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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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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Sanctus Pius de Petrapulsina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Padre Pio
비오 신부[1]
본명 프란체스코 포르지오네 (Francesco Forgione)
출생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왕국 피에트렐치나
사망 1968년 9월 23일 (향년 81세), 이탈리아 산조반니로톤도
시복 1999년 5월 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시성 2002년 9월 1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축일 9월 23일
소속 카푸친 작은형제회
직업 사제, 수도자
교파 가톨릭


1. 개요2. 유년기3. 사제로서의 비오4. 시복 시성5. 기적
5.1. 오상5.2. 예언5.3. 기타
6. 영성7. 어록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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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의 이콘

이탈리아 카푸친 작은형제회 사제이며 가톨릭 성인.

2. 유년기

프란치스코 포르지오네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남부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피에트렐치나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마을 사람들이 단체로 미사에 참례하는 건 기본이고, 묵주기도마저 단체로 바치는 경우가 매우 잦았다고 한다. 프란치스코는 성벽 인근에 있는 성녀 안나 경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어린 프란치스코는 자주 예수 성모 마리아, 그 외 여러 성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는 10대 초반이 되어서야 부모에게 이 사실을 밝혔는데, 이유인즉슨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인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모가 알게 된 것조차도, 프란치스코가 밥 먹다가 "엄마, 오늘 성모님이 그러시던데-"와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고 한다.

어린 프란치스코는 탁발과 설교를 하러 다니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사들을 보고, 자신도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하기로 결심한다. 부모님이 어떤 수도회에 들어갈 것인지 묻자, 프란치스코는 카푸친회가 아닌 다른 수도회는 절대 싫다며, "수염을 기르고 다니는 수사님들인 카푸친회 수사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3. 사제로서의 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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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성혈을 축성하는 비오 신부

프란치스코는 1910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수품 4일 후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그는 징병 시절을 제외한 일평생 동안 피에트렐치나에서 살았다.

사제로서 그는 매우 엄격했는데, 일례로 그는 고해성사 때에 거짓말을 하는 신자는 내쫓고, 죄를 지어 고해성사를 보고 나서 또 같은 죄를 지어 또 고해성사를 보려고 하는 경우에는 "같은 죄를 한두 번은 사해줄 수 있지만, 3번째부터는 주님이 흘리신 거룩한 피에 모독이 될 수 있어요!!"라고 역정말하며 사죄경을 외워주지 않았다. 비오 신부는 매주마다 같은 죄를 지어서 고해성사를 보러 오는 신자에게는 사죄경을 외워주지 않았고, 40년만에 정말 진실된 마음으로 고해성사를 본 신자에게는 사죄경을 외워준 적이 있다. 사실 다른 사제들도 이럴 수 있긴 하지만, 지금도 그때도 잘 이러진 않았다. 비오 신부도 자기 방식을 다른 신부들에게는 추천하지 않았다.[2]

거의 같은 시기, 이탈리아 파도바의 카푸친회 수도원에 있던 '헤르체그 노비의 성 레오폴도(1866-1942)' 신부는 언제나 매우 온화하고 자상하게 고해성사를 베풀었으며, 또한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을 발휘하여 역시 명망이 높았다. 성 레오폴도는 신자들에게는 일부러 매우 관대한 보속을 주고, 대신 자기가 고백자들의 몫까지 기도하고자 하였다. 레오폴도 신부는 비오 신부와 동시대를 살았고 먼저 시성되었지만, 생전에 두 사제가 만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똑같이 이탈리아에서, 똑같이 카푸친 수도회 소속이었으므로 서로 이름은 전해들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어떤 신자들이 오상의 성 비오 신부에게 "파도바에 계신 레오폴도 신부님은 고해성사를 언제나 온화하고 따뜻하게 주신다는데, 왜 비오 신부님은 그렇게 호통도 잘 치고 하시나요?"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비오 신부가 "레오폴도 신부님이 골때리는 고백자를 만나면, 보속으로 저한테 보냅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물론 진짜로 그랬다는 소리는 아니고 농담. 성 레오폴도 신부가 생전에 한 말에 이런 것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 고백자들에게 너무 너그럽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하느님의 용서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의 자비는 모든 것을 넘습니다." 이는 똑같은 수도회에 몸담은 성직자들이었지만, 개인적인 삶 속에서 추구한 영성의 초점이 서로 달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비오 신부는 미사를 집전할 때도 기도문 하나하나에 빠져들며 집전했기에, 미사 1대당 무려 3시간이나 걸려 집전했다고 한다. 스스로 고행을 하였으며, 돌베개와 돌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1968년 9월 23일에 사망했는데,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피에트렐치나의 모든 신자들이 모두 울며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4. 시복 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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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바오로 2세가 거행한 시성식, 2002.6.16 산 조반니 로톤도 성당에 안치된 성인의 유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재위 중인 1990년 비오 신부의 시복시성 청원이 교황청 시성성에 접수되면서 하느님의 종이 되었고, 1997년 가경자가 되었다. 그 후 전개된 기적 심사에서 비오 신부에 대한 전구로 질병이 치료된 것이 기적으로 인정되어 1999년 5월 2일 시복되었으며, 3년 후인 2002년 6월 16일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2008년에는 사후 40주기를 맞아 성인의 유해를 발굴했는데, 정수리 일부의 뼈가 드러난 것 이외에는 유해가 온전한 상태였다. 신자들이 유해를 참배하고 공경할 수 있도록 유리관에 공개하면서 얼굴에는 밀랍 마스크를 씌웠다.

