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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23:54:46

헤르만 괴링/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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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시절과 나치당 협력기2. 업적3. 실책
3.1. 스페인 내전에서의 양다리3.2.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3.3. 공중 보급 실패3.4. 병력 낭비3.5. 자만과 허세3.6. 지휘부의 내분 주도3.7. 사치와 부패
4. 범죄
4.1. 게슈타포 창설과 장검의 밤4.2. 강제노동4.3. 유대인 이주부 설립 지시4.4. 나치 이념 교육4.5. " 최종 해결" 지시
5. 전쟁 말기의 행적과 퓌러 자리 요구6. 재판7.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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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젊은 시절과 나치당 협력기

판사였던 아버지가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의 초대 총독으로 발령이 난 탓에 뉘른베르크에 있던 대부 에펜슈타인 백작[1][2]의 성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이때 행실이 별로 좋지 않아 어머니에게 위대한 사람이 되거나 범죄자가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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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전용 포커 D.VII 전투기에 탑승한 괴링의 삽화
독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육군 항공대 전투기 조종사로 종군해 에이스 조종사 집단 '제 1 전투비행단(JG1)'[3]에 소속되고, 비록 과장 의혹이 제기되긴 하지만 총 22대의 격추 기록을 세워 독일군 격추 순위 56위를 기록했다. 이 공적으로 유명세를 날려 철십자 훈장 이상의 권위를 자랑하는 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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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 르 메리트 훈장을 단 괴링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잔류를 인정받은 엘리트 장교 4천명 중 하나로 뽑혔으나, 거부하고 제대를 택했다. 전시 복무한 장교 특례로 뮌헨 대학에 입학이 허가되었으나, 마찬가지로 거부했다.[4] 이후 덴마크 스웨덴의 민간 항공업계를 전전하다가 남편과 별거 중이던 카린 폰 칸초프라는 귀족 여성을 만나 약혼하고, 얼마 뒤 뮌헨으로 돌아와 결혼했다.

귀국 후 뮌헨 대학에서 경제학, 역사학을 공부하며 국수주의 성향을 길러나갔는데, 당시 뮌헨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관심을 가져 1922년 가을 히틀러와 대면하게 된다. 이 한번의 만남으로 괴링은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당에 입당해 돌격대 재편성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증된 인사인 괴링은 상위 간부로 승급하게 된다.

당내 좌파인 약사 출신의 그레고어 슈트라서와는 달리 경찰 출신의 법학 박사 빌헬름 프리크와 함께 당 내 우파를 이끌었다. 또한 괴링은 집안과 인맥을 활용해 귀족, 기업가들에게 고액 기부를 얻어내 당 운영 자금과 히틀러의 사치 비용을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이런 출신성분 탓에 당내 좌파인 슈트라서 형제와 괴벨스에게 잦은 비판을 받았다.

당 활동 초기에는 정치, 행정적 영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돌격대 친위대, 게슈타포 창설에도 깊이 관여했다. 특히 게슈타포는 나치 정권 초기 내무부 장관 시절 괴링 본인이 직접 프로이센 정치 경찰[5] 내의 반나치 인사들을 숙청해가며 대개조해 만들어낸 단체다. 이 외에도 프로이센 주 총독, 국회의장, 재무부 장관, 국가수렵어업청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초기 나치당의 국가 권력 장악에 기여했다.

이 때 괴링은 독일 경제의 구원 투수인 국가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를 만나 설득해 친나치 인사로 전향시킨다. 이때 샤흐트는 괴링을 '겸손하며 영리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이후 샤흐트는 괴링의 소개로 나치당에 입당했고, 훗날 경제 장관 등 요직에 오르나, 아이러니하게도 괴링과의 불화로 인해 사실상 쫓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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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나치 돌격대 지휘관이 된 괴링
1923년, 뮌헨 폭동 때 히틀러와 함께 행진하다 경찰의 사격으로 총알이 고환 맞아 심한 부상을 입고[6], 대부 에펜슈타인 백작이 있는 오스트리아로 도주했다가 부인의 친정인 스웨덴으로 이동해 치료를 받았다. 이때 쫓기는 신세라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했고 극심한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맞은 진통제용 모르핀에 중독되면서 성격이 괴팍해지고, 자기 관리도 소홀히하게 되어 비만이 된다. 그러나 고환 한 쪽만 다쳤기에 성기능 자체는 상실하지 않았다.

이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 의해 사면령이 내려지자 1927년 독일로 귀국해 나치당 활동을 재개한다. 이때 괴링은 사교계에서 활발하게 나치당을 선전하고, 간부들과 정재계 인사들을 서로 소개시켜 당-상류층 간의 인맥 구축을 위해 노력했다. 이덕에 독일 유수의 기업과 인사들이 하나둘씩 나치당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회담까지 갖게 된다. 괴링이 없었다면 나치당의 급속한 성장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현대 역사학계의 주류적인 의견이다.

1928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1930년 히틀러의 공식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에는 부인이 사망했다.

1932년 7월 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이 35%의 득표율을 얻어 1당이 되고, 괴링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첫 회의에서 당시 수상인 프란츠 폰 파펜이 대통령 재가를 받은 의회 해산안을 가져오자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역으로 파펜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시켜 파펜 내각을 무너뜨린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 내각이 성립되자 괴링은 독일 정무장관 겸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직에 임명된다. 괴링은 돌격대, 친위대와 재향군인 조직 철모단 단원들을 보조경찰로 채용해 프로이센 주 나치화 작업을 시작한다. 그러던 2월 27일,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벌어지자 극좌파 성향의 루베라는 인물을 범인으로 단정 짓고, 이를 명분 삼아 계엄령을 선포해 좌파 세력 탄압에 나섰다. 그렇게 잡혀간 좌파 성향 인물들은 괴링이 설립에 관여한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괴링의 결혼식 모습. 독일 공군의 신형 폭격기들까지 동원되어 매우 성대히 치러졌다.
1933년 4월 10일, 프로이센 주 주지사로 임명된 괴링은 프로이센 주 경찰의 정치경찰 부문을 독립시켜 게슈타포를 창설한다. 5월에는 항공장관, 임야 및 수렵청장을 겸직해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된다. 1935년 3월, 재무장 계획으로 신설된 공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4개년 계획을 입안해 스스로가 철강재벌을 겸하여 군비 확장을 추진한다. 4월 10일에는 전직 배우인 에미 존네만과 재혼해 딸 에다[7]를 얻게 된다. 1938년, 안슐루스가 일어나자 히틀러를 대신해 오스트리아 총리 쿠르트 슈슈니크를 겁박해 독일군 주둔을 수락케 한다.

2. 업적

그는 전설적인 전공들을 무수히 남긴 루프트바페(Luftwaffe)의 창설 주역이었다. 2차대전 중후반기에 그가 저지른 여러 실책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는 전략적 능력이 전무했던 루프트바페를 전략적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군대로 개편하였고, 이후 이렇게 개편된 공군이 전쟁 내내 어떤 활약을 했는지 감안한다면 그의 군사적 재능과 독일 국방군에 대한 공헌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작 운용에 있어서는 전략적 실책들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공군의 양성과 정예화 그리고 그 질적 수준을 유지시키는 데는 엄청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를 보면 전략적 식견은 미흡했을 지언정, 그 이상으로 최고 지휘관에 걸맞은 인사능력과 조직가로서의 능력이 출중했던 인물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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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 시절의 헤르만 괴링
단순히 군사적 능력만이 아니라 경제와 행정 등 관료로서의 수완도 상당했다. 그는 경제 개발 4개년 계획에 깊숙이 관여하여 독일의 만성적 실업 해결 및 초기 군수경제 체제 설립에도 기여했다. 괴링은 1937년에 라인메탈을 위시하여 루르 지방에 포진해 있던 부실한 민간 철강기업들을 대규모로 인수합병하여 '국가공업 헤르만 괴링(Reichswerke Hermann Göring)'을 설립했다. 헤르만 괴링은 민간 기업에 의해 경제성이 낮다고 판단되어 개발되지 않았던 잘츠기터 지방의 광맥을 본격적으로 개발하여 철광 채굴 및 제련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시 이들 국가에 있던 중공업 기반을 흡수해 1941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 기업이 되었으며, 거의 50만에 달하는 인원을 고용했다. 괴링은 이 기업을 결코 소유하거나 이 기업을 통해 이익을 얻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일부 자금을 유용했다는 의심을 사긴 했다. 오늘날 주식회사 잘츠기터(Salzgitter AG[8])라는 철강기업의 전신이 바로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이다.

3. 실책

그러나 오스트리아 합병 때까지의 화려한 경력과 달리 뮌헨 협정 체코슬로바키아 합병을 기점으로 당내 영향력을 상실해 나갔다. 결정적으로 괴링 본인의 약물, 마약 중독 때문에 후반기로 갈수록 오히려 독일 공군은 물론이고 독일군 전체의 발목을 잡았다. 전쟁이 끝난 후 약물 중독만 치료해줬을 뿐인데 연합군의 생각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여준 걸 보면 약물 중독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전쟁 당시와, 전쟁 종료 이후의 평가에서도 괴링에 대한 증언은 거의 일관성을 띄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전후에는 전범이나 패전, 전후 밝혀지는 여러 실책 등으로 인해 평가를 달리하거나,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나오는데, 루프트바페 출신이나 그외 독일군 부서들조차 " 에이스 출신에 공군을 주도한 괴링은 유능하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약물 중독에 빠지기 전의 괴링이었다."고 말했을 정도.

