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탄생부터
NWA 출범 전까지 (19세기 후반 ~ 1948년)3. NWA의 분열,
AWA와
WWWF의 탄생 (1950년대 ~ 1960년대)4.
NWA-
AWA-
WWWF 3강 체제 (1960년대 ~ 1980년대 초반)5. WWF의 골든 시대,
WCW의 탄생 (1980년대 ~ 1990년대 초반)6. 스테로이드 파동과 새로운 시대, 월요일 밤의 전쟁의 시작(1992~1995)7.
ECW의 등장과 대격변,
nWo와
애티튜드 시대 (1996~2001)
7.1. 관련 문서
8. 인디 레슬링의 약진,
WWE의 독주와 사건 사고 (2002 ~ 2007)9.
TNA의 몰락, PG와 리얼리티 시대 (2008 ~ 2014)10.
WWE 체제 변화?
AEW의 등장 (2014 - 2022)11.
트리플 H의 집권과 WWE의 새로운 시대 개막1. 개요
미국 프로레슬링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는 페이지.2. 탄생부터 NWA 출범 전까지 (19세기 후반 ~ 1948년)
기존에 단순히 힘이 센 장사를 쓰러트리면 끝나던 개념이 오늘날의 쇼맨십이 가미된 경기로 발전한 것은 1900년대 초반부터였다.[1][2] 영국의 사업가 찰스 코크란은 당시 유럽의 그레코로만 레슬러로 이름을 알리던 게오르그 하켄슈미트를 영입하여 다수의 레슬링 경기를 주관하였다. 그러나 정직한 스타일로 경기를 펼치는 하켄슈미트로는 흥행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코크란은 하켄슈미트에게 박진감을 높이기위한 다양한 쇼맨십을 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레슬러들에게는 레슬링 실력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쇼맨십 능력이 필요하다"라는 인식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3]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 속에서 유럽에서는 더 이상 사업을 벌이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하켄슈미트 등의 많은 레슬러들은 미국으로 건너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럽에서 배운 레슬링 기술과 쇼맨십 기술을 살려 각종 공연을 벌임으로써 미국에서 프로레슬링 단체의 기반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골드더스트 트리오라 불리는 에드 루이스(Ed Lewis), 빌리 샌도우 (Billy Sandow), 투츠 몬트(Toots Mondt)라는 세명의 레슬러에 의해 크게 성장하게 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미국의 레슬링 단체들은 레슬링 경기의 흥행을 위해 태그팀 매치, 심판방해, 난입, 선수 고유의 시그니쳐 무브 등을 개발하였고 이는 오늘날 프로레슬링의 근간이 되는 개념들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기존의 대부분의 레슬러 선수와 공연 주최 단체는 경기마다 계약을 하였지만, 이 시점부터는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년단위로 선수가 단체에 머물러 경기를 진행하는 장기계약선수가 등장함에 따라 해당 단체의 공연을 자주 보는 지역주민들은 특정 선수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더욱 자주 공연을 보러오게 되었다.[4]
이러한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이후 미국 전역에 수많은 프로모터와 단체들의 범람으로 이어지는데, 그들은 서로의 지역구를 존중하는 불문율은 지키면서도 각자의 단체에 '세계' 챔피언을 지정하며 상호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8년 프로모터 폴 '핑켈' 조지의 주장과 여러 프로모터들의 동조로, 상호간의 상업 지역을 존중하고 하나의 세계 챔피언만을 지정하는 체제의 NWA가 탄생하였다. 초대 NWA 세계 챔피언으로 오빌 브라운을 앉히지만 곧 부상으로 물러나고 프로레슬링의 제왕 루 테즈가 왕좌를 차지하게 된다.[5]
3. NWA의 분열, AWA와 WWWF의 탄생 (1950년대 ~ 1960년대)
이렇게 루 테즈를 챔피언으로 내세워 잘 나가던 NWA도 분열하기 시작했는데, 다름 아닌 루 테즈의 7년이 넘는 장기 집권이 문제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프로모터 겸 레슬러 번 가니에가 NWA에 불만을 가진 여러 프로모터들과 함께 NWA를 탈퇴해 1960년 AWA를 창단하게 된다. 이후 1963년에도 또 다른 단체가 NWA를 탈퇴하는데, 빈스 맥마흔의 아버지 빈스 맥마흔 시니어의 단체 CWC가 당시 NWA 세계 챔피언이었던 '오리지널 네이처 보이' 버디 로저스의 타 지역 단체 출전 문제로 마찰을 빚자 NWA를 탈퇴해 단체명을 WWWF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이 단체는 훗날 전설이 된다.4. NWA- AWA- WWWF 3강 체제 (1960년대 ~ 1980년대 초반)
이후 한동안 AWA와 WWWF는 탈퇴했지만 당장에 NWA를 이길 수 없기에 NWA와의 관계를 유지했으나, 이들이 경쟁력을 갖추자 한동안 북미 프로레슬링계는 여전히 건재한 NWA와, 신흥 단체 AWA와 WWWF의 3강 체제에 접어든다. 브루노 삼마르티노, 더스티 로즈, 밥 백런드, 릭 플레어[6]와 같은 기라성 같은 레전드들이 이 시기 활동하였고, 또한 1979년, WWWF는 단체 이름을 WWF로 바꾸게 된다. 1970년대 한국인 레슬러 박송남이 NWA 지구에서 활약하기도 했다.5. WWF의 골든 시대, WCW의 탄생 (1980년대 ~ 1990년대 초반)
1982년, ' 빈스 맥마흔 주니어가 아버지로부터 WWF를 물려받는다.그 직후, 빈스 맥마흔은 기존의 지역구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확장을 하며 업계의 불문율을 깨고 경쟁을 시작한다. WWF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벗어나 흥행을 열기 시작했고, 흥행 비디오를 지역구 밖에서 판매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앙드레 더 자이언트, 로디 파이퍼와 같은 선수들이 맹활약했고, 일본에서 이미 스타였고 영화 록키 3에도 출연한 경력이 있으나 AWA에서는 테크니션이 아니라는 이유로[7] 메인 이벤터가 되지 못하던 선수를 영입해 단체의 탑 선역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그 선수가 바로 헐크 호건. 이렇게 세력을 불러오던 WWF는 1985년, 레슬링계의 슈퍼볼을 꿈꾸며 역사적인 첫 레슬매니아를 개최했다.[8] 가수 신디 로퍼, 복서 무하마드 알리, 배우 미스터 T를 섭외해 헐크 호건, 웬디 릭터와 엮어 '락 앤 레슬링 커넥션'을 만들고, MTV로 대표되는 당대의 팝 문화와 레슬링을 성공적으로 접목해 레슬매니아 1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이후 전세계에 '프로레슬링 붐'이 일어 WWF는 세계적 관심을 받게 되어, 1987년 레슬매니아 3은 무려 9만명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며 공식적인 최다 관중 동원 프로레슬링 흥행 기록을 남기는 등[9][10] 성공가도를 달렸다.
