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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e1c25> 이론 | 중국특색 사회주의,( 선부론 · 흑묘백묘론 · 개혁개방 · 국가자본주의), · 샤오캉 사회 · 일국양제 · 도광양회 | |
행보 | 엄타,(1983 ~ 1986), · 남순,(1992), · 4대 현대화 | ||
사건사고 | 중국-베트남 전쟁,(1979), ·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1983), · 중국 해군 어뢰정 망명사건,(1985), · 중영공동선언,(1985), | ||
천안문 항쟁,(1989), | 각종 매체 · 사건 진행 · 탱크맨 |
1. 초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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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프랑스에서 삼촌 덩샤오성(鄧紹聖)[1]과 덩샤오핑 | 쓰촨성 광안시에 위치한 덩샤오핑 옛 집 |
덩샤오핑은 쓰촨 성에서 유복한 집안(집에 방이 12칸이나 있었다고 한다. 그것도 1900년대 초에 벽돌집으로)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에 신해혁명의 원조격이 되는 보로운동에 참여했고, 사천성 각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1918년 근공검학(勤工儉學)[2] 운동에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학업을 하였다. 이 때 돈이 없어 많은 끼니를 크루아상 하나로 때웠다고 한다.
그런데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노동력 부족은 둘째치고 프랑스의 일자리 자체가 적어지면서 프랑스 측의 대우가 나빠졌다. 처음에는 공부를 하러 프랑스로 간 덩샤오핑은 이 시기에 공부에서 운동으로 관심을 돌려 1923년 말쯤에 '중국 공산 청년 동맹'[3]에 가입하고 조직 기관지 《적광(赤光)》에서 저우언라이와 함께 일하며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다. 1924년에 저우언라이를 포함하여 청년 동맹의 지도자급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뒤 덩샤오핑이 지도자급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후 1924~1925년 사이에 적광에서 세 편의 글을 썼는데 어조는 강렬해도 저우언라이의 글에 비하면 이론적인 뒷받침이나 문장의 퀄리티는 그냥 그랬다고 한다. 이는 덩샤오핑이 중국에서 공부하던 시절과 프랑스 예비 유학생으로서 준비하던 시절에도 항상 성적이 중간에서 맴돌았던 인물인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4]
그 뒤 모종의 사건으로 프랑스 경찰이 귀찮게 하기도 하고 어차피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기는 해야 했던지라 경유지 비슷하게 하여 동지들과 같이 1926년 초 모스크바로 향한다. 물론 이는 모스크바가 공산주의자에게 갖는 상징성과도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 후 모스크바에 간 덩샤오핑은 1926년 초에 스탈린 동방노동자공산주의대학(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рудя́щихся Восто́ка имени И. В. Сталина, 약칭 КУТВ)[5]에 입학했고[6], 이때 공산당에 입당한다. 그리고 마침 1920년대 초부터 중국인들이 러시아로 유학을 많이들 왔는지 1925년에 설립된 중산대학(中山大學)[7]으로 1926년 중순 쯤에 거처를 옮겼다.
덩샤오핑은 여기서 자기 이론의 배경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배웠는데 이것도 깊게 배우질 않고 프랑스 시절처럼 어중간하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깊게 파고들지 않아서 극좌파 노선이 아니라 실용적인 성향을 가지게된 것으로 보인다. 덩샤오핑이라는 인물 자체가 이론이나 도그마가 아니라 실무나 경험을 통해서 커갔던 인물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1926년 말, 당대 중국의 군벌 펑위샹 밑으로 들어간 덩샤오핑은 정치적 선동 부분의 일을 맡아서 공산주의에 대한 강의를 하며 지냈는데 펑위샹은 소련과 연계하면서도 반공을 표방한 장제스와 합작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한 펑위샹은 덩샤오핑을 군에서 내쫓았고[8] 1927년 7월, 덩샤오핑은 당시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였던 우한(武漢)으로 가서 당의 중앙에서 일하게 된다.[9] 그리고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에 서기로 참석하여 마오쩌둥을 처음 만난다. 그후 몇 개월 뒤 당 중앙이 상하이로 옮기자 덩샤오핑도 같이 따라가고 1928년 초에 중산 대학에서 같이 수학했던 동지 장시위안과 결혼했는데 안타깝게도 2년 뒤 장시위안이 사망하게 되어 그의 첫 번째 결혼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2. 국공 내전과 항일 전쟁
홍군의 정치장교로 근무했다. 1933년 당시 비주류였던 마오쩌둥을 지지하고,[10] 대장정에 참여하였다.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장교를 맡았다.
팔로군 시절 129사단 수뇌부 좌로부터 리다(후에 상장), 덩샤오핑, 류보청(후에 원수), 차이수판. |
"군신" 또는 "독안룡"이라고 불리던 팔로군 명장 류보청과 함께 정치위원으로서 129사단을 이끌고 8로군 주류와 떨어져 옌안을 떠나 중원으로 이동하여 일본군 배후에서 항일 전쟁을 치렀다. 류덩군(류보청+덩샤오핑)이라고 불린 이 129사단은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덩샤오핑의 군사적 재능도 높이 평가되었다.
국공 내전이 시작되자 8로군은 인민해방군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29사단은 확대 개편되어 제2야전군이 되었다.[11] 국공 내전 초기에 전체적으로 인민해방군은 밀리고 있었으나, 류덩군은 중원에서 국민당군을 견제하면서 산둥 반도를 본거지로 하여 후방을 교란했다. 류덩군은 산둥 반도를 장악했고, 1948년 말부터 전쟁은 전체적으로 역전되어 인민해방군이 국민당군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9년 장강(長江)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공을 세웠다.[12]
1949년 10월 19일, 중앙인민정부 산하에 중국 전역의 군사실력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인민혁명군사위원회가 군사위원에 선출되었다. 11월 23일, 중공중앙서남국이 설치되면서 서남국 제1서기가 되어 서남 지역의 당무를 장악하게 되었다. 1950년 2월 8일, 충칭에서 류보청을 주석으로 하는 서남군정위원회가 설립되면서 허룽, 슝커우, 류원후이, 룽윈 등과 함께 부주석으로 추대되었는데 허룽을 제외한다면 대부분 항복한 사천군벌 찌끄러기들을 명예직으로 임명한 것이었으므로 덩샤오핑이 실세였다. 2월 22일, 서남군구가 설립되면서 초대 정치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쓰촨성을 시작으로 운남성, 구이저우성, 시캉성, 티베트 자치구를 다스리는 서부권역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제2야전군의 전신인 129사단의 초창기부터 함께하여 항일전초기 수백명부터 시작해서 수십만 집단군이 될때까지 제2야전군을 사실상 이끌었다. 1, 3, 4 야전군이 사령관이 이끄는 일반적인 군대였지만 유독 제2야전군은 류덩군이라하여 류보청과 덩샤오핑이 함께 이끄는 군으로 묘사된다. 항일전쟁부터 시작해 10년을 이끌고 사실상 제2야전군을 만들었다고 봐도 되는 인물이었다. 국공내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그는 이러한 군 업적을 인정받아 전후 1954년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1기 부주석에 임명되는데 차례대로 주더, 펑더화이, 린뱌오, 류보청, 허룽, 천이, 덩샤오핑, 뤄룽한, 쉬샹첸, 녜륭전, 예젠잉, 청첸, 장즈전, 푸쭤이, 룽원 등 총 15명중 7석을 받았으며 뒤에 4명이 중화민국의 항장을 예우했다고 보면 앞의 11명이 실질적인 군공을 인정 받은거였다. 이중 덩샤오핑을 제외한 10명이 군에 남아 10대 개국 중공군 원수에 임명되었다.[13]
덩샤오핑은 전후 서남지구에서 성공적인 군인, 정치장교에서 벗어나 정치인으로서 능력과 리더십을 보여주어 이후 정치 중앙에 성공적으로 진출하고 1956년 마오쩌둥이 맡고 있던 서열 1위 명예직인 중국공산당 주석을 제외한 중국공산당 내 의전서열 2위 실무 최고 책임자인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임명되고 약 10년 가까이 재직하게 되는 원동력이었다. 추후 1970년대 후반 하방에서 복귀해 국무원 부총리 겸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맡아 권력을 쟁취하며 1980년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권을 통해 당을 지배하는 권력을 가지는 힘이 이런 군 경력에서 나오게 되었다.
스스로 군 경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는지 최고 권좌에 오른 후, "어떤 전공을 공부하셨습니까?"라는 서방 기자의 질문에 "특별히 없습니다만, 굳이 하나 말하자면 군사라고 할 수 있지요."라고 대답했다. 공산당 내에서 덩샤오핑을 넘는 당과 군, 정 3개의 집단에서 독보적인 당, 군 성취를 이루어내고 확실한 성과를 이룬건 중국공산당 전체를 통틀어 3개집단에서 마오쩌둥 하나 밖에 없었다.
3.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사진에 나온 당시 정치 구조는 류사오치와 함께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하던 1962년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춘절 기념 행사에 참석한 덩샤오핑(오른쪽에서 두 번째). 왼쪽부터 저우언라이, 천윈, 류사오치, 마오쩌둥이 보인다. 마오쩌둥이 잠시 일선에서 물러난 1960년대 전반기 중국 국가 지도부는 형식적으로 당 주석이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마오쩌둥을 최고 지도자로 하고 실질적으로는 류사오치( 국가주석)-덩샤오핑(중국공산당 총서기)-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의 집단 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마오쩌둥은 여전히 가장 중요한 권력 기반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서 군권을 가지고 있었고 실질적 권력은 없지만 중국공산당 주석으로서 당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 체제는 안정적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문화대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지만, 서부에는 후쭝난의 지휘 아래 국민당군 40여만 명이 남아 있었다. 제2야전군은 서부로 진격했고, 1949년 12월 청두를 함락시켜 대륙에 남아 있던 최후의 국민당 근거지를 점령했다. 제2야전군은 이곳에 계속 주둔하면서 서남군구로 개편되었다. 덩샤오핑은 서남군구 정치장교,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을 맡았고 이후에는 충칭시장을 역임하면서 토지개혁, 아편 거래 근절, 국민당 잔당 토벌 등을 시행했다.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이었기 때문에 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폭동까지 일으킬 정도로 저항했으나, 덩샤오핑은 무자비하게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지주계급 및 아편 유통업자, 기타 국민당 잔당들을 합해 10만 명 이상을 처형했다고 알려져 있다.
