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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로(송)

송나라의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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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로 京東路

1. 개요2. 역사3. 행정구역
3.1. 경동동로(京東東路)
3.1.1. 청주(靑州)3.1.2. 밀주(密州)3.1.3. 제남부(濟南府)3.1.4. 기주(沂州)3.1.5. 등주(登州)3.1.6. 내주(萊州)3.1.7. 유주(濰州)3.1.8. 치주(淄州)3.1.9. 회양군(淮陽軍)
3.2. 경동서로(京東西路)
3.2.1. 응천부(應天府)3.2.2. 습경부(襲慶府)3.2.3. 서주(徐州)3.2.4. 흥인부(興仁府)3.2.5. 동평부(東平府)3.2.6. 제주(濟州)3.2.7. 단주(單州)3.2.8. 복주(濮州)3.2.9. 공주(拱州)3.2.10. 광제군(廣濟軍)

1. 개요

경동로는 송나라의 최상위 행정구역인 로(路) 중 하나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산둥성 일대이다. 후술할 행정구역들의 괄호 안은 해당 송대 행정구역 일대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 불리는 이름들이며, 해당지역의 인구는 모두 숭녕(崇寧, 1102년 ~ 1106년) 연간에 행해진 인구조사에 나온 정보들이다. 여기 적힌 정보들은 《 송사》 85권 지리지1의 정보를 기준으로 한다.

2. 역사

997년 송나라는 지방행정구역 15로를 설치하면서 경동로를 설치하였다. 1074년에 경동로를 경동동로와 경동서로로 분할하였다. 정강의 변으로 송나라가 화북 전역을 상실한 이후 금나라는 이곳에 산동동로와 산동서로를 설치하였다.

3. 행정구역

3.1. 경동동로(京東東路)

지금의 산동성 동부해안지역을 관할했다. 7주 1군을 통치했으며 총 38현을 관할했다.

3.1.1. 청주(靑州)

삼국시대로 따지면 청주병이 징집된 것으로 유명한 청주 북해군 일대로 송나라 시대에도 북해군(北海郡)이다. 진해군(鎭海軍) 절도주로 962년 북해현에 군(軍)을 두어 994년에 진해군이 되었다. 1042년에 경동동로 안무사(京東東路安撫使)가 설치되었다. 95,158호 162,837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6현을 두었으며, 익도현에 치소를 두었다.

3.1.2. 밀주(密州)

본래 방어주로 960년에도 이어졌다가 972년에 안화군(安化軍) 절도주가 되었다가 방어주로 격하되었으며 973년에 다시 안화군 절도주가 되었다. 144,567호 327,304명의 주민들이 살았으며, 5현을 두었다. 치소는 제성현이다.

3.1.3. 제남부(濟南府)

후한 말 삼국시대에 조조가 제남상을 지내던 바로 그 지역이다. 송나라 시대엔 제남군(濟南郡). 흥덕군(興德軍) 절도부로 본래 제주(齊州)였다. 1001년에 임제현(臨濟縣)을 폐지하고, 1078년에 경동동로에 소속되었으며, 1116년에 제남부가 되었다. 133,321호 214,067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5현을 두었으며, 치소는 역성현이다.

3.1.4. 기주(沂州)

삼국시대로 따지면 제갈량의 고향으로 유명한 서주 낭야군이었다. 송나라 시대에도 낭야군(琅琊郡). 방어주였다. 82,893호 165,230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5현을 두었으며, 치소는 임기현이다.

3.1.5. 등주(登州)

동모군(東牟郡). 방어주였다. 81,273호 173,484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4현을 두었으며, 봉래현에 치소를 두었다.

3.1.6. 내주(萊州)

동래군(東萊郡). 방어주였다. 97,427호 198,908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4현을 두었으며, 치소는 액현이다.

3.1.7. 유주(濰州)

후한 말의 청주 북해군 일대이다. 단련주로 청주(靑州) 북해현(北海縣)에 북해군(北海軍)을 세우고 창읍현(昌邑縣)을 설치하였다. 965년(건덕 3년) 북해군이 주로 승격되었고 창락현(昌樂縣)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44,677호 199,549명의 주민이 살았으며 3현을 두었다.

3.1.8. 치주(淄州)

치천군(淄川郡). 군사주였다. 61,152호 98,610명의 주민들이 살았으며 4현을 두었다.

3.1.9. 회양군(淮陽軍)

후한 말의 장수 손견이 승으로 있었고 손권이 태어났으며 유비가 머물렀고 여포가 최후를 맞은 곳으로 유명한 서주 하비가 바로 이 일대이다. 송나라 시대엔 982년(태평흥국 7년)에 서주(徐州) 하비현(下邳縣)에 회양군을 세우고 경동동로에 예속시켰다. 숙천현(宿遷縣)을 회양군에 소속시켰다. 하급주와 동급이다. 76,887호 154,130명의 주민들이 살았으며 2현을 두었다.

