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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10:04:54

한산: 용의 출현/역사 재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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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배경 및 소품
2.1. 복식2.2. 함선
2.2.1. 조선 전선
2.2.1.1. 판옥선2.2.1.2. 거북선
2.2.2. 일본 전선
3. 줄거리 전개 관련4. 기타
4.1. 지명 관련4.2. 관계 설정

1. 개요

본 문서에서는 2022년 개봉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의 재현성에 관하여 다룬다. 영화 개봉 전 정보가 일부 포함되어 있음에 유의할 것.

2. 배경 및 소품

지적할 만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나 명량에서 지적되었던 소품들은 대다수 고증에 맞게 새로 교체되었다.

기존 '명량' 때 소품을 그대로 다시 쓸 것이라는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건데, 전작이 고증 부분에서 워낙 비판을 많이 받아 그대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명량이 1761만이라는 전무후무한 흥행을 기록하면서 제작에 많은 배려를 받아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1. 복식

파일:한산 두정갑.png
파일:한산 두정갑.jpg
주요 인물들이 두정갑을 입고 있는데 갑옷의 재현 부분에서 실제 유물 및 기록과 모습이 동떨어진 것 같다는 비판이 많다. 어깨에 달린 용문양 견철은 실제로 이순신의 갑주에 저런 장식이 달려 있었을 가능성은 적지만[1] 전작의 엉터리 찰갑에 달린 과한 용문양에 비하면 미학적으로 크게 튀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어쨌든 저런 형상의 유물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순신이 실제로 입었던 갑옷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현재로서는 완전히 고증오류라고 하기도 힘들고, 주인공의 개성 정도로 넘어갈 만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사료적 근거가 있거나, 혹은 장식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도 그냥 고증을 지키지 않은 디테일들이 대부분이다.

극중 등장한 두정갑은 상하분리형에 소매 아래가 찢어진 형상을 하고 있고, 낭심보호대[2]가 달려 있는 등 조선시대에 널리 사용된 포형 두정갑과는 전혀 다른 형상이며, 굳이 따지자면 국조오례의에서 찾아볼 수 있는 황동두정갑과 두두미갑에 가까운 형상이다. 문제는 두 갑주 모두 실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황동두정갑은 일반적인 두정갑이나 찰갑 등 다른 갑주와는 달리 지방에서 만들어서 바치라는 내용의 기록이 없고, 어떤 병종이 착용하는가에 대한 기록 또한 전혀 없어서 실전에서 구르는 일반적인 갑주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두미갑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방호재가 없고 장식성이 강한 의장용 갑주이다.

제작진의 의도가 실전성과는 별개로 정말로 황동두정갑이나 두두미갑을 재현하려는 것이었다고 해도 문제가 있는데, 그렇다고 그 두 갑주 중 하나를 제대로 구현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황동두정갑 특유의 호액[3]이 구현된 것도 아니고, 두두미갑 특유의 화려한 3중 허리띠를 구현한 것도 아니다. 즉 본작에서 등장한 갑주는 유물이나 기록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두정갑이라는 틀 내에서 고증에 크게 구애하지 않고 창작해낸 판타지 갑주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인 형상과 별개로 지적할 만한 고증오류라면 두정[4]이 지나치게 촘촘하게 박혀 있다는 점이 있다. 한산에서 등장한 갑주에는 마치 깨를 뿌린 것마냥 두정이 촘촘하게 박혀 있는데, 이러한 형상은 조선 두정갑뿐만 아니라 명나라, 청나라에서 사용된 두정갑은 물론이고 브리간딘 등 다른 문화권의 유사한 갑주와 비교해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두정갑의 두정은 그냥 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죽 외피 안에 달린 찰갑편을 고정하는 부품이다. 즉 고증을 지키려면 영화에서 등장한 갑주처럼 무질서하게 두정이 흩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두정이 찰갑편의 형상에 맞추어 규칙적으로 줄을 맞추어 배열되어 있어야 한다.

이외에도 또 지적할 만한 고증오류로는 이제 한국 사극의 고질병이라고 할 만한, 소위 챔피언 벨트라고 불리는 장식이 달린 두꺼운 허리띠이다. 전작 관련 문서인 명량/역사 재현 항목에서도 지적된 바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갑주를 고정할 때 허리띠가 아니라 전대라고 불리는 천으로 된 띠를 허리에 둘러맸다. 즉 허리띠로 갑주를 고정하는 행위 자체가 고증오류라는 것이며, 허리띠의 형상 역시 고증과는 아무 상관 없는 형상이다.

전작에서 등장한 정체를 알 수 없던 찰갑[5]과 비교하면 그나마 실제 유물과 비스무리한 형상이기는 하나, 결국 조금만 디테일을 파고들어가도 금세 실제 유물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들 투성이라 고증 면에서는 많이 아쉽다고 볼 수 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던 찰갑이 두정갑 테두리에 재활용됐다 또한 투구에 달린 드림이 펄럭인다. 드림은 목과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데, 영화에서는 드림이 계속 펄럭이는 걸 볼 수 있다. 참고로 펄럭이는 드림 역시 전술한 챔피언 벨트와 함께 한국 사극에서 유독 고증을 지키지 않는 사례 중 하나이다.

칼의 패용 방식도 말이 많은데, 칼을 손에 들지 않고 띠돈을 사용하는 것은 옳게 된 반영이나 검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다. 영화에서는 일본 타치 식으로 손잡이가 앞으로 가도록 허리에 수평으로 칼을 차고 있는데, 조선 환도는 손잡이가 뒤로 가고 칼집이 다리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모습으로 차야 한다는 것이다.[6] 다만 조선의 예법이나 규정에서 명문으로 정해지지 않았기에 손잡이가 앞으로 가도록 검을 휴대하는 것도 반영 오류라고 볼 수 없다. 환도의 띠돈은 고리가 360도 회전 가능하므로 칼을 어느 방향으로든 자유자재로 돌릴 수 있고, 그래서 손잡이가 뒤쪽으로 가는 방식이 더 많았을 뿐이지 앞쪽으로 가는 방식이 없던 것은 아니다.[7]. 비슷한 사례로 망건이 있는데, 망건 또한 상투가 떨어지지 않게 이마 위쪽으로 맸지만 실제 역사에선 현대의 한국 사극처럼 이마에 머리띠마냥 매는 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파일:한산 일본갑옷.png