한편 AWA는 WWF의 기세에 버티지 못해 결국 1991년 WWF에게 인수되었고, NWA는 WWF의 맹렬한 기세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설상가상 NWA의 가맹단체 GCW가 테드 터너 산하의 케이블 방송사 TBS에 방영하던 프로그램 WCW[11]를 1984년 빈스 맥마흔이 인수하며[12] NWA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지만, 빈스 맥마흔의 WCW가 삽을 푸면서(...) 1985년 NWA의 짐 크로켓 프로모션즈가 탈환한다.
하지만 짐 크로켓 프로모션즈도 WWF를 당해내긴 역부족이었고, 결국 파산하면서 NWA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테드 터너가 직접 나서 1988년 11월 짐 크로켓 프로모션즈를 인수했다. 또한 단체명 자체를 WCW로 바꾸어 본격적으로 WCW가 출범하였다.
6. 스테로이드 파동과 새로운 시대, 월요일 밤의 전쟁의 시작(1992~1995)
하지만 뜨거웠던 1980년대의 프로레슬링 붐은 90년대에 이르러 식어가기 시작했다. 80년대의 여피 문화는 1991년 너바나의 ' Nevermind'로 종말을 맞이했고, 프로레슬링도 시대의 흐름에 맞춰갈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헐크 호건의 바통을 받았던 얼티밋 워리어의 인기는 좋았지만 만족스럽지 않았고, 결국 헐크 호건이 다시 복귀하는 등 WWF의 세대 교체는 신통치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1992년 스테로이드 파동이 터지며 WWF의 이미지도 악화되었다.상황은 WCW도 별반 다를 게 없었는데, TBS의 인사들과 테드 터너는 프로레슬링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초기엔 로보캅의 도움을 받는 스팅(...)
이렇게 위기를 맞던 와중, WWF는 상황을 바꿀 두 가지 수를 두는데, 하나는 80년대의 주역이었던 선수들은 배제하고 새로운 선수들을 메인 이벤터로 올리는 것이었다.[15] 이 시기 푸쉬를 받은 선수들이 브렛 하트, 숀 마이클스, 디젤, 레이저 라몬, 브리티시 불독, 렉스 루거 등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80년대의 스타들과는 다른 부류의 카리스마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브렛 하트와 숀 마이클스는 당시까지의 WWF, 아니 역대 모든 프로레슬러 중에서도 탑 클래스의 경기력이라 심심하면 데이브 멜처에게 별 0개를 받던(...)[16] 골든 시대 시절에 비해 WWF는 경기 측면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두번째는 생방송으로 주간 프라임타임 시간대 레슬링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TV에 방영되던 프로레슬링 프로그램은 전부 사전녹화된 영상을 보여주고 스튜디오에서 인터뷰나 PPV 홍보를 하는 식이었는데, 1993년 1월 WWF가 최초의 생방송 레슬링 쇼 RAW의 첫 에피소드를 방영하며 생방송 시대를 연 것이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RAW는 이전과는 모든 게 달랐다. 선수와 관중은 서로 가까이 연결돼 있었고, 선수들은 매주마다 경기를 치렀으며, PPV에서나 나타나던 챔피언이 매주 개근을 했다.[17]
이렇게 상황을 타파할 전략을 짠 WWF였지만, 부작용도 있었다. 80년대의 검증받은 레슬러들이 소외됐던 것이다. WWF의 '뉴 제너레이션' 시대가 열리며 기존의 선수들은 기회를 받지 못했고, 헐크 호건을 시작으로 아직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RAW 해설이나 보던(...) 랜디 새비지 등 많은 골든 시대의 메인급 선수들이 테드 터너의 자본에 힘입어 마구 선수들을 영업하던 WCW로 이적한 것이다. 이는 WWF에게 뼈 아픈 실수가 됐는데, 이미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베테랑들을 잃어 선수들의 네임밸류가 WCW에 비해 떨어지게 된 것이다.
