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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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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성) 한국군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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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민국 국군이 자행한 학살
2.1. 국가의 조사2.2. 민간의 조사
3. 조선인민군이 자행한 학살
3.1. 국가의 조사3.2. 기타 관련 학술 기록
4. 이후
4.1. 유해 발굴 및 평화공원 조성4.2. 유전자 감식
5. 대중매체6. 관련 자료7. 같이 보기

1. 개요

6.25 전쟁 대전형무소(현재 대전광역시 중구 목중로 34, 출입국 관리사무소 위치)의 수감자들을 상대로 일어난 학살. 첫 번째 학살은 1950년 6월에서 7월 사이에 대한민국 국군에 의해 발생했고, 두 번째 학살은 1950년 9월에 조선인민군에 의해 발생하였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부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가 시작되었으며 북한군에 의한 학살 사건은 2008년, 한국군에 의한 학살은 2010년에 진실규명이 되었다.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 사건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대전 산내 골령골은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최소 4천여 명에서 많게는 7천여 명까지 학살돼 묻힌 곳으로 6.25 전쟁 시기 대한민국 내 단일지역 최대 규모 희생지다.[1]

2. 대한민국 국군이 자행한 학살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6일까지 대한민국 군경[2]이 대전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좌익사범, 재소자, 미결수, 보도연맹원들 등을 인근 산내면 야산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 제주 4.3 사건, 여순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충청도 지역의 일부 보도연맹원과 4.3 사건, 여순 사건 당시 일부 수감자들이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4.3 사건 관련자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다고 한다.

희생 규모는 첫 번째 시기인 7월 1일까지 1,400명, 두 번째 시기에 1,800명, 그리고 마지막 시기에 1,700명이 희생되어서 4,900여명이 희생되었다는 주장이 많지만 이외에도 여러 주장이 있어서 정확한 규모를 추정하기는 어렵다.[3]

2.1. 국가의 조사

1949년부터 대전형무소에 좌익사범들이 상당히 수감되기 시작했는데 북한의 남침 이후 보도연맹원이 잡혀 들어와서 수감자가 너무 많아졌다. 6.25 전쟁의 전개로 인해 대전이 함락될 위기에 빠지자 정부에서는 재소자를 처단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4쪽)

당시 대전형무소에 있었던 교도관의 증언에 따르면 윗선의 지시에 따라 사형수, 무기징역수부터 대한민국 육군 헌병대나 경찰에 이첩하여 육군 헌병, 경찰들이 트럭에 사람을 싣고 인근 야산에 데리고 가서 무더기로 사람을 처형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7쪽)

1950년 7월 1일 교도소 수용 능력의 한계로 일반 단기사범들을 석방한 후(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5쪽) CIC 헌병들이 재소자 인도 요구를 하였다. 7월 2일부터 재소자를 주먹구구식으로 분류하여 헌병은 보도연맹원, 좌익사범, 장기형 기결수, 미결수, 심지어 형기가 얼마 남지 않은 사람까지 모조리 낭월동 골령골로 끌고 가서 처형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16쪽)

파일:보도연맹학살사건.png

당시 집행 참관인이었던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처음에는 사람을 막대기나 나무에 매달거나 묶어 총살했지만 나중에는 청년방위대가 판 50m 길이 구덩이 앞에 끌려온 사람들을 일렬로 구덩이 쪽으로 눕게 한 뒤에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2쪽) 이런 짓을 국군이 대전에서 후퇴하기 전인 7월 16일까지 지속하였다. 증언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대한민국 정부 및 군경 당국의 형무소 재소자, 기결수와 미결수 살해는 법적 요건의 측면에서 많은 위법성이 드러난다고 판단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6쪽)

학살의 원인은 전쟁 발발 이후 보도연맹원이 북한군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고 본 이승만과 수뇌부들의 판단이었다. 상부에서는 보도연맹원을 모조리 붙잡아 처단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고 당시 전국에서 군인이나 경찰이 동네에서 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인근 형무소에 집어넣거나 바로 학살했다. 골령골에서 학살 지시를 한 사람은 당시 대전지검장 정재환[4]이었고 직접 시행한 사람은 몇 년 전 제주 4.3 사건에서 학살을 했던 송요찬 대령으로 당시 육군 2사단 헌병사령관이었다.

