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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19:57:53

1996년 가요계

1996년 별들의 전쟁에서 넘어옴
연도별 가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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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가요계에 불어닥친 가수들의 컴백 경쟁이 일어난 해. 일명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연도로 이 문서에서 다룰 가수는 솔리드, R.ef, 김건모, 신승훈, 전람회, 윤종신, 클론, 터보다.

2. 현황

당시 연예계 쪽에서는 대형 가수들인 솔리드, R.ef, 김건모, 신승훈이 상반기 동시기에 컴백하는 빅4의 싸움으로 거론되던 시기였다. 전람회 윤종신은 빅4에 비해 대중성이 떨어졌고 클론은 이제 막 데뷔하는 그룹, 터보는 데뷔 앨범부터 대박을 치고, 다음 앨범부터 이제 막 최전성기를 가지던 그룹이었으니.

1996년 봄(4월)은 작년 겨울에 활동하던 가수들이 활동을 끝내고 당시 한국 가요계를 좌지우지하던 슈퍼스타들의 컴백이 줄줄이 이어지던 가요계가 흐름이 바뀔 시기였다.

1996년 이전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1995년 가요계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룰라가 표절로 활동을 거의 못해서 댄스계는 DJ DOC가 점령했으며, 김정민은 '슬픈 언약식'으로 그 해 겨울 많은 1위를 수상했다. 또한 거물급 가수들이 컴백하기 전까지 1995년 일부 발매곡들이 이듬해 5월까지 순위권에 있었다.[1]

1996년 1월 서태지와 아이들의 돌연 은퇴선언으로 가요계의 절대 강자가 사라진 상황이 다음 대권을 차지하려는 뮤지션들의 도전욕구를 자극한 것도 컸다[2]. 한편으로 당시 조선일보 같은 메이저 신문 연예면에서 방송사 PD 입을 빌려 '서태지와 아이들은 냉정하게 말해 은퇴를 해서 후배 가수들에게 길을 열어줘라' 같은 칼럼으로 공격하고 있던[3] 상황이었다. 신인팀이었던 클론을 제외하면 나머지 팀의 경우 각자의 커리어에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인기가 꺾인 팀들도 있다.

앞서 말한 뮤지션들의 앨범 발매 순서는 솔리드 3집(4월 초), R.ef 2집(4월 중순), 신승훈 5집(5월 초), 김건모 4집(5월 중순)이 되겠다. 윤종신의 5집과 전람회의 2집은 4월에 발매되었고, 그 해 여름을 씹어먹은 클론의 데뷔앨범은 5월에 발매되었다. 하반기에는 DJ DOC, 룰라, 터보 등이 컴백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문서를 읽기 전에 가요톱텐의 순위 제도에 대해 알면 쉽게 이해될 것이며 그 중에서도 골든컵 제도가 이 문서의 양념 요소다. 쉽게 말해 5주 연속 1위를 하면 명예졸업(차트 아웃)하는 제도다.

3. 활동 준비

당시 4~5월에 컴백 혹은 데뷔했던 가수들의 이해 관계는 다음과 같으며 컴백 시기 순으로 정리했다.

3.1. 솔리드

김조한, 이준, 정재윤 재미교포 3명으로 이루어진 솔리드는 1993년에 데뷔했지만 큰 인기를 못 얻다가 1995년 봄 그들 최고의 히트곡 '이 밤의 끝을 잡고'가 엄청난 인기를 얻으며 스타가 되었다. '이 밤의 끝을 잡고'는 후속곡 '나만의 친구'가 순위 차트에 진입했다 빠질 때까지 머물렀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성공적인 한 해를 보낸 이들은 1996년 봄을 3집 <Light, camera, action>의 발매 시기로 잡았다.

3.2. R.ef

이성욱, 성대현, 박철우로 이뤄진 R.ef는 1995년에 데뷔했으며 그들의 1집에 담긴 '고요 속의 외침', '이별공식', '상심' 세 곡이 모두 1위를 차지하는 등 스타가 되었고 특히 준수한 외모와 화려한 춤 덕에 소녀팬들의 지지가 아주 높았다. 다만 '고요 속의 외침'과 '상심'이 표절 시비에 휘말리는 등 우여곡절이 있었다.

