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서양청어 大西洋靑魚 | Atlantic herring |
|
|
|
학명 |
Clupea harengus Linnaeus, 1758 |
<colbgcolor=#fc6> 분류 | |
계 | 동물계 Animalia |
문 | 척삭동물문 Chordata |
강 | 조기어강 Actinopterygii |
목 | 청어목 Clupeiformes |
과 | 청어과 Clupeidae |
속 | 청어속 Clupea |
종 | 대서양청어 C. harengus |
멸종위기등급 | |
[clearfix]
1. 개요
청어과 청어속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북대서양에 분포하며, 최대길이와 몸무게는 각각 43cm, 680g이다.2. 특징
난생이다. 보통 거대한 무리로 다니는데, 약 100만 마리 이상 모이면 무리 전체 길이가 27km가 된다.매년 초 노르웨이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간단히 알아볼까요? 먼저, 플랑크톤 대증식이 발생하여 영양이 풍부한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엄청난 수의 청어 떼가 몰려든 후 노르웨이 피오르드 깊숙이 내려가 산란장소를 물색합니다. 이어서 대구, 대서양 대구, 참치, 광어, 고래와 같은 큰 물고기들이 청어사냥에 나섭니다. 심지어 바닷새와 곰들마저 청어와 청어알을 만찬으로 즐기러 모여듭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서 청어는 대서양 생태계에서 대체 불가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 노르웨이 수산조합의 대서양 청어 생태에 대한 설명. #
태평양청어처럼 이쪽도 해양 생태계의 중요한 어류다.- 노르웨이 수산조합의 대서양 청어 생태에 대한 설명. #
매일 상하 수직으로 이동하는데, 낮에는 바닷속 바닥에 있고 밤에는 표층으로 올라와서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는다.
원린이 계속 새 것으로 바뀌는 게 특징이다.
3. 대서양청어와 인간
물 반 청어 반이다 싶은 어마어마한 개체 수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서양의 바닷가에서는 중요한 먹거리였다.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유럽의 훈제 청어와 청어 초절임 등이 대서양청어를 이용한 대표적인 보존 식품이다. 또한 청어 어업이 창출한 거대한 규모의 경제는 한 지역과 국가의 흥망이 청어의 어획량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대서양대구와 함께 대서양청어를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라고 부르기도 했다.▲ 영국의 염장 훈제 청어인 블로터(Bloater).
▲ 바이킹들의 식사를 소개하는 영상. 청어포가 나온다.
청어를 잡는 기술, 청어를 연기에 그을려(청어를 팔기 위해서는 훈증을 했다) 제대로 처리한 뒤 상인들과 행상인들에게 넘기기까지 수많은 손길이 필요했다. (중략) 청어는 목수, 배 대목, 낚싯줄, 밧줄, 케이블 제조인, 대마 일꾼, 방적공과 그물-직조공 등에게 일거리를 제공했다. 소금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소금집이 세워지고, 소금 위에 소금을 쌓고 (중략) 통 제조업자, 맥주 제조업자, 제빵사들도 청어 때문에 소득을 올렸던 사람들이며, 그 외에도 청어 아가미를 제거하고 난 뒤 씻어 포장하여, 옮기고, 옮긴 것을 다시 옮기는 작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 토머스 내쉬의 기록. 데이비드 커비 및 멜루자-리자 힌카넨의 저서 <발트해와 북해> 제8장 '어업'에서 발췌함.
- 영국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 토머스 내쉬의 기록. 데이비드 커비 및 멜루자-리자 힌카넨의 저서 <발트해와 북해> 제8장 '어업'에서 발췌함.
유럽에서도 흔하고 친숙한 식재료였다. 일명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 중세 유럽에서는 금육일에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로 소비되던 것이 훈제 청어일 정도였다. 게다가 비타민 D 함량이 많은 음식 중 하나라서 우중충한 날씨가 일상적인 북유럽에서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수산조합은 청어가 유럽 식문화에서 밀과 감자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고까지 설명한다. #
유럽에서도, 청어 어획량은 늘 들쑥날쑥해서 청어가 잡히는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한자동맹의 성장과 몰락에 청어 서식지의 변경이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으며,[1] 대항해시대 시절 네덜란드도 청어 어획고가 감소하자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줬을 때 그 밑바탕이 된 것이 엄청난 청어 어획고로 벌어들인 돈이었다고. 대구와 함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청어는 매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유럽에서도 청어를 지칭하는 표현은 다양하다. 목록은 아래와 같다.
-
헤링(Herring)
일반적인 청어를 지칭한다. -
브리슬링(brisling)
작은 청어를 지칭한다. -
스트뢰밍(strömming)
발트 지역 북쪽의 유난히 작은 청어를 지칭한다. -
마트예스(maatje)
산란을 마쳐 체내에 알도 정자도 없는 성체 청어를 지칭한다.