변요한이 연기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갑옷도 바뀌었다. 아무래도 조진웅과 변요한의 신장이 차이나다 보니 어차피 바뀌었어야 했다.[8] 자주색 계열에다 뒤에는 황금장식이 있는 형태다.그러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실제로 사용한 가부토는 전면장식이 없고 뒤에 가몬을 새긴 깃발이 박혀있는 형태이나 이를 재현하지 않았다. 하지만 특이한 점은 가토 요시아키의 오징어 투구(...)가 그대로 영화상에 나왔다. 더불어 구키 요시타카의 사슴뿔 형태의 투구도 잘 재현되었다. 그렇지만 와키자카의 부하들의 투구는 색깔만 다를 뿐, 뿔은 전부 동그라미 형태의 뿔이다.( 영화를 참고하자). 가토 요시아키의 오징어투구와 구키 요시타카의 사슴뿔 투구는 잘 묘사했으면서 왜 와키자카의 투구는 왜곡을 하고 부하들의 투구는 뿔에 대한 개성이 없는지 이해가 잘 안된다.

또한 왜군의 복식도 바뀌었는데 전에 전체적으로 빨간색 위주였던 전작의 갑옷에서 영화 대립군에 나온 왜군의 갑옷으로 바뀌었다. 전작 명량에서 '왜군들이 해적이든, 정규군이든 할 거 없이 전부 다 획일화된 갑옷을 입고 나온다'는 지적을 받고 각 영주들이 거느리는 군사들마다 세부적으로는 갑옷에 차이를 두었다. 예를 들어 와키자카가 이끄는 군사들은 투구의 목가리개가 흰색이지만 웅치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군사들은 목가리개가 빨간색이다.
전작에서 사용했던 왜군 갑옷은 노를 젓는 노꾼들의 갑옷으로 전락하여 잘 드러나지 않으며 왜군 하급 부관들의 갑옷과 투구는 거의 절대 다수가 영화 '대립군'의 갑옷을 사용한다. 특히 명량에선 대부분의 부관들이 초승달 모양 장식이 붙은 스지가부토를 착용하고 있는데 반해 본작에서는 전령들의 투구로만 쓰임이 한정되었으며 대부분의 부관들은 원 모양의 장식이 붙은 즈나리가부토를 착용한다.[9]

아무래도 영화 '대립군'에서 조선군 측 복장을 '명량'의 복장을 사용해서 이번에 '한산'을 찍을 때도 '대립군'의 왜군 복장을 사용한 것 같다.

다만 한국 사극의 고질적인 문제인 여성들의 짧은 저고리는 잘못된 것. 단국대학교 석주선박물관에서 16세기 회화를 바탕으로 재현한 당시 기생들의 복식을 보면 저고리의 길이가 매우 길고,소매의 폭이 매우 넉넉하다. 이것이 조선 전기의 저고리 특징이다.

김향기가 입고 나온 기생의 복식은 소매가 좁고, 매우 짧고 타이트한 18세기 이후의 양식이다. 김향기 외 다른 기생들이 입고 나온 저고리는 16세기의 것에 비해선 짧지만 그래도 긴 편이며, 소매가 넉넉한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이렇게 입혔는지는 의상감독의 재량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2.2. 함선

2.2.1. 조선 전선

2.2.1.1. 판옥선
파일:한산판옥선.jpg

판옥선의 묘사가 다소 바뀌었다. 전작 명량에서는 배 옆면의 용 그림이 그렇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번 작에서는 도색하여 뚜렷하게 나오며, 지휘소 지붕도 누각이 없었지만 한산에서는 설치되어 있고, 명량의 판옥선과 달리 지휘소의 계단이 옆쪽에도 추가되어 두 개이다. 그리고 지휘관의 직함을 적은 현판이 누각에 설치되어있다.

명량 뿐만 아니라 이전에 임진왜란을 다룬 모든 작품들과 가장 큰 차이점은 진법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것이다. 기존 작품들은 어느 해전을 다루든 주로 화포전에 집중했다. 그에 반해 한산은 포로로 잡힌 왜군들을 이용해 기동 및 진법 훈련하는 장면, 조선 수군의 기본 이동 진법인 첨(尖)자진 활용, 모든 전선들이 학익진을 갖출 때까지 공격을 기다리는 등 진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10]

다만 아쉬운 점은 그간 임진왜란을 다룬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판옥선의 한쪽 면에서만 함포 발사를 묘사했다. 실제로 판옥선은 당시 세계 최초로 노를 이용해 그 자리에서 배를 돌리며 360도 사격이 가능한 시스템이었다. 이런 사격 시스템이 있었기에 영화와 달리 실제 한산도 대첩에서는 단 한 척의 왜선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으며, 명량해전에서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제자리 회전을 통한 사격은 불멸의 이순신에서나 몇 번 언급만 되었을 정도로 묘사된 적이 거의 없다.[11]

그러다보니 와키자카가 이순신 장군선에 가까워질 때 판옥선 갑판에서 병사들이 함포를 끌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틀린 부분이다. 위에 설명했듯 판옥선은 제자리에서 360도 돌며 함포를 쏘았기 때문에 병사들이 포를 옮길 필요가 없었다. 무거운 포를 옮기고 재장전하는 시간보다 이미 발사가 준비된 방향으로 배를 돌리는게 더 빠르기 때문이다.
2.2.1.2.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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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거북선 건조.png
작중에 등장하는 3척의 거북선. 가운데 거북선은 2층, 나머지는 3층 거북선으로 묘사되었다. 건조 중인 2층 거북선

거북선은 2층 구조 1척과 3층 구조 2척이 확인되었다.[12] 실제 거북선이 2층일지 3층일지는 학계에서도 여러 주장과 의견도 많이 갈리고 있는데 그냥 2가지를 다 보여주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거북선이 독자적인 함선이 아니라 특수목적을 위한 개조함선이라는 가설이 있기 때문. 주로 튼튼한 판옥선을 베이스로 개조했다는 가설이며 과거 실제 거북선을 그린 기록들마다 눈에 띄는 차이가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아니냐는 가설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판옥선도 오래 사용해오며 개량되며 설계가 바뀌었는데 임진왜란 180년 전, 태종 시절 때도 있었던 거북선도 개량해오며 시대마다 모습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고증 오류로 판명난 해군사관학교에 있는 목이 있는 거북선은 등장하지 않는다.