이후 유족들은 가족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사회에서 빨갱이로 몰리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다.(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317쪽)

1999년 미합중국 법무부에서 미합중국 육군 장교가 남긴 사진을 공개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28쪽, Execution of Political Prisoners in Korea, Report no. R-189-50, Records of the Army Staff G-2 ID File, Box 4622, RG 319, NARA)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해당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2010년에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2.2. 민간의 조사

첫 번째 학살은 독재정권 시기에 은폐되었지만 대한민국의 학살이라 많은 국민을 구덩이 파는 데 동원했다 보니 구덩이 파는 데 동원되었던 사람들과 군인들이 학살 현장을 증언하면서 조사 시작 후 증언이 많이 나왔다.
사격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나지요. … 사수가 물러나면 양쪽에 설치되어 있는 기관단총으로 다시 확인사살을 하고... 죽었는지 안죽었는지 지휘자가 또 다시 확인을 합니다. … 그 다음엔 뒤에 대기하고 있던 소방대원들이 우루루 몰려와 시체의 두 다리를 번쩍 들어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어요. 그 후 기관단총 사수가 다시 두 번을 왔다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2차 확인사살을 합니다.
92년 2월 월간 「말」지 '대전형무소 학살사건' 기사 #

구덩이를 파는 데 동원되었던 사람(익명)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
"말도 마. 파낸 흙을 구덩이 앞에 쌓아 놨었는데 가서 보니 흙이 전부 질컥질컥해. 장마철에 진흙길 걷는 것 마냥.. 비도 안 왔는데 왜 그런 줄 알아? 마른 흙이 피로 반죽이 돼서 그런 겨. 피 곤죽이 된 흙이 여기 무릎 아래까지 빠지더라고..아이구…."

"가죽 장화를 신은 경찰(또는 군인)로 보이는 높은 놈이 구덩이에 들어가 시체더미를 발로 힘을 줘 꽉꽉 누르더라고. 그 때까지 살아 있던 사람이 소리를 내거나 꿈틀거리면 다시 시체 더미를 헤집고 권총을 빵빵빵 쐈어. 말도 마. 새우젓 담가 놓은 것하고 똑같았어."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는데 구덩이를 파는 데 동원되었던 이규희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나중에 확인 결과, 학살현장은 폭이 1.8m, 깊이가 2m, 전체 길이가 200∼250m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 당시 학살현장에는 독경하는 스님과 미군도 있었다. 열흘쯤 재소자들을 옮기는 트럭을 목격했다. 지금도 이 밭을 조금만 파면 이런 인골이 무더기로 나올 것이다. 한때는 사람뼈가 밭 주변에 널려 있었다.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이자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주요 증언은 다음과 같다.
(골령골) 능선에는 경비헌병이 지키고 있었고 미군하고 사회 유지들도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이 미리 구덩이를 파놓고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트럭이 그 앞에 와서 죄수들을 쏟아부었지요. (트럭에 실린) 죄수들이 도착하면 억지로 돼지 새끼 끌어내리듯 끌어내린 겁니다. 소방수들이 죄수들을 구덩이 앞에 엎어서 눕혀 놓고 물러나면 사수는 왼발로 (죄수) 발을 밟고 총구를 대각선으로 겨냥합니다. '사격 개시!; 그러면 사수들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참, 사람이 못할 일이었습니다.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골이 튀어나와 온몸에 튀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이 나지요. 사수가 물러나면 기관단총으로 다시 두 번을 왔다 갔다하며 구덩이 속을 향해 확인사살을 합니다. 구덩이가 차면 소방대원들이 매장하게 되는데 주위는 온통 피 반 흙 반이에요. 아무리 흙을 덮어도 발이 툭툭 불거져 나와요. 밤 9시가 넘었는데 그래도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이 있어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더라고요. 다시 흙을 제치고 사수들이 소리가 안 날 때까지 M1 소총으로 마구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정말로 산내면에서는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현장 근처가 온통 피바다였습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대상자들 중엔 20세 미만의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1992년 <월간 말>(2월 호)가 인터뷰(글쓴이 소설가 노가원)한 당시 충남도경찰청 소속 사찰 주임이자 총살집행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변홍명(가명)의 증언 #