과감하면서도 잡음 없는 일처리로 능력을 보이면서, 3년 후 중앙으로 전임되어 1952년 정무원(政務院) 부총리, 1954년 당 중앙위원회 비서장,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국공 내전 말 그와 지위가 비슷하거나 그보다 훨씬 높았던 인물들이 많았음에도 꾸준히 승진하여 지도부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앞서 본 것처럼 서남지구에서 능력과 리더십에서 성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중앙에서 계속 주목을 받으며, 요직을 맡았고 1956년에는 드디어 중국공산당의 총서기[14]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국가주석인 류사오치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우는 한편 지성 중시, 도회 상업 중시, 대외적 균형에 정책적 초점을 맞춰 실용주의적 경제 개혁을 실시했는데,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1960년 중국과 소련이 결별하자 공산국가들이 모인 회의에서 마오주의를 설파하고 소련을 "수정주의"로 비판하여 마오쩌둥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이는 훗날 덩샤오핑이 실각한 후에도 다시 복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4. 문화대혁명과 시련
하지만 국가주석에서 물러난 마오쩌둥은 새롭게 국가주석이 된 류사오치, 당 총서기 덩샤오핑이 자신이 죽으면 소련의 흐루쇼프가 스탈린을 격하했듯이 자신을 격하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들을 당내에서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반혁명분자요 주자파라 여기게 되어 제거하고자 했다. 여기에 장칭이 열심히 마오쩌둥을 부추겼다.[15]결국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시작으로 1966년 베이징 8월 폭풍 사건이 벌어지면서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이 시작, 중국 전역은 홍위병들의 살육과 파괴, 약탈로 점철되는 개판이라는 말도 아까운 생지옥으로 변모하였다. 이때 국가주석 류사오치도 숙청당했다.
이후 홍위병이 일어나고 중국 전역에서 문화대혁명에 따른 혼돈이 발생했다.[16] 덩샤오핑도 반마오주자파(反毛走資派, 마오쩌둥에게 반기를 든 자본주의 추종자)의 수괴라는 비판을 받고 당 총서기직에서 실각하고 상무위원 등 중국공산당에서 맡고 있던 당직에서 은퇴한다.[17] 문화대혁명 당시, 그의 큰아들인 덩푸팡 역시 추락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18]
5. 1차 복권
1973년 3월 총리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방광암으로 투병 중이던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이때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하기도 했는데, 정치인인 그가 군사위원으로 간 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그는 국공 내전 당시 항상 전선에서 정치위원역을 역임하였고, 당시 인민해방군은 계급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이상한 것도 아니다. 더구나 덩샤오핑은 훗날에 정권을 잡을 때도 보이듯이 군부에 엄청난 입김을 가지고 있었다.[19] 덩샤오핑의 재부상에 문혁 이후 중국의 권세를 누리고 있던 4인방(四人幇)은 긴장했다. 덩샤오핑만 없다면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 사후 권력은 그들의 것이 될 수 있었다. 정치국 회의 등에서 4인방은 덩샤오핑을 격하게 비판했다. 린뱌오 사후 국방부장 직을 계승한 혁명원로 예젠잉(葉劍英)이 덩샤오핑을 옹호했지만 마오쩌둥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는 4인방을 막기에는 무리였다.
1975년 1월, 중국공산당 10기 2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 및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에 보선되어 계속하여 정돈사업을 지휘하였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세상을 떠났다. 인기있던 총리의 죽음에 군중은 그와 대척점에 섰던 4인방의 처벌을 요구했고 4인방은 빈소 설치 금지, 검은 옷 착용 금지 등으로 대응했다. 이때 저우언라이의 추도식에서 추도사를 낭독한 것이 덩샤오핑이었다. 저우언라이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대중에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4인방은 덩샤오핑을 향한 견제를 더욱 강화했다. 4인방은 마오쩌둥의 조카[20] 마오위안신을 움직여 마오쩌둥에게 덩샤오핑이 문혁에 대한 평가에 인색하다고 모함하도록 했다. 문혁은 마오쩌둥의 역린이었다. 마오쩌둥의 불신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천안문 사태가 격화되자 덩샤오핑은 그 책임을 지고 다시 모든 직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당적 보유만은 허락됐다.
이때 덩샤오핑의 대담함을 알게 해 주는 일화가 있는데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이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덩샤오핑은 끝까지 문화대혁명을 공식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일단 마오쩌둥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도 했고 덩샤오핑 본인이 문화대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가 마오쩌둥 사후 자신의 국정 운영에 발목이 잡힐 수 있기 때문에[21] '나는 문혁 당시에 시골에서 노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식으로 어떻게든 어물쩍 넘어가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명령이 곧 황제의 명령과 같은 시기였기 때문에 덩샤오핑이 이런 태도는 마오쩌둥은 물론 당내 지도 세력들의 어그로를 끌기에 충분했지만 어쨌든 덩샤오핑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대신에 덩샤오핑은 수차례 자아비판을 하고 마오쩌둥에게 반성문을 보냈지만 이미 삐칠 대로 삐친 마오쩌둥은 그런 덩샤오핑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어쨌든 이는 마오쩌둥이 얼마나 덩샤오핑을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이기도 한데, 마오쩌둥은 덩샤오핑의 중앙 관직은 박탈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 이상의 공격은 막아주었다. 덩샤오핑이 계속 당권을 보유할 수 있도록 명령한 것도 마오쩌둥이었고 4인방을 비롯한 급진파들이 덩샤오핑을 숙청하자고 수십 차례 마오쩌둥에게 건의했지만 마오쩌둥은 끝까지 덩샤오핑에게 최소한의 보호는 해 주었다. 과거 펑더화이이나 류사오치 같은 인사들이 마오쩌둥에게 대항했다가 어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보기 드물게 마오가 인간적인 모습을 덩샤오핑에게 보여준 셈이다.
6. 2차 복권 및 실권 장악
그리고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났다. 당 중앙위 주석이던 화궈펑[22]이 문화 대혁명에서 살아남은 10원수 출신의 예젠잉(葉劍英), 특무 부대장인 왕둥싱(汪東興)과 결탁하여 4인방을 숙청하였으나 문화대혁명을 기반으로 급성장한[23] 화궈펑의 힘만으로는 정국 수습이 어려웠으므로[24], 예젠잉의 종용으로 1977년 7월 덩샤오핑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25] 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직위 즉 군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지도자로서 복직되었다.그는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애초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고, 결국 1978년 12월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26] 그 후 1981년 6월 중국 공산당 11기 6중전회에서 그는 화궈펑의 뒤를 이어 중국 내 모든 군사력을 지배하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으며 자신의 권력 작업을 완성한다.
7. 집권 시기
7.1. 문화대혁명 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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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에서 (덩샤오핑과의) 저녁식사 중 영화배우
셜리 맥클레인과 한 해프닝이 있었다. 맥레인은
문화대혁명 당시였던 1970년대 초에 중국을 방문했었으며,
마오쩌둥 사상의 사회개혁 노력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1979년 백악관에서의 저녁식사 중, 맥레인은 중국의 농장에서 채소를 키우는 교수를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그녀는 대학교에서 연구를 중단하고 고된 노동을 하는 것에 슬픔을 느끼냐고 질문했고, 교수는 가난한 농부들과 함께 노동하며 배울 수 있기에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덩샤오핑은 이야기를 들은 후 잠시 멈춘 뒤, "그 교수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맥레인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카터 대통령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China's Quest," John W. Garver. Oxford University Press
이 시기부터 그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재평가'와 '출신 성분 제도 혁파'를 단행했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한편, 기존 공산 혁명 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지주 계급 출신이 제도적으로 차별 대우를 받게 한 것을 철폐했다."China's Quest," John W. Garver. Oxford University Press
당시 덩샤오핑은 "마오 주석은 공이 과보다 많다."[27]라고 라는 말로 마오쩌둥의 권위를 보호해주는 척하면서 실질적으로 마오쩌둥을 계승한 문화대혁명 당시 마오쩌둥의 직계들을 차례차례 제거한다. 마오쩌둥을 잃은 문화대혁명 지지 세력에는 권위나 경력에서 덩샤오핑을 상대할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개인 숭배에 빠지지 않았다. 전임 화궈펑만 하더라도 그 짧은 집권기 동안 자신을 찬양하는 포스터나 노래, 선전물을 무수히 제작하였으나, 덩샤오핑은 개인 숭배를 멀리하고 자신에 관련된 동상이나 포스터를 절대로 제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하여 그의 동상과 선전화는 그의 사후에야 나올 수 있었다.
덩샤오핑은 분명 문화대혁명의 피해자였으나, 마오쩌둥을 격하하지는 않았다. 흐루쇼프는 자신의 전임자를 격하하더라도 블라디미르 레닌이라는 대체할만한 인물이 있었고 스탈린의 도움없이도 이름을 날렸던 유명인들도 한둘이 아니라서 격하시켜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대체가 불가능한 인물이었고[28] 마오쩌둥 이외에 이름을 날린 이들도 어디까지나 마오쩌둥을 보좌하면서 이름을 날렸기 때문에 아무리 덩샤오핑 개인이 마오쩌둥에 당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해도 격하시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의 일인지라 그를 굳이 격하시키지는 않았던 것이었다.
