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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7:20:56

필리핀 탈환전

필리핀 전투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아시아/태평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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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테섬 팔로 해변에 상륙하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세르히오 오스메냐 前 필리핀 대통령과 참모들, 1944년 10월 20일[1][2]

1. 개요2. 배경
2.1. 1942 ~ 1944년의 상황2.2. 1944년 7월 진주만 회의
3. 전투 준비4. 전투서열
4.1. 미군4.2. 일본군
5. 레이테 만 해전과 레이테 섬 전투6. 루손섬 전투
6.1. 링가옌만 상륙전과 전차전6.2. 클라크 비행장 탈환6.3. 마닐라 공방전과 남부 지구 전투6.4. 루손섬 북부 전투, 탈환전의 종료 (45년 2~8월)
7. 남부 필리핀 전역8. 결과

1. 개요

"People of the Philippines, I have returned."(필리핀 국민 여러분, 제가 돌아왔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Philippines Campaign (1944–45). #영문위키
フィリピンの戦い (捷一号作戦)

미국 일본 제국으로부터 빼앗긴 필리핀을 수복하기 위해 벌인 전투.

사실 이 필리핀 탈환전은 수많은 전투들이 얽혀 있기에 필리핀 탈환 전투가 아닌, 필리핀 탈환전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2. 배경

필리핀 탈환전을 결정한 진주만 회의의 진행 과정[3]

2.1. 1942 ~ 1944년의 상황

태평양 전쟁 초기, 바탄 반도 전투가 한창이던 1942년 3월, 맥아더는 FDR의 지시로 필리핀에서 호주로 탈출하면서 "나는 돌아올 것이다(I Shall Return)."를 외쳤지만, 그가 염원하던 필리핀 탈환을 위해선 거쳐야 할 수많은 관문들이 존재했다.

일본군은 1942년 봄이 끝날 무렵 동남아시아 영역을 사실상 점령한 후에도 동쪽으로 영역을 계속 확장,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를 침공했고 더 나아가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영역을 장악, 미국 - 호주, 뉴질랜드 간의 통신 선의 차단을 꾀했으나, 이는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역, 코코다 트랙 및 부나 - 고나 전투에서의 미국과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의 확장 시도는 1943년이 되자마자 정지됐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수세에 몰리게 된다.

일본의 팽창은 멈췄지만, 그들이 기존에 점령했던 영역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1943년 내내 일본은 연합군과 교전이 임박한 점령지 최전선들의 요새화와 절대국방권의 설정 등으로 연합군에게 출혈을 안겨주고 진격을 저지해서 전쟁의 주도권을 재쟁취할 시간을 벌고자 했다. 한편 남태평양의 연합군은 여러 조율을 통해 1943년의 전략 목표로 일본군의 총괄기지가 있던 라바울의 점령을 위해 수레바퀴 작전을 발동, 세부적으로 파푸아 북부 지역(지명: 라에, 살라모아, 핀시하펜)과 중/북부 솔로몬 제도(지명: 뉴조지아 섬, 부겐빌 섬), 솔로몬 해 도서 지역(키리위나 섬, 우드러크 섬, 뉴브리튼 섬)에서 다수의 전투를 개시했다. 개시한 전투의 상당수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이 과정에서 정글 지형의 험악함과 정보 부족, 그리고 여전히 만만찮았던 일본군의 전력과 그들이 준비해온 요새화 등으로 인해 적지 않은 사상자와 일정 지연의 발생으로 연합군은 라바울 점령의 필요성에 의문을 가졌고, 라바울의 직접 점령 대신 견제가 가능한 외곽 지역들(부겐빌 섬, 뉴브리튼 섬 서부 지역, 그린 아일랜드, 에드미럴티 제도, 에미라우 섬)을 점거하면서 1944년 5월까지 작전을 완료했다.

1944년 봄이 되면서 라바울의 무력화는 완료되었으나, 필리핀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멀고도 멀었다. 일본군(제18군)을 파푸아 북서 지역(지명: 마당, 웨왁)으로 몰아낸 후 맥아더는 뉴기니 섬 북해안과 그 도서지역(인도네시아 서뉴기니)을 따라 필리핀으로 향하는 축선상의 일련의 전진기지를 확보하고 현지의 잔존 일본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수백 km 단위로 우회 작전을 실시했다. 서부 뉴기니 전역(Western New Guinea campaign), 남서태평양해역군은 1944년 4월 22일, 웨왁 북서쪽의 각각 150, 350km 지점에 있는 아이타페와 홀랜디아(현 지명: 자야푸라)에 상륙해(Landing at Aitape, Battle of Hollandia) 일본의 뉴기니 전선을 분단해 일본 제18군을 고립시켰고[4], 5월 17일과 27일, 7월 2일엔 각각 와크데 섬(Battle of Wakde), 비악 섬(Battle of Biak), 노엠포 섬(Battle of Noemfoor)에 상륙해 거점 및 항공기지를 확보했다. 7월 30일엔 샌서포르(Battle of Sansapor)에 상륙해 뉴기니 섬 최북서단에 도달, 뉴기니 주둔 일본군(제2방면군, 제2군, 제18군)을 곳곳에서 우회, 분단,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2.2. 1944년 7월 진주만 회의

1944년 6월,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 벌어지고 곧이어 사이판 전투도 벌어져 7월 9일, 일본군 사이판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미군 측은 이후 침공로를 설정하는데, 육군과 해군의 의견 충돌(사실상 맥아더 - 니미츠 사이의 의견 충돌)이 벌어져 상당기간 진통기간을 겪었다. 조지 C. 마셜 참모총장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체면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해군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기 위해 오키나와로 쳐들어가 볼 것을 권유했는데,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니미츠는 대만 침공을 주장하고 있어, 세 사람 모두 의견이 제각각이라 진통을 겪고 있었다.

