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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전역

발트 해 전역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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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전역
Baltic Sea Campaigns
겨울전쟁 독소전쟁의 일부
파일:external/wio.ru/balt7-u.jpg
탈린에서 레닌그라드로 대피중인 소련 해군
날짜
1939 ~ 1945년
장소
발트해
교전국
[[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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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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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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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핀란드 공화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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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핀란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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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핀란드 공화국
]] (~1944)


[[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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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핀란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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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핀란드 공화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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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핀란드 공화국
]] (1944~)
결과
- 연합군의 승리
영향
추축국의 발트해에 대한 영향력 상실

1. 개요2. 배경3. 각 국가의 해군 전력 및 상황
3.1. 독일 해군3.2. 핀란드 해군3.3. 소련 해군
4. 작전 해역의 환경5. 전개
5.1. 1939년 ~ 1940년 - 소련 해군과 핀란드 해군과의 교전5.2. 1941년 - 독일군의 침략
5.2.1. 운명의 날 - 발트 작전
5.2.1.1. 리가 만 해전
5.2.2. 탈린 철수5.2.3. 베오울프 작전5.2.4. 항코 반도 철수작전
5.3. 1942년 - 소련 해군의 분투
5.3.1. 아이스 슈토스(얼음 타격) 작전5.3.2. 소련 잠수함들의 분투5.3.3. 수르사리 섬 전투5.3.4. 소메리 해전
5.4. 1943년5.5. 1944년 - 대 소련 포위망
5.5.1. 강화 조약5.5.2. 기뢰원의 무력화
5.6. 1945년 - 신들의 황혼
5.6.1. 사상 최대규모의 퇴각작전5.6.2. 독일 피난선들의 고난
6. 결과7. 여담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 및 핀란드 해군 등의 추축국 해군과 소련 해군 발트함대에 의해 발트해에서 전개된 주요 전선 중 하나이다.

비록 태평양 전선만큼의 화려함은 없었지만 그 처참함과 처절함은 태평양전선이나 대서양 전투 못지 않았으며 발트해 일대 해역은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 해역에 못지 않은 기뢰의 천국으로 악명높았다. 소련 해군의 조사에 따르면 근 60,000기 이상의 기뢰가 부설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부설하고 돌파하며 소해하는 임무는 기뢰전 역사상 가장 치열했다.

또한 구축함 이하급의 소형 전투함들의 교전이 심심할 때마다 터졌으며 지형상 지상군 및 공군과의 연계도 많아 입체적인 전황이 펼쳐졌다. 수시로 군함에 의한 지상군 포격 및 항공기들의 대함공격이 많이 일어났고 제한적인 상륙작전, 퇴각작전 등까지 합쳐져 전투 양상은 매우 다양하여 발트해 일대에 헬게이트가 활짝 열렸다.

2. 배경

소련군은 발트 3국을 점령하고 독일과 같이 폴란드를 침공할 때 발트 함대도 같이 여러 전투를 벌이며 내려왔고 이는 분명히 핀란드와 독일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은 영국 해군을 상대하기도 벅찬 상태여서 발트해에 경순양함급을 넘는 군함을 동원하기 힘들었고 핀란드 해군은 전력이 높지 않았다. 이에 발트해가 기뢰밭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후 독소전쟁이 시작되면서 소련은 독일의 진군을 막고 핀란드에 들어오는 상선을 막아야 했다. 역으로 독일은 북부집단군의 진공과 보급을 원활하게 해야 했고 핀란드는 영해에서 소련의 휘협을 제거해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소련의 발트 함대와 독일의 크릭스마리네, 핀란드 해군과의 전투는 불가피했다.

3. 각 국가의 해군 전력 및 상황

교전 국가들의 해군 전력들은 타국 해군의 전력과 비교해 미약하였으며 그야말로 2차대전기 국가들 중 마이너 해군의 집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1. 독일 해군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E-boat(고속정) 28척
잠수함 5척
기뢰부설함(대부분 개조된 여객선 및 페리) 10척
M급 소해함 3개 분대
VP-boat(징집된 상선 포함 정찰선) 2개 분대
징집된 저인망 어선(트롤선)을 개조한 소해함 3개 분대
R-boat(소해함) 3개 분대
Sperrbrecher[1] 3척
소해함을 지원하기 위한 모선 2척

그외에도 다양한 소형 공격선과 무장 바지선과 보조함이 투입 되었으며 경순양함과 구축함들도 이들을 지원하러 가기도 했다.

한편 1941년 9월 독일은 만약 스웨덴이 중립에서 소련으로 편을 바꾼다면 이를 저지하고 발트 함대를 파괴하기 위해 전함 티르피츠를 중심으로 순양함 어드밀러 쉐어, 엠덴, 쾰른,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와 구축함 Z25, Z26, Z27과 2척의 어뢰정으로 구성된 발텐플로트 함대를 창설했다. 그러나 스웨덴이 중립에서 탈출하는 일은 없었고 독일 공군의 공격에 소련 해군 발트 함대가 큰 피해를 입자 함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독일 해군 발트 함대를 1941년 10월에 해체한다.