작중에서 나온 2층 거북선은 나대용이 3층 거북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조를 한 것으로 나오는데, 2층 구조는 3층 구조의 느린 속도와 충파시 용머리가 적선에 끼는 [13]단점을 보완하여 배 아래에 도깨비머리가 튀어나온 형태와 용머리를 넣었다 뺐다 할수 있게 개조되었다.[14] 이 부분도 순수 창작은 아니고 KBS 역사스페셜에도 방송된 적 있는 주장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KBS 역사스페셜 – 거북선 머리는 들락거렸다 / KBS 1999.2.13 방송분 유튜브 영상[15]

배가 3층 구조일 시 배의 복원력에 문제가 생겨 측면 포를 쏘면 뒤집힐 수 있다는 설을 인식해서 그런지 3층선은 측면포를 판옥선처럼 연속적으로 쏘지는 않는다. 또 그간 거북선이 무적인 것처럼 과장되었던 것에 반해 적선에 박혀 못움직이는 용머리, 느린 속도, 취약한 측면 등 단점들을 그대로 표현하는 동시에 돌격선이라는 실제 한정된 역할만을 부여했다.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에 분명히 등판 가운데에 쇠송곳이 꽂히지 않고 맨 갑판으로 된 승조원 이동통로가 있었다고 기록에 남아있었다. 그 후 거북선에서는 방어상의 약점이라고 판단되어 없어졌었는데 이를 재현한 점도 새로운 점이다.

2층선은 층이 낮아져서 3층선과 달리 속도가 빨라졌는데 과장된 측면이 있다. 나부배는 아무리 빨라도 작중 속도로 갈 수 없다. 그리고 노를 젓는 공간과 포를 쏘는 공간이 겹치면 측면포를 움직이면서 포를 쏠 수 없다는 설에 맞게 돌격하면서 앞쪽 포만 쏘다가 충파 후 정지된 채로 적선이 가까이 몰려오면 측면포[16]를 이용하여 전탄사격을 한다. 또한 2층선은 나머지 두척과 달리 등판이 검은빛을 띄고 판옥선의 포탄을 일부 튕겨낸 것으로 보아 등판이 철갑일 것이다. 게다가 스치기만 해도 왜군 세키부네가 나뭇조각이 터지듯이 박살이 나는 모습을 보였다.[17] 극중에서는 3척이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2척만 투입되었다.

또 거북선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 처럼 나오는데 허구다. 거북선의 역할은 본격적인 전투 직전에 왜수군 진열을 흐트리는 돌격선에 한정되어 있었다.[18] 거북선은 무게 때문에 판옥선 처럼 360도 돌 수도 없고 시야 확보도 어려웠기 때문에 돌격 이후에는 전투에서 빠지는게 일반적이었다. 당시 기록 어디에도 거북선이 영화에서 처럼 적진을 헤집고 다녔다는 내용은 없다. 워낙 거북선이 주는 이미지가 강렬한 덕분이지 이순신 장군 본인도 거북선에 대한 특별한 기록을 남기지도 않았다. 또 거북선을 선봉에 세워 함포 위협 사격으로 왜군을 엎드리게 하거나 조총 사격을 대신 맞게 하는 역할로만 활용했을 뿐이다. 때문에 명량해전 이후에는 굳이 거북선을 건조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김한민 감독이 영화 명량에 이어 거북선이 직접 왜군 전함을 들이받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영화에서는 '충파'를 직접 들이받는 것으로 해석했는데 단어의 뜻은 '적을 깨뜨려 부순다', 즉 함포를 쏘아서 공격한다는 뜻이다. 물론 판옥선과 거북선이 왜군 전함보다는 튼튼했지만 양측 모두 나무로 건조되었기 때문에 직접 부딫히면 조선 전함도 똑같이 손상을 입게 된다. 전쟁 중에 한척의 배도 귀한 조선 수군의 입장에서 그런 전술을 쓰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연출이다. 또 당시 어디에도 그런 전술을 썼다는 기록도 전무하다.

2.2.2. 일본 전선

일본의 군선은 '명량' 때보다는 모두 조금 작게 나왔다. 이는 기록에 따른 것으로 명량해전 때 일본 군선이 그간의 전투 경험을 살려 개전 초보다 더 크게 만들어진 것은 사실이다. 선조실록에서는 칠천량의 패전을 보고받은 선조가 "대체로 적의 배가 전보다 대단히 크다고 하는데 사실인가?"라고 물으니 김응남이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습이 나온다. 전쟁 초기에는 일본군의 배와 조선군의 배가 서로 크기 차이가 너무 나서 일본군이 등선육박을 할 때 공성전을 하듯이 사다리를 타고 조선군 함선으로 올라왔어야 했다고 하니 이 부분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다만 초반 준사 일행이 훈련에 동원한 노획 세키부네는 정말 사다리를 거의 수직으로 올려야 판옥선 갑판에 닿을 수준인데 반해 실제 전투에 투입된 세키부네들은 완만한 경사로 광양전선에 오를 수 있을 정도였다.

작중 일본군은 세키부네의 빠른 속력을 활용해 유인전에 나선 광양과 옥포의 전선들을 따라잡아 등선전을 시도하는데, 실제 한산 해전에 대한 조일 양측 기록 모두 이러한 양상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칠천량 해전 등을 보면 세키부네들이 조선 전선을 따라잡아 등선에 성공한 사례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이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파일:거북선2.png
파일:거북선1.png
거북선과 충각이 달려있는 안택선
와키자카의 군대가 사용하는 철갑을 두른 배와 화포가 달려있는 배(텟코센), 충각이 달려있는 배 모두 가토에게서 삥뜯은 물건들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영화상의 창작이다.

