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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21:17:23

미치코 상황후

미치코 황태자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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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의 황후
미치코
美智子
파일:EmpressMichikoOfJapan.jpg
<colcolor=#dca600> 출생 <colbgcolor=#fff,#1f2023> 1934년 10월 20일 ([age(1934-10-20)]세)
도쿄도 분쿄구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출신 도쿄도 시나가와구 히가시고탄다
즉위 1990년 11월 12일 (도쿄 고쿄)
재위기간 일본 황후
1989년 1월 7일 ~ 2019년 4월 30일
일본 상황후
2019년 5월 1일 ~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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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dca600> 이름 <colbgcolor=#fff,#1f2023>[ruby(美, ruby=み)][ruby(智, ruby=ち)][ruby(子, ruby=こ)](미치코)[1]
신장 161cm
부모 부친 쇼다 히데사부로(正田 英三郞)
1903년 ~ 1999년 (향년 96세)
모친 쇼다 후미코(正田 富美子)
1909년 ~ 1988년 (향년 79세)
형제 오빠 쇼다 이와오(正田 巌)
1931년 ~ ([age(1931-01-01)]세)
여동생 안자이 에미코(安西 恵美子)[2]

남동생 쇼다 오사무(正田 修)
1942년 ~ ([age(1942-01-01)]세)
배우자 아키히토 상황
1933년 12월 23일 ~ ([age(1933-12-23)]세)
자녀 2남 1녀
나루히토 천황
1960년 2월 23일 ~ ([age(1960-02-23)]세)
후미히토 친왕
1965년 11월 30일 ~ ([age(1965-11-30)]세)
구로다 사야코
1969년 4월 18일 ~ ([age(1969-04-18)]세)
학력[3] 덴엔초후 후타바 여학원 유치원 (수료)
덴엔초후 후타바 여학원 초등과 (졸업)
세이신 여학원 중등과 (졸업)
세이신 여학원 고등과 (졸업)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 / 학사)
종교 가톨릭 신토[4]
십이지 개띠 (갑술년)
오시루시[5] 자작나무 }}}}}}}}}
파일:6fc0f1e2278c3b47acb1cd441ff31edc.webp
쥬니히토에(十二単)를 입은 미치코 상황후
1. 개요2. 생애3. 남편 아키히토와의 관계4. 가족
4.1. 황실 가계도4.2. 자녀
5. 남편 아키히토의 양위6. 루머7. 여담

[clearfix]

1. 개요

아키히토 상황의 배우자로 현재 일본 상황후이다. 또한 일본 최초의 평민 출신 황후이기도 하다.[6] 비록 미치코 상황후는 평민 출신이나, 당시 일본에서 손꼽히던 재벌가의 딸이었다.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될 수 있는 분위기와는 다분히 거리가 먼, 명백한 일본 상류층의 일원이었던 것이다.

쇼와 덴노 고준 황후의 큰며느리이며, 나루히토, 후미히토, 구로다 사야코의 모후, 마사코 황후 키코 비의 시어머니이자, 아이코 공주,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 히사히토의 친할머니이기도 하다.

2019년 5월 1일, 아키히토상황(上皇)으로 물러나면서 미치코 황후 역시 황실전범에 따라 상황후(上皇后)에 책봉되었다.

2. 생애

2.1. 결혼 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미치코 상황후/결혼 전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m5.jpg
1959년 1월, 결혼을 3개월 앞두고서 친정에서 코 후리소데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미치코
당시 아시아 최대의 제분회사였던 닛신(日清) 제분[7] 사장의 딸로 태어난 재벌가 영애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가족들의 사랑과 비호 아래 곱게 자랐다.

이외에도 미치코는 공부, 운동, 요리, 음악, 미술 등등 못 하는 것이 없는 엄친딸이자 모범생이였으며, 이렇게 뛰어난 미모에 각종 재색까지 겸비했던 그녀는 가정과 학교에서 두루 사랑받았다.

