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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마운트배튼/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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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기
2.1. 가문의 몰락과 망명2.2. 프랑스 생활2.3. 미쳐버린 어머니, 그리고 영국행2.4. 떠돌이 왕자2.5. 계속되는 시련2.6. 엘리자베스 2세와의 만남
3. 청년기 ~ 노년기
3.1. 해군 복무3.2. 공주의 연인3.3. 영국으로 귀화하다3.4. 약혼과 결혼3.5. 여왕의 부군3.6. 장수와 건강 문제
4. 사망

1. 개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국서인 필립 마운트배튼의 생애를 정리한 문서이다.

2.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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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와 함께
1921년 6월 10일, 그리스 왕국 코르푸 섬에서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의 막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아 4명의 누나가 있었으며 모두 필리포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국서가 되기 전에는 그리스의 왕자였기 때문에 본명은 그리스어인 ‘필리포스’[1]였다.

친가인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가계를 보면 증조할아버지는 덴마크 국왕이며 유럽의 할아버지라 불렸던 크리스티안 9세고 친할아버지는 그리스 왕국 초대 국왕 요르요스 1세였으며, 친할머니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녀이자 니콜라이 1세의 친손녀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이었다.[2] 친할아버지의 누이들, 즉 필리포스의 고모할머니들도 각각 영국의 왕비, 러시아의 황후, 하노버의 왕세자비라는 어마무시한 가족 관계를 자랑했다.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로 가면 외할머니가 헤센 대공국의 공녀였고 이모할머니들은 각각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대공비, 프로이센의 이레네 왕자비,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였으며, 이모가 스웨덴의 왕비였고 외삼촌들은 각각 후작 백작이었다. 또한 빅토리아 여왕 차녀였던 앨리스 공주를 외외증조할머니(어머니의 외할머니)로 두었기 때문에 필리포스는 빅토리아 여왕 현손자이기도 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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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후 8개월의 필리포스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형 콘스탄티노스 1세의 퇴위로 인한 3년 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그리스로 돌아온 지 1년 만에 태어난 늦둥이 외아들[5]인 필리포스는 가족들의 큰 기쁨이었다. 늘 아들을 원하던 부모님과 친척들은 필리포스의 탄생을 반겼으며, 외할머니 빅토리아는 아들 조지 마운트배튼에게, 이모 루이즈는 노나 커에게 이렇게 적었다.
필립은 하루 종일 딱딱한 마룻바닥을 맨다리로 기어다니면서 웃어. 이렇게 명랑한 아기는 살면서 처음 보는 거 같아.[6]
1922년, 필립이 11개월 때 그리스를 방문한 외할머니 이모가 보낸 편지.
그러나 당시 그리스 왕실의 안위는 좋지 못했다. 필리포스의 큰아버지 콘스탄티노스 1세는 1917년 강제 퇴위했던 전적이 있었고 왕위를 물려받은 차남 알렉산드로스[7]가 1920년 패혈증으로 사망한 후 다시 즉위했으나 그리스는 이미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패배에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2.1. 가문의 몰락과 망명

1922년 9월 27일, 그리스-튀르키예 전쟁에서 그리스가 참패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콘스탄티노스 1세는 2번째 퇴위를 했으며, 대중의 분노를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었던 고위층과 장군들은 짧은 재판 후 사형당했다. 전쟁에서 고위 사령관이었던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다른 이들과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8]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안드레아스 일가와 친척들은 여러 곳에 닥치는 대로 도움을 청했으며, 필리포스의 외가였던 바텐베르크 공가는 영국 총리에게 로비했고 조지 5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영국 외무부 장관 조지 커즌은 영국 정보부 요원 제럴드 타블롯을 보내 안드레아스 왕자의 처벌에 대해 신(新) 정권의 지도자들과 협상하게 했는데, 그 결과 다행히도 안드레아스 왕자의 사형은 면했지만 그들 일가에게 추방령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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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돌이 지난 필리포스[9]
누나 소피아에 따르면 스페인의 알폰소 13세,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교황, 조지 5세[10] 등이 도와주려 했다고 한다. 결국 조지 5세 같은 실수[11]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영국 경순양함 칼립소(HMS Calypso)를 급파해 이들을 구출하도록 했다. 고용인 6명[12]도 안드레아스 일가의 뒤를 따랐으며, 승선은 군중들이 모여들까 비밀리에 진행됐지만 몇몇은 안드레아스 왕자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첫 날 안드레아스 왕자와 앨리스 왕자비가 배에 오른 후, 그 다음날에 코르푸에 있는 궁으로 가 아이들을 데려왔다.

필리포스의 넷째 누나 소피아 공주는 "당시 일은 끔찍했고 혼란 그 자체"라고 회고했으며, 떠나기 전 언니들인 마르가리타 공주 테오도라 공주가 자신들의 모든 문서와 편지를 태워서 "수십 년이 지났어도 몬 레포스에서의 연기 냄새를 기억한다"고 했다. 짐을 챙긴 후 차로 이동하고 작은 배에 올라 군함까지 가서야 승선할 수 있었으며, 당시 생후 15개월이던 필리포스는 항해 내내 과일 상자로 만든 침대에 눕혀져 있었다고 한다.

가족들은 처음에 영국으로 가고 싶어했으나, 이는 영국 외무부와 조지 5세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이탈리아 왕국 남부 브린디시[13]에 도착해 기차를 타고 수도인 로마로 향했다. 아무것도 모르던 필리포스는 기차 여기저기를 기어다니고 창문을 핥으며 놀았다고 한다.[14]

로마에 도착한 안드레아스 일가는 말 그대로 돈 한 푼 없었기 때문에 영국 대사관에서 돈을 빌려주었고, 파리행 기차표까지 구매해줬다. 나중에 은행가들과 연락이 닿아 재산을 찾은 뒤엔 배고프고 가난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재정 상황이 이전에 비해 나빠졌기 때문에 주변 친척과 지인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로마에서 필리포스의 백모인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15]가 살고 있는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2.2. 프랑스 생활

1923년, 안드레아스 왕자 일가는 마리 보나파르트 왕자비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 근교 생클루드에 정착해 그녀가 소유한 별장에서 생활한다. 이 때 필리포스는 생후 18개월이었으며, 생클루드에는 마찬가지로 그리스를 떠나 망명 온 사촌누나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가족들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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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6세
유럽 각국의 부유한 친척들[16]은 필리포스의 학비를 대줬고, 필리포스는 파리에 있는 미국식 신설학교인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McJannet American school)에 입학한다. 맥자넷 스쿨은 필리포스를 따뜻하게 맞이했으며, 학생들이 다양한 외국 문화를 배우며 사람들의 차이점을 존중해 나가는 것이 교육 이념이었다.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학교의 창립자이자 교장이던 도널드 맥자넷에게 아들의 활달한 성격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도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고 필리포스가 미래에는 영어 말하는 곳에서 지낼 것이기 때문에 미국/영국식으로 교육되고 영어를 잘하길 바란다고 전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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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자넷 아메리칸 스쿨 급우들과 함께 (가운데 금발머리) 1929년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에서 개최된 화살 쏘기 대회에서 친구들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필리포스는 운동을 좋아하는 활동적인 아이였고, 뛰어나진 않았지만 학업에도 충실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30분 일찍 가정교사와 함께 등교해 칠판과 책상을 정리했으며, 누나들이 말해준 예의범절 같은 충고를 언급하던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18] 학교를 너무 좋아해 어머니 앨리스에게 기숙사에서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당시 안드레아스 일가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맥자넷 스쿨에서 필리포스는 ‘성이 없는 남자아이’라고 불렸다.[19] 이 시기 동안 가장 친한 친구는 프리맨 쿠(Freeman Koo, 顧裕昌 구유창)와 웰링턴 쿠 2세(Wellington Koo, Jr., 顧福昌 구푸창)라는 중국인 형제였다.[20] 필리포스는 평생동안 맥자넷 부부를 기억했고 그들에 대해서 매우 높게 평가하고 애정을 담아 말했다. 1970년대까지도 도널드 맥자넷과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맥자넷 부부는 필리포스가 1947년에 엘리자베스 공주와 혼인했을 때 학교 앨범을 선물했고, 첫 아들 찰스 3세가 학교에 다닐 나이가 되자 ‘아버지가 어린 아이였을 때’라는 필리포스의 학교 생활에 관한 책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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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베르크 해변에서 필리포스와 친구 엘렌 코르데[21]
생클루드에 있던 집은 정원이 딸린 예쁜 저택이었으며, 이곳에서 모두가 함께 생활했다. 비록 불안정한 환경이었지만 가족들은 막내 필리포스를 매우 귀여워했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휴일에는 가족과 함께 바닷가로 피서를 가거나 친척들을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아직 어렸던 필리포스는 프랑스 생활에 금방 적응해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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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0월 촬영된 마지막 가족사진
위의 사진을 찍고 나서 몇 년 후 가족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며, 필리포스의 평범하고 행복했던 생활도 막을 내린다. 먼 훗날 그는 프랑스 망명 시절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고한다.[22]

2.3. 미쳐버린 어머니, 그리고 영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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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9세[23]
1931년, 신경쇠약으로 수년간 고통받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 스위스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누나들과 함께 외출을 하고 돌아온 필리포스는 그날 저녁에서야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사실상 이때 앨리스 왕자비와 안드레아스의 결혼 생활은 끝났으며, 안드레아스 왕자는 파리에 있는 가족들의 집을 정리했다.