일본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안택선(텟코센)에 불랑기포를 매달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묘사라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왜 수군의 대포 사용 자체가 고증에 크게 벗어난다고 볼 수는 없다. 당시 일본군도 서양에서 수입한 소형 불랑기포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며 왜구와 동업했던 중국 해적 왕직을 통해 일본 해적들은 명나라식 대포를 이미 입수한 상태였고, 그래서 일본 수군은 사실상 대포를 운용했다고 봐야 한다. 한산 해전 이후에 벌어진 안골포 해전에서도 참전했던 구키 요시타카의 기함 니혼마루(日本丸)[19]에도 함포가 3문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일:external/pacific.valka.cz/nihon_maru1592.jpg
안골포 해전 당시 구키 요시타카 니혼마루 거북선의 대치 상상도.
당대 조선쪽 기록에도 비슷한 내용을 확인할수가 있는데, 선조와 류성룡의 칠천량 해전 직후 대화에서도 왜군이 대포를 달아 접근하기 힘들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 선조가)
"척후병도 설치하지 않았단 말인가? 왜 후퇴하여 한산(閑山)이라도 지키지 못했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한산에 거의 이르러서 칠천도(七川島)에 도달했을 때가 밤 2경이었는데 왜적은 어둠을 이용하여 잠입하였다가 불의에 방포(放砲)하여[20] 우리 전선 4척을 불태우니 너무도 창졸간이라 추격하여 포획하지도 못하였고, 다음날 날이 밝았을 때에는 이미 적선이 사면으로 포위하여 아군은 부득이 고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육지에 내려보니 왜적이 먼저 하륙하여 이미 진을 치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사는 미처 손쓸 사이도 없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선조실록 90권, 선조 30년 7월 22일 신해 3번째기사 ##
다만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한산도 대첩에서 대포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나오지 않는데[21], 사실 이런 묘사는 이번 영화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산도 대첩을 다룬 다른 영상 매체에서도 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20여년전의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와키자카군은 안택선에서 대포 2문을 대들보에 매달아 사용하고 있다.
파일:조선전역해전도-일본수군화포확대.jpg
조선해역전도 중 왜군 화포 운용 장면 中
대포를 대들보에 걸었다는 것은 조선전역해전도 때문에 생긴 오해로 실제론 조선처럼 갑판에 거치했다. 사실 조선전역해전도는 임진왜란때 그려진게 아니라 20세기 작품으로 한일 양쪽 모두 반영에 참고할 물건이 전혀 아니다.[22]

3. 줄거리 전개 관련

긴장감을 위해 꽤 많은 각색이 이루어졌다. 이건 김한민 감독뿐 아니라 역사를 소재로 하는 영화는 100% 사실과 고증에 입각해서만 만들기는 어렵다. 애초에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인 이상 고증 그대로 사실 그대로만 쓰려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것.

그럼에도 전작 명량에 이어 과도한 각색과 왜곡에 대한 비판은 불가피하다. 이순신 장군 관련 기록이 부족하면 어쩔 수 없이 재해석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난중일기, 장군이 쓴 장계, 조정에서 조사한 보고서, 와키자카를 비롯한 일본 쪽 기록이 워낙 자세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부 각색이면 모를까 감독은 왜곡에 가깝게 비틀어서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3.1. 사천 해전

사천 해전과 그로부터 이틀 뒤에 벌어진 당포 해전을 합쳤다.

거북선으로 대장선을 들이받은 상황은 그로부터 이틀 뒤에 벌어진 당포 해전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거북선의 공격을 받은 미치유키의 안택선이 반쯤 부서진 채로 표류하던 것을 끌고 왔다고 와타나베 시치에몬이 언급한다. 그런데 사천 해전, 당포 해전 당시에는 참전한 모든 왜군 함선이 격침되었기 때문에 실제로라면 와키자카가 거북선의 공격에 부서진 안택선을 보는 상황이 나올 수가 없다.

이순신이 왼쪽 어깨에 총을 맞았다는 상황은 사실에 맞게 재현되었다. 단, 영화에서는 총을 쏜 사람이 준사라는 인물로 설정되었는데, 준사는 한산도 대첩보다도 더 뒤인 안골포 해전 이후에 항왜가 되었다. 또한 나대용이 사천 해전에서 총을 맞은 것은 사실이며,[23]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는 준사가 쏘았다는 설정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대용은 당시에 거북선이 아니라 대장선에 승선하고 있었다.

3.2. '복카이센' 대사

참고로 예고편에서 와타나베가 부서진 도쿠이 미치유키[24]의 군선들을 보면서
해저 괴물.....복카이센!
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서 거북선을 부른 명칭은 '맹선(盲船)'[25]이란 뜻의 메쿠라부네였다. 배가 사방이 전부 막혀있어서 어디로 밖을 내다보는지 알 수 없어 장님 배라고 불렀다고[26].

복카이센(沐海潛)은 임진왜란 종전 이후, 일본에서 제작된 군담들 중 인형극 <남신궁황후>(男神宮皇后)에 등장하는 인물로 고려국 요동대왕(조선왕)이 조공을 게을리 해 일본이 병선 수만척을 보내자 요동대왕이 물질에 능하고, 힘센 복카이센에게 독물고기로 변해 일본 대장이 탄 배를 전복시키라는 지시를 내린다. 복카이센은 호랑이 머리에 등에는 가시가 돋았고, 꼬리를 위로 곤두세운 ' 샤치호코'(위 티저 영상에서 해저 괴물로 번역되었다.)라는 물고기로 변해 일본배에 달려들고, 이를 고니시 유키나가를 모티브로 한 고니시 야슈우로(小西彌十郞)가 퇴치한다. 등에 가시가 돋은 괴이한 물고기 샤치호코와 그 샤치호코로 변신한 물질에 능한 장수 복카이센은 진주목사 김시민을 모티브로 만든 '목소관(木曾官)처럼 이순신과 거북선을 모델로 창작해낸 인물이다.[27] 즉, 복카이센은 임진왜란 종전 이후 일본 인형극에 등장하는 인물이지, 임진왜란 중인 1592년 일본군 사이에서 언급될 이름은 아니다.

영화 내에선 패잔병들이 거북선을 '복카이센'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와키자카가
"이야기 속의 괴물 말인가"
라며 익히 알고 있다는 듯 반응을 보이며 '복카이센'은 일본군이 품은 두려움의 표시로, '메쿠라부네'는 멸칭으로 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영화 내 사용 빈도는 메쿠라부네가 더 많으며 초반을 제외하면 대부분 메쿠라부네라고 언급한다.

