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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까레에바, 한베라, 한세죽, 김세죽 |
본관 | 신안 주씨 |
출생 | 1899년 6월 7일[1] |
함경남도
함흥군 주남면 상리 (현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동) |
|
사망 | 1953년[2] (향년 53~54세) |
소련 러시아 SFSR 모스크바 | |
묘소 | 러시아 모스크바 단스키 수도원 납골당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국과 소련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 초창기 여성운동가. ( 근우회 핵심 멤버로 활동함)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9년 6월 7일 함경남도 함흥군 주남면 상리[3]의 넉넉한 집에서 아버지 주용섭과 어머니 신씨 사이의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 주경흠이 있었다. 이후 함흥부 대화정4정목[4]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옮기기도 했다.그녀는 함흥 영생여학교[5]를 2년 다니다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는 바람에 퇴학당했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시)로 가서 활동하다 1921년 중국 상하이로 피아노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났다. 이 때 상하이에서 박헌영과 김단야를 만났고, 1922년에 유학을 마치고 경성부로 돌아왔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했고, 그해 5월에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조직했다. 그해 11월에는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박헌영과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925년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풀려났으며, 1926년에는 6.10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 풀려났다.
1927년엔 김활란 등이 참여한 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참가하는 등 여성 항일운동 및 여성 계몽활동에도 참여했다. 1927년 박헌영이 가출옥하고 1928년 9월 남편 박헌영과 함께 만삭의 몸으로 조선땅을 탈출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으로 이주했고, 도중에 딸 박 비비안나를 낳았다.
1928년 남편 박헌영과.
1928년 남편 박헌영과 딸 비비안나와 찍은 사진.
그 후 신한촌 하바로프스카야에 있던 선우섭(鮮于燮)의 집에 잠시 기거하다가 모스크바로 이주하여 지냈으며, 그 뒤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1932년 상하이로 갔다. 1933년 박헌영이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자 김단야와 함께 모스크바로 피신한다. 그런데 도망친 모스크바에서 주세죽은 김단야와 눈이 맞아버렸고(...) 박헌영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바로 김단야와 재혼하였다.[6] 당시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이 추문을 두고 주세죽과 김단야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지만[7], 박헌영은 "신경 쓸 거 없다"며 넘어갔다.[8] 박헌영은 1939년에 출옥하였는데, 친척들이 주세죽의 행방을 묻자 죽었다고 답했다고.
3. 소련에서의 삶과 죽음
1937년 김단야의 아이를 임신하였으나, 대숙청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김단야는 일본 간첩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주세죽도 체포되어 1938년에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 5년간 복역하였다. 김단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김비탈리는 1~2살 무렵, 주세죽이 유형 생활을 할 때 사망했다.카자흐스탄 지역 협동농장에서 계속 일하던 중에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북한으로 귀국하게 허락해달라"고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전남편 박헌영은 북한 부수상이 되었고, 1946년 7월에 소련을 방문했을 때 딸 박비비안나를 만났으나 주세죽과는 만나지 않았으며, 1949년 8월에 자신의 비서였던 윤 레나와 재혼했다.
1953년, 병든 몸으로 딸 비비안나가 있는 모스크바로 가던 중에 기차에서 병이 악화되어 모스크바 도착 후에 사망하였다. 건강이 안 좋은데 무리해가면서 딸에게 간 이유는, 전남편 박헌영이 북한에서 구속( 김일성의 정치숙청)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소련 정부가 박헌영의 핏줄이기도 한 비비안나를 북한으로 강제송환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련이 개방정책을 펼친 1990년대에 기밀 해제된 소련 정부의 문서에 의하면, 아이러니하게도 소련 정부는 박 비비안나를 북한으로 송환할 계획이 없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미국의 간첩이란 혐의로 체포하여 기소했지만, 소련은 김일성이 권력투쟁 차원에서 박헌영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박헌영의 딸을 숙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1953년 당시 주세죽은 이런 사정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병든 몸을 이끌고 딸에게 갈 수 밖에 없었다.