단, 이건 선후관계가 명확하지 않은데, 헐크 호건 등 몇몇 기존의 베테랑 레슬러들이 WWF에서 스테로이드 사건에 대해 빈스 맥마혼에게 불리하게 증언한 다음 WCW에 거액의 돈을 받고 튀었다는 말이 있다. 또 WCW에서도 WWF의 유명 레슬러들을 돈으로 끌어모으기도 했고. 한마디로 빈스가 세대 교체를 위해 베테랑을 내보냈다기보다는 대부분의 베테랑들이 돈을 쫓아 WCW로 가는 바람에 2선급의 레슬러들을 급히 메인으로 올린 것이다.
이렇게 릭 플레어, 헐크 호건, 스팅, 랜디 새비지라는 다시 없을 메인이벤터 진에 더해 WCW는 테드 터너를 대신해 WCW를 총괄할 인물을 뽑게 된다. 바로 에릭 비숍. WCW의 부사장이 된 비숍은 경기장을 구식 경기장에서 세련되고 관객들과 가까운 경기장으로 이주하고, 본인 말로는 '전형적인 남부지역 레슬링 쇼'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남부 억양의 해설진을 갈아치우고[18][19] 바비 '더 브레인' 히넌과 민 진 오클런드를 고용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개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5년, WCW는 WWF의 RAW와 같은 생방송 레슬링 쇼 나이트로를 신설한다. RAW와 똑같은 월요일에, RAW와 똑같은 프라임 타임에, 북미 프로레슬링 양대 단체의 메인 쇼가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배치된 것이다.
이로써 두 단체의 사활을 건, 프로레슬링 역사상 다시는 없을, 아니 방송 역사상으로 따져도 다시는 없을 전무후무한 시청률 전쟁이 시작됐다.
7. ECW의 등장과 대격변, nWo와 애티튜드 시대 (1996~2001)
이 무렵, 'Eastern Championship Wrestling' 이라는 필라델피아를 본거지로 하는 독특한 단체가 있었다. 폴 헤이먼의 주도하에 화려하고 하드코어한 경기를 선보이던 이들은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밥줄이었던 WCW에게 버림받은 NWA의 새 돈줄로 매니아들의 지지하에 소소한 흥행을 해오던 단체였는데...1994년 8월 27일 모든 게 달라졌다.
이 날 NWA 월드 챔피언십을 건 매치에서 승리한 셰인 더글러스는 대뜸 타이틀을 던져버리고는 "NWA는 죽은 단체이며 ECW 타이틀만이 세계 타이틀이다"란 폭탄 발언을 남겼다. 당시 운영자였던 토드 고든, 폴 헤이먼, 셰인 더글러스 세 사람이 짜고 NWA를 엿먹인 것이다. 이후 이름의 Eastern을 Extreme으로 바꿔 'Extreme Championship Wrestling'을 출범한 후 NWA에서 탈퇴해버렸다.
이후 본격적으로 비주류의, 비주류에 의한, 비주류를 위한 단체의 길을 걷기 시작한 ECW는 비단 하드코어 레슬링 말고도 에디 게레로, 크리스 제리코,
WWF의 간판 스타였던 스캇 홀과 케빈 내쉬가 '아웃사이더즈'라는 이름으로 WCW의 침입자들처럼 데뷔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던 nWo 각본은, 헐크 호건의 악역 전환과 nWo 창단이란 충격적인 각본을 선보이며 WCW가 WWF를 압도하는데 결정적 도움을 줬고, 이후 nWo의 충격적 행보와 스팅의 역대급 기믹 전환까지 합쳐지며 WCW는 83주동안 WWF를 시청률로 압도했다.
경기력 면에선 그래도 WCW보다 나았지만, 각본 면에선 프랑스 귀족 헌터 허티스트 험슬리, 치과의사 아이작 양켐, 닭벼슬머리의 열혈청년 락키 마이비아(...)[21] 등 어처구니없는 기믹을 선보이던 WWF도 스티브 오스틴을 시작으로[22] 트렌드를 맞추기 시작해 원래부터 온갖 망나니 짓은 다하던 숀 마이클스는 트리플 H, 차이나와 함께 DX를 결성해 더 막나가기 시작했고(...) 막가파 악역이었던 스티브 오스틴은 어느새 Bad Ass한 희대의 반항아로 변해있었으며, 영웅 브렛 하트는 이런 세태에 못마땅해 하더니 결국 냉혹한 독설가가 돼 버렸다.[23] 이렇게 변화를 해오며 WCW를 추격해왔지만 역부족이였던 WWF였는데... 몬트리올 스크류잡이 일어났다.
평생을 WWF에 헌신해온 충신 브렛 하트가 배신을 당한 것에 레슬링계는 충격에 빠졌고, 백스테이지는 어수선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WWF의 대반격의 시발점이 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막나갔기 때문이다. 브렛을 엿먹인 역적 중 하나인 DX는 얘네가 과연 어디까지 막나가나 궁금할 정도로 매주마다 방송사고급 만행(...)을 일삼았고, 남은 한 명인 빈스 맥마흔은 아예 그의 악덕 회장 이미지를 캐릭터화 시켜 스티브 오스틴과 전설적인 대립을 하며 초대박을 쳤다. 이 시기 WWF는 최고 시청률이 8%[24] 를 넘는 등 엄청난 인기를 구가했고, 이 반격을 이겨내지 못한 데다 추가로 자기들끼리 정치싸움에 삽질까지 한(...) WCW와, WWF와 WCW의 이중압박을 견디지 못한 ECW를 인수하면서 월요일 밤의 전쟁은 WWF의 승리로 끝이 났다.