그래도 자신이 직접 꾸린 최정예 공군은 나름대로 꾸준히 신경 써가며 관리하기는 했다. 하지만 전쟁 후반으로 가면 갈수록 독일 공군은 서부전선에서 영국 공군과 미 육군 항공대를 상대하면서 소모되는 상황이 되었으나 그는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 했고 결국 망해버린다. 물론 괴링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고 하더라도 생산력 자체가 미국이 압도적이라 딱히 답이 나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3.1. 스페인 내전에서의 양다리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독일 국방군의 육해공군을 콘도르 군단이라는 이름을 붙여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 국민군 측으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때 독일 공군 수장이라는 괴링이 적군인 공화국에게도 군수 장비를 팔아먹었다. 비밀 유지를 위해 본인 관리 하의 라인메탈사의 그리스인 조력자와 협력해 서류를 조작하여 그리스를 거쳐 공화국에 장비를 팔았으나, 들켰다.

결과적으로 이 일을 포함한 여러 복합적 요인[9]으로 인해 스페인은 추축국으로 참전하지 않았다.

3.2. 영국 본토 항공전 패배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괴링은 전격전에서 육군만이 각광을 받은 것에 불만을 가졌고, 영국을 무력화 시키는 데에는 공군만으로 충분하다고 호언하며 영국 폭격을 단행했다. 그러나 공격 부대는 독일 공군이 재건 당시 지상군의 작전을 근접 지원하는 공중 포대의 컨셉으로 진행했기 때문에 가진 것은 항속거리도 짧고 방어력도 탑재량도 충분치 않은 중형 폭격기와 단거리 전투기가 대부분인데다[10][11], 영국군의 체계적이고 집요한 요격을 받는 바람에 귀중한 공군 전력의 상당부분을 영불해협과 런던 위에서 잃어버린다. 단순히 유럽 본토에서의 전투만 생각했으면 저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테지만, 문제는 전선이 너무 늘어나서… 그 외에 실책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것으로는 근접 호위를 지시한 것이 있는데, 폭격기 조종사들이 불안하다고 징징거리고 괴링이 근접 호위를 지시하는 트롤링(…)이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이는 철저하게 전투기 조종사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며, 폭격기가 날아가야 하는 거리가 멀어지면 선 제압 방식의 호위로는 폭격기를 효과적으로 호위하기가 어렵다. 물론 영국 남동부 정도면 선 제압 방식으로도 그럭저럭 호위가 가능하지만 런던쯤 가면 근접 호위가 필수적이다. 당연히 공군 전체를 지휘하는 괴링의 입장에서는 전투기 조종사들의 입장 뿐 아니라 폭격기 조종사들의 입장도 고려해야 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호위할 필요가 있으므로 근접 호위를 지시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보기는 애매하다. 애당초 괴링은 폭격기 호위를 항속거리가 긴 Bf110에 넘기려고 했는데 야들이 영국 공군의 밥(...)이 되어버려서 고육지책으로 그나마 영국 요격기를 잡을 수 있는 Bf109가 호위를 맡게되는 삽질을 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충분한 전투 능력을 갖춘 장거리 전투기 없이 영국 공군을 얕보고 무리하게 Bf110을 투입한 것이 실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더욱 희한한 건 전투기 숫자가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전투기 생산속도조차 신경쓰지 않았다. 그 결과 매월 영국의 전투기 생산 숫자는 독일의 것을 한참 추월해서 마침내는 보유 전투기 대수조차도 영국에 밀려버린다. 이런저런 끝에 공군은 공군대로 날려먹고, 결국 영국 상륙 계획( 바다사자 작전)까지 중단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이는 괴링만의 잘못은 아니다. 괴링이 저런 판단을 한 것은 조종사들의 격추 보고와 초기 영국 전투기 숫자에 의한 것인데, 조종사들의 격추 전과 자체가 과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국은 전투기를 생산하는 데 사활이 걸려 있었기에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투기 생산량이 독일의 2배에 달했고, 손실량을 거의 보충하고 있었던 반면에, 독일은 전투기 손실 자체는 영국보다 적었으나 손실량을 보충량이 따라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게다가 이후 독일이 런던 폭격에 집중하면서 전투기 생산 공장이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자 이 격차가 더더욱 벌어진다. 그래도 이런 문제등의 교훈으로 괴링은 보다 엄격한 전과 확인 체계를 갖추라는 지시를 내려서 보다 정확하게 전과를 집계할 수 있었으니 이때까지는 그럭저럭 멀쩡했다고 볼 수 있다.[12]

애당초 바다사자 작전은 영국의 월등한 해군력으로 인해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작전이었다. 영국에 상륙한 독일군이 영국 해군에 의해 빠르게 고립된다는 이유로 괴링을 제외한 독일 군부에서도 바다사자 작전은 그리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이유 때문에 괴링이 폭격만으로 영국을 굴복시키겠다고 큰소리 칠 때 크릭스마리네의 최고사령관인 에리히 레더 제독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어차피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륙전인데 괴링이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3.3. 공중 보급 실패

공군의 최고 지휘자로부터 스탈린그라드에 관한 소식을 거의 또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우리 동료들 사이에서, 괴링에 관한 얘기를 할 때마다 이런 말이 나왔다.
"뚱땡이는 입이나 닥치고 있어야 한다."
- 요아힘 마티스
롬멜: 적은 항공전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들은 미제 철갑탄으로 아군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괴링: 그건 불가능하네! 미국인들이 만들수 있는건 면도칼 밖에 없다고!
롬멜: 존경하는 독일 제국 원수 각하! 각하께서 면도날이나 만든다는 미국은 영국과 함께 북아프리카에서 면도칼이 수염을 밀어버리듯이 공군으로 우리를 쓸어버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각하께서 말하시는 물자를 하늘에서 비오듯 뿌리고 다닌다는 위대한 제국 공군은 지중해 어디 있는 겁니까? 제국 원수각하, 우리에게는 그 면도칼이 필요합니다!!!
-1942년 9월 볼프샨체에서 열린 롬멜의 알람 엘 할파공략 실패 보고자리에서 [13][14]

독소전쟁의 분수령이라 할 스탈린그라드 전투 때 공군 참모총장 한스 에쇼넥은 히틀러에게 6군에 대한 공중보급이 단기간이면 가능하다는 보고를 했고, 괴링이 이를 보증하면서 6군이 철수 시기를 놓치는 데에 일조한다.

당시 독일군에게는 스탈린그라드 근방을 통틀어 사용 가능한 활주로가 단 한개 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활주로도 스탈린그라드로부터 800km 이상 떨어져있는 데다가[15], 소련군의 기습으로 함락되기도 하는 등 제대로 된 보급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활주로였다. 즉, 애초에 이 주장 자체가 이미 말이 안 되는 허언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적 대공포가 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6군이 버티면서 소련군을 붙들고 있는 동안 A집단군은 간발의 차이로 소련군의 포위를 피해 후퇴할 수 있었다. 만약 6군이 바로 빠졌다면 A집단군이 6군 신세가 되었을 것이니 결과적으로는 어느 쪽이나 망하는 거지만 말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전에 있었던 데먄스크 전투에서 분전하던 독일 육군에게 공군이 필사적으로 물자를 지원해줘서[16] 소련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던 것도 괴링의 자만심을 부풀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데먄스크와 스탈린그라드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는 상식에 가까웠기 때문에 괴링이 바보라는 것만 확실하게 만들어 주었다. 당장 데먄스크 전투 당시 고립되었던 병력은 10만 명 정도였고, 스탈린그라드에 비해 활주로 등 항공기 수송에 필요한 시설도 그럭저럭 갖춰진 편이었다. 하지만 스탈린그라드에 고립된 병력은 33만 명이란 대병력이었고, 이 대병력이 필요한 물자를 기후가 나쁜 지역에서 활주로 하나만 갖고 항공 수송으로 보급하겠다는 건 21세기 현재의 기술력으로도 사실상 불가능하다.[17]

차라리 공중 보급 대신 제공권을 확보해서 폭격이라도 해주는 게 그나마 6군을 도와주는 거였다. 애초에 공군에서 참모나 부하들이 불가능하다며 다 안 된다고 말렸지만 가뜩이나 연합국의 폭격 때문에 욕을 처먹고 망신당하던 괴링이 점수 좀 따보려고 스스로 낸 작전이라고 한다. 게다가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나마 보급이라고 가져다 준 것도 콘돔, 철십자 훈장, 철모 등 쓸모없는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했고, 당장 필요한 식량, 탄약, 의약품, 방한복이 그만큼 덜 보급됐다. 이것도 상식적으로 육군 병참 장교가 파견돼 보급 순위를 정해야 하는 과정을 괴링이 공군이 알아서 하겠다며 거부해 저지른 참사였다.