인기 고공행진을 하던 이들은 연말 지상파 방송 3사 가요 시상식을 끝으로 휴지기에 들어갔고, 1996년 봄[4]을 2집 <Back to the black>의 발매 시기로 잡았다.

3.3. 신승훈

이미 대중음악계의 슈퍼스타였던 신승훈은 1994년 가을 발매된 4집 <그 후로 오랫동안>을 끝으로 긴 휴지기에 들어갔다. 그는 다음 앨범을 1~4집 성공에 큰 역할을 한 소속사 라인음향 김창환, 천성일 등의 도움을 최소화해서 발매하겠다는 방침을 세운 다음 그가 전곡 작사, 작곡, 편곡 및 프로듀싱까지 해 낸 5집 <Shin seung hun Ⅴ>를 1996년 봄에 발매했다.

3.4. 김건모

신승훈과 더불어 이미 대중음악계의 스타였던 김건모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첫인상, 핑계, 잘못된 만남으로 3연속 홈런을 날린 뒤 최다 판매로 기네스북 기록까지 갖게 된 3집 이후, 소속사 라인음향을 나오면서 프로듀서 김창환과 결별한 뒤 솔리드, 김현철이 소속된 서인기획으로 소속사를 갈아탔다.

또한 당시 여러 히트곡을 발매한 최준영과 함께 4집 <Exchange kg. m 4> 작업에 들어갔으며 컴백 시기를 1996년 봄으로 잡았다.

3.5. 클론

경기고등학교 동창인 구준엽, 강원래로 이루어진 클론은 1996년 당시 라인음향 소속 가수들의 작업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술을 전공한 구준엽은 앨범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었으며, 강원래는 박미경을 비롯해 다른 라인음향 소속 가수들의 안무를 짜주는 안무가였다.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한 이 두 명은 김건모가 라인음향을 나가면서 빡친 김창환의 주도로 '타도 김건모'를 기치로 데뷔 앨범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첫 앨범 발매 시기 역시 김건모 4집에 맞불을 놓기 위해 동일한 1996년 봄으로 잡았다.

3.6. 터보

1995년에 발매한 데뷔 앨범 정규 1집 < 280km/h Speed>부터 타이틀곡인 나 어릴적 꿈과 후속곡 검은 고양이가 1위를 여러번 차지했으며, 삼속곡 선택도 10위 권 안에 올리는 등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1996년 3월까지 활동을 마치고 바로 정규 2집 New Sensation 작업에 들어가며 5개월의 공백기간을 가진 후 1996년 8월에 정규 2집 New Sensation을 발매했다.

3.7. 전람회 윤종신

김동률 서동욱으로 이뤄진 전람회는 1993년 MBC 대학가요제에 참가하면서 데뷔했다. 1집 <Exhibition> 발매 후, '기억의 습작'이 성공하고 이들은 동시에 군입대( 방위병)를 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구였던 둘은 예전에 작업한 곡들과 더불어 군생활 틈틈이 작업한 새로운 곡들을 모아서 만든 2집 'Strangers…(Exhibiton 2)' 발매시기를 1996년 봄으로 잡았다.

015B 1대 객원보컬이었던 윤종신은 1993년 2집 <Sorrow>의 '너의 결혼식'( 1992년 발매), 1994년 3집 < The Natural>의 '오래전 그날' (1993년 발매) 그리고 1995년 '부디',"내사랑 못난이" 등을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홀로서기에 성공했고, 동시에 라디오 등지에서의 입담으로 점차 대중음악계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때까지 윤종신의 앨범은 김형석, 정석원 등이 편곡을 맡았다가 한 술자리에서 김장훈의 소개로 유희열을 만났고 그를 음악노예로 참여시켜 5집 <우()>를 1996년 봄에 발매했다.

당시 이 두 뮤지션의 소속사는 1990년대 이른바 뮤지션들의 소굴이었던 '대영 AV'였다.

