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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5 01:58:29

황미나(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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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너캐 작가 본인
1. 개요2. 출판 만화 시절
2.1. 순정만화계의 대모
3. 웹툰 태동 이후4. 작품 활동
4.1. 제1기4.2. 제2기4.3. 제3기4.4. 이후 작품4.5. 기타
5. 수상 경력6. 논란 및 사건사고
6.1. 드라마 제작사에 대한 표절 의혹 재기
7. 여담8. 외부 링크

1. 개요

대한민국 만화가. 순정만화 작가로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김진과 함께 80년대 한국 순정만화계의 부흥을 이끈 선구자이자 한국 만화계의 핵심 중 하나.

2. 출판 만화 시절

1961년 2월 1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age(1961-02-19)]세) 젊은 시절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80년 <이오니아의 푸른 별>을 잡지 < 소녀시대>[1]에 발표하면서 데뷔했다.

70년대 일본 순정만화의 서사극 스타일을 이어받으면서도 그런 스타일을 한국적인 정서로 승화시켜서 80년대 이후 한국 순정만화의 흐름을 개척하고 확립한 작가이다.

그러나 데뷔 초기만 해도 일본 순정만화의 표절작들에 상대적으로 밀리는 상황이었으며, 출판사의 압력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일본 작품을 베낀 만화를 그린 적도 있다. 데뷔작인 '나의 꿈나무'조차도 카와 아키라(1950년생) 원작만화인 '기와지붕의 파도'를 표절한 만화였다. [2]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꾸준히 자신의 오리지날 서사극 스타일을 밀고 나갔고, 굿바이 미스터 블랙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마침내 당대 최고의 순정만화가로 자리잡는다. 다음 작품인 불새의 늪도 큰 인기를 얻었다.

서사극 스타일로 인기를 얻는 와중에도 황미나는 먼 이국의 이야기가 아닌 당대 한국의 이야기를 담고자 시도하며 <너의 이름은 미스터 발렌타인>을 그렸고, 더 나아가 한국의 현실 속에 방황하는 청춘을 그려낸 작품인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를 내놓는다. 하지만 <우리는 길 잃은 작은 새를 보았다>는 검열제 속에 가위질과 삭제로 난도질당한 채 남겨졌고, 이로 인해 황미나는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슬럼프에 빠진다.

<다섯 개의 검은 봉인>을 보물섬에 연재하며[3]다시 자신을 가다듬은 황미나는, 남성향 액션물인 <무영여객>과 성인 취향의 단편인 <상실시대>를 그리며 방향 전환을 꾀한다. 이후 소년지인 <보물섬>이나 <아이큐 점프>로는 <녹색의 기사, 태백권법 수퍼트리오, 파라다이스>를, 순정만화 잡지인 <르네상스>에는 기존 스타일을 이은 작품인 <엘 세뇨르>를 연재하며 다양한 시도 속에 여러 작품을 그렸다.

순정만화에서는 드물게 무협에도 관심이 높아 무협물도 자주 연재한 적이 있다(ex. 취접냉월) 본인이 쿵후도장을 다닌적도 있다. 이소룡의 영화나 기타 홍콩 액션영화에도 조예가 깊은 편이다.

록 음악에 조예가 상당히 깊다. 르네상스에 음악 칼럼을 쓰면서 한국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뮤지션들을 소개한 일도 있고 락밴드를 소재로 한 메이저에서 마이너까지 같은 작품을 그린 일도 있다. 주인공이 레드 제플린 같은 유명 락 밴드의 티셔츠를 입고 나오거나 작품 중에 음악 이야기가 종종 나오기도 한다. 프로그레시브 록 평론가인 성시완과 친분이 있어 그의 잡지에 제쓰로 툴 이언 앤더슨 일러스트를 그려줬고 시완레코드의 로고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작품 중에 음악 얘기가 심심찮게 나온다. 성시완과의 인연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핑크 플로이드를 비롯한 각종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들도 상당히 좋아하는 듯.

순정 만화에서는 드물게 다작을 했다가 한 때 몸이 아파서 다작을 중단하게 되었다. 바로 레드문을 그릴 때였는데, 다작하던 와중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에게 "죽고 싶으면 그렇게 활동하라"는 경고를 받고 다른 작품은 죄다 중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연재하던 알 게 뭐야도 갑자기 중단했다.

일본에도 진출하여 모닝에 <윤희>, <이씨댁 이야기>를 연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웹툰에서도 연재 중. 한 때는 롤플레잉 게임 ' 벨피어기스 나이트'의 일러스트레이션를 맡은 적도 있었는데, 그 게임은 대차게 욕만 먹고 묻혔다. 전체적인 평은 '일러스트레이션이 아깝다'. 청소년용 교재의 일러스트도 담당하신 바 있다.