스탈린그라드에서 6군이 항복한 날 제국원수의 개인 수첩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었다고 적혀 있다. 게다가 영국 공군에 의해 북아프리카 제공권을 빼앗겨서 궁지에 몰린 롬멜에게 공군이 지원할 수 있으니 버티라고 말했고, 롬멜의 반응은 당연히 이뭐병.

3.4. 병력 낭비

당시 기준에선 시대를 앞서나간 전차로 중무장한 공군 부대인 ' 헤르만 괴링 기갑사단'도 그러한 공명심과 경쟁심의 산물이다. 원래 이 부대는 공수부대였고, 게다가 처음부터 독일군의 공수부대는 육군 소속이었던 것을 공군이 뺏어온 것[18]인데, 이것 역시 괴링의 전공에 대한 욕심 때문. 대외적으로는 '작전상 항공부대와의 원활한 연계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그걸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 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대전 초 육군의 눈부신 공적에 침을 흘리던 중, 나름대로 육상전투에서 활약을 하던 공수부대를 더 키워서 휘하에도 '기갑사단을 만들고 싶은' 괴링의 욕심과, 안 그래도 크레타 전투 이후 대규모 공수작전 능력이 제한이 걸리면서, 지상 수송으로 투입되는 일이 많아진 공수부대 덕분에 가뜩이나 부족한 전차 및 각종 기갑장비를 육군에게서 가져와 창설했다. 그리고 창설만도 모자라서 지속적인 지원을 펼친 결과, 창설 당시부터 사단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 데다가 전쟁 말기에 가면 2개 사단을 거느린 기갑군단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괴링의 '공군 기갑사단' 개념 자체는 현대이나 제 2차 세계대전이나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뭔가 괴링 이니까 뻘짓 아니냐는 편견이 생길수도 있지만, 이미 독일군은 Me 323 수송기로 대전차자주포를 수송하는데 성공했고, 이걸 굳이 태클 걸기에는 영국군의 공수전차 테트라크가 있으며, 소련군 역시 공수전차에 관심 많았으며, 미군 역시 전후 공수전차에 관심이 많았다. 연합군이 마켓 가든 작전 실패 원인 중에는 대전차 화력 부족으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 이다. 오죽하면 현대전에서도 수송기 체급을 키워서 주력전차를 수송한다는 개념이나, 헬리본 전술에도 중장비를 견인해서 수송하는 개념까지 생겼을 정도이며, 현대전에서도 여전히 공수부대가 강력한 기계화 장비들을 가지고 있는건 전쟁에 도움이 된다는게 입증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공수군을 적극 운영하는 러시아군 역시 전쟁초에 공수부대로 전격전을 선보이며 러시아 육군이 도착도 하기 전에 공수군으로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까지 밀어붙였지만, 정작 도착했어야 하는 육군은 현대전에서 마켓 가든 시즌2가 벌어지면서 공세는 실패해 공수군은 결국 후퇴를 해야 했다.

그만큼 현대의 실전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공수부대가 운영하는 기계화사단은 공수 준비를 철저히 한다면, 적진에서 상당한 시간을 버틸수 있고, 그만큼 이득을 가져올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헤르만 괴링의 공군기갑 사단 개념은 당시의 기술적 문제가 심각했을 뿐 괴링의 전공에 대한 욕심 치고는 개념 자체는 시대를 앞서간거나 다름 없었기에 공군기갑사단의 규모의 비대함, 그로인한 보급 문제 같은 요소를 논하는게 아닌, '공군 기갑사단'의 존재 자체를 비난하거나 부정하는 쪽이 오히려 전략과 전술을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는 문제를 가진게 된다.

크레타 섬 전투로 인해 육상으로 투입되는 게 공중에서 투입되는 일보다 많아진 독일 공군에게 중전차 등의 기갑장비로 중무장한 기갑사단을 거느리게 되었다는 점은, 공수를 위한 경량화 기갑사단이 아닌 어차피 공중투입 못 한다고 육군의 중기갑사단으로 편성한 것, 현대에도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공군에서 경기갑이나 장갑차와 중화기로 무장한 부대를 운용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당시 기준에서는 생소한 신개념인 공군 기갑사단의 존재는 육군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 했다.

그나마 모체인 공수부대가 원체 정예부대인데다 훈련, 장비도 충실하여 이런 괴악한 상황 하에서도 여러 전투에서 상당한 활약을 펼쳤다. 오히려 이런 정예부대에게 중기갑 사단을 쥐어준다는 것 자체가 꽤나 탁월한 선택이기도 했다. 당장 러시아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전선에서 이들은 연합군을 떡실신시켰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단위 부대 중 연합군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힌 부대라는 수식이 붙어있을 정도다. 그러나 전공과 별개로, 이 부대의 존재는 육군 공군의 반목을 심화시키는 원인만 되었다.

게다가 강하기갑사단은 전공을 잘 세우는 정예 병력이라서 육군이 불만을 참아넘겼지만, 공군 자체에 인가 병력보다 더 많은 잉여 병력이 놀고 있는 것을 육군등 여러 곳에서 지적하니까 인원을 포기하기 싫어서 무늬만 지상사단인 다수의 공군 야전사단을 창설하였다. 이들 부대는 공수기갑사단처럼 활약조차 하지 못했으며 아예 육군으로부터 경멸이나 받으며 러시아 전선에서 안 그래도 88mm 대공포 사용 문제로 자주 다투는 육군과 공군사이의 반목을 심화시켰다. 심지어 육군의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의 회고록에서는, 그는 어느 날인가 공군 제복에 총 맨 녀석들이 번쩍번쩍한 MG42 같은 최신 새 장비로 온몸을 두른 채[19] 의기양양하게 전선으로 향하며 자기 부대 옆을 지나가는 걸 봤는데, 다음날 총이고 장비고 다 패대기치고 도망가는 꼴을 보고 "공군 야전사단은 소련군용 무기 셔틀이나 마찬가지"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심지어 소련군이 저들에게서 노획한 공군 복장으로 아군 행세를 하며 스파이질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아, 아군에게 총 맞고 죽거나 다친 공군 장병이 여럿 나왔다고 한다. 비단 그의 기록 말고도, 육군이나 SS의 회고록 중 이들을 좋게 평가하는 내용이 실린 것을 찾기 힘들다. 이들에 대해서는 문서 참조.

3.5. 자만과 허세

괴링은 자국의 수도 베를린은 완전히 안전하다며 큰소리를 쳤는데, 이른바 "마이어 발언"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허풍은 그의 가장 대표적인 허장성세로 알려져 있다.
Ich will Meier[20] heißen, wenn auch nur ein feindliches Flugzeug über Deutschland erscheint!
(만약 한 대의 적 항공기라도 독일에 나타난다면, 나를 '마이어(Meier)'라고 불러도 좋다!)
(1939년 9월[21], 루프트바페 장병들 앞에서 연설하던 중)
뭐라고? 미국은 전투기나 폭격기를 만들지 못해! 미국 놈들은 면도날이나 만들 줄 아는 놈들이라고!
북아프리카 전역의 알람 엘 할파 공략 과정에서 제공권을 미•영 연합군에게 내주었다는 에르빈 롬멜의 보고에 한 말

사실 괴링이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만 했던 게 독일 공군은 됭케르크 철수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이전까지는 큰 패배를 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 도중 영국군이 베를린을 진짜로 공습해버리는 바람에 체면을 구겨야 했다.[22] 물론 그 다음부터 사람들은 기꺼이 괴링을 ‘마이어 아줌마’라고 불러주었다. 나중에 독일 베를린에서는 공습 사이렌이 울리면 사람들은 이를 ‘마이어의 사냥 나팔소리’라고 비웃었고 연합군 폭격기 조종사들은 "우리 마이어 아줌마한테 인사나 하러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야사에 따르면 언젠가 괴링이 공습 때문에 베를린의 한 방공호에 숨을 일이 생겼는데 자신을 진짜로 마이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23] 이 일을 계기로 동물원 대공포탑을 위시한 대공포탑들이 독일 곳곳 요충지에 건설되게 된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전선의 제공권을 미•영 연합군이 장악했다는 롬멜의 보고에 괴링은 미국의 기술력은 그저 면도날을 만들 수 있을 뿐이라고 일갈했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이후로도 괴링의 전설적인 삽질은 계속되었다. 증가 연료탱크를 탑재한 P-47 선더볼트 등의 호위 전투기들이 주간 폭격 작전의 호위에 등장하자 독일 공군은 더욱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전투기대 총감이던 아돌프 갈란트가 사냥을 나가던 괴링에게 기차역에서 직접 에센 상공에서 격추된 P-47 선더볼트에 대해 보고했으나 괴링의 첫 반응은 " 그럴 리가 없다."였다. 갈란트가 "해당 전투기의 잔해는 에센 시에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괴링은 이어서 "프랑스 상공에서 격추당했으나 장거리를 활공해서 에센에 추락한 것이다."라고 현실 부정의 망상을 읊어대다가 한 성질하는 갈란트가 계속 맞서자 결국 혼자 쳐서 "에센에 연합군 비행기는 없었다고! 알아듣겠냐!!"라고 소리 지른 후 기차를 타러 나가버렸고, 괴링의 뒤통수에 대고 갈란트는 "명령이라면 알겠습니다. 각하."라고 이죽거렸다고 한다.