3.2. 경동서로(京東西路)

지금의 산동성 서부 내륙 평야지역을 통치했다. 총 4부 5주 43현을 두었다.

3.2.1. 응천부(應天府)

상나라, 송나라의 수도로 후한 말 삼국시대로 따지면 예주 양국 일대이며, 현대의 상추시 일대이다. 부로 승격되기 이전엔 당나라에선 송주(宋州)였다. 송태조 조광윤의 근거지였기에 왕조가 처음 출범한 곳으로 여겨져 남경 응천부(應天府)로 격상되어 북송 시대에 존중받았다. 송나라 시대엔 하남군(河南郡)이다. 귀덕군(歸德軍) 절도부로, 1006년(경덕 3년)에 응천부가 되었고, 1014년(대중상부 7년)에 남경(南京)이 이곳에 설치되었다. 1072년(희녕 5년), 경동로가 경동동로와 경동서로로 분리될 때 경동서로의 관할로 들어왔다. 79,741호 157,400명의 주민들이 살았으며, 명주를 공납으로 바쳤다. 6현을 두었으며, 치소는 영릉현이다.

정강의 변으로 수도 개봉부가 금나라에 함락당한 뒤인 1127년, 송고종이 응천부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건염(建炎)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곧이어 응천부 역시 금나라군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송나라 조정은 바로 철수하여 강녕부로 이주했다. 이후 금나라가 멸망한 단평 연간(1234년)에 이를 되찾아 다시 남경 응천부로 이름을 되돌렸다.

3.2.2. 습경부(襲慶府)

노군(魯郡). 태령군(泰寧軍) 절도부로 부로 승격되기 이전까지는 연주(兗州)였다. 1008년(대중상부 원년)에 도독부로 승격되고 1118년에 습경부가 되었다. 71,777호 217,734명이 살았다. 대화릉(大花綾), , 운모, 자수정, 방풍나물, 복령(茯苓)을 공납으로 바쳤으며 7현을 두었다. 치소는 하현이다. 선원현은 공자의 고향 곡부로도 잘 알려져 있다.

3.2.3. 서주(徐州)

풍패지향(風沛之鄕)으로 유명했던 한고조 유방의 고향 일대이다. 송나라 시대에는 대도독부(大都督府). 팽성군(彭城郡). 무령군(武寧軍) 절도주로 1078년 경동로가 경동서로와 경동동로가 분리될 때 경동서로로 이관되었다. 64,430호 152,237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쌍사릉(雙絲綾)과 고(槹), 명주를 공납으로 바쳤다. 5현을 두었으며 주의 치소는 팽성현이다.

3.2.4. 흥인부(興仁府)

제음군(濟陰郡). 창신군(彰信軍) 절도부로, 1102년 부로 승격될 때까지는 조주(曹州)였다. 1101년에 절도사가 파견되지 않고 흥인군(興仁軍)이라는 군액을 받았다가, 1102년에 흥인부로 승격되고 다시 절도사가 파견되었다. 1108년에는 독부(督府)로 승격되었다가, 1111년에 독부가 폐지되었다. 35,980호 66,931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명주와 두루미냉이의 씨앗(葶藶子)를 공납으로 바쳤다. 4현을 두었으며 치소는 제음현이다.

3.2.5. 동평부(東平府)

삼국시대로 치면 연주 제북 일대로 그 유명한 수호전에 등장하는 양산박이 바로 이 부 서남쪽에 존재하고 있었으며, 송나라 시기 이 일대는 습지대가 위치하고 있었다. 동평군(東平郡). 천평군(天平軍) 절도부로 본래 운주(鄆州)였다. 1042년에는 경동서로 안무사가 설치되었고, 1107년에 대도독부로 승격되었다. 1114년에 안무사가 응천부로 옮겨졌고, 1119년에 동평부가 되었다. 130,305호 396,063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명주, 아교를 공납으로 바쳤으며 6현을 두었는데 치소는 수성현이었다.

3.2.6. 제주(濟州)

제양군(濟陽郡). 방어주였다. 50,718호 159,137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아교를 공납으로 바쳤으며 4현을 두었다. 주 서북쪽에 양산박이 있었다. 거야라는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일대는 과거 거야택이라 불리는 늪지대였다는데, 이 거야택을 근거지로 초한쟁패기에 팽월 진승·오광의 난이 터지기 전까지 이 지역에서 도적질을 하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 일대가 농지지만 송나라 시대에도 아직 개간이 되지 않아 양산박의 도적들이 활동할만한 늪지대와 습지대였다.

