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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독일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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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독일
독일어: Deutsch-französische Beziehungen
프랑스어: Relations entre l'Allemagne et la France
영어: France–Germany relations

1. 개요2. 단순비교3. 역사
3.1. 근대 이전 3.2. 19세기3.3. 두 차례의 세계 대전3.4. 2차 대전 후3.5. 21세기
4. 관련 기사5. 관련 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www.stratfor.com/france_germany.jpg

프랑스 독일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항목. 전통적으로 두 국가는 앙숙이었으며 특히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통하여 독일이 통일을 이루고 독일 제국을 세운 뒤로는 거의 반 세기 넘게 실질적인 주적이었다. 또한 뒤이은 1차 대전 2차 대전을 연달아 거치면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은 극도로 증폭되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적극적인 과거사 청산 및 유럽연합의 창설 등을 통하여 두 국가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으며, 진정한 우방으로 발전했고 EU의 쌍두마차로 불리고 있다. 특히나 2011년에는 프랑스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가장 호감가는 국가 1위로 독일이 꼽혀서 상당한 놀라움을 안겨줬다.

2. 단순비교

국가 독일 프랑스
면적 357,021km² 674,843km²
인구 83,838,212 67,448,986
정치제제 의원내각제 이원집정부제
1인당 GDP $50,841 $46,933
명목 GDP $4조 1,116억 $3조 1,962억
국방비 360억 달러 612억 달러

3. 역사

독일은 신성 로마 제국이 뿔뿔히 흩어지고 19세기 후반에 독일 제국이라는 근대적 통일 국가로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무수한 군소 공국들로 분열된 상태였고 1871년 이전의 '독일'이란 일국의 정치체가 아닌 역사, 문화를 공유하는 관념상의 지역주의 개념이었다. 따라서 본 단락에서 언급하는 독일은 오늘날의 독일 연방공화국을 넘어서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 문화권'을 지칭하고 있다.

1871년에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전쟁을 통해 강제로 배제한 후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소위 말하는 '독일'이란 사실상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가리켰다. 중부 유럽 국가들의 공통 조상인 신성 로마 제국 또한 르네상스 이후 근세에는 '도이치(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 일컫어졌다. 따라서 '독일'이라는 말의 의미와 범위는 시대가 지나며 변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과거의 '독일'이란 보통 신성 로마 제국의 강역, 특히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의 강역을 나타낸다.

따라서 '독일'이란 단순히 현대(21세기)의 '독일연방공화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존재했던 무수한 독일계 국가들을 모두 뭉뚱거려 일컫는다.

3.1. 근대 이전


고대 로마 라인강 이남만을 차지했고 독일 지역에는 로마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다. 다만 당시 프랑스와 독일은 독자적 정체성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절의 역사가 이후의 프랑스-독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물론 문화적으로는 프랑스를 비롯한 로망스어권과 독일을 위시한 게르만어권이 나뉘는 계기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독일 관계의 시작은 카롤루스 대제 사후 베르됭 조약에 의거하여 프랑크 왕국이 삼분되면서부터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베르됭 조약 이후로 양국 사이에 대규모 전쟁은 없었으나 전혀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1214년 신성 로마 제국 오토 4세는 잉글랜드의 존 왕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공격했다가 부빈 전투에서 패했다. 또한 1496년 이탈리아 전쟁에서 막시밀리안 1세 밀라노를 차지하려는 프랑스를 상대로 교황령, 베네치아, 밀라노, 아라곤 등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군과 싸운 일도 있었다.

그러다 머나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카를 5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크게 바뀌게 된다. 카를 5세는 오늘날의 베네룩스 일대를 비롯한 라인강 지역을 재패한데 이어 스페인의 왕위까지 차지해버렸고, 프랑스는 유럽에서 고립돼버린다.[1]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프랑스는 허구한 날 합스부르크와 치고박았고 그 중에서도 갈등이 가장 크게 폭발한 것이 17세기의 30년 전쟁이다.

이후 루이 14세 시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하여 스페인의 부르봉 왕조를 세우는데 성공하면서 비로소 프랑스는 외교적 고립을 뚫어버릴 수 있었고, 심지어 18세기 중반에는 동맹의 역전이라는 대격변을 겪으면서 오스트리아와 우방이 된다.

3.2. 19세기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악연이 끝나자 프로이센 왕국이라는 새로운 악연이 등장했다.