후에 P-51 머스탱 전투기가 베를린 상공에 출현하자 " 우린 이 전쟁에서 졌다."라고 절망했다고... 이제야 그걸 아셨수?

정작 이 일이 일어나기 전 1942년 10월 4일의 수확감사제에서는 이런 연설을 했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군수산업이 늘어놓은 천문학적인 숫자에서 얼마간의 위안을 얻고 있다. 물론 미국의 군수산업을 얕보는 건 아니다. 미국인이 기술적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거두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들이 속도가 빠른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것도 알고 있다. 라디오도 그들의 업적이고, 면도기도 있지, 하지만 제군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미국 놈들이 허풍쟁이라는 것이다.[24]
출처:갈란트, 처음과 마지막.(die ersten und die letzten)

저 위의 면도기 발언은 괴링의 말도 안 되는 공군의 항공보급 발언에 빡친 롬멜에게 한 것으로, 1942년 9월 알람 엘 할파 전투 패배 이후, 롬멜이 북아프리카 전선의 유지를 위한 공군기와 전차 지원을 요청하며, 미국이 영국에 전차와 전투기를 대량으로 지원해 주고 있다고, 히틀러에게 보고하자 괴링은 상기한 면도기 드립을 치며, 패배주의 정신을 버리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롬멜은 "존경하는 제국원수 각하! 미국은 그 면도기 만드는 기술을 전투기와 전차에 적용하여 우리 병사들을 썰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그 면도기가 필요합니다!!![25]라며 씹어버렸다.

상황이 이 따위다 보니 당시 정계에서는 괴벨스 박사의 바지[26]가 괴링의 몸집에 맞는 날에 전쟁이 끝날 것이다라는 유머가 떠돌 정도였다.[27] 근데 농담성 진실이지만 괴링은 전쟁이 끝나고 수감되면서 규칙적인 생활과 약물중독 치료로 정상 체중으로 돌아갔다.

3.6. 지휘부의 내분 주도

나는 전쟁은 끝났다고 아주 냉정하게 말할 수 있다. 대원수는 계속 모르핀에 의지하고 있었다. 회의가 길어지고 모르핀 기운이 떨어지자 그가 회의 도중에 잠이 드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그게 바로 공군 총사령관의 모습이었다!
- 공군 항공대장 헬무트 푀르스터, 1945년 5월
2차 대전 전부터 독일 해군 항공모함 ' 그라프 체펠린 함'을 만들려고 계획하고 있었고 실제로 어느정도 건조되었다. 그러나 항공모함에는 함재기가 필수적인데, " 제3제국의 모든 날개 달린 것은 (날아다니는 새까지도) 모두 내 관할[28]"이라고 하던 괴링은 처음에는 선뜻 함재기를 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조종사와 함재기 관련 요원이 전부 공군 소속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했어도 Bf109E를 함재기 버전으로 개량한 Bf109T를 해군에게 제시하여 해군이 신형 함재기를 얻을 수 있게 배려했다.[29] 해군 총사령관이었던 해군원수 에리히 레더 제독은 이 조건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체펠린 건조 자체가 이미 너무 늦어진데다가 크릭스마리네 수상함대의 졸전에 실망한 히틀러는 아예 해군을 해체할 기세로 화를 냈고, 결국 완성되지도 못하게 된다. 나중에 그라프 체펠린은 소련 해군에게 멀쩡하게 접수되어 연습용 표적으로 쓰인 뒤 어뢰를 맞고 침몰하게 된다. 그리고 레더 제독이 물러날 때 히틀러에게 총통께 부탁드리는데, 해군의 적인 괴링에게서 해군과 제 후임자(해군 원수 칼 되니츠 제독)를 지켜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30]

사실, 이 함재기 건 이전부터 전함이나 순양함 등에 탑재되는 정찰 및 연락용 Ar 196의 조종사와 승무원, 정비 인력 등도 모두 해군 항공대가 아니라 공군 파견대가 맡는 등 괴링의 집착은 대단했다. 그나마 1942년부터 지상에서 발진하는 장거리 초계기 나 전투기 등의 항공기를 해군에 내주긴 했다.

같은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 공군 장관 이탈로 발보도 괴링 못지 않게 해군의 건함 계획을 반대하여 말아먹었다. 그리고 저 둘만 아니라 연합국도 해군과 공군간의 알력은 존재했다고 한다.[31] 일본은 파벌 싸움으로 아예 공군이 두 개였다.

대표적으로 몇가지 언급하자면 전쟁 후기 독일 공군의 패배 원인을 자신이 아닌 파일럿들에게 돌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파일럿[32]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 각 전투비행단마다 파일럿 한명씩을 차출, 비겁죄로 군사재판에 회부하겠다는 10분의 1형스러운 해괴한 방법을 동원하려 했고 이는 곧 갈란트를 필두로 한 전투비행단장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33] 체면만 구기고 말았다.

그러나 괴링은 이때 아돌프 갈란트에게 엿을 먹은 것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고, 후에 Me 262의 전폭기 전용과 관련하여 갈란트가 또 괴링의 의견에 반대를 표명하자 갈란트를 전투기대 총감직에서 자르고 일선 전투비행단장으로 날려버렸다. 이러자 독일 공군 전체가 들고 일어나는 꼴이 되어버렸고, 서부전선 전투기 부대를 이끌던 귄터 리초브 공군 항공 대령이 선임으로서 총대를 매고 괴링과 담판에 나섰다. 여기서도 리초브 항공대령은 "내가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한 사실을 부정하는 거냐?"라는 괴링의 말에 "각하는 강력한 독일 공군을 건설하셨으나 이후 낮잠만 주무셨습니다."라고 시원하게 질러버렸다.[34]

이에 빡친 괴링이 이 항명사태에 관련된 사람을 전부 반역죄로 처형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으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결국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고, 이미 중장 계급이었음에도 일선 전투비행단장으로 나간 갈란트는 독일군의 현존 슈퍼에이스들을 죄다 불러모아 독일군의 두번째 제트전투기 운용 전투비행단을 창설하였으니, 이것이 전설의 전투비행단 JV-44다. 이 비행단의 전설적인 면모는 해당 항목을 참조하자.

3.7. 사치와 부패

모든 뛰어난 연구 자료와 문화 자산을 확보해서 독일로 옮겨오는 것이 우리 국가사회주의에 주어진 당면과제다.
- 1941년 괴링이 공포한 법령
예술품에 대하여 소유욕이 굉장했다고 한다. 약탈품 중에 히틀러가 점찍은 그림들도 대원수 전용열차로 차떼기해서 자기 저택으로 가져가는 용감함을 보여서 히틀러를 격분시키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위작 작가 한 판 메이헤런에게 속아서 위조품 명화들도 한가득 산 적이 있다고 한다. 더 황당한 것은 그 사기꾼한테 준 거액도 죄다 위조지폐였다.

또 프랑스와 여러 나라 미술관에 있던 많은 문화재 밀반출에 기여했다. 악명이 자자했기에 소련이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을 당시 레닌그라드에 위치한 에르미타주 박물관[35]를 방문했던 인사들은 빈정거리며 "괴링이 좋아라 여기로 오겠군!"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미 주요 전시품들과 중요 전시품들은 예카테린부르크로 피난을 마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많은 문화재들이 쌓여있었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의하면, 계속된 군사적 실책으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명예욕과 감투 자리에 집착하고[36] 축재와 미술품 사냥에 열을 올렸는데, 전쟁 중에 축재한 방법으로 미술품 중에 가치가 떨어지는 하품을 나치당 관구장들한테 비싼 값에 팔아먹었고,[37] 비밀리로 이탈리아를 통해 여성 화장품이나 스타킹을 밀수해서 암시장에 팔아먹었다고 한다. 값이 떨어지면 자기 수입이 주니깐 가격표까지 정하는 꼼꼼한 사업 경영 능력을 선보였다고 한다. 물론 제국원수 체면에 직접한 건 아니고 1차대전 당시의 전우를 시켜서 했다. 부하들한텐 선심 쓰듯 나눠주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 이전에도 그의 부패는 이미 악명높았는데, 항공부의 예산을 뚝 떼다가 자기가 낼름 먹어치우는 횡령을 저질렀음에도 누구 하나 항의하지 못했다.[38] 게다가 본인의 생일인 달에는 더 가관이었다. 나치당 의원들한테 묻지도 않고 세비에서 선물비를 공제했다고 하며, 그러고도 생일 선물까지 따로 받아먹었다. 이 때문에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에 따르면 나치당 의원들에게 비호감 인사로 받아들여졌고, 그 누구도 괴링의 생일파티에 참가하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사치 생활을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실크로 만든 군복이다. 당시에도 지금도 비단은 꽤 비싼 데다, 그것으로만 만들면 옷이 좀 흐물흐물해지는 등의 이유로 비단으로 남성용 정장을 100%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고, 주로 안감과 셔츠, 넥타이에 넣거나 울에 혼방해 쓰는 정도인데, 이 인간은 그 비싼 실크를 100% 써서 만든 공군 정복을 입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도 회의 중에 약에 취해서 쿨쿨 자빠져서 자는가 하면, 4개년 경제계획의 책임자임을 뜬금없이 내세워서 경제장관 발터 풍크와 프리츠 토트, 알베르트 슈페어 등 군수조직 책임자들과 충돌하는 기행까지 벌였다. 거기까진 그렇다 쳐도 독일에 강철이 모자라는 상황이 오자 어디서 주워 듣고는 콘크리트로 기차를 만들자[39]라는 황당한 제안을 슈페어에게 했다고까지 하니,[40] 말그대로 쓸데없는 명예욕과 물욕으로 점철된 속물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4.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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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링의 군사적 실책이나 갖가지 일화들, 그리고 그가 일부 유대인 인사들을 비호한 사례들은 화되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 똥별 마이어'의 이미지는 그저 단편적인 일부분일 뿐이다. 오히려 그의 범죄 행위는 그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져 있지 않거나 매우 추상적인 것이 사실이다.

