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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관/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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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152484,#fff> 생애 생애
가족 아버지 김봉환 · 어머니 박봉순 · 형 김영철 · 김두철 · 김두성 · 동생 김두수 · 딸 김가영 · 아들 김도완
20대 대선 제20대 대통령 선거
두드림 캠프 · 대한민국대전환 선거대책위원회
비판 및 논란 비판 및 논란
기타 양산 바이러스 연구소 }}}}}}}}}

1. 이장에서 군수로2. 행정자치부장관
2.1. 해임건의안 가결
3. 3수 끝의 경상남도지사 당선4. 무리수였던 대통령 도전
4.1. 다시 재야로
5. 20대 총선: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하다6. 21대 총선: PK에서의 신승7. 두번째 대통령 도전8.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후
8.1. 2022년8.2. 2023년
9. 22대 총선 낙선10. 당대표 출마

1. 이장에서 군수로

음력 1958년 10월 23일( 양력 12월 3일) 경상남도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가난한 어부의 5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는 넷째로 태어났다. 김두관 자신의 저서 『아래에서부터』(비타베아타, 2012)에서는 "주민등록상으로 1959년 4월 10일에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1958년 10월 23일로 할아버지가 출생신고를 6개월 늦게 하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고 언급했고, 유시민이 저술한 『나의 한국현대사 1959-2020』(돌베개, 2010)를 보면 '59년 돼지띠 남자'인 유시민 자신은 김두관이 호적상으로는 동갑이지만, 실제로는 한 살이 많아서 늘 형님으로 대했다는 대목도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해외로 돈벌이를 나간 형들[1]을 대신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는 등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남해 도마국민학교(26회), 남해중학교(23회)를 졸업하고 남해종합고등학교(현 남해제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남해종합고등학교 3학년 때 국민대학교 어문계열에 합격했으나 연 등록금 28만 5천 원[2]을 감당할 수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 1977년 2월 남해종합고등학교(5회)를 졸업한 뒤 둘째 형과 고향에서 2년간 마늘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손해가 나는 것을 보고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 대학 진학을 결심했다.

1979년 영주경상전문대학 행정과(79학번, 9회)에 입학했고, 1981년 동아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35회) 3학년에 편입학했다. 4학년 때이던 1982년 9월 4일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제2훈련소 제23신병교육연대(계백연대)에서 신병교육을 받았고, 이후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던 제2군수지원사령부 제16보급대대에서 유류관리병으로 30개월간 복무했다. 1985년 3월 7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여 병역을 마쳤다.

이후 복학했고, 1986년 4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약칭 민통련)에 동생 김두수[3]와 함께 가입해 민주화운동에 투신했고, 간사 및 서울지부 사회부장 등을 맡았다. 그러던 중 개헌추진본부 충청북도지부 결성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수감 시절, 석방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출소 후 동아대학교에 복학해 졸업했다. 그 뒤 고향 남해군으로 낙향해 1987년 남해농민회를 결성하고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이후 1988년 창당한 진보 정당 민중의당[4]에 입당했으며,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중의당 후보로 경상남도 남해군·하동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5%도 채 되지 않는 득표율로 민주정의당 박희태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5]

총선 이후 1988년 고향 이어리의 이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2년간 여러가지 활동을 통해 기반을 쌓아나갔고, 1989년에는 지역주민들을 대상을 주주 공모를 통해 <남해신문>이라는 지역 신문사를 설립해 대표이사로서 운영하며 신망을 쌓았다. 이렇게 쌓은 지역 기반을 가지고 1995년 치러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남해군수 선거에 출마해 민주자유당 강태선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군수 당선 당시 만 36세로 전국 최연소 지방자치단체장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선거로 선출된 지방자치단체장으로는 최연소 기록이 깨지지 않는 중이다. 이후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국민승리21의 지원을 받는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한나라당 김종현 후보, 자유민주연합 최태백 후보 등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6]

영화 이장과 군수가 실제로 이어리 이장을 거쳐 남해군수가 된 김두관을 모티브로 했다는 설이 있다.

민선 2기 남해군수 임기가 끝나갈 무렵인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남해군수 3선 도전 대신 경상남도지사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노무현을 만난 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했다.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상태에서 지역주의를 극복할 수 있을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났고[7] 결국 17%의 저조한 득표율로 낙선했다. 상대 후보였던 한나라당 김혁규 넘사벽이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당시 김혁규는 무려 74% 이상의 득표율로 김두관을 개박살내고 무난하게 3선에 성공했다.[8]

2. 행정자치부장관

이후 참여정부가 들어선 후 2003년 2월 27일 제5대, 참여정부로는 초대 행정자치부장관으로 취임했다. 만 45세로 민주화 이후 최연소 장관이었다. 문재인의 저서인 '문재인의 운명'에 따르면 당시 장관직 수행평가에서 1위를 여러차례 차지할 만큼 장관직 수행을 잘 했다고. 그러나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그의 장관직 수행에 대해 크게 부정적이었으며, 한총련이 미군기지에 침투하여 불법시위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을 제출했고, 결국 해임건의안이 통과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해임건의안을 거부하고 그의 장관직을 지킬 것이라고 했으나, 계속 논란이 되자 그는 스스로 사의를 제출하면서 결국 2003년 9월 18일 장관직에서 퇴임하였다. 사실, 그동안 국회에서 해임건의안이 통과된 경우는 여야를 불문하고 스스로 사임해야 하는 것이 관례며 승복하지 않으면 역풍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9]