3.2. 핀란드 해군

핀란드 해군의 전력도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파일:핀란드 국기.svg 핀란드 해군 전력
장갑함 2척[2]
잠수함 5척[3]
초계함 4척[4]
소해정 12척
기뢰부설함 3척
고속어뢰정 7척

3.3. 소련 해군

소련 해군 발트함대의 경우, 발트해에 전개되어있던 추축군 해군 전력들을 다 합한 것보다 강력한 해군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px-Naval_Ensign_of_the_Soviet_Union.svg.png 소련 해군 발트함대 전력
전함 강구트급 전함 - 2척[5]
중순양함 키로프급 순양함 - 2척[6]
구축함 그녜브늬급 구축함 - 9척[7]
스따라졔보이급 구축함 - 5척[8]
레닌그라드급 구축함 - 1척[9]
민스크급 구축함 - 1척[10]
기뢰부설함 마르티급 기뢰부설함 - 1척[11]
잠수함 S급 잠수함 - 11척[12]
L급 잠수함 - 1척[13]
슈카급 잠수함 - 18척[14]
M급 잠수함 - 16척[15]

4. 작전 해역의 환경

발트해는 북유럽의 지중해라 불리는 바다이다. 사아레마 섬과 히위무 섬은 소련 해군의 주요 군사 지역이었다. 발트해는 제대로 된 항구가 얼마 없는 소련이 외부와 통할 수 있는 바닷길이었다. 독일로서는 이 지역을 확보한다면 해군이 쉽게 북부집단군에게 보급을 할 수 있고 소련을 외부로부터 단절시킬 수 있었다. 만약에 독일이 레닌그라드와 발트해를 점거하여 소련을 외부로 단절시키고 쉽게 보급을 받아 작전 목표인 A-A선 북쪽 끝인 아르한겔스크까지 진격하면 영국으로부터 오는 렌드리스를 막을 수 있었다. 즉, 두 국가 모두에게 중요한 바다였다.

5. 전개

5.1. 1939년 ~ 1940년 - 소련 해군과 핀란드 해군과의 교전

겨울전쟁은 이름 그대로 겨울에 일어난 전쟁이어서 발트해가 얼어 붙은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는 해군의 활동이 제약될 수밖에 없었고 해전은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소련의 잠수함과 쇄빙선만이 활동을 했다. 핀란드 해군은 주력 함선인 두 척의 베이네뫼이넨급 해방함을 올란드 섬 방어에 투입했고, 12월 빙하가 두꺼워지자 투르쿠 항구에 집결시켜 대공 임무에 투입했다.

핀란드군 해안 포대도 활약했다. 이 해안 포대는 러시아 제국 때 만들어진 구식 포였지만 핀란드는 스웨덴의 도움을 받아 가능한 선에서 현대화를 했고 항코 항 남쪽에 있는 러사뢰 섬에 접근한 소련 구축함과 순양함 키로프에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카렐리야 지협에 있었던 해안포들은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소련 해안포들처럼 육군에게도 포격을 가했다.

소련은 핀란드의 해안을 봉쇄해서 서방으로부터 들어오는 원조들을 막으려 노력했지만 위에 언급했듯이 발트해가 얼어 작전에 제약이 있었다. 소련의 잠수함은 겨우 5척밖에 침몰시키지 못했고 발트해가 얼어붙자 봉쇄 작전에 나선 소련 공군도 5척의 상선을 침몰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소련 해군은 잠수함 한 척을 잃어서 손해였다.[16]

5.2. 1941년 - 독일군의 침략

북부집단군의 1941년 중 에스토니아 전역을 자세히 보여주고 있다.

위에 언급했듯이 레닌그라드는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다. 나치독일의 OKH(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소련 침공을 위한 계획을 세울 임시조직을 설치한다. 그리고 18군 참모장인 에리히 마르크스는 주력을 둘로 나누어 키에프 모스크바를 공격하고 조공으로 레닌그라드를 공격하는 안을 냈다. 이 안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뼈대가 됐다. 하지만 히틀러는 레닌그라드도 같이 점령할 것을 명했고 최종적으로 3개의 집단군이 소련을 침공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이 완성됐다.

레닌그라드를 공격하기 위해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장군이 지휘하는 북부집단군이 창설됐다. 북부집단군은 4기갑집단 선두에서 돌파하고 양쪽에서 18, 16군이 진격하며 제1항공군이 엄호하기로 예정되었다. 또한 3개 집단군 중 유일하게 해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북부집단군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 안은 조공이었고 나중에 주공으로 바뀌었어도 관할 지역이 작다는 이유로 제대로 보급을 받지 못했다. 특히 모스크바 전투 때 4기갑집단을 중부집단군에게 넘겨주었는데 처음부터 작았던 북부집단군은 더 쪼그라들어서 돌파력까지 잃고 레닌그라드를 포위만 한 채 점령을 하지 못하게 된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이유로 역사에서도 비중이 들러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해군은 병력과 물자를 최대한 지원해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북부집단군은 해군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5.2.1. 운명의 날 - 발트 작전

파일:발트 공세도.gif
독일군의 공세도

운명의 날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고 북부집단군도 일제히 네만 강을 건너 진격을 시작했다. 독일 공군이 일제히 리가부터 크론스타트까지 모든 군사 지역에 폭격을 가했고 소련 항공기 1200대가 날지도 못한 채 파괴되었다. 개전 전날 해군 총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비상 경계령을 내려서 오직 소련 해군만이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부터 무사할 수 있었다.

소련군 5기갑사단은 독일 7기갑사단이 네만 강을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해 알리투스에서 전차전을 벌였다. 소련 지휘부는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알리투스 전차전에서 독일군은 공군의 도움을 받아 90대의 전차를 파괴시켰다. 5기갑사단은 빌뉴스로 후퇴한다. 알리투스 전차전은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브로디 전차전과 같이 개전시에 일어났던 대규모 전차전이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알려진 것이 없다.[17]
파일:라세이니 전투도.jpg
라세이니 전투 지도

네만 강을 건넌 독일군은 라세이니를 통과하고 드비사 강을 건너기 위해 게오르그 한스 레인하르트(georg Hans reinhardt)의 41기갑군단과 만슈타인의 56기갑군단이 다리를 점령하러 진격했다. 소련군은 네만 강에서 후퇴하고 반격 준비를 했다. 북서전선군 사령관 표도르 쿠즈네초프 상장은[18] 진격하는 독일군의 옆구리를 치기 위해 3기계화군단과 12기계화군단을 카우나스에 집결시켜 두비사 강으로 진격하고 독일군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만슈타인의 56기갑군단은 하루에 80km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진격해 니헤멘을 거쳐 강을 건널 아리오갈라 다리를 점령한 상태였다.