4. 활동 내역

여기 있는 곡들이 한 달도 안 되어서 1위 후보까지 오른 뒤 1위를 차지하다가 다음 가수에게 1위를 빼앗기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치열한 경쟁이었다.

4.1. 솔리드

마침내 솔리드가 1996년 4월 15일, 3집 <Light, camera, action>을 들고 컴백했다. 타이틀 곡은 '넌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이 노래는 솔리드 경력 중 최고봉인 '이 밤의 끝을 잡고'의 뒤를 잇는 R&B 발라드다. 그리고 그 유명한 "천생연분"이 뒤늦게 터졌다.

한편, 2집 활동 시절과는 달리 김조한 뿐만 아니라 랩을 담당한 이준도 턱수염을 기르고 나와 화제가 되었다.

이 시기 출연과 관련해 갈등을 빚은 SBS를 제외하고, KBS2 가요톱텐, MBC 인기가요 BEST 50 등 지상파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빠른 속도로 순위권에 진입한 끝에 2주 간 정상 자리를 차지했다.

4.2. R.ef

R.ef도 솔리드와 큰 시차를 두지 않고, 2집 <Back to the black>로 활동했다. 이례적으로 더블 타이틀곡으로 '찬란한 사랑'과 '마음 속을 걸어가'를 더불어 홍보하다가 이성욱의 인상적인 내레이션으로 유명한 '찬란한 사랑'을 중심으로 활동을 진행했다.

정적인 솔리드와는 달리 현란한 춤을 주무기로 삼고 활동한 R.ef는 소녀팬들의 인기가 대단했으며 먼저 차트 1위를 차지한 솔리드의 뒤를 열심히 쫓은 끝에 마침내 5월 마지막 주에 가요톱텐 정상 자리에 오른 뒤 강력한 가수에게 자리를 넘겨 주었다.

4.3. 신승훈

4집 활동 후, 1년 6개월여의 공백을 가진 신승훈의 컴백은 당시 가요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든 핫이슈였다. 그는 본인이 가진 음악역량의 진수를 보여주고자 5집 <Shin seung hun V> 전 곡을 작사, 작곡, 편곡했으며 타이틀 곡은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신승훈이 그간 앨범에 담아왔던 애이불비 정서의 대단원에 해당하는 곡으로 신승훈의 1~4집과 발매와 더불어 빠른 속도로 100만장 판매를 훌쩍 넘겼다. 그와 더불어 차트 순위 진입 속도도 무척 빨라서 앨범 발매 후 가요톱텐에서 3주[5]만에 1위 후보가 된 뒤 6월 5일에 정상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후속곡으로 활동했던 맘보풍의 "내 방식대로의 사랑", 발라드곡인 "운명"도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는 당시 굉장히 이례적인 일로 그의 인기를 반증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1위 제조기인 그의 5집도 컴백하고 약 열흘 후, 한때 같은 라인음향 소속이자 90년대 가요계에서 그의 라이벌인 가수에게 다음 주 바로 정상을 내주었다.[6]

4.4. 김건모

김창환과의 결별 후, 그는 당시 솔리드 김현철이 소속되어 있던 서인기획으로 소속사를 옮겼고 4집 <Exchange kg. m 4>를 발매했다. 타이틀 곡은 '스피드'. 이 곡은 당시 의 '작은 기다림', '슬퍼지려 하기 전에' 그리고 룰라의 ' 날개 잃은 천사' 등의 히트곡을 쏟아냈던 작곡가 최준영의 작품이다. (이후에 이정현의 '', ' 코요태의 '순정' 등을 작곡했다.)

당시 활동 의상은 브라스 편곡과 더불어 복고적인 리듬으로 진행되는 곡에 맞춰 중절모와 품이 넓은 스트라이프 정장! 그래서 이 시기 영상들을 유튜브에서 찾아보면 남자 출연자들의 와이셔츠 깃이 재킷을 다 덮는다. 심지어 남철, 남성남의 왔다갔다춤 등으로 곡의 분위기를 한껏 살렸다.