게다가 곧이어 대선도 다가오기에 루스벨트 대통령 볼티모어급 중순양함을 타고 직접 진주만을 찾아 맥아더와 니미츠를 불러모은 뒤 작전 상의를 했고, 결국 다음과 같은 이유로 필리핀 침공이 결정되었다.

3. 전투 준비

일본군의 본래 전투 계획은 필리핀 루손섬에서는 육군 중심으로 전투를 하면서, 레이테 섬을 포함한 다른 지역들은 해군 및 항공부대에 의해 전투를 수행한다는 방침이었다. 일본 측은 대단위 전략을 ~호 작전이라고 명명하는 전통에 따라 이를 첩(捷)호 작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현지 부대의 루손섬 결사 항전론과 대본영의 항공결정론이 대립했고, 미군의 상륙 예상 지점으로 민다나오섬을 지목하는 등 사전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본영은 미군이 1945년 1월에 이르러서야 민다나오섬에 상륙하고, 3월에 루손섬에 상륙할 것이라고 막연하게 희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의 일본군은 사기도 개판이었는지, 1944년 9월 다바오의 해군 지휘관이 '내일 적이 상륙할지 모른다'고 발언하자 다음 날 아침 관측병이 파도를 상륙단정으로 착각, 이 보고가 상부로 올라가면서 점점 확대되어 '현란한 색의 적 수륙양용전차' 등 정체 불명의 것으로 변하고, 할마헤라 방면의 항공부대가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등 엉뚱한 호들갑을 떨었다.( 다바오 오보 사건) 대만해협 항공전에서 대전과를 올렸다고 믿었던 대본영이 필리핀 방어를 담당하는 제 14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대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전을 급히 변경해 육군도 필리핀 동남부 레이테 섬의 방위에 참가시키며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10월 10~20일에 걸쳐 벌어진 대만 항공전의 실상은 처참한 것이었다. 미 제3함대가 1,300여 대 함재기를 날려 보내며 대만과 오키나와를 강타하였고, 일본군은 미 함대에 대해 380여 대의 항공기를 내 보냈다. 항공모함 19척, 전함 4척, 순양함 7척, 함종불명 15척을 격침, 격파했다고 요란하게 선전했지만, 실제 미 함대의 손실은 구축함 1척 격침, 항공모함 4척 소파, 항공기 89대 손실 뿐이었다. 이 댓가로 일본군은 대만과 오키나와의 거의 모든 비행장이 거덜났으며, 300대가 넘는 항공기를 손실해 버렸다. "라디오도쿄가 격침했다고 보고한 제3함대의 모든 함정은 지금 바다 밑에서 무사히 인양되어 적진을 향해 퇴각 중"이라는 윌리엄 홀시의 명언도 바로 이 때 나온 것이다. #참조 링크

문제는 필리핀 방위를 담당해야 할 필리핀 제1항공함대 전투기 150대 중 110대를 여기서 상실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필리핀의 일본군은 제공권/제해권 장악 따위는 꿈도 못 꾸게 되었다. 이를 알고 있던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루손 섬(수도 마닐라가 위치한 필리핀의 중심 섬)에서 동남쪽으로 800km나 떨어진 레이테섬으로의 병력 수송은 꿈도 못 꾼다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대만해협 항공전의 오보를 굳게 믿고 있던 대본영은 현지 사령관의 진언도 무시하고, 레이테 섬에서 결전할 것을 그냥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려 버렸다. 이에 야마시타가 애써 준비했던 지연전은 이미 물 건너 갔고, 한숨만 푹푹 쉬며 남은 항공력과 해상력을 그러 모아 레이테 섬으로 병력을 실어 날라야만 했다. 일본 해군도 역시 대만 근처에서 벌어진 항공전에서 미군이 상당한 항공기를 잃었을 것이라 판단, 남은 전력을 가능한 최대한 동원해 미 해군을 물리치고 레이테에 상륙 중인 미 육군에 불벼락을 안겨주기 위해 3면에서 함대를 소집했다.

4. 전투서열

4.1. 미군

4.2. 일본군

5. 레이테 만 해전과 레이테 섬 전투

파일:레이터 섬의 위치.jpg
타클로반이 위치한 섬이 바로 레이테 섬

공격의 첫단추는 10월, 레이테섬을 침공해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온다던 일본 해군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인 레이테 만 해전에서 상륙함대에 근접했으나, 그만 상황 판단을 잘못하는 바람에[9] 회군, 결과적으로는 패배하고 이후 영혼까지 탈탈탈탈 털리며, 사실상 대양해군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 재기 불능 상태에 빠져버렸다. 레이테 만 해전 항목 참조.