7.2. 근대화 추진
또한 이 때부터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하여 과감한 개혁 조치들을 단행하였다.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29]로서 1978년 '4대 근대화'(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 기술의 근대화, 국방의 근대화)로 대표되는 개혁과 개방 정책을 발표, 추진하여 기업가와 농민의 이윤 보장, 지방 분권적 경제 운영, 엘리트 양성, 외국인 투자 허용 등으로 중국 경제가 크게 성장하는 단초를 마련하였다.[30] 덩샤오핑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다지던 무렵, 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농업 부문의 전근대화 및 문화대혁명과 하방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한 농촌지역 인력과잉이었고, 생산성 또한 저조해서 상당량의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으며 그나마도 배급제로 운영되었다. 배급제 특성상 식량이 풍족하게 배급되었던 것은 아니라서 불편한 점이 이만저만이 아닌데다가 또한 당시 중국의 인구증가 속도를 생각하면 생산성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더 많은 식량을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이로 인한 외화낭비도 목과할 수 없는 문제였는데 1980년대 초반에 농업개혁을 시행해서 결국 수년 내에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한다. 중국은 광활한 영토를 가지고 있지만, 사막과 산악지대 등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많고 도시화가 진행된 2020년과는 다르게 개혁 · 개방이 막 시작되었을 당시에는 중국인구의 대부분이 농촌에서 주거했기 때문에 실제 1인당 경지 면적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공산당의 상징적 성과물인 중국농업인민공사(통칭 인민공사)에 의한 중앙 통제적 농업을 과감히 버리고, 가구별 의사 결정에 따른 자율적 농업 및 잉여 농산물의 시장 판매를 허용하였다. 이는 그를 반대하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카리스마와 그가 계획적으로 양성한 정치적 친위부대의 지원을 통해 이를 극복하였다. 시범 지역이었던 안후이성의 농업 생산은 3년 만에 3배가 된 곳도 있었으며, 1981년에는 식량의 자급 자족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안후이성을 시찰한 중국 지도부가 '드디어 인민이 진심으로 행복해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전국적으로 정책을 확대할 정도였다.
7.3. 개방 정책
내부적으로 식량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는 눈을 바깥으로 돌린다. 덩샤오핑은 이제 농업보다 한 단계 높은 "기초적인 생산과 공업"을 육성코자 하였으나, 이를 내부적으로 추진할 생산 수단이나 자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를 서방의 여러 국가로부터 들여오기로 결정하고, 사전 단계로서 미국과 전격 수교하였으며[31], 미국과의 수교 직후에는 자신이 구상한 경제 개발 모델[32]을 시험할 경제 특구를 4군데 지정했다. 따라서 이 4곳의 경제 특구는 모두 남동쪽 해안가에 위치하게 된다. 물자의 유통 및 수송이 편하고, 자본주의의 영향을 내륙으로 퍼지지 않게 관리하기 위함이었다.그는 홍콩과 인접해있고 광저우와도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당시로써는 그저 시골 어촌 마을이던 선전을 경제 특구로 개방했고, 선전의 성공을 확인한 후 경제 특구를 총 20곳 지정하였다. 이 지역들은 밀려드는 서방의 돈과 생산 기술, 시설을 활용하여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중국 전체에 성공과 부를 전시하는 표본으로 기능했다.
7.4. 대외 정책
서방과의 관계도 확연히 증진되었다. 미중수교 과정은 1970년대 초반부터 진행되어왔던 것이었지만 1979년 1월 1일 미국과 공식 수교하였고, 약 한 달이 안된 1월 28일에 중국공산당 최고위 지도자로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강한 인상을 남겼다.[33] 이때 카우보이 모자를 눌러쓰고 로데오 경기를 관람하는가 하면, 공식 석상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러브 미 텐더(Love Me Tender)》를 열창하는 등 미국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회담도 하였다.[34] 보잉사 등 미국 내 주요 산업 시설을 돌아본 덩샤오핑과 중국 지도부는 큰 문화 충격과 경제 개발에 대한 강한 자극을 받았다.그리고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공동선언을 이끌어내어,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국에 반환되었다.
반면 소련과의 관계는 이념 및 국제 정세의 문제로 인해 냉랭하였다.[35] 1960년 중소 영토 분쟁과 수정주의 논쟁으로 같은 공산주의 진영임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소련과는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 연원은 1920년대에 코민테른을 앞세운 소련의 과도한 간섭에 대한 마오쩌둥 등 비주류의 반발부터 시작된다. 미국과의 수교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는 효과도 부수적으로 얻었다. 물론 이 역시 덩이 의도한 바이다.[36]
7.5. 천안문 6.4 항쟁
덩샤오핑은 중국 최고영도인이 된 후 국가주석이나 당 총서기직에 앉았던 적이 없었지만, 중국인민해방군을 통수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39] 자리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미는 이들을 요직에 앉혀 후일에 대비했다. 그래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국가주석에는 류덩군 시절부터 친구였던 원로 리셴녠을 앉히고, 행정부의 수장인 국무원 총리는 자오쯔양, 당 총서기는 후야오방[40]이 맡았다. 자오나 후는 당시 후계자로 거론되어 있었다.
그러나 덩은 무조건적인 서방화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에서 드러났다. 학생 운동에서 시작한 이때의 시위는 개혁파 후야오방의 명예 회복 요구로 시작하여 민주화 운동으로 발전하지만, 이 사건에 대해 덩샤오핑은 시위대를 난동꾼이라고 비난하며 유혈 진압을 단행한다. 한편, 당시 덩샤오핑을 포함한 중국 원로들이 이런 학생 운동이나 대중 운동에 대해 특히 콤플렉스를 보인 것은, 민주화에 따른 중국공산당 실각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겠지만, 그 외 이들이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겪은 당사자들이었기 때문이라는 시선도 있다. 문화대혁명 역시 당시 홍위병이 주체가 된 학생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홍위병의 실질적 배후는 언론을 통해 이들을 선동한 마오쩌둥 및 4인방이었지만, 어쨌든 그 주체는 각급 학교의 학생들이었으며, 당시 덩샤오핑의 진압 성명문이나 자오쯔양의 회고록에서도 이런 운동이 일파만파로 전개되어 제2의 문혁 같은 혼란을 야기할 것임을 우려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공산당의 다른 원로들은 문화대혁명 당시 시골로 끌려가서 삽질하며 개박살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대중 운동을 더욱더 불신하고 있었다.[41] 특히나, 이 때 베이징에서는 30년만에 중소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천안문 광장이 시위대로 가득 찬 것 때문에 예포는커녕 카퍼레이드도 할 수 없었다. 때문에 방중한 고르바초프는 결국 어떤 축하행사도 갖지 못한 채 뒷길로 돌아서 조용히 숙소로 들어가야 했고, 회담을 하면서도 광장과 거리의 시민들과 시위대가 내는 소리가 들리는 등 회담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는데, 이게 또 전 세계에 생중계가 되어 중국 공산당이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공산당은 시위대를 매국노로 인식하게 되었고,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진압하자는 강경론이 당내에서 득세하게 된다.
허나 이에 동조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있었는데, 당시 덩의 유력한 후계자로 거론되던 당 총서기 자오쯔양은 덩의 지시로 군 투입이 결정되자 천안문 광장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제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군이 곧 투입될 것이니 빨리 해산해주십시오"[42]라고 눈물로 호소했지만, 그곳에 모인 군중은 해산하지 않았고 탱크를 앞세운 군대에 진압되었다. 이때 진압과정에서 수백~수천명이 사망했다.[43]
그리고 시위대에게 눈물로 호소했던 자오의 이런 행동은 그가 시위대에 동조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때문에 덩의 눈밖에 나서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탈락했고 모든 직위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가택 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결국 자오쯔양은 권좌에서 축출당한 후 사망시까지 약 20년 간을 가택 연금 상태로 보냈는데, 그 와중에도 자신의 주장이 거의 옳았다고 믿었다.[44]
어쨌든 이렇게 축출된 후와 자오를 대신해 시위대에게 강경하다고 평가된 장쩌민을 당 총서기에 임명하는 등 권력 승계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다. 또한 티베트인들의 반중 시위를 유혈 진압한 후진타오를[45] 중앙당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하였다.[46] 국가주석 직은 1988년 리셴녠이 죽자 군부의 대표자 양상쿤을 앉혀 군부를 달랬다.
헌데 지금 중국에선 천안문 민주화 운동을 총칼과 탱크로 진압한 것에 대한 비난은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이붕)이 바가지로 먹는 감이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사람이 천안문 민주화 운동 당시 실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고 수행도 이 사람이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군권은 모두 당 중앙군사위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하고 있었고, 장쩌민, 양상쿤과 같은 원로들이 실질적인 정책 결정을 내렸기 때문에 하수인에 불과한 리펑 입장에선 좀 억울한 측면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개혁 · 개방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보수파들이 리펑의 뒤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천안문 군중들에게 대피하라고 눈물로 호소한 자오쯔양과도 비교당하며,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든 자'와 같은 욕을 신나게 먹었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직에는 남아있을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주범은 마오쩌둥이었지만, 정작 크게 비판받은 사람들은 4인방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
7.6. 임기제 확립
모든 당직의 재임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제한하고, 65세 이후에는 새로운 당직에 취임하지 못하도록 명문화하였다. 이는 1인 독재와 원로들의 간섭을 배제하고 원활한 세대 교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70대 ~ 80대 원로들이 당을 좌지우지하거나 수십년씩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행태는 사라졌으며 시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게 되었다.덩샤오핑 사후 장쩌민과 후진타오 모두 10년씩 집권하면서 후계 세대를 조직적으로 양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일당 독재이면서도 주기적인 세대 교체가 잡음 없이 이루어지는 특이한 모습이다. 물론 당직에서 물러났다고 해도 원로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현직이 아니면 힘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는 기타 공산당 국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지도부의 '노화 현상'을 방지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다만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은 공식 직함 없이 사실상 중국을 통치했다. 예컨대 천안문 사태 당시 자오쯔양 총서기의 해임은 원로방에서 결정됐고 이후 열린 당 중앙위원회 회의는 그저 형식적 추인을 하는 데 그쳤다. 또한 덩샤오핑은 13기 5중 전회에서 당 군사 주석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로서 인사권과 국가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부여받았다. 당시 그는 일개 당원[47]에 불과했다.