3.1. 북유럽과 한자동맹
유럽에서 청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9세기경이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리로 인해 사순절과 같은 시기에는 육류의 취식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동물성 단백질은 반드시 보충해야 했으므로 이는 곧 종교적 제한에 걸리지 않는 청어와 대구 가공품의 급격한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2]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되었던 곳은 발트 해 연안, 그 중에서도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방이었다. 스코네 어시장(덴: Skånemarkedet/스: Skånemarknaden)은 청어 어업의 핵심적인 장소로, 덴마크 정부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다.[3]초기에는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가 주도하였으나 곧 북해와 발트해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도시 공동체인 한자동맹이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청어 가공의 중심지는 독일 북부의 뤼겐 섬. 이 지역은 독일 동부와 폴란드 일대에서 캐낸 암염을 조달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덴마크령 스코네와 보른홀름, 에스토니아 등에서 잡힌 청어는 뤼겐 섬으로 모여 뤼네부르크산 암염으로 염장된 후 한자동맹 상인들을 거쳐 독일 서부의 베스트팔렌 지역의 상회들로 이동했고, 여기서 다시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이는 물론 덴마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발트 해의 도서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패권국이었던 덴마크는 한자동맹이 자신들의 영해에서 이득을 보는 꼴을 좌시하지 않았고, 한자로부터 청어 산업의 주도권을 방어하고자 계속 시도했다. 온갖 규제와 통제가 도입되었고, 한자 상인들은 스코네 어시장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그리고 덴마크는 1109년에 아예 뤼겐 섬을 공격해 점령하여 지역의 청어 거래 시스템을 아예 붕괴시키기에 이른다. 이 결과로 덴마크는 스코네 어시장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 주요 자금줄 하나를 지켜냈다. 전 북유럽에서 상인들과 어부들이 스코네로 몰려들어 청어를 거래했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약 3500명에서 5000명에 달하는 이들이 청어 어업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일했다. 외레순 해협 일대에서 조업하는 선원들은 2만 5천 가량이었다.
하지만 스코네 외에도 발트해 남부의 여타 지역들 역시 청어 거래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지분을 차지했다. 독일 북부의 뤼베크로 중심지가 이동한 후 동유럽 슬라브 계통의 가맹도시 출신 상인들은 꾸준히 청어를 실어 뤼베크로 가져왔고, 이를 가공한 한자동맹의 청어 어업은 계속 번창했다. 1370년 한자동맹은 아예 덴마크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슈트랄준트 조약을 맺어 발트 해 전역에서 독점적인 어업을 할 권한을 덴마크로부터 받아내면서 힘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한자동맹과 발트 해 청어 어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청어의 주 산지인 발트 해에서 한자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해지자 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새로운 무대를 찾아내었고, 이는 곧 청어 어업의 무대가 북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단순히 청어 어업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해 한자동맹이 몰락하는 반면에 이들 국가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며 청어 어업에서 한자의 지분을 잠식해 들어갔다. 때마침 16세기에 청어들이 이동하여 발트 해에서 어획량이 급감하기도 했다.
3.2. 네덜란드의 독점
▲ 자신이 발명한 칼과 청어를 든 빌럼 뵈컬손
▲ 네덜란드 청어 어업의 핵심이던 청어잡이 원양어선 하링부이스(Haringbuis). 오른쪽의 작은 선박은 소형 어선인 도거(Dogger)다. 출처: 대영박물관 #
네덜란드가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던 주된 이유는 혁신적인 어업 지원 시스템 덕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은 청어 통, 어선 규격, 건조 방식 등에 대한 엄격한 품질 관리 조항들을 규정하였다. 정부 요원들, 그리고 '대형어업감독협회'의 직원들이 생산과 유통을 일일히 감시했으며 저질의 상품을 납품하는 이들은 처벌받았다.
동시에 약 9000 길더의 가격으로 건조할 수 있던 네덜란드 청어 어선인 '하링부이스'는 유망을[4] 사용하고 선체 중앙부 어창에 활어를 보존하는 혁신적인 방식을 도입했으며 이후 북해 일대 각국의 표준 청어잡이 어선으로 채택된다. 다만 하링부이스는 3번의 조업을 나간 후에는 배 전체를 폐기해야 했다. 1년에 3번 조업을 나갔으니 대략 1년마다 한번씩 배를 갈아타야 했던 셈. 이 때문에 네덜란드 업자들은 여럿이 자금을 모아 배를 구매하곤 했다.
그 외에도 이러한 주도권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빌럼 뵈컬손(Willem Beukelszoon), 영어로는 윌리엄 버클스(William Buckels)라는 네덜란드 어부였다. 그는 1380~1386년 시기에 갓 잡은 청어의 간[5]과 이리[6]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 대신 함수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했다. 옛날부터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중요하고 비싼 필수품이었고, 특히 연중 일조량이 적은 기후 탓에 바다에서 소금을 만들기 어려웠던 북유럽과 서유럽은 더더욱 소금이 귀했다. 이 때문에 기껏 청어를 잡아도 오래 보존하려면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소금이 부족해서 충분한 양을 수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소금 대신 바닷물을 끓여서 수분을 날려 굉장히 짜게 만든 소금물(함수)을 소금 대신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완전히 증발시켜 고체를 만들거나 암염광산에서 캐내어 정제해야 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함수는 그저 바닷물을 끓이기만 하면 얻을 수 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거기다 네덜란드는 발전한 자국의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원양어선 하링부이스 선단을 구성하여 북해의 청어를 쓸어담았고, 강대한 네덜란드 해군 함대는 이들의 안전한 활동을 보장했다. 네덜란드는 이 방법으로 청어를 기존보다 수십 배나 많이 생산했고, 기존의 노르웨이, 스웨덴, 한자동맹 등 경쟁 세력들을 밀어내고 대성공하였다. 당대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했을 정도니 #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청어절임은 지금도 여전히 먹고 있는데 그것이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하링(Haring)이다.