레이테 섬은 제 14방면군 휘하의 제 35군이 맡고 있었다. 제 35군은 후방의 세부섬에 사령부를 두고 주력을 민다나오섬에 배치했었다. 레이테섬을 수비하던 부대는 약 2만 명으로, 4개 사단과 2개 여단이었다.

10월 20일에 상륙한 미군은 패잔병이 아니라 제6군(크루거 중장)의 병력 10만 명(최종적으론 20만)의 대규모 부대였다. 이 작전의 지휘관은 <난 반드시 돌아오겠다>라고 필리핀을 떠나야 했던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10] 휘하 군단과 사단으로는 제10군단의 제24사단과 제1기병사단이 레이테섬 동쪽의 타클로반에, 이어서 그 남쪽 약 27km의 둘락에 제 24군단의 제7보병사단과 96사단이 상륙을 개시했다. 레이테섬 남쪽의 파나온섬 지구에도 24사단의 21보병연대 전투단이 상륙했다. 이후 일본군의 증원으로 레이테섬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미군도 마찬가지로 증원부대로 제11공수사단과 제32, 38, 77보병사단을 추가로 투입했다.
파일:레이터 섬에 상륙한 미군.jpg
이 유명한 사진도 상륙당일인 20일 오후 3시에 촬영된 것

#레이테섬의 구글지도를 참조하며 읽으면 이해하기에 매우 좋다.

타클로반에 상륙한 미군은 중부의 브라우엔, 최종적으로는 일본군의 양륙 지점인 서쪽의 오르모크 항구를 목표로 동쪽과 남쪽에서 차근차근 밀고 나간다. 일본군도 어느 정도는 저항에 성공해서 상륙 당일 타클로반에서 미 24사단 사령부에 어느 정도의 피해를 주고, 야간에 전차전으로 역습을 시도했으며, 중부 협곡에서 미군을 다소 지연시키기도 하지만, 당연히 전국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 한다.

21일에는 협곡과 브라우엔 비행장을 방어하던 일본군 2개 연대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24일과 31일에 걸쳐 일본군은 30사단 41연대와 1사단 병력이 계속되는 공습에도 불구하고 서부 오르모크에 큰 손실없이 증원하는데 성공했지만, 오르모크 동쪽의 리몬 언덕에서 미군과 전투를 벌이던 도중 모조리 분쇄되고 만다. 이후 12월 초순까지 리몬 언덕에서 소모전이 펼쳐지는가 싶었지만, 섬 남쪽을 가로질러 서해안의 베이베이를 거쳐 진격하고, 바다를 통해 증원된 미군 2개 사단(미군 제7, 77사단)이 북부와 중부 협곡을 통과한 주병력(미군 제10군단과 제24군단의 잔여 사단들)과 협격에 성공한다. 당장 일본군의 사령부가 있던 오르모크과 그 주변 지역이 12월 15일에 미군이 점령했고 잔존 일본군의 배후지였던 섬 북서쪽의 팔롬폰과 산 이시도르도 각각 12월 25일과 27일에 점령되어 미군은 레이테섬 전체를 장악했고 미군 제6군 사령부는 루손 섬 전투의 지휘를 위해 레이테섬의 지휘권을 제8군에게 이양한다. 미군은 섬의 요지는 장악했지만 섬의 내륙산간지역엔 잔존한 일본군이 25,000명 (미군 예상) 이 넘는 규모로, 섬의 북서부와 중부 산악지대에 나뉘어 은신해 게릴라전을 지속했고 미군은 이들에 대한 토벌을 45년 5월까지 진행했다.[11][12]

일본도 증원 작전을 계속하여 12월까지 5개 사단과 1개 여단의 도합 5만 병력이 레이테섬으로 수송되었다. 그러나 앞선 행운은 더 이상 따라 주지 않았다. 미군의 공습과 잠수함전은 주/야간을 가리지 않았고, 5만의 병력 중 태반이 수송 도중 수장 되었으며, 간신히 건져올린 군수품이라곤 20%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피해가 적었던 26사단 역시 무기를 모두 잃고 맨몸의 병력이 되어버렸다. 그 후의 상륙정과 병력, 물자는 아예 끊기고 말았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가망없이 버티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일본 육군은 나름 방어 준비를 단단히 했음에도 미군에게 5,000여 명의 전사자를 안겨 주는 동안 총병력 83,000명 중 단 1,000명 정도만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 거의 대부분은 죽음을 맞았다. 상당수의 병사가 해상 수송 중에 수송선이 격침당하면서 수장당했고, 격침된 수송선에서 살아남아 간신히 해안가로 헤엄쳐 올라온 일본군의 상당수는 분노한 필리핀인들에게 붙잡혀 최후를 맞이했다.

곧이어 루손섬 아래에 있는 민도르섬이 순식간에 미군 손에 떨어지며 본무대인 루손섬으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6. 루손섬 전투

6.1. 링가옌만 상륙전과 전차전

#루손섬의 구글지도를 참조하며 읽으면 이해하기 좋다.

일본 현지 사령부인 제 14방면군의 작전 계획은 루손섬에 최대한 전력을 집중하여 평원에서 결전을 벌이기였지만, 앞서 설명되었듯 대본영의 삽질로 인해 금쪽같은 전력을 레이테에 꼴아 박아야 했고, 루손섬의 일본군 전력은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이런 현실을 직면한 제 14방면군의 작전참모 호리 에이조(堀榮三)등의 참모들은 " 함포 포탄을 피할 수 있는 산악지대에서 지구전"을 펼치자고 진언하였고, 야마시타 대장은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한다.