그런데 시진핑이 약 30년 후 사실상 종신집권을 하게 되면서 중국은 강력한 독재자에 의해 이끌어지는 새로운 체제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7.7. 남순강화
1989년의 천안문 사태와 그 후폭풍으로 경제 개혁과 개방을 반대하는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개혁 · 개방을 계속 밀어붙이면 소련처럼 1당 독재 체제의 붕괴를 재촉시킬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들 보수파들은 개혁 · 개방, 자본주의 시장 경제 도입을 여기서 멈추고 당에 의한 통제를 확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편 상하이에서 시위대에 강경대처한 공로로 단숨에 중앙정계에 진입한 장쩌민 국가주석은 덩샤오핑의 개혁파와 천윈의 보수파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은 과거 마오쩌둥 시대로 퇴보하지는 않았지만, 외국에 약속했던 추가적인 개혁 · 개방, 시장경제화는 모두 미뤄졌고, 극도의 정치적 경색이 이루어졌다. 잔인한 천안문 유혈진압에 격분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은 중국에 대해서 적대적인 태도로 돌변해서 모든 방면에서 교류협력을 중단했으며, 덕분에 외국인 투자는 급감하고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은 실추되었다. 하지만 서구권은 중국을 적성국으로 규정한다거나 무역을 봉쇄하지는 않았다. 천안문 사태 직후에는 최혜국 대우 연장불가, 경제제제, 무역중단 같은 조치들도 거론되었으나 결국 모두 흐지부지되었다. 냉전이 막 종식된 상황에서 중국을 또다시 적성국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냉전을 시작하기에는 정치권이나 대중들이나 모두 피곤했으며, 당시 10억 인구의 거대한 시장을 놓치기도 너무나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1989년 12월, 차우셰스쿠의 처형과 1991년 12월 소련의 붕괴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때문에 천윈 등은 계급투쟁을 다시 중심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개혁개방의 전면 후퇴를 주장했다. 공식적으로 장쩌민은 경제 건설로 공산당 지위를 굳혀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해지는데 정작 장쩌민의 실질적 정책은 모두 사상 강조, 정치 통제의 강화에 있어서 이 부분은 윤색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장쩌민의 완고한 태도에 자신이 죽고 나면 개혁개방이 무산되고 자신이 그저 천안문에서 학생들을 죽인 살인마로만 기억될 것을 우려한 덩샤오핑은 후치리, 옌밍푸 등 숙청당한 개혁개방파를 복권하고 심지어 자오쯔양의 복권 카드까지 꺼내들면서 장쩌민을 압박했다. 하지만 보수파의 완고함이 바뀌지 않자 덩샤오핑은 1992년 1월, 소위 남순강화 라고 일컫는 행보를 시작한다.
이는 명목상 가족여행이었고 덩샤오핑은 실제로 여러 명소를 방문하면서 관광을 즐기는 듯 했지만 한가지 주목할 것은 가족여행에 당중앙군사위원회 제1부주석 양상쿤이 동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덩샤오핑의 여행 준비에서 당은 배제되고 인민해방군이 준비를 맡았으며 중군위 비서장 양바이빙이 총정치부, 해방군보를 동원하여 인민해방군의 덩샤오핑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였다. 1월 17일, 전용열차로 베이징을 떠난 덩샤오핑은 먼저 후베이성 우한과 후난성 창사를 방문, 후베이성 서기 관광푸와 후베이성장 궈수엔에게 중앙에 전하라면서 엄중한 경고를 날렸다.
우리 지도자들은 마치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값어치 있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회의와 행사 뿐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자신들을 텔레비전 스타로 생각하는 것이 틀림 없다. (...)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선전과 주하이 방문에서는 "개혁개방 노선, 정책, 방침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백성들이 호응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라도 타도될 것이다. 이점에 대해 나는 몇차례 언급하였다."라고 또 경고를 날렸다. 보수파가 우세하였던 중공중앙 지도부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평당원의 가족여행으로 폄하하면서 보도를 금지하였으나,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눈치챈 홍콩의 명보, 대공보 등이 취재를 시작하였고 홍콩 언론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던 광둥성과 푸젠성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상하이 해방일보, 선전특구보 등 지방언론들이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보도하기 시작했으며 2월에 이르러 인민일보도 굴복하였다. 3월부터 선전특구보를 중심으로 덩샤오핑의 현지지도를 매우 자세히 보도하기 시작했고 광저우 양청만보, 광명일보, 문회보에 이어 신화통신이 전국에 덩샤오핑의 남순강화 동정을 보도하였다.
덩샤오핑의 뒤에 중군위 제1부주석 양상쿤, 중군위 비서장 겸 총정치부 주임 양바이빙, 중군위 부주석 류화칭 등 중국의 군사지도자들이 모두 따라붙었으며 심지어 장쩌민의 경쟁자인 정법위 서기 차오스까지도 덩샤오핑쪽에 서면서 중국 지도부는 경악하였다. 덩샤오핑은 군대가 자신의 뒤에 있다는 것을 보수파에게 매우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남순강화가 끝난 후인 8월에 전국 군구의 사령관들이 개혁개방을 옹호하는 궐기 사설까지 내보내면서 총이 누구 손에 있는지가 매우 명백해졌다. 장쩌민은 2월 3일, 상하이에 도착한 덩샤오핑에게 새해 안부 전화를 걸면서 아부를 해야 했고, 중앙문건을 통해 전국 각지의 간부들이 남순강화에 대해서 학습하게 하였다. 2월 21일, 덩샤오핑은 의기양양하게 베이징으로 개선하였다.
3월 9일에서 10일 사이에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가 남순강화를 공식적으로 수용하기로 결정, 3월 11일자 신화통신을 통해 정치국 공보를 발송하여 전국에 알리게 했다. 덩샤오핑은 5월 22일, 서우두철강 현지지도 때 지도자는 반드시 경제통이어야 하며 주룽지야말로 경제를 확고히 장악했다고 그를 크게 칭찬, 장쩌민에게 계속 까불면 주룽지로 총서기를 교체하겠다고 위협하였고 장쩌민은 14차 당대회에서 자신이 몰락할 수 있다는 공포에 휩싸여 "14차 당대회에서 누가 보고를 발표할지도 모르겠다."라고 넋나간 소리를 할 정도였다. 천윈과 보이보는 이미 총서기를 두번이나 찍어냈는데 세번째로 갈아치울 순 없다고 장쩌민 지지를 분명히 했지만 장쩌민은 덩샤오핑에게 완전히 기울어 5월 29일 중앙당교에서 열린 성부급 간부 연수반 졸업식에서 덩샤오핑을 찬양하면서 그에게 줄을 대게 되었다. 천윈은 중앙고문위원회를 소집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였으나 덩샤오핑의 선동으로 전국 각지의 지도자들이 개혁개방을 요구하면서 중앙을 압박하고 국무원 부총리 톈지윈을 비롯한 남순강화에 고무된 개혁개방파들이 반격에 나섰다. 톈지윈은 좌파 특구를 만들어서 극좌파들을 격리시켜 평생 배급이나 받아처먹고 쇄국주의나 하면서 살게 만들자는 폭탄발언까지 했으나 원로들의 항의에도 덩샤오핑이 별거 없는데 웬 소란이냐고 톈지윈을 옹호하였고, 이 일로 보수파는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중국 공산당 내의 마지막 개방 vs 쇄국의 대결에서 승리한 덩샤오핑과 개방 세력은 결국 중국의 경제정책 방향에 마침표를 찍었고, 중국은 달리기 시작했다. 1993년에 NBA를 라이브로 중국 공영방송에서 틀어주기 시작한거나 같은 해에 상하이증권거래소, 선전증권거래소가 세워진 것이 대표적인 예시다.
참고로 중국 공산당 내부 개방 반대세력인 보수파의 수장은 덩샤오핑과 동급의 영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던 천윈으로, 덩이 먼저 죽으면 보수화가 진행되고 천이 먼저 죽으면 개혁 개방이 유지된다는 것이 당시 해외 중국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본디 천윈이 병약했던지라 덩보다 일찍 갈 것이라는 게 대부분의 예측이었으나, 부인의 극진한 간호로 인해 의외로 장수하여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결국 남순 강화 직후 천윈은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은 이미 적용할 수 없게 되었다"라고 자신이 밀렸음을 인정하는듯한 발언도 했다. 이후 1992년 10월, 제14차 당 대회의 당 규약 개정으로 중앙고문위원회가 폐지되어 천윈은 은퇴했고, 1995년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그보다 2년 뒤에 죽었다.
7.8. 죽음
이후 은퇴하여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향년 92세로 1997년 2월 19일 베이징 301의원[48]에서 사망하였다.말년의 큰 소원 중 하나가 자국으로 반환된 홍콩 땅을 밟는 것[49]이었지만 5개월 남짓 앞두고 사망했다. 그 외에도 두 가지의 소원이 더 있었다. 하나는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을 하는 것이었는데, 사후 5년 뒤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중국이 본선에 진출했으나, 이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또 하나는 대만과의 양안통일이었는데, 이것은 현재까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50]
이와 같은 소원의 영향으로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중국과 홍콩, 대만 사이에 있는 남중국해에 비행기로 뿌려졌다.
유언으로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향후 50여 년 동안은 국제 사회에 섣불리 나서지 말고 인내하며 조용히 힘을 키우라는 말을 남겼다. 힘을 키우기 전까진 패권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 또 그의 유훈에는 ' 러시아를 경계하라'는 것도 있었다고 하는데, 중소결렬 시기를 겪으면서 경계심이 커졌던 것 같다. # 이와 관련해 덩샤오핑은 생전에 이런 농담도 하였다고 한다. ' 중국은 총 한 방 쏘지 않고도 러시아를 점령할 수 있다. 중국군이 모두 러시아에 들어가 항복하면 러시아는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거덜이 날 것이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러시아는 중국 차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유훈과는 달리 중국의 대외적 성향은 점차 공격적으로 변해갔고[51] 끝내 그가 사망한 후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미국-중국 패권 경쟁으로 이어졌다.