다만 이후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영국인들이 청어의 주 어장인 영국 연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네덜란드 함대를 무너뜨리면서 점차 쇠락했다. 청어 어획고의 감소는 타격을 가속화하였다. 동시에 새로 등장한 유럽의 보호무역 풍조로 인해 잡은 청어의 80%를 수출하던 네덜란드인들은 각국의 높은 관세와 부닥쳐야만 했다. 청어는 유럽 서민들의 주요 식단이었기에 낮은 가격을 유지해야만 했으나 관세가 높아지면서 네덜란드산 청어 수입은 바로 경쟁력을 상실한 것.
설상가상으로 기존의 주도자들이었던 북유럽 국가들과 새 경쟁자인 영국이 네덜란드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왕실이 출자하고 노르웨이인 요훔 룬드가 관리하던 '덴마크 왕실 청어 회사'는 네덜란드의 시스템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을 넘어 기존 발트 해 어장을 벗어나 아이슬란드와 오크니 일대까지 규모를 확장했다.[7] 그물 역시 무거운 대마 그물을 가벼운 면 그물로 대체하였으며 이는 어획량이 높은 후릿그물 사용을 가능케 했다. 아이슬란드 일대 선단 역시 네덜란드식 유망 어업과 같은 신기술을 적극 도입했다.
영국 역시 '영국청어어업협의회'를 설립하여 추격에 나섰다. 이 결과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과거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이후 유럽 청어 어업은 네덜란드인들의 청어 어업 기법을 배우고 강대한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3.3. 영국의 주도권 장악
알프레드 스태너드(Alfred Stannard)의 1841년 작품, <노퍽의 야머스 부두(Yarmouth Jetty, Norfolk)>. 해안에서 출항 준비를 하는 소형 어선의 모습을 담았다. 스태너드는 노퍽 지역의 향토 미술사에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하나로, 주로 어민들과 바다를 그렸다. 본 작품은 오늘날 노퍽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 |
유럽 대서양 청어의 주된 어장은 북해, 그중에서도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연안과 북해 중앙의 거대한 모래톱인 도거 뱅크이다. 이 해역은 수온이 낮고 템스 강 및 라인 강에서 흘러드는 영양 염류가 풍부하며, 수심도 매우 얕아 청어의 중요한 산란지이다. 특히 잉글랜드 동남부 노퍽 주의 그레이트야머스(Great Yarmouth), 일명 야머스 시의 앞바다가 가장 경제성 있는 청어 어장이었다. 야머스 앞바다에는 해저에 헤이즈버러 사주(Haisborough Sands) 등의 길다란 모래톱이 곳곳에 분포하여 여러 해양생물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8]
덕분에 중세 이래로 야머스의 어민들은 백사장에서 보트를 타고 조금만 나가도 청어로 만선을 채울 수 있었다. 이렇게 잡힌 청어들은 썩기 전에 바로 가공된 후, 야머스 시내를 지나는[9] 야레 강(River Yare)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노리치에 도달했다. 노리치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 제2의 도시였고, 그 이후에도 이스트 앵글리아의 중심지였기에 전국의 많은 상인들이 모였다. 야머스산 청어도 여기서 전국 방방곡곡으로 팔려나갔다. 그리고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부터 야머스의 청어 산업은 확장된 철도망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량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세기 이전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가 암스테르담이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는 야머스였다고 할 정도였다.
19세기에는 영국에서 흰살 생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갈수록 뻗어나가는 철도는 내륙으로의 수산물 운송을 용이하게 하면서 어업의 번창에 기여했다. 동시에 동력선과 저인망의[10] 도입은 보다 많은 어획고를 올리는 것을 가능케 해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전통적인 무동력선 위주의 어업을 하던 영세 어부들이 몰락하고 비싼 동력선을 장비할 수 있는 자본을 가진 회사들 위주로 어업 체계가 개편됨을 의미하기도 했다.[11] 또한 유럽 내부에서도 철도가 깔리면서 덴마크와 독일 제국 등지에서 청어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외국 상인들이 영국을 찾기 시작했다.
▲ 당시 야머스 부둣가. 빽빽하게 몰려든 어선들 전부가 청어잡이 어선이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은 스코틀랜드 선단으로, 그들은 상업적 어업 회사 외에도 협동조합과 가족노동이 결합된 형태를 띄기도 했다. 청어잡이 시즌이 되면 어부들은 동업자들 및 가족들과 함께 유망어선을 타고 청어를 쫒아 영국 동부 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건조업자들과 내장제거 업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노포크가 최종 목적지였다.