스피드는 가요톱텐에서 3주 뒤 신승훈을 1주 천하로 끝나게 한 다음 승승장구하면서 가요톱텐에서의 큰 역사를 남기기 직전에 등장한 인물은...

4.5. 클론

솔리드, R.ef, 신승훈의 대접전 이후 김건모의 4집 타이틀곡인 '스피드'가 파죽지세로 차트를 장악하면서 승리를 굳히려고 할 때 라인음향의 프로듀서인 김창환은 라인음향을 박차고 나간 김건모를 응징하기 위해 댄스 듀오 클론을 출격시켰다. 데뷔곡은 ' 꿍따리 샤바라'. #

제작사에서는 앨범 발매 전부터 미리 클럽 등지에 데모 테입의 형태로 이 곡을 배포해 두는 등 홍보를 많이 했으며 클론은 현진영과 와와로 데뷔해서 라인음향 소속 가수들의 안무를 짜준 덕에 방송무대에 자주 올랐다. 특히 강원래 박미경 2집에 실린 '이브의 경고'에서 랩과 안무를 담당하면서 인지도를 높힌 뒤 건장한 체격에다 화려한 춤을 무기로 여름느낌 물씬 나는 노래로 활동을 시작한 결과 그 해 전체를 지배하는 히트곡이 되면서 발매된지 3주 만에 1위 후보에 올랐다.

이들은 승승장구한 끝에 4주 연속 1위를 하던 김건모의 '스피드'를 꺾으면서 마침내 '타도 김건모'의 임무를 멋지게 성공했다. 이 날 김건모는 이들의 1위를 진심으로 축하했지만 조용필 이후 정규앨범 4집 연속이자 4년 연속 골든컵 수상, 이선희, 신승훈과 같이 골든컵 통산 2위 기록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무산되어서 아쉬운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7]

사실 김건모의 <스피드>는 클론의 <꿍따리 샤바라> 때문에 대기록이 무산된 것도 있지만 중간에 상반기 결산으로 한 주 미집계가 된 것도 있다.(상반기 결산에서 최고의 곡으로 뽑히긴 했다.) 이는 야구로 따지면 9회말 2아웃 상태에서 클론이 그의 퍼펙트 게임을 저지한 거와 마찬가지. 참고로 1위 제조기인 신승훈, 서태지와 아이들도 3집에서는 1위 수상곡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 뒤 기세를 몰아서 또 다른 경쟁곡인 룰라의 < 3!4!>, DJ DOC의 <여름 이야기>와의 대결 끝에 골든컵의 주인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바와 같이 이들이 1996년 별들의 전쟁의 최종 승자며, 가장 큰 성과는 신인임에도 당대 최고로 인기가 있던 거성들을 제치고 전성기를 누렸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 순간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만면에 미소를 띄었던 사람은 라인음향의 프로듀서 김창환.[8] 더불어 김창환과 라인음향의 마지막 전성기라고도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 <꿍따리 샤바라>가 골든컵을 수상한 게 라인음향 소속 가수의 마지막 가요톱10 1위 수상이었다. 그 후로도 라인음향은 1996년 10월 박미경 3집(<아담의 심리>, <기억속의 먼 그대에게> 수록. 실질적으로는 4집이다.), 11월 노이즈 5집(<성형미인> 수록), 1997년 6월 클론 2집(<도시탈출>, <빙빙빙>, <너의 생일엔> 수록)을 발매했지만 모두 전성기 때의 인기에는 못미쳤고 클론이 <꿍따리 샤바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을 무렵 콜라를 데뷔시켰지만 라인음향 선배 가수들의 인기에는 못 미쳤다.