8. 평가
마오쩌둥과 함께 20세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인으로 평가되며, 같은 공산진영의 이오시프 스탈린, 같은 중화권의 장제스, 리콴유와 함께 가장 대표적인 개발독재자로 꼽힌다. 대한민국의 박정희와 가장 유사[52]한 포지션의 인물로, 아시아 현대사의 정치인들 중에서도 가장 극심하게 공과가 갈리는 인물 중 하나이다.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기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의 실패 등으로 최빈국으로 굴러떨어진 중국을 개혁·개방 체제로 돌려 혼합정치 체제를 완성하고 사회주의 실현에 필요한 생산력을 확보할 새로운 성장의 길을 이끌며 중국이 강대국의 지위를 되찾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천안문 6.4 항쟁 당시 대량학살과 민주주의 파괴,[53] 내부 불평등,[54] 사회적 모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짓밟은 탄압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고 있다
덩샤오핑은 복권 이후 백화제방 백가쟁명[55]을 외치며 한동안은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4인방을 숙청하고 화궈펑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린 후에는 그 탈을 벗어던졌다. 또 범죄소탕, 부패척결이란 명분 하에 수많은 시민들을 때려잡은 1983년 엄타(嚴打) 운동 같은 사례처럼, 덩샤오핑의 통치기는 법치주의, 인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취지는 문혁 이후 흐트러진 공권력, 치안 강화였으나, 문제는 반대 의미로 너무 강하다보니 법과 처벌은 고대 진나라 이상으로 엄격했고 사법적 절차는 상당히 줄여버려 억울한 피해자들이 쌓이게 된다. 또 그런 와중에도 권력층은 유유히 처벌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여줘 민심이 흔들리게 된다.
허나 아이러니하게도 덩은 스스로 임기제를 확립하고 그 임기를 지킨 후 공식 지위에서 물러나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해 1인 지배체제로 굴러가던 중국공산당의 민주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덩샤오핑을 포함한 8인의 원로방이 공식 직함 없이 중국을 사실상 통치했기 때문에 말장난일 뿐이란 반론도 있다. 또 그들끼리도 서로 견제가 있었다 하더라도[56] 사실상 덩샤오핑과 원로방이 공식적인 직함보다도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57] 은 변하지 않는다. 거기에 그 자손들은 삼삼오오 결탁해 태자당을 형성한 것으로도 모자라, 가족이나 대리인을 내세워 스스로 사업에 나서 수조원에서 수십조원 단위의 재산을 일궈냈으니, 이는 원로의 자손들이 상위계급으로 군림하며 자기들끼리 각종 정책을 결정하는 과두제를 창설했을 뿐 어떻게 봐도 국가와 당이 민주화되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58]
그리고 임기제를 시스템으로 정착시키고 정치개혁을 완성하기 위해 법과 규정을 정립하는 대신 불명확한 관례와 개인의 권위를 이용하는 인치(人治)에 의존했고, 규정을 적용할 때도 본인들은 혁명원로라면서 자기들에게 불리한 규정은 예외로 만들어 빠져나가기 바빴다.[59] 그런 측면에서 덩샤오핑의 소위 임기제 확립은 이미 시작부터 폭탄을 안고 출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본인은 임기제 확립을 강조하면서도 원로들은 문화대혁명 때 겪은 고초에 대한 보상을 받겠답시고 80대 후반이 되도록 권력을 놓지 않는 모순은, 원로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드디어 친정체제를 구축하나 싶던 참에 10년 임기가 끝나버려 후진타오와 공청단파에게 권력을 넘겨주게 생긴 장쩌민과 상하이방의 퇴진 거부[60]와 권력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이는 결국 후진타오와 공청단파의 반격을 불러와 보시라이 사태와 저우융캉 숙청, 시진핑의 1인체제 수립으로 집단지도체제의 모순을 만천하에 드러내며 피날레를 장식한 당내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이어졌으니 덩샤오핑 때부터 내려온 모순과 내로남불이 결국 시진핑의 독재자 등극으로 이어진 셈이다. 이렇게 2010년대 들어서 5세대 중국 지도부의 지도자가 된 시진핑이 1인독재체제를 구성하면서 허술한 집단지도체제조차 지금은 사실상 붕괴되었으니, 덩샤오핑 역시 책임론을 피해갈 수가 없다. 덩샤오핑은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를 유지하면서 계파간 견제를 통한 주기적 세대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결국 시진핑 대에 와서 입증된 것처럼 스스로 물러나는 권력은 없으며 여러 당이 권력획득을 위해 경쟁하고 시간이 되면 치를 수밖에 없는 다당제 선거만이 항구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권력교체 방법임이 드러난 것이다. 덩샤오핑은 중앙고문위의 다른 원로들에 비해서는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장쩌민에게 이양하는 등 그래도 다음 세대로의 권력이양이 정착되도록 힘쓴 편이고, 그래도 천안문 전까지는 마오쩌둥 시대와 같은 피를 덜 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다. 동구권 붕괴 앞에서 중공 고위층이 느꼈을 상상 이상의 공포를 고려하면 강경책에 손을 대려는 유혹이 강했던 상황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래도 결국 천안문 이후 중공의 정치개혁은 불가역적으로 중단되었고, 애써 확립한 임기제마저 오래 못 가 붕괴되었으니 평가는 냉엄해야 할 것이다.
여전히 일당독재인 중국에선 중국인 개개인의 속은 알 수 없으나, 중국공산당 차원에선 개혁 · 개방으로 중국식 사회주의를 실현한 위대한 지도자로 호평받고 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덩샤오핑은 어찌됐든 말년까지 마르크스주의자란 말을 칭찬처럼 사용하고 부르주아를 비판한 사회주의자였다. 덩이 주창한 것도 '사회주의 시장경제론'.[61] 그런 점에서 덩샤오핑은 사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처럼 좌파정당에서 경제적 우클릭을 이끈 좌우혼합형 사회주의자라고 볼 수 있는데, 물론 안티들에겐 둘 다 사회주의를 위장한 쁘락치라는 욕도 먹는다. 사실 시장주의자들에게도 특히 덩은 일당독재 권위주의적 방식까지 결합되어[62] 사실상 국가자본주의자 혹은 국가사회주의자, 관치 경제로 오히려 시장 경제를 망친 자라는 비판도 듣는다.
그렇기 때문에 덩샤오핑은 보는 관점에 따라 진영 내에서도 평가가 나뉠 수 있는 인물이다. 모 경제 관련 언론에서 덩샤오핑을 치켜세우다가, 정치 쪽 사설이나 서적에선 덩샤오핑을 독재자 운운하며 비난하는 건 이런 맥락. 국내의 경우 먼나라 이웃나라의 저자 이원복처럼 덩샤오핑을 호평한 인물도 있는 반면, 진중권처럼 '천안문 사태에 대해 철없는 부르주아 학생 난동을 진압했다며 중공을 조심스레 옹호하던 일부 구좌파나 군부독재를 찬양하는 한국 우익의 멘털리티가 묘한 교감을 이룬다'며 이를 비꼬는 인사도 있는 등 사실 덩샤오핑에 대한 평가는 좌우를 넘는 부분이 있다. 실제 구좌파라고 표현되긴 했지만 지금도 중국 공산당을 긍정하는 한국내 일부 좌파들은 그를 옹호하며 독재도 일당독재를 추구했으니 일인독재보단 낫다는 식으로 부분적 쉴드를 치는 반면[63], 뭔 헛소리냐고 발끈하는 리버럴 좌파들도 많다. 더 왼쪽으로 가면 덩샤오핑도 그저 주자파일 뿐이라고 냉소하는 좌파도 있다. 한편, 보수 우파도 조갑제처럼 긍정하는 인사가 있는 반면, 중국공산당 생명줄 연장시킨 독재자일 뿐이라고 비난하는 리버럴 우파의 경우도 많다. 근데 이 리버럴 진영 안에서도 또 2016년 기준 리버럴 중도 혹은 중도좌파 정치인으로 인식되던 안철수가 뜬금없이 덩샤오핑을 롤모델로 한국의 미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연설을 하기도 하는걸 보면 한국 내에서도 그를 평가하는 잣대가 여러 관점으로 나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외에서도 흑묘백묘론 같은 실사구시적 태도나 외교술 같은 부분은 호평하지만, 인권 문제 등에 있어서는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그럼에도 다른 독재자들보다 약간 더 호평받는 기류는 있는데, 세계사적 관점에서 중국이란 강대국의 지도자라는 점이 언급 빈도를 높이고 실사구시적 태도나 일당독재를 추구해 종신독재자와는 표면적으로나마 구분되는 점, 또 롤러코스터를 달리던 전임 마오쩌둥과 비교되는 대비 효과 덕분도 있어보인다. 물론 이 평가가 천안문 6.4 항쟁 이전에 나온 것도 상당하다는게 함정이지만. 헨리 키신저는 덩샤오핑을 만나 그의 결단력과 통찰력을 보았다며 덩샤오핑은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극찬했고[64], 일본계 미국인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덩샤오핑을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는 아니지만 민주주의 정치인이 할 수 없는 경제 대변혁을 이룬[65] 위대한 '황제'[66]라고 주장했다.[67] 반면 중국현대사의 권위자인 모리스 마이스너 교수는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덩샤오핑을 혹평했는데, 부작용이 많은 중국 관료 자본주의의 형성에 그가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천안문 6.4 항쟁 역시 이런 관료 자본주의로 인해 득세한 관료들의 부패와 그로 인한 양극화를 목도한 민심이 폭발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외적으로는 일명 '도광양회'라고 중국의 경제 발전을 우선하면서 서방을 자극하지 않는 현실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 덕에 냉전 이후 중국은 천안문 사태로 이미지가 잔뜩 실추된 후에도 WTO에 가입하는 등 국제 사회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대 들어 시진핑 지도부가 공식적으로 도광양회 정책을 폐기함으로서 이 정책이 재주목 받은 바 있다. 미국은 당연히 여기에 반발했고 결국 미중 무역분쟁으로 이어졌다. 물론 시진핑은 북경 올림픽 집행위원장을 지내는 등 외교 감각이 아예 없는 사람은 아니었고 미국을 도발하고 싶어서 도광양회를 버린 것도 아니다. 그저 도광양회가 이제 그 가치를 다했다고 판단해 버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 대안이라면서 가져온 정책이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 중국이 누구 힘으로 중진국까지 발전할 수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시진핑인 만큼 미중 무역 분쟁은 분명 시진핑도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일부 마오주의자들에게는 중국을 " 공산주의의 탈을 쓴 제국주의"로 만들었다고 비난받기도 한다.[68] 이들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공산당을 짝퉁 공산당 취급하며, 2008년 중국마오쩌둥주의공산당이라는 정당도 만들었지만 현재는 반체제 세력으로 찍혀 금지된 상태다. 심지어 이들 중에선 천안문 사태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외부에서 싸잡아 보는 시선과 달리 내부에선 그들끼리도 나름 다툼이 치열한 모양이다.