3.2.7. 단주(單州)

탕군(碭郡). 960년(건륭 원년)에 단련주가 되었다. 61,409호 116,969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뱀도랏(蛇床)과 방풍나물을 공납으로 바쳤다. 4현을 두었다. 주의 치소는 단부현에 두었다. 한고제가 거병할 때 은거했다는 '망·탕산의 늪[芒碭山澤]'이 바로 이 인근 늪지대를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주전충의 출신지이기도 하다.

3.2.8. 복주(濮州)

삼국시대에는 연주 복양군으로 알려진 지명으로 송나라 시기에도 복양군(濮陽郡). 단련주였다. 치소는 견성현이고 4현을 두었다. 이 일대의 특산품인 명주를 바쳤으며 1,747호 52,681명의 주민들이 살았다.

3.2.9. 공주(拱州)

보경군(保慶軍) 절도주. 본래는 개봉부(開封府) 양읍현(襄邑縣)이었으나, 1105년 이곳에 공주를 설치하고 보경군이라는 군액을 받았으며 동보(東輔)가 되었다. 주로 승격되었을 때 개봉부 고성현(考城縣), 태강현(太康縣), 응천부의 영릉현(寧陵縣), 초구현(楚丘縣), 자성현(柘城縣)을 관할하였다가, 1110년에 공주를 폐지하고 다시 양읍현이 되었으며 개봉부 소속이 되었다. 1114년에는 다시 공주가 설치되었다가, 1120년에 다시 폐지되어 경동서로의 주가 되었고 양읍현, 태강현, 영릉현, 여귀현(餘歸縣)을 속현으로 두었다. 1125년에는 영릉현이 응천부, 태강현이 개봉부의 속현이 되었으며, 자성현을 속현으로 두었다.

3.2.10. 광제군(廣濟軍)

963년에 발운모(發運務)가 설치되었고, 976년에 전운사(轉運司)가 설치되었다. 977년에 광제군이 되었고 조주(曹州), 전주(澶州), 복주(濮州), 제주(濟州)를 속주로 두었다가 다시 현을 설치하였다. 1071년에 군이 폐지되고 정도현(定陶縣)이 조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086년에 다시 광제군이 설치되었다.
[1] 후량 시기의 명칭은 안구현이었고, 후진 시기의 명칭은 교서현(膠西縣)이었으며, 971년에 다시 안구현으로 명칭이 돌아왔다. [2] 1087년(원우 3년)에 판교진(板橋鎭)을 교서현으로 격상시켰고 현령이 임해군사(臨海軍使)를 겸하였다. [3] 1006년인 경덕 3년에 장구현에 청평군(淸平軍)을 설치했다가 1069년에 폐지되고 치소에 군사(軍使)를 두었다. [4] 960년에 홍수로 성이 무너져서 962년에 치소를 손적진(孫耿鎭)으로 옮겼다. [5] 모평현에 유산채(乳山砦)와 염가구채(閻家口砦)가 있었다. [6] 본래 수나라 시기에 도창현(都昌縣)이었다가 폐지되었고 962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7] 본래 당나라 시기에 영구현(營丘縣)이었다가 폐지되었고 건덕 연간에 안인현(安仁縣)을 설치했다가 다시 명칭이 창락현으로 바뀌었다. [8] 1004년에 제양현을 폐지하면서 치소를 이곳으로 옮겼다. [9] 1006년에 선화군(宣化軍)을 설치했다가 1070년에 다시 폐지시키고 치주의 속현으로 만들고 군사의 치소를 두었다. [10] 초구현(楚丘縣)과 함께 공주(拱州)에 소속되었다가 1110년에 다시 응천부의 속현이 되었다. 1114년에는 공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24년에 다시 응천부의 속현이 되었다. 중국 4대서원 중 하나로 알려진 응천서원(應天書院)이 있었다. [11] 1110년 이전까지의 명칭은 하구현(瑕丘縣)이었다. 1111년에 대악진(岱嶽鎮)으로 치소를 옮겼다. [12] 한나라 건봉현(乾封縣)으로 1008년(대중상부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1008년 이전까지의 명칭은 봉건현(乾封縣)이었다. 972년(개보 5년)에 대악진(岱嶽鎭)으로 치소가 옮겨졌다. [13] 1110년 이전까지의 명칭은 공구현(龔丘縣)이었다. [14] 1012년까지의 명칭은 곡부현(曲阜縣)이었다. [15] 1072년에는 진으로 격하되어 선원현에 편입되었으나 1084년에 복구되었다. [16] 제철을 맡았다. [17] 1083년에 설치되어 동전의 주조를 맡았다가 1085년에 폐지되었다. [18] 제철을 맡았다. [19] 1086년까지의 명칭은 원구현(冤句縣)이었다. [20] 1113년에 폐지되었다가 1120년에 다시 설치되었다. [21] 양산박이 바로 이 인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