루손의 일본군 전력은
총 28만 7천 명의 병력이었다. 쇼부집단에는 전차 제 2사단의 기갑사단이 있었고, 신부와 켄부 집단에는 해군 소속 지원 병력과 해군항공대도 소속되어 있었다.

이에 맞서는 미군은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미군 제 6군과 제 8군, 영국- 호주연합군, 연합해공군으로 구성된 175,000명의 병력으로 루손 섬 탈환에 나섰다. 이에 더해 루손섬에는 많은 필리핀 사람들로 구성된 게릴라 부대가 연합군과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상륙을 기다리고 있었다.
1945년 1월 4일, 미군 항공대는 마닐라~링가엔 만 사이 전체를 대상으로 맹렬한 폭격을 실시했다. 6일부터는 미해군 제 7함대에 의한 함포 사격이 개시되었고, 3일 간에 걸쳐 일본군의 해안진지는 모조리 박살이 나 버렸다. 그리고 9일 아침, 9개 사단 175,000명이 링가엔 만에 상륙을 개시했다. 링가옌 만은 지금의 다구판시에 위치한 만이다. 신중한 성격의 크루거 중장은 2개 사단은 마닐라 탈환을 위해 남부로, 2개 사단은 북부지역 제압을 위해 북부로 보내고 나머지는 동부로 진군을 개시했다.

이에 대해 일본군은 1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 그리고 전차 약 60대가 반격을 실시했고, 16일 밤에는 야습을 감행해 예상 이외의 전과를 내는 등 다소의 성과도 있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고, 27일에는 산 마누엘에서 이 반격부대는 완전히 전멸하고 만다.

마닐라 북부로 북상한 미군 제1군단은 루바오와 산 호세 등에서 전차 제 2사단의 주력과 상대해 격렬한 전차전이 벌어졌다. 2월 중순에 이르자 일본군의 전차대는 전멸했지만 그 사이 북부의 일본군은 북부 산악지대로 물자를 수송해 장기전 태세를 구축하는데는 성공했다.

6.2. 클라크 비행장 탈환

마닐라 북서쪽 100km 지점, 현재의 앙헬레스에 위치한 클라크(Clark) 지구는 비행장 숫자만 13개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전쟁 전 동양 최대 규모의 미군 비행장이었다. 이곳은 당연히 일본군에게도 미군에게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기에 격렬한 전투가 필연적이었다.

이곳을 담당한 일본군은 켄부(建武) 집단은 총병력이 다양한 병과로 이루어진 3만 남짓의 병력이었지만, 제대로 된 전투 부대는 공정부대와 전차사단 기계화보병 등을 합쳐 3,000명 남짓 정도였다. 물론 일본군도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아서 3선이며 4선에 이르는 조밀한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미군은 1월 20일 경부터 클라크 지구로 진입해 25일, 미군 제 14군단(제37, 40사단)에 의한 맹공을 개시했고, 후퇴하며 방어전을 펼치는 켄부 집단군을 일방적으로 분쇄하며 30일, 스탓텐버그 비행장에 성조기를 게양하고 클라크 비행장 일대의 제압을 선언했다.

미군주력부대는 그대로 동남쪽 100km에 위치한 마닐라를 목표로 남하를 계속했다.

6.3. 마닐라 공방전과 남부 지구 전투

#구글지도 참조

미군은 필리핀 수도 마닐라 탈환을 핵심으로 판단했다. 링가엔 만에서 남하한 2개 사단 외에, 1월 30일에는 제 11군단이 바탄반도 부근 산 안토니오에 상륙, 31일에는 마닐라 남서쪽 나스구브에도 제11공수사단이 상륙, 2월 3일에는 제 511공수연대가 낙하하여, 사방에서 마닐라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마닐라를 포함한 남부일대를 담당한 신부(振武) 집단이었다.

미군이 마닐라에 진입한 날은 2월 3일이었고, 여기서 일본군과 미군은 약 한 달간의 격렬한 시가전을 펼쳤다.[13] 3월 3일에 마닐라는 연합군이 완전히 제압하였다. 이 시가전에서 일본군은 약 12,000명의 사망자를 냈고, 연합군은 전사 1,000명, 부상 약 5,500명에 달했다.

마닐라 전투에서 약 10만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시가지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육군 측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은 원래 마닐라를 무방비도시로 개방할 방침이었지만, 해군 측 이와부치 산지 소장이 시가전을 강력히 주장하여 벌어진 일이다. 다시 말해 군종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극상(필리핀 전역의 총지휘관은 분명히 야마시타였다)을 벌인 어이없는 상황이지만, 일본군 내에서는 이런 일이 매우 많이 일어났던 터라 신기할 것도 없다. 대본영도 마닐라 폐기를 인정하지 않아 발생한 참극이었다. 이것이 바로 마닐라 대학살이다. 이 때 마닐라 주재 스페인 영사관도 약탈과 학살이 자행되어서, 분노한 스페인 측은 결국 일본에게 강력한 항의를 하고 단교해버렸다.