5. 기적

5.1. 오상

그가 오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부터가 기적이었다. 죽기 하루 전에 완전히 사라졌으며, 아기와 같이 보드랍고 새하얀 피부만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다만 교황청은 이 성인의 오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뿐만 아니라 오상을 가졌다고 알려진 다른 성인들의 오상도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너무나도 깊은 공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로 인해 생긴 것이라고 해석한다.[3]

하지만 비오 신부 본인에겐 이 오상이 너무 아파서 평생 고통이었다. 순례객들이 호기심 등의 이유로 만지거나 하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어느 날 한 사람이 " 신부님, 오상은 어떤 느낌입니까?"라고 묻자 비오 신부는 그에게 "그대의 손에 못을 관통시켜서 그것을 이리저리 돌리며 사방으로 당겨보면, 내 고통의 3분의 1 정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그런데 그의 오상을 직접 본 이는 그리 많지 않은데, 늘 반장갑을 끼고 다녔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도 미사를 집전하다가 축성경을 외우면 그의 두 손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은 모두가 볼 수 있었다.[4]

5.2. 예언

그밖에도 성 비오 신부는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례로 비오 신부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7년 폴란드에서 이탈리아 유학온 젊은 사제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사제가 장차 교황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신부님이 앞으로 수행할 교황의 자리에 피가 보이는군요!!"라고 덧붙였다. 비오 신부가 만난 젊은 사제는 카롤 보이티와 신부, 바로 훗날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였다. 그리고 그는 교황 재직 중 암살당할 뻔한 일이 있다. 이후 비오 신부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재위 시절에 시복, 시성이 모두 이루어졌다.

1938년, 후에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이 되는 움베르토 왕세자의 아내인 마리조제 왕세자비가 비오 신부와 만나게 되었다. 비오 신부는 "곧 끔찍한 전쟁이 터질 것이며, 이탈리아의 군주제도 이 전쟁의 여파로 사라질 것입니다."[5]라고 예언하였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이탈리아 왕실은 전후 국민투표를 통해 폐지되었다. 이후로도 마리조제는 비오 신부와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비오 신부는 "이탈리아의 군주제가 다시 복원되어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혈통인 아오스타 가문에서 다시 군주가 즉위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6]

신기하게도 비오 신부가 사망하고 나중에 그의 시성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이모네 왕자가 카푸친회 수사들의 초대로 비오 신부의 시성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공개된 부조아이모네 왕자의 15살 시절의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이 부조는 비오 신부의 생전에 만들어진 것이고 비오 신부가 사망했을 당시 아이모네 왕자는 1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일각에서는 비오 신부가 아이모네 왕자가 이탈리아의 국왕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예언하기 위해 이 부조를 만든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

1950년 2월에 사적계시를 받았다고 하는데, 3개월 후에 한국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5.3. 기타

그리고 그가 일으켰다는 기적은 여럿 더 전해지고 있다. 질병을 치유하거나 타인의 진심을 꿰뚫어보는 것은 흔했으며, 같은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동시이처존재의 기적도 여러 번 일으켰다. 지금은 교회법이 바뀌어 시복시성에서 '부패하지 않은 유해'라는 조건이 빠졌지만, 사후 40년이 지났음에도 방부처리하지 않은 유해가 온전한 점 또한 기적으로 여겨진다.

6. 영성

그는 타인의 구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연옥 영혼들에 대해서는 눈물이 날 정도의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그는 교회가 대사의 일부를 없애버렸을 때 매우 놀라며 '아니, 교회가 대사를 없애면 그토록 불쌍한 연옥 영혼들을 어떻게 도와줄 것인가!'라며 개탄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고통에 대한 크나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건 그 고통이 보속으로서 남들의 구원에 도움이 되어서였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그의 말이 바로 다음과 같다.
주님, 불쌍한 연옥 영혼들을 당장 천국으로 끌어올려 주소서. 그들에게 필요한 보속을 제 고통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보속의 100배에 해당하는 고통을 제게 짊어주소서!!

또한 그가 맹장염으로 인해 수술을 받을 때 자처해서 무마취수술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고통을 남의 구원을 위한 보속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수술을 받다가 중간쯤에 그만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절했는데, 나중에 일어나서는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좋은 보속을 제가 그만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 죄송합니다!!'라고 하며 주저앉아 어린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덧붙여서 교회가 잠잘 때 입는 밤 수도복을 없앴을 때도 울었다고 한다. 수도복은 상당히 불편하기에 그것을 입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속을 할 수 있는데, 그것 중 잠잘 때 입는 수도복을 없앴기 때문이다.