7.1. 관련 문서
8. 인디 레슬링의 약진, WWE의 독주와 사건 사고 (2002 ~ 2007)
2002년, WWF는 세계 야생동물 기금과의 소송에서 패소해 단체명을 WWE로 바꾼다. 비록 ECW는 사라졌지만, ECW 이후로 무수히 많은 인디 레슬링 단체들이 생겨났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게 ROH.[25]ECW의 후계격으로 시작한 이 단체는[26] CM 펑크, 대니얼 브라이언, AJ 스타일스, 사모아 조, 새미 제인, 케빈 오웬스, 세스 롤린스, 세자로와 같은 수많은 선수들과 CM 펑크와 사모아 조간의 60분 시간제한 매치와 같은 수많은 명경기를 배출했으며, 한때는 세상에서 경기력으로 가장 좋은 평가를 받는 단체이기도 했다.
그리고 북미 내 2인자 자리를 수성해왔던 TNA도 빠질 수 없다. 특색 있는 육각 링과 한때 TNA를 먹여살리던 X 디비전 및 넉아웃 디비전, 리썰 락다운, 킹 오브 더 마운틴 같은 고유한 경기 방식이 공존하던 특색 있는 단체였으나 그분이 오고 나선...[27][28]
하지만 상업적인 면에선 경쟁 상대가 없어진 WWE의 독주 체제다.
사건 자체의 충격과 크리스 벤와의 뇌가 알츠하이머 환자 노인 수준이었다는 부검 결과로[29] WWE는 청문회에 끌려다녔고, 비단 WWE 뿐만 아니라 북미에서의 프로레슬링 자체가 흑역사로 남을 뻔했다. 이곳저곳서 잡음이 터지던 WWE는 이후 머리에 하는 체어샷과 같은 많은 기술을 봉인하고 시청 등급을 TV-14에서 PG로 낮춘다.
9. TNA의 몰락, PG와 리얼리티 시대 (2008 ~ 2014)
TNA는 경영진의 실책 및 헐크 호건 등 거액을 주고 영입한 노장 레슬러 등의 영향 행사로 인해 그 팬덤을 잃기 시작한다. ROH 역시 선수를 키우는 족족 WWE에 빼앗기며 그 영향력이 줄기 시작했다. 이로써 WWE는 그 독주 체제가 더욱 심화되었다.WWE가 PG로 등급을 내린 후 무적 선역 기믹인 존 시나는 매니아 팬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하는 라이트 팬층에게 인기를 끌며 아이콘으로서의 자리를 굳힌다. 더불어 2011년 이후로 ROH 출신의 레슬러 CM 펑크[30], 대니얼 브라이언은 각각 파이프밤과 'Yes Movement'[31]라는 영향력 있는 행적을 남기며 이른바 '리얼리티 시대'를 주도한다.
한편 서바이벌 쇼였던 NXT가 육성 단체 FCW와 통합되면서 본격적인 WWE 산하단체로서의 NXT가 탄생한다. 트리플 H의 주도로 인디 곳곳에서 타일러 블랙, 존 목슬리, 클라우디오 카스타뇰리, 케빈 스틴 같은 명선수들을 영입함에 따라 산하단체 NXT는 괴물집합소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10. WWE 체제 변화? AEW의 등장 (2014 - 2022)
2015년 이후 WWE는 새로운 무적선역 캐릭터인 로만 레인즈를 계속 밀어주고 있으며 이 때문에 부침을 겪고 있다. 존 시나 때보다 더한 밀어주기와 부족한 개연성 탓에 계속해서 야유를 받는 것이 대표적인 이유다.[32][33] 심지어 2017년 레슬매니아에서는 언더테이커마저 이겨버리는 각본으로 매니아층에게 어마어마한 야유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로만의 푸시는 줄지 않았고, 끝끝내 미즈를 꺾고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면서 WWE는 로만을 계속해서 단체의 얼굴로 밀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천명한다. 2017년 10월엔 인도계 캐나다인 프로레슬러 진더 마할에게 스맥다운의 메인 챔피언을 쥐어주며 인도 시장에 진출하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인도 시장의 흥행은 그저그런 정도로 끝나고 말았고, 진더 마할도 타이틀을 AJ 스타일스에게 내주고 만다.[34]그러나 의견이 분분한 메인 쇼와 달리, NXT는 지속적으로 세계 곳곳의 선수들을 매우 적극적으로 영입하며 매니아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다. 2014년부터 시작한 단독 PPV 이벤트인 NXT 테이크오버는 해가 갈 수록 높은 평가를 받으며 급기야는 레슬매니아 같은 메인 로스터 이벤트 이상의 호평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른다.
더불어 샬럿 플레어, 사샤 뱅크스, 베키 린치, 베일리라는 ' 포 호스위민'을 위시한 NXT 출신의 여성 레슬러들을 중심으로 한 "위민즈 레볼루션"은 여성부 레슬링의 위상이 급격히 올라가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UFC 파이터 출신인 론다 라우지의 합류는 이런 추세에 쐐기를 박았으며, 이는 여성 단독 이벤트인 WWE 에볼루션 개최를 통해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다른 한편 WWE의 손이 닿지 않는 북미 틈새시장에 영향력이 늘기 시작한 것은 ROH와 협약을 맺은 신일본 프로레슬링이었다. 특히 2014년에 TNA 출신의 AJ 스타일스가 신일본에 건너가 불릿 클럽의 리더가 되고 단숨에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딴 사건은 북미 레슬링 팬들 상당수가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주목하게 된 계기였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ROH와 신일본은 2019년, WWE의 근거지였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동 주최로 G1 슈퍼카드를 열기에 이른다.