한편, 의외라면 의외지만 덩샤오핑은 해외 문화가 중국에 퍼지는 거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편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이미 일본 문화 전파에 대한 족쇄를 풀었는데, 1990년대 후반에나 일본 문화의 전면적인 개방이 이뤄진 한국인 입장에선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 그의 개혁 개방 사상과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중국은 이때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특촬물을 무삭제로 지상파 TV에서 볼 수 있었는데[69], 이런 시류 때문인지 당시 수교가 이뤄지던 일본 내에서도 중국 요리나 관광 붐이 일어 이때를 노리고 드래곤볼, 란마 1/2이나 쿵후보이 친미, 권법소년 같은 중국풍이 강한 작품들이 나오기도 했다. 권법소년의 원작자 마츠다 류지는 아예 방중하여 각종 무술인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했다. 이런 개방 정책은 자유주의의 물결도 불러와 천안문 항쟁의 간접적인 요인도 되지만, 이를 진압한 후에도 해외 문화 유입은 유지되어 그가 정계를 은퇴하고 쉬고 있을 때도 관료들이 눈치가 보였는지 어쨌는지 검열 등 문화통제 정책을 강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그가 사망하고 장쩌민이 권력을 장악한 뒤로는 그런 거 없고 다시 강력한 검열과 문화 통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한편으로 본인이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자리에 오르는 것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70] (즉,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만 차지하고 국가주석 자리는 계속 거부하는 바람에) 덩샤오핑의 집권기 내내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자리는 중국 국외에는 이름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들이 번갈아 가면서 맡아야 했다.[71] 그나마 덩샤오핑이 퇴임한 이후에는 중국 내에서도 이게 너무 이상했다는 인식은 있었는지 덩샤오핑의 직계 후임인 장쩌민 집권기부터는 항상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과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을 동일인물이 맡도록 조치하고 있으며 이는 2023년 현재 시진핑 집권기까지 유지되고 있다.
[1]
소련에 유학 중
독소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2]
(근면히) 일하면서 (검소히) 공부한다는 뜻으로 1918~1920년에 약 1,500명의 중국 학생들이
프랑스로
유학한다.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노동력이 부족해진 프랑스의 상황과 맞물려 생긴 일로, 이중 200명이 후에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그 중 20명은 미래에 중국의 요직을 차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근공검학에는 그 근본부터 프랑스와 중국 사이에 심한 괴리가 존재했다. 프랑스는 '(근)공'에 초점을 둔 반면에 중국은 '(검)학'에 초점을 뒀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프랑스에서는 중국 유학생들을 꽤 박하게 대했고 공부를 하기 위해 프랑스로 갔던 어린 덩샤오핑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공산주의자가 된다. 덩샤오핑은 나중에 자신이 프랑스로 유학한 이유를 "중국을 구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런데 동시기에 마오도 프랑스로 유학할 기회가 있었지만 정작 그는 가지 않았다. "중국의 붉은 별" 저자가 왜 프랑스로 유학을 가지 않았는지 마오에게 묻자 마오는 "중국 문제의 해결책은 중국에서 찾아야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마오가 매우 비범한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 생각은 적중해서 중국 인민을 정확하게 파악한 마오는 조각조각난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기념비적인 업적만을 남겼다.
[3]
공산당과는 약간 다르다. 1920년 초에 이미 존재했던 조직으로 덩샤오핑이 청년 동맹의 주요 인물로 부상한 뒤 프랑스 경찰을 피해 동지들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가는 1926년까지 유지된다. 덩샤오핑이 공산당에 입당한 것은 모스크바로 간 뒤의 일이다. 또한
저우언라이와도 여기서 처음 만났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에서 평생 동안 덩샤오핑을 후원했고 덩샤오핑도 6살 차이의 저우언라이를 항상 큰형님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4]
덩샤오핑은 프랑스를 떠나기 전 자기가 일했던 자동차 공장과의 계약을 해지했는데 당시 공장장의 평가는 이랬다고 한다. "사직 이유 : 귀국, 근무 성적 : 괜찮음, 전반적 태도 : 양호함"
[5]
일종의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으로 여기에서 공부했던 인물들 중 상당수가 후에 중국에서 한 자리씩 차지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덩샤오핑,
류사오치, 런비스,
녜룽전,
장징궈 등이다. 그리고 그 외의 유명 인물들로는
조봉암,
주세죽,
허정숙,
호찌민 등이 있다.
[6]
재학 시절에는
장징궈와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7]
'중산'은
쑨원의 자(字)로 중국 공산주의자를 위한 대학이었다. 프랑스에서는 일개 하류 노동자 취급을 받았던 그들이 러시아에서는 혁명 동지로 대우받았다고 한다. 러시아 측에서도 꽤 신경을 썼는지 중산대학 초청 강연자 중에
레프 트로츠키까지 있다.
[8]
덩샤오핑은 후에 펑위샹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했는데, 펑위샹이 마음만 먹었으면 자기 부대 안의 공산주의자들을 몰살시킬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고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내면서도 그들에게 여비까지 챙겨줬다. 그 보은 덕분인지 공산당은 집권하고 나서 펑위샹 자손들을 돌봐주었고, 군벌 가문 치고는 꽤 출세한 사람이 많다.
[9]
여기서 이름도 바꾸게 된다. '소평(小平)'이라는 이름은 덩샤오핑의 세번째 이름으로 태어날적 이름은 '셴셩(先聖)', 청소년기 이름은 '시셴(希賢)', 그리고 마지막 이름이 '샤오핑(小平)'이다. 뜻 풀이가 재미난데, 태어날 때 이름은 "옛 성인과 같이 되어라."이고 두 번째 이름은 "현명해지기를 바람."이고 마지막 이름인 샤오핑은 "작고 평범함."으로 점점 이름의 뜻이 소박해진다. 참고로 앞서 두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고 샤오핑이라는 이름은 본인이 지은 것이다.
[10]
1920년대 말부터 마오쩌둥을 지지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류파였던 강서 소비에트 정부의 거부를 받아서 마오와 함께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심지어 아내와도
이혼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1935년 대장정 기간 중에 열린 준의 전원 회의에서야 비로소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이때부터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주더가 당 중앙 지도부를 형성하게 된다.
[11]
항일전 초기 수백명으로 시작했던 129사단은 항일 전쟁 끝에 12만명 규모로 불어났다.
[12]
이 때의 공적 덕분에 그는 중국 군부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얻었고, 이 시기에 군부에 만든 인맥들 특히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제2야전군 출신들은 훗날 그의 권력 탈환에 크나큰 힘이 되었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류사오치를 지지하던 군부 인사들이 류의 실각과 함께 숙청 당했던 반면, 덩샤오핑의 인맥이었던 군부 인사들은 문혁 시기에서도 실권을 가진 현직에 남아 있었다. 군 실세의 한 명이기도 했던 후야오방은 "덩샤오핑 동지가 장악하고 계시면 한마디로 끝날 것이, 우리들로서는 다섯 마디나 필요하다."라는 말로 덩샤오핑의 군에 대한 영향력을 표현했다. 덩사오핑이 최고 지도자가 되는 1980년대 이후 제2야전군 출신들이 군의 주류가 된다.
[13]
실제적인 덩샤오핑에 군공은 개국 10원수에 밀리지 않는 평가를 받는다.
[14]
마오쩌둥이 당 서열 1위 명예직인 중앙위윈회 주석으로 군림하고 있어서 직함은 총서기이지만 당직 중에서는 주석 다음의 서열 2위였고, 상무위원단 내에서의 서열은 6위였다. 그렇지만 당시 중국 지도자들 중에서 당-군-정 모두에서 덩샤오핑보다 더 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은 마오쩌둥 단 한 명뿐이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특정 분야에서의 영향력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상무위원단 내 서열과 명망에서 보다 앞서는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으로서 명목상 서열 2위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간주됐고, 당 주석인 마오와 총서기인 덩샤오핑 사이에는 부주석인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주더, 천윈 그리고 루산회의 이후로는 린뱌오 등 6인의 부주석이 존재했으나 당이 모든 분야를 지도하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을 대리해 당을 총괄한 덩샤오핑의 실제 위상은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와 대등했다고 간주해도 무방하다.
[15]
당시 마오쩌둥은 당 총서기로 실권을 잡은 덩샤오핑에 대해 "(덩샤오핑은) 나를 죽은 아버지 모시듯이 한다."라고 비꼬았다. 즉, 겉으로는 마오쩌둥을 최고위, 명예직인 당 주석 자리에 올려놓고 모시기는 극진히 모시지만, 대부분의 실무 의사 결정을 내릴 때는 "뭐 이런 것 갖고 주석을 귀찮게 해 드려야 쓰겠습니까?"라는 자세를 취하면서 국가주석 류사오치와 당 총서기였던 덩샤오핑 등 정치국 상무위에서 자기들끼리 알아서 처리해 버리는 식으로 마오쩌둥을 배제해 버렸던 것이다.
[16]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을 홍위병의 분란을 핑계로 당 대회에서의 투표로 추방하려던 류사오치의 계획을 성사 직전에 파탄에 빠뜨린 것은 덩샤오핑이었다. 당시 덩은 "마오 주석의 지시는 반드시 이행되어야 한다."라면서 지방에 있던 마오쩌둥 지지자들을 베이징으로 옮기려던
린뱌오의 작업을 지지하였다. 덕분에 류사오치와
펑더화이,
허룽,
리리싼 등이 고초를 겪던 시기에서도 덩샤오핑은 주자파의 2인자라는 낙인이 찍히고도 살아남았다.