바탄반도 및 코레히도르 섬에도 전투가 벌어졌다. 바탄 반도의 일본군 3,500명, 코레히도르 섬 요새의 일본군 4,500명은 1월 말부터 강력한 함포사격과 공습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와중에 코레히도르 섬 수비대는 2월 15일에 특공보트 36척을 출격시켰지만 전과는 미군 상륙지원정 3척만 부수는데 그쳤다.

2월 16일 미군 제 24보병사단의 일부가 상륙을 개시하고, 제 503공수연대도 낙하산으로 강하했다. 수비대장이 전사한 일본군은 20일 이후 조직적인 저항력을 상실하게 된다. 바탄반도에서의 전투로 일본군은 전사 4,497명, 이에 반해 미 연합군은 전사 228명에 부상 727명에 불과했다. 한편 코레히도르 섬에는 종전 후에도 일본병사들이 숨어 있다가 1946년 1월에 18명이 투항하기도 했다.

루손섬 남부의 신부(振武) 집단은 마닐라 함락 후 동쪽 산악지대에서 남부연안으로 이동해 지구전을 펼쳤다. 이 때 병력은 10만을 약간 넘었지만, 비전투병과가 많아 실제로는 1개 보병 사단의 전력 뿐이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완강하게 저항하였다. 마닐라 시가전 종료 후인 3월 중순, 총공격을 감행해 미군 제6보병사단장 에드윈 D. 패트릭에게 중상을 입히고[14] 제 1 연대장[15]을 전사시키는 뜻밖의 전과를 올리기도 했지만, 결국 거기까지였고, 미군 3개 사단이 압박하기 시작한 3월 하순이 되자 끝없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6월이 되면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소규모 부대로 분산, 고산지대로 옮겨 장기전을 꾀하였다. 이들은 9월이 되어서야 일본의 항복사실을 알곤 9월 8일에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몇몇 부대는 11월에 항복하기도 했다. 이로써 신부(振武) 집단 전체의 병력 약 10만 5천명 가운데 전사는 60,000명, 말라리아 및 기아로 사망한 자는 15,000명, 행방불명 13,000명, 포로 1,600명의 피해를 냈다.

이로써 미군은 마닐라 항을 연합군의 중요한 병참기지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필리핀을 탈환하는데 성공한 것이나 마찬가지.

6.4. 루손섬 북부 전투, 탈환전의 종료 (45년 2~8월)

#구글지도 참조

필리핀 일본군의 주력은 야마시타 도모유키 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쇼부(尙武)집단이었다. 이들은 사령부가 있는 바기오를 중심으로 북부 산악지대에서 방위전선을 펼쳤다. 총병력은 약 15만이었다. 이들은 곡창지대인 카가얀 협곡과 바기오, 두 군데를 핵심적인 방어지점으로 선정했다.

2월 하순, 미군 제 1군단은 산악지대로 들어왔지만, 바기오로 향하는 거점 세 곳을 완강하게 방어하는 일본군에 의해 돌파가 실패당하자, 서쪽 해안에서 바기오로 이르는 길로 우회 공격을 시도했고, 4월에는 북서 방면에서 바기오를 협공해 들어갈 수 있었다. 결국 야마시타는 4월 16일이 되자 호세 라우렐 대통령 일행을 일본 본토로 탈출시키고 최후의 저항을 펼쳤지만 결국 4월 26일에 바기오는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한편 카가얀 협곡 방면, 바레타 언덕, 사라쿠사쿠 언덕 등 산악지대에서 미군과 일본군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되풀이했으며, 미군은 5월 중순 ~ 하순에 걸쳐 이곳들을 모두 접수하며 북진하였다. 그 동안 미군 제6사단은 사단장 패트릭이 전사했고 제 25사단은 전사 685명에 부상 2,090명, 제 32사단은 전사 825명에 부상 2,160명의 피해를 당했으며, 특히 6,000명의 열대 전염병 환자가 발생하는 큰 비전투손실을 입기도 했다.

물론 미군이 이 정도 손실을 입는 동안 일본군의 손실은 그야말로 절망적인 건 당연지사다. 5월 하순에 전차 제 2사단의 보유 중화기는 전차 12량과 화포 7문이 전부였다. 총 병력은 이미 처음의 20%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루손 섬 북서쪽의 아발리에 6월 23일에 연합군이 낙하산 공수작전을 펼쳤고, 남북에서 협공을 받게 된 쇼부(尙武) 집단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일본군은 대부분이 정글 지대인 루손 섬 북부에서 식량보급이 완전히 끊겨 아사자/ 병사자가 속출했다. 지휘체계가 와해된 탓에 조직적인 작전은 꿈도 못 꾸고 소부대로 분산되어 정글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게 전부였다. 이 와중에도 항복이 엄격히 금지된 탓에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은 그대로 죽거나 자결했다.

극도로 쇠약해진 일본군 병사들은 점령기간 동안 극도의 원한을 품은 현지게릴라나 원주민들에게 습격당해 살해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고, 어떻게든 식량을 구해야 했던 일본군 소부대가 원주민 마을을 습격하여 털어 먹기도 했다. 이쯤 되면 이미 현대전과는 거리가 먼 상황. 일본군 병사들 중에는 대만까지만 건너가면 살 수 있다고 믿어 뗏목을 만들거나 헤엄쳐 가는 병사들도 있었다. 물론 모조리 태평양에서 사라져 버린 건 당연지사다.