이런 경쟁의 심화는 유튜브, 그리고 2014년을 기점으로 본격화된 WWE 네트워크 등의 인터넷 영상 보편화와 함께 전세계 레슬러들 경기력의 급격한 상승을 가속화시킨다. 데이브 멜처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별점 인플레'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단체를 막론하고 더 후한 별점을 주기 시작한다. *
그리고 2019년에 ROH 및 신일본에서 불릿 클럽의 유닛으로 활약하던 디 엘리트는 올 엘리트 레슬링 창설을 발표한다. 2018년에는 단독 흥행인 ALL IN을 성공시키기도 했던 디 엘리트는 풀럼 FC의 구단 관계자이기도 한 토니 칸의 주도로 본격적인 단체 구성에 돌입하며, 미국의 TNT, 영국의 ITV와 TV 계약을 맺는데 성공하며 더블 오어 나씽 2019로 성공적인 첫발을 내딛는다.
2020년에 코로나바이러스-19로 인해 다른 종목들 처럼 위기가 생겼다. 그러나 다른 종목들은 중단 및 취소크리를 맞았지만 프로레슬링은 무관중 경기로 그대로 진행하면서 사실상 북미에서 유일하게 진행하고 있는 프로스포츠가 되면서 자가격리를 하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유일한 볼거리가 될 전망이다.
2021년에는 WWE가 코로나로 주춤한 틈을 타 AEW가 공격적인 경영을 하면서 기존의 WWE의 유명 선수들을 다수 영입하고[35] 특히 반 WWE의 선봉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레슬러 CM 펑크를 데려오는데 성공하면서 WWE가 독점하고 있던 북미 프로레슬링계에서 어느 정도 지분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WWE는 기존의 NXT를 신인 선수 육성 단체로 다시 돌리면서 상당수의 선수들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정작 WWE에서는 몇몇 선수들만 독점적으로 메인 이벤터를 차지하고 기존에 있던 다수의 능력있는 선수들을 푸대접하고 있어서 점점 문제가 심각하지는 중이다.[36][37]
현재 WWE가 그동안 선점해놓은 미국 시장에서의 영향력 덕분에 RAW는 약 170만 가구의 시청자 수를 기록하고 있으며,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스맥다운은 약 210만 가구의 시청자 수를 기록하는 등 2위 단체인 AEW의 다이너마이트가 약 95만 가구, 램페이지가 약 55만 가구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과 비교하면 경쟁에서 앞서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우디에서 개최되는 PPV의 수익도 상당해서 당분간 두 단체의 격차는 유지되겠지만, 문제는 단체의 평판과 현장 반응이다. PPV에서 5성급 이상의 경기를 만들어내며 엄청난 반응을 이끈 풀 기어 2021과 달리, 로만 레인즈 강점기라고 불리며 쇼의 낮은 퀄리티와 매주 동일한 스토리라인이 반복되다보니 WWE에 대한 팬들의 평가가 바닥을 치고 있다. 심지어 근처 지역에서 비슷한 시기에 생방송 일정이 잡혔는데 AEW의 티켓 구매자 수가 더 많이 나오는 등 실제 열혈 팬들의 반응은 역전된 상태. 2022년에는 AEW가 상승세를 이어 ROH까지 인수하며 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때문에 북미 레슬링 시장에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AEW에 예상치 못한 악재가 터졌다. 촉망받는 선수였던 MJF가 태업 및 노쇼로 부정적 이슈를 생산하더니, 얼마 있지 않아 단체의 간판스타이자 메인 챔피언이었던 CM 펑크가 단체의 또다른 스타인 행맨 페이지에 대한 슛 발언, 절친한 동료였던 콜트 카바나에 대한 비난, AEW의 주축인 디 엘리트 멤버들과의 백스테이지 폭력 사건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폭력 사태와 관련된 선수들에겐 챔피언 자격 박탈이라는 중징계가 내려졌다. 이후, CM 펑크 뿐만 아니라 선수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AEW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부쩍 늘어났다. 무엇보다 CM 펑크는 현재 레슬링 팬들에게 공공의 적으로 취급받는 상황이다.[38][39][40][41][42]
11. 트리플 H의 집권과 WWE의 새로운 시대 개막