2.1. 해임건의안 가결

[162582] 국무위원(행정자치부장관 김두관) 해임건의안(홍사덕의원 등 149인)
국무위원( 행정자치부장관 김두관) 해임건의안
(의안번호: 162582) (발의일: 2003년 8월 29일) (의결일: 2003년 9월 3일)
재적 재석 기권 무효
272 160 150 7 2 1
결과 재적의 과반수 이상이 찬성하여
가결
후속 절차 대통령 : 해임건의안의결서 수령( 헌법 제63조)

역대 국무총리·국무위원 해임건의안 가결 사례
<rowcolor=#ffffff> 연도 정부 해임대상 해임여부
1955년 이승만 정부 임철호
농림부장관
사퇴
1969년 박정희 정부 권오병
문교부장관
1971년 오치성
내무부장관
2001년 국민의 정부 임동원
통일부장관
2003년 참여정부 김두관
행정자치부장관
2016년 박근혜 정부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대통령
거부
2022년 윤석열 정부 박진
외교부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장관
2023년 한덕수
국무총리
<rowcolor=#ffffff>


여담으로 2003년 당시 김두관 장관의 해임안 통과에 대해 한나라당의 초선 의원이자 당 대변인을 맡던 박진 의원이 '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승리'라고 평가했는데, 정작 20년 후인 2022년 박진이 윤석열 정부의 외교부장관에 취임한 뒤 반대로 박진 해임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김두관은 '20년 만에 돌려드렸다'고 평가했다. [논&설] 2003년 김두관, 2022년 박진…공수 바뀐 해임건의안 더 자세한 내용은 박진 해임건의안 가결 참고.

이 해임건의안에 대해 홍사덕 한나라당 원내총무[10]는 기자간담회에서 "마음이 유쾌하지는 못하다"며 "현 제도상 노무현 대통령의 실정을 직접 규탄할 방법이 없어서 반성을 촉구하는 의미를 담아 김두관 장관이 선정된 것"이라고 밝히며 이 해임건의안이 정치적이었음을 시인했다. 김두관 여유, 한나라당은 긴장 '강한 야당 콤플렉스'의 실패작 당시 한나라당은 김무성 의원이 "나는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인정 안해"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등 대놓고 16대 대선에 불복하는 분위기였고, 이 분위기의 연장선에서 해임건의안이 가결된 것.

불명예스럽게 퇴임한 셈이 되었으나, 민주당계에서는 그는 한나라당의 딴지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이라는 시각이 강해지면서 차츰 민주당계에서는 떠오르는 정치인으로 올라섰고, 비슷한 시기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되며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자 바로 합류했다. 그리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공천을 받아 남해군- 하동군 지역구로 출마하였고, 당시 탄핵 논란으로 열린우리당에 상당히 유리하다는 평이 있어 어느때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선거운동 초반 여론조사에서도 20% 가까운 우위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정동영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이 보도된 이후 샤이보수 층이 결집하면서 끝내 한나라당 박희태[11] 후보에게 약 7,000표 차이로 석패했다. 2년 뒤인 2006년 열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경상남도지사 선거에 다시 도전했으나, 현임 도지사였던 한나라당 김태호[12] 후보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며 낙선했다.[13][14] 2년 뒤에는 지역주의를 의식했는지 무소속으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같은 지역구로 출마했지만 마찬가지로 한나라당의 여상규 후보에게 밀리며 40%의 득표율로 낙선하였다.[15]

이로서 2년 주기로 걸친 4번의 선거에서 연속으로 2위로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이후 중국 베이징대학 역사학과에 고급연수생으로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3. 3수 끝의 경상남도지사 당선

그러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마찬가지로 경상남도지사에 도전했고, 무소속 신분이었던 그는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후보와 단일화 과정을 거쳐 야권 단일후보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53% 득표율을 얻으며 한나라당 이달곤[16][17] 후보를 꺾고 성공했다. 본인으로선 도지사 선거만 3번의 도전 끝에 당선되었다. 중앙에서 활동하던 이달곤에 비해 오랫동안 PK에 몸담아온 김두관이었기에 지역밀착형 후보라는 태그가 승리의 큰 요인이라는 분석이다. 더욱이 2006년을 기점으로 세를 보이기 시작한 PK의 진보층도 큰 활약을 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문재인이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경남 전역을 누비며 김두관이 당선될 수 있도록 총력지원을 해준 것도 당선의 원동력이었다. 이로써 지역주의 타파의 아이콘이 되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18]

문재인 강기갑 등 여러 야권 명망가들의 격려를 받으며 2010년 7월 1일 경상남도지사로 취임한 김두관은 자신과 야권단일후보를 놓고 경쟁했던 민주노동당 소속의 강병기를 정무부지사로 임명하며 협치 행정을 실천하였다. 또한, 2012년에는 새누리당 허남식 부산시장과 일일 교환근무를 하기도 했다. 이어 4대강 사업을 선명하게 반대하며 이명박 정부와 각을 세웠고[19], 무상급식을 통과시켰다.