곧이어 앨리스 왕자비에게 조현병 진단이 내려졌고, 누나들은 독일 제국 출신의 왕공족들에게 8달 만에 모두 시집을 갔다. 어머니가 조현병 환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혼삿길이 막힐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24]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몬테 카를로에서 따로 생활하게 됨에 따라, 8살의 필리포스는 혼자가 되었다. 기숙학교는 가족의 갑작스러운 해산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안드레아스 왕자는 자신이 경험한 가혹한 그리스 군대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기를 바라며, 아들을 영국에 있는 학교에 보내고 싶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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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침 스쿨에서 찍은 학교 증명사진 침 스쿨 급우들과 함께, 뒷줄 맨 오른쪽.
그를 돌볼 부모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가 필리포스를 책임졌다. 필리포스는 큰 외삼촌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 (George Mountbatten)을 후견인으로 두고, 서리에 있는 명문 사립학교 침 스쿨에 입학해 외할머니 빅토리아와 외삼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영국에서 지냈다.

2.4. 떠돌이 왕자

필리포스는 7년 동안 어머니와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편지 한 통 받지 못한 채 홀로 생일을 맞이해야 했다. 필리포스는 사실상 고아였고 방학이나 크리스마스같은 연휴때는 외할머니 빅토리아가 있는 켄싱턴 궁전, 버크셔의 밀포드 헤이븐 후작저, 코핀스, 독일에 있는 누나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지냈다. 그중에서도 셋째 누나 케킬리아가 시집간 헤센 대공가[25]가 있는 다름슈타트와 볼프스가르텐[26]에 자주 갔기 때문에 누나들 중 셋째 누나 케킬리아를 제일 좋아했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이 휴일들을 항상 즐겼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필리포스의 일정을 계획했기 때문에 휴일마다 정확히 어디로 가는지 혼란스러웠다고.

미래의 아내 엘리자베스 공주가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부족함 없이 자란 것과는 달리 확연히 대조되는 성장 배경이었던 것. 그럼에도 그는 항상 밝은 모습이었으며 부모에 대한 기억은 놀라울 정도로 긍정적이었는데, 가끔씩 다른 가족들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했지만 그들에 대해서 만큼은 항상 애정, 심지어 동경을 담아 말했다고 한다. 부모의 초상화는 모두 버킹엄 궁의 서재에 걸려있었고, 거의 평생동안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인장 반지를 끼고 살았다.

필리포스의 친구이자 친척인 지나 베르너[27]는 필리포스가 기숙사에서 행복했지만 어릴 때 아래처럼 자신한테 말했다고 한다.
"모두들 돌아갈 집이 있어. 하지만 나는 아니야."
"Everybody has a family to go back to. I don't."

2.5. 계속되는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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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3세
1933년, 필리포스는 독일로 건너가 슐레 슐로스 잘렘(Schule Schloss Salem)[28]에 입학한다. 잘렘 학교는 둘째 누나 테오도라의 남편 바덴의 베르톨트의 소유였기 때문에 누나 가족과 함께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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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에서 6번째, 잘렘 시절의 필리포스.
뒤 쪽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걸려있다.
잘렘에서 지내는 동안 나치당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었다. 어느 날 유대인 학생이 반유대주의자에 의해 삭발을 당하자 필리포스는 이 모욕적인 대우를 가리기 위해 자신의 침 스쿨 모자를 씌워주었다. 쿠르트 한에 따르면 필리포스는 사람들이 나치 경례를 할 때마다 크게 웃었으며, 경고를 받은 후에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게 웃었다고 한다. 결국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갑작스럽게 결정했다.

필리포스는 잘렘에 다닌 지 2학기 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턴 스쿨(Gordonstoun School)에 입학했다. 고든스턴 스쿨 역시 슐레 슐로스 잘렘의 설립자인 쿠르트 한(Kurt Hahn)이 스코틀랜드로 건너와[29] 세운 기숙학교였으니 자매학교로 전학한 셈이다. 고든스턴 스쿨은 전교생 모두가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기숙사제로 운영되었으며, 특유의 체력장 문화와 엄한 학풍으로 유명했는데, 단순히 학문이나 교육적인 측면에서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을 육체적으로 단련시키는, 마치 사관학교를 방불케 하는 학교였다. 필리포스는 이런 스파르타식 학풍이 본인의 성정과 잘 맞았는지 학교생활에 금방 적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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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고든스턴에서 열린 연극을 위해 분장한 모습
이후에도 필리포스는 모교인 고든스턴에 많은 애정을 가져 기부도 지속적으로 했고 장남 찰스 3세도 이 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러나 유약하고 섬세한 성격의 찰스 3세는 집에서[30] 멀리 떨어지고 폐쇄적인 이곳의 생활을 몹시 싫어했고, 향수병에 시달렸으며 동급생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해[31] 부자 관계가 소원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훗날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두 아들 윌리엄 왕세자 해리 왕자 상류층 자제들만 다니는 학교인 이튼 칼리지에 재학시켰다. 참고로 고든스턴은 오늘날까지 학교폭력 문제로 악명이 자자하다.

1937년에는 큰 비극이 벌어졌다. 셋째 누나 체칠리아 런던에서 열리는 시동생 루트비히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가던 도중 벨기에 오스텐더 상공에서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난 것. 이 사고로 넷째를 임신 중이던 만삭의 누나와 매형, 조카 2명까지 전원 사망했다.[32]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해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이 끔찍한 비보를 숨기기로 결정했지만 문제는 그날 저녁에 있었다. 학교에서 흘러나오던 BBC 라디오 방송으로 누나의 죽음을 접하고 말았던 것. 사촌 누나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는 남편 켄트 공작 조지 왕자와 자택에서 이 방송을 듣자 필리포스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에 곧바로 고든스턴으로 연락했으며 크게 동요하는 사촌동생을 가라앉혔다. 필리포스는 사고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비행기의 작은 잔해를 간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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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헤센 대공가의 장례식 (선두 오른쪽에서 2번째, 제복군인들 사이)[33]
설상가상으로 누나 가족의 장례식을 치른 뒤 불과 몇 달 후, 후견인이었던 큰 외삼촌 밀포드 헤이븐 후작 조지 마운트배튼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연휴마다 같이 시간을 보냈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는 가장 아끼던 셋째딸의 죽음 이후 필리포스를 버리다시피 하고 모나코에서 애인과 함께 생활하며 카지노를 전전하며 살다가 1944년 말 모나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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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고든스턴의 지붕 위에 앉아있는 모습
딸의 장례식에서 근 7년 만에 아들을 만난 앨리스 왕자비는 필리포스를 데리고 왕정이 복고된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죽은 형을 대신해[34] 필리포스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실질적인 아버지 역할을 해주었고, 필리포스도 루이 마운트배튼을 사실상 아버지로 여긴 데다가[35] 영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하며 해군이라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36]에 불안정한 그리스로 돌아가기보다는 영국에 남는 선택을 한다.

훗날 그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와의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 댁에서 (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37] 무슨 말을 쓰셨나요?”라는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집에서’라는 게 무슨 뜻이죠?
What do you mean ‘at home’?

2.6. 엘리자베스 2세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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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필리포스 인생의 전환점이 된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조지 6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가 큰 딸 엘리자베스 공주와 작은 딸 마거릿 공주를 데리고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하러 방문한 것이다. 사실 엘리자베스 공주와는 사촌누나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의 결혼식때 만난 적이 있었으나 두 사람 모두 서로를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상 공식적인 첫 만남이였던 것.

당시 18세의 어린 생도였던 필리포스는 학생 대표로 나가 국왕 일가를 안내하였고[38], 공주들의 에스코트 역할을 맡았다. 이때 13세의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리포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사실 말이 에스코트지 놀이 상대로 왔던 필리포스는 공주들의 기차놀이에 질려버린 나머지 “테니스 네트를 뛰어넘는 놀이를 하자”고 제안한 후 네트를 넘어가며 달렸는데 그 모습에 엘리자베스는 다시 한번 반해버렸고, 그날 밤 가정교사인 크로포드 부인에게 “필리포스의 모습은 마치 그리스 신처럼 멋있었다”며 그와 함께한 이야기를 밤새 늘어놓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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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 앞줄에 앉아있는 소녀가 엘리자베스 공주, 뒷줄에 서서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흰 생도 모자를 쓴 소년이 필리포스다. 그리고 그의 오른쪽이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

많은 이들이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의 풋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필리포스의 친척들은 달랐다. 그들은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를 닮아 잘생기고 훤칠한 필리포스에게 창창한 앞날을 만들어 주려 하고 있었다. 바로 영국 여왕의 남편 자리였다.[39] 특히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은 이 원대한 계획의 중심 인물로, 그는 누나의 아들인 필리포스를 장래 영국 왕의 아버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40] 이 계획에는 외할머니 헤센의 빅토리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왕실 사람들 대부분이 참여했고, 엘리자베스 공주의 작은어머니이자 필리포스의 사촌누나였던 마리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작 필리포스는 13세였던 엘리자베스를 그저 어린애로 생각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이미 세계 1차 대전 이후로 외국 왕족과의 혼담이 줄어든 영국에선 공주 또래의 귀족이나 젠트리 가문의 영식을 부마로 뽑길 선호했었다. 가장 유력했던 후보는 이집트의 투탕카멘 발굴을 후원한 카나본 백작가(Earl of Carnarvon)[41] 후계자 헨리 허버트(1924~2001)였다.[42] 왕실과 왕래가 잦았던 가문 덕에 엘리자베스의 소꿉친구였다고.