IMF 구제금융 한파가 휘몰아친 1998년 2월 발매한 신승훈 6집(<지킬수 없는 약속>, <고개숙인 너에게> 수록)이 라인음향의 이름으로 발매한 마지막 정규앨범이었다. 신승훈 6집이 나오기 직전에 가요톱10이 막을 내렸고, 그 해 7월 사맹석 대표이사가 탈세 혐의로 고발당한 이후 신승훈, 노이즈 등이 라인음향과 결별하면서 라인음향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4.6. 터보

데뷔 앨범부터 크게 히트를 치고, 1996년 8월에는 정규 2집 < New Sensation>을 발매했다. 타이틀곡인 " Twist King"은 전작의 검은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말랑말랑한 멜로디로 살짝 동요 느낌이 나는 신나는 댄스곡으로 나오자마자 큰 인기를 끌었다. 뮤비에 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출연했는데, 주영훈 고유의 강한 대중성을 갖춘 멜로디가 이 곡에서 제대로 드러난 덕분인지 유치원생부터 10대, 20대를 가리지 않고 젊은 층과 어린 층에서 대히트했다. 각종 차트에서 1위를 휩쓴 것은 기본, 음악 방송에서도 총 14관왕을 차지하며 활동 첫 주에 순위제를 실시하는 모든 음악 방송에서 1위를 수상하면서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타이틀곡의 열기가 식기 전에 정규 1집의 나 어릴적 꿈과 같은 댄스 계보를 잇는 " Love is... (3+3=0)"를 후속곡으로 선보여 물개춤과 지렁이춤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며 꽂히는 테마 'Uhuhuh'와 농구의 동작을 접목한 손동작이 포인트로, 그저 노래를 듣기보다 자연스레 그 동작을 따라하게 되는 중독성이 있었다. 음악 방송에서 총 10관왕을 차지했고, 2014년 12월 무한도전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서 오랜만에 선보인 지렁이춤 역시 녹슬지 않은 실력을 보여줬던 곡이다. 토토토가의 여파로 2014년 지니뮤직 주간 차트 1위, 소리바다 주간 차트 1위를 달성했다.[9]

두 곡 연속으로 초대박 히트를 친 다음 잔잔한 발라드 후속곡 " 어느 째즈바..."로 활동했다. 제목답게 색소폰 소리로 시작되는 다소 빠른 비트의 발라드 곡으로서 나오자마자 지상파 음악 방송에서 상위권까지 드는 등 이 곡도 히트를 치면서 최고의 댄스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호프집이나 클럽, 돌잔치 등에서 생일 축하 노래로 14번 트랙인 생일 축하곡 (Acid House Remix)가 나오는 경우가 십중팔구로 상당히 많으며, 터보의 최대 스테디셀러 및 메가히트곡이라고 평가 받는 일도 꽤 있다.

여담으로 이 앨범은 김종국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다고 밝힌 앨범이며, 터보의 음악적 색깔이 잡히기 시작한 계기라고 한다. 네이버 뮤직 - AGAIN, TURBO!

정규 2집에서 활동곡을 제외한 상당히 명곡과 인기곡으로 평가 받고 있는 곡은 3번 트랙의 노스트라다무스 (사랑의 예언), 9번 트랙의 평화로운 세상, 10번 트랙의 하늘만큼 땅만큼, 11번 트랙의 상처, 13번 트랙의 지난 겨울이다. 심지어 터보 앨범의 테마를 여는 정규 2집의 Prologue도 다른 앨범의 Prologue보다 터보와 어울리는 예술적인 곡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터보 2집은 버릴 곡이 없다, 모든 곡이 타이틀곡 감이다라는 평이 많다.

4.7. 전람회 윤종신

대형 가수가 득세하는 이 난세 속에서 전람회는 2집 ' Strangers…(Exhibiton 2)'를 발매해 군입대로 인한 긴 휴지기를 마치고 활동에 들어갔다. 타이틀 곡은 '이방인'. # 전람회 특유의 진중한 사운드를 뿜어낸 이 곡은 라디오를 중심으로 서서히 인기몰이를 하기 시작했고, 같은 앨범의 'J's bar에서'와 '10년의 약속' "고해소에서"등도 호응을 얻었다. 무엇보다 이 앨범에 담긴 곡 중 지금까지 인기있는 명곡이 있는데, 다름아닌 쑥맥남들의 고백송인 ' 취중진담'. 댄스음악 열기속에서도 1집처럼 무려 10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