4. 무리수였던 대통령 도전

이후 민주당에 복당하여 무난히 도정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재임 3년차인 2012년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경선 시작 전에 경남지사직을 뜬금없이 내려놓고 대선 경선에 출마하여 논란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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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다시 재야로

졸지에 다시 재야가 되어버린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초청으로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1년 간 연수를 받은 뒤, 2014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지역구는 당초 활동했던 PK가 아닌 경기도 김포시로 정해졌다.[20] 아무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나서자 낙하산이나 뜨내기라는 비판이 생겨났지만, 본인으로선 대권 도전을 위해서는 수도권에 힘을 뻗어야 한다는 정치적 계산이 들어간 수였다.

거주지도 김포로 완전히 옮기고 본인은 분투를 했지만, 지역 토박이들은[21] PK 그 자체라 볼 수 있는 그를 좋게 볼 리가 없었고 그나마 지역 정체성이 덜한 신도시 지역에 승부수를 둬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승리 여부에 의문을 둬야 했다. 결국 경쟁상대인 새누리당 홍철호[22] 후보에게 밀리며 4년만에 낙선의 쓴맛을 맛봐야 했다. 예상대로 농촌지역에선 홍철호에게 몰표가 쏟아졌고, 신도시에서도 패배하여[23] 40% 득표율로 선거를 마감했다. 경남지사 당선 배경에는 PK 지역밀착형 후보였던 점이 상당히 먹혔던 것에 비해 이번 선거에서는 오히려 그 점이 낙선의 큰 요인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5. 20대 총선: 두 번째 재기에 성공하다

그러고도 경남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김포시에 거주하며 활동하고 있다. 점점 김포시민화가 되어가는 중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김포에서 출마하기 위해 꾸준히 준비해오고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마침 운 좋게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김포시 선거구가 인구 증가로 갑/을로 분리되면서 자리가 하나 더 늘었고, 김포시 갑 선거구 공천을 받아 출마하게 되었다.[24] 새누리당 측의 상대는 김동식 김포시장. 더불어민주당에서는 PK 출마를 기대했지만, 본인은 대권 도전에 대한 미련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듯. 김두관 본인 말로는 경남지사 자리에서 중도 하차해 다시 보수정당의 홍준표에게 헌납한 그 원죄 때문에 못 내려가고 있다고[25]

현재까지 나온 관련 여론조사를 살펴보면, 새누리당의 김동식 후보보다 5~10% 안팎의 우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포 갑이 원체 도시 인구가 많아 야권세가 상대적으로 강하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듯. 물론 결과는 두고 볼 일이지만, 일단 2014년 재보궐 선거 때보다는 해볼만한 승부로 여겨진다. 김동식 후보는 김두관에 비해 무게감부터가 떨어지는데다[26] 김포시장 시절 권력형 비리(!)로 처벌받은 전과까지 있어서 시민들한테 평판이 나쁘다.

여담으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도 지역 출마자들 중 91년 이후 역대 공직선거 출마 횟수가 8회로 가장 많다. #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포함하면 총 9회이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마치면 10회가 된다.

결과는 당선되면서 이제는 경남이 아닌 경기도에서 새로운 정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제20대 국회 임기 때이던 제19대 대통령 선거 선거운동기간에 경남에 내려가서 똑같은 내용으로 고해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대충의 내용은 '죄송하다 내 잘못이다'로 시작해서 '중도사퇴는 잘못됐다' → '내가 관둬서 홍이 됐다' → '나는 준비가 미흡했다' 라는 순서로 갔다. 그 다음 문재인 후보를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으로 마무리. 여기에 홍준표를 벌해달라는 말은 덤. 전형적인 사과문의 한 사례이다.

6. 21대 총선: PK에서의 신승

머니투데이 기사에 따르면 민주당 지도부에서 PK 지지율이 안 좋아지니까 21대 총선에서 다시 PK로 차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 양산 갑/을 중에 차출될 구상이었는데, 김두관 본인은 김포시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며 고사했다. # 하지만 계속된 당 지도부 및 친문 그룹의 설득과 권유로 양산 갑/을 중 하나로 다시 PK로 돌아가는 것으로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동아일보 기사)[27]

2020년 1월 23일, 양산시 을 출마를 결심하였다. # 현역 서형수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한 곳이다.

2월 17일, 양산시 을 전략공천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20일 더불어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부산·울산·경남 지역 선거를 지휘할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21일에는 양산시 을 선거구에 더불어민주당 예비후보로 등록했던 임재춘, 박대조 예비후보가 김두관 지지를 선언했다.