[17]
덩샤오핑은 결국
장시성 시골의 트랙터 공장으로 쫒겨나 생산 노동자를, 그것도 4년이나 하면서 지내야 했다. 이 정도면 사실상의 정치적인
사형 선고지만, 덩샤오핑은 언제일지 모를 재기를 기약하며 이 기간을 묵묵히 버텨냈다. 하지만 문헌에 따라서는 4년 내내
이십사사를 읽으면서 지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18]
홍위병의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2층 베란다에서 추락했고, 척추 골절로 인한 영구적
하반신마비가 되었다. 덩샤오핑은 이 일을 자신의 생애 중에서 가장 슬픈 사건으로 기억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은 장애인 인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석이 앞장서서 장애인 인식 개선에 힘쓰게 되니 오늘날 중국은 국가의 인권 수준에 비해 장애인 인권이 어느 정도 잘 보장되어 있는 편이라 오히려 일본보다도 장애인 인권이 더 나은 축에 속한다. (일본은 남과 다른 것을 메이와쿠라고 상당히 꺼리고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전근대적인 면이 남아 있어 아직도 장애인 인권이 잘 보장되어 있지 않다. 주석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바뀌고 급격한 사회 변혁을 겪은 중국과 달리 2,000년이 넘는 역사에서도 이렇다 할 급격한 사회 변혁이 거의 없이 물 흐르듯 역사가 흘러왔기 때문이다.) 덩푸팡은 훗날 중국 장애인 협회 주석이 되나 부정부패로 온갖 구설에 오른다. 그럼에도 덩은 미안한 감정에 어쩌지 못했다.
[19]
상술했지만,
난징 함락 당시 작전을 짰던 사람이 바로 덩샤오핑이다.
정치장교이긴 했지만 어쨌든 전쟁 영웅이었던 셈이다.(물론 이때 나온 영웅들이
한
둘
이 아니다.)
[20]
마오쩌둥의 동생인 마오쩌민의 아들이다.
[21]
더군다나 덩샤오핑의 아들은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들의 광기에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22]
이데올로기적 신봉만이 아니라 실무 능력도 우수했고 인망도 높았기 때문에 유언으로 마오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하지만 이 유언은 화궈펑의 조작이었다는 루머가 있다.
[23]
이것이 화궈펑이 오래 집권하지 못한 원인이다.
[24]
당시 중국의 여론은 문혁으로 인한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었고 하방정책으로 농어촌지역의 노동력이 과잉상태였기도 한 데다가 무엇보다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던지라 문화대혁명에 몹시 부정적이었다. 이 때문에 마오는 물러가시오!와 같은 구호가 나왔을 정도였는데 그래서 나온 사건이 제1차 천안문 사건.
[25]
정치인 덩샤오핑이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이 된 이유로는 공산국가 특성상 군에 대한 계급이 처음에 없어서 국공내전 시절 제2야전군 정치장교로서 참여하여 막대한 군공을 세웠다. 그리고 앞선 군공이 1955년 인민해방군 계급이 생김에 따라 중국 인민해방군 10대 원수와 맞먹는다는 평가를 받아 원수 계급도 같이 받을 수 있었지만 당 지도자, 정치인으로 성장함에 따라 덩샤오핑 본인이 한사코 거부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군부내에서 총참모장을 덩샤오핑에게 맡겨도 아무런 불만도 없었고 오히려 환영받았다.
[26]
이 당시에도 이미 서방 외교관들은 화궈펑에 대해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영국 대사의 말에 따르면 "전제적인 황제였다."고 할 정도. 여담으로 화궈펑은 권력에서 축출되었지만 그래도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대략 우리나라 국회의원급)으로 20년 동안 활동하고 후에도 원로로 잘 대우받다가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 중국 공산당 내에서 권력에서 축출되어도 어느 정도의 지위와 대우를 받게 된 최초의 케이스. 이후
자오쯔양과 같은 몇몇 예외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중국 공산당 내의 권력 다툼은 지더라도 한직으로 밀려나는 수준인 경우가 많아졌다.
[27]
현재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는 공칠과삼(功七過三). 항일전/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게 한 공(功)이 있으나 대약진 운동과 문화 대혁명의 과(過)가 있다는 평가다. 이를 통해 마오쩌둥의 권위를 이용하면서도 그의 기존 정책은 싹 엎어버릴 수 있었다. 근데 재미있는 건 이 공칠과삼이라는 표현이 마오쩌둥이
스탈린을 평가할 때 처음 쓴 표현이라는 것이다.
[28]
마오쩌둥이 당권을 잡기 전 천두슈 같은 중국공산당의 창당 1세대의 지도부들도 있었지만 마오쩌둥을 위시한 신진 세력들에게 당권을 빼앗기거나 몰락했다.
[29]
1970년대 후반부터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라는 군부 내 실질적 지배자였고, 1981년 부터는 중국의 군권을 가지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었다.
[30]
본래 중국의 4대 현대화는 1964년
저우언라이 국무원 총리가 제2기 전국 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었는데, 2년 후 시작된 문화 대혁명의 혼란으로 덩샤오핑의 집권기에 본격화될 수 있었다. 결국 오늘날 중국 4대 현대화는 덩샤오핑의 업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31]
대신 중국은 미국에게
중화민국과
단교하라고 요구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대만은 자국의 영토에 불과하다는 논리였으며, 미국은 고민 후에 이를 수용한다. 대신 미국 의회는 '
타이완 관계법'을 제정하여 대만의 군사적 안전을 간접적으로 보증하였다.
[32]
주로 일당독재를 시행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룬 국가인
싱가포르와 당시에는 일당 독재 국가이던
대만의 사례를 많이 참고했고, 동유럽 국가 가운데에서는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의 사례를 상당히 많이 참고했다.
[33]
여담으로 방미 당시 중화민국 시위대의 덩샤오핑 반대 시위가 벌어졌었다.
[34]
1979년 이 시기는 후일 1981년에 임명되는 중국의 실질적 1인자이자 군권을 가지는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아니었으므로 덩샤오핑은 엄연히 정치적 직위로는 중국 최고지도자가 아닌 상태였다. 따라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회담하기 위해 국빈 방문을 했지만 정식적으로는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장 겸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라는 군부 내 실질적 지배자였을 뿐이다. 하지만 미국 외교에서 보통 이루어지지 않으며 극히 예외적으로 당시 중국의 최고
실세였던 덩샤오핑을
국가 원수이자 국빈으로서 대우하였다.
[35]
실제로 당시의 중국은 냉전이 최정점이던 1980년대 초반,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은 같은 공산권 국가였음에도 제1국가들을 따라 보이콧을 하였고,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참여하는 등, 제2세계 진영의 국가가 아닌, 제1세계 진영의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내려고 노력하였다.
[36]
그래도 1985년에 고르바초프가 집권하면서 중소 관계는 다시 회복된다. 한편 베트남 역시 사회주의권이지만 이 당시에 중국과 베트남은 전쟁을 했고 베트남에 살던 화교도 강제추방을 당하거나 보트피플로 중국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중월 관계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37]
리펑의 회고록에서 언급 되었다. 다만 이것은 진압의 실무자인 리펑이 자신을 변명하기 위해 일부러 알리바이로 남긴 것이란 것은 고려해야 한다. 청년 시절 학생운동을 일으켰고, 또 하나의 학생운동인 문화대혁명으로 실각한 입장에서 세번째 운동에 대한 덩샤오핑의 입장은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뒤의 문장과 상충되는 취지의 말이고 실제로 덩샤오핑의 취지와 부합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필요]
[39]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고 설파하였다. 덩샤오핑도 충실하게 이 주장을 따라 군권을 가진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라는 자리와 당의 최고 원로 중 한 명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중국 공산당과 중국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배하였다.
[40]
1980년대 한때 덩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다당제 등의 강력한 정치 개혁을 주장하였고, 이에 보수파의 역공을 받아 실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1989년 2차 천안문 사태는 그의 죽음을 계기로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추모 대열이 시위로 번지면서 시작되었다.
[41]
일부에선 문화대혁명을 소련식
대숙청과 같은 정부 주도의 변란으로 알고 있는데, 전혀 사실이 아니다. 문화대혁명은 최고 지도자 마오가 정권을 잡기 위해 대중을 선동해 벌인 일종의 친위 쿠데타며, 정부 기관은 한켠으로 물러 서 있는 가운데 순수 민간조직인 홍위병이 언론 기관을 장악한 4인방의 선동에 이끌려 나선 것이다. 이랬기 때문에 문혁 때 무지막지 고생한 당시 중국 지도부들은 대부분 대중 운동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이때의 두려움이나 경험을 살려 천안문 사태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게 된다.
[42]
말이 웃긴 것 같지만 자오쯔양은 이때 절망적이었다고 한다. 위 사진이 당시의 사진인데, 정말로 울면서 말하고 있다. 한편 이때 자오쯔양의 옆을 지킨 사람이 이후
후진타오 국가주석 체제에서 2인자격인 국무원 총리가 되는
원자바오.
[43]
반중인사들이 높여잡은 추정치도 4,600명 정도이다.
[44]
이는 자오쯔양이 덩샤오핑을 비판한 구술 녹음 테이프가 자오쯔양의 사망 이후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는데, 자오는 감시원의 의심 및 수색을 피하기 위해 이 녹음 테이프들을 자신의 손자가 가지고 놀던 낡은 곰 인형 속에 숨겨놨었다. 그러다 2005년 1월 그가 사망하자 또 다시 시위가 벌어질까 우려한 중국 정부는 천안문 광장 등 주요 지역에 무장 경찰을 배치하고, 언론 보도 또한 통제하였다. 기타 자세한건
자오쯔양 항목 참조.
[45]
당시 티베트 지역 당 서기였던 후진타오는 반중국 시위가 일어나자 시위 현장에서 철모를 쓰고 직접 강경 진압을 진두 지휘하였다. 덕분에 개방에 유화적인 태도와 함께 내부 문제에선 강경파로 덩샤오핑과 보수파 양쪽에게 인정받았다.
[46]
천안문 민주화 운동으로 덩샤오핑은 보수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개방에 회의적이던 장쩌민을 후계자로 지명하였으나, 장쩌민의 후임은 개방을 적극 지지하던 후진타오로 내정하였다.
[47]
중국 공산당의 당원은 수천만명에 이른다. 때문에 혹자는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조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현재는 인도의 우파정당인
인도인민당이 세계 최대 정당이다.