'복카이센'이란 명칭이 기존에 다른 사극을 통해 알려지지 않았던 만큼 제작진이 사전에 해당 논문을 읽고 자료조사를 했음은 분명하다. 영화에서 사용한 것은 거북선에 대한 일본군의 두려움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각색한 것이다.[28] 그리고 "복카이센"은 "거북선"을 마치 일본 한자음으로 읽은 것처럼 들려서북거선 관객들이 "아 거북선을 말하는 거구나" 하고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에 복카이센 명칭을 고집한 이유도 클 것이다.[29]

3.3. 웅치 전투

웅치 전투는 웅치 전투와 후속전 안덕원 전투가 결합되었으며, 목적부터 양 군의 규모까지 많은 각색이 이뤄졌다. 웅치 전투의 최고 지휘관은 김제 군수 정담이었지만 이 영화에선 후군장이었던 황박이 최고 지휘관처럼 묘사된다. 황박은 웅치 전투에 참전해 살아남고, 다음날 벌어진 이치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했으나 영화에서는 웅치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실제 역사에서는 최고 지휘관 김제 군수 정담이 웅치 전투에서 전사했다. 함께 등장한 황진은 장수 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전라 감사 이광의 지시로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가 7월 5일경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웅치에서 무너진 조선군이 나주 판관 이복남의 지휘하에 안덕원(오늘날의 전주시 산정동과 금상동 일대)에서 재정비할 때 지원군으로 합류해 일본군의 전주성 진격을 좌절시켰다. 그러나 이건 오리지널판에 한정된 얘기이며, 정담 배역도 캐스팅 목록에 있고 리덕스판에서는 정담이 등장한다.

리덕스판에서 이치 전투와 웅치 전투가 동시에 발생하고 있다는 내용이 안코쿠지 에케이를 통해 언급되는데, 흔히 이치, 웅치 전투가 같은 날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선조수정실록》의 서술 방식을 감안하지 않아 생긴 오류다. 그리고 영화에서의 권율의 직책이 전라도 순찰사인데, 실제 이치 전투 당시 권율의 직책은 광주 목사였으며, 웅치 전선에는 안코쿠지만 참전하고 고바야카와는 이치 전투를 치르러 갔다. 고경명의 군대가 진군한다는 언급도 있는데, 웅치 전투는 7월 7일, 제1차 금산 전투는 7월 10일에 벌어졌으므로 시기상으로 거의 맞아떨어진다.

웅치 전투는 일본군측 제6군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예하 병력이 전주로 향하기 위해 남하하다가 조선군과 마주친 것이었으나, 영화상에서는 전주성으로 향하던 왜군 병력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제안을 받아들여 방향을 돌려 전라좌수영을 육로로 공격하려 한 것으로 각색되었다.[30] 이와 같은 이유로 허를 찔린 조선군은 항왜인 준사가 제공한 정보 덕분에 막판에 급하게 최소한의 방어진을 세우고, 후군장이었던 황박이 지휘를 하게 된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전라좌수영 공격을 위한 웅치 돌파 추측이 극중에서는 와키자카의 견내량 내 본진돌격의 계기로 작용하는데[31] 둘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는지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있는 관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웅치와 여수 사이의 거리가 자그마치 150km이다.....[32] 이는 실제론 전주성 방어전에 가까웠던 웅치 전투가 전라좌수영 방어전으로 각색되었기 때문이다. 웅치 전투가 일어난 곳은 전주의 지척에 있다. 영화에선 준사가 전주성과 전라좌수영으로 향하는 갈림길에서 전주성으로 가는 길목이 텅 비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몇 시간 뒤에 (전라좌수영 근처에서) 전투가 일어나므로 마치 전주성(전라북도 북단)과 전라좌수영(여수, 전라남도 남단)이 가까이 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론 상당히 멀리 있다. 기왕 각색을 할 것이면 차라리 웅치 전투란 설정 자체를 빼고, 가상의 전투로 연출하는 게 개연성 면에선 더 나았을 것이다.[33] 거기다 웅치 전투는 한산도 대첩 전날에 벌어졌기 때문에 출격 전날에 양동작전을 논의해놓고 "지금쯤이면 웅치를 돌파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당연히 틀린 말이 된다.

그리고 작중에서는 조선 의병들이 화포 사격으로 왜군을 저지하는 묘사가 나오나, 도로 사정이 나빠 중장비를 빠르게 운송하는 데 제한이 따르고, 기병 중심으로 여진족과 왜구에 맞서는 식으로 교리가 짜여 있었던 임진왜란 이전 조선 육군은 수성전이 아닌 야전에서 승자총통과 완구 이상의 화기를 운용하는 데 관심이 없어, 그런 훈련 자체가 되어있지 않았다. 조선군이 야전에서 포병 운용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하는 건 인구증가와 지속적인 개간으로 교통이 불편한 험지가 줄어든 조선 후기부터로 주로 수레에 조선에서 애용한 소형 불랑기, 총통, 신기전, 조총 등을 올려서 운용하는 쪽으로 발전한다.[34]

그리고 오류를 하나 꼽자면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쓰는 서신중에 그대(そなた)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것이 실제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보낸 편지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작중 대본이라면 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이 표현은 최소한 서로 동등한 입장일때 주로 쓰는 호칭인데 둘의 나이 차이는 21세로 고바야카와 타카카게가 한참 연상이고 무엇보다 고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전국 시대 대영주 가문인 모리 가문의 삼남으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감히 그대라고 부를만한 나이도 신분도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당시 임진왜란 일본군 전체로 놓고봐도 9군 사령관중 최고 연장자이며 영주로서의 명성은 시마즈 요시히로동급임과 동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다음에 해당하는 " 오대로"에 들 정도의 대영주인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인데 영지나 나이나 명성이나 모든게 한참 뒤떨어지는 와키자카 야스하루 정도라면 그에게 도노(殿)라고 높혀 불러야 맞을 것이다.(현대로 치자면 일개 소령~중령 정도가 옆군단 군단장에게 맞먹는 호칭을 쓴 것). 현대 일본에서도 둘의 인지도 차이는 꽤 큰 편으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전국시대를 주름잡았던 다이묘였기에 각종 게임에 등장하며 능력치도 우수한 편이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35]