한편,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PK 수비대장을 자처하며 양산 을에 출마하겠다고 나서면서 전직 경남도지사 간의 빅매치가 성사될 것으로 보였으나, 홍준표가 미래통합당 공천에서 컷오프당한 후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 홍준표 대신 김두관의 선거 상대로 나온 적수는 나동연 前 양산시장이었다.[28]

한 마디로 체급이 센 홍준표가 아닌 나동연이 나온 덕분에 선거가 조금 수월해졌다. 실제로도 나동연은 웅상지역에서 민심이반을 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기는 과정이 결코 수월하지 않았다. 웅상지역에서 반쯤 이기고 양주동에서 적은 표차로 이기면서 겨우 당선되었다. 만약 홍준표와 맞붙었더라면 낙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홍준표 예비후보가 과거 경남지사 시절의 마이웨이 행보로 인해 지역에서 안티가 꽤나 많았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완전히 불리한 싸움은 아니었다. 홍준표 후보가 고향 출마가 아닌 대구 출마를 선택한 이유도 경남에서는 썩 유리하다고는 볼 수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29]

결국 치열한 접전끝에 경남 양산시 을에서 미래통합당 나동연 전 시장을 꺾고 당선되며 8년 만에 돌아온 격전지 경상남도에서 재선 국회의원이 되는 데 성공했다. # 본인이 민주당 선거를 지휘했던 PK 지역에서 민주당 의석이 10석에서 7석으로 줄었지만, 2019년을 기점으로 민주당에 싸늘해졌던 지역 민심을 생각하면 낙동강 벨트를 접전 끝에 수성하면서 선방했다는 평가. # 아울러 그의 정치 커리어 최초로 민주당 당적을 갖고 경남에서 당선되는 기쁨을 누렸다.

총선 직후 오거돈 부산시장이 성추문으로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자, 민주당 내에서 내년 있을 보궐 선거에서 후보를 낼 것이냐, 내지 않을 것이냐를 가지고 격론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심판을 받더라도 잘못했으면 잘못한 대로, 잘했으면 잘한 대로, 선거로 심판받는 것이 민주주의라면서 후보를 공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인께 따뜻한 연대를 보낸다.
위안부의 역사적 진실을 찾는 기나긴 여정에 인생을 바친 윤미향 당선자마저 공금횡렴범으로 조작해서는 안 된다.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을 핑계로 정의기억연대와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보수진영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다. 다수가 숨죽여 침묵할 때 일본 제국주의의 성노예 범죄를 세계에 알리는데 평생을 바친 한 사람의 인생과 역사적 성과를 누더기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공격이 친일 반인권 반평화 세력의 최후 공세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2015년 박근혜 정권이 맺은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파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기부금의 진실'이 아니라 '위안부의 소멸'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를 했던 미래통합당, 일제와 군국주의에 빌붙었던 친일언론, '위안부는 매춘'이라는 친일학자들이 총동원된 것 같다.
페이스북 지지 선언

재선 성공 이후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에 의해 촉발된 윤미향 당선인 및 정의연에 대한 의혹공세,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논란, 부산시장 재보궐선거 무공천 여부, 북한에 대한 전단살포, 윤석열 검찰총장의 거취와 관련해 강경한 입장을 내고 있다. 특히 윤미향 당선인 및 정의연 관련 의혹 제기에 대해 "친일, 반인권, 반평화 세력이 최후의 공세를 하고 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 한 시민단체가 나서서 고발하고, 검찰이 수사하고, 언론은 검찰의 입을 빌려 밝혀지지 않은 의혹을 단독이라 연일 보도할 것이다.", "윤미향 향한 비판은 보수 망나니의 칼춤이다."와 같은 반응을 내놓으며 윤 당선인을 강력히 옹호하고 이런 의혹은 모두 토착왜구의 저열한 공격이라고 일축했다. 이러한 논란 전체를 '윤 당선자 길들이기'로 정의하기도 했다. 윤미향과 김두관은 같은 남해군 출신 동향인이기도 하다.

7. 두번째 대통령 도전

그러던 중 2021년 초 갑작스럽게 대권후보로 청와대가 낙점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 하지만 민주당의 부울경 지역 의원들의 의견은 그냥 가담항설. 쉽게 말해, 그냥 썰이 아니냐는 추측 또는 경우의 수를 넓혀보자는 의미라고 하는 듯. 무엇보다 또다시 대선 출마를 준비하려면 어렵게 당선된 국회의원직을 내려놔야 하는데 이미 과거 도지사직을 사퇴해 꽤 오랜 기간 고생했던 것을 감안해보면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아보인다. 만약 이번에도 도중 사퇴를 선택했다가 경선에서 패한다면 정치적인 생명이 사실상 끝장 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4월 26일, 정말로 대선 도전을 공식화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시아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작년 가을부터 대선 출마의 생각을 굳히고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오는 6월에 출마 선언을 하겠다고 밝혔다 # 과거의 경험으로인해 사퇴는 하지 않고 출마했다.

6월 12일에 출판기념회를 열면서 문재인 대통령을 큰형님 #이라고 호칭하면서 2012년 대선 경선 과정에서 문재인 당시 후보를 공격했던 일을 사과한다고 발언했다. 이번 대선에서 친문세력을 자기쪽으로 끌어오려는 시도로 보인다.

7월 11일, 제20대 대통령 선거 더불어민주당 후보 예비경선 결과가 발표되었다. 6명으로 컷오프되어 남은 사람만 본경선에 진출하는데, 지지율이 극히 낮은 양승조 최문순이 컷오프되며 이재명, 정세균, 이낙연, 박용진, 추미애와 함께 본경선에 진출하였다.