실제 헤르만 괴링의 진짜 모습은 국가 경제를 위해 노예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친위대와 게슈타포의 설립 및 홀로코스트 정책의 수립에 깊게 관여한 대표적인 나치 관료이자, 전쟁 범죄자다.

4.1. 게슈타포 창설과 장검의 밤

괴링은 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시절인 1933년 프로이센 주정부 산하에 나치 당원들로 채워넣은 새로운 경찰 조직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악명 높은 비밀국가경찰, 즉 게슈타포이다.

이 덕분에 괴링은 장검의 밤 당시에도 개입하여 수많은 불법적 학살과 숙청을 진두지휘할 수 있었다. 괴링 역시 에른스트 룀의 권력 기반이었던 돌격대를 해체하여야 한다는 데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미약했던 친위대의 독립과 성장에 조력하였다. 결국 장검의 밤 사건에서 괴링은 친위대 총수 힘러와 그 휘하 정보기관인 보안대의 하이드리히를 도와 룀과 그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인 1934년 4월 게슈타포의 관할권은 내무부 장관 힘러가 쥐게 되며, 직접적으로는 국가보안본부 소속이 되어 하이드리히가 장악한다. 그리고 룀이라는 경쟁자를 제거한 친위대는 나치당과 히틀러의 가장 충실한 개로써 노예 노동과 절멸수용소, 학살부대 운용 등 주요 범죄 행위를 주도하는 집단으로 성장한다.

4.2. 강제노동

1937년 세워진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Reichswerke Hermann Göring)' 사는 독일 재무장 정책과 군수공업에 핵심적인 기능을 하던 업체로, 괴링이 4개년계획부 전권장관으로서 주도적으로 설립했다. 이 회사는 본디 루르 공업 지대 일대에 기반한 철강업체였으나 나치 독일이 팽창함에 따라 체코와 우크라이나, 발트 3국 등 점령지의 공장들 역시 공격적으로 합병하였다. 2차 대전 당시 유럽 내에서 가장 거대한 기업이었다.

일차적인 목표는 라인란트 일대의 기업들이었다. 잘츠기터 제철소를 중심으로 여러 업체들이 합병되었으며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의 제철 및 채광업체인 ÖAMG도 인수되었다. 그 외에도 독일 군수산업체 라인메탈, 룩셈부르크 제철소 ARBED, 체코의 폴디 제철소와 비코비체 제철소, 루마니아의 갈라치 조선소 등이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피난할 수 없던 소련의 제철소들, 가령 드네프르 제철소 등 독일 지배 하의 여러 중공업 업체들까지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의 자회사가 되거나 간접적인 지배 관계에 들어왔다.

헤르만 괴링 국가공업은 노동수용소들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인력을 공급받아 유대인을 비롯한 이민족들과 정치범들을 그야말로 노예처럼 부려먹었다. 가령 약 30만 명이 노역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린츠 일대의 마우타우젠-구젠 강제수용소는 그 일대에 위치한 국가공업 소속 회사들에 노예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가스실이나 집단 총살에 비해 임팩트가 낮을 뿐 이 역시 노동을 통한 절멸(Vernichtung durch Arbeit)에 해당한다. 수많은 유럽 시민들이 헤르만 괴링 공업사에서 벌어진 강제노동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4.3. 유대인 이주부 설립 지시

1938년 수정의 밤 사건이 벌어진 이후, 괴링은 공군 사령부에 친위대 및 경찰 인사들을 불러모은 후 유대인들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듬해인 1939년, 그는 4개년계획부 전권장관으로서 보안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제국 중앙 유대인 이주청(Reichszentrale für jüdische Auswanderung)' 설립을 지시하였다. 유대인 이주부는 독일 영내의 유대인들을 강제적으로 이주시키는 작업을 위해 세워진 부서로, 하인리히 힘러가 수장으로 있는 제국내무부 산하의 조직이었다.

일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유대인 이주부가 말 그대로 이주를 위해 세워진 것이며 학살과는 무관하다고 발뺌하지만 이는 전혀 근거없는 악의적 왜곡이다. 유대인 이주부의 직원들은 친위대 보안대와 국가보안본부 요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초대 청장부터가 악명 높은 게슈타포 국장 하인리히 뮐러가 겸직했으며 그 후임자는 그 유명한 아돌프 아이히만이었다. 훗날 독일의 홀로코스트 정책이 점차적으로 급진화되어 절멸로 나아가면서, 이 조직 역시 유대인들을 이송하여 각지의 게토나 수용소로 이송하는 작업의 중핵을 담당한다. 한마디로 홀로코스트의 핵심적인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4.4. 나치 이념 교육

"우리는 해독한 기생충을 제거하듯 세계 유대인들을 제거한다. 우리가 그들을 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적을 격퇴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다. 유대인을 제거하는 투쟁은 신이 원하는 종족의 순수함과 건강함을 위한 도덕적 투쟁이다. 그리고 새롭고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이다."
- 1939년의 국방군 정훈교육 교재(Schulungshefte) 제5권에 실린 C.A. 호베르크 박사의 논문, '독일사 속의 유대인'의 마지막 문단.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22p에서 발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에 괴링은 공군 최고사령관으로서 타군 사령관들, 즉 육군 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 상급대장 및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상급대장과 함께 나치당의 국가사회주의 이념을 국방군 장병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내부적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가르치기 위한 정훈교육 교재를 제작해 일선 장병과 소부대 지휘관들에게 배포했다. 이 교육은 국방군이 나치당의 인종 섬멸 전쟁에 사상적으로 동조하게 만들었다.

4.5. " 최종 해결" 지시

파일:Goring Authorization Letter.jpg
1941년 7월 31일, 베를린

제국원수(Der Reichmarschall des Großdeutschen Reiches)
4개년계획부 전권 장관(Beauftragter für den Vierjahresplan)
국방위원회 의장(Vorsitzender des Ministerrats für die Reichsverteidigung)

공안경찰(Sicherheitspolizei) 및 보안대(SD) 최고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SS중장(SS-Gruppenführer) 귀하

베를린

1939년 1월 24일 최적의 수단을 동원해 유대인을 이주시키고 추방하라는 귀하의 의무에 더해, 독일의 영향력이 미치는 전 유럽에서의 유대인 문제를 완벽히 해결하기 위해 발생하는 조직적이고 기술적이며 실제적인 문제에 관련된 모든 필수적 사항들을 준비할 책임을 귀하에게 부여한다.

정부의 다른 부처가 관련될 경우 그들은 언제든 귀하에게 협조해야 한다.

나는 귀하에게 우리가 바라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직적, 기술적, 실제적 수단들을 모두 포함하는 전체 계획을 가까운 시일 내에 제출하도록 요구하는 바이다.

괴링(서명)

독소전쟁이 발발한 지 1달 가량 지난 1941년 7월, 괴링은 보안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게 유대인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이드리히는 이에 따라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 반제에 위치한 별장에서 독일 정부 및 나치당의 몇몇 요인들을 비밀리에 초청하여 이에 대한 세부적인 해결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가 그 유명한 반제 회의이다.

여기서 유대인 문제 해결법이 ' 절멸(Vernichtung)'로 결정됨에 따라 절멸수용소를 중심으로 하는 본격적인 학살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실무 책임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친위대 주도로 폴란드에서 6개의 절멸 수용소들이 가동되기 시작하였으며, 야전에서는 친위특무대와 국방군 주도로 벌어지던 학살이 더욱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위 문서는 괴링이 절멸 정책을 계획하는 데 중책을 담당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전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장에서 괴링은 연합군 검사단이 상영한 홀로코스트 영상들을 두고 끔찍하다는 소감을 남겼으나, 정작 본인 역시 그 끔찍한 학살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다.

