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오늘 거행하는 이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한 것을 겸하여 경축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어서 40여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희생적으로 투쟁하여온 결실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은 내 평생에 제일 긴중한 시기입니다.
내가 다시 고국에 돌아와서 내 동포의 자치 자주하는 정부 밑에서 자유 공기를 호흡하며 이 자리에 서서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격으로 이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는
대통령의 존귀한 지위보다 대한민국의 한 공복인 직책을 다하기에 두려운 생각이 앞서는 터입니다.
우리가 목적지에 도달하기에는 앞길이 아직도 험하고 어려웁니다. 4천여년을 자치 자주해온 역사는 막론하고 세인들이 남의 선전만 믿어 우리의 독립 자치할 능력에 대하여 의심하던 것을 금년 5월 10일, 전 민족의 민주적
자결주의에 의한
전국 총선거로써 우리가 다 청소시켰으며 모든 방해와 지장에 대하여 일시의 악감이나 낙심 애걸하는 상태를 보이지않고 오직 인내와 정당한 행동으로 극복하여 온 것이니 우리는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연속 진행함으로 앞에 많은 지장을 또 일일이 이겨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우려하거나 퇴축할 것도 없고 어제를 통분히 여기거나 오늘을 기뻐만 하지말고 내일을 위해서 노력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할 일은 우리의 애국심과 노력으로 우리 민국을 반석같은 기초 위에 둘 것이니 이에 대하여 공헌과 희생을 아니한 남녀는 더 큰 희생과 굳은 결심을 가저야 될 것이요 더욱 굳센 마음과 힘을 다하여 다만 우리의 평화와 안전 뿐 아니라 온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힘써야 될 것입니다.
이 건국 기초에 요소가 될 만한 몇 조건을 간략히 말하면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 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 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다른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해로 인해서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대정 방침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 제도가 어렵기도하고 또한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2.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 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어서 다만 말과 행동 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이 절대로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 활동과 자유 판단권을 위해서 쉬지않고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유래로 저의 나라의 전제 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져서 속으로 민주 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 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수난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30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중하며 한도 내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던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 계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계단을 밟어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해서 위험 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쉬웁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 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 권리를 행사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칙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어야 될 것입니다.
4. 서로 이해하며 협의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관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으로 공고하며 밖으로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해서 자기를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 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 국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분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히 받들어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를 불복한다든지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으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또 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 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 분자들이 민권 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어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5. 정부에서 가장 전력하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 정도를 개량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에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 통상과
공업 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에 따라 발전을 실시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 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敗)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를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요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계급과 계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계급 전쟁을 피하고 전 민족의 활동을 도모함이니 우리의 활동과 단합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고 시대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에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에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6.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경제적 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든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세계 대세가 변해서 각 나라 사이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에 화복안위를 같이 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되므로 어떤 적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에 동일하게 관심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기왕에 밝히 표명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이요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준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요망이 없고 오직 세계 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의심이 조금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미군정은 끝나고 대한 정부가 시작되는 이날에 모든
미국인과 모든
한인 사이에 한층 더 친선을 새롭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우리 자유를 회복하는 것은 첫째로
미국이
일본의 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있던 적군을 밀어내었고 지금은 자발적으로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기에 돕는 것이니 우리 토지의 일척일촌(一尺一寸)이나 우리 재정의 일푼전이라도 원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미국은 과연 정의와 인도의 주의로 그 나라의 토대를 삼고 이것을 세계에 실천하는 증거가 이에 또다시 표명되는 것입니다. 겸하여 과도기에 미국 장교들을 도와서 계속 노력한 모든 동포들의 업적은 우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첫째로
미국 군인이 점령한 동안에 군정이나 민정에 사역한 미국 친우들이 우리에게 동정하며 인내하여 많은 양해로 노력해준 것은 우리가 또 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또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 바는
미 점령군 사령관이요 지도자인
하지 중장의 모든 성공을 치하하는 동시에 우리는 그분을 용감한 군인일 뿐 아니라 우리 한인들의 참된 친우임을 다시금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 새로 건설되는 대한 민주국이 세계 모든 나라 중에 우리의 좋은 친구되는 나라들이 많은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의 주의하는 바는 기왕에 친근히 지내던 나라와는 더욱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요 기왕에 교제 없는 나라들과도 친밀한 교제를 열기로 힘쓸 것입니다.
