했다고 하는데 유대교를 포용하면서 예수를 인정했다는 것은 메시아적 유대교를 떠올리게 할 수밖에 없다. [12] 현재는 원본을 지웠는지 볼 수 없다. [13] 물론, 히틀러의 종교적 행적을 보면 가톨릭,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계와 이슬람등에대해서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였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회유하려고하면서도, 나중가서 아리아인이 아닌 기독교신자와 성직자, 목회자등을 죽이거나 감옥에 보내는 등하고, 이슬람을 좋아한다고 고백도 했었기때문. 당장, 히틀러와 나치당은 위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를 탄압하고, 고백교회를 탄압했었었다. [14] 이 사람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 소개될 정도로, 당시의 기준은 물론 지금의 기준으로도 상당히 비기독교적인 사람이었다. 루 월리스와는 남북전쟁때 같은 북군에서 싸웠던 전우이기도 하다. 계급은 월리스가 종전시 소장으로 더 높았지만. 당대에도 이 사람의 불가지론은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남북전쟁 중에 한번 전투에서 패하고 포로가 되자 포로로 그를 잡은 남군 병사가 "저 양반은 지옥이 없다고 믿는 양반인데, 우리가 지옥 비슷한건 있다는걸 이번 기회에 보여주었다"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15] 아마도 1692년에 대니얼 디포가 채무 문제로 체포되었던 것을 의미하는 듯하다. [16] 노예 밀무역을 하려는데 로빈슨은 전체적인 관리만 맡아주면 따로 투자하지 않아도 노예를 배당해주겠다는 제의. [17] 이때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해적들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했을 때 로빈슨을 구해주고 흑인 소년을 견습 선원으로 데려간 그 포르투갈인 선장이었다. [18] 이들을 구조해준 배의 선장이 이 소년을 견습 선원으로 쓰기 위해 달라고 하자, 로빈슨은 흑인 소년의 의사를 확인한 후 선장에게 10년 후엔 자유롭게 해준다는 서약서를 받아냈다. 그리고 그 선장도 상당히 공정하고 정직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소년 "Xury"에 대한 기억은 계속 크루소의 뇌리에 남아있는데, 그가 노동력이 필요한 순간에 크루소는 항상 이 소년을 놓아준 것을 아쉬워하는 것으로 봐서 크루소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아직 미비한 놈(...)이라는 의견이 존재한다. [19] 사실 오히려 프라이데이 쪽이 로빈슨을 주군으로 모시려고 했었고, 로빈슨이 프라이데이에게 주인이라고 부르라고 한 건 오히려 이를 완화시킨 것이다. 로빈슨이 원한 건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아니라 선량한 고용주와 신뢰할 수 있는 하인 쪽에 더 가까웠다. 마지막에도 프라이데이의 부족민들이(이들 중에는 프라이데이의 아버지도 있었다.) 적 부족민들과의 싸움에 져서 포로가 되어 잡아먹힐 뻔하다가 로빈슨과 프라이데이의 습격으로 이들을 구하고 돌려보낼 때 프라이데이는 은혜를 갚겠다고 끝까지 남아서 나중에 반란자들과의 싸움에도 큰 역할을 해냈다. [20] 무엇보다 로빈슨은 프라이데이와의 대화에서 "우리는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죽입니다만, 유럽인들은 대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입니까?"라는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문명인이자 기독교인인 유럽인이 야만인(이라고 이제껏 생각했던)이고 비 기독교인인 이들보다 나은게 대체 뭔가 하며 고민했다. [21]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은 워낙 복잡하기에, 위키백과에 따로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에 대한 문서가 있을 정도이다. [22] 반대로 아인슈타인에 대해 불교도라고 주장하는 글도 많이 보이는데, 아인슈타인이 불교를 긍정했다는 주장 또한 출처가 불분명하다. [23] 정확히는 같은 종교가 서로 다른 쪽의 승리를 기원하는 모습을 보고 신앙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