윤종신은 1996년 겨울에 예정된 군입대를 앞두고, 그 해 봄 5집 앨범 '<우()>'를 발매했으며 타이틀 곡은 유희열과 함께 작곡한 ' 환생'. # 1996년은 1970년대 복고무드가 주름잡을 때였다. 그 덕에 슈가팝 스타일의 '환생'은 별들의 전쟁 시기에도 가요톱텐에선 최고 4위, mbc 인기가요 베스트 50에서는 신승훈, 클론과 같이 1위 후보에 3차례 올랐으며 순위권에서도 오래도록 있었다. 당시 다양한 곡의 코러스를 담당하던 조규찬도 한 몫 했고...[10]

더불어 윤종신의 TV 출연도 잦아지게 되었으며 이 앨범은 (이 후 윤종신이 앨범을 만드는 방식이 되기도 한) 앨범 전체를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 구성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앨범은 70만장이라는 판매고로, 윤종신 앨범중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앨범이다.

이들의 경우에는 이른바 치열했던 1996년 가요계에서 본인들의 영역을 단단하게 지켜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며, 특히 대중적인 인기척도인 가요 순위프로그램은 매주 시시각각 노래들의 순위가 오르내리고 있었을 때, 이들의 앨범은 가요앨범판매 시장에서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었다.

솔리드, R.ef, 신승훈, 김건모의 경우 시장 초기 반응이 워낙 좋아서 순식간에 앨범 판매량이 올라갔다면 이들의 앨범은 천천히 그리고 오래 타는 장작처럼 시장을 달구어갔다.[11]

5. 그 후 행보

5.1. 솔리드

1993년에 데뷔한 솔리드의 전성기가 시작된 시기는 1995년 2집 활동 때다. 한국에서 R&B 스타일의 곡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솔리드는 비슷한 스타일의 곡으로 3집 활동을 시작해서 빠르게 정상을 차지했지만 그 성과는 2집과 비교하면 적은 편이었으며 어쩌면 2집의 성공이 독이 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후속곡인 '이제 그만 화 풀어요'가 중박 정도 치다가 활동곡으로 내정하지도 않았던 곡이 입소문을 타면서 지금도 여름만 되면 울려퍼지는 스테디 셀러가 되었다. 그 곡은 다름아닌 ' 천생연분'이며 가요 차트에서 최고 5위까지 가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12]

그 뒤 이들의 인기는 1세대 아이돌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점차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고, 다음 해인 1997년에 4집 앨범 <끼리끼리>라는 곡으로 잠시 활동한 후[13]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가 21년 만에 재결합했다.

5.2. R.ef

5.3. 신승훈

5.4. 김건모

5.5. 클론

1996년 여름에 가요계 차트를 점령한 '꿍따리 샤바라'로 일약 최고 스타가 된 클론은 후속곡인 '난'으로 가요톱텐 1위 후보까지 오르면서 인기를 이어갔으며 1996년 10월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다음 해 여름에 '꿍따리 샤바라'와 비슷한 컨셉인 '도시탈출'을 타이틀곡으로 해서 2집 활동을 했다. 이 때는 이전 스타일의 답습에 그쳤다는 평가가 있었고 전성기를 누리던 임창정과 1세대 아이돌들이 장악한 시기였음에도 슈퍼루키 시절의 인기를 통해 여러 가요 프로그램에서 1위 후보에 여러번 올랐으며 후속곡인 '빙빙빙'도 10위 권 안에 들면서 선전했다. 그 뒤 대만 쪽으로 프로모션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길이 시작되었다.