소련군의 진격을 발견한 루프트바페는 즉각 공습을 가했다. Ju 88의 공습에 특히 3기계화군단 예하 23기갑사단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한편 6기갑사단은 처음으로 KV 전차를 만났고 이 전차의 성능에 놀라서 보고서를 썼다. 이 전투에서 KV 전차 한 대가 독일군의 진격을 하루 동안 막은 것은 상당히 유명한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KV-2 항목 참고.

11군 사령관 바실리 이바노비치 모로조프 중장의 명령에 따라 소련군은 Betygala 근처에 있는 다리를 통해 두비사 강을 건너 라세이니로 진격해 독일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이미 드비사 강을 건넌 독일군 41기갑군단 예하 1기갑사단과 38기동보병사단이 소련군이 건너온 다리를 점거해 후속부대와 연결을 끊고 포위한다.

11군 소속 3기계화군단은 포위됐고 보급도 끊겨 탄약과 연료가 부족해졌다. 예하 부대인 2기갑사단은 거의 전멸하고 사단장 솔리킨도 전사했다. 5기갑사단과 84차량화사단도 손실이 막심했다. 8군 소속 12기계화군단은 후퇴에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중장비를 잃었다. 소련군은 독일군보다 전차의 수가 3배 더 많았고 성능이 뛰어난 KV 전차 T-34 전차도 있었지만 독일군을 오판했고 잘못된 전술을 채택했다. 또한 훈련도 부족하고 독일군과 달리 지휘차량에만 무전기가 있어 서로간 소통도 하지 못했다. 결국 745대 중 704대를 잃는 참패를 당했다.

41기갑군단이 이들을 쌈싸먹는 동안 만슈타인의 56기갑군단은 6월 26일 드비나 강(현 다우바 강)에 도착한다. 무려 280~320km나 되는 거리를 4일만에 주파해 버린 것이다. 라세이니 전투가 6월 27일에 끝나고 STAVKA(소련군 최고사령부)는 11군은 드비나 강으로 가서 지연전을 펼치고 8군은 빌뉴스로 후퇴해 지연전을 펼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드비나 강은 만슈타인이 먼저 도착해 다리를 지키고 있는 상태였고 소련군은 다시 포위되기 싫으면 빨리 북쪽으로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만슈타인은 경이로운 속도로 진격한 후 다리를 지키고 쿨타임(...)으로 인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3일 뒤 알프레드 보그리드 포병대장의 26군단이 리가 남부 도시 옐가나를 점령한다. 필리피 클레페 기병대장의 제1군단이 리가로부터 남동쪽으로 60km 떨어진 야운옐가바(Jaunjelgava)를 점령하면서 드비나 강을 건널 준비를 한다. 리가를 포위 공격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소련군은 예카필스(Jekapils)에서 독일군 41군단의 진격을 막지 못하고 포위섬멸을 당하지 않기 위해 리가와 그 인근에 병력을 뒤로 물린다. 그리고 6월 30일 리가는 독일군에게 떨어진다. 리가 사람들은 소련의 만행으로 인해 반소 감정이 컸고 이에 독일군을 해방군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환영했다. 하지만 독일군도 소련군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편 라트비아 서부 해안에서도 전투가 있었다.1938년 리투아니아 도시 메멜(Memel)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테란트처럼 독일인들이 살았고 그들도 오스트리아 합병을 보고 독일과의 합병을 원했다. 결국 1939년 3월 리투아니아는 독일에게 메멜을 넘기고 소련이 발트 3국을 점령할 때도 이곳은 독일의 영토였다.

독일군은 이곳을 발판 삼아 리투아니아 서부 해안의 주요 항구인 리예파(Liepaja)를 빠르게 포위했고 소련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결국 섬멸당하고 만다. 7월 1일 소련군과 발트 함대는 에스토니아로 후퇴한다. 한편 북서전선군 사령관 쿠즈네초프는 티모셴코에 의해 해임당한다.

소련군을 함부로 후퇴시킨 것과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해임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쿠즈네초프의 뒤를 이은 소벤니코프 소장도 후퇴 명령을 내렸다. 이들의 후퇴 명령으로 스탈린이 화를 내긴 했지만 독소전쟁 초기 병력을 후퇴시키지 않고 진격시키다 민스크와 스몰렌스크 키예프에서 일어났던 참사들은 북서전선군에게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에스토니아와 리투아니아의 영토가 포위하기에 좋지 않은 것도 있긴 했다. 어찌되었든 후퇴를 하고 체계적인 지연전을 펼쳐 어느정도 병력을 보전하고 레닌그라드 전투에 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당시 후퇴가 가능했던 것은 스탈린의 시선이 모스크바에 쏠려있어서 레닌그라드 방위를 보로실로프가 맡았기 때문이다. 이에 소련군 지휘관들은 스탈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상당히 자유롭게 작전을 짤 수 있었다.