청어잡이 시즌만 되면 수백 대의 스코틀랜드 어선이 야머스와 남쪽 로웨스토프에 몰려들었고, 유망 또는 저인망을 이용해 날마다 엄청난 양의 청어를 잡아들였다. 육지에서는 청어 가공 공장에서 날마다 청어를 가공,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완제품을 납품했다.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그리고 폴란드에서도 많이 수입해갔지만, 주된 고객은 남유럽 국가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남유럽에서는 아무래도 앤초비 젓갈 등으로 익숙해서 그런지 청어 절임을 많이 수입했다고 한다.[12]
특기할 만한 이들이 있다면 바로 '피셔 걸(Fisher girl)'이라 불린 이들이다. 야머스의 향토사 박물관인 Time and Tide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피셔 걸들은 부둣가에서 어선들이 잡아온 청어의 내장을 손질하던 스코틀랜드인 여성 계절노동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건 간에 걸(girl)로 불렸다. 또는 영상에서처럼 피셔 래시즈(Fisher Lasses)나 스코티시 래시즈(Scottish Lasses), 또는 헤링 래시즈(Herring Lasses)라 불리기도 했다. Lass는 북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방언으로, 젊은 여성을 뜻한다.
이들은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했는데, 두 명이 내장을 제거하면 남은 한 명이 이를 받아 나무 통에 담는 방식이었다. 현지에서는 이를 스카치 큐어(Scotch Cure) 방식이라 하는데, 사실 빌럼 뵈컬손이 개발한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위 영상에서 그들의 작업 방식을 잘 볼 수 있다. 작업 시간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였으며, 주로 노동요를 함께 부르며 고된 작업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거대했던 그레이트야머스의 청어 어업은 1950년대까지 성업하였으나,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의 폭격과[13] 1953년의 대홍수로 시내가 파괴되면서 주춤하기 시작했다.[14][15] 결정타는 바로 청어 어획량의 감소였다. 남획과 청어의 서식지 이동으로 어족자원이 고갈되면서, 1960년의 청어 어획량은 전성기인 1913년의 2~3%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야머스 항의 마지막 유망(Drifter) 어선 역시 1963년에 팔려나갔고, 청어 조업은 1968년 가을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한때 야머스 항구를 가득 채웠던 피셔 걸들 역시 지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동시에 영국 국민들은 흰살생선을 선호하였지 청어는 별로 익숙해 하지 않았으며 이는 국내 판로 개척에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2차 대전 이후 전후복구기에 유럽인들의 생활수준이 증가하고 기존에 청어를 소비하던 각국의 노동자 계층마저도 청어를 외면하면서 영국의 청어 어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발트해와 북해>에 따르면 1950년대부터 청어는 시장에 나오는 대신 동물 사료 공장으로 직행하였으며 이는 남획으로 이어지다 결국 1977년 북해 청어 어업 금지법의 제정으로 이어지고 만다.
이렇게 어업이 쇠퇴한 대신, 석유 시추 산업이 성장했다. 오늘날의 야머스는 소규모 석유 정제 및 물류 기점이자 국내 관광도시로 재개발되었다. 한때 성업했던 청어 어업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은 단 두 곳 뿐이다. 시내 인근에 정박해 있는 야머스의 마지막 유망 어선인 YH 89 리디아 에바(Lydia Eva) 호,[16] 그리고 실제 청어 건조장을[17] 개조한 시간과 조류(Time and Tide) 박물관이 바로 그곳. 리디아 에바 호는 남쪽 로웨스토프의 마지막 트롤어선인 LT 412 민카를로(Mincarlo) 호와 함께 한데 묶여 ' 리디아 에바와 민카를로'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종종 항해도 한다. 한편 Time and Tide 박물관은 야머스의 어업사뿐만 아니라 도시의 지역사까지 총망라하는[18] 향토 박물관으로 유명하다.