한편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빈스의 집권도 어느덧 황혼이 찾아오게 되는데 그 기점은 바로 빈스 맥마흔의 성추문 사건이었다. 빈스 맥마흔은 이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딸 스테파니에게 WWE 회장 자리를 물려주긴 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상왕 노릇을 하면서 주간쇼 와 PLE의 지휘 및 각본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나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눈길이 빈스에게 미치자 결국 2022년 7월 23일, 빈스 맥마흔은 77세의 나이로 모든 WWE 직위에서 은퇴하고 물러날 것을 선언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WWE의 수뇌부에도 많은 변화가 생기게 되었는데, 우선 빈스 맥마흔과 함께 성추문을 저질렀다는 의혹을 받던 임원 존 라우리나이티스는 결국 회사에서 쫒겨나게 되었다. 이외에도 WWE 내에서 트리플 H와 대립하던 임원인 케빈 던[43]은 워낙 WWE 업무에 잔뼈가 굵은 인물이라 단번에 쫒겨나지는 않았지만[44] 대신 권력은 내려놓아야 했고 또, 케빈 던 못잖게 빈스의 심복이었던 브루스 프리차드[45] 역시도 쫒겨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중요 보직에서는 밀려나 있다. 대신 스테파니 맥마흔은 WWE 회장 및 CEO를 맡게 되면서 사실상 WWE의 최고 자리에 올랐고 그녀는 자신의 남편 트리플 H에게 모든 실권을 밀어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는 WWE의 핵심 보직인 각본팀 수장 및 최고 컨텐츠 책임자(CCO), 그리고 인재 개발 수석 부사장 자리[46][47]를 도맡게 되었으나 나중에 인재 개발 수석 부사장 밑 NXT 책임자 자리를 절친인 숀 마이클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WWE의 수뇌만 바뀐 것이 아니라 그동안 WWE의 단점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상당부분 해소되기도 했는데, 사실 빈스 맥마흔은 나이가 들면서 고집만 매우 강해져서 남의 말은 거의 듣지 않고 자신의 심복이자 예스맨들인 케빈 던과 존 라우리나이티스, 브루스 프리차드 등의 말만 들었고 이로 인해 WWE의 인재들을 함부로 밖으로 유출시켰는데[48], 특히 빈스와 그 심복인 케빈 던은 NXT 출신들을 매우 싫어해서 그동안 트리플 H가 공들여 키운 레슬러들을 상당수 해고해 버렸고 이들은 마침 선수들을 불러모으던 신설 단체였던 AEW로 가 버리게 되었다. 그래서 한동안 WWE는 정말로 매주 나오던 선수들만 나왔고 시청률은 서서히 떨어져 가던 상황이었다. 또한 빈스는 나이가 들면서 변덕도 심해져서 주간 쇼(RAW, 스맥다운)가 시적되기 몇십 분 전에 갑자기 각본을 바꾸고 선수나 해설진 등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귀에 꼽힌 리시버에 대고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그 뿐만 아니라 선수들의 프로모나 각본에서도 철저하게 선수들과 각본진의 의견은 무시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대로만 지시하고 있어서 존 목슬리의 말에 의하면 로만 레인즈가 프로모에 대해 괜찮은 아이디어를 내서 빈스에게 한번 건의해 보라고 제안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아이디어는 어디론가 가 버리고 로만은 빈스가 지시한 낡고 구린 프로모를 연습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빈스가 가고 트리플 H가 집권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는데 트리플 H는 WWE의 신인 레슬러 대부분을 키웠거나 데려온 장본인이기도 해서 선수들과 직원들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었고 본인도 원래 레전드급 선수 출신이라 이 업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잘 알고 있던 데다가 경영도 다년간 맡고 있었다 보니 그야말로 차세대 WWE의 경영진으로서 준비된 인물이나 마찬가지였고 팬들의 요청에도 매우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맡게 된 WWE는 팬들에게 매우 호평을 받는 중으로 특히 주간 쇼에서 프로레슬링의 비중을 높이는 한편 진지함이 부족하고 주요 각본과 관련없는 가벼운 백스테이지 장면[49]을 사실상 삭제했으며 그 대신 선수들에 대한 각본도 더 깊이있게 바꾸고 경기 시간도 크게 늘렸다. 무엇보다 선수들의 자신의 각본 및 프로모에 대한 의견을 더 많이 받고 피드백하도록 하였고 직원들에게도 소리를 지르는 대신 차분하게 의견을 나누도록 해서 선수들과 직원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또한 과거 해고되었거나 활동을 중단한 선수들 중 AEW에 가지 않은 선수들을 대거 재영입을 하면서 다른 의미로 팬들의 열광을 불러 모았는데 캐리언 크로스, 브론 스트로우먼, 자니 가르가노, 덱스터 루미스, 다코타 카이, 히트 로우, The O.C, 미아 임, 브론슨 리드 등이 재영입된 선수들이다. 또한 NXT에서도 부치, 이요 스카이, 토마소 치암파, 솔로 시코아같은 선수들을 콜업하여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중이며 거기다 이전까지 WWE 내에서 푸대접받고 있거나 성장이 정체된 케빈 오웬스, 새미 제인, 리코셰, AJ 스타일스, 도미닉 미스테리오, 오스틴 시어리 등의 선수들을 재발굴해[50]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으며 이는 현재진행형이다.