7월 19일에 국립 5·18 민주묘지를 방문해서 전날 윤석열이 참배하며 만지고 간 묘비를 더럽혔다며 손수건으로 닦는 모습을 보였다. #

9월 4일부터 더불어민주당의 본경선이 시작되었는데, 모두의 예상과 같이 여권의 강력 대권 주자로 꼽히는 이재명의 1위 독주, 이를 추격하는 이낙연의 존재로 인해 인지도가 낮은 박용진과 함께 득표율 하위권을 달리고 있다. 심지어 박용진에게도 밀리며 꾸준히 최하위였는데, 박용진이 민주당에서의 커리어가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꽤나 자존심 구기는 결과다. 대통령 도전은 이번에도 무리수였던 것이다. 본인으로서는 부울경의 지지를 바랐겠지만 부울경 역시 이재명 후보의 손을 들어주면서 크게 도움을 받지 못했다.

결국, 2021년 9월 26일에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며 경선에서 하차하였다.

8. 제20대 대통령 선거 이후

8.1. 2022년

이재명 후보 지지선언 이후에는 이재명 후보의 대선 캠프에 합류한것 말고는 별다른 움직임은 없다. 현재는 국회의원 3선을 노리는 것인지 지역 현안에 좀 더 치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선이 이재명 후보의 패배로 끝난 뒤, 3월 11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이재명 후보를 비대위원장에 올려야한다고 주장하며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후보를 지지하지 않았던 민주당 권리당원들을 거세게 비난했다. #

하지만 윤호중 비대위가 예정대로 출범하자 한발 더 나가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공개 저격하면서 이재명 비대위 구성을 위한 서명 운동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 그러나 이재명 전 지사의 측근들까지 이재명 조기 등판론에 부정적인 의사를 나타내고 있는데, 한 측근 의원은 "이재명 전 후보의 체력이 완전히 방전됐다"며 "가까운 인사들과의 만남도 이번 주 들어 재개할 듯하다"고 했다고 하며 민주당 의원들의 채팅방에선 '이재명 비대위 체제'를 주장하는 김 의원에게 "지나치다"는 의견을 공개적으로 개진한 의원도 있다고 한다. ##

처음에는 당내 일부 반발에 본인 페이스북을 통해 의견을 굽히는 가 했더니, 오히려 3월 19일에는 주장을 강화해 이재명 전 후보를 1971년 대선에 나섰던 당시 신민당 김대중 후보에 비교하면서 조기 등판을 촉구하고 사퇴 요구를 거부한 윤호중 비대위원장을 거세게 비난했다. #

이후, 7월 27일에는 경남도당 위원장에 출마하였다 #

같은 해 8월 13일에는 경남도당위원장에 당선되었다. #

8.2. 2023년

2023년 3월 22일에 차기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밝혔다. # 보통 거대 정당의 원내대표는 관례상 3-4선 의원들이 주로 출마하기 때문에 재선 의원인 김두관 의원의 출마가 이례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김두관 의원의 경우 행자부 장관과 경남도지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의 중량감이 중진급 의원들 못지 않으므로[30] 예외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차기 민주당 원내대표 적합도 20% 안팎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다른 후보군들은 모두 10%에 못 미치고 있다. 여러 원내대표 후보군 중에서 거의 유일한 (범)친명계로 분류되는 후보이다 보니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월 17일 원내대표 경선에 출마할 것을 선언했다 #.

하지만 4월 28일에 치러진 원내대표 경선결과 낙선했다. 여론조사에서는 높게 나온편이었지만 의원들끼리만 하는 선거이다보니 이재명계에 대한 견제심리와 돈봉투 사건의 여파, 후보 통합을 하지 못한 이재명계의 안일함, 여기에 경선날 오전에 있었던 합동토론회에서 사실상 사상검증에 가까웠던 발언 #등 여러 요인들이 있었다. @

다만 지역 정치권에서는 이번 낙선이 김두관의원에게 딱히 손해가 아니라는 평이 우세하다. 일단 여론조사에서는 상위권을 달려 대중적인 인지도도 어느정도 확보했고, 지역의 위원장, 당원등이 김두관을 보다 확고히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 # 이번을 계기로 도지사 중도 사퇴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가 어느정도 희석될 것으로 보인다.

5월경 지역구의 숙원사업이었던 부산-양산-울산 광역전철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확정시켰다 @. 아직 본 타당성 조사가 남아있고 실제공사까지는 많은 절차가 있지만[31] 국토부에서도 규격변경까지 제안할 정도로[32] 관심을 보이는 사업인 만큼 상당한 사업동력을 확보할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지역내 인지도도 다소 올라갔다.

9. 22대 총선 낙선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자신의 원 지역구인 양산시 을에 공천을 받아 3선을 노린다. 하지만 국민의힘에서 재선 경상남도지사 출신인 김태호 의원을 이 곳에 전략공천하면서 전직 경상남도지사 간 맞대결이 이뤄지게 됐다. 참고로 김태호와는 지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상남도지사 후보로 맞붙은 적 있는데 18년만의 맞대결이 다시 이뤄지게 된 셈이다.