3.4. 다시 네덜란드와 북유럽으로
오늘날 청어 어업의 주도권은 다시 네덜란드와 북유럽 국가들에게 돌아왔다. 북유럽은 19세기 인구가 폭증하면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던 스웨덴 서부 해안 지대에까지 마을들이 들어섰다. 새로 개척된 지역들은 농업에는 매우 부적합하였다. 동시에 철도의 발달로 국제적인 어류 수요가 늘어나면서 스칸디나비아의 농민들은 살기 위해 부업으로 어부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반농반어 문화와 이에 수반된 청어 건조 산업 등이 발트 해 연안을 따라 확산되었다. 1870년대에 보후스 지방에 청어들이 되돌아오면서 청어잡이가 활기를 띄기 시작함에 따라 북유럽의 영세 어업도 점차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소형 동력선과 1인 그물이 보급되면서 오늘날과 같이 어업의 개인화가 진전되었다.2020년대 시점에는 네덜란드가 전 세계 청어 어획량의 36% 가량을 공급하여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인 노르웨이가 24% 가량을 공급한다. 두 국가가 쌍벽이며, 3위인 미국은[19] 9%를 차지한다. 그 뒤로 독일, 한국, 아이슬란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가 이어진다. 한때 독보적 1위였던 영국은 고작 1~2%를 생산하여 9위이다.[20]
4. 음식
-
영국
영국에서는 훈제 청어들을 즐겨 먹는다. 특히 내장을 제거하고 반 갈라 훈연한 키퍼(Kipper)는 전통적인 아침식사 메뉴다. 주로 팬에 버터를 두르고 구운 뒤[21], 토스트와 삶은 계란 또는 스크램블 에그와 함께 먹는다. 마트에서 반조리 된 상태로 시판되는 것은 전자레인지로 익히기도 한다. 다만 아무래도 생선구이다보니 신세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구이 요리도 발달했다. 위 영상은 1940년 영국 식품부가 배포한 청어구이 조리 및 취식 방법 교육영상이다. 비늘과 내장을 제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를 발라낸 뒤, 소금과 파슬리, 그리고 후추로 양념하여 오븐에 구워낸다. 진미로 취급받는 알집이나 이리는 따로 잠시 빼 두었다가 양념하기 직전에 청어에 도로 집어넣어 함께 조리한다. 과거에는 블로터(Bloater)도 비슷한 방식으로 먹었으나 현재 블로터는 거의 사라졌다.
영국인들 역시 독일식 청어 피클인 롤몹스(Rollmops)를 즐겨 먹으나, 유럽 대륙 국가들만큼 자주 먹지는 않는다. 보통은 키퍼를 먹거나, 상술한 튀김 또는 구이의 형태로 소비하는 편.
-
네덜란드
네덜란드에서는 하링(Haring)[22]이라고 부르며,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잡히는 청어를 머리와 꼬리를 떼고 내장을 빼낸 뒤 소금에 절여서 보관한다. 소금에 절인 청어는 잘게 다진 양파나 오이피클(augurk)을 청어로 싸서 함께 먹는다. 그리고 꼬리를 집어 올린 다음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젖혀 통째로 먹는 특이한 방식[23]이 보편적이다. 현대에는 전통적인 방법 외에도 핫도그빵에 끼거나 썰어서 이쑤시개로 찍어서 먹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통조림으로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대개 토마토 소스에 조린 것을 담아서 판다.
-
발트 해 연안
네덜란드에서 발트 해로 이어지는 동북유럽 국가들은 유사한 청어요리들, 특히 청어 피클을 즐겨 먹는다. 이들은 청어에 보통 양파, 감자나 호밀빵, 사워크림, 오이 피클, 딜을 조합한다.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유사한 레시피를 공유한다. -
독일
독일인들은 술을 마시고 난 뒤 해장 겸 아침식사(Katerfrühstück)로 청어를 즐겨 먹는다. 독일에서 청어 피클은 '롤몹스(Rollmops)', 또는 '비스마르크 헤링(Bismarckhering)'라고 불린다. 롤몹스는 말 그대로 한입에 먹기 좋게 동그랗게 말아 놓은 청어 피클 요리이고, 비스마르크는 그냥 필렛을 펴 놓은 것이다. 딜과 오이 피클, 양파, 빵이나 감자와 함께 즐긴다. 작은 아침식사용 빵인 브뢰첸(Brötchen)을 갈라 그 사이에 양파, 양상추와 함께 끼워넣은 피시브뢰첸은 독일 북부에서 즐겨 먹는 간단한 식사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함부르크 등지에서는 이웃한 네덜란드식 하링을 마티예스(Matjes)란 이름으로 부르며 자주 먹는다.
열훈법으로 만든 뷔클링(Bückling) 또한 먹는다. 이건 영국의 버클링과 같은 음식. 다만 영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훈제 청어보다는 절인 청어를 주로 소비한다. -
북유럽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와 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3국과 더불어 청어를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들이다. 이들은 유사하면서도 다양한 청어요리 문화를 공유한다.