2.1. 순정만화계의 대모

이미 황미나를 모르는 새로운 독자층으로 세대교체가 되고 예전 그녀의 만화를 읽은 세대 역시 '옛날에 내가 봤던 옛날 작가'로 기억하는 상황에서 후술된 섣부른 표절제기 논란으로 이미지가 추락한 지금 시점에서는 쉽사리 연결짓기 힘든 이미지이지만, 황미나 하면 "순정만화계의 대모"로 소개됐다.

이 호칭은 단순히 황미나 팬덤끼리에서만이 아니라 만화계 전체에 공인된 호칭으로, 매체 인터뷰나 TV 출연이 있을 때에도 역시 이렇게 소개됐다.

순정지 소년지를 오가는 거의 유일한 작가였는데 이런 커리어가 대단한 이유는 당시 소년지와 순정지의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정작가가 소년지에 대뷔하게 되면 순정지 경력이 인정받지 않는다. 즉 신인급으로 취급한다는 것, 그런 차별 때문에 양쪽에 다 연재했던 작가는 거의 드물었다. 황미나는 양쪽에서 인정받았기 때문에 특별하다. 아이큐점프에서 연재한 <파라다이스>와 <슈퍼트리오>는 제법 인기도 많았다.

1997년경 청소년보호법 문제로 인한 만화 때리기가 있었을 때, 길거리에서 목에 을 쓰고 걷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다. 이게 뭐가 대수냐 싶겠지만 1997년은 여자가 길거리에서 튀는 행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던 시절이고, 뭣보다 책상 앞을 떠나는 그 순간 경제활동이 올스톱되는 만화가의 작업 특성상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만화가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다. 책상 앞을 못 떠나는 문제에 있어서 소위 공장만화가들은 논외이긴 하지만 그런 만화가들은 성인들을 대상으로 한 시장에서 일을 하다보니 애초에 검열이나 저작권 도용과는 무관한 경우가 많다.

또 2000년 초, 청소년보호법 문제와 대여점 논란이 한창 일 때에 '자유의 검은 리본'이라는 심볼이 만화계와 팬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심볼 역시 황미나가 제안해서 만화계에 퍼진 것.이라고 퍼뜨렸다. 이 사실과 심볼을 퍼뜨린 사람은 박무직이었는데, 사실 이 심볼과 그 개념을 만든 것 역시 박무직 본인이었다. 표현의 자유와 저작권에 대한 의지와 인식이 만화계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황미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본인의 작품이나 사이트를 통해 이 심볼을 알린 것. 실제로 황미나라는 '만화계의 대모'[4]가 제안했다는 점 때문에 이 심볼은 널리 퍼지고 곳곳에서 쓰였다.[5] 2006년에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도 지냈다.

1981년, 황미나는 진주시에 살던 김귀자라는 팬에게 "만화를 그리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라는 팬레터를 받는다. 둘은 편지를 몇 차례 주고받았고 어느 날 팬이 습작 원고를 보냈는데, 황미나가 바로 안면있던 출판사 사장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리고 서울에 아무런 연고도 없던 그녀에게 무조건 올라올라고 했다. 팬은 습작원고를 들고올라왔고, 그 이후로도 가끔씩 올라와 황미나의 집에 일주일씩 머무르며 원고를 보여주었다. 그 만화가 지망생이 바로 북해의 별로 데뷔한 김혜린.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도 워낙 붙어있다 보니 당시 만화계에는 이 둘의 커플설까지 진지하게 돌았고 황미나의 문하생이라는 오해까지 있었던터라 김혜린은 어쩔수없이 독립하게 된다.

이미라 역시 데뷔 전에 황미나에게 습작과 편지를 보내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황미나에 칭찬에 용기를 얻은 이미라는 얼마후 바로 데뷔를 했다.[6]

그외 서정희, 서타영, 성미경, 오경아, 이명신, 이정애 등의 만화가들이 황미나의 문하생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3. 웹툰 태동 이후

2009년부터는 첫 웹툰 진출작 보톡스를 연재했다.