줄곧 여론조사에서 오차범위 안팎에서 김태호 후보를 앞서가고 있었고 실제로 출구조사에서도 약 1.2% 차이로 김태호 후보에게 앞서는 것으로 나왔으나 막상 개표 결과 득표율 48.94%, 득표수 48,600표로 51.05%의 득표율을 기록한 김태호 후보에게 2.11%p, 2,085표 차로 밀려 낙선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 지역구의 주요 지역인 웅상쪽에서 이슈가 많았는데 응급의료시설 폐쇄같은 지역내 이슈에 대한 미흡한 대응[33]으로 인한 낮은 지역구 활동 등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인다.

같은 총선에서 양승조, 이광재, 홍익표처럼 현역 지역구가 아닌 험지에 자진해서 출마[34]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지난 총선에서 당선됐었던 현역 지역구에서 패했다.[35] 그나마 득표율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향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경상남도지사 재출마나 수도권(초선을 했던 김포시 갑 등) 및 경상남도 타지역의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정치적 재기를 모색해야겠으나, 경상남도지사도 과거 본인이 경솔하게 사퇴했다가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에게 지사직을 헌납해서 홍준표를 대권주자로 만들어준 원죄가 있어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36] 이제 나이도 꽤 고령이기도 하다. 물론 경남에서 민주당의 인재풀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고 여전히 당내에서 유력 인사이기 때문에 앞으로 행보에 따라 재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한다.

10. 당대표 출마

2024년 7월 9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출마를 선언했다 @. 다만, 현실적으로 이재명 대표의 독주체제에서 이재명 대표와 차별화 또한 되지 않아서 많은 득표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거기에 어차피 대표는 이재명이라는 슬로건 아래에서 투표율도 낮게 나오는 것도 김두관 후보 입장에선 악재다.

결국 2012년 도지사 사퇴때부터 시작해서 체급에 비해 부족한 정치력이 시간이 지나도 늘지 않아 결국 자기발목을 자기가 잡아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김두관은 22대 총선때도 자신의 실책으로 지역구를 내주었다는 평가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김경수가 복권되었기 때문에 pk맹주라는 타이틀도 김경수에게 내주게 생겼다.