3.4. 한산도 대첩

실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할 시 너무나 일방적이고, 압도적인 승리라 극적 재미를 위해 상당한 각색이 가해졌다. 실제 역사상의 해전 양상을 영화에서 그대로 보여주면 영화적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주기 어렵기 때문에 어느 정도 치열한 양상을 보이도록 각색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그래서 한산도 대첩 이후에 일어난 안골포 해전의 전개를 차용하여 영화 내에서는 안골포 해전 수준의 접전과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묘사된다.
거북선 3척이 투입되는데 실제로는 2척이었다. 왜군들이 포를 이용해 거북선들을 공격하는 장면, 거북선이 포위되기를 기다렸다가 사방으로 포를 발사하는 장면, 충파 전술로 왜군 선채를 직접 타격하고 노를 깨는건 완전 허구다. 특히 충파는 돌격선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구현한 1차원적인 시각이다.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판옥선을 기본으로 하고 갑판에 조총을 막을 정도의 장갑만 덮은 함선이다. 영화에서 처럼 왜선들을 들이받으면 거북선도 나무이기 때문에 같이 깨진다. 실제로 유일하게 거북선의 전투 모습을 기록한 건 사천해전이 유일한데 보면 "거북선이 선봉에 서서 왜군 함선에 가까이 접근해 포격하자 왜군들이 엎드렸다"가 전부다. 이 대목으로 유추할 때 거북선이 왜군들의 주력인 조총과 대형 조총 사격을 막거나 사격을 대신 맞고 있으면 판옥선들이 일제 포격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진법을 구현한 것도 문제가 있다. 남해안은 섬이 많아 진로가 제한되기 때문에 항상 육지를 끼고 진형을 만들었다. 실제 한산도 대첩에서 보였던 학익진은 U자의 가운데만 먼저 만들어놓고 왜군들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매복해있던 이억기 함대가 좌측에서, 원균 함대가 우측에서 나와 마저 완성시켜 일본군을 완전히 가둬서 궤멸시킬 수 있었다.[42] 때문에 원균이 혼자 먼저 포탄을 다 소진하고 무력하게 있었다는 것도 허구다.[43]

3.5. 안골포 해전

안골포 해전은 그냥 함대로 안골포 일대의 왜군 기지를 일방적으로 포격하고, 구키 요시타카와 가토 요시아키가 그걸 그냥 구경하는 걸로 묘사했지만, 실제로는 한산도 대첩 때와 비슷하게 유인전을 통해 왜군 함대를 끌어내고 섬멸한 전투였다.[46]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와키자카와 구키-요시아키 간의 갈등관계를 만든답시고 둘의 배를 모조리 빼앗는 걸로 전개시키다보니 정작 안골포에서는 역사와 달리 둘 다 손놓고 구경할 수밖에 없는 결과가 만들어진 것이다.

3.6. 부산포 해전

영화에서는 부산포 해전이 3차 출정 시기인 1592년 음력 7월 11일에 발발했다고 언급하지만, 실제 부산포 해전은 1592년 음력 9월 1일에 벌어졌으며, 4차 출정 때의 일이었다. 3차 출정은 안골포를 포격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47]

부산포 해전에서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했지만 이 내용은 다뤄지지 않았고, 일방적인 포격으로 승리한 걸로 처리되었다.

실제 부산포 해전에 정박해있던 왜선은 400척 정도의 대함대였는데, 정작 부산포의 왜선은 출정 나온 판옥선보다도 한참 적은 숫자만이 정박되어있다.

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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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지명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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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관계 설정