3. 청년기 ~ 노년기

3.1. 해군 복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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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12월 13일 라밀리즈(HMS Ramillies)에서
사관 후보생 필리포스
18세의 필리포스는 영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 장교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 1940년에는 콜롬보를 모항으로 둔 낡은 리벤지급 전함 라밀리즈(HMS Ramillies)를 시작으로 인도양에서 호주 병력 호송대를 호위했다. 당시 그리스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필리포스는 전선에 나갈 수 없었다. 이후 카운티급 중순양함 켄트(HMS Kent) 및 슈롭셔(HMS Shropshire)에 배치되어 인도양의 영국 ~ 남아프리카 ~ 호주간 해상 교통로 호송 임무에 참여했다.[43]

1940년 6월에 이탈리아 왕국 그리스 왕국을 침공하면서 그리스도 전쟁에 참여하자 필리포스는 전선에 나갈 수 있게 됐다. 따라서 1940년 말에는 알렉산드리아 지중해함대 소속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밸리언트(HMS Valiant)에 배치되어 리비아 포격, 크레타 섬 전투 마타판곶 해전에 참여했다. 마타판곶 해전에서는 탐조등을 이용해 은밀히 접근하던 이탈리아 왕립 해군 함정들을 발견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한다. 마타판곶 해전에서 이탈리아 측 전투기가 없어 비교적 쉽게 이길 수 있었다. 하지만 크레타 섬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44]

1942년 7월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셰익스피어급 구축함 월리스(HMS Wallace)의 부장(副長)에 임명되었다. 윌리스의 부장이 다른 곳으로 배치되자, 필리포스는 그의 자리를 맡아 대위로 진급했다. 필리포스는 21세로 가장 어린 나이에 대위로 진급했다. 월리스는 주로 북해, 북대서양의 호송 임무를 수행하며 독일 공군과도 여러 차례 교전했고, 이후 1943년에는 지중해로 이동하여 시칠리아 상륙작전에 참여하였다. 시칠리아 상륙작전 무렵에는 추축국 공군의 야간 폭격을 받아 거의 격침 직전의 상황에 몰리기도 했다. 이때 필리포스는 선내의 나무들을 엮어 간이 뗏목을 만들고 여기에 연막탄을 피워 바다에 던지는 기지를 발휘 했다고 한다. 야간이라 정확한 식별이 어려운 상황에서 적 폭격기들은 이 뗏목을 적함으로 오인하여 무사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44년에는 신조된 W급 구축함 웰프(HMS Whelp)의 부장에 임명되었다. 이 HMS 웰프는 북대서양 호송 임무를 수행하다가 독일 해군의 수상함 세력이 거의 소멸하자 동양함대(이후 태평양함대)로 전속되어,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에는 인도양 남태평양에서 항공모함/전함 호위 등 다양한 전투임무를 수행하다가 종전을 맞이하였다. 종전 후인 1945년 9월에는 일본의 항복 뒷처리를 위해 도쿄만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후 HMS 웰프는 홍콩, 호주 등을 거쳐 영국으로 귀환, 1946년 2월 포츠머스에 입항한다. 이로써 필리포스는 해군 장교로 6년여에 걸친 전시 임무를 완수했다. 5월에는 마타판곶 해전의 영웅 중 한명으로 인정됐다. 귀국해서는 육상 임무로 전환되어 윌트셔 주 코섐에 위치한 해군 부사관 통신학교 교관직을 수행했다.

1944년 12월 3일,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가 사망했다. 아테네에서 살던 앨리스 왕자비는 동생 루이 마운트배튼을 통해 HMS 웰프에 있던 필리포스에게 소식을 전했다.

3.2. 공주의 연인

한편 엘리자베스 공주는 해군사관학교에서 필리포스와 만난 이후 짝사랑에 빠져 계속 편지를 쓰고 사관학교에 면회를 가기도 했으나, 필리포스는 자신보다 5살이나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엘리자베스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당시 잘생긴 외모와 호탕한 성격으로 많은 상류층 영애들의 흠모 대상으로써 사교계를 휩쓸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에도 필리포스에게 첫눈에 반해 호의적이였던 엘리자베스와는 달리, 필리포스는 그저 친척 아가씨이자 어린 동생 수준으로 그녀를 대했다. 나이로나 외모로나 취향 밖이었지만[45] 공주, 그것도 장래 모든 군인의 상관이 될 공주의 편지를 무시할 수 없던 노릇이라 가끔씩 답장을 써주었고, 엘리자베스는 그렇게 오는 답장을 혼자 방에 들어가 몰래 읽으며 설레어 했다. 필리포스가 엘리자베스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을 알던 동기들은 "요즘도 공주님께 편지 보내냐"며 그를 놀렸다고 한다.

1941년 10월 휴가 중에 필리포스는 윈저 성에 초대되어 조지 6세 및 엘리자베스와 환담을 나누기도 했고, 그해 11월에는 필리포스의 사촌매형[46]이자 엘리자베스의 작은아버지인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결혼기념일 파티[47]에서 둘이 같이 춤을 추기도 했다. 그럴수록 엘리자베스는 점점 더 사랑에 빠져들어 작전에 나간 필리포스에게 계속 편지와 음식을 담은 소포를 보냈는데, 여전히 필리포스는 마지못해 가끔 회답하는 수준이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주변인들에게 필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공주는 사촌인 마거릿 로데스에게 "지금 너무 신나! 엄마가 필립이 여기에 와서 지내도 된다고 허락했어!(It's so exciting. Mummy says that Philip can come and stay.)"라고 편지했으며 사촌 다이애나 보우스라이언에게 "난 지금도 필립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는 정말 재밌어. 진지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가 진지해지면 꽤나 논리적으로 말한다고 생각해. 지난 일요일 밤에 우린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어. 축음기 음악 소리에 맞춰서 춤을 췄는데 굉장히 즐거웠어.(I still think he is charming and he is great fun. Hardly ever serious. But when he is, I think he talks good sense. We had a terrific time on Sunday night. We danced to the gramophone, which was great fun.)"라고 편지했다. 이외에도 엘리자베스는 "필립이 다시 나한테 편지했어!", "필립이 곧 방문한대! 너무 즐겁지 않니?" 라고 편지하는 등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던 1943년 12월 말, 당시 필리포스는 부장을 맡고 있던 HMS 월리스가 계속된 기계 고장으로 수리 도크에 들어가는 바람에 육상에서 비교적 여유로운 연말을 보낼 수 있었다. 그 바람에 크리스마스 휴가도 윈저 성에서 왕실 가족들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17살을 맞이한 엘리자베스는 그 사이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고, 필리포스는 지중해 전선에서 실전을 치르면서 바이킹 전사 같은 남성적 매력이 넘쳐나던 때였다. 바로 이 때 엘리자베스는 성내에서 열린 왕실 크리스마스 공연에서 주인공을 맡아 연기를 펼친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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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본 필리포스는 엘리자베스의 성숙한 모습에 확 빠져들었고, 이들의 관계에도 본격적으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 엄청 큰 필립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자랑스러운 소유자야. 사진은 벽난로에 있고 나를 보고 있어. 이 사진이 도착했을 때 나는 꽤 많은 질책을 들었었지만 엄마가 "그는 잘생긴 아이야."라고 한 말은 동의해! 나는 샌드링엄의 고용인들은 모두 이 사진을 보고 "어머, 이게 누굴까나."라는 말을 했다고 장담해."
1945년 2월, 엘리자베스 공주가 다이애나 보우스라이언에게 보낸 편지

1944년, 필리포스는 새로운 구축함 HMS 웰프에 배치되어 다시 전선에 나가면서 선실에 엘리자베스의 사진을 걸어놨고, 엘리자베스도 복무 중에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필리포스의 사진을 가장 아끼며[49] 왕궁의 자기 방에 걸어놨다고 한다.[50]

엘리자베스 공주는 이 때부터 아버지 조지 6세에게 둘의 관계를 알리고 그와 결혼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조지 6세는 큰딸에게 "아직 결혼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이니,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다. 엘리자베스의 할머니 메리 왕비도 1944년 1월에 "엘리자베스와 필리포스가 지난 18개월 동안 사랑에 빠져있었지만, 왕과 왕비는 엘리자베스가 아직 너무 약혼하기엔 어리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엘리자베스가 결혼 전 더 많은 것을 겪고, 또 더 많은 남자를 만났으면 한다"고 편지에 적었다. 언론에는 "둘이 사귀는 것을 왕실에서 반대했다"는 기사도 많이 나오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지 6세는 매사에 소심했던 자신과 다르게 남자답고 건실하고 활달했던[51] 필리포스를 좋아했지만, 큰딸이 너무 어려 걱정했을 뿐이었다. 조지 6세는 필리포스가 전쟁 중에도 휴가를 나오면 윈저 성이나 왕가의 여름 휴가지인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에 초대해 왕가 사람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배려했다.