그러는 동안 태평양 전쟁은 끝났다.[16] 야마시타 대장은 종전 4일 후인 8월 19일에 정전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분산되었던 각 부대로 연락이 되지 않아 반 년 가까이 지나서야 모든 군이 완전히 항복할 수 있었다.[17]

7. 남부 필리핀 전역

레이테섬 전투 이후 미군은 두갈래로 나눠져 제6군[18]이 루손섬을 포함한 북부 필리핀 지역을, 제8군은[19]필리핀 중서부의 섬, 남부의 섬(대표적으로 민다나오섬)들에서 전투를 치렀다.

8. 결과

연합군은 육군 기준(육군 항공대 포함) 13,973명의 전사자와 48,541명의 부상자, 총 62,514명의 병력 손실+해군 3,470명 전사[20] 합계 총 전사자가 17,443명에[21] 사상자 기준으로는 78,844여명이다.[22] 필리핀군은 57,000명이 전사했다. 연합군은 총 74,000명 전사했다. 일본군은 각종 원인을 합해 총 320,000명 전사, 12,000명 부상이라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전사자 외에 부상자 비율로 치면 그 비율은 1:5.6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일본군이 무조건 유리했다고만 보기도 어려운 게 병력 수에서부터 이미 거의 2.36:1의 비율로 차이를 보이고 있었고, 육해군의 각종 장비부터 양, 질 측면에서 차이가 컸다. 딱하나 일본군이 나은 건 홈그라운드로서 현지를 요새화할 여력이 있었다는 정도 뿐이다. 또, 일본군이 질병, 기아로 대부분 사망한 건 섬 지역에서 보급로가 끊긴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 이 점은 태평양 전쟁 초반 당시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했을 때와 비교할 수 있는데, 그 때의 일본군은 필리핀 탈환전의 미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덜 우세한 상태에서[23] 사망자 5,000명, 부상자 20000명을 기록한 대신 연합군 사망자 25,000명, 부상자 20000명, 75000명의 포로를 발생하게 했다. 연합군 입장에서 보면 부상자 20000명 중 일부는 전력으로 건질 수 있겠지만, 사망자, 포로 85000명에 해당하는 분은 전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군이 쳐들어가서 상황이 종료될 시기까지는 대략 4개월 정도 걸렸지만 미군이 탈환할 때는 대략 8개월은 걸린 점도 감안할 수 있다. 즉, 보급로 상실로 고생한 시간이 더 오래 걸려서 그만큼 기아나 질병이 만연했다고 볼 수 있다. #참조 링크.

여담으로, 일본군은 이 기간 동안 순식간에 엄청난 점령지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각 섬에 잔존해 있던 일본군 부대들은 미처 사령부의 연락을 전달받지 못하고 그대로 해당 지역의 잔존병력으로 남아서 빨치산화돼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24] 일본 패전 후에 이들은 대부분 투항 명령을 받고 항복했지만, 그 중 일부는 투항을 거부하고 계속 싸우다 죽거나, 심지어는 수십년 동안 혼자 버틴 케이스도 존재한다. 오노다 히로오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예.

일본 해군에게 있어서도 큰 손실이었는데, 필리핀에 미군이 본격적으로 상륙하면서 일본 해군의 허리가 완전히 끊기게 된 것이다. 남방 지역의 일본 해군 전력은 더 이상 필리핀을 경유할 수 없어서 본토로 복귀할 수 없었고, 반대로 본토의 전력은 필리핀 주위의 수송로가 차단당해 남방 지역의 원유를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남방 지역의 일본 해군 전력들은 제대로 출항할 엄두도 못낸 채 항구에 그대로 정박하거나 연합국 해군에 각개격파당했고 본토의 해군 전력들은 원유가 떨어져 수상대공포대 정도의 역할 밖에 수행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필리핀에 미군의 비행장들이 본격적으로 설치되면서 일본의 수송함대는 박살나기 시작했고, 일본의 수송로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다만 태평양 전쟁에서 필요한 전투였냐 하면 의문인데, 이 백만 대군급 전투가 웬만한 2차대전사 책에는 언급도 안 될 정도로 존재감이 적었기 때문이다. 왜냐면 전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그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일본군은 지상전을 루손섬에만 한정하려 하였기 때문에 육군 병력은 그 쪽에만 몰빵돼 있었다. 반면 미군은 레이테섬만 점령해서 항공기지를 정비하고 일본 본토와 남방간의 수송로만 끊어두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굳이 맥아더의 정치적인 이유로 일본 남방군의 주력이 있는 거대한 루손섬까지 진격하다가 산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으로 일관한 일본군에 의해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미군 9개 사단이 잡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이 목조로 되어 있는 마닐라시는 불바다가 되고, 많은 시민들이 일본군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것은 덤.