이 문서가 결정적인 스모킹 건이 되어서 괴링은 결국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5. 전쟁 말기의 행적과 퓌러 자리 요구

전쟁 말기로 가면서 독일 공군이 더 이상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유럽은커녕 독일 본토의 제공권조차 상실해버리는 막장 전황으로 변모하는 데 한몫했기에, 괴링은 점점 히틀러의 신뢰를 잃고 버로우하기 시작한다. 전쟁 말기쯤에는 그래도 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오래 전 철수한 해군 총사령부를 제외한 국방군 최고사령부, 육군 총사령부, 공군 총사령부의 기능을 오버잘츠베르크로 이전할 것을 명했다. 오버잘츠베르크는 아돌프 히틀러 파울 요제프 괴벨스 등 나치당 고관들의 별장이 많던 곳으로 공군 총사령관이던 괴링도 자신의 별장으로 옮겼다. 이때 괴링은 베를린에 첫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자신의 거대한 저택인 "카린홀"을 폭파시키고 그 안의 막대한 양의 미술품들을 별장으로 옮겼고, 베르히테스가덴에 있던 자기 계좌로 50만 마르크도 송금해 놨다.[41]

이후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지자 괴링은 1945년 초에 아내 에미와 딸 에다를 안전한 바이에른 산악 지방으로 보냈고 2월에는 유서도 써놓았다. 그러다 소련군의 공격으로 베를린이 완전 포위당하기 직전에 "베를린을 탈출하려면 지금밖에 없다!"는 시점에 이르자 괴링은 히틀러와 가신들이 모인 회의에서 갑자기 "공군을 지휘하러 남부 독일로 빨리 가야겠다"라고 얼버무리면서 베를린을 떠나려 하자, 히틀러는 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몇 마디 건성으로 악수를 나눴다. 사실 히틀러는 괴링이 겁나서 둘러대는 거라는 사실을 눈치챘겠지만 자포자기했는지 가도록 허락했다. 괴링은 회의가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달아났다.[42] 괴링은 수천명의 피난민과 함께 독일군이 겨우 확보하고 있는 남쪽의 작은 통로로 베를린을 떠나 남독일 지역으로 도망쳤다.

보어만이 거짓으로 4월 22일에 "퓌러께서는 현재 신경쇠약상태시니 대신 그대가 지휘를 맡으라"라고 괴링에게 무전을 보냈는데 이것은 보어만이 정적 제거를 위해서 취한 함정이었다. 이를 받아들인 괴링은 23일, 베를린 함락 직전 벙커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던 히틀러에게 지휘권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당시 괴링이 보낸 글 전문.
"퓌러 각하, 베를린의 요새에 남겠다는 각하의 결정에 따라 1941년 6월 29일 포고한 법령에 의거해 제가 즉시 국가의 전권을 맡고 국내외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활동하는 데 동의하십니까? 오후 10시까지 답신이 도착하지 않는다면, 각하가 행동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후 저는 법령에 정해진 조건이 충족된 것으로 여기고 국민과 조국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것입니다. 제 생애 가장 힘들었던 시간에 제가 각하께 품었던 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저로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각하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에 곧 도착하실 수 있기를 빕니다. 당신의 충신 헤르만 괴링."
쉽게 내용을 요약하자면 퓌러께서 곧 서거하실테니, 예전에 퓌러가 명령한대로 2인자인 내가 지금부터 퓌러자리 물려받아도 됩니까?하는 전문을 보낸 것이다. 당연히 열받은 히틀러는 괴링을 반역자로 규정, 모든 직책에서 해임한 뒤, 괴링에게 이런 전보를 보냈다.
"그대의 행동은 사형으로 처벌해야 마땅하지만, 귀하 스스로 직위와 직책을 포기한다면, 그대의 과거의 봉사와 노력을 참작하여 한 번만은 면책하도록 하겠소. 하지만 이 조치에 순응하지 않는다면 바로 조치를 취할 것이오."

적잖이 당황한 괴링은 서둘러 동의했고[43], 역시나 적잖이 당황한 친위대 대원들에 의해 가택 구금에 처해졌다. 하지만 4월 25일에 오버잘츠부르크가 폭격을 받자 괴링의 별장도 소실되어 감금 명령은 실행될 수가 없었고 헤르만 괴링과 가족들은 오스트리아의 마우텔른도르프에 있던 괴링 소유의 성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대신해 가장 가까운 미 육군 부대에 특사들을 파견했다. 그는 온화한 태도를 취해 일시적으로는 미 육군 장교들의 환심을 샀지만, 이후 5월 7일에 괴링은 힐슈호른 성에 감금되었다.

사실 이 점에 있어서 괴링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있는데, 분명히 전문에 "나는 퓌러 각하가 빨리 베를린을 탈출하여 이 곳에 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명시했고, 만약에 탈출하지 못했을 경우에 자신이 지휘권을 이어받아 전쟁을 수행해도 되겠느냐고 히틀러에 승인을 요청한 것이다.[44] 반면에 힘러는 아예 히틀러에 알리지도 않고 전후 자신이 퓌러가 된다며 스웨덴을 중재자로 세워 연합국과 휴전 협상을 벌이려 했다.

6.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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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링의 관리 기록 카드와 머그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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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 줄, 맨 왼쪽의 인물이 괴링이다
다른 나치 독일의 핵심 인사와는 달리 히틀러와 함께 자살하지 않고 스스로 전권대사로 대우받기를 원하고는 미군 장교에게 항복하였다. 이후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피고 중에서는 가장 거물이 되었다. 이 때 군복의 부착물을 전부 소련의 요구로 강제 탈거했다. 이는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과 육군 상급대장 알프레드 요들도 마찬가지로, 군인들은 전부 사복을 입든가, 서훈, 훈장, 계급장 등 부착물을 전부 다 제거한 군복을 입어야 했다. 가택 연금되었다가 교도소로 들어올 때 복용이 금지된 모르핀 대신 법에 허용되는 각성제를 2만여 정이나 가지고 들어왔고[45] 아침 저녁으로 각각 20알씩 복용했다. 교도소장은 이것이 그의 정신상태를 해친다고 판단하여 미 육군 군의관들에게 이를 치료하도록 명령했고, 군의관들은 하루에 한 알씩 줄이게 했다. 괴링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생각했으나, 결국 각성제 복용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거기다가 교도소에서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식사도 조절되다 보니 몸무게도 감소하여 청년시절의 훈남 모습이 되돌아왔다. 마약을 끊으니 정신도 맑아졌다고 한다. 나치 정권 시절에는 그의 과시욕과 허영 때문에 나치 고관들조차 그를 피했으나, 뉘른베르크에서는 젊었을 시절의 친화력과 카리스마가 회복되어 나치 전범들의 우두머리 노릇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회복한 육체적-정신적 건강으로 사형을 면하기 위해 자신을 정력적으로 변호했다. 영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 실력도 다른 전범 피고들 가운데 가장 유창했고 화술도 좋아[46] 가끔은 날카로운 논리를 구사하여 연합국 측 검사나 판사들의 말문을 막기도 했으나, 워낙 나치가 저지른 짓은 미증유의 것이라서 스스로도 사형을 면할 것이라고는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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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재판 과정에서 힘러나 하이드리히 같은 자들에게 전쟁범죄의 책임을 전가하기는 했지만, 히틀러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 전가는 일체 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괴링과 힘러를 동급으로 취급해서 자살시에 모두 후계자에서 배제했지만, 자살을 결심한 히틀러에게 (예전에 히틀러가 한 명령에 따라) 후계자 자리를 요구한 괴링의 행동이 부당한 것은 아니었다.[47] 결과적으로 괴링은 히틀러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친 것이다. 슈페어가 뉘른베르크에서 자신이 총통의 벙커에 독가스를 살포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고 자백하자[48] 누구보다 격노하여 고함을 질렀고 재판이 종료된 다음에 슈페어에게 ''여기서 나가거들랑 네놈부터 반역죄로 처형해주마!"라고 일갈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누구보다 똑똑했던 괴링 본인이 살아서 나갈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테고 아마 히틀러에게 총애를 받던 자가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분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알베르트 괴링(1895-1966)이 몰래 유태인과 소련군 포로들을 석방한 사실을 알게 되자 "반역죄로 처형한다고? 당신 동생이나 간수하라"라고 비꼼을 당했다. 괴링의 동생 알베르트는 나치와는 전혀 무관했고, 형과는 달리 나치를 반대했으며, 아이러니하게 형의 배경을 이용하여 많은 유대인들을 구했다. 한 가지 반전은 바로 괴링도 측근들을 통해서 이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알베르트 괴링은 유대인 구원을 위해 자기의 사재를 털기도 했지만, 잘 되지 않을 때에는 형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고, 실제로 도움을 얻어내기도 했다고 한다. 알베르트 괴링은 이걸 근거로 형을 구명하려 했지만, 워낙 죄가 커서 그걸 감안하고도 사형이 내려졌다.[49]

바르샤바 봉기에서 봉기군을 잔악하게 짓밟은 SS 대장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거짓말을 일삼고 동료들을 배신하는 추태를 보이자 재판 도중에 격노하여 동석해 있던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과 같이 "역겨운 돼지새끼"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이때 바흐-첼레프스키는 피고가 아니라 증인 자격으로 나와 있었는데 독소전쟁 중 파르티잔 학살에 도가 튼 그가 증인으로 나와 있었으니 괴링 입장에서는 울화통이 터질 판. 출처 괴링이 그 난리를 쳤는데도 판검사 측은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본인들이 봐도 첼레프스키의 행태가 어지간히 짜증난 듯. 솔직히 피고였으면 확실하게 사형당했을 놈이 증언을 해주는 대가로 피고가 아니라 증인이 되었으니…

한편, 베를린 공습과정에서 폭격을 맞아 사망한 악질 판사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재판 동영상을 검사 측에서 틀었는데, 괴링이 홀로코스트 영상보다 더 불쾌하다고 깠다.