작가가 젊은 세대를 의식하여 '게임'이란 소재를 쓰고있는데, 평이 엇갈린다. 출판 만화 대모의 이미지가 옅은 어린 세대의 신규 유입 독자들을 포함해 다수의 독자들에 의해 연출과 그림체가 옛날 방식이고 촌스럽다는 이유로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원래부터 여성 팬층은 두터웠던 만큼 당시 여성에게는 상대적으로 인기와 함께 호평을 유지하고 있었다. 엇갈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보톡스 자체가 남성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는 별로 없는 편이었고 철저하게 여성향으로서의 순정만화 구성을 따르고 있기 때문. 그러나 작품 자체의 스토리와 흡입력은 대가답게 매력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과거 출판만화를 그리던 시절에 비해 원고료가 적어지면서 상대적으로 어시스턴트를 덜 쓰거나 안 쓰게 된 탓인지, 그림의 질도 상당히 하락했다. 캐릭터만 보자면 크게 무리는 없으나 3D를 활용한 배경이 문제. 구도나 시점이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붙여넣어서 거슬린다. 물론 웹툰 중 시점이나 구도에 맞지 않는 배경을 여러번에 걸쳐 재활용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나, 황미나의 경우 인물 자체가 실사에 가까운데다 과거 뛰어난 데생력으로 찬사를 받던 작가라 이런 실수가 더욱 도드라지게 됐다. 출판 만화 시절 호평을 받던 부분은 독특한 패션 센스나 개그 센스도 시대가 바뀌면서 촌스러움으로 인식되어 부정적 평가에 일조했었다.

2019년부터는 만화 작업을 중단하고 처음 도전하는 분야인 웹소설로 '에덴'을 계속 연재중이다. 삽화도 본인이 직접 그린다. 2021년 완결되었다.

4. 작품 활동

황미나의 팬덤은 그녀의 작품 활동을 일반적으로 3기로 구분하고 있는데, 지금은 접속되지 않는 황미나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시기 구분의 편의를 위해 작품 일람은 이 3기 구분을 그대로 따르며, 이후는 별도로 '제4기' 등의 구분 없이 '이후'로 표기한다.

4.1. 제1기

4.2. 제2기

4.3. 제3기

4.4. 이후 작품

4.5. 기타

5. 수상 경력

6. 논란 및 사건사고

6.1. 드라마 제작사에 대한 표절 의혹 재기

2010년 12월 14일 자에는 네이버 측과의 상의도 없이 휴재 공지를 내걸면서 어느 드라마의 표절 논란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표절 논란을 제기받은 제작사 화앤담픽처스 측은 법적대응 입장을 밝혔다. 기사

이와 관련해 완전히 다른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과 자신의 작품을 엮은 황미나에 대해 억지에 불과하다는 의견이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부분은, 시크릿 가든의 원래 기획안에는 남녀의 몸이 바뀌는 판타지 소재 외에도 황미나의 작품처럼 온라인 게임과 현실을 오가며 남녀주인공이 만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장혁이 캐스팅 됐다가 하차하고 현빈 하지원의 캐스팅이 확정된 상황에서도 남녀의 몸이 바뀌는 소재에 대한 강조 보다는 온라인 게임이라는 소재가 주요 후킹요소로 홍보되었다. 물론 초기기획안과 작품 자체가 동떨어지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시크릿 가든>의 경우 '초기'기획안이 아니라 불과 드라마 방영 약 1달 전까지 이런 내용으로 홍보되다가 갑작스럽게 후킹 요소로 밀고 있던 요소가 바뀐 셈이라 조금 특이한 경우라고 해석할 여지는 있다. 실제로 "한편 <시크릿 가든>은 게임과 현실을 오가며 벌어지는 사건과 사랑을 그릴 멜로판타지드라마다."라는 표현이 제작사 측 보도자료를 근거로 작성된 다수의 기사에 등장했었기 때문이다. 단, 방영 직전까지 남녀의 몸이 바뀐다는 주요 후킹요소를 일부러 감추었을 가능성은 있다. 남녀의 몸이 바뀐다는 특징의 존재와는 별개로 황미나가 기존에 표절 의혹을 재기한 근거인 게임 소재에 대한 해명은 별도로 이루어진 바가 없다.

제작사 측에서 법적대응 운운하기는 했지만 소송은 없었다. 또한 드라마 시크릿 가든과 웹툰 보톡스 사이의 유사성은 이미 드라마 기획안이 수정되어 게임 소재가 완전히 제거된 시점에서부터 없어진 것과 다름 없기 때문에 황미나 작가 측도 오해했다면서 더 이상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거대한 기업을 상대로 법적 다툼을 벌이는 것이 힘들어서 숙이고만 것이 아닌가하는 이견도 있었으나, 황미나는 이미 몇년간의 소송과 항소 끝에 연극 점프와의 소송[8]에서 합의를 이끌어낸 전적이 있기 때문에 법적 다툼 자체에 두려움을 느껴 피했다고 볼 수는 없다. 시크릿 가든의 경우 가장 큰 부분인 '이야기의 유사성'이 변경되었고 황미나 작가 측도 이를 인지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갈등을 빚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표절 재기 자체는 일련의 소동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당시 출판만화에서 웹툰으로 한국 만화 시장의 거점이 이동하는 시점에 잘 적응했다고 볼 수는 없던 황미나였기 때문에, 이 소동을 계기로 출판만화 시절의 대모 황미나를 기억하지 않는 다수의 어린 만화 독자, 즉 웹툰 독자들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는 결과가 되었다.