독일군은 하루 동안 휴식을 갖고 7월 2일 진격을 개시한다. 한편 7월 3일 에스토니아에서 에스토니아인 12000명이 친독반소 에스토니아 독립 단체인 숲 형제를 조직해 소련군과 NKVD와 전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군은 이들과 무관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독일 4기갑집단은 에스토니아 주둔 소련군과 서남부 소련군의 연결을 끊을 수 있고 레닌그라드와 가까운 주요 거점인 프스코프를 공격한다. 니콜라이 바투틴은 11군 예하 41소총군단에게 이곳을 사수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독일군의 빠른 진격으로 인해 주요 방어 거점인 요새 지대를 빼앗겼고 다시 되찾기 위해 반격을 했지만 요새를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를 보고 물러간다. 결국 독일군의 공격에 너무 쉽게 프스코프를 7월 8일에 내줬고 소련군은 우왕좌왕 후퇴하고 만다.

이에 스탈린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고 41소총군단장 이반 스테바노비치 코소부츠키 소장과 118소총사단장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글로바츠키 소장은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코소부츠키 소장은 총살형, 글로바츠키 소장은 총살형에서 감형된 10년 형이 선고됐다. 코소부츠키 소장은 처형됐고 글로바츠키 소장은1942년 10월에 복권된다.
독일군 18군은 7월 7일~7월 9일에 에스토니아 국경을 넘었고 에스토니아 숲 형제와 만났다. 숲 형제는 독일군에 의해 더 크게 조직되었다.
5.2.1.1. 리가 만 해전
독일이 빠르게 침공한 후 독일 공군의 공습을 피한 발트 함대는 독일 해군의 군수품 수송과 진격을 막기 위한 작전을 펼친다. 전투에 참가한 소련 발트 함대의 사령관은 블라디미르 F. 트리부트, 독일 발트 작전부의 사령관은 후베르트 슈문트였다.

1941년 6월 21일 독일의 S-boat는 발트 함대를 방해하기 위해 아벤 해협(Irben Strait)에 기뢰를 설치했고 이틀 후 키로프급 경순양함 막심 고리키와 그녜브니급 구축함과 구축함 고디가 피해를 입고 고디의 자매함 그녜브니가 침몰한다. 6월 24일 소련 발트 함대는 역으로 구축함 3척의 지원 아래 키로프급 순양함과 구축함 4척이 이 지역에 기뢰 500개를 설치한다. 이로 인해 6월 26일 독일군은 S-boat 2척을 손실하고 다음날 M급 소해함 1척과 R-boat 4척이 피해를 입고 R-boat 1척이 침몰한다.

한편 독일 S-31과 S-59와 소련 구축함 스따라졔보이급 스따라졔보이가 발트해에서 첫 해전을 벌였고 스따라졔보이(storozhevoy)는 S-boat의 어뢰로 인해 큰 피해를 입고 1943년 9월에 대대적인 정비 끝에 침몰을 겨우 면한다. 또한 같은 급의 구축함 스몰리는 S-54의 어뢰에 맞고 소련 모터 어뢰정 n°73에 의해 뇌격 처분당한다.

날짜는 이제 7월이 되었고 소련 구축함 2척이 기뢰설치 중 kolka 근처에서 M급 소해함 1척과 지원함 MRS-11/Osnabruck와 마주한다. 소련 구축함들은 이들에게 효과적인 공격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1척이 M급 소해함에게 직격탄을 맞았다.

7월 3일 리가가 함락되면서 해상에서의 전투도 절정을 달한다. 7월 9일 소련의 MO급 경비정들이 독일의 호송선단을 기습 공격했지만 실패한다. 그렇지만 아벤 해협에 설치된 소련의 기뢰들은 지속적으로 독일 해군에게 피해를 입혔다. 소련 구축함들은 기뢰 설치 작업을 수행하고 소련 공군과 소련 어뢰정들이 독일 호송 선단을 재공격해서 여러 수송선과 여러 무장 바지선을 침몰시키거나 피해를 입힌다. 한편 7월 18일 소련 구축함들이 Ju 88의 공습으로 1척이 큰 피해를 입고 뇌격 처분됐다.

8월 1일 독일군도 아벤 해협에서 계속 기뢰를 설치하자 소련군은 2척의 구축함 호위 아래 모터 어뢰정으로 케이프 도메스나스(Cape Domesnas)의 S-boat를 공격했다. 하지만 오히려 소련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8월 6일 소련 구축함들은 독일군의 해안포들을 공격했고 17일에 소련 어뢰정 4척이 다시 케이프 도메스나스를 공격해 교전 중 독일 소해함 1척이 침몰했다. 3일 후 S-54의 어뢰 공격으로 소련 소해함 T-51이 침몰했다. 8월 21일 리가 만에서 소련 구축함들이 독일의 호송선단을 공격하는 마지막 작전이 있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소련군은 독일의 호송선단을 성공적으로 막지 못하고 3척의 구축함들을 잃었다. 이후 소련 해군은 탈린으로 이동한다. 독일군은 소련 해군이 설치한 기뢰밭들을 제거하는 것에 상당히 성공한다.

5.2.2. 탈린 철수

탈린 철수는 러시아의 됭케르크 철수작전이라고 불린다. 발트 함대가 소련군과 친소 민간인을 탈출시킨 작전이다.

숲 형제는 7월 5일 안슬라(antsla)에서 소련군과 전투를 벌여 도시를 점령하고 7월 8일에 바스텔리냐(vasteliina)에서 더 큰 공격을 가해 소련 제8군을 몰아내고 독일 18군이 도착하기 전에 먼저 점령했다. 숲 형제는 소련의 도시 파괴를 막고 그곳에 있었던 지역 공산당 간부를 감옥에 가두었다. 이들은 18군에 의해 오마카이트(omakites) 군대로 재조직됐다.