학살 현장을 목격한 또 다른 주민은 “당시 의용소방대 소속 젊은이들이 ‘악질분자들을 묻을 구덩이를 파야한다’고 해서 강제적으로 끌려가 부역을 했다”며 “그토록 끔찍한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학살로 인해 한동안 골령골에는 땅에서 핏물이 배어나오고 근처 냇물은 붉게 변했으며 물에서는 피냄새가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 2차선 도로를 만들 때 포크레인 기사가 무수히 바뀌었다고 하는데 하도 유골이 나와서 계속해서 작업을 하지 못한다. 전쟁 직후 보따리 장사라도 하기 위해 이 길을 다녀야 했던 주민들은 흙 밖으로 삐져나온 손과 발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한편 위닝턴 기자는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좌익 정치범 및 보도연맹원 등 7000여 명이 대전 골령골에서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된 후 암매장됐다고 보도했다. 특히 기사는 "학살은 미국 고문관의 감시 하에 진행됐다"고 썼다. 민간에서 진행된 조사를 통해 미국이 학살에 생각보다 더 깊이 개입했음이 밝혀졌다. 심규상, 미국이 '흉악한 조작'이라던 대전 골령골에서 쏟아져 나온 유해

위 기사를 쓴 심규상 기자는 90년대부터 학살을 조사한 유명한 활동가다. 다음은 진실위 조사관들이 직접 한 말이다.
진실위는 왜 미국 희생사건에 인색했나. '대한민국'이 완전히 '빨갱이 나라'가 되는 걸 목숨 걸고 막아준 그 고마운 미군에 대해, 절대로 고의로거나 실수로라도 민간인에게 총구를 겨눴을 리 없는 그 미군에 대해 당신들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죽거나 다쳤다고, 여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우리 조사관들이 진실화해위원회(진실위) 내외에서 '좌익 반미주의자들'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진실위 조사관 백서 준비모임 #
정근식 진실화해위 위원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사기간이 만료돼도 40~50%밖에 해결 못한다, 자신도 9명의 상임위원 중에 한 명에 불과해 어떤 일을 하겠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고 발언했다. 이에 대해 유족회는 “보수정권으로 바뀌니 변명으로 일관하고 기구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려 진실규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략) 부산·대구·대전 형무소 재소자 학살에 미군이 직접 개입했음을 입증하는 문서들도 확인됐다고 유족회는 덧붙였다.
민간인피학살자전국유족회,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전원 사퇴하라" #

3. 조선인민군이 자행한 학살

3.1. 국가의 조사

1950년 7월 21일에 북한군은 대전을 점령하였고 일부 인민군은 곧장 산내 골령골의 집단 희생을 인지하였다. 이후 북한군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했다는 범죄혐의로 한국군 포로, 우익 인사, 군인, 경찰, 공무원, 서북청년단을 모조리 찾아 프란치스코회 수도원, 대전 경찰서, 대전형무소에 분산 수감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3쪽)

수감 과정에서 북한 정치보위부는 수감자에게 '양민을 투옥하고 학살했다'는 내용을 쓰도록 강요했으며 자술서를 쓰지 않는 사람은 구타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98쪽) 끝까지 자술서를 쓰지 않았던 사람은 사건 발발 며칠 전 석방됐다고 한다. 북한군은 국군 장교와 판사, 검사는 모조리 사형시키고 경찰, 군인, 면장, 동장, 반장 등은 면밀히 조사하여 사상검증을 하였다. 이후 수감자 인민재판에서 무죄를 주장하려고 했으나 UN군과 한국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상황이 급변했다.