이 지역에서는 청어 피클을 실(Sill, Sild)이라고 하는데 맛은 피클 비스무리하면서도 살짝 달달하고, 고소하면서도 생선 살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좋다. 위의 사진은 스웨덴에서 미드솜마르 기간 동안 즐겨먹는 취식법으로, 청어 초절임에 삶은 감자, 삶은 계란과 차이브를 썰어넣은 사워크림 소스를 곁들인다. 여기에 생 양파를 추가하기도 하며, 넓은 노르웨이식 감자빵(Lefse)이나 딱딱한 호밀빵(Knäckebröd)에 올려 일종의 오픈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 샌드위치는 스웨덴에서는 실마카(Sillmacka), 덴마크에서는 실데스뫼레브뢰드(Sildesmørbrød)라 부른다. 또는 생 청어를 가시를 잘 바른 뒤 튀겨서 으깬 감자와 월귤잼을 곁들이기도 한다. 청어 튀김은 특히 핀란드에서 많이 소비되며, 호밀 가루를 묻혀 튀기는 것이 특징이다. #
그 외 스웨덴 북부에서는 수르스트뢰밍이라는, 극한까지 발효된 청어 통조림을 즐겨 먹는다. 이 역시 취식 방법은 일반적인 실과 유사하다. 다만 냄새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뿐. 그리고 스웨덴 남부 고틀란드와 덴마크 보른홀름에서는 지역 특산물로 훈제 청어를 만든다. 스웨덴에서는 뵈클링(Böckling)이라고 하며, 영국의 버클링이나 독일의 뷔클링과 기원이 같다. -
러시아와
발트 3국
해당 지역에서도 훈제 청어를 즐겨 먹는다. 특히 발트 3국은 열훈법으로 훈제 청어를 만드는 법을 최초로 개발한 지역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외국인 대상 수입식품점에서 통조림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같은 발트해 지역이다 보니 북유럽 및 독일과 유사한 청어 피클 요리들도 즐겨 먹으며, 특히 청어 샐러드가 유명하다. 감자, 양파, 비트, 그리고 청어를 이용해 만드는데, 에스토니아에서는 로솔리예(Rossolje), 러시아에서는 셀료드카 포드 슈보이(Сельдь под шубой)라고 부른다. 위의 사진이 바로 러시아식 청어 샐러드로, 켜켜이 층을 쌓아 만들었다. 한편 에스토니아와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처럼 쌓지 않고 한데 섞어버린다. -
폴란드
폴란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청어 피클과 청어 샐러드를 비롯한 다양한 청어 요리를 소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슬레지예 볼레유(Śledź w Oleju)라 불리는 요리가 유명한데, 기름에 담근 청어라는 뜻이다. 뼈를 바른 청어 필렛을 썬 생양파와 함께 식물성 기름에 재워 만든다. 기름은 요즘은 보통 남유럽산 올리브 오일을 쓰는 편. -
북미
북미에서도 청어 피클은 쉽게 구해 먹을 수 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고등어 초밥이 먹고 싶은데 고등어 초절임을 구하기 마땅치 않을 때 대용으로 사용해 만들어 먹어도 좋다. 사실 위의 하링도 보통은 피클 형태로 먹는 것이 일반적인 편. 위키백과의 초절임 청어 항목
미국 토착원주민 중에는 청어의 산란기 습성을 이용해 솔송나무가지를 물에 넣어서 청어알을 채집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청어가 아닌 청어 알을 먹기 위해 그물을 설치한다고도 한다.
-
스페인
청어 살에 첨가물을 넣고 오징어 먹물을 입혀 까맣게 만들어 가공해 파는 것을 '아브루가'라고 하는데, 캐비어와 비슷한 외형 때문에 캐비어의 대용품으로도 쓰인다. 물론 가격도 훨씬 싸고 알도 아니다. #, # 오세트라 캐비어가 15g에 7만~9만 원을 왔다갔다 하는데, 아브루가는 50g에 1만 원 후반 ~ 2만 원 초반이다.
4.1. 주요 가공품
유럽의 주요 청어 가공품은 다음과 같다.-
청어포
청어를 말린 것으로, 한국의 과메기와 사실상 동일하다. 유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주로 만들어 먹었다. 다만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춥고 습한 기후와 청어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으로 인해 청어가 잘 마르질 않아, 나중에는 다른 방식들이 대세가 되었다. -
청어 피클(Pickled herring)
독일의 롤몹스, 포메른 지방의 비스마르크와 네덜란드의 홀란처 니우어(일명 하링) 등, 식초나 소금에 절여 만든 청어 가공품 전반. 독일의 롤몹스와 비스마르크는 청어 필레와 썰어놓은 양파를 후추와 겨자씨를 비롯한 향신료, 조금의 소금과 오이 또는 당근과 함께 화이트와인 식초에 절여서 만든다. 네덜란드의 하링도 비슷하지만 소금물을 쓰기도 하며, 어린 청어를 사용해 크기가작은 것이 특징이다. 그 외 과거 한자동맹에 청어 가공품을 내다 파는 어시장이었던 스웨덴의 스코네 지방에서도 여전히 생산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트니아 만의 묽은 바닷물로 인해 발효가 된 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수르스트뢰밍이다.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스카치 큐어(Scotch Cure)라고 하는 방식이 유명하다. 1860년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당대 세계 최대 청어 어장인 그레이트야머스에 도입되었다. 위 영상에서처럼, 청어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내장을 바로 제거한 뒤 나무통에 굵은소금과 함께 빼곡하게 담는다. 그러면 소금이 청어에서 흘러나온 물에 녹아 섞이면서 함수가 되어 청어를 절이게 된다. 이 방식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탈리아에 수출되는 물량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영국에서는 하술할 블로터와 키퍼의 명성이 더 높았다. -
Buckling(버클링)
훈제 청어. 그 중에서도 열훈법으로 바싹 훈연한 청어를 의미한다. 과거 발트 지역에서 기원했는데 강한 불을 피워 빠르게 청어를 보존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술할 영국의 레드 헤링과 다른 점은 강한 열에 빠르게 훈연한다는 것이다. 발트 3국 말고도 독일에서도 즐겨 먹었다. 덴마크 보른홀름 지역에서도 즐겨 먹으며, 여기서는 생선의 내장을 따고 잠시 절였다가 바싹 훈연하는 식으로 만든다. -
Bloater(블로터)
1836년, 영국 노퍽주 그레이트야머스의 비숍이라는 염장업자가 개발한 방식. 야머스 블로터(Yarmouth Bloater)로도 불린다. 어원은 '담그다' 라는 뜻의 스웨덴어 blöta. 청어들의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로 함수 수조에 넣어 일주일 간 절인다. 이후 20마리씩 눈을 막대기에 꿰어 탑 형태의 훈연실 천장과 벽에 빼곡히 걸고 6시간에서 8시간 가량 잠깐 냉훈법으로 훈연하면 완성된다. 주로 생산되던 시기는 8월에서 11월 사이였다.