2주 동안 이어진 타르투 공방전이 7월 10일에 프리드리히 커그(Friedrich Kurg)가 지휘하는 숲 형제가 타르투(Tartu)를 점령하며 끝났다. 한편 NKVD가 7월 8일에 타르투 감옥에서 193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드디어 페르누 강(pärnu river) 노선에 따라 에스토니아 남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 사이 타르투는 크게 파괴된다.

독일군 스몰렌스크 전투로 인해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 사이에 공간이 생겨버렸고 마침 북부집단군 군인들도 엄청난 진격에 지쳐 잠시 진격을 멈추기로 한다. 레프 장군은 히틀러에게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더 큰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청했지만 다른 집단군도 예비대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때 소련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빠르게 방어선을 구축하고 7월 15일 탈린에 10소총군단이 포위될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소련군 제8군은 진격을 개시했고 일시적으로 독일군을 30km나 후퇴시켰다. 그러나 7월 22일에 독일군이 반격을 가하자 소련군 8군 11소총군단이 전멸을 하고 피해가 커지자 후퇴했다. 이 공격은 8군과 탈린을 완전히 연결시키지는 못했지만 탈린의 소련군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때 독일군은 항공 지원을 받지 못했다.

히틀러는 8월 5일 스몰렌스크 전투가 끝나는 대로 중부집단군의 39장갑군단을 레닌그라드 공략에 투입했고 어느 정도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 사이 공간이 없어지면서 다시 진격을 개시한다.

독일군은 8월 5일 탈린 외곽에 도착한고 8월 7일에 포위를 개시한다. 숲 형제는 독일 18군과 연합해 8월 17일 나르바(narva)를 점령하면서 완전히 탈린을 포위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소련군의 분투에 독일군의 진격이 이전에 비해 늦어졌다. 독일군은 8월 19일 에스토니아 비행장을 이용해 Ju 88로 항구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고 독일군 4개 사단 6만 명이 총공격을 가했다.

소련 발트 함대 제독 블라디미르 트리브투는 순양함 키로프를 기함으로 하여 250척의 탈출 함대를 꾸려 탈린으로 갔다.
크릭스마리네와 핀란드 해군은 이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발트해에 기뢰 2400개를 설치했고 8월 8일 부터 라헤마(lahemaa) 해안에 추가로 기뢰 600개를 설치하고 주민다(juminda) 곶에 150mm 해안포를 설치했다. 핀란드 해군은 어뢰정 플로틸라와 VMV급 경비정, 크릭스마리네는 에스보트(E-보트)를 헬싱키 외곽 수오멘린나 섬에 집결시켰다.

10소총군단은 모든 여력을 동원해 독일군의 총공격을 막았다. 8월 27일 밤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4만 명을 태운 탈출 함대는 드디어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밤에 탈출한 덕분에 한동안은 발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악천후와 독일 공군의 폭격에 소해 작업을 거의 하지 못했다. 이미 항구에서만 Ju 88의 폭격으로 1000여 명이 사망했고 5척이 침몰했다. 해가 뜬 후 이들을 발견한 독일군은 이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공격을 개시했다.

루프트바페는 폭격을 개시했고 크릭스마리네와 핀란드 해군은 어뢰정으로 소련 선박을 공격하고 기뢰를 매설한 해안으로 배들을 몰았다. 소련군은 연막으로 폭격을 막았지만 이로 인해 기뢰를 보지 못하고 어뢰정에 쉽게 대응하지 못했다.

육지에 대기하던 150mm 함포도 불을 뿜었다. 기뢰가 한 가득인 해안을 돌파하던 많은 상선과 군함이 격침되거나 큰 손상을 입었다. 소련군은 탈출 함대를 호위할 전투기도 없어 함대의 출혈은 더 심해졌다. 침몰한 배에 있던 사람들을 구해줄 여력도 없었다.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레닌그라드로부터 35km 떨어진 고글란트 섬으로 수영해서 갔고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12000여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8월 30일에 구조됐다.

8월 29일 선두 부대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했고 독일 공군은 레닌그라드까지 함대를 쫓아갔다가 레닌그라드의 방공방이 불을 뿜자 그제서야 물러갔다. 하지만 후속 부대는 독일 해군과 공군 해안포에 계속 공격을 받았다. 8월 31일 마지막 후속 부대가 레닌그라드에 도착하면서 철수 작전은 끝났다.

165척의 배들이 탈출했으며 66000톤의 장비도 가져왔고 28000명의 인명도 구했다. 12000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고 16척의 군함, 28척의 대형 수송선과 6척의 소형 수송선, 34척의 상선들이 침몰했고 기뢰에 의한 피해가 꽤 컸다. 독일군의 피해는 경미했다.

8월 28일 독일군과 에스토니아군은 소련군이 철수한 뒤 에스토니아 수도인 탈린을 점령한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숲 형제는 독일에 의해 해산됐고 에스토니아 깃발도 나치 깃발로 바뀌게 된다.

성공한 철수 작전이라 할 수 있지만 한동안 공산 정권에 의해 무시되어 왔으며 러시아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철수 작전이다. 현재 주민다에 사망자를 기리는 비가 있으며 소련이 탈린을 되찾은 후 추모 무덤이 조성됐다.

북부집단군은 탈린의 소련군에 발목을 잡혔고 또한 키에프 전투로 인해 전선이 재편되면서 초반에 비해서 진격속도가 확연히 느려지게 된다. 시간을 번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남쪽에 루가(luga) 강과 네바 강에 이르는 외곽 방어선과 그 안에 페테로프(Peterhof) 와 콜트스키(Koltushy)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완성한다.

이후 발트 함대는 레닌그라드 주변 지협에 자리를 잡고 육상부대를 함포로 지원한다.