[48]
현
중국 인민해방군 총의원
[49]
실제로 덩샤오핑의 홍콩에 대한 집념은 초지일관이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홍콩 반환 시기를 늦춰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한 것도 모자라 "중국 인민해방군은 당장 오늘이라도 홍콩을 접수할 수 있다."라고 경고했을 정도. 당시 마거릿 대처는 "우리가 당신을 막지는 못하지만, 전 세계의 눈은 이제 중국이 어떤 나라인지 똑똑히 알게 될 것이다." 라고 반협박을 하였는데, 이는 대영제국이라 불리며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를 짓밟았던 19세기의 제국주의 열강 영국이 100여 년만에 중국에게 상대가 안된다고 시인한 것이니 역사의 흥미로운 부분이라 할만하다. 물론 이시기 영국은 식민지 영토 대거 내주고 미국에 패권도 뺏긴 쪼그라든 나라일 뿐더러 자국에서 군대 파견하긴 홍콩은 너무 먼 것도 있었지만. 또 중국 역시
제3차 세계 대전 일으킬 거 아닌 딴에야 실제로 쳐들어올 가능성은 낮았다.
[50]
물론 2000년대 이후 이전에 비해 양안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양안관계가 개선되기도 했지만 2016년 이후 차이잉원-라이칭더 정권 시기에 와서 다시 악화되어 전쟁위기까지 발생하는 등 양안통일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51]
장쩌민,
후진타오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대외적으로는 비교적 막 나가지 않아서 미국이나 기타 서방국가들, 다른 아시아 주변국과의 관계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도 소수민족 문제의 경우 독립 요구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짓밟기는 했지만 최소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고 위로하는 시늉은 하고 소수민족 내부에 친중파들도 키우는 등 온건한 방법도 병행했다. 하지만
시진핑 시절에 들어와서는 정권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수용소에 몰아넣는 등 강경책 일변도로 나갈 뿐 아니라 주변국을 상대로도 일견 막 나가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52]
우선 나라의 체제의 기틀을 잡은 국부(
마오쩌둥,
이승만)가 국가 운영을 실패해서 그 체제를 따르는 하에서 국가를 재건했다는 정치적 경력이 비슷하며, 국부의 국가 운영 실패 외에도 전쟁같은 외환(
국공내전,
6.25 전쟁)으로 인하여 국가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더불어 개인적으로는 국부였던 전임자와 확실한 적대관계였으나, 기본적으로는 체제나 이념의 뜻을 같이 했고, 결국 사후에는 해당 스펙트럼의 지지자들에게 함께 지지받는다는 점이 매우 유사하다.
[53]
참고로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학살에 비해 수십배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암매장으로 학살자수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사망자 수 최대치가 천안문 항쟁 당시 사망자수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난다.
[54]
이런 점 때문인지 일부
마오쩌둥 지지자들에겐 현대 중국의
양극화를 낳은 주범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마오쩌둥 시절만 해도 중국 대학비는 무료였지만 개방개혁이 이뤄지면서 대학 입학비를 받게 된다. 또 이런 양극화 문제의 핵심은 결국 부동산이 좌우하는 경우가 많은데, 못 살던 시절엔 다른건 몰라도 몇년 일하면 집은 살 수 있던게, 도리어 잘 살게 되자 다른건 풍족해졌는데 투기 등으로 집값이 폭등해 몇십년을 일해도 집을 못사게 되는 상황이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다.
[55]
'백가지 꽃이 만개하게 하라, 백 가지 의견이 경쟁하게 하라'라는 뜻으로 원랜 마오쩌둥 통치 시기인 1950년대 후반 쌍백 운동의 방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 낚여 많은 당대 지식인들이 사회와 당, 국가에 비판을 가했지만, 정도가 과했는지 어쨌는지 빡쳐버린 마오쩌둥과 공산당은 직후 반 우파 투쟁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게 된다.
[56]
당시 공산당은
마오쩌둥의 철저한 숙청으로 인해 마오쩌둥 사후 특정 인물 한 명이 당을 완벽히 장악하는 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말년의 남순강화와 같은 공산당 원로들의 권력 다툼으로도 보일 수 있는 행보를 죽을 때까지 한 것이다.
[57]
마오쩌둥이 죽고 그를 대신할 권위가 붕괴한 상황이었으니 정국 수습에 원로들의 도움이 필요했다고 치더라도, 정말로 정치개혁을 실현할 생각이었으면 본인들이 총서기로 삼은 후야오방과 자오쯔양을 전적으로 밀어주고 본인들은 조력에만 힘써야 했다. 실제로는 총서기와 총리 뒤에서 권한은 누리고 책임은 회피하며 이들의 상전노릇을 하기만 했으니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이기적이라는 평가는 면할 수가 없다.
[58]
인민공사가 해체되며 그 틀 내에서 생계를 이어나가던 사회적 약자들이 아무 보호 없이 시장경제 체제에 내던져지고 체계적인 부패와 상납의 사슬을 만들어내었다.
[59]
흔히 덩샤오핑의 관대함을 칭송하기 위해 인용되는, "마오가 점지한 중앙위원에게는 정년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화궈펑의 중앙위원 신분을 건드리지 않은 일화도 시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해석이 완전히 달라진다. 쫓겨나서 권력이 전무한 전임 주석조차도 원로라는 이유로 신분을 유지시켜 준다면 당연히 본인들도 죽을 때까지 해먹겠다는 소리 아닌가? 그리고 그렇게 비루하게 장기집권을 하면서도 그 권한의 근거를 자신들이 그렇게나 싫어하던 마오쩌둥에게 기대면서 그의 과오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이 더욱 어려워지게 된 것은 덤이다.
[60]
특히 중앙군사위 주석 직을 내놓지 않고 상왕으로 군림하려고 했던 장쩌민의 행위
[61]
사실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자고 주장한 적이 없으며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첫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니까 자본주의→사회주의→공산주의 순으로 가야 하는데 현실은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진정한 공산주의는 시작도 안했다는 것이다.
[62]
영국의 리버럴(
자유주의) 정당 자유민주당과 합당도 추진한 경력이 있는 토니 블레어와 가장 크게 차이나는 부분이라 할만하다. 북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세력과도 차이나는 부분이다.
[63]
도올도 중공의 일당독재는 당내 민주주의가 작동된다며 은근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다만 시진핑의 일인독재는 이것을 무너뜨렸다며 격렬하게 디스한 바 있다. 사실 도올은 좌파 진영 학자로 분류되긴 하지만, 민족 정기를 위해 징병제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발언도 하는 등 은근히 보수적인 성향도 있는 학자이다.
[64]
다만 2010년대 낸 자서전에선
저우언라이를 자신이 만난 중공 최고의 인물로 표현했다. 덩샤오핑은 처음엔 너무 까칠해보여 별로 안좋아했는데, 말은 무뚝뚝해도 열심히 하려는걸 보고 진정성을 느꼈다고 평가했다.
[65]
물론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방임주의에서 정부 개입을 긍정하는 혼합체제적 성격으로 경제 변환을 이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후의 미국이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도 복지제도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킨 유럽권,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거치며 대기업의 전문화와 벤처기업육성 등 경제 체질을 강화시켜 연착륙에 성공한 한국 등을 들어 후쿠야마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의견도 있다. 다만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바닥까지 주저앉았던 중국을 어느 정도 반열에 올랐던 이들과 비교하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는데, 애초에 대공황과 세계대전으로 초토화된 지역을 복구한 업적들이 결코 폄하될 것은 아니고 그 이전도 사실 미영 등은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성장한거다. 또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때의 중국 역시 지금보다 못할 뿐 엄연히 유엔상임이사국을 맡고 있던 강대국에
영토,
자원도 빵빵하고 고작 100여년 전만 해도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라 할만한
청나라를 계승한 나라로, 잠재력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던 것마냥 호도하는 것은 팩트와 어긋난다. 진짜 최빈국에서 올라선건 서방권이나 기타 주변 강대국의 산업, 교육 지원도 거의 받지 못하는 지역인 아프리카의
보츠와나 등과 같은 나라들이다.
[66]
말 그대로 그를 민주주의 체제의 지도자가 아닌 황제, the Great
대제라고 부른 것이다. 왕조 시대의 지도자로 규정한 셈이다. 다만 봉건전제왕정을 디스하는 공산당 입장에서 보자면 황제라는 칭호 자체는 욕이 된다.
[67]
그러나 과거 중국 왕조 시대에도 위대한
황제들이 있었음을 언급하며 민주주의 체제의 권력 견제가 없는 체제라도 황제가 좋은 사람일 때는 나라도 잘 되지만 늘 이런 좋은 지도자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면서
마오쩌둥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황제가 절대 권력을 장악해
폭군이 된 것을 예로 들었다. 물론 리버럴 입장에서 보자면 덩샤오핑도 정도 차이일 뿐 일종의 폭군이라 할 수 있다.
[68]
근데 정작 덩 본인은 후술된 어록에서 보이듯 본격적인 집권 이전 시절에는 제국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69]
북두의 권을 거의 무삭제로 틀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그래서 2020년대 초 기준 중국의 일본 문화 오타쿠들은 이 세대인 30~40대들이 많다고 한다. 인구 수가 엄청나다보니 저때 방영한 더빙 애니메이션을 전편 녹화한 기인들도 많아서 저 당시 더빙작들은 지금도 더빙 자료가 그대로 남아있다.
[70]
덩샤오핑 본인은 국가주석 자리에 오르지 않은 이유를 밝힌 적이 없다. 마오쩌둥과 같은 1인독재를 우려해서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지만 정작 본인이 군사권을 쥔 막후실세로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의 업무 외에도 국정 전반에 관여한만큼 이렇게 보기도 어렵다. 그나마 추측하자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최고지도자의 직위로 하고 국가주석을 북한의 내각총리와 유사한 행정실무자 역할로 두려고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러기에는 국가주석의 공식적인 역할이나 직위가 너무 컸고 결국 장쩌민 이후로는 최고지도자가 국가주석도 겸임하고 있다.
[71]
쑹칭링 정도면 중국 국외에서도 유명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쑹칭링의 임기는 고작 2년으로 그다지 길지 않았고 게다가 쑹칭링은 명목상으로 국가주석을 역임하고 있던 시절에도 국무회의 등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장에 쑹칭링은 공식 직함부터가 "국가주석"이 아니라 "명예주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