5.6. 터보

정규 2집 New Sensation으로 최고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소속사에서의 온갖 폭력행위와 노예계약, 살인적인 스케줄이 극에 달했고, 가장 많을 땐 무려 하루에 17개가 있었다고 김종국이 힐링캠프에서 직접 밝혔었다. 이로 인해 소속사와의 마찰 심화로 정규 2집을 발표한지 3개월 만에 활동을 중지했다. 폭력에 견디다 못해 다른 소속사를 찾으려다가 사기를 당했고, 유언비어로 인한 오해가 생겨 어떤 프로그램의 녹화방송 도중에 검·경 수사까지 번져 둘이 함께 6개월 동안 도망치듯이 잠적한 적도 있을 정도다. 동시에 김종국은 소속사와의 오해를 어느 정도 풀고 돌아왔으나, 김정남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해서 복귀를 거부하고 탈퇴했다.

불과 세 달의 활동 기간 동안에 1위를 달성한 곡이 무려 3곡이 나왔다는 사실에도 알 수 있듯 인기도 최절정이었고, 혹사도 최절정이었던 시기였다. 이 당시에는 한 곡으로 세 달 정도 활동했던 것이 일반적이었는데[15], 터보는 3개월 동안 세 곡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1위 차트를 모두 쓸어담고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게다가 3개월 활동 직후 11월에 신곡 10여 곡이 수록된 겨울 캐롤 앨범인 X-Mas Dance Party With TURBO가 발표되었으니 이런 사실만 보아도 얼마나 쉬지도 못하고 철저히 혹사당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혹사가 결국 멤버들의 잠적과 김정남의 탈퇴로 이어졌으나, 짧은 3개월의 단기간 동안 폭발적인 인기를 누린 덕분에 음반 판매량은 15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음악 방송에서도 총 24회 1위를 수상했다.

여담으로 이 앨범은 김종국이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한다고 밝힌 앨범이며, 터보의 음악적 색깔이 잡히기 시작한 계기라고 한다. 네이버 뮤직 - AGAIN, TURBO!

정규 2집에서 활동곡을 제외한 상당히 명곡과 인기곡으로 평가 받고 있는 곡은 3번 트랙의 노스트라다무스 (사랑의 예언), 9번 트랙의 평화로운 세상, 10번 트랙의 하늘만큼 땅만큼, 11번 트랙의 상처, 13번 트랙의 지난 겨울이다. 심지어 터보 앨범의 테마를 여는 정규 2집의 Prologue도 다른 앨범의 Prologue보다 터보와 어울리는 예술적인 곡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터보 2집은 버릴 곡이 없다, 모든 곡이 타이틀곡 감이다'라는 평이 많다.

5.7. 전람회 윤종신

1996년 봄의 조용한 승자 전람회는 사실 예정대로, 팀 해체를 앞두고 있었다. 음악의 길을 걷고 싶어했던 김동률과 본인의 미래를 걷고 싶어한 서동욱은 서로를 위해, 이듬해 초, 3집 <졸업>을 발매한 뒤 공식 해체를 했다. 타이틀 곡 <졸업>이 좋은 반응을 얻으며, 높은 판매고를 올렸다.

1997년 김동률 패닉 멤버인 이적과 함께 카니발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으로 결성해서 활동을 이어갔다. IMF시국과 아이돌 시장속에서도, 앨범은 50만장이상 판매되었다. 카니발 앨범에는 "'거위의 꿈"', <그땐 그랬지>라는 명곡이 있으며, 아이돌이 장악한, 그해 골든디스크 본상까지 수상하였다. 서동욱은 회사원으로 활동하면서 가끔씩 전람회 멤버들과 같이 틈틈히 음악 활동을 했다.

또 다른 승자 윤종신은 <환생>으로 그 해 여름 내내 활동을 이어간 후, 11월에 6집 <육년>을 발매하고 군에 입대했다. 그 뒤로는 프로듀서 활동 뿐만 아니라, 예능, MC에도 뛰어 들면서 활발하게 연예 활동을 하고 있다.

6. 그 외

상기 가수들의 불꽃 튀는 경쟁 뿐만 아니라 1996년에 1위를 차지하거나 차트에서 30위권 내에 장기간 머물렀던 곡들도 수두룩했다.