5.2.3. 베오울프 작전

배오울프 작전 지도

7월 1일 쿠즈네초프 상장은 27군을 히우마 섬과 사아레마 섬으로 방어전을 준비하게 한다. STAVKA는 모스크바에서 21기계화여단을 해체시키고 27군에 배속시켜 전력을 강화시켜준다. 27군 예하 3소총여단 23700명이 방어를 맡았다. 독일군 61보병사단은 에스토니아군도 동원해 전투를 했다. 독일군은 소련군을 혼란시키기 위해 일련의 기만작전을 펼쳤다.

크릭스마리네는 100척의 바지선[19] 150척의 소형 공격선 그리고 엠덴급 경순양함 엠덴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쾰른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 라이프치히를 동원했다. 한편 해안 포격을 위해 출발한 핀란드 해군 주력함인 베이네뫼이넨급 일마리넨이 항코에서 기뢰를 건드려 침몰했다.

독일군은 Vormsi라는 작은 섬을 히우마 섬 공격을 위해 확보한 후 9월 14일 무후 섬에 상륙해 9월 16일에 완전히 점령해서 사아레마 섬을 공격할 교두보를 마련한다. 9월 17일 사아레마 섬을 공격하고 9월 23일 쉐르페 반도로 소련군을 밀어낸다. 그리고 10월 5일 독일 해군의 지원 아래 61사단은 소련군에게 다시 강력한 공세를 가했고 10월 21일에 항복을 받는다. 히우마 섬은 9월 12일에 공격했고 소련군을 타쿠나 반도(Takhuna Peninsula)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9월 21일에 항복을 받아냈다.

독일 공군과 해군이 지역을 포위했기에 소련군이 도망칠 곳은 없었다. 소련군 4천 7백명이 전사했고 1만 9천명이 포로로 잡혔다. 독일군의 사상자는 2850명이었다.

5.2.4. 항코 반도 철수작전

https://en.m.wikipedia.org/wiki/Battle_of_Hanko_(1941)
항코 반도 전역도

항코 반도는 핀란드 헬싱키 주변에 위치한 반도로 소련이 겨울전쟁 레닌그라드 방위를 핑계로 이 땅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이 협상이 결렬되고 겨울전쟁이 일어났고 강화 조약에서 결국 이 땅을 소련에게 30년 동안 넘겨주기로 한다. 아직 핀란드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은 상태라 발트해와 레닌그라드 방위를 위한 해군은 많이 주둔하지 않았고[20] 오히려 육군이 더 많이 주둔했다.

이 항코 반도에 주둔한 소련군은 핀란드군이 계속전쟁을 개전한 이유 중 하나이다. 항코 반도는 계속전쟁이 벌어지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만네르하임 원수는 항코에 있는 23500명의 소련군을 빠르게 포위한다. 하지만 핀란드군은 큰 피해를 우려해 포위만 하고 직접적인 공격을 하지 않고 주로 주변 섬에서 국지전과 정찰 활동과 포격전을 주고 받는 정도였다.[21] 게다가 포위의 대부분을 맡은 17사단은 여름에 동카렐리야로 배치된다.

1941년 7월 항코 반도 주변 군도에서 두 군대 모두 수륙 양용 작전을 수행했고 여러 유형의 전투와 해상 철수가 반복되었다.

모로곤란덴트 섬을 점령한 소련군은 등대가 있는 벵츠카헤르 섬을 침공한다. 핀란드는 이들을 독일 지원군으로 착각하고 상륙을 허용했지만 그 이후는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등대 경비대는 치열하게 방어전을 펼쳤고 핀란드 해군과 해안포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막았다.

핀란드 해군에서는 6척의 건보트가 출동했고 그 중 두 척인 우시마와 헤미네마는 소련군과 교전하고 우시마는 소련의 MO급 경비정 한 척을 사격을 가해 침몰시켰다.[22] 이 전투 외에도 이와 같은 여러 치열한 전투가 있었지만 전략적으로 큰 이득이 없어 작전 자체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이러한 항코 반도 주변 군도에서 펼쳐진 작전들은 대부분 10월에 끝난다.

직접적 공격을 하지 못한 대신 핀란드군은 항코 반도 해안을 포위해 보급품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했다. 그러나 핀란드 해군은 장비의 질이 떨어지고 숫자도 부족했고 크릭스마리네의 전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강력한 소련 해군의 저항은 해안 봉쇄를 불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이에 독일과 핀란드는 기뢰로 대응했고 기뢰가 많아지자 소련 해군과 보급선의 피해가 커졌고 후에 철수 작전 과정에서도 기뢰로 인한 피해가 많았다. 물론 소련 발트 함대도 기뢰를 많이 설치했고 핀란드의 상선과 두 해군도 어느 정도 피해를 봤다.

1941년 10월 16일부터 12월 2일까지 철수 작전이 실행됐다. 여러 호송대가 단계적으로 레닌그라드로 이들을 철수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3척의 구축함과 2척의 대형 수송선과 2척의 소형 수송선이 핀란드 해군과 기뢰와 해안포에 의해 침몰한다. 소련군이 철수한 후 핀란드군이 항코 반도를 점령한다.

5.3. 1942년 - 소련 해군의 분투

독일 육군의 진격과 루프트바페의 공습 그리고 핀란드와 독일 해군이 설치한 엄청난 수의 기뢰로 발트 함대의 활동 영역은 상당히 축소된다. 하지만 발트 함대는 포위된 레닌그라드를 돕기 위해 최대한 작전을 펴쳤다.