[1] 견철은 단순히 멋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실제로 어깨 쪽 방호력을 보강하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이 있는 부품이다. 즉 전쟁터에서 입는 실전용 갑주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견철이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실제로 현존하는 유물들을 봐도 실전을 뛰어야 하는 무관들이 입던 두정갑에 달린 견철은 아주 단순한 형상을 하고 있다. 영화 속 견철은 고종 황제의 두정갑 유물에 달려있는 견철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군주의 갑주이기에 실용성보다는 장식성이 강조된 것이다. [2] 정확한 명칭은 엄심이라고 한다. [3] 겨드랑이, 혹은 옆구리를 보호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두르는 부품으로 주로 조선 두정갑보다는 명나라, 청나라 두정갑에서 자주 보이는 부품이다. [4] 갑주 겉에 달려 있는 동그란 못머리를 말한다. [5] 영화 마지막 웅치고개 전투 마지막에 증원온 의병독전장 황진의 갑주로 아주 찰나의 순간에 다시 출현하긴 했다. [6] 파일:external/www.kjclub.com/d0010108_46f6284852075.jpg [7] 사실 역대 역사극 매체에서의 등장이 전무했던 띠돈패용이 잠깐이나마 비춰지기라도 한 것만으로도 한국 사극의 고증 면에서 장족의 발전으로 평가받아 마땅한 부분이다 [8] 조진웅: 187cm / 변요한: 175cm [9] 대립군에서 박해준 배우가 연기한 타로베의 투구로 처음 선보인 소품인데, 본작에서 대량생산해 사용했다. [10] 여기에 발맞춰 와키자카측도 어린진이라는 진법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11] 전장포의 단점인 긴 장전시간을 배를 돌려 양현을 교대로 쏘며 보완한다는 개념을 언급한다. 여러모로 왜군 조총병이 3개조로 돌아가며 연사력을 만들어낸 것과 비슷한 개념. [12] 파일:한산 촬영지.jpg [13] 만약 실제로 이런 상황이있다면, 용머리가 적선에 끼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용머리가 부서졌을것이다. [14] 전투 중 미리 훔친 설계도를 통해 용머리가 끼는 단점을 미리 알고 있던 와키자카 사헤에가 강하게 부딪힐 수록 못 빠져나갈 것이라며 칼을 빼들고 월선을 준비하는데, 갑자기 용머리가 사라지자 벙쪄버린다. 머리가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메쿠라부네라고 부르며 전의를 다지다가 머리가 들어가자 충격과 공포에 휩쌓인 얼굴로 복카이센이라 읊조리는 연기가 일품. 영화 초반부에 나대용이 자라를 한 마리 선물 받고, 이 자라가 목을 움츠리는 장면들을 따로 촬영한 것을 보면 머리를 출납식으로 변경한다는 아이디어를 자라에서 떠올렸다는 설정이 있는 듯하다. 다만 영화 내에서는 편집되었는지 언급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복선이다. [15] 다만 이는 매우 오류가 매우 많은 장면이다, 당장 봐도 거북선이 파도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는데 그 육중한 용두를 들락거리는 장치는 역사 기록에도 없고, 영화에서처럼 그러면 용두 때문에 거북선 선수가 부서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거북선 선수부분쪽에 용두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그리고 용두 밎에는 닺줄을 감아올리는 권양기가 있어 그런 장치는 설치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를 의식했는지 디자이너 한호림은 이를 고증오류로 주장하였다. [16] 기동 시에는 포문에 화포가 없다가 정지 후 그제야 포구에 화포를 배치한다. [17] 이는 영화상 극적인 표현으로 봐야할 듯 하다. 아무리 거북선이 실제로 적선을 충파로 부쉈다는 기록이 있더라도 돛을 펼치고 격군들이 힘차게 노를 저어도 적선을 반으로 쪼개는 것은 힘들다. [18] 당시 모든 전투는 어느 측 진법이 먼저 무너지냐에 승패가 달렸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육군의 기병 역할을 할 전함이 필요했다. [19] 원래 이름은 키슈우(鬼宿, 3원 28수 중 하나로 현재의 게자리에 위치한 별을 말한다.)였으나 자신의 기함으로 선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니혼마루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다만 실제로 히데요시가 사용한 기록은 없고, 임진왜란 발발 직전에 구키 요시타카에게 넘겨주었다. 구키 요시타카의 개인 행장록인 구키행공기(九鬼御伝記)에 따르면 조선 수군의 맹공에도 침몰하지 않고 버텼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침몰하지 않은 배라는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분석하고 재건설 하라는 명을 가토 요시아키를 통해서 전달받게 된다. 안골포 해전 당시 조선 수군이 발사한 장군전이 니혼마루 옆구리에 박히게 되었는데 구키 요시타카는 이를 챙겨서 종전 후 일본으로 가져갔다. [20] 다만 방포는 대포뿐 아니라 총을 쏘는 것을 의미 한다. 국립국어원 답변. 그러나 전선 4척이 불탔다는 내용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 총보다는 대포를 발사했다는 의미로 이야기 한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조총을 쐈다고 배가 불타진 않을테니까. [21] 이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다른 다이묘들처럼 큰 세력이 아니었기 때문인데다가 화포 하나하나가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가의 물건인지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재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와키자카의 군대는 조총병이 적었고 냉병기로 무장했었다고 한다. [22] 아무래도 대립 구도가 있다보니 대포를 다루는 방식이 서로 다른 것을 더 선호하는 듯. 게다가 안택선의 낮은 내구도를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실제로 이 현수식 거치방법이 한국에서 주목을 받은 이유가 '안택선은 내구도가 낮아서 화포의 갑판 거치가 불가능했다'는 식의 설명 때문이었다. [23] 종전 이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24] <명량> 영화에 나오는 구루지마 미치후사의 형이다(성씨가 다른 이유는 미치유키가 도쿠이 가문에 입양되었고, 미치후사는 구루지마로 성씨를 개명했기 때문이다). 당포 해전에서 자신의 대장선과 거북선 간의 접전이 일어나자 저항했으나 중위장 권준이 쏜 화살에 맞아 쓰러졌고, 이후 사도 첨사 김완과 그의 군관 진무성이 일본 대장선 안으로 뛰어들어 백병전을 벌이다가 그를 발견하고 단칼에 베어버렸다. 거북선에 의해 일본군의 배가 관통당하는 장면 위쪽을 자세히 보면 흰색 깃발이 있는데 그 깃발의 가몬이 구루지마의 8겹 3줄 가몬이다. [25] 장님 맹, 배 선, 눈먼 배라는 뜻이다. [26] 실제로는 영화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일종의 전차의 큐폴라 역할을 하는 여닫이 채광창이 사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27] 최관, 1998, <일본문학에 나타난 임진왜란의 영향>, 《남명학연구》 권7 1호,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8] 예를 들어 냉철한 와키자카 사헤에는 시종일관 메쿠라부네라고만 부르다가 후반부에 거북선의 엄청난 위용을 확인하고 경악하며 "복카이센...!"이라고 중얼거린다. [29] "거북"은 순우리말이고, "선"은 한자어이다. 일찍이 소설가 이우혁이 이를 지적하며 자신의 소설 <왜란종결자>에서 거북배라는 명칭을 쓴 바 있고 김한민 감독도 이점을 감안해 <명량>에서부터 한결같이 '구선'이란 명칭을 쓴다. [30] 와키자카는 이순신을 위협적으로 여겨 육지와 물 양쪽에서 공격해 궤멸시키려고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전라도에서 자신의 몫을 전부 넘겨준다는 조건으로 고바야카와에게 공격을 부탁했다. 물론 이런 제안이나 6군이 전라좌수영을 목표로 진군했다는 것은 영화상의 허구이다. [31] 와키자카의 대사 "지금쯤 고바야카와는 웅치를 돌파했겠지" [32] 실제로 아무리 빨리 행군한다 하여도 군대로 행진하기에는 하루에 20km가 한계이다. 