[1] 큰 형은 파독 광부였고, 셋째 형은 사우디 건설 노동자였다고 한다. 형들의 영향을 받아 군수 시절에 파독 광부 대상 실버타운 독일마을을 조성한 바 있다. [2] 이 당시 사립대학 자연계열 등록금이 연 37만 원이었다.(현재는 약 850만 원) 이를 바탕으로 당시 28만 5천원은 현재의 660만 원 정도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현재는 지속적인 등록금 동결로 물가 대비 등록금 수준이 다소 낮아졌기 때문에 지금과는 꽤 차이가 있는 값이다. 한편 이로부터 5년 전인 1972년에 홍준표 대구시장이 대학에 입학할 당시 고려대학교 첫 학기 등록금이 5만 6천 원이라 연 11만 2천 원 정도였다. [3] 고려대 행정학과를 졸업했으며, 제 16대 총선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제 17대 총선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고양시 일산구 을(현 일산서구 일대)에 출마했다가 낙선하기도 했다. 현재는 평론가로서 주로 활동중. [4] 김두관 외에 민중의당 당원 중 대표적인 사람은 훗날 친이계의 좌장이자 보수정당인 신한국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으로 5선 국회의원 역임한 이재오가 있다. [5] 그래도 꼴찌는 아니었다. 당시 꼴찌는 신민주공화당의 한춘기 후보. [6] 관련 내용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8/06/05/1998060570436.html [7] 이 당시만 해도 경상남도는 TK 못지않은 한나라당의 텃밭이었다. [8] 아이러니하게도 김혁규는 3선에 성공한 뒤 이듬해인 2003년 말 한나라당 탈당과 동시에 경남지사직을 사퇴해버렸고, 이후 17대 총선 출마를 위해 열린우리당에 입당하면서 김두관과 같은 당 소속이 된다. [9] 그러나 이 관례는 박근혜 정부에서부터 깨지게 된다. 김재수 장관 해임안을 박근혜 대통령이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는 해임결의안이 통과된 적이 없었고, 윤석열 정부에서도 통과된 해임결의안을 윤석열 대통령이 전부 받아들이지 않고 장관들을 유임시키면서 현재 시점에서 이 관례는 깨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10] 당시에는 원내총무라 불렀으며, 당대표 내지는 당 총재의 입김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17대 국회에 가서야 열린우리당이 '원내지도부의 권한 강화'를 내세우며 원내총무를 원내대표로 부르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대로 정착되었다. [11] 제18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이자 2014년 핫이슈가 된 그 인물 맞다. 현재까지 남해군에서 배출된 정치인 중 김두관과 함께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검사 출신의 의원으로 남해-하동 지역구를 김두관이 처음 출마한 13대부터 20년간이나 꿰차고 있던 인물이었다. 당은 다르지만 같은 고향 출신이라 그런지 김두관과도 사석에서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장관 해임건의안 제출 때는 한나라당 소속으로는 드물게 반대를 하기도 했다. 자세한 사항은 박희태 문서로. [12] 원래 거창군수였으나 2003년 김혁규 전 지사의 사퇴로 인해 열린 보궐선거에 출마해 경상남도지사에 당선되었다. 김두관이 최연소 민선 지방자치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면, 이쪽은 최연소 민선 광역자치단체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13] 당시는 지역주의뿐만 아니라 참여정부 열린우리당의 인기가 현저히 낮아서 압도적으로 패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당시 광역자치단체장 16석 중 한나라당이 무려 12석을 가져갔으며 열린우리당은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전북지사 1석만 획득하는 데 그쳤다. 하물며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후 전남권 지역정당으로 쪼그라들어 오늘내일하던 민주당(구 새천년민주당)에게도 광주시장과 전남지사 2석을 빼앗기는 등 열린우리당 입장에서는 역대급 참패를 겪은 선거였다. [14] 그나마 수확이 있었다면 자신이 군수를 지낸 남해군에서는 58.9%를 득표해 당선자인 김태호를 더블스코어 차이로 눌렀다는 것 정도가 위안거리다. [15] 참고로 남해-하동군은 전통적인 보수텃밭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무소속으로 출마해 유력인사인 여상규 후보와 겨뤄서 40%를 얻었다. 즉, 김두관 또한 경쟁력있는 유력인사였던 것이다. [16] 창원 출신의 이름있는 행정학자며 이명박 정부 한나라당 18대 총선 비례대표 국회의원 행정안전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로써 이 선거는 전직 행정안전부 장관(김두관 시절에는 행정자치부) 끼리의 대결이 되는 셈이기도 했다. 하지만, 출마할 당시 중앙에서 내려온 낙하산 후보라는 비판을 들었고 나름대로 상당히 분투했으나, 낙선. 통합창원시 아이디어를 낸것도 이분이었다. 2012년에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발탁되어 근무했다. [17] 당시 한나라당 소속의 김태호 경남지사는 이명박 정부의 차기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되면서 일찌감치 3선 도전을 포기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런저런 논란으로 인해 국무총리가 되지 못하고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낙마했다. [18] 실제로 김두관은 서부 경남권인 밀양, 창녕, 합천, 거창, 산청, 통영, 진해를 제외한 전 지역에서 승리했다. 특히 고향인 남해에서는 무려 66%로 낙동강 벨트인 김해보다 더 높게 나왔다. [19] 이 때문에 영남권 시도지사 모임 때 마다 다른 시도지사들과 갈등을 겪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한나라당 소속 시도지사들은 모두 4대강 사업에 찬성한 반면 본인만 홀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20] 경남에는 자리가 없긴 했지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울산광역시 남구에서는 재보선을 치르는 지역구가 있었다. 이 중 부산의 경우는 아무 연고도 없는 김포와 달리 출신 대학과 민주화 운동, 막노동을 했던 연고가 있고, 게다가 지역주의 타파, 결자해지의 의미도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부산에 출마했다면 근소한 차로 이겼을 지도 모를 일이고, 졌더라도 도지사 사퇴라는 병크를 만회하고도 남았을 텐데, 아무리 국회의원이 좋아도 그렇지, 당선이 되어야 본전일 김포 출마를 왜 선택했는지 참으로 의아해지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원래 이수봉이 출마를 준비했던 자리를 뺏어버렸다. # [21] 김포는 한강신도시가 개발된 지금도 다른 지역에 비해 타 지역과의 왕래가 적고 북한과 가까워서 서울에 붙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토박이 비율이 매우 높은 지역이다. 