동앵글리아 지역의 청어가 기름기가 적어 적합했다고 하며, 주로 이탈리아로 수출되었다. 한때는 청어 가공품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통과메기와 비슷한 이유로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레드 헤링에서 블로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제품은 따로 실버 헤링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더 오랫동안 절이고 더 짧게 훈연했기 때문에 차라리 날생선에 가깝다. -
Red Herring(레드 헤링)
영국의 훈제 청어. 염장법이 개발된 16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가장 기본적인 청어 가공품. 가장 이른 기록이 13세기일 정도로 전통적인 방식이다. 청어를 적갈색이 될 때까지 몇 주간 바싹 훈연한 것이다. 덜 훈연한 것은 은은한 황금색을 띄어 골든 헤링이라 하는데 이건 현재도 영국에서 볼 수 있는 해산물 요리이다. 한편 몇 달간 훈연해서 시꺼멓게 변한 청어는 블랙 헤링이라 부르며, 끝내주게 좋은 보존성을 자랑했다. 이건 주로 카리브 및 아프리카 식민지에 노예들의 식량으로 수출하는 상품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현재는 생산되지 않는다.
냄새가 매우 심해서, 근세 범죄소설에서는 범인이 이걸 마치 현대 전투기가 미사일 회피용 플레어를 뿌리듯 자신을 뒤쫓는 경찰견들에게 던져서 후각을 교란하는 묘사를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영어에서 레드 헤링이라 하면 논점일탈의 오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브리티시 파테에 소개된 키퍼 제작 방법. 1948년, 그레이트야머스에서 촬영. |
-
Kipper(키퍼)
영국의 훈제 청어. 내장을 제거한 청어를 세로로 반으로 갈라 편 다음 소금을 뿌려 몇 시간가량 염장한 후, 막대기에 스무 마리씩 눈을 꿰어 훈연탑에 건 뒤 훈제한 것. 영국에서 현재도 상당히 흔히 볼 수 있는 해산물 식단이다. 그레이트야머스의 염장업자 존 우저(John Woodger)가 1846년에 개발했다. 한국의 과메기와 거의 같다. 1918년부터는 천연색소를 첨가했는데, 참나무 연기의 검은색을 내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으로는 훈연하면서 청어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싹 훈연하면 위의 레드 헤링이 된다. 최대 생산지는 맨 섬이다.
5. 관련 민요
And you wish you were a thoosand miles awa fae Yermouth quay.
넌 야머스 항구에서 천 마일은 먼 곳에 있고 싶구나
영국의 경우, 상술한 '피셔 걸'들이 청어 내장을 손질하며 피로를 잊기 위해
스코트어로 노동요를 부르곤 했다. Song of the Fishgutters, 일명 '생선손질노래'라고 불리는 해당 노래는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노퍽주의 그레이트야머스 일대에서 전승되어 왔다. 각 절마다 '야머스 부둣가(Yermouth quay)'로 끝난다는 것이 특징. 스코틀랜드 출신 계절노동자들인 피셔 걸들이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던 마음이 담겨 있다.넌 야머스 항구에서 천 마일은 먼 곳에 있고 싶구나
6. 여담
- 알래스카 근처의 한 대서양청어 산란지는 산란철에 원양어선들이 어획그물(주로 설치형)을 치면, 위험을 느낀 대서양청어들이 알과 정소를 뿌려대는데 정액 때문에 물 색깔이 희뿌옇게 변할 정도이다. 수정된 알들은 그물에 달라붙으면서 어장이 망가지기도 하는데, 문제는 수정된 알은 끈기가 엄청 강해서[24] 그물에서 제거하기 매우 힘들다고.
- 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 먼 옛날 침몰한 노르웨이배에 장기 숙성된 청어, 그러니까 이 대서양청어를 발견한 펭귄들이 리코 빼고 다 먹고 물고기 중독증[25]이라는 병에 걸려 맛탱이가 훼까닥 가버린 에피소드가 있다. 그외에도 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 기본적으로 나오는 가장 흔한 물고기이기도 하다.