1946년, 전시 임무를 모두 마치고 돌아온 필리포스는 밸모럴 성에 초대되어 1달의 긴 여름 휴가를 엘리자베스와 함께 보냈다. 이때 필리포스는 20세의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하고 엘리자베스도 완전히 결혼할 뜻을 굳히며 아버지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바로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 무렵에는 왕실에서도 둘의 관계를 눈치채 주변 중신과 귀족들이 엘리자베스에게 직간접적으로 우려를 전달하기도 했으나, 이미 사랑에 눈이 먼 엘리자베스에게는 소 귀에 경 읽기였다. 필리포스는 조지 6세에게 둘의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다.

혈통으로만 따지면 빅토리아 여왕 현손자이자 전하(HRH) 칭호를 가진 엄연한 고위 왕족이었기 때문에 부마로서의 자격은 충분했다. 그러나 몰락한 가문 출신에 부모도 온전치 않은 점,[52] 무엇보다도 그의 누나들이 전부 독일 왕공족들과 결혼한 점이 문제였다. 또한 일부 매형들은 나치당에 가입하거나 독일군 장교로도 복무했었다.

첫째 매형 호엔로에랑엔부르크 후작 고트프리트, 둘째 매형 바덴 변경백 베르톨트[53] 모두 독일 국방군에 복무했었고, 넷째 매형 헤센카셀 공자 크리스토프는 나치 친위대 장교였다.[54] 셋째 매형인 헤센 대공 게오르크 도나투스는 앞서 상술했듯 전쟁 발발 전인 1937년에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 사고로 일가족과 함께 사망했다. 다만 셋째 누나 부부도 사망 6개월 전에 이미 나치당에 가입한 상황이었다.

2차례의 세계 대전을 치른 직후라 반독 정서가 극에 달한 상태여서 일반 국민은 물론 상류층들 사이에서도 필리포스의 집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다. 대표적으로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나 윈스턴 처칠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특히 왕비는 엄연히 백작의 딸이지만 그리스 공주 출신의 동서이자 필립의 사촌인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에게 은근히 무시당해서 서로 감정이 좋지 않았다. 필리포스가 영국 해군 항해장교로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최일선에서 복무한[55] 참전 용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 독일에 대한 영국의 여론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3.3. 영국으로 귀화하다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가 친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 필리포스의 가족들은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영국 해군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영국으로 귀화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사촌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는 필리포스의 영국으로의 귀화는 매우 좋은 생각이며,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56]

필리포스의 귀화를 위해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이 매우 많은 노력을 했다.[57] 먼저 영국의 조지 6세의 허락과 그리스의 요르요스 2세의 허락이 필요했지만, 두 군주 모두 기꺼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요르요스 2세의 입장에서 귀화는 다른 나라에게 자국의 왕자를 빼앗기는 굴욕적인 상황처럼 보여질 수도 있었으며[58], 조지 6세의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의 의도가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과의 결혼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지 6세는 일기에 "필리포스의 귀화는 결혼과 관련 있을 것 같다."고 적었다.

두 군주들이 허락을 꺼렸고 영국 정부에서도 필리포스의 귀화로 발칸 반도의 정치 상황에 끼어들까 봐 조심스러워했다. 결국 필리포스의 귀화는 3년이 걸렸다. 그동안 루이 마운트배튼은 여러 곳에 로비를 하는 등 이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조지 6세가 필리포스의 귀화를 허락하자, 루이 마운트배튼과 요르요스 2세는 앨리스 왕자비에게 필리포스가 영국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라고 했다.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고 조지 6세는 요르요스 2세가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해 허락이 늦어졌을 뿐이라고 했다.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와 요르요스 2세 모두에게 온전히 승인을 받았음을 확인했다. 이후에도 앨리스 왕자비와 외할머니 빅토리아, 이모 루이즈 왕세자비가 함께 버킹엄 궁전에 방문해 왕과 왕비와 상의하는 등 사실상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오갔다.

필립은 귀화로 새로운 성이 필요했다.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가문 이름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로 올덴부르크 가문의 분가였기 때문에 올드캐슬(Oldcastle)이라는 성을 추천 받았다. 하지만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리포스는 어머니 가문의 성 마운트배튼(Mountbatten)[59]을 사용하기로 했다.

1947년 5월 18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필립 마운트배튼 대위로 영국에 귀화했다. 아울러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신분과 계승권[60]을 포기함과 동시에 종교도 동방정교회에서 성공회로 개종[61]했다.

3.4. 약혼과 결혼

조지 6세는 이에 엘리자베스가 21세 생일을 맞는 이듬해 1947년 4월까지는 둘의 교제를 발표하지 않고, 12주의 남아프리카 순방 동안 약혼에 대해서 더 생각할 시간을 가지겠다는 조건 하에 허락했다. 중간중간에 둘의 교제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는 했으나, 왕실에서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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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공식 약혼사진
마침내 1947년 7월 9일, 영국 왕실은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이 날이 선택된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21세 생일을 맞이한 기념으로 다음 날인 7월 10일에 야외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에 맞춰 대중에게 두 선남선녀의 모습을 공개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어 필립의 정식 청혼과 결혼 발표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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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공주와 필립 마운트배튼의 결혼식
같은 해 11월 20일 11시 30분,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세기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상황에서 열린 로열 웨딩은 큰 화제가 되었으며, 비록 결혼식에 참석한 영국 왕족 귀족들은 필립을 향해 안 좋은 말을 수군거렸지만[62] 이미 필립도 논란거리를 정리한 상황이었고,[63] 현역 해군 대위에 훤칠한 미남이었기 때문에 국민들의 열렬한 축하를 받았다. 이 결혼식의 공식 하객만도 2천여 명에 이르렀고, 결혼식을 보기 위해 50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런던 거리에 운집했다. BBC 라디오를 통해 결혼식 중계 방송을 들은 전 세계 청취자도 약 2억 명에 달했다고 한다. 풀영상

결혼식에는 필립의 사촌인 엘레니, 이리니, 에카테리니, 5촌 조카인 알렉산드라와 그 남편 페타르 2세, 6촌형 프레데리크 9세와 당숙인 호콘 7세, 5촌 조카인 미하이 1세, 6촌인 부르봉파르마의 공녀 안,[64] 사촌형 파블로스의 왕비이자 누나 소피아의 시누이이며 동시에 필립의 6촌이기도 한 프레데리키, 룩셈부르크 대공세자 등 유럽 전역의 친척 왕족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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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과 피로연을 마치고 3주간 가진 신혼여행 초반은 본가나 다름 없는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의 브로드랜즈 저택에서 보냈다. 그리고는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65]으로 이동하여 나머지 기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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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밸모럴 성에서 찍은 가족사진
결혼 1년 만인 1948년에 첫아들 찰스 3세가 태어났고, 이듬해인 1950년에는 고명딸 앤 공주가 태어났다.

이후에도 필립은 영국 해군에 계속 복무했다. 1948년에는 그리니치의 왕립해군대학의 교관직을 맡았으며, 1949년에는 영국령이었던 몰타의 지중해 함대로 나가 구축함 체커스(HMS Chequers)의 부장직을 맡았다. 이어 1950년에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역시 몰타 지중해 함대 소속 호위함 맥파이(HMS Magpie)의 함장에 임명되었다. 엘리자베스는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이 해외 근무 시기에 필립과 함께 몰타에서 거주했는데, 훗날 여왕이 되고 나서 몰타에서 보냈던 이 시기를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3.5. 여왕의 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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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직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66][67][68]
종전 이후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초가 된 조지 6세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자[69], 추밀원은 1951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을 국왕 대리로 임명했다. 필립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군을 떠나야 했다.[70] 부부는 국왕 대리로서 영연방을 순방했다. 1952년 2월 6일 케냐에 체류하는 도중 조지 6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필립은 다른 수행원들을 물리친 후 직접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때부터 앨버트 공 사후 91년 만에 등장한 여왕의 부군으로서 필립의 임기도 함께 시작되었다.
조지 6세의 사망으로 인한 갑작스런 귀국
급히 귀국한 부부의 앞에 놓인 첫 번째 문제는, 왕가의 명칭 변경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필립의 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은 "남편의 성씨를 따라 영국 왕가의 명칭이 윈저 왕가에서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지만, 이때까지 아직 살아있었던 대왕대비(즉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 테크의 메리는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는 원래부터 합의되어 있던 사항이라고 한다.[71] 필립은 이따금씩 "영국에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못하는 남자는 나뿐"이라고 자조하고는 했다.