그리고 에르하르트 밀히 공군 원수가 유대인 이라고 의심 받아 강제 수용소로 갈 처지가 되자 괴링은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50]라고 말하며 밀히를 보호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나치의 고관중 넘버 원일 뿐만 아니라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후계자였고[51][52] 카를 되니츠[53] 히틀러 대신 목매달 만한 사람은 아니었고, 또 누군가는 나치스가 대전 기간 내내 벌인 잔학행위 등을 대표해 책임을 져야 했기에 결국 사형 판결을 받는다.

7. 최후

사형을 선고받자 괴링은 군인의 전통적인 사형 방법인 총살형으로 집행해줄 것을 탄원했지만, 소련 수석 판사가 반대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절망했다고 한다. 전세계의 모든 군인들은 사형당한다면 총살형으로 집행하는 게 당연한 관례였고, 정반대로 교수형은 사형 방식 중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괴링 본인은 죽을 때 죽더라도 총살형으로 군인다운 최후를 맞고 싶었는데, 정반대로 가장 모욕적이고 불명예스러운 교수형을 당한다는 사실에[54] 절망했다. 결국 교수형 집행 하루 전에 몰래 입수한 청산가리 앰플을 씹어서 군인으로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살하는 것으로 생을 마감한다.[55] 괴링은 자살하면서 이 점을 유서에 남겼다고 한다.
총살형이라면 상관없지만, 독일군 원수를 지낸 나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독일의 이름으로 나는 이것을 거부한다. 그리고 적의 징벌에 따라야 할 의무도, 책임도 없다. 그러므로 나는 위대한 한니발 장군과 같은 방법으로 죽을 것을 결심했다.

이는 하인리히 힘러의 최후와 같다. 이때 독약의 효과 때문에 피부 색깔이 초록색이 되어서 완전히 슈렉처럼 보였다고 한다.

어떻게 청산가리 캡슐을 손에 넣었는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영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2005년 2월 7일, 1945년 당시 19세의 교도관이었던 미 육군 군사경찰이 "독극물을 건네준 것은 나다"라고 LA 타임즈에 밝혀서 파문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만난 독일인 여성과 2명의 독일인 남성이 괴링의 병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약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만년필에 숨겨진 캡슐을 건네받았고 자신은 순진하게도 이것을 약으로 믿고서 괴링에게 건네주었다라는 주장이었고, 그 군사경찰은 처벌이 두려워 오랫동안 이 사실을 숨겼다고 증언했다. 한동안은 전범 1명당 1명씩 배정[56]된, 전범들의 고충 상담 등을 하고 내용을 정리해 윗선에 전달하는 동시에 감시하는 역할의 미 육군 장교들 중 괴링에게 배정된 담당자였던 중위가 범인으로 의심받았다. 괴링이 특유의 사교력으로 그 중위와 우리식으로 표현해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친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도 이 중위가 괴링에게 자살약을 건넨 듯한 뉘앙스의 연출을 집어넣었다.