[1]
출처 "이야기로 읽은 부의 세계사".
[2]
물론 특성상 대부분 염장 청어였고 당연히 맛은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호되는 음식은 아니었다. 때문에 영주나 수도사 등 지배계층들은 영지 내에
연못을 두고
송어 등을 길러 먹으려고 했다.
[3]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스코네는 덴마크의 영토였다.
스웨덴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이다.
[4]
물에 흐르는 그물로, 고기떼의 진행 방향을 가로막으며 친다. 그럼 고기떼는 유망을 가로지르려다 그물코에 끼어 잡히게 된다. 유자망이라고도 한다. 보통
정어리나 청어, 또는
멸치를 잡을 때 쓴다.
[5]
간의 효소가 염장된 청어에
발효 과정을 일으켜 풍미를 이끌어낸다.
[6]
청어의 이리는 진미로 인정받는 고급 부위다.
[7]
다만 덴마크 왕실 청어 회사는 결국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파산한다.
[8]
헤이즈버러 사주 위로 더 올라가면 노포크 사주(Norfolk banks)라 불리는 일련의 해저 모래톱들이 늘어서고, 그 북쪽에
도거 뱅크가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는 해저 모래톱에 들이받고 좌초한 침몰선 역시 많다.
[9]
야머스 시 자체가 야레 강 하구 사주에 생긴 도시다.
[10]
쓰레그물이라고도 하며, 어선이 직접 끌고 다니며 해저의 생물들을 쓸어담는 방식의 그물이다. 어획량이 많지만 반대로 수중 생태계를 심각하게 파괴한다는 단점이 있다. 야머스에는 19세기 초부터 도입되었다. 무동력선 시절에는 직접 선원들이
캡스턴을 돌려서 그물을 수거해야 했다.
[11]
19세기 말이 되면 이 때문에 영국의 영세 어촌들이 거대 어항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됨에 따라
이촌향도 현상이 나타난다.
[12]
여담으로 야머스 항의 이 많은 트롤어선들은 세계대전 당시에 징발되어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함으로 쓰이기도 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 당시 프랑스로 달려간 어선들도 상당수 있었다.
[13]
야머스는 독일과 가까워 여러 차례
공습을 받은 바 있다. 2023년에도 미처 전후에 처리되지 못한 250kg짜리 독일제 SC250JA 항공폭탄 하나가 불발된 상태로 야레 강 바닥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이 폭탄은 영국군 폭발물 처리반이 해체하는 도중에 갑자기 폭발했는데,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14]
그레이트야머스는 노퍽과 서퍽주 일대에 걸친 '더 브로즈(The Broads)'라는 넓은 저습지의 끝자락, 그것도 강 하구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홍수에 아주 취약하다. 더 브로즈 일대는 지반 전체가
이탄과 진흙, 그리고 모래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때문에 바다 건너 맞은편의
네덜란드처럼, 이 지역 역시 예로부터
풍차를 돌려 땅의 물기를 퍼내야 했다. 1953년의 대홍수는 이런 지형적 조건과 함께 갑자기 내습한
폭탄 저기압이 몰고 온 폭풍 때문에 발생하였다. 당시 이 폭풍은 북해 연안 전체를 초토화했다. 야머스에서만 307명이 사망했다.
[15]
2차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야머스 시내는 사람 둘이 지나가면 꽉 차는 좁은 골목길, 일명 로우(Row)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습과 홍수, 그리고 이어진 시내를 정비 때문에 옛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로우가 이어진 옛 시내의 모습은 Time and Tide 박물관에서 재현해 놓은 전시실에서나 볼 수 있다.
[16]
2023년 영화 《
웡카》에서
윌리 웡카(
티모시 샬라메 분)가 타고 다니는 배가 바로 리디아 에바 호다. CG나 세트장이 아니다.
[17]
1880년대에 세워지고 1988년에 문을 닫은 "타워 수산(Tower Fish Curing Works)"이다. 폐업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백 년간 배어든 미세한 청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18]
선사 시대와
로마 식민지 시대도 포함한다.
[19]
미국은 서쪽에서는 태평양 청어를, 동쪽에서는 대서양 청어를 모두 잡는 유일한 국가다.
[20]
영국의 어업은 청어 대신
대구를 비롯한
흰살생선 조업이나 굴을 비롯한
어패류 양식업으로 변화했다. 영국인들의 입맛이 변화하여 청어를 별로 찾지 않게 된 것 역시 영향을 끼쳤다.
[21]
또는 키퍼에 버터 한 조각을 얹은 후 오븐에 굽기도 한다.
[22]
영어의 herring이나 표준독일어의 Hering이나 네덜란드어의 Haring이나 동일한 어원의 게르만어계 어휘다.
[23]
꼬마펭귄 핑구에서
핑구가 생선을 먹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24]
산란지인 해초에 잘 붙게하기 위함이다.
[25]
오래된 물고기를 먹어서 걸리는 병으로 계속 물고기를 찾게 되고 이병에 걸린상태에서 물고기를 하나라도 먹으면 미친상태로 평생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