1960년 차남 앤드루의 출생을 앞두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전하의 호칭을 가진 왕족들은 성이 없는데 왕족 직함을 쓰지 않을 새로운 아이의 손자부터는 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72] 여러가지 논의 후, 필립과 여왕의 일부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surname)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왕가의 이름(family name)은 계속 House of Windsor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surname=family name이지만, 영국 왕가의 경우 앞으로 surname은 마운트배튼윈저(Mountbatten-Windsor), family name은 윈저 가(House of Windsor)라고 하여 구분하겠다는 것이다.[73] 즉 성씨는 달라지더라도 왕가의 이름은 계속 Windsor로 고정된다는 뜻이다.[74]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당시 영상[75]
조지 6세의 사망과 엘리자베스 2세의 갑작스러운 즉위로 인해 평범한 가정 생활과 그동안 쌓아왔던 해군 경력을 겨우 31세의 젊은 나이에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즉위 초창기에 엘리자베스 2세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76] 실제로 호주 순방 당시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BBC 뉴스 필름 촬영이 예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부부 싸움을 하다가 화가 난 엘리자베스가 필립 공에게 라켓을 던지고, 필립 공이 숙소 밖으로 뛰쳐나오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요즘이었으면 이 영상이 유포되어 언론과 대중들로부터 신나게 씹혔을 테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왕의 사생활을 언론이 보도한다는 것은 절대로 상상할 수없는 일이어서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카메라를 열어 필름을 빛에 노출시켜 영상을 없앴다고 한다.

또한 여왕의 남편임에도 여전히 무일푼 외국인 왕자라는 귀족들의 비아냥과 모욕을 듣거나 왕가의 성을 윈저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서서 남편 필립 공의 지위를 확실하게 정리했는데, 특히 딸을 비롯한 여계 후손들과 왕족 호칭이 안 붙는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란 성을 쓰게 조치했다. 심지어 자신도 아주 사적인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윈저 부인이라는 이름을 쓴 적도 있다.[77]

더불어 1953년부터 시작된 당시 에든버러 공작의 왕실 작위에 대한 논쟁 끝에 여왕은 그에게 1957년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공(Prince of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작위를 내리는 한편[78], 그를 칭할 때에는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로 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더불어 필립 공의 공식 지위가 '현저하고 우선하게 여왕 폐하 다음(Place, Pre-eminence, and Precedence next to Her Majesty)'이라고 법적으로 못을 박았다. 이로써 필립 공의 위치는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79]

아내 엘리자베스 2세와는 평생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데에는 남편 필립 공과의 모범적인 결혼 생활도 한몫 했다. 외국에 알려진 것처럼 수십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왕이 남편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 눈감아주었고, 필립 공 역시 바람은 피워도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본분을 잊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간히 나오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을 평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고전적인 유형의 부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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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신혼여행 중 (위)
2007년 결혼 60주년을 맞이해 위를 재현 (아래)
필립 공은 여왕의 부군이라는 위치 때문에 항상 아내보다 한 발 물러서 있어야만 하는 처지에 엘리자베스 2세는 국정을 혼자 살피기 때문에[80] 정치적으로 발언권을 가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대신 여왕을 대리해 해외를 순방[81]하거나 각종 학술단체 또는 자선단체의 후원자를 맡는 등 민간 활동에서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필립 공은 생전에 자신을 "나는 세계 최고의 현판 제막식 전문가"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1956년 남극 제도를 방문한 이후 자연 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의전 서열상 영국군 최고 계급 보유자로, 영국 육군, 영국 해군, 영국 공군 원수 계급을 보유하고 있고, 201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해군 최고사령관(Lord High Admiral) 직위를 넘겨받았다. 옛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마운트배튼 경처럼 외국인이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반대로 인해 해군 제독 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다. 반면 필립 공은 영국 해사 출신이고 해군 현역시절 2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중령까지 진급한데다 이미 본국 왕정도 없어진 상태라 큰 논란이 없었던 듯하다.

3.6. 장수와 건강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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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70주년 기념 사진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 중 가장 장수했다. 이전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은 여왕의 손녀인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공주(1883년 ~ 1981년, 97년 313일)[82]였는데, 2019년 4월 19일부로 필립 공이 이 기록을 경신했다.

2010년대 들어 워낙 고령이다 보니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오곤 했었다. 2011년 12월 23일에는 가슴 통증을 호소해 병원에 입원해서 관상동맥경화 수술을 받고 27일 퇴원했다. 2012년 6월 4일에는 전날 있었던 수상 퍼레이드에서 비가 오는 날씨에 2시간 동안 선 채로 참석한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 증세를 보여 런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9일 퇴원했다. 2013년 6월 6일, 복부 수술을 위해 런던클리닉에 입원했다.

2017년 8월 2일 버킹엄 궁에서 열리는 왕립 해병대 퍼레이드 행사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왕실 업무를 끝내고 은퇴하였다. 필립 공이 맡았던 업무들은 막내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에게 인계되었고, 이 95세 전후가 왕실의 은퇴 연령으로서 장차 여왕 역시 은퇴하고 아들이 섭정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이 제기되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2019년 1월 17일,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인근에서 본인이 운전하던 랜드로버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큰 부상 없이 멀쩡하다는 병원 진단이 나왔다.[83] 그러나 사고 이틀 뒤 안전벨트 없이 또 운전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어 고령자의 운전 금지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2월 9일 운전면허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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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세 기념 사진[84]
왕실 공무에서 물러난 후 여왕과 찍은 사진들을 보면 거동도 크게 불편해 보이지는 않는 등 꽤 정정한 모습이었다.

2020년 6월 10일 99세 생일을 맞이해 영국 역사상 현직 군주의 배우자로서 최고령이자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85]

2021년 2월 16일, 필립 공이 몸이 좋지 않아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고 밝혔다. 코로나 19는 아니라고 한다. # 3월 1일 구급차로 세인트 바르톨로메오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심장 수술을 잘 받았다고 한다. # 한 달 만에 퇴원하였다. #

4.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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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공식적으로 찍힌 마지막 모습[86]
심장 수술을 받기 위해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하는 모습이다.[87]
BBC의 특별 추모 방송[88]

버킹엄 궁은 현지 시간 2021년 4월 9일 성명을 발표하고 필립 공이 윈저 성에서 이날 아침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사망 당시 여왕이 곁을 지켰다고 한다. 향년 만 99세.[89] # #

얼마 전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나왔을 때 꽤나 수척해진 모습(이 문단의 윗 사진)이라 많은 사람들이 걱정했었는데, 우려대로 곧 사망했다. 코로나19가 아닌 감염증 치료를 하던 중 심장 관련 지병이 발견되어 추가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노환으로 고비를 넘기지 못했다고 밝혔다. #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의 배우자의 직무[90]를 수행한 왕족으로, 장례식은 생전 그의 뜻에 따라 간소하게 치러질 것이라고 한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소식을 듣고 "매우 슬펐다"면서 "필립 공은 영국과 영연방, 전 세계의 여러 세대로부터 애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또, "필립공은 비범한 삶을 살았다"면서 "셀 수 없이 많은 젊은이의 삶에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그는 "필립 공은 왕실이 영국인들에게 중요한 기관이 되도록 도왔다"고 덧붙였다. #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영국은 비범한 공복[91]을 잃었다"며"그는 2차 대전 때는 영국 해군으로서, 이후엔 에든버러 공작으로서 나라에 인생을 헌신했다"라고 말했다.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필립 공이 여왕을 오랜 세월 놀랍고 꾸준하게 지지한 것으로 인정받아야 하지만 선견지명과 의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으로서도 기억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필립 공의 모국이자 지금은 없어진 그리스 왕국 콘스탄티노스 2세[92] 전 국왕은 필립 공에 대해 "그의 나라와 영연방을 위한 의무와 봉사에 전 생애를 바친 놀라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또 "우리 가족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슬픔이 더욱 깊어진다. 그는 우리 모두에게 깊은 그리움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

프란치스코 교황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필립 공이 "결혼과 가족에 대한 헌신, 공익사업에 대한 경이적인 기록, 미래 세대의 교육과 발전을 위한 헌신을 했다"면서 진심 어린 애도를 표했다. 교황은 또 "필립 공이 떠난 데 대해 슬퍼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주님의 위로와 평화의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부탄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국왕과 제선 페마 왕비가 심토카 종(Simtokha Dzong)에서 1000개의 등불을 밝혀 필립 공의 명복을 빌었다. #

문재인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역시 다음 날 트위터에 성명을 내 명복을 빌었다. #

영국 정부와 각 국의 영국 대사관 및 영사관을 비롯해서 같은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에서는 조기를 게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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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킹엄 궁전에 게시된 부고문

사망 이후 버킹엄 궁전 대문에는 공식 발표문이 붙었으며, 이후 추모객들이 줄을 이었다. 버킹엄 궁 측에서는 "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고려해 조화를 놓는 등의 행동을 자제하고, 기부 등의 방법으로 추모를 할 것을 권장한다"고 밝혔지만, 애도를 표현하려는 인파가 버킹엄 궁 앞으로 몰리는 것을 우려해 공식 발표문도 1시간 만에 뗐다.