1950년 9월 25일 인천상륙작전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급히 후퇴하게 된 북한군이 UN군 및 한국군에 이로운 행동을 할 우려가 있는 사람을 모조리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이윽고 9월 25일 밤부터 9월 26일까지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사람을 모조리 인근 야산이나 우물에 끌고 가서 학살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3쪽) 총살 이외에도 곡괭이 등으로 찍어 죽이거나 산 채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에서는 아일랜드인 수도자, 우익 인사들이 학살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7쪽) 대전 경찰서에는 포로, 부상자들이 주로 수감되었고 9월 27일에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에는 시간이 급박한 관계로 경찰서 앞마당으로 모조리 끌고 와서 남아 있던 국군 포로들을 벽에 묶어놓고 모조리 총을 쏘아 학살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20쪽)

조사 결과 학살된 인원은 총 1,557명이었다. 두 번째 학살은 1960년대에 진상 규명을 많이 한 편이라 비교적 조사 자료가 많이 남아 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23쪽)

3.2. 기타 관련 학술 기록

로이 애플먼과 맥스 헤이스팅스가 쓴 6.25 전쟁 관련 서적들에 따르면 북한군이 대전에서 5,000~7,000명의 주민을 살해하고 집단 매장지에 묻었다고 한다. 이에 브루스 커밍스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된 영국 사절 앨버리 개스코인은 믿을 만한 기자들이 남한 군대의 수감자 학살을 거듭 이야기했다고 말했지만 미군 전쟁포로사절단의 J. 언더우드라는 사람은 "영국의 관계 당국에게 대전 감옥에 채 2,000명도 갇혀 있지 않았는데 과연 7,000명의 수감자를 대전에 끌어 모을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고 반박했다.[5]

4. 이후

4.1. 유해 발굴 및 평화공원 조성


유해발굴은 2015년에 시작됐고, 평화공원 조성 사업은 사업비 부족 등으로 지지부진하기만 했다.

하지만 황인호 대전 동구청장 부임 이후 황 청장이 적극적으로 나서 기존 예산 295억 원에서 402억 원으로 국비를 증액하며 사업에 탄력을 받았다.

2021년 9월 동구 낭월동 골령골에 집단 매장된 유해 천여 구가 발굴되었다.

희생자들의 유해 1천 441구가 발굴된 것으로 집계됐다. #

이러한 황 청장의 노력에 힘입어 유해발굴사업은 2월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평화공원 사업은 토지 매입은 80% 이상 됐지만 물가 상승으로 총 사업비가 591억 원으로 늘어나면서 타당성 재조사 등 행정절차가 발목을 잡혔고, 이후 정권이 교체되고 황인호 청장 본인 역시 재선에 실패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2023년 열린 황 청장의 자서전 출판기념회에서 사건희생자 유족회장이 참석하고 해당 내용이 다시 한 번 언급되며 재조명되었다. #

4.2. 유전자 감식

유전자 감식 예산이 2022년 1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됐다. 2023년부터 그동안 발굴된 1,361명의 희생자 유해에 대한 검체 수집과 유가족의 유전자 신원확인정보자료 구축 사업이 본격화될 예정으로 전해졌다. 유족들은 “내 평생, 최고로 기쁜 소식입니다. 이토록 반가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라며 기뻐했다. #

5. 대중매체

6. 관련 자료

7. 같이 보기

대한민국의 국가폭력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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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시대에 걸친 경우 시작 시점이 기준.
※ 3공화국기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를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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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대전산내사건희생자유족회, 《대전 골령골 73년간의 진실, 골령골》 [2] 진실화해위원회 2010년 상반기 보고서 5권 제2부 링크에 의하면 관여병력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다. [3] 출처:임영태의 ‘한국 현대사, 망각과의 투쟁 [4] 리츠메이칸대학 졸업 후 일제 치하에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고 검사를 지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해방 후에는 동아대학교를 설립해 초대 총장이 되었으며 훗날 제6대 법무부차관이 되었다.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석당인재학부 등이 그의 호인 석당을 따서 이름 지어져 그는 지금도 여전히 설립자 겸 초대 총장으로서 기념받고 있다. [5]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