생전 김포에 발조차 들이지 않은 사람이 국회의원을 하겠다고 들어갔던 것에다가 상대인 홍철호 후보는 김포를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토박이들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유정복 인천시장의 측근이라서 애초에 김두관이 당선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22] 굽네치킨 창업주라고 알려졌지만, 정확히는 계육 가공 중소기업인 (주)크레치코 창업주라고 한다. 기업뿐만 아니라 김포 지방의 자잘한 단체 활동을 하기도 했다. 당선된 후에는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로 활동하다가 바른정당으로 옮겼으나 자유한국당에 복당했다. [23] 전부 패배한건 아니고 김포2동, 구래동에선 400~500표 정도 앞섰다. 하지만 해당 지역들은 아파트 밀집 지역에 비해선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았고, 나머지 신도시 지역에선 많게는 2000표 이상 뒤지는 등 참패했다. [24] 2014년 재보선에서 대결했던 새누리당의 홍철호는 김포시 을에 공천받았다. [25] 실제로 더불어민주당이 PK 출마를 원하는 이유가 바로 지역주의 타파이다. 왜냐하면 경남 창원, 양산, 김해 등의 동경남 지역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지만, 김두관의 연고지이기도 한 서경남은 아직도 해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좀 묘한 부분이 동경남이 YS의 통일민주당이 강세를 보였던 곳이라 야권 입장에서는 '빼앗긴 곳' 정도의 위치라면 서경남은 80년대에도 TK와 별 다르지 않은 민주정의당 우세지역이었다.[37] 단, 진주, 통영, 고성의 경우 통일민주당의 우세지역이였다. [26] 그럼 홍철호는 뭐냐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홍철호는 김포 토박이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유정복의 정치적 후계자였다. [27] 물론 양산 을이 김포 갑보다 험지고 갈 명분이야 충분하지만, 본인이 김포시에 당선되면 뼈를 묻겠다고 선언했다 변경한 건, 당 요청보다는 본인의 정치적인 입지를 높이려고 하는거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28] 참고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당이 다 쓰러져가는 와중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선거에 나와서 가장 유력한 후보 중 하나인 안철수를 깨버리고 2위를 찍어서 당을 회생시킨 게 홍준표였다. 문재인은 너무 엄청난 강적이라 그렇다 쳐도 안철수를 이긴 건 대단한 선방인 것이다. 그 걸 해낸 홍준표인만큼 적어도 경상도에서만큼은 엄청난 강적이다. 물론 대선 때는 지지세가 결집한다는 건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경남 서부, 내륙지역은 원래 보수세가 상당하다. 무엇보다 당시 안철수 후보는 여러 구설에 많이 오르내리면서 지지세를 스스로 갉아먹었던 측면도 있었다. [29] 도지사 시절엔 정말 심심하면 의회와 교육감과 반목했다. 심지어는 자당 소속의 도의원들하고도 싸웠다. 특히 무상급식과 관련된 갈등이 상당했다. 당연히 주민들은 "대선에 나간다는 사람이 애들 밥 가지고 싸우냐."는 식의 의견이 많았다. [30] 18대 국회에서 재선 의원으로서 원내대표를 역임한 김진표 의원과 박지원 의원의 사례가 있는데 김진표 의원은 부총리와 국무조정실장 등을 역임, 박지원 의원은 대통령비서실장과 문체부 장관 등을 역임하였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서의 중량감이 웬만한 중진급 의원들 못지 않았으므로 예외를 인정받았다. [31] 이 때문에 지역언론에서는 통상적으로 큰 고비들을 넘겼을때 쓰는 9부능선이라는 표현 대신 7부능선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했다. [32] 당초 수소트램으로 건설을 시도했으나 국토부에서 경쟁력등의 이유로 경전철로의 규격변경을 먼저 제안했다. [33] 이 외에도 4월초 버스 감차이슈도 있었다. 이미 승무사원 수급 문제등으로 운행횟수 감회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예 감차까지 되어버리면서 배차가 30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광역철도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성사시킨 것은 큰 성과였지만 그 외 성과가 없었던 것이 치명타로 작용했다. [34] 양승조는 전직 충남지사이자 민주당의 충남 맏형으로서, 기존 지역구 천안시 을을 고사하고 험지인 홍성군·예산군에 자진해서 출마해 충남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광재도 전직 강원지사이자 민주당의 강원 맏형으로서, 기존 지역구 홍천군·횡성군·영월군·평창군이나 원주시 갑을 고사하고 험지인 성남시 분당구 갑에 자진해서 출마해 대권주자 안철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대권주자로서의 몸값을 올렸으며, 홍익표도 전직 원내대표로서 현역 지역구 중구·성동구 갑을 고사하고 험지인 서초구 을에 자진해서 출마해 강남3구에서 40%대 득표율을 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나마 김두관에게 위안이라면 본인은 패해 지역구를 헌납한 대신 창원시 성산구 허성무가 당선되면서 총선 3번 연속으로 3석( 김해시 갑, 김해시 을, 창원시 성산구)은 그대로 유지하였고 본인 지역인 양산시 을 창원시 진해구, 거제시는 비록 패배했지만 초접전이었고, 양산시 갑은 45% 가까이 득표해 10% 이내로 줄였고, 진주시 갑 지역은 처음으로 42%대 득표를 해 성과는 있었다. [35] 비슷한 사례가 같은당 소속의 성남시 분당구 을 지역 현역의원인데 3선에 실패한 김병욱이 있다. 다만 김두관이나 김병욱은 텃밭이 아닌 준험지에 출마한 거라서 당선 당시에도 본인의 개인기로 승부를 봐서 당선될 수 있던 거고 이번에는 김태호, 김은혜라는 집권여당에서 인지도 높은 상대와 붙어 접전패를 당한 거라 오히려 졌잘싸였기 때문에 정치 생명에 딱히 치명상을 당한 건 아니다. [36] 거기에 현재 민주당 경남도지사 후보로 언급되는 인물로 박종훈 3선 경남교육감, 장충남 남해군수 등과 붙어서 과연 경선에서 경쟁력을 입증할 수 있을것인지도 생각해봐야한다. 진보딱지로 3선 교육감에 당선된 박종훈은 말할 것도 없고 장충남 군수와는 자신의 본진과 겹치기 때문. 여기에 김경수 전 지사가 만약 선거 전에 사면복권되고 저명한 원외인사들까지 가세한다면 8회 지선과 달리 경남도지사 후보 경쟁도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애초에 8회 지방선거가 이상하리만큼 역대 민주당 경남도지사 후보중에서 제일 체급이 낮은 후보들만 경선에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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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부산이 바닷가에 위치하면서 동쪽에 치우져 있는데다 대구의 위치가 경북의 남부에 위치하여 현재까지의 영향으로 봐서 부산보다 대구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경우도 없지 않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