장례식은 4월 17일 토요일에 왕실 관례와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윈저 성 내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국장이 아닌 왕실장으로 치러지며, 안장도 그 곳에서 이루어질 예정이다. 대략적인 예상도 다만, 이는 가안장에 해당하며 여왕의 영면 후에는 여왕과 같이 조지 6세 경당에 안장될 예정이다.[93] 코로나 19로 인해 일반인 추모를 위한 시신 공개 행사도 없다고 한다. # 최근 잇따라 왕실에 대한 폭로를 내놓았던 해리 왕자도 평소 할아버지 필립 공과 사이가 가까웠던 만큼 장례식에 참석한다고 한다.[94] 다만, 부인 메건 마클은 현재 둘째 아이 임신 중인 만삭이어서 장례식 참석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

코로나 19로 인해 장례식 참여 인원이 30명 이하로 제한되어, 장례식에는 그의 가족과 개인 비서만 참여한다. 보리스 존슨 총리 또한 그의 가족이 최대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장례식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장례식에는 필립 공의 생전 요청에 따라, 나치에 시집을 갔다는 이유로 자신의 결혼식에 오지 못했던 누나들의 후손들이 올 수 있게 되었다.[95]

ITV는 필립의 영면이 발표된 당일 앤 공주 에드워드 왕자 인터뷰를 가졌고 찰스 3세는 이튿날 간략한 성명을 남겼다. 앤드루 왕자는 11일 추모성찬례를 마치고 BBC 인터뷰를 가졌는데 영국 여론은 저런 성범죄자가 부친상을 핑계로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미냐는 반응이 대다수.

4월 12일 BBC 두 채널에서 계속 추모 방송을 하여 필립 공 특집 방송을 그만하라는 항의 청원이 110,000건으로 기존 최고 기록이었던 제리 스프링거쇼 방송 항의 횟수 63,000건을 훌쩍 넘어 기록을 갱신했다. # 어느 정도 보수성이 있는 공영 방송이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는 평도 있다. 결국 BBC는 필립 공의 장례식을 BBC One에서 생중계한 뒤 당일 저녁 BBC Two에서 재방송하였다. #

바누아투의 타나섬 카스톰 족은 필립을 자신들과 같은 부족이라고 믿고 있어서 큰 슬픔에 빠졌다. # 자세한 내용은 후술.

여담으로 필립 공이 세상을 떠난 2021년에는 그의 증손주가 무려 4명이나 태어났다.[96]

유언장이 최소 90년 동안 대중에 공개되지 않은 채 봉인된다. #

2022년 3월 29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필립 공의 추도식이 열렸다. 여왕을 비롯하여 자녀, 손주, 증손주 및 각국의 국왕과 왕비들도 참석하였다.

이후 2022년 9월 8일에 엘리자베스 2세가 향년 96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부부가 나란히 1년 5개월의 차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여왕의 장례식 후 가안장 되어있던 필립의 관을 조지 6세 경당으로 옮겨 여왕과 함께 안장되었다.