본래 프로이센과 동맹이었던 프랑스였지만 동맹의 역전을 통하여서 그 관계는 적대 관계로 변하였고 7년 전쟁을 통하여 프로이센과의 오랜 갈등이 시작된다. 하지만 7년 전쟁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최소한 양국 국민들의 입장에서 전쟁은 '민족 간의 다툼'이라기 보다는 '권력자들간의 다툼'이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적대감 같은 것은 크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프랑스 혁명전쟁을 거치면서 이 또한 송두리째 뒤집어졌다.

파일:external/www.philosophersguild.com/Anne-Louis_Girodet-Trioson_rooster_vs_eagle.jpg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박살내면서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을 무너뜨렸고, 라인강 서안을 프랑스에 합병시키는 한편 라인 동맹을 결성하여 독일문화권을 사실상 프랑스의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2] 이러한 상황에 반발하면서 독일에서 근대 내셔널리즘이 싹트기 시작한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빈 체제가 수립되면서 이런 내셔널리즘은 다시 잠잠해보이는 것같이 보였었으나 오히려 수면 밑에서 내셔널리즘은 세력을 차츰차츰 확장해나가고 있었고, 독일 내에서는 "프랑스를 대신하여 우리 독일이 유럽의 지배자 자리에 올라야 한다."라는 주장이 공공연히 표출됐다. 게다가 프랑스가 꾸준히 독일 연방 내부의 정세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프랑스에 대한 반감 역시 커져갔다.

이렇게 겹겹이 쌓인 반감이 한순간에 폭발하면서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프랑스의 참패로 끝났으며 독일은 프랑스의 심장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을 선포하면서 통일을 이루게 된다.

수세기 동안 유럽의 최고 강대국 자리에서 밀려난 것만으로도 프랑스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는데, 프로이센 왕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게서 받아낸다.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독일에 대한 적대감을 불태웠고 독일은 독일대로 프랑스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소위 '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리는 이 시기 유럽 외교계에서 독일이 철저히 프랑스를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비스마르크가 실각하고 빌헬름 2세가 정국을 장악하면서 독일이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프랑스를 밀어주면서 1890년대에 살짝 양국 관계가 호전될 기미를 보일 듯한 시기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이미 서로에게 쌓인 것이 너무 많았던 데다가 1905년 모로코 위기가 터지면서 말짱 도루묵이 됐다.

3.3. 두 차례의 세계 대전


그리고 이러한 해묵은 원한은 1차대전 2차대전으로 대폭발을 일으킨다. 1차대전 당시 양 측은 모두 협상국 동맹국의 핵심이었던만큼[3] 전황 역시 양국에 의해 주도됐다. 양국이 합쳐서 400만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사자를 낸 끝에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고 프랑스는 50년전의 패배를 잊지 않고 고스란히 갚아줬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독일은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으로 다시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게 돌려주어야 했고 라인란트는 비무장화되었으며 신생국 폴란드에 동부 영토 일부를 할양해야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 내부에서의 여론은 이것조차 너무 관대한 거 아니냐면서 불만이 컸었다. 아예 프랑스 내부에서는 라인란트를 프랑스에게로 합병하려는 방안이 진지하게 논의됐었고, 영국과 미국이 뜯어말리지 않았더라면 실제로 일어났을 가능성도 농후했다.

또한 베르사유 조약이 수립된 이후에도 프랑스는 가능한 한 독일을 재기불능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전쟁배상금 이행이 늦어지자 당시 대통령 레몽 푸앵카레의 주도 하에 벨기에군과 연합하여 독일의 루르 공업 지대를 점령한 일이었다. 심지어는 자국이 IOC를 주도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독일의 올림픽 참여를 막기까지도 하였다.

이러한 프랑스의 강경적인 대독일 정책은 독일인들의 극렬한 반발심리를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같은 승전국이었던 영국과 미국 역시도 이러한 대독일 강경책에 분명한 반대의사를 표시했기 때문에 결국 프랑스는 한 발 물러설 수 밖에 없었고 도스 안, 영 안, 로카르노 조약 등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양국 간의 긴장 완화가 1920년대 중후반부터 찾아온다.

하지만 1929년 대공황으로 전세계 경제가 박살나면서 양국 모두 정치적으로 극도의 불안정성이 야기되고, 특히나 대공황으로 인한 피해가 컸던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정권을 잡는다.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펼치는 아돌프 히틀러 앞에서, 프랑스는 1920년대 초반의 패기는 사라지고 한 마리 순한 양으로 변해버린다. 대표적으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한 일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 프랑스의 유화적인 대독일 정책이 변명거리가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일단 당시의 프랑스 제3공화국은 정치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해서 1년에만도 여러 차례 내각이 엎어지는 판국이었기 때문에 대외정책에 신경을 쓰기조차 버거운 판국이었다. 거기다 같이 독일을 견제해야할 영국과 엇박자는 덤이었다.