7. 여담

8. 외부 링크



[1] 황미나는 식당에서 <이오니아의 푸른 별>을 그리다가 <월간TV> 관계자의 눈에 띄어 발탁돼 미술팀에서 일을 한다. 만화와 관련없는 일이었던 터라 계속하지 않고 그만뒀는데, 황미나의 실력과 <이오니아의 푸른 별> 원고의 존재를 기억하던 <월간TV> 측이 새로 <소녀시대>를 창간하면서 황미나를 다시 불러들여 데뷔시킨 것 [2] 그 시절 그러지 않은 한국 만화가들은 거의 없었다. 싫으면 만화가 때려쳐야 했다. 덕분에 이두호, 김수정 같은 유명 만화가들도 어거지로 베낀 만화를 그렸고, 그렇게 해서 받은 돈은 겨우 입에 풀칠할 수준이었다. 결국 김수정은 분개하여 때려치고 세일즈맨을 잠깐 하기도 했었다. [3] 원래 <어깨동무>에서 <은빛태양 금빛달>로 시작했던 만화긴 하다만. [4] '순정만화계의 대모'이기는 하나, 남성대상 만화를 그리는 여성만화가는 적었기 때문에 만화계 전체에서 봐도 황미나 말고 대모 위치에 있을만한 만화가가 없었다. [5] 이 심볼은 어느 정도 쓰이다가 '대여점 논란' 자체가 시들해진 뒤 '만화계' 자체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독자들이 거의 사라지게 되고, 박무직이 사실상 한국만화계를 뜨면서 더이상 쓰이지않게 됐다. [6] 사실 이미라는 고등학생 시절 출판사를 찾아갔다가 너무 어리다고 거부당한 전적이 있다. 그 일로 시기만 엿보다가 황미나의 칭찬이 계기가 돼 다시 출판사를 찾아간 것으로 보인다. [7] 1977년에 만들어진 <초분>이라는 30분짜리 다큐멘터리에선 한국 산지와 숲을 찍었음에도 발전이 없는 모습만 찍었다고 방송 금지되었다. 그런데 이게 한국 방송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텔레비젼 다큐멘터리 은상을 받아버리면서 당당하게 방영할 수 있었고 감독은 검열하던 자들에게 이렇게 따지기까지 했다. "당신들은 책이나 모든 것을 부잣집처럼 그리고 발전이란 이름으로 첨단도시가 아닌 것을 금지하는데 신경쓸 동안, 해외에선 아름다운 자연과 한국이란 나라를 다시 보고 있었다!" (1997년 중앙일보 기사) 이러니 빈민가를 그린 만화야 오죽할까... [8] 왁더글덕더글의 이야기, 캐릭터 이미지, 인물 동작 등을 도용했다는 것이 주요골자. [9] 그리고 황미나가 삥땅을 쳤다는 것을 안 할머니는 황미나를 두들겨 패면서 '너 그 돈으로 과자 사먹었지!'라고 했단다. 설마 어린 애가 술을 마실 줄은 몰랐다는 것.. [10] 심지어 술 잘마시기로 소문난 이현세마저도 패배를 선언했다고 한다. 이현세 왈. '정신은 어찔한데 황미나의 구두소리만 또각댈 때의 그 심정을 아세요?' [11] 황미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가 왜 표절작까지 억지로 그려야 했는지 이걸 봐도 알 수 있다. 그녀의 회고를 보면, 화실도 없어서 식구들과 한방에서 지내면서 만화를 그리다가 어린 조카들이 애써 그린 그림을 망치는 경우까지 겪었다고 한다. 그녀가 생활이 펴진 것은 만화가 아닌 사둔 아파트 값이 올라서였다. 그리고 일본 진출로 받은 돈이 더 많고, 온라인 게임 레드문의 로열티로 매달 들어온 돈으로 이제서야 만화를 여유롭게 그리게 되었다고...... [12] 솔직히 지나친 술과 담배도 한몫 했겠지만... <레드문> 이후론 담배도 끊고 술도 엄청 줄이셨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