다만 2023년 현재 빈스 맥마흔은 WWE에 일단 복귀한 상태다. 명분은 WWE의 매각 때문이지만 사실상 이사 3명을 억지로 교체한 상태인 점도 있어서 현재까지는 경영에만 손을 댈 뿐 쇼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결국 임시 회장인 딸 스테파니 맥마흔이 물러나고[51] 이사회 이장직을 차지해서 WWE 팬들은 상당히 불안에 떨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사우디 국부 펀드에 WWE가 매각되었다는 뉴스가 올라오면서 팬과 WWE 직원 및 선수들을 충격에 빠뜨렸으나 다행히 오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아무튼 WWE 매각 자체는 아직 신빙성이 있는 루머이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빈스가 쇼에 개입하지는 않고 있다.[52][53][54][55]
이후 WWE는 UFC를 운영하는 그룹인 엔데버에 인수합병 되는데[56], 사실 WWE을 인수할 기업으로 엔데버가 선택된 이유가 바로 빈스 맥마흔을 경영에서 배제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곳이 엔데버 뿐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57] 그래서 팬들에게 의구심을 들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다만 빈스도 일련의 사태를 거치면서 WWE 임직원들의 저항에 힘이 부쳤는지 트리플 H의 운영 자체를 크게 방해하고 팬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벌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쇼가 시작되기 직전에 각본을 바꾸는 짓은 여전히 하고 있어서 팬들을 불안하게 하고 있다. 다만 빈스의 간섭과는 상관없이 현재도 쇼의 퀄러티 자체는 트리플 H가 운영의 중심이 된 이래로 여전히 좋은 편이다.[58]
2023년 9월 12일을 기점으로 WWE와 엔데버 두 기업이 TKO 그룹 홀딩스로 완전히 합병되었으며 지분은 구 엔데버 51%, 빈스 맥마흔 34%, 기타 15%[59]가 되었으며 이사회 의장으로 빈스 맥마흔이 취임하였다. 다만 WWE 운영은 TKO의 이사이기도 한 닉 칸과 (TKO 이사는 아닌) 폴 르벡이 여전히 담당한다. 프로레슬링 업계 및 쇼 엔터테인먼트에서의 거대 공룡의 탄생이지만 어차피 원래부터 WWE는 거대 공룡이었다보니[60] 운영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을 거라고 한다.[61][62] 또, UFC와 WWE의 크로스오버에 대해서도 별다른 계획은 없을 거라고 한다.[63]
2023년 후반부에는 엔데버와의 합병과 NFL 등과의 경쟁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기도 했지만 문제적인 인물인 CM 펑크를 영입하였고, 2024년 들어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와 50억 달러의 방송 계약을 맺기도 하는 등 활기를 어느 정도 되찾았으며, 빈스 맥마흔이 결국은 성추문으로 인해 자신이 가진 모든 주식을 팔고 TKO의 모든 직위에서 사임하면서 완전히 축출되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71년간의 맥마흔 가문의 지배 구조가 완전히 청산되었다.
현재는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전 회장직을 맡았던 스테파니 맥마흔이 레슬매니아 40에서 오랜만에 모습을 나타내 '폴 르벡 시대의 첫 번째 레슬매니아'란 표현을 사용하면서 맥마흔의 시대의 종언과 트리플 H의 시대의 시작을 선언했고, 트리플 H는 후대의 평가에 맡기겠다고 하지만 코디 로즈를 대표로 내부에선 현재의 시대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르는데다 레슬매니아 40의 마무리가 역대급 반응을 받는 등 트리플 H의 시대는 내외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시작하게 됐다.
[1]
물론 프로레슬링의 원류라고 할 만한 경기들은 이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흥행을 하는 서커스에서 보여주는 권투나 레슬링 쇼, 혹은 지역에서 거친 일을 하는 이들이 모여서 말뚝 박고 밧줄을 치고 주먹질을 하는 식의 시합이나 흥행을 하는 류 등. 이런 류의 프로레슬링 선수로 유명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전직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다. 특히 링컨은 키도 굉장히 크고 힘도 엄청난 장사라서 12년 동안 수백 번의 시합을 치르면서도 단 한 번밖에 패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피니시는 초크 슬램이었다고 한다.
[2]
실제로 링컨에게 동네 깡패들이 시비를 걸어와(원인은 링컨의 친구들이 링컨이야말로 동네 최고의 싸움꾼이라고 소문을 내서라고 한다.) 깡패 두목과 일대일로 싸우게 되었을 때 링컨은 상대방의 목을 잡고 던져서 기절시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깡패 두목과는 나중에 친구가 되었고 링컨이 정치가가 되자 후원자로 나서기도 하였다.
[3]
사실 프로레슬링은 그 태생부터가 쇼맨십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여기서 말하는 쇼맨십이란 퍼포먼스 뿐 아니라 기믹, 캐릭터 연기 등이 포함된 개념을 말한다. 사실 릭 플레어 스타일의 이른바 '화려한 외양을 갖춘 거만한 캐릭터'는 이미 1940년대 활동한
고저스 조지라는 프로레슬러가 실현하고 있었다.
[4]
일종의 단체 프랜차이즈 선수의 개념이 이때 등장한 것이다. 이 선수들은 주로 전국을 떠도는 떠돌이 레슬러들이나 파트타임 레슬러들을 상대로 이기는 경기를 펼침으로써 지역주민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했다.
[5]
WWF가 초대 챔피언으로
버디 로저스를 앉히지만 실질적으로는 브루노 삼마르티노가 초대인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오빌은 690일이나 챔피언 자리를 유지했으므로 버디 로저스같은 바지챔피언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빌 브라운은 이후 챔피언 벨트를 차지한 적이 없으므로 미묘한 위치긴 하다. 다만 애초에 오빌은 챔피언에서 물러나게 된 계기가 자동차 사고로 인한 은퇴였으므로 당연히 초대 챔피언에서 물러난 후에 별다른 커리어가 있을 수 없는 처지였다.
[6]
아시다시피 플레어는 이 시기 후로도 왕성히 활동하였고, 배클런드 또한 90년대 중반 WWF에 복귀했다.
[7]
번 가니에는 자신이 테크니션 프로레슬러라 테크니션을 각별히 총애하였다.
[8]
이 레슬매니아와 먼데이 나이트 러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바로 빈스 맥마흔의 최측근이었던 케빈 던이었다. 이 공으로 그는 빈스의 총애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9]
비공식적으론 WCW의
북한 흥행이 15만 명을 동원했지만, 관객들은 강제동원됐을 확률이 높고 반대로 관람이 자유롭지도 않아 인정되지 않았다.