[1] 괴링의 모친이 불륜 상대이기도 했다. 그래서 괴링의 아우인 알베르트 괴링의 경우 에펜슈타인 백작과 생김새가 닮아서 그의 사생아가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이는 영국측 프로파간다에 의한 거짓으로 괴링의 모친은 알베르트 괴링 잉태시 괴링의 부친과 함께 아이티에 거주중이었다. 참고로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막대한 재산을 기부한 대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백작 작위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아마 본인은 유대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것으로로 보인다. [2] 정확하게 말하자면 부친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이었고, 모친은 토종 독일인이다. 다만 유대인 사회는 어머니가 유대인인 사람을 유대인으로 인정하는 모계 사회이지만, 나치 독일 기준으로는 그런 거 없다. [3] 비행서커스단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붉은 남작이 부대장이던 그 곳이다! # [4] 반대로 같은 육군 장교였던 루돌프 헤스는 특혜를 받아 뮌헨 대학에 진학했다. [5] 사민 - 우파 연립 정권때 조직된 나치, 공산당 감시 전담 경찰 조직. [6] 참고로 히틀러 또한 고환 한쪽이 없는 잠복고환이였다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히틀러는 선천적 요인이였고, 괴링은 후천적 요인이였다는 것이다. [7] 베니토 무솔리니의 딸의 이름에서 따왔다. [8] AG는 Aktiengesellschaft의 약자이다. [9] 미국의 경제적 제재가 가장 위협이 되었던 요소였고, 이후 영국과 미국이 스페인의 주권을 보장함으로써 스페인국은 추축국에 가담하지 않았다. [10] 물론 독일 공군이 저렇게 성장한게 괴링만의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괴링은 장거리 폭격기에도 관심을 가졌었는데 He 177의 개발 지연에 몹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거나 연설에서 4.5톤 정도의 폭장을 하고 대양을 가로질러 뉴욕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폭격기를 가질 수 있으면 매우 기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1] 중폭격기 열성론자이던 발터 베버는 여타 장교들과의 마찰이 심했었는데, 베버가 의문의 추락사고로 사망했을 때 암살 음모론도 존재한다. 여튼 베버 사후 독일에서 중폭격기는 사실상 찬밥 신세가 된다. 이를 토대로 보면 괴링도 딱히 베버의 이론을 크게 지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시 히틀러는 장기전이 아니라 연합군들의 허를 찔러서 속전속결로 끝내지 않으면 1차대전 반복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공격기와 전투기, 경폭격기 위주로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고 무엇보다 폭격기는 가격도 비싸고 유지비도 많이든다. 현대에 폭격임무를 수행하는것이 미국을 제외하면 폭격기가아닌 전투기나 공격기가 수행하는 이유도 유지비가 많이들어서 효율성이 떨어져서이다. 거기에 초기에는 빨리 재무장을 하기위해서 폭격기는 뒷전이 되었을테고 전쟁중에도 소모량이큰 전투기나 전차, 개인화기등에 집중하느라 폭격기는 우선순위에서 밀렸을것이다. [12] 덕분에 독일 공군의 격추 기록은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더 정확한 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교차 검증은 필수적이지만 말이다. [13] 네셔널 지오그래픽, The Battle of North Africa, 2013 [14] 위대한 3인의 전사들 P208 [15] 부산에서 신의주 거리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웬만한 육군 차량의 편도 주행거리보다 멀다. [16] 이때는 식량과 탄약, 연료, 의약품과 같은 필수품 뿐만 아니라 말에게 줄 사료까지 지원하여 육군의 보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17] 근사한 활주로를 여럿 가진 대규모 공항이 다수 존재한다면 기후가 양호하다는 가정 하에 미 공군이라면 보급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대형 공항이 충분했던 서베를린이 목표였을 때는 수송기를 하루에 1000대씩 띄우면서 소련의 베를린 봉쇄를 물거품으로 만든 적이 있다. 그마저도 소련과 독일 방공군이 미군 수송기를 격추하면 3차 대전이 일어날까봐 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공항 상태가 개판이고 기후가 안 좋다면 애초에 비행기가 내릴 수도 없으니 미군이고 뭐고 불가능. [18] 소련군도 공수군으로 독립하기 전엔 공수부대가 공군 소속이었다. [19] '전쟁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고 묘사할 정도로. [20] Meyer라고 적힌 경우도 있다. 성을 마이어로 간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일종의 독일식 표현으로 한국어로 의역하자면 '~하면 내 성을 간다' 정도가 된다. 마이어는 당시에나 오늘날에나 아주 흔한 독일 성씨다. [21] 날짜의 출처는 영문 Wikiquote인데, 확실하지는 않다. [22] 물론 폭격의 전과 자체는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당시 영국은 전투기 생산에 사활이 걸린 상황이라 대규모 폭격을 실시할 여력이 없었다. [23] 군인으로부터 보호받기도 힘든 고립된 방공호에서 자신을 괴링이라고 대놓고 소개했다가는 혹시나 있을 첩자에게 살해당할 확률이 있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24] 1942년 12월에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국의 항공기 생산량이 월 5,500대에 달한다고 발표했을 때도 괴링의 떨거지였던 독일 공군 지도부는 이 숫자를 사실로 여기지 않았으며 군 정보기관이 가져온 정보도 과장된 거라면서 무시했었고, 괴링도 공군 안에서 미국이 말하는 생산량을 사실로 받아들이거나 입에 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25] 나무위키스런 서술이 아니고, 정말로 면도날의 특성을 살린 드립이었다(!) [26]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괴벨스는 괴링과는 반대로 상당히 빼빼 마른 체형이었다. [27] 출처: 히틀러의 뜻대로 괴링편 [28] 참고로 '날아다니는 새' 드립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 괴링이 겸직한 직책 중에 국가수렵장관이 있기 때문. [29] 노후화된 전투기 기종을 줬다는 소문은 사실과 다르다. 괴링이 제시한 Bf109T는 E형을 함재기 버전으로 개량한 물건인데, 본래는 1940년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며 이 당시만 해도 E형은 최신형이었으므로 예정대로 배치만 되었으면 최신 함재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당장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주력으로 활약한 루프트바페의 전투기 기종이 E형이라는 사실만 봐도 노후화된 전투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이 기체나 노후화되자 G형을 바탕으로 새로 함재기를 개발하지만 그라프 체펠린이 취소되면서 취소되었다. [30] 되니츠 제독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실화를 밝히면서, 타 군의 실패에 대한 부정확한 보고를 히틀러에게 서둘러 한다며 괴링을 비판했다. [31] 미 해군과 미 육군항공대가 폭격의 우선 순위 문제로 갈등했고, 영국 공군은 영국 해군과 해군 항공대의 처우를 두고 갈등했다. [32] 특히나 전투기 파일럿들의 정점 아돌프 갈란트와 하인츠 베어. [33] 각 전투비행단장들이 일제히 군사재판 회부 대상자에 자신의 이름을 써서 제출하는 것으로 괴링에게 엿을 먹였고, 그 리스트의 맨 앞자리에는 당연히 아돌프 갈란트의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34] 물론 뒤집어 말하면 저렇게 돌직구를 꽂아버린 리초브 대령도 괴링이 강력한 공군을 건설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 못했다는 소리다. [35] 루브르 박물관, 대영박물관 등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항상 꼽히는 곳이다. [36] 유일하게 거절한 작위가 하인리히 힘러가 1945년에 명예 친위대 상급대장을 제안했을 때였다. 사실 제국원수 계급을 가지고 있던 괴링에게 고작 상급대장, 그것도 자신의 눈에는 군대로 보이지도 않는 슈츠슈타펠에다 까마득한 아래로 보고있는 힘러 휘하의 계급으로 들어오라는 건 천하의 제국원수 나리께는 콧방귀 뀔 가치조차 없던 일이었던 셈. 게다가 상징적으로 힘러의 아래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될 테니… [37] 약탈한 그림이 너무 많아서 저택 카린홀 창고가 모자라 천장에까지 매달아 두었다고 한다. [38] 게슈타포가 이 건으로 괴링을 입건하질 못해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42년부터는 SS친위대의 수장인 힘러의 권력이 자신보다 더 강력해짐과 동시에 게슈타포의 끈질긴 감시와 체포 시도가 더 많아지면서 더욱 조심했다고 한다. 게다가 실제로 게슈타포는 괴링을 구속할만 한 여러 비리 내역과 증거 사진들을 쭉 가지고 있었다. [39] 태평양 전쟁 후기에 미군이 특수 콘크리트로 간조한 바지선 여러 척을 급양함으로 운용한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바지선이므로 후방에서 물자를 생산하고 보급하는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하였다. [40] 당시 콘크리트의 질을 생각한다면 가다가 퍼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41] 그 중 괴링이 아끼던 술이 가득 든 창고는 몇 달 후 미 육군 제101공수사단 506보병연대 2대대 E중대의 루이스 닉슨에게 넘어가게 된다. [42] 알베르트 슈페어는 훗날 괴링의 작별을 제3제국의 임박한 종말을 상징하는 작별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43]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히틀러는 본인의 권력을 움켜쥐고 휘두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전쟁 중에는 더더욱 그래서, 독소전 말기 맛이 가기 시작하는 시점(…)을 제외하면 제아무리 자신이 퓌러라도 장성들의 의견을 감히 묵살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바른 의견을 내는 장성이 있다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고 그 사람의 의견을 밀어줄 줄도 알았다. 그러나 만약 필요하다면 가차없이 권력을 능숙하게 휘둘렀으며, 그가 스스로 가장 권력을 휘둘러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순간이 바로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가 있을 때였다. [44] 영화 "몰락"에서도 이 장면이 나오는데, 가방끈이 짧고 의심이 많은 히틀러를 대신해서 마르틴 보어만이 평소에도 여러 문서를 "씹고 뜯고 맛본" 다음, 자기 마음대로 해석, 가공하고 예전 행적을 양념 쳐서 정적들을 파묻어 버리는 재주를 많이 부렸다. 여기서도 히틀러는 여지없이 넘어갔다. [45] 그런데 이 각성제들, 정황상 필로폰일 확률이 매우 높다. [46]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살아 있었다면 괴링보다도 더 뛰어났겠지만, 해당 시점의 괴벨스는 이미 자살로 생을 마감한 상태였다. [47] 특히 히틀러에게 알리지도 않고 후계자 행세를 하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알리지 않고 스웨덴을 중재로 연합국과 강화를 맺으려고 하다가 이것이 들통나서 히틀러가 자살하기 직전에 모든 지위에서 해임당하고 사형 선고를 받은 힘러보다야 훨씬 양호한 것이었다. [48] 명백히 슈페어의 헛소리다. 그의 회고록을 보면 이 시점은 1944년 7월 20일 이후로, 총통은 신변의 안전을 위해 굴뚝의 높이를 대거 높였다. 그런데 그 곳에 독가스를 넣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동참한 가담자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도 없는데, 슈페어가 사형을 면하기 위해 꾸민 거짓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49] 알베르트 괴링은 전후에 헤르만 괴링의 동생으로서 서방 연합국과 체코에 의해 두 번이나 체포되었지만 그가 구해주었던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를 구하기 위해 증언하여 두 번 다 무사히 풀려났다고 한다. [50] 이 말 자체는 괴링이 먼저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의 시장이었던 정치인인 카를 루에거(Karl Lueger)가 먼저 한 말이었지만 루에거는 돈 있고 오스트리아 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은 보호받아야 할 좋은 사람이고 돈 없고 오스트리아에 적응 못 한 사람은 유대인이니까 꺼지라는 뜻으로 했던 말이다. [51] 나치당 시절부터 2인자였고 1939년 독일 국내 법령으로도 히틀러의 후계자로 선포되었다. 누구와 공식적으로 히틀러의 후계를 놓고 경쟁한 일도 없다. [52] 힘러는 당내 기반이 전혀 없는 듣보잡에다가 괴벨스는 군내 기반이 전혀 없고 히틀러의 신임이 절대적인 인물이었을 뿐이다. 차라리 마르틴 보어만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보어만은 당시에 어딨는지 파악이 안됐고 훗날 1972년 베를린 재개발 중 포격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로 발견되었다. 1998년에 아들을 통해 받은 유전자 검사로 확정. [53] 되니츠 제독은 대통령 직책을 승계받아 거쳐간 자리로만 치면 전범들 중 최선임이었으나 연합국에서 인정을 안 해줬고, 전쟁 기간 중 범죄 행위가 가장 적고 인지도도 낮았던 해군 출신이었다. [54] 당시 재판부 판사들도 군인 계급을 가진 자들에겐 총살형을 선고하고, 그렇지 않은 나머지들에겐 교수형을 선고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련 측 판사인 이오나 니키첸코 소장이 (본인의 대리인이었던 알렉산드르 볼치코프 중령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길이 날뛰며 "이런 쓰레기들에게는 교수형만으로도 충분하다. 총살형은 무슨 총살형이냐"라고 격렬히 반대한 탓에 군인이든 아니든 전원 교수형으로 사형 집행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애초에 독소전쟁에서 소련이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반응도 약과라고 할 수 있는데 니키첸코 역시 소련의 현역 군인이었고, 인종주의에 매몰되어 자국의 무고한 민간인을 수도 없이 죽인 자들을 총살 같은 것으로 한 방에 편히, 명예롭게 죽여줄 이유도 없었다. 당시 소련이 얼마나 독일에 대해 치를 떨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교수형은 현대의 사형 방법 중에서 가장 치욕스러운 방법이기 때문에, 소련 측은 나치 수뇌부를 군인은 커녕 사실상 사람 취급도 안해주겠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다. 자세한 것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의 사형 선고 문단 참조. [55] 당연히 소련 측에서는 괴링에게도 오랫동안 고통스럽게 매달리며 죽어가는 불명예스러운 교수형을 선고했는데, 독일군이 저지른 만행의 최전선에 서있던 그가 자기 명예를 지키겠답시고 편하게 자살하자 매우 분노했다고 한다. [56] 본래 단순 감시 및 생활 통제 등을 맡기고 겸사겸사 전범들에게 굴욕감을 주기 위해 미 육군 군사경찰 부사관들이 배정됐으나, 수감자들의 자살 및 자살미수 사건으로 인해 이를 방지하고자 보다 나은 처우를 보장해 주기 위해 장교들을 배정하는 걸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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