이 때문에 전사에는 레이테 만 해전까지만 중시되고, 필리핀 탈환전은 언급조차 안 한다. 레이테 만 해전을 끝으로 일본 수상함대가 궤멸되면서 사실상 필리핀과 일본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분단된 지역이 되었고, 필리핀에 고립된 일본 육군이 움직이질 못하니 본국은 물론 중국전선조차도 참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연합군은 일본까지 진격할 안전한 징검다리 통로 확보가 필요했는데, 필리핀은 이에 해당하지 않은 변두리였고 그마저도 미 해군 주도의 본토 공격으로 일본이 항복할때까지 필리핀 탈환전을 마무리하지도 못했다.[25]

필리핀은 뉴기니, 버마 전선과 더불어 조선에서 편성된 조선군(일본군) 소속 사단(30사단 및 19사단)이 투입된 전투로 이 때문에 조선인들도 많이 희생되었다. 19사단은 필리핀에서 격전이 한창이던 1944년 11월 동원 되었고, 다음달인 12월에 필리핀 루손으로 파병되었다. 12,328명 중 전사 8,233명, 생환 4,095명으로 66.8%의 전사율을 기록한다. 20사단 내 조선인은 1,888명으로 941명이 전사하고 947명이 생환하여 전사율 49.8%이다.

30사단의 경우 16,249명이 동원되어 민다나오 및 레이테에서 12,832명이 전사하고 3,237명이 생환하여 전사율이 79%에 달한다. 이 중에서 조선 육군특별지원병은 1,247명이 동원되어 977명이 전사하고 270명이 생환하여 사망률이 78.3%에 달했다.