5.3.1. 아이스 슈토스(얼음 타격) 작전

1942년 4월 루프트바페가 발트 함대에 공격을 가한 작전이다. 소련의 발트 함대의 지원포격은 분명 독일 육군에게 부담이 되었고 독일 공군은 네베이에 주둔하고 있던 이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당시 네베이는 아직 얼어 있어 소련 발트 함대가 원활한 기동을 하지 못했고 독일은 이를 파악하여 얼음이 녹기전에 발트 함대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942년 3월 28일에 작전 명령이 떨어졌다. 이 작전은 제1 항공대 헬무트 페르스터 공군 장군에 의해 실행됐다.

1942년 3월 26일 제 1항공대는 폭격기를 대기시킨다.또한 네베이의 소련 발트 함대의 위치를 확인하고 한 호수에서 소련 선박을 닮은 연습 표적을 만들어 훈련을 한다. 독일 공군은 우선 목표를 강구트급 전함 키로프급 순양함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1톤에 달하는 폭탄들이 보급됐다. 독일 포병들은 공군을 지원하기 위해 레닌그라드에 위치한 대공포와 소련 발트 함대와 항구를 포격할 준비를 하고 소련 공군에 대비해 대공포도 준비한다.

한편 소련은 레닌그라드 방공 부대를 강화하기 위해 화기지원과 재편성을 개시했고 발트 함대를 엄호할 전투기들을 배치시킨다. 그리고 소련 정보 부대가 독일 공군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독일군이 만든 소련 해군의 군함을 닮은 연습 표적을 발견하자 함대의 배치를 바꾸고 더욱 넓게 포진시킨다. 그리고 1942년 3월 31일 이후로 레닌그라드에 배치된 모든 부대는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간다.

1942년 4월 4일 독일 공군의 항공기 191대가 3그룹으로 나누어 공중 추돌을 막기위해 녹색 불을 키고 19시간 동안 발트 함대에 공습을 개시한다. 소련 발트 함대의 군함중 직접적으로 폭격을 받은건 키로프 순양함 한 척 이었고 키로프 순양함의 갑판과 보트에 폭발이 일어났다. 이 폭발로 인해 근처에 있던 두척의 순양함이 손상을 입었다. 또한 6척의 군함이 파편등에 의해 가벼운 피해를 입었다. 독일 폭격기들은 대다수가 레닌그라드 주거 지역을 폭격했고 이로 인해 116명이 사망하고 311명이 부상을 입었다. 한편 소련 공군은 늦은 출격으로 제대로 활약하지 못한 채 전투기 4대를 잃었다. 독일 공군은 약 10대가 손상되는 경미한 피해를 입었다.

4월 5일 독일 공군의 폭격기 31대가 강구트급 전함 10월 혁명호를 폭격했고 민간인 포함 50명이 사망하고 100여명이 부상을 당한다. 독일 공군은 마라 폭격 이후 한번 더 공습을 개시하려 했지만 지금까지 작전을 검토한 결과 작전 효율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퀴흘러 데미얀스크 전투의 지상군 지원 요청이 들어오자 세 번째 공습은 취소한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포기하지 않았고 데미얀스크 가도가 열리면서 제 2군단이 포위에서 풀려나면서 독일군 지상군의 상황이 나아지고 히틀러의 소련 선박 공격 촉구로 독일 공군은 다시 한번 소련 발트 함대에 공습을 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괴츠 폰 베를리힝엔 작전을 개시한다. 이 작전에서 독일 공군은 전술에 변화를 주는데 소수의 폭격기로 다양한 방향에서 정밀하게 공격하고 구름을 이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전술은 소련군의 기존의 대공망이 예상하지 못한 전술이었고 그 결과로 발트 함대는 위험에 빠진다. 1942년 4월 24일 폭격기 62대와 전투기 28대가 3시간 동안 첫 번째 공습을 개시한다. 10월 혁명에 25개의 항공 폭탄이 떨어져 2개의 대형 대공기관총이 파괴되었고 2척의 구축함, 트럭 2대, 경비함 5척, 보조함 1척이 항공 폭탄 15대와 기총 100대를 맞아 피해를 입어 4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키로프 순양함의 피해가 컸는데 폭탄 3개를 직격으로 맞아 예비 지휘 구역이 파괴되고 일부 파이프 라인이 파손되는 등 여러 시설이 파괴되었고 탄약 저장고에 불이 번져 유폭이 나서 피해가 커졌다. 포 6문과 대공 기관총 2기가 파괴되었고 86명이 사망하고 46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3개의 해안포와 군항과 군수 공장등 여러 군사 시설 건물과 발트 함대 지휘소도 공습을 가했다. 이로 인해 주택 36채가 파괴되었고 민간인 포함 117명이 사망하고 34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소련은 20대의 항공기를 격추했고 14기를 파손시켰다고 보고했다. 독일은 이 공습에서 2기를 잃었다고 한다.

이 공습에서 심각하게 파괴된 키로프급 순양함 키로프는 막심 고리키와 같이 즉각 예인되어 독일군의 공습 순위에서 낮은 다른 배들 사이로 이동되어 이들과 같게 보이기 위한 위장을 했다. 또한 이들의 취약해진 대공 능력을 보조하기 위해 주변에 대공 화기가 강화되었다.

4월 25일 독일은 40대의 폭격기로 2차 공습을 가했다. 독일 공군은 촘촘하게 배치된 소련의 대공 화기로 인해 우선 폭표 순위에 쉽게 도달하지 못했고 보로시롭그 여객선과 선박 1척을 침몰시겼다. 소련군은 이 공습에서 독일군 폭격기 17대를 격추했다 주장했지만 독일은 1대도 잃지 않았다고 한다.