[1] 하지만 영국식이나 독일식으로 Philip(필립)/Philipp(필리프)로 불렸다. 또한 전하 경칭을 가진 고위 왕족이라서 성씨가 없었다. [2] 따라서 니콜라이 1세는 필리포스의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3] 아내 엘리자베스 2세 빅토리아 여왕 현손녀로 남편 필리포스와는 8촌 지간이다. 앨리스 공주의 친오빠 에드워드 7세가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할아버지였기 때문. [4] 사실 엘리자베스 2세와는 외가 뿐 아니라 친가 쪽으로도 친척인데, 필리포스의 할아버지 요르요스 1세와 엘리자베스의 증조할머니 알렉산드라 왕비가 남매다. 때문에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 2세는 덴마크 그리스 왕실 기준으로도 7촌이고, 따지고 보면 장인어른인 조지 6세와도 같은 항렬인 6촌 지간이 된다. [5] 첫째 누나 마르가리타 공주와 나이 차이가 16살이 났다. [6] 편지의 본문은 "Philip could stand up alone now & sits with bare legs on the hard road & crawls on it without minding the stones. He is in fact as advanced & sturdy for his age as all the others were & has the same tow-coloured hair.."(이제 필립은 스스로 설 수 있고, 맨다리로 딱딱한 도로에 앉고 기어가. 다른 아이들(필립의 누나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래에 비해 튼튼하고, 옅은 금발이야.) 그리고 루이즈는 “아이는 하루종일 웃어. 난 이렇게 명랑한 아기는 본 적이 없어.(laughs all day long. I have never seen such a cheerful baby.)" [7] 장남 요르요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은 이유는 그가 독일 제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반독 정서를 의식해서였다. [8] 재판을 받은 7명 중에 안드레아스 왕자만이 목숨을 건졌다.(1명은 종신형.) Trial of Six [9] 남자아이임에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이유는 당시의 배변 훈련 문화 때문이다. 옛날에는 바지는 입히고 벗기며 기저귀를 갈아주기에 번거로워서, 남자아이에게도 치마를 입혔다고 전해진다. 훗날 자신의 맏아들 찰스 3세에게도 이런 드레스를 입히고 안아주는 사진이 남아있다. [10] 고모할머니의 아들이자 외할머니의 사촌이자으로 이후 배우자의 할아버지다. 촌수로는 친가 기준 5촌. [11] 조지 5세 러시아 혁명 당시 앨리스 왕자비의 셋째 이모이자 자신의 사촌들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 니콜라이 2세 부부가 자녀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 의사를 타진한 것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러시아 황실 일가족들을 죽게 만든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12] 앨리스 왕자비의 시녀, 아이들의 가정교사, 유모 [13] 노년의 소피아 공주는 이제까지 살면서 가본 최악의 장소라고 평했다. [14] 앨리스 왕자비는 멈추라고 했지만, 유모는 필리포스를 가만히 놔두자고 했다. [15] 요르요스 1세의 차남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으로, 성에서 짐작하듯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이다. [16] 에드위나 애슐리, 낸시 리즈(그리스의 아나스타시야 왕자비), 마리 보나파르트 등. 에드위나 애슐리는 필리포스의 외숙모로 루이 마운트배튼의 부인, 에드워드 7세의 재정관리인이었던 외할아버지 어니스트 카셀의 상속녀였다. 낸시 리즈는 필리포스의 숙모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크리스토프 왕자의 첫째 부인, 철강왕 윌리엄 리즈와의 2번째 결혼에서 큰 돈을 상속받았다. 마리 보나파르트는 필리포스의 백모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 왕자의 부인, 몬테 카를로의 카지노를 설립한 외할아버지 프랑수아 블랑의 상속녀였다. [17] 맥자넷 전기, 앨리스 왕자비가 교장에게 전한 말. 원문: Instead of being constantly hushed up he should be working off his boundless energy by practicing games and learning Anglo-Saxon ideas of courage, fair play, and resistance. Philip should develop English characteristics, because his future will be in English speaking lands, perhaps American, and I want him to learn English well. [18] 뿐만 아니라 항상 방문자들을 위해 의자를 가져다주고, 여자들이 자신을 위해 음식을 가져다 주는 일이 없도록 직접 부엌에서 음식을 가져왔다고 한다. [19] 전하(HRH) 칭호를 쓰는 고위 왕족은 성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 당시 프랑스 주재 중화민국 대사였고, 나중에 주 영국, 주 미국 대사, 대총통 권한대행까지 지낸 구웨이쥔 웰링턴 쿠(Wellington Koo, 顧維鈞)의 아들들이다. 이 둘은 학교에서 칭칭 차이나맨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21] 엘렌 코르데는 프랑스 태생의 여배우로 필립의 불륜 상대로 자주 지목된다. 엘레네 푸푸니스가 본명으로, 필리포스와 소꿉친구였다. 푸푸니스 가족은 꽤나 부유한 프랑스에 살던 그리스인 가족이었다. 필리포스의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와 엘레니의 엄마, 필리포스의 유모와 엘레니의 유모는 친구였다. 푸푸니스 가족은 베르크 해변가에 별장이 있었다. 필리포스네 가족이 해변가로 휴가를 나왔을 때 누나 케킬리아 소피아와 필리포스는 엘레니, 엘레니의 남동생 라이니, 여동생 리아와 함께 놀았다고 한다. 엘렌 코르데는 60년 후에 이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어릴 때 필리포스를 매우 질투했어요. 내가 필리포스를 싫어한 만큼 필리포스는 나를 싫어한 것 같진 않지만, 내 감정은 주로 질투였습니다. 모두들, 특히 우리 엄마는, 필리포스가 잘생긴 아이라고 좋아했어요! (참고로 엘레네의 엄마의 회고록에 따르면 예전에 사람들은 자신보고 필립의 보호자인지 가정교사인지 계속 물어봤는데, 그 어느 것도 아니었지만 자신의 아이처럼 필립을 사랑했다고 함.) 우리 아빠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새아빠에게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우리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금발 벽안의, 이 독일인처럼 생긴 작은 아이가 우리집에 오고, 우리 엄마가 그 아이에게 너무나 많은 관심을 쏟을 때면 나는 매우매우 화났어요. 필리포스와 내 동생 라이니는 작당해 맨날 나를 괴롭혔어요.”라고 말했다. 이후 그들은 헤어졌지만 새아버지가 사망하고 가세가 기운 이후 필리포스가 15살 때 런던에서 다시 만났다고 한다. 필리포스는 헬렌이 첫번째로 결혼할 때 신랑 들러리가 되어주었고, 2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의 대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헬렌의 아들 맥스에게 고든스턴 학교를 권유했으며, 헬렌의 필립이라는 손자도 고든스턴에 갔다. 그들은 친구였지만 불륜 상대로 지목된 이유는 첫 남편과 이혼하지 않고 별거 중에, 두 번째 남편이 될 애인과 아들 맥스를 낳았기 때문에 아이의 아버지를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근데 필립이 맥스의 대부가 되어주었기 때문에 불륜 상대로 지목돼 버린 것. [22] 그가 느끼기로는 그저 평범한 가족의 삶과 다름이 없었으며,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적이 없다고 밝혔다. [23] 입고 있는 옷은 그리스 전통 옷인 에브존이다. [24] 조현병은 오늘날까지도 인식이 최악인 병이다. [25]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의 외가이기도 하다. [26] 이 시기보다는 이후이지만 볼프스가르텐 성에는 1946년부터 2005년까지의 방문 기록이 창문에 새겨져 있다. 창문에는 필리포스, 엘리자베스 2세, 찰스 3세, 앨리스 왕자비의 서명이 있다. [27] 외숙모였던 밀포드 헤이븐 후작부인 나데이아 마운트배튼의 조카다. [28] 바덴 대공국의 대공자인 당주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후원을 받아 쿠르트 한이 1920년 독일 남부 잘렘에 설립한 기숙학교이다. 필립은 둘째 누나 가족 소유의 학교이기 때문에 학비를 아끼려고 침 스쿨을 떠나 잘렘에 입학했다. [29] 쿠르트 한은 유대계 독일인이라 나치당에 반기를 들었다. 결국 나치가 집권하고 유대인 탄압이 본격화되자, 1933년에 투옥되었다가 영국으로 추방되었다. [30] 최상류층 답게 정기적으로 여러 거주지를 오가며 살았는데, 고든스턴은 아예 스코틀랜드에 위치해 있어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다. 유력 후보지였던 이튼 칼리지는 거주지 중 하나인 윈저 성에서도 보일 정도로 가까웠고, 이는 더 크라운에서 “저기 봐 찰스, 저 언덕만 넘어가면 학교야. 그러니깐 주말은 여기서 보낼 수 있어. 네 침대에서도 잘 수 있고.”라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사로 반영된다. [31] 이는 남동생들인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도 마찬가지였다. [32] 이때 나이가 너무 어려서 동행하지 않아 살아남은 체칠리아의 막내딸 요한나는 숙부 루트비히에게 입양되었으나 2년 뒤 수막염으로 사망한다. 이후 루트비히 또한 자녀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헤센 대공가의 직계는 사실상 단절된다. [33] 선두에 서 있는 제복 군인들 중 3명은 필립의 매형들이다. 첫째 줄은 루트비히 폰 헤센 공자. 둘째 줄은 왼쪽부터 고트프리트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 크리스토프 폰 헤센 공자(SS 제복), 필립 폰 헤센 공자(SA 제복), 필립 공(에든버러 공작), 베르톨트 폰 바덴 공. 루이 마운트배튼 경은 뒤에서 뾰족한 해군 모자를 쓰고 있으며, 조지 6세 엘리자베스 왕비의 대리인으로 참석했다. 이 장례식에는 헤르만 괴링이 직접 참석했다. [34] 조지 마운트배튼의 아들이었던 데이비드 마운트배튼이 밀포드 헤이븐 후작위를 물려받았으나, 필리포스보다 고작 2살 많았을 뿐더러 미성년자였기에 누군가의 후견인을 맡을 처지가 아니었다. [35] 이 때문에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IRA의 폭탄테러로 끔찍한 최후를 맞았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36] 1995년 인터뷰에서 해군으로 입대하게 된 것이 루이 마운트배튼의 영향이라고 직접 밝혔다. 기자의 질문은 “전하의 할아버지들 모두 해군에 몸담으셨고, 아버지는 육군에 계셨었지만 전하는 원래 공군이 되고 싶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결국 해군을 선택하게 되었나요?”였는데, 대답은 “결국 외삼촌(마운트배튼 경)한테 설득당했으니까요.”였다. [37] 필립의 모국어인 그리스어는 너무 어린 시절에 그리스를 출국해 대화는 다소 서툰 편이었으나, 1992년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했다고 한다. [38] 현 국왕 차기 여왕이 시찰을 나오는 만큼, 그만큼 격이 되는 생도가 의전을 맡아야 맞다. 마침 필립 또한 왕자 지위를 가진데다 빅토리아 여왕의 4대손이기도 하므로 격이 맞았다. [39] 당시 국왕 조지 6세는 딸만 둘이었고 나이도 40대 중반에 다다르며 아들을 볼 가능성이 거의 없어지자 장녀 엘리자베스가 차기 국왕으로 즉위할 것이 확정적이었다. 엘리자베스가 웨일스 여공 작위를 받지 못한 건 왕세자비를 의미하는 웨일스 공비와 어감이 같아 조지 6세가 반대했기 때문. [40]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필립과 공주들의 만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라고 일기에 적었으며, 훗날 필립이 첫아들인 찰스 3세를 얻자 크게 기뻐해 친할아버지 역할을 자처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왕따를 당하던 찰스 3세를 위해 과자 등을 한껏 싸들고 학교에 찾아가며 차 밖에서 찰스에게 바보라고 소리치는 급우를 노려본다. [41] 참고로 가문 영지인 하이클럭어 캐슬이 그 유명한 다운튼 애비의 촬영지이다. [42] 7대 카나본 백작 헨리 허버트는 여왕과 소위 찐친 관계였고, 1969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여왕의 레이싱 매니저를 맡았다. [43] HMS 켄트의 중위는 일지에 ‘오늘은 비가 많이 왔다. 다행히 필리포스 왕자가 사관생도로 있는데, 코코아를 정말 잘 만든다…’라고 적었다. [44] 이 전투에서 잃은 군함 중 하나는 구축함 HMS 켈리로 필리포스의 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이 함장으로 지휘하고 있었다. 살아남은 마운트배튼이 필리포스와 만나자 필리포스는 외삼촌이 기름을 뒤집어쓴 모습을 보고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45] 다만 엘리자베스 2세 또한 당시에도 상당한 미모를 자랑했다. 2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필립에게 중학생 정도였던 엘리자베스는 취향 밖이었겠지만. [46]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아내 켄트 공작부인 마리나 왕자비가 필리포스의 친사촌(마리나의 아버지 니콜라오스 왕자가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친형)이었다. [47] 이것이 조지 왕자의 생전 마지막 결혼기념일이 되었다. 영국 공군에서 복무 중이던 그는 이듬해 여름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다. [48] 전쟁 중 영국 왕실에서는 연말에 상류층 인사들을 초청해 크리스마스 자선 공연을 열어 전쟁자금을 모아 기부하는 행사를 가졌다. 왕실에서도 모범을 보이기 위해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가 참여했는데, 1941년에는 ' 신데렐라', 1943년에는 ' 알라딘', 1944년에는 'Old Mother Red Riding Boots'에 등장했다. [49] 막상 엘리자베스 2세는 중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수염을 기른 남자를 매우 싫어했다. 