딸은 어머니가 모스크바에 온다는 것을 모르고 다른 지방으로 공연을 떠난 상태라, 임종은 사위인 빅토르 마르코프가 지켰다. 당시 소련의 교통, 통신 상황이 열악해서 딸에게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갔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딸을 만나지 못했다.
4. 사후
1989년에 소련에서 정식으로 복권되었으며, 김단야도 이때 복권되었다.참여정부 시기 사회주의(좌익) 계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면서[9] 2007년 대한민국에서 정식으로 복권되었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추서식에는 딸인 박 비비안나가 직접 한국을 방문해 대리수령했다. 조중동이나 보수우익 쪽에서 좌익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건국훈장을 준다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북한 정권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이 아닌 이상 해방 이전의 좌익활동은 독립운동 경력을 깎아내리는데 어떤 명분이 되지 못한다.[10]
5. 후손
5.1. 박 비비안나
딸인 박 비비안나(Вивиана Пак , 1928-2013). 주세죽의 묘비 앞이다. 박영이란 한국 이름도 갖고 있다.
박 비비안나는 평생을 소련과 ( 소련 붕괴 후에는 그 후신인) 러시아에서 살며 무용가로 활동했다. 1928년에 부모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소련으로 탈출할 때 기차 안에서 태어나 소련의 보육원에서 성장했다. 이 보육원은 일반적인 고아원이 아니라, 소련의 지원 및 지령으로 활동하는 각국의 공산주의자들의 자녀를 위한 시설이었다. 그런 특수성 때문에, 보통의 보육원은 물론이고 당시 소련의 일반적인 가정보다도 시설이나 대우가 좋았다.
어느 정도 자란 후에야 어머니 주세죽을 만나게 된 비비안나는 어머니를 낯설어 하며 멀리했고, 주세죽은 이 일로 괴로워했다. 주세죽은 보육원 교사에게 이 일을 호소했고, 교사도 비비안나에게 "어머니와 친밀하게 지내라"고 타일렀다. 하지만 비비안나는 자신과 항상 같이 사는 보육원생들과 교사들에게는 가족같은 정을 느꼈지만, 어쩌다 한 번 나타나는 어머니에게는 정을 느끼지 못해서, 그후로도 어머니를 어색하게 대했다. 훗날 어머니가 사망하고 수십 년이 지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 때에야 어머니가 자신을 자주 찾아올 수 없었던 사정[11]을 알게 되어, 어머니에게 친절히 대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성장한 후에는 무용가로 활동하며, 훗날 소련 모이세예프 무용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아들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박 비비안나는 1958년 미국 방문 등 해외 공연을 한 적이 있다.
남편은 러시아인 화가인 빅토르 마르코프로, 2003년에 사망했다.
비비안나 스스로는 소련공산당으로부터 특혜를 받고 자랐음에도 부모의 숙청과 처형, 이복동생들[12]의 실종 등을 이유로 공산주의에 반감을 느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다고 한다. #
1949년 8월 박 비비안나가 평양을 방문하여 찍은 사진. 남자는 50세의 박헌영, 왼쪽 여자가 21세의 박 비비안나, 오른쪽 흰옷을 입은 여자가 25세의 윤 레나.
비비안나는 4살 밖에 차이 안 나는 계모 윤 레나[13]와 의외로 사이가 좋았고, 윤 레나가 낳은 두 이복동생을[14] 귀여워했다. 그래서 윤 레나가 아이들을 데리고 마지막으로 소련을 방문했을 때 " 북한 정치상황이 심상치 않게 변하고 있다"며 불안해하자, "북한으로 돌아가지 말고 같이 소련에서 살자"고 권했다. 그러나 윤 레나는 "남편에게 돌아가야 한다"며 귀국했고, 얼마 후 박헌영은 체포되어 몇 년간의 재판 및 수감생활을 거친 후에 처형되었다. 그 뒤로 윤 레나와 아이들은 행방불명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15] 훗날 비비안나는 "내가 좀 더 강하게 말해서 새어머니를 귀국하지 못하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비비안나에게는 윤 레나가 낳은 이복동생들 말고도 다른 이복동생이 있다. 박헌영의 혼외자이며 박헌영의 자녀 중 유일하게 남한에서 태어난 원경스님(본명 박병삼)이다.[16] 그는 아버지 관련 기록을 모으던 중 1991년에 러시아에 있는 비비안나를 찾아가 만났고, 60대(비비안나는 1928년생)와 50대의 나이(원경은 1941년생)가 되어서야 처음 만난 이복남매는 서로의 기구한 인생을 안타까워하며 상당히 우호적인 관계를 쌓았다고 한다. 같은 해에 한소수교가 되자 비비안나가 방한하여 박헌영의 고향인 충청남도 예산군의 흙을 갖고 러시아로 돌아가 어머니의 묘비에 뿌렸는데, 이 방한 때 이복동생 원경스님이 직접 꽃다발을 들고 김포공항으로 마중나가 막 도착한 비비안나와 포옹하기도 했다.