[1] 인천 상륙 작전 때도 비슷한 구도로 바지에 물을 적시며 걷는 사진이 찍혀서 인천 상륙 작전의 사진이라고 소개되기도 하는데, 이 사진은 필리핀 탈환전 때의 사진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사진은 이 쪽 [2] 당시 모든 상륙정들이 사용 중이였고, 그 때문데 그는 함정의 표준장비인 단정에 올라 해변으로 향했으나, 해변으로부터 상당히 먼 지점에서 모래톱에 좌초하고 말았다. 그는 부두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려 했지만, 상당한 함포사격을 받아 부두가 완파된 상태였고, 그 섬에서 파괴되지 않은 부두의 위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장교였던 해군 해안부대 지휘관은 너무 바빴다. 한 사람의 진술에 의하면 맥아더는 성을 내며 파도를 헤치고 당당히 걸어갔다. 그런데 이것은 뜻밖의 횡재가 되었는데, 바로 그의 일행이 파도 속을 헤치며 걷는 것이야말로 훌륭한 선전효과 그 자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다시 한번 더 반복해 카메라맨을 대동하여 파도 속을 헤치며 걸어갔는데, 그게 바로 위의 사진이다. 참고로 이 당시 잔존해 있던 일본군 저격수들은 해안가에 나타난 "맥아더 닮은 놈"을 보면서 "저게 진짜 맥아더겠어? 카게무샤를 대동해서 쇼하고 있구만."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난 후 야마시타는 이 사진에 대해 "그게 진짜 맥아더인 줄 알았으면 자폭 특공 결사대를 조직해서 확실히 제거했을 텐데."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앞에 쓰여 있다시피 저 사진은 실제상황이라기보다는 카메라맨을 대동하고 다시 찍은 연출샷이라 그렇게 판단할 여지가 있기도 하다. [3] 맥아더의 정치군인으로써의 면모를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유감없이 발휘한 회의다. [4] 미군의 상륙으로 후방이 차단된 제18군은 보급 부족으로 아사 및 자멸 위기에 처했고 미군을 격파해 보급품을 탈취하고 뉴기니 서쪽에 있을 아군과 합류하기 위해 웨왁에서 서쪽으로 진군, 7월에 아이타페의 미군과 전투를 벌이나 패배해 (Battle of Driniumor River) 웨왁으로 돌아왔고, 종전까지 지구전을 벌였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참상들이 유명하다. [5] 미국이 가르친 민주주의 대신 일본어와 일본식 천황체제를 강요하고, 곳곳에 총검을 든 병사들을 배치하고 겁탈, 공개처형까지 자행돼 공포감과 분노가 만연했다. 게다가 현지조달 원칙에 따라 강제 징용은 물론, 식량까지 수탈해 아사자가 넘쳐났고 심지어 사탕수수 대신 미국으로부터 수입할 수 없게 된 목화를 심도록 강요했으나, 필리핀의 식생과 맞지 않았다. 심지어 현지민들을 구리 광산으로 징용시켜 넣었으나, 이들이 자꾸 탈출하자 가족들을 인질로 잡고, 서로간의 감시까지 유도했다. 참고로 이는 일본 NHK 태평양전쟁 다큐멘터리에도 상세하게 언급될 정도였다. [6] 여기에 소형 보트와 잠수함들이 일본군 점령지들을 순회하며 사탕, , 초콜릿, 담배 등 요긴한 것들과 총기류를 주어 공포감을 주고 수탈하기만 하는 일본군으로부터 이반하게 만든 것도 이유가 되었다. [7] 대만이야 어차피 전쟁이 승리로 끝나도 중국에 반환될 예정이지만, 필리핀은 합중국의 식민지로 남길 수도 있다. 다만 필리핀은 1946년에 독립을 하는 것으로 이미 당시 기준으로 10여 년 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으므로 식민지로 남기는 것보다는 장차 독립국이 될 필리핀에게 미국에 대한 확실한 인상(물론 좋은 쪽으로)을 심어주어 자발적으로 친미 국가로 있게 하는 데에 더 중점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8] 전술이 전략의 하위개념이듯이, 전략은 정치의 하위개념이라 보는 시각도 있다. [9] 고작 호위항공모함 몇 척을 중심으로 구축함에 호위구축함 몇 척으로 구성된 소규모 상륙부대 호위 함대를 정규함대로 착각했기에 벌어진 일이다. 통칭 구리다 턴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 [10] 전투의 실무는 제6군 사령관인 크루거 중장이 담당했고, 제7함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제독이 제3함대를 제외한 레이테 만과 해상의 미 해군 함대를 총지휘했다. [11] 전쟁 내내 맥아더 특유의 허세로 인해 많은 곳에서의 작전 진행단계에서 점령 및 잔당 토벌 선언에 대해 실제 시점보다 훨씬 일찍 대중들에게 공표했는데 현장에선 여전히 일본군과 한창 교전 중이었고, 이를 보고 맥아더가 현장 지휘관들에 압력을 행사한 사례가 꽤 있고, 경질된 자들(Ex: 호레이스 풀러 소장 - 제41사단장)도 있다. [12] 레이테 섬의 점령 선언이 원래 11월 말 ~ 12월 초에 예정했는데 (미군이 아직 돌파구를 못내고 일본군과 소모전 중이었다.) 현장의 전황이 좋지 않아 연기된 것이다. 점령 선언 후에도 미군의 최초 상륙부대와 1차 증원군들 (도합 8개 사단) 은 45년 2월까지 1차 소탕전을 벌였고, 교대로 투입된 2개 사단이 (아메리칼, 제81사단) 2차 소탕전으로 완료했다. [13] 유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보면 마닐라 시가지의 일본군 거점 곳곳에 미군 포병들이 155mm 포 M114를 끌고 와서 영거리 사격으로 조져버리는 모습들이 보인다. [14] 얼마 안 가 전사했다. [15] 미군 제6보병사단은 1944년 7월, 미군의 서부 뉴기니(현재 인도네시아령 뉴기니) 전역의 후반부인 포켈곱 반도의 침공(샌서포르)에서 처음 투입되었고 이후 루손 섬의 전투에 참여했다. 뜻밖에도 사단에는 미군 제1보병연대(1783년 창설)가 편제되어 있었다. 미6사단과 미1보병연대는 전후 한국으로 진주해 미 군정에도 종사했다. [16] 일본이 전함 미주리에서 항복한 9/2 시점에서도 필리핀의 미군 전투부대들은 상당수가 일본군과 교전 중이었다! [17] 오노다 히로 만큼은 아니지만 항복을 거부한 일본군이 적잖게 필리핀 곳곳에 잔존했고 미군은 블랙리스트 작전을 발동하면서 필리핀에 있던 미군 부대 상당수는 점령군으로 일본으로 이동했으나 5개 사단 (제31, 37, 38, 93, 96 보병사단) 이 잔류했고, 미국 본토에서 1개 사단을 (제86사단)[26]추가로 필리핀에 보냈다. 잔류 미군 부대들은 순차적으로 철군하여 46년 연말까지 최종적으로 귀국했으며, 이들 부대는 일본군에 대한 잔적 소탕과 군축으로 전역장병을 미국으로 귀환시키기 위한 서류상의 편제 유지[27], 독립이 예정된 필리핀 자치령에 대한 치안 유지 및 필리핀 군에 대한 군사고문 및 재건[28]과 훈련 지원 등이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8] 미국 육군이 태평양에 전개시킨 야전군은 3개 군으로 제6, 8, 10군이 있다. 이 중 6, 8군은 맥아더 장군의 휘하에, 10군은 니미츠제독의 휘하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첫 데뷔를 했다. 니미츠 제독의 구역의 경우 육군과 해병대 부대가 혼성편제된 수륙양용군단으로 흔히 지상전을 치렀고 전쟁 후반기 오키나와 침공에 동원된 대규모 합동지상군을 통제할 사령부로 제10군을 선정했다. [19] 현재 주한미군을 구성하는 그 8군이 맞다./지휘관: 로버트 아이첼버거 중장 - 미군의 초기반격이 있었던 1942년 후반(파푸아 전역)부터 활약했던 장성이다. 전쟁 기간 동안 파푸아, 서부뉴기니, 남부 필리핀에서 군단(제1군단), 야전군(제8군의 초대 사령관 재직기간 1944-1948)을 지휘했다. 후임 사령관이 바로 월튼 워커 중장. [20] 레이테만 전사자 3,800명 제외. 레이테만 해전 이후 태풍으로 인한 전사자 포함되어 있음. [21] 링크 내 다른 수치로는 육공군 한정 16,303명. [22] 다른 자료로는 육공군 사상자는 71,834명. [23] 필리핀에 있던 연합군 대부분이 필리핀인인 점을 감안해도 그러하다. [24] 현대에도 필리핀 지역에는 수많은 섬이 존재하고, 지금까지도 개발이 제대로 안 돼서 반쯤 밀림 지역으로 남아 있는 오지 중에 오지인 곳도 상당히 많다. [25] 오히려, 큰 희생을 치른 이오지마,오키나와 전투와 도쿄 대공습이전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던 B-29 폭격 성과문제로 미 해군과 육군 항공대가 정치권과 여론의 질타를 받을때 맥아더가 필리핀에 갇혀 있었기에 현장에서 언론플레이로 일을 키우는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