아무리 웅치에서 여수까지 진군한다 하더라도 8일이나 9일 정도 걸리는데 이 시간에 동시에 협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3] 예를 들어 원래 역사에서처럼 전주성으로 향하던 제6군이 방향을 틀어 여수 근처에서 주로 의병으로 이뤄진 조선군과 싸우게 됐다든지... [34] 2000년대까진 이런 화기를 올린 전투용 수레 제작을 군사를 잘 모르는 문신 관료들이 뭘 모르고 둔 훈수 취급해서 탁상공론으로 제기되다 말았고, 조선은 말기까지 야전에서 화포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으나 연구가 더 진척된 2010년대부턴 조선 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정말 진지하게 논의해 전술을 짜고, 실전에 사용도 해봤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35] 일본 더빙판에서도 수정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36] 실제 역사에서 이순신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데에는 이순신의 엄청난 능력도 있었지만 멍청하게 싸우다 진 일본군의 졸전도 한몫했다. 한산도 대첩 당시 전선 숫자 자체는 조선 수군 55척 VS 왜군 73척으로 우세했지만, 함선의 체급 차이가 워낙에 커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력 차이도 크게 안나는 상황에서 장수들이 무능해서 제대로 싸우지도 못한 것이다. [37] 이런 묘사는 사실 전작 <명량>과도 충돌하는 부분인데, <명량>에서 가토 요시아키는 비중이 거의 없지만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전혀 불편한 모습도 없고, 오히려 그가 구루시마와 충돌할 때 가토가 와키자카 쪽에 서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실제 역사에서 저렇게 야밤에 기습까지 할 정도로 내분을 일으켰다면 와키자카는 할복을 명령받았을 것이다. [38] 그 당시 일본은 해군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39] 유인전을 펼치러 갔던 함선은 광양현감, 흥양현감, 옥포만호, 율포만호, 거제현령, 남해현령, 기타 전라좌수영 소속 함선이었으며, 사도첨사의 깃발은 없었다. [40] 아마도 감독은 거북선을 지상전에서 기병이나 탱크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41] 작중 와키자카가 회상했던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실제 전개가 이랬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다케다 신겐을 상대로 처음부터 학익진을 만들어놓았는데, 신겐은 학익진에서 가장 약해보이는 측면을 발견하여 다케다 노부카도의 기병대를 그리로 돌격시켜 진형을 붕괴시킨 뒤 본대의 어린진을 움직여 극소수의 사상자만 내고 대파했다. [42] 영화에서는 그냥 모든 함대가 매복 없이 와키자카 함대가 나오자마자 학익진을 처음부터 완전한 형태로 만들어놓고 싸우는 걸로 연출되었다. [43] 조선 수군은 판옥선과 작은 협선을 한 조로 운용했다. 협선은 정찰, 공격 뿐만 아니라 보급도 담당했기 때문에 판옥선이 폭약이 없어서 무력화된 일은 실제로는 없었다. [44] 견내량에 추가로 투입된 함선 중에 거(巨)제현령의 함선이 있었다. [45] 2차 진주성 전투 때 전사했으며, 1년 정도 공석이었다가 명량 해전으로 유명한 안위가 후임으로 부임한다. [46] 구키 요시타카가 이 전투에 자신의 안택선을 끌고 나왔다가 대장군전을 정통으로 맞아서 그걸 가지고 본국에 돌아갔다. [47] 시기상으로 안골포 해전 바로 다음날에 치른 것이 된다. 안골포와 부산포의 거리는 20~25km로 안골포에서 하루만에 갈 수는 있지만, 이미 이틀의 시간 간격이 있었다고는 해도 대규모 전투를 두 번이나 연달아 치른 시점에서 사상자가 제법 나온 데다 병사들의 피로도가 상당히 높고, 추가 보급이 이루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부산포까지 연달아 진격하는 것은 무리이다. 4차 출정 때 부산포 해전 이전까지 대여섯 차례 전투가 있었지만, 각 전투의 상대가 10척 내외의 소규모 함대 수준이라 부산포 해전에 별다른 지장을 주지 않았다. [48] 원균의 문제 중 하나였던 조선인 민간인의 목을 베 왜구로 위장시켜 전공을 부풀린 것은 그려지지 않았다. 일각에선 원균 고증을 따라하면 원균의 막장행태가 역겹고 19금이 된다는 지적이 있다. # 다만 학익진의 전개 방식이 각색 되다보니 이순신 지시대로 매복했다 튀어나온 역사와 달리 진형을 만들고 있는데 혼자 뒤처졌다는 건 그 원균이라 해도 억울할 수는 있다. [49] 다만 평택시는 말할 것도 없고 여수시조차 이순신을 도운 사람들 비석 중 원균을 두고 있으며 이에 반발하는 일부 여수시민들이 철거하라고 민원을 넣었지만 전문가들의 공식적인 의견은 "원균은 이순신을 도운 게 맞고 칠천량 패전은 조정 탓."이라는, 진짜 이순신 전문가인지 원균옹호론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말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실제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원균을 나름 판단력 있는 맹장으로 표현하여 시청자들에게 욕을 먹었다. KBS 역사저널 그날에서는 원균을 이순신급으로 두고 명장으로 평가하는 촌극을 보여주었다. 특히 한산도 대첩의 이순신과 원균은 같은 일등 공신이라고 하는데 한산도 대첩문서 보면 알겠지만 신하들이 이순신이면 충분한데 원균 같은놈은 일등공신에 두는것은 부적절하다(실상은 기여도가 없다)고 지적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도(그래도 원균이 일등공신에 등록된것은 선조의 이순신 견제책 때문이었다.) 방송 프로그램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빼먹은 채로 말이다. 무엇보다 영화 개봉전 22년에 원균 후손이 원균을 재평가해야 한다고(참고로 이순신은 폄하하지 않는다면서 내용 곳곳에 이순신을 폄하하는 내용이라기보단 사실 이순신이 한 일은 원균이 한 일이었다는 궤변이 가득하다...심지어 이순신이 원균말을 들었으면 병자호란은 일어나지도 않았을것이라는 궤변까지 있다!) 새로 쓰는 원균이야기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원균을 옹호하는 움직임이 나오니 일부에선 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하는 것. [50] 물론 실질적으로 군을 이끈 건 이순신이긴 하다. [51] 대감이라는 표현은 정2품 이상의 품계일 때 쓰는 표현이고 장군의 경우 수군절도사보다 품계가 낮은 정3품 당하관인 어모장군 이하의 품계를 가진 무관에게 쓰는 표현이다. 대감, 영감, 장군(또는 나리)은 직책이 아니라 품계에 따른 호칭인데 조선은 행수법을 시행하던 나라이기 때문에 품계와 관직이 대등하지 않아도 7품 이하의 경우 2계 이상의 높은 관직을, 6품 이상의 관리는 3계 이상의 높은 관직을 주지만 않는다면 품계에 상관없이 관직을 줄 수 있었기에 품계가 높은 사람을 낮은 관직에 임용하는 경우를 ‘행(行)’, 반대로 품계가 낮은 사람을 높은 관직에 임용하는 경우를 ‘수(守)’라 했다. 만약에 관직과 품계가 대등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받은 품계에 따라 호칭을 다르게 불러야 했다. [52] 원균에게도 부장들이 "장군"이라고 부르는데, 많은 사극들이 현대에서처럼 고위급 지휘관들을 일괄적으로 장군이라 부른다. [53] 저 중 이억기는 일단 표면적이나마 이순신과 직위가 같았고, 배설은 삼군통제사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당시 이순신은 정3품 절충장군으로 복귀하였기에 품계는 같았다. 실제로 배설은 이순신에게 하오체를 쓴다. 즉 이순신보다 확연히 아래인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장군으로 지칭하면서 마치 장군이 대감이나 영감보다 더 존중하는 표현처럼 보이는데, 위에 설명했다시피 정반대다. [54] 실제로 영화에서 등장하여 류형과 함께 조선군을 진두지휘했다. [55] 영화 엔딩 크레딧 가장 마지막에도 이해를 돕기 위해 현재의 지명을 사용하였다고 적혀있다. [56] 실제로 작중에서도 '여수'라는 지명은 와키자카에 의해 딱 한 번 언급되며, 이후로는 매번 '좌수영'이 언급된다. [57] 일본 더빙판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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