2.2. 결혼 후

파일:B2EE6014-6C20-48D5-BD6A-9E1F6E9638C3.jpg
1960년, 아키히토 황태자와 함께 아들 나루히토를 바라보고 있는 미치코 황태자비.
미치코 황태자비는 결혼한지 열달만에 첫 아들 나루히토를 낳았다. 그녀는 고쿄 내의 산전(産殿) 대신 궁내청 병원에서 출산했는데, 당시 시민들은 고쿄 앞 정원에 모여들어 궁내청 병원이 있는 쪽을 바라보며 기도까지 했다. 취재하러 온 기자들은 친왕이 탄생했다는 궁내청의 발표를 듣자마자 이 소식을 본인들의 언론사 지면 먼저 싣기 위해 앞다투어 뛰어나갔으며, 미래의 덴노가 될 남자 황손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작년에 있던 두 사람의 결혼식 못지 않게 일본 열도를 흥분시켰다. 시아버지 쇼와 덴노 장손의 탄생에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그녀는 혹독한 시집살이를 당하면서도 황실 생활의 여러 면에서 천년 동안 전해져 온 전통을 깨고 파격적인 면모, 즉 평범하며 가정적이고 인간적인 행보를 많이 보였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품에서 떼어내 신하들에게 양육을 맡기는 전통을 깨고 아이를 직접 자신의 품에서 젖을 먹여 길렀다. 시어머니 나가코 황후도 직접 모유 수유를 했지만 유모도 두었다. 하지만 미치코 황태자비는 아예 유모를 두지 않고, 직접 수유하다가 모유가 부족하면 분유를 먹였다고.

결혼 전 연애하던 시절, 쇼다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로부터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 들었다. "황실의 전통에 따라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품에서 떨어져 자라났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음식[8]을 먹은 적도 없다."하는 말을 듣고 미치코는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깊은 연민을 느꼈다. 그래서 미치코는 따뜻하고 단란한 가정, 보통 사람들의 평범하고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가정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 전부터도 미치코는 "결혼하면 아키히토 황태자에게 손수 카레라이스 요리를 해주고 싶다." 말했다고 한다.
파일:745D81C9-0C79-4357-BA61-286EB4102630.jpg
1961년, 아카사카 어소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손수 요리를 하는 미치코 황태자비
미치코 황태자비는 자녀교육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미국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포크 박사의 저서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를 영어 원서[9]로 읽으며 육아에 대해 공부하여 나름의 육아 지침을 세웠다. 공무(公務) 때문에 시종에게 아이를 맡길 때면 이 지침대로 돌보게 했다. 이는 나루 짱[10]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라고 불리며 많은 일본 부모들의 공감을 샀으며, 《The Common Sense Book of Baby and Child Care》는 일본어로 번역되어 일본에서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훗날 차남 부부가 낳은 두 손녀 코무로 마코 카코 공주도 '나루 짱 헌법'에 따라 양육되었다.
파일:external/68a822ec476a557085fad706a764ba63161e8e049a0935c074c40720f001b84e.jpg
1971년 10월, 만 37세 생일을 며칠 앞둔 미치코 황태자비

2.3. 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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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결혼 전의 쇼다 미치코는 그야말로 팔방미인이었고, 이는 ' 일본 황실 최초의 평민 출신이자 미래의 황후'가 되어 전 일본 여성들의 부러움까지 한몸에 받으면서 결실을 맺은듯 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달랐으며, 이는 평생 마음고생이 보장된 가시밭길의 시작이였다.

시어머니 고준 황후 아들을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인지,[11] 아니면 딸들의 불행한 삶과 죽음에 대한 화풀이였는지,[12] 정말 죽기 직전까지도 계속 큰며느리 미치코 상황후를 인정하지 않고 괴롭혔다.