7. 어록

"병중에 있는 사람은 미사를 봉헌하는 중인 것입니다."
"고통이 우리 영혼에 필요하고 십자가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영혼을 날마다 순화하고 영혼을 속된 것에 물들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십자가 없이 구하려 하지 않으시고 구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한 영혼을 부르실 때, 하느님은 십자가로 그 영혼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만 그대가 하느님이자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게 된 것을 행운으로 받아들이십시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저버림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도 큰 사랑이지요. 이것은 벌 받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최고 경지입니다. 그러니 주님께 그 고통에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겟세마니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시십시오."
"내 딸이여, 그대의 골고타가 갈수록 고통스럽다는 것을 나는 이해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곳이 바로 골고타였음을. 그리고 구원된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완성할 곳도 그곳이라는 사실을. 고통은 신랑이 주는 결혼반지입니다."
"주님은 때로 그대가 십자가의 무게를 느끼도록 하십니다. 그 무게가 참을 수 없을 정도라 하여도 그대는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자비로 그대에게 힘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과 역경은 그대를 십자가 밑에 있게 하고 천국의 문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이 그대를 영원한 행복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비록 세상에 모든 죄를 다 지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반복해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네가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수많은 네 죄는 용서받았다'라고 말입니다."
"그대가 고통받고 그분의 뜻에 순명할 때, 그대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대가 겪는 고통의 순간에 그대 안에서 그대를 위하여 고통 받으심을 그대가 알게 될 때 그대 마음은 커다란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그대가 그분을 떠났어도, 그분은 그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지만, 고통을 슬기롭게 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통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고통을 제대로 쓰는 법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복됩니다. 언제나 고통을 바라십시오. 고통은 거룩한 지혜와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줄 것입니다."
"천사가 우리에게 부러워하는 것은 딱 한 가지,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고통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고통만이 한 영혼에게 이렇게 말할 자격을 줍니다. '나의 하느님, 보십시오. 제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그대의 영혼을 그토록 어루만져 주신다는 말을 들으니 나는 너무나 기쁩니다. 나는 그대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고통은 하느님께서 그대를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고통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의 몫을 상속받을 자임을 구분하는 표징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그대의 정신이 실패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나의 사랑스런 자녀여, 그대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함께 그대 안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아픔과 불편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그대는 완전하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고통 자체를 사랑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고통을 하느님께 구하는 이유는 고통의 열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귀양살이하는 형제를 구원하며 연옥불에서 영혼을 건져냅니다. 고통은 보속입니다. 고통은 나의 일용할 양식이고 기쁨입니다."
"불경스런 인간이기에 예수님은 당신과 함께 울어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하여금 슬픔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자비는 끝이 없습니다. 그분은 쓴 것을 단 것으로 바꾸는 법을 아십니다. 그분은 삶의 일시적 고통을 영원한 행복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내적 기쁨 중에는 유치한 기쁨도 있습니다.그런 기쁨은 영적 완성의 상징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쁨보다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내적 무미건조한과 불안감, 무기력함이야말로 참된 사랑의 상징입니다."
"고통은 즐거워할 만한 것입니다. 고통의 귀양살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분을 사랑할수록 그대는 희생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려는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준비해야 합니다."
"위대한 영혼들에게 아픔은 기쁨의 원천이었습니다. 창조의 불행한 타락 이후 아픔은 우리 영혼을 고양시키는 강력한 지렛대 역할을 해왔습니다. 아픔은 우리를 새롭게 만드는 끝없는 사랑이신 그분의 손길입니다. 십자가는 그대를 억누르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그대를 비틀거리게 하여도 십자가의 힘이 그대를 지탱시킬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은 조화의 하느님입니다. 그대는 아픔을 그분께 드리고 평화를 가져갑니다. 절망을 드리고 희망을 가져갑니다."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께 합당한 제물이 되는 것은 우리의 육체적-정신적 고통뿐입니다."

[1] 뜻은 그냥 '비오 신부'라는 뜻이지만, 이탈리아 국외에서까지 이렇게 통용된다. [2] 애초에 일반적으로 사제들은 고해소에서 듣고 나서 사죄를 해주고 나면 대부분 잊는다고 한다. 고해성사의 내용을 발설하지 않기 위한 면이 크다. [3]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오상을 지녔다고 인정한 인물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단 1명뿐이다. [4] 그런데 사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도 마찬가지였다. [5] 물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워낙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인지라, 이탈리아 왕실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는 이탈리아인으로서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6] 그러나 2023년 현재로선 아오스타 가문도 사보이아 본가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지만, 즉위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하지만 이탈리아 정치판이 2000~2020년대 들어 유독 정치판 변동이 심하니, 너무 심하다 싶으면 국민의 구심점 역할로 가능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