둘재로
국제연합의 회원된 나라들을 일일이 다 지명하여 말할 수는 없으나 이 모든 나라들이 우리에게 많은 동정을 표하였으며 작년 11월 14일에 한국을 위하여 통과한 결의로 우리의
독립 문제를 해결되게 한 것을 감사히 여기는 중 더욱이
유엔 임시위원단에 대표를 파견한 그 나라들이 민주적 총선거를 자유로 거행하는데 도와주어서 이 정부가 생기게 한 것을 특별히 고마워하는 바입니다. 이 앞으로 유엔총회가
파리에서 열릴 때에 우리나라 승인 문제에 다 동심 협조하여 이만치 성공된 대사업을 완수하게 하기를 바라며 믿는 바입니다.
우리 전 국민이 기뻐하는 이날에 우리가
북편을 돌아보고 비감한 생각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거의 1천만 우리 동포가 민국 건설을 우리와 같이 진행하기를 남북이 다 원하였으나 유엔 대표단을 소련군이 막기 때문에 못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장차 소련 사람들에게 정당한 조처를 요구할 것이요 다음에는 세계 대중의 양심에 호소하리니 아무리 강한 나라이라도 약한 이웃의 강토를 무단히 점령케 하기를 허락한다면 종차로는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는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그 나라가 자유로 사는 것을 우리가 원하느니만치 우리가 자유로 사는 것을 그 나라도 또한 원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우리의 이 원하는 바를 그 나라도 원한다면 우리 민국은 세계 모든 자유국과 친선을 지키며 지내는 것과 같이 소련과도 친선한 우의를 다시 교환하기에 노력할 것입니다.
결론으로 오늘 지나간 역사는 마치고 새 역사가 시작되어 세계 모든 정부 중에 우리 새 정부가 다시 나서게 되므로 우리는 남에게 배울 것도 많고 도움을 받을 것도 많습니다. 모든 자유 우방들의 후의와 도움이 아니면 우리의 문제는 해결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 우방들이 이미 표시한 바와 같이 금후로도 계속할 것을 우리는 깊이 믿는 바이며 동시에 가장 중대한 것은 일반 국민의 충성과 책임감과 굳센 결심입니다. 이것을 신뢰하는 우리로서는 모든 어려운 일에 주저하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하며 장해를 극복하여 이 정부가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이 없이 민주주의에 모범적 정부임을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우리는 이에 선언합니다.
애당초
중국 방면으로의 대륙 진출을 염두에 두고 가장 먼저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1931년
9월 18일을 기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완전히 석권하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과 협력하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들은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에 경제제재를 경고하며 만주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였지만 일본은
제1차 상하이 사변,
열하사변 등을 일으키며 계속해서 국제사회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결국 미·영·프와는 어긋나게 된다. 일본은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미·영·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독일과 가까워지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추축국을 결성하였다.
일본은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공하기 시작하였다. 만주와 마찬가지로 금방 점령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던 일본은 생각보다 거센 중국의 항전으로 인한 전쟁의 장기화로 물자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어서
동남아시아 방면으로의 진출을 획책하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으키는 바람에 같은 추축국인 일본은 미·영·프로부터 사실상의 적국 취급을 받았고 경제제재와 전략자원의 수출을 금하는 등의 압력을 받게 되었으며
1941년에는 미·영·프·중의 4개국이 일본에
석유를 포함하여 전략물자의 수출을 봉쇄하면서 전쟁 물자 보급에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일본은 지속적으로 미국과의 협상을 벌였지만 미국은 중국에서의 철수를 요구하였는데 중국 점령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일본은 결국 협상을 포기하고
1941년
12월 7일을 기하여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에 공습을 감행하며
태평양 전쟁을 개시했다. 당시 일본은 빠른 속도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석권하여 국제사회의 항복을 받아내고 일본에 부여된 제재들을 해제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실제로 전쟁 초반부에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을 거의 석권하였으나 만성적인 물자 보급난과 길어진 전선 등의 악재가 겹치기 시작하였다.