3. 남편 아키히토와의 관계

파일:crown princess michiko2.jpg
파일:external/www.laura.jp/1c572536.jpg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에든버러 공작처럼,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하다. 황실에서 시집살이하면서 온갖 푸대접을 받았음에도 남편을 내조했다는 점에서도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13] 황실에 시집와서 모든 걸 잃었던 미치코 황후에게 있어 늘 자신의 곁에 있어주는 마음씨 좋은 남편이 의지할 수 있는 세상의 전부나 다름없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함께 공무하는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 서로를 자연스럽게 바라보면서 짓는 미소가 잘 어울린다.[14] 이는 현재 천황인 장남 부부 나루히토 마사코 황후의 사이에서도 잘 나타난다.
파일:attachment/미치코 황후/old3.jpg

테니스를 통해서 처음 만난 것 때문인지, 지금도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테니스를 치기도 한다.

4. 가족

4.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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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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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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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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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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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4.2. 자녀

자녀들이 어렸을 때엔 칭호나 휘(이름)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애칭으로 불렀다. 나루히토 황태자는 휘 '나루히토'의 앞글자 '나루', 후미히토 친왕은 칭호 '아야노미야'의 앞글자 '아야', 사야코 공주는 이름 '사야코'의 앞글자 '사야'라고 했다.

이제 일본 화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2남 1녀 모두 일반인과 결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일본의 화족들은 신헌법에 따른 신분제 폐지로 인해 공식적으로 지위가 무효화되었기에, 현대 일본에 화족은 사실상 없다. 그런데도 1959년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올 때 옛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그 난리를 떨었으니, 참으로 시대착오적인 일이다.

5. 남편 아키히토의 양위

2016년 8월부터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가 거론되고 있다. 미치코 황후 역시 이에 대해 찬성이며, 두 아들( 나루히토, 후미히토)과 상의하고 있다고 한다. 2017년 6월 9일 일본 국회에서 "천황의 양위 등에 관한 황실전범특례법"이 통과되었는데, 양위 후 아키히토의 칭호가 과거의 태상천황을 줄인 상황이 아니라 그냥 상황(上皇)으로 결정됨에 따라, 미치코 본인의 칭호는 상황후(上皇后)가 되었다. 만약 아키히토가 미치코보다 먼저 서거한다면 그 때부터 미치코 황태후로 불릴 수도 있다.

2019년 6월 13일자로 사실상 생전퇴위 관련 공식일정이 끝났다. 미치코 상황후는 6월 중에 백내장 수술이 예정되었다. 현재 심장에도 문제가 있다 보니, 최대한 신경쓰면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고쿄에서 임시 거처로 이사할 준비를 할 것으로 보인다.

양위 이후, "미치코 상황후는 백내장 이외에도 여러가지 방면에서의 건강 상태가 계속해서 안 좋아졌다"는 보도들이 나왔다. 결국 8월 9일, 궁내청은 "미치코 상황후가 초기 유방암으로 확정[15]되어 9월 중 수술을 받을 예정"이라고 발표한다. 유방암 발표 전에 "상황/상황후가 7월 말 요양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에 다시 요양을 할 것"이라는 궁내청 발표가 있었는데, 아마 수술 후 휴양을 가는 것으로 보였다.

9월 7일, 미치코 상황후는 도쿄대학병원에 입원하여 다음날인 8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약 4시간 정도 수술을 받았는데, 한동안 입원할 예정이라고 밝혀졌다. 이에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딸 구로다 사야코가 병원에 방문해, 미치코 상황후가 수술실로 올라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수술을 잘 마치고 9월 11일에 퇴원했다. 이날은 공교롭게도 작은며느리 키코 비의 53세 생일이기도 해서 바로 오후에 키코 비의 생일기념행사에도 참석하였다.

2019년 10월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막대한 양의 이삿짐을 정리하는 건 미치코 상황후 혼자라고 한다. 아무리 초기 암이라 호르몬 치료로 다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연달은 수술로 건강이 안 좋아진 상태에서 약 120톤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짐을 혼자서 정리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시종들이 도우려고 하지만, 미치코 상황후는 혼자서 하겠다고 도움을 사양하고 있다. 덕분에 미치코 상황후는 아침 일찍 기상해서 밤 늦게까지 혼자서 짐 정리에 몰두한다고 한다.