박 비비안나는 2013년에 사망했는데, 남편 마르코프와 사이에 자녀를 두었기에 주세죽의 후손은 이어지고 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보도 또한 박헌영 입장에서 보자면 위에 쓴대로 2남 2녀를 두었지만, 장녀 박 비비안나 쪽으로만 후손이 이어지고 있다. 재혼한 윤 레나와의 사이에 낳은 1남 1녀는 박헌영 처형 후 어린 나이에 생사불명이 되었고, 월북 전 혼외자로 낳아 남한에 남겨진 아들 원경스님은 80세였던 2021년에 입적했지만 평생 승려로 살아 후손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1]
용의조선인명부와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참조. 영해박씨대동보 권3 358쪽에는 1898년 6월 2일생,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1901년생으로 각각 등재되어 있다.
[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1950년, 영해박씨대동보 권3 358쪽에는 1932년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3]
현
함경남도
함흥시 성천동
[4]
현 함흥시 삼일동
[5]
개신교 계통의 사립학교로, 1903년에 창학하였다. 자매품(?)으로 남학교인 영생중학교도 있었다. 1947년
소련군정에 의해 폐교되었다가 월남한 동문들의 지원으로 한신학원이 1990년
수원시에
영생고등학교란 이름으로 재개교했다.
[6]
김단야도 아내 고명자와 연락이 끊긴 상태였다. 다만 1929년부터 이미 김단야와 불륜 상태였다거나 김단야가 박헌영이 살아있는 걸 알면서도 숨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7]
더 골때리는 건 박헌영은 일본 경찰의 모진 심문에도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면서까지 두 사람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는데 정작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인다.
[8]
다만 박헌영 본인도 뒤끝이 남아서 이후 딸 비비안나와는 만나도 주세죽은 평생 보지 않았다.
[9]
2005년
여운형에 대한 건국훈장 수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운형은 1947년 암살당한 뒤 정적이었던
이승만에 의해 오랫동안 그 업적이 폄하당하고 사실상 역사에서 지워진 존재로 살았지만, 민주화가 된 뒤 여러 재평가 작업을 통해 그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10]
실제로
참여정부에서도 북한 정권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독립운동가들은 서훈 자격에서 제외했다. 이 때문에 주세죽의 남편인 박헌영은 부인과 달리 훈장을 받지 못했다.
[11]
죽는 날까지 복권되지 못한 상태로 당국의 통제하에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딸을 만나러 갈 수 없었음
[12]
아버지 박헌영과 계모 윤 레나 사이에 태어난 1남 1녀.
[13]
박헌영의 비서로 일하다가 결혼하게 됐다.
[14]
첫째는 딸인 박 나타샤. 둘째는 아들인 박 세르게이. 두 아이 모두 비비안나보다 20살 넘게 어려서, 나이로 보면 동생이라기보다는 자식이나 조카뻘이었다.
[15]
김일성은
박헌영에게 "
미국의
간첩이라는 혐의를 인정하면, 윤 레나와 아이들은 외국으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살려주겠다"고 말했고, 박헌영은 처형당하기 직전 "'그 약속을 반드시 지켜달라'는 말을 김일성에게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김일성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16]
주세죽이 낳은 비비안나와 윤 레나가 낳은 1남 1녀는 정식 혼인으로 태어났고, 원경스님만 혼외자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