인구수도 프랑스는 1814년까지 유럽 1위였던게 1937년에는 5위까지 굴러떨어지는(...) 굴욕을 겪었는데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는 이미 저출산으로 인한 인구수 정체가 심각해서 1937년 기준 인구수가 4,200만명이었다. 20년 전의 1차대전 당시 청년층의 3분의 1 이상을 잃었다. 참고로 당시 이탈리아 인구가 4,300만명, 영국 인구가 4,700만명이고, 독일 인구는 7,800만명으로 소련에 이은 2위였다.

라인란트 재무장 허용과 뮌헨 협정 등을 통하여 프랑스는 최대한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프랑스를 보고 시간이 지날수록 "저것들 호구네. 슬슬 판을 더 벌리자."라는 태도를 보였고 마침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했다. 폴란드 침공은 프랑스의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다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된다. 하지만 1차대전의 악몽으로 인해 프랑스는 전쟁 초기 내내 머뭇거렸고 실로 한심한 모습만 보여주다가[4] 독일한테 프랑스 침공으로 폭싹 무너지고 만다.

독일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프랑스에서 자국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로 남을 비시 프랑스가 수립되었고 전쟁 기간 내내 프랑스는 독일의 빵셔틀 노릇을 해야 했다. 자유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비교적 활발히 반독투쟁을 벌이기는 했지만, 프랑스의 체면은 말그대로 박살이 났으며 단 6주만에 독일에게 패배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프랑스로 하여금 단순히 독일에 대한 반감을 넘어서서 공포감을 선사했다.

프랑스는 나치의 수탈과 억압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그나마 같은 유럽계로 대우받아 당장 서부전선 동부전선의 독일국방군의 태도 차이만 봐도 영국, 프랑스, 미국인들은 정말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던 폴란드인이나 체코인, 아예 작정하고 절멸 대상으로 보았던 유대인, 집시인, 소련인 등과 비교하면 같은 게르만계 인종으로 인식하고 그들 기준에서 꽤 대우해준 편이다.[5] 물론 식민지는 식민지라고 시민들은 독일 및 추축국 국민들과 차별되는 2등 시민 취급을 받았고 수시로 징용에 끌려가 강제노동과 공출,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유태인들은 독일 정부가 지시하지도 않았음에도 비시 프랑스 정부 측에서 자발적으로 수용소에 보낸 탓에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3.4. 2차 대전 후

2차 대전 후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서유럽은 기존까지 세계 무대의 주역이던 열강의 대열에서 밀렸고 그 자리를 미국과 소련이 채웠다. 이들이 주도한 국제질서 냉전은 위대한 국가(Grande Nation)의 부활을 꿈꾸던 프랑스에는 껄끄러운 상황이었지만 이미 국력이 한 풀 꺾인 프랑스가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2차 대전 당시의 동맹국인 영국은 유럽의 일원이라는 아이덴티티가 결여되다시피 해서, 이미 윈스턴 처칠은 2차 대전 도중에 샤를 드 골에게 대놓고 "전쟁이 끝나고 영국이 대서양(미국)과 대륙(프랑스) 중 하나를 선택해야 되면 우리는 당연히 대서양을 선택할 것이다."라는 말한 적도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는 영국을 대신해서 함께 유럽 세계를 주도할 협력 국가가 필요했고, 그 파트너가 바로 서독이었다.

한편 패배 후 독일에서는 미국-영국-프랑스 점령지에서 콘라트 아데나워를 총리로 하여 독일연방공화국이 수립됐고, 이들은 기존까지 독일의 주류 정계가 자부하던 독자노선(Sonderweg)[6]에 반감을 드러내면서 적극적으로 서구권의 일원으로 편입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때문에 서독과 프랑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고 국가 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맹도 없다는 오래된 표현은 여기에도 적용되었다.

협력의 첫 단추는 경제적 교류였다. EU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장 모네는 1950년 이른바 슈망 계획을 발표하면서 루르/ 알자스-로렌/ 베네룩스 일대의 철강과 석탄을 프랑스, 서독, 베네룩스 국가들이 자유롭게 서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서독은 로렌을 프랑스에게 할양한 이후 철강이 부족했고 반대로 프랑스는 석탄이 부족했다. 즉, 서로 윈윈하는 것이었다.