2019년 10월 15일, 궁내청에서 미치코 상황후의 생일 행사에 대해 발표했다. 미치코 상황후는 10월 20일에 85세 생일을 맞이한다. 하지만 생일축하행사는 대폭 간소화되었다. 태풍 19호의 영향도 있고, 생일 2일 후인 10월 22일에 열리는 큰아들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 행사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 행사들을 취소하고, 대신 간단히 가족들과 식사하는 것으로 대체했다고 한다.

2019년 10월 한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미치코 상황후는 작은며느리 키코 비로부터 인터넷 사용법을 배워, 인터넷으로 일본 황실 관련 뉴스를 보고 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미테코(ミテコ)'라는 단어를 보고, 미치코 상황후는 시종들에게 "이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았다. 시종들은 '미테코'라는 단어가 미치코 상황후를 비하하는 용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차마 사실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그냥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회피했다. 그러나 미치코 상황후는 시종들의 그러한 태도에서 눈치를 챈 듯하다고 한다.

2019년 10월 23일, 큰아들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 축하 궁중차회에 남편 아키히토 상황과 참석하여 미치코 상황후가 직접 큰며느리 마사코 황후를 대외 귀빈들에게 소개시켜줄 예정이라고 하였다. 원래 이때 미치코 상황후가 노래도 부르려고 했으나, 건강상의 문제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날은 맏손주 마코 공주의 28세 생일이기도 했다.