4월 27일 독일은 40대의 폭격기와 15대의 전투기가 3차 공습을 가했다. 순양함 막심 고리키의 피해가 컸고 키로프 주변 선박 여러대가 침몰했다. 해안에 배치된 대공 진지 2개도 파괴되었다.

4월 30일 마지막 공습에서 독일은 일부 배를 소파 시킨거 외에는 전과를 올리지 못했으며 소련군 사망자는 없었다. 독일은 폭격기 한대가 집중 포화를 맞았다.

이 공습으로 소련군은 전함 10월 혁명과 순양함 막심 고리키, 잠수함과 잠수정 8척 구축함 2척이 피해를 입고 키로프급 순양함이 대파되고 보조선 3척과 잠수함 3척을 잃었다. 또한 소련군은 자신들의 공습 대비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다. 독일 공군은 총 596번 출격했고 폭탄 500톤을 소비했으며 피해는 자료마다 다양한데 소련측은 25대~60대의 독일 항공기가 손상되거나 격추되었다고 하고 독일측은 총 2대만 격추 되었고 10여대가 파손 되었다고 한다. 독일측의 자료가 더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5.3.2. 소련 잠수함들의 분투


하지만 이렇게 소련 잠수함들의 용감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추축국의 주축인 독일군의 평가에 따르면 소련 해군 잠수함들의 전략/전술적 가치가 매우 낮다라고 평가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일찍이 독일과 소련이 사이가 나름 좋았을 시절, 소련 해군 잠수함의 설계와 건조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독일이었기에 소련 잠수함들의 기술 수준이나 훈련 수준, 전력 규모에 대해 어느정도 간파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U보트로 막대한 재미를 본 나라의 평가답게 그 평가는 나름 냉정했다. 발트해 일대에 부설되기 시작한 기뢰들은 소련 잠수함들의 통상적인 훈련 및 초계작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낮은 수심과 좁은 해역 덕분에 훈련할만한 곳도 마땅찮았다. 이미 이전부터 소련 해군은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예산 배정부터 후순위로 밀려있던 데다 훈련 수준 역시 진작에 막장가도를 달리고 있었으며 대숙청의 영향은 엄청났고 이런 답 안나오는 상황에 독소전쟁이 발발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버린 것.

이 때문에 소련 잠수함들은 어뢰를 발사하고 나서 표적이 침몰했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할 경우 어뢰를 쏘고 명중하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이는 전과 과장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적으면 2배, 심하면 5배까지 전과 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8월 11일부터 8월 21까지 활동한 소련 잠수함들이 보고한 전과는 14척 격침, 톤수 10만 톤을 달성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5척 격침, 톤수 1만톤이 전부였다. 또한 기본적인 조타에도 문제가 많아 접촉할 이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기뢰에 접촉해 침몰하거나 좌초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분투하긴 했으나 소련 잠수함대가 보고한 전과보다 훨씬 모자란 전과만을 겨우겨우 기록했고 1900여대 규모를 가진 추축군 선단의 피해는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40만명의 병력 수송을 저지하는 데에 실패했다.

5.3.3. 수르사리 섬 전투

5.3.4. 소메리 해전

5.4. 1943년


5.5. 1944년 - 대 소련 포위망

5.5.1. 강화 조약

5.5.2. 기뢰원의 무력화

5.6. 1945년 - 신들의 황혼

5.6.1. 사상 최대규모의 퇴각작전

5.6.2. 독일 피난선들의 고난

6. 결과

7. 여담



[1] 1차세계대전 당시 보조함으로 쓰였으나 2차세계대전 때 소해함으로 개조된다. [2] 베이네뫼이넨, 일마리넨 [3] 베시히시, 이쿠-투르소, 베테히넨, 베시코, 사우코 [4] 투룬마, 카르얄라, 우시마, 하멘마 [5] 마라, 옥차브리스카야 레볼루치야 [6] 키로프, 막심 고리키 [7] 그녜브늬, 고르듸, 그리먀시, 그롬키, 그로즈늬, 그라쟈시, 스테례구쉬, 스트례미텔늬, 사크루쉬텔늬 [8] 스토로제보이, 스토이키, 세르디틔, 싈늬 [9] 레닌그라드 [10] 민스크 [11] 마르티 [12] S-1, S-3, S-4, S-5, S-6, S-7, S-8, S-9, S-10, S-101, S-102 [13] L-3 [14] Shch-301, Shch-302, Shch-303, Shch-304, Shch-305, Shch-306, Shch-307, Shch-308, Shch-309, Shch-310, Shch-311, Shch-317, Shch-318, Shch-319, Shch-320, Shch-322, Shch-323, Shch-324 [15] M-71, M-77, M-78, M-79, M-80, M-81, M-83, M-90, M-94, M-95, M-96, M-97, M-98, M-99, M-102, M-103 [16] 소련 해군보다 독일 유보트의 공격으로 침몰한 상선이 더 많았다. [17] 당시 소련군이 발트 3국을 점령하면서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이쪽에 주둔했던 소련군에 대한 연구와 기밀문서 해제가 아직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18] 후술할 쿠즈네초프는 모두 이 인물을 지칭한다. [19] 웬 바지선?이라고 생각 할 수 있겠지만, 독일은 엄연히 무장한 바지선을 운용했다. 지벨패러(Siebelfähre)라고 불리는 쌍동 바지선이 대표적인 물건이다. 무장은 주로 대공포로 했는데, 20mm Flak30/38 4연장 터렛이나 88mm 대공포를 장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20] 항코 반도는 처음부터 해군 기지로 빌렸다. [21] 이는 소련군도 마찬가지였다. [22] 이 전투에서 핀란드는 소련군 60명이 전사했다고 추정하고 소련은 2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