프랑스가 슈망 플랜을 제안한 목적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이 계획을 독일이 받아들이면 서독의 철강 사용량과 사용처의 추적이 상당부분 가능했기 때문에 2차 대전 이후 현실에 옮겨진 서독의 재무장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섰던 것도 크게 작용했다. 이 당시 서독에서는 막 라인강의 기적이 시작됐던 찰나였기 때문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당시 서독 경제부 장관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1952년에는 프랑스/독일/베네룩스 3국에 이탈리아까지 합류하며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ECSC)가 탄생했다. 이 ECSC 로마 조약을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다. 그리고 여기에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이 가입하면서 세를 불린 결과가 오늘날의 EU다. 그래서 EU의 설립자인 독일과 프랑스의 입김이 강하다.

이를 바탕으로 마침내 1950년대 후반이 되자 양국 간의 정치적 협력 역시 활발히 이루어졌다.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트 아데나워가 강력한 친프랑스 인사였다는 점[7], 그리고 드골이 극렬 프랑스 민족주의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Vive la France(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위대한 국가의 부활을 가장 열렬히 주장하던 드골 입장에서 미국과 영국은 2차 세계 대전 내내, 그리고 그 이후에도 프랑스에게 상전 노릇을 하려는 나라들로 보였고, 이는 미영 양국에 대한 반감과 서독에 대한 우호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협력은 1963년 아데나워와 샤를 드 골이 맺은 엘리제 조약으로 방점을 찍었다. 양국은 엘리제 조약을 통하여 외교/경제/군사 등의 업무에서 노선을 같이 할 것을 약속했고 이는 실제로 이행되었다. 양국의 국가원수들은 정치적 스탠스에 상관 없이 서로 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그 중에서도 아데나워 - 드골과 헬무트 슈미트 -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사이의 관계가 무척이나 절친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협력 덕분에 양국간의 관계는 20세기 전반과 비교하면 상전벽해에 가까울 정도로 우호적이 됐으며,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유럽이 1,100년 만에 재통합됐다."는 농담이 나오기도 했다.

1990년에 프랑스와 독일의 학자들이 각기 자국 역사교육과정의 기술내용을 시정 보완하기로 합의했고, 이를 관계교육당국에 건의하고 나서 주목을 모으고 있다. #

1994년 7월 14일 혁명기념일을 맞아 독일군이 유럽군단(Euro Corps)의 일원으로서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 일대에서 다른 구성국 군대와 함께 군사 퍼레이드를 펼쳤다. 1944년 파리 수복 이후 50년만의 일로 프랑스-독일 관계 개선의 상징적 순간으로 손꼽힌다. #

3.5. 21세기

1977년에 독일은 프랑스를 우호적으로 보는 비율이 10%에 그쳤으나 2016년 조사에서는 27%로 늘어났다. #

아래의 일련의 흐름에서 보듯 프랑스-독일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다. 다만 몇몇 알력은 있다. 가령 독일의 숄츠 부총리가 프랑스가 가지고 있는 상임이사국 지위를 EU에게 넘겨야 한다고 발언하자 프랑스에서 반발한 바 있다. # 러시아에 대한 입장도 독일이 좀 더 유화적인데, 노르드스트림2를 두고 마크롱 대통령이 제동을 걸자 독일측은 반발했다. # 다만 러시아에 대한 입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 역시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입장을 보이면서 프랑스와의 입장 차이가 다소간 줄어들었다.

4. 관련 기사

5. 관련 문서



[1] 유럽 대륙에서만 놓고 보면 완벽히 고립된 상황이었지만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이 을 침공하는 것을 도와줬다. [2] 오스트리아는 그래도 마리 루이즈를 시집보내서 명목상으로나마 프랑스와 동등한 취급을 받기라도 했지만, 프로이센은 틸지트 조약을 통하여 완전히 재기불능에 빠져버리게 된다. [3] 2차대전과는 달리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은 연합군의 제1 전력이었는데 이들은 2차대전의 소련군 역할에 가까웠으며 소련과 마찬가지로 종전 후 성비 불균형이 발생했다. 괜히 1890년대생 프랑스 남성과 1920년대생 소련 남성이 저주받은 세대인 것이 아니다. [4] 사실 프랑스군 자체는 1차대전과 마찬가지로 나름 열심히, 잘 싸운 편이었다. 문제는 수뇌부의 계속된 삽질들 때문에 사병들만 죽어나갔다는 것(...). [5] 재미있게도 미국은 과거 독일인들이 이민을 많이 간 나라들 중 하나였다. [6] "우리 독일은 독일만의 고유한 길이 있으므로 서구 민주주의를 따르지 않겠다."는 마인드이다. [7] 아데나워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이 사람은 1920년대 후반 당시에 라인란트 프랑스군이 다시 진주할 것을 주장해서 '반역자'라고까지 정적들에게 씹혔던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