6. 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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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1] 혼인 전 이름은 쇼다 미치코(正田 美智子). 이름 ’미치코‘는 시할머니 데이메이 황후의 조카손녀 카야 도시코(賀陽梅子)의 딸 미치코와 동명으로, 한자까지 같다. [2] 결혼 전 이름은 쇼다 에미코. 안자이 가문의 다카유키와 결혼했다. 안자이 가는 전후 경제계에서도 손꼽히는 규벌을 구축한 명문가로 스미토모 재벌, 사토 에이사쿠 가문, 미키 다케오 가문과도 연결된다. [3]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쭉 가톨릭 미션스쿨이다. [4]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면서 개종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고 있다는 소문이 많다. [5]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 [6] 반대로 시어머니인 고준 황후는 마지막 황족 출신 황후가 되었다. [7] 대선제분 영등포공장 건물이 일제강점기 때 이 회사 공장이었다. [8] 쇼와 덴노, 고준 황후, 그들의 2남 5녀가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은 주말뿐이었다. 고준 황후는 큰아들 아키히토 황태자가 좋아하는 두부 요리를 직접 만들기도 했지만, 아키히토 황태자가 이 음식을 직접 먹은 적은 없다고 한다. [9] 미치코 황후는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영어회화도 잘 했다고. 1993년 뉴델리에서 열린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 제26차 총회에 전달한 영상메시지에서 영어로 기조연설을 하기도 했다. [10] 맏이 나루히토 황태자의 이름에서 딴 것. [11] 히로히토 천황이었을 당시의 일본 사회는 자식을 부모가 소유하는 것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1960년대의 한국도 비슷했다.) 게다가 아키히토 고준 황후가 딸만 넷 낳다가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아키히토가 태어나기 전까지 고준 황후는 딸만 낳는다고 엄청난 압박과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 후궁 제도를 부활하는 것까지 심각하게 거론되곤 했다. 실제로 신하들이 후궁 후보로 몇몇 규수들을 정하여 쇼와 덴노에게 규수들의 사진까지 제출했다. 그러나 쇼와 덴노가 후궁 들이는 것을 매우 거부하여 실현되지는 못했다고. 후에 두 아들 아키히토 마사히토가 태어나, 간신히 후궁 제도의 부활 여론이 잠잠해졌다. [12] 쇼와 덴노 고준 황후의 장녀 히가시쿠니 시게코는 패전 후 구황족 황적이탈로 황족의 신분을 잃고 고생하다 병을 얻어 어린 3남 2녀를 두고 요절했고,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는 생후 6개월에 요절했다.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와 4녀 이케다 아츠코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가즈코의 남편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는 간통하다가 불륜녀와 함께 죽었고, 과부가 된 가즈코는 강도에게 부상까지 당했다. 아츠코도 부부 관계가 역시 원만하지 못했고,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단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만이 유일하게 행복한 결혼 생활을 보냈다. 차남 마사히토 친왕은 조용히 살고 있지만,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자녀를 낳지 못했다. [13] 심지어 아내와 금슬이 좋다는 필립조차 생전 여러번 불륜을 저질러 엘리자베스가 그 시대 왕족처럼 참고 용서해주느라 며느리 다이애나 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아키히토 부부는 그런 유언비어조차 없다. 다만 실제로 필립이 노여워했던 대상은 다이애나보다는 아들인 찰스였으며, ' 바람을 피우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본처에게 충실하지 못한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4] 둘째 며느리인 키코 비가 굉장히 억지스럽고 기괴한 웃음을 짓는 것과 대비된다는 평이 많다. 키코 비도 젊은 시절에는 미소가 예뻤으나 남편의 외도와 가정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태도, 그리고 3명의 자녀 교육과 지나치게 많은 공무에도 치이면서 혼자 책임져야하는 상황 속에서도 대외적으로는 웃는 모습을 보여야하는 탓에 지금처럼 억지스런 미소를 짓는 모습이 되었다. [15] 7월 12일 건강검사에서 이상이 발견되어 15일 도쿄대학병원에서 MRI를 찍어보니 이상이 확실시되었고, 이후 8월 2일 궁내청 병원에서 조직검사를 한 결과 유방암 초기임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16] 평민 출신인 형님 미치코 황후와 달리, 옛 화족 가문 출신이다. 평민 출신의 큰며느리를 미워한 고준 황후가, 작은며느리는 화족 가문 출신으로 직접 고른 것이다. 단 하나코 비는 (남편 마사히토 친왕의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했다. [17] 미치코 황후가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중상을 일체 비난하는 일 없이 침묵을 지키는 기품 있는 자세를 보여주자, 많은 일본인들이 감명을 받았다. 덕분에 주간지 등의 비방 기사가 종식되기도 했다고 한다. [18]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인 나시모토 이츠코의 여동생. 즉 이방자 비의 이모가 된다. 또한 노부코는 다이쇼 덴노의 차남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의 장모이자, 가쿠슈인 동창회장을 지내는 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황족들과 화족들의 우두머리로 군림했다. [19] 이방자 비의 친정어머니.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가 황실로 시집온다는 사실에 몹시 분개하여, "이제 일본도 다 끝나 버렸구나!!"라는 글까지 남겼다. [20] 마차습격 장면이 찍힌 퍼레이드 영상.(1분 4초 경) 이때 미치코 황후는 깜짝 놀라 쓰러지듯 몸을 움츠리며, 마차의 마부들과 경호원 및 경관들이 황태자 부부를 필사적으로 보호하며 폭도를 떨어뜨려 놓는다. 여담으로 마차를 습격한 폭도는 19살의 청년으로 평소 천황제에 반대해왔고, "황족의 결혼식에 3억엔에 가까운 세금을 쓰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불경죄 같은 건 패전 이후 법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에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구류 50일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지만, 근왕의식이 잔존하던 당시 일본의 사회 분위기 탓에 누나가 파혼당하고 형이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등의 불이익을 받았다고 한다. [21] 물려받은 유산은 미치코 황후의 친정인 쇼다 가문의 소유이기 때문에, 황실비처럼 황실로 흡수되지 않고 사인 대 사인으로 상속되었을 자산이어서 미치코 황후 개인의 재산이 된다고 한다. 만약 유산상속을 받았더라면 영국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처럼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친정 스펜서 백작가문의 재산은, 다이애나의 두 아들 웨일스 공 윌리엄 서식스 공작 헨리 왕자가 물려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