이 때문에 여왕 생전 왕실의 남자 구성원들은 반드시 면도를 해야만 했다. [50] 그런데 정작 왕실 직원들은 깔끔하게 면도를 하고 온 필리포스의 모습에만 익숙해서, 사진 속 수염을 기른 인물이 필리포스인지도 잘 몰랐다고. [51] 왕족치고는 풍파를 좀 겪어본 데다가 군대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탓이었다. [52] 부친 안드레아스 왕자는 모나코 몬테 카를로에서 객사한지 오래였고, 모친 앨리스는 이전에 조현병으로 정신병원에서 3년간 지낸 데다 그리스로 돌아가 수녀처럼 지내며 봉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53] 베르톨트는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다. [54] 크리스토프는 괴링 밑에서 Forschungsamt(FA)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일했다. 후에는 SS 장교, FA수장을 맡으면서 루프트바페에서 복무하다가 1943년에 전사했다. 넷째 누나 소피아는 남편의 전사 이후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자이자 하노버 왕가의 차남 게오르크 빌헬름과 재혼한다. [55] 그냥 복무한 것도 아니고 공을 세워서 군 기관지에 이름이 언급된 것만 수차례가 넘는다. [56] Duchess of Kent to Louis Mountbatten 28 January 1945 "I think it is a very good idea & apart from it being a help in his naval career it might also be an asset for other 'matters'." Of course the less said about the question we have sometimes discussed the better - & as you say it must take its course. [57] 루이 마운트배튼은 조카가 영국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매우 들떴다. 그는 야망이 컸고 가계도와 결혼 중매에 관심이 많았다. 1930년대에 친구 에드워드 8세를 위해 (15세부터 33세까지) 18명의 결혼 가능한 유럽의 공주들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 [58] 당시 남성 왕족이 얼마 없었던 그리스 왕가에서 필리포스는 의외로 계승서열 3위인 왕족이었다. [59] 마운트배튼은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의 성을 영문식으로 읽은 것으로, 1차대전 중 반독 감정으로 개명한 것이다. 단,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그 훨씬 전에 결혼했기 때문에 한 번도 '마운트배튼'이었던 적이 없었다. [60] 필립의 계승권은 당시 그리스 왕가에서도 매우 높은 3위였다. 살리카법을 채택하고 있던(1952년 폐지) 그리스의 국왕은 필립의 사촌형인 요르요스 2세였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으며(1921년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1935년에 이혼했고, 필립의 영국 귀화 직후인 1947년 4월 1일 동맥경화로 급서), 요르요스의 동생이자 후임 국왕인 파블로스도 아들이 콘스탄티노스 2세뿐이었으며, 둘째 백부 요르요스 왕자는 80살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고, 그의 외아들 페트로스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한데다 자녀 없이 사망, 셋째 백부 니콜라오스 왕자는 딸 셋만 두고 이미 사망, 이미 사망한 숙부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미하일이 있었지만 슬하에 딸만 둘을 두어서 여기도 단절됐다. [61] 여태껏 가족이나 친구들과 성공회 감사성찬례(예배)를 드렸으나, 군에 있을 때 세례는 그리스 정교회식으로 받았다고 한다. [62]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그 윈스턴 처칠"신랑 가족들이 왜 다 안 왔는지 알아? 전부 나치하고 결혼했거든. 골수 나치하고!"라고 두 사람의 결혼식을 못마땅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즌 2의 1화에서도 마거릿 공주가 언니 엘리자베스에게 "뭐? 그럼 형부의 나치 누나들이 계속 와서 괴롭혀?"라고 말한다. 2화에서 나온 필립의 단독 인터뷰 장면에서도 그가 독일에 있는 학교에 다닌 것에 대해 누나들이 거기에서 살았다고 대답하자, 여기자가 "나치 누나들이죠. 당신 누나 한 분과 결혼한 사람이 히틀러의 친구였어요."라고 말하여 필립의 성질을 긁어버린다. 그리고 필립의 학창 시절을 다룬 9화에서도 고고한 태도의 필립에게 불만을 가져 ’어디 몰락한 백작님이라도 되나?‘라고 이죽거린 학생이 ‘난 백작이 아니라 왕자야.‘ 라고 맞받아치자, 반격한답시고 가족들의 상황을 언급하며 "네 누나들은 다 나치잖아."라고 말한다. [63] 그럼에도 필립의 누이들은 가족의 나치 전력 등의 이유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들은 6년이 지나서야 올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게 되었고, 후술하지만, 그 후손들은 사후 필립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64] 이후 이 결혼식에서 만난 미하이 1세와 결혼하게 된다. [65] 2022년 9월 8일 아내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난 그 곳이다. [66] 필립 공이 애매한 신분으로 즉위식에 참여했다는 것이 복장에서 드러난다. 군주와 군주의 배우자는 도유 의식을 위해 장갑 등을 착용하지 않으며, 전통적으로 부부 모두 왕관을 착용한다. [67] 공작관(coronet)은 즉위식에선 썼으나 사진 촬영 때는 벗었다. 공작관이 충성맹세 때 사용되는 물품이기 때문에 여왕의 신하로서 부부 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 [68] 또한 필립 공은 왕비들과 달리, 제대로된 대관식 기념 초상화도 남아있지 않다. 이 역시 필립은 대관식의 주인공이 아닌, 여왕의 신하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69] 사실 조지 6세는 젊은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많아서 건강한 사람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안 그래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편인데 전쟁으로 인해 과로와 스트레스, 거기에 줄담배까지 피워댔으니 건강이 정상일 리가 없었다. [70] 필립은 해군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상심했다고 한다. 총각 시절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자기 실력으로 중령까지 달았는데, 느닷없이 반강제로 군을 떠나야 하게 됐기 때문. 사실 해군을 떠나긴 했지만 제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기존에 근무하던 호위함 함장을 그만두고 왕실 공무에 투입됐을 뿐이다. 필립은 아내가 즉위한 1952년까지 현역 신분을 유지했지만 1951년 호위함 함장을 그만둔 이후로 다시는 현역 해군 장교로서의 보직을 받지 못했다. 국서로서 감당해야 할 업무량은 여왕과 비슷했으며, 이듬해 엘리자베스가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필립은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나고 왕족으로서 육해공군 원수직을 받았다. [71] 루이 마운트배튼은 자신이 쓰고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게만 유통된 책 <마운트배튼 계보>에서 마운트배튼 가문이 영국을 두 달 동안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그 두 달은 여왕이 결혼한 이름으로 통치한 1952년 2월 6일부터 4월 9일까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4월 9일에 윈스턴 처칠의 조언에 따라 여왕과 그녀의 아이들은 윈저의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72] 조지 5세의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전하 호칭은 군주의 자녀, 군주의 아들의 자녀, 웨일스 공의 적장손만 사용할 수 있다. 이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찰스 3세는 메리오너스 백작, 앤 공주는 레이디 마운트배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 6세의 1948년 개봉 칙허장으로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아이들은 전하(H.R.H.)와 Prince/Princess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성이 없다. 성을 쓰는 The Royal Highness Prince는 필립 뿐이었다. [73] 영국 왕실의 공식 설명. # [74] 마운트배튼윈저 성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손녀 루이즈 앨리스 엘리자베스 메리이다. 아버지의 직위와 상관없이 왕의 부계 손녀이기 때문에 루이즈는 HRH 칭호와 Princess 호칭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에드워드 왕자 부부가 자식들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랐기 때문에 HRH 경칭을 주지 않을 것 뿐이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보통 성을 쓰지 않고, 써야 할 상황이면 영지 이름을 사용한다. ex) 찰스 에든버러, 윌리엄 웨일즈, 조지 케임브리지. [75] 04:12쯤에 필립 공이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76] 필립 공이 해외 순방으로 6개월 동안 여왕과 떨어져 지냈는데, 이때 이혼설이 언론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버킹엄 궁 측에서 곧바로 부인했다. 또한 이는 버킹엄 궁이 사상 최초로 밝힌 왕족의 이혼설에 대한 입장이었다. [77] 엘리자베스는 결혼 이후 즉위하기 전까지 엘리자베스 마운트배튼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 [78] 그 외에 이 논쟁에서 후보로 거론된 작위로는 국서(Prince Consort), 영연방 공(Prince of the Commonwealth), 왕국 공(Prince of the Realm), 프린스 로열(Prince Royal)등이 있었다. [79] 1957년에 여왕이 작위를 내리기 이전에는 에든버러 공작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라는 호칭이 전부였다. 이는 왕족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인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책봉되어 있었던 자신의 장남보다 낮은 신분이었다. [80]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정부에서 보낸 서류를 상자에 넣은 다음 꺼내서 함께 들여다 보았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상자의 열쇠를 자기만 갖고 남편에게 주지 않았다. [81] 예를 들면 1956 멜버른 올림픽 개회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호주 국왕을 대신하여 개회 선언을 했다. 한편 인도를 방문했을 때는 영국 식민지 시절 학살자 추모비에 딴지를 걸다가, 여왕이 나중에 인도를 방문할 때 극우파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실컷 당하는 데 기여했다. [82] 여왕의 막내 아들 레오폴드 왕자의 1남 1녀 중 장녀. [83] 상대 차량은 기아 카렌스였고, 탑승자 2명 모두 가벼운 부상으로 끝났다. [84] 마지막 공식 생일 사진이다. [85] 현직이 아닌 전체 군주로 한다면 최장수한 배우자는 필립의 장모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다. 무려 만 101세까지 살았다. [86] 사망 1달 전에 찍힌 사진이다. [87] 고령에도 비교적 정정했던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수척해진 모습으로 등장했다. 또한 평소에는 퇴원 시 스스로 걸어나와 차를 탔지만 이때는 병원에서 휠체어를 타고 나와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 탑승했다. [88] BBC 영국 왕실 일원의 추모 방송에 국제 방송인 BBC World News를 포함한 모든 정규 방송을 끊고 God Save the Queen을 송출한다.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2002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사망 때도 방송했다. 영국 왕실기나 국기를 띄워주었던 지난 추모 방송과는 다르게 이번에는 필립 공의 사진을 띄웠다. 이후 다음 해 엘리자베스 2세의 사망 때도 여왕의 사진을 띄웠다. [89] 만 100세를 단 2개월 앞두고 있었다. 그래도 굉장히 장수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90] 1952년 ~ 2017년. [91] 원문 extraordinary public servant, 쉽게 번역하자면 만인의 비복 [92] 필립 공의 사촌인 파블로스의 아들로 필립 공에게는 5촌 조카. 스페인 소피아 왕대비의 남동생이기도 하다. [93] 필립은 생전에 빅토리아 여왕 앨버트 공이 영면한 프로그모어에 묻히고 싶어했다고 한다. [94] 원래 2달 뒤인 100세 생일 때 영국에 방문하려고 했었다고. [95] 첫째 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르가리타 공주의 손자 필리프 추 호엔로에랑엔부르크와 둘째 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테오도라 공주의 손자 베른하르트 폰 바덴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셋째 누나가 시집 간 헤센-다름슈타트 가문(현재 남계 단절) 및 넷째 누나의 첫 시댁인 헤센카셀 가문을 대표하여 헤센카셀의 당주 도나투스(필립 공의 넷째 누나 소피아의 첫 남편 크리스토프의 형 필리프의 손자)도 참석했다. [96] 외손녀 자라 틴달의 아들 루카스 틴달, 친손녀 유지니 공주의 아들 어거스트 브룩스뱅크, 친손자 해리 왕자의 딸 릴리벳. 여기에 친손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딸 시에나 마펠리 모치가 태어났다. 루카스와 어거스트의 미들네임에는 필립이 들어간다. 손녀들이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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