미국·영국·중국·
소련은
1942년
1월 1일에 연합국 공동 선언을 발표하며
추축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결성하였다.
1942년
6월 7일에는 미국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하며 태평양에서의 판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일본이 점령한 지역들을 탈환하기 시작하였고
1943년에 이르면 이미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연합국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되었다. 이에 루스벨트는 1943년 6월에 미·영·중·소 4개국 정상이 만나 전후 처리를 놓고 회담을 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계자들은 7월 즈음이 되어서 장제스가 전후 처리 문제로 회담에 참석할 거라는 걸 알게 되었고, 7월 26일에 김구가 장제스를 찾아가서 한국 독립 의제를 거론해 주기를 부탁하였다. 이전까지는 한국의 처리를 놓고 미국과 영국 사이에 미·영·중·소 4강의 공동 관리 정도로 이야기가 오갔고 장제스도 김구와 만나기 전까지는 한국 독립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제스는 김구와의 만남 이후에 한국의 완전 독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에 영국과 소련은 중국이 4강에 끼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고 급기야 소련은 중국이 회담에 나오면 자신들은 나가지 않겠다며 빠지기까지 했는데 장제스는 영국과 소련이 중국을 배제하려고 하자 한국 독립을 강하게 밀어붙여 영국의 기를 꺾고 싶어 했다.
마침내
1943년
11월 22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소련을 제외한
미·영·중 3국 정상이 만나게 되었다. 다음 날인
11월 23일 저녁, 미중 정상 간의 만찬이 있을 때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을 언급하였다. 루스벨트는 이를 즉각 동의하며 만찬에 동석했던 해리 홉킨스 특별보좌관에게 즉시 선언문의 초안을 작성할 것을 지시하였는데 그 초안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내용인즉, "우리는 일본에 의한 한국인들의 비참한 노예상태를 기억하고 일본 패망 후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 이 나라가 자유 독립국이 되도록 결의하였다."였다. 그러나 당시
영국 총리였던
처칠은 그 초안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며 장제스와 대립하였다. 사실 영국 입장에서 한국의 독립은 무척이나 껄끄러운 문제였던 것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 주게 되면 영국 치하의 식민지들도 전부 독립 움직임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므로 당시 영국 정부의 입장은 한국 독립에 대해 최대한 언급을 안 하는 것이었다.
루스벨트 역시 장제스의 말에 일단 동의는 하였으나 뒤로는 중국의 의도를 상당히 의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제스가 한국 독립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두고 루스벨트는 다음 날 열린 영국과의 합동 참모회의에서 "아무래도 쟤네가 일본 대신에 한국을 꿀꺽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아무튼 중국과 영국은 한국의 독립 문제에 있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결국 미국의 중재 하에 "가능한 가장 이른 시기에"라는 구절이 "적절한 시기에"라는 문구로 수정되었으며 영국 측 주장으로 "적절한 절차를 거쳐"라는 문구도 추가되었다. 최종적으로 발표된
카이로 선언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로 되어 있었는데 이는 '즉각 독립'에서 '
신탁통치'를 내포하는 뜻으로 바뀐 것이다.
그렇긴 해도 이 선언을 통해서 처음으로 한국의 독립이 논의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된 후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즉각 승인을 요구하였고 임시정부는 "사의(謝意)를 표한다."는 말을 보냈다.
[1]
00:20 각계 인사들
중앙청으로 02:15 개회 03:01 이승만 대통령 연설 09:48
맥아더 장군 연설 16:28
하지 장군 연설 20:56
유엔 한국위원단 의장 연설 23:52
주한 미 대사 연설 24:33 폐회 24:45 참석한 내외 귀빈들 퇴장
[2]
정부 수립 후
9월 25일
단군기원 연호가 법제화되기 전까지 이승만 행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사용한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한민국 연호 사용 경위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