7. 관련 문서


[1] KBS 가요톱텐 기준으로 1996년 5월 첫째주까지 1995년 발매곡들이 1위를 차지했다. [2] 오죽하면 SM엔터테인먼트에서 신화의 데뷔를 착실히 준비하다가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라는 초대형 변수를 접하고는 이후 이후 지각변동을 일으킬 가요계의 변화를 시장조사하는 차원에서 H.O.T를 먼저 투입했다는 썰까지 나왔다. [3] 서태지와 아이들는 방송권력에 맞서 뮤지션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신장해온데다, 발해를 꿈꾸며, 교실이데아, 컴백홈을 비롯해 사회적 이슈를 진보적 입장에서 다룬 곡을 다수 내며 진보 진영에서는 희망으로, 반대로 보수진영에서는 공공의 적으로 떠오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서태지 죽이기'라는 용어가 언론의 사회면을 장식했을 정도. [4] 1집 곡인 <상심>이 1996년 초까지 순위권에 있었다. [5] 가요톱텐 컴백 기준으로는 2주. [6] 참고로 신승훈은 가요톱텐에선 김건모와 천적 관계인데, 김건모와 같이 1위 후보에 올랐을 때 1996년 6월 첫째주에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으로 1위를 차지한 게 유일하다. [7] 다만 뮤직뱅크에서 "미안해요"로 골든컵을 수상하여 어느 정도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8] 참고로 이들은 박미경의 <이브의 경고>에서 피처링으로 참여했을 때 DJ.DOC의 <머피의 법칙>과 겨룬 적이 있었다. [9] 타 가수 1위 경쟁곡은 Apink의 최대 히트곡 LUV EXID의 대표곡 위 아래였다. [10] 사실 엠넷 가요베스트27이라는 프로그램에서 2주 연속 1위를 한 적이 있지만, 케이블 방송에다 마이너한 프로그램이라서 그런지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참고로 가요톱텐에서 <부디>로 3위까지 간 게 최고 기록이며 그 뒤 21년 만에 좋니로 지상파에서 1위를 최초 수상했다. [11] 실제로 음반/카세트 판매량과 방송 출연을 기준으로 순위를 집계하던 뮤직박스 차트에서 윤종신은 7주 연속 3위 70만장, 전람회는 19주 연속 10위권 100만장이라는 성적을 기록하며 롱런했다. [12] 컴백 당시에는 댄스곡인 '해피엔딩'을 활동곡으로 잡았다. [13] 솔리드가 4집을 발표한 게 1997년 4월이었는데 이들이 해체될 때까지 KBS 가요톱10에서는 단 한번도 솔리드 4집곡을 소개한 적이 없었고 30위 권에도 단 한번도 들지 못했다. [14] 신승훈 6집이 나온 때는 가요톱10이 종영된 직후였다. [15] 서태지 등장 이후로 한 곡으로 활동하는 시기가 짧아지기는 했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3달 지나서 차트에 진입하는 사례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심하면 5~6개월까지도 한 곡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특히 93년 12월에 발표된 부활"사랑할수록"은 다음 해 여름이 되어서야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발표한지 8개월이 지나서 첫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6년 당시에는 대체로 한 곡으로 3개월, 길면 4개월 정도가 일반적인 상황이었고, 199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한 곡으로 2개월, 2000년대 중반에는 한달 반 정도를 소비했다. 게다가 2000년대 초반까지는 음반 시대였기 때문에 후속곡 활동은 거의 필수였으므로 실제 한 앨범으로는 더욱 오래 활동했다. 지금과 같은 활동 패턴은 대 아이돌 시대와 음원 시대가 열린 200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16] 슬픈 언약식(11번 - 가요톱텐 골든컵 수상, TV가요 20 3번, 인기가요 베스트 50 3번), 마지막 약속(6번 - 가요톱텐 1번, TV가요 20 2번, 인기가요 베스트 50 3번), 애인(9번 - 가요톱텐 3번, TV가요 20 2번, 인기가요 베스트 50 4번). [17] 당시 상대인 영턱스클럽 <정>에게 10대를 제외한 모든 세대에서 우세했음에도 14표 차의 근소한 차로 1위를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