[10]
이후 레슬매니아 32에서 공식 기록이 경신되었다.
[11]
이 시기 WCW는 그저 GCW의 프로그램 이름이었다.
[12]
이를 '프로레슬링의 검은 토요일'이라 부른다.
[13]
단체의 얼굴인 에이스의 위상 관리는 세심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그 에이스의 위상이 곧 단체의 위상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당장 헐크 호건, 존 시나, 스티브 오스틴 등이 쉽게 패배를 당하지 않는 이유도 단체 자체의 위상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며 한때 존 시나의 티셔츠 판매량이 펑크에게 뒤져서 펑크의 티셔츠 판매를 WWE가 막았다는 헛소문이 진지하게 퍼졌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14]
사실 미국 프로레슬링은 약과고 신일본 프로레슬링의 에이스였던 이노키는 현역 시절 동안 단 10패만 당했고 신일본 주니어 에이스였던
타이거 마스크는 그보다도 더 적어 고작 1패만 기록했을 정도였다.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도 미사와 미츠하루가 점보 츠루타나 스탠 헨슨을 꺾은 경기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하극상으로 뉴스에도 날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15]
다만 엄밀히 말하면 저 선수들도 대부분은 80년대에도 활동한 선수들이다. 단지 헐크 호건, 얼티밋 워리어, 마초맨 랜디 새비지, 안드레 더 자이언트 등 80년대를 주름잡던 선수들과는 달리 정상에 올라온 적은 없었던 선수들이었다.
[16]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기준도 다른 법이라 그런 거지 무조건 멜처의 기준이 다 맞다고는 할 수 없다.
[17]
참고로 이 생방송 쇼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바로 빈스 맥마흔의 최측근인 케빈 던이다. 던은 이외에도 레슬매니아에 대한 아이디어도 내서 사실상 빈스가 가장 총애하는 측근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8]
원래 WCW의 전신이었던 NWA는 기반을 미국 남부에 두고 있었다. 현재 AEW의 코디를 남부의 적자라고 부르는 것도 아버지인 더스티 로즈가 NWA의 맹주이자 전설적인 레슬러였기 때문이다.
[19]
반대로 미국 북부에 자리잡은 단체가 바로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WWWF(현 WWE)였다.
[20]
이전까진 항복 개념은 있었지만 탭아웃 개념은 없어서, 관절기에 걸린 선수가 링 바닥을 마구 치고 있는데 경기가 안 끝나는 요즘 기준에선 묘한 광경을 볼 수 있다.
[21]
웃기게도 이들은 모두 기믹 변경 후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22]
이쪽도 사실 처음에는 칠리 맥브라이드라는 어처구니없는 링네임을 받을 뻔했지만 오스틴 본인이 이를 거부하고 오스틴의 아내가 생각한 '스톤콜드'를 링네임으로 삼았다.
[23]
실제로 브렛은 WWF의 애티튜드 정책을 못마땅하게 봤는데 이유는 프로레슬링을 가족들이 볼 수 있는 쇼가 되는 쪽을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24]
이 8퍼센트라는 시청률은 미국 1997년 인구 기준으로 무려 2천만을 넘는 미친 시청률을 기록한것이다.
[25]
다만 실제로는 ECW 이전이든 이후든 간에 미국에서 인디 프로레슬링 단체는 무수히 많았다. 그 중에서도 ROH가 독보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거지.
[26]
하지만 ROH와 ECW는 근본 철학 자체가 정반대다. ECW는 역설적으로 프로레슬링 그 자체보다는 쇼에 올인한 형태였다면(괜히 nWo의 전신이 아니다.) ROH는 그야말로 프로레슬링 그 자체에 올인한 단체다.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인 NOAH의 이른바 왕도 프로레슬링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아서 그야말로 프로레슬링의 극한을 보여준 단체라고 할 수 있다.
[27]
호건은 TNA에서 자기가 하던 것을 그대로 하려다 실패했고, TNA의 돈을 엄청나게 빨아먹은데다가, 이름값이 높은 만큼 에고도 높아서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운 인물인데, 당시 TNA의 회장 딕시 카터는 호건을 감당할 재목이 아니었다.
[28]
사실 헐크 호건의 에고를 감당할 만한 인물은 프로레슬링 업계에서도 빈스 맥마흔밖에 없었다. 그렇다보니 헐크 호건은 WWE에서만 제대로 된 활동을 했지만 나머지 단체에서는 호건의 에고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졌던 것. 현재 업계 최고의 어그로꾼인 CM 펑크를 감당할 만한 단체가 WWE밖에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
[29]
운동선수와 뇌진탕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던 전직 프로레슬러이자 하버드 출신 크리스 노윈스키가 조사한 결과였다. 크리스 본인도 프로레슬러였다가 뇌진탕으로 인해 은퇴한 인물이었다.
[30]
특히 이때 레슬링을 보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펑크의 상품 판매량이 잠시나마
존 시나를 뛰어 넘었을 정도로 펑크의 인기는 엄청났다
[31]
yes movement의 정점은 레슬메니아 30때 경기를 2번이나 한끝에 챔피언등극으로 레슬메니아의 엔딩을 장식하여 많은 사람들이 꽃가루를 휘날리는 대니얼과 yes챈트를 외치는 것을 떠올릴 수있다
[32]
존 시나 때도 비슷하긴 했지만 이때는 에티튜드 시절의 유산과 존 시나의 개인 능력, 이외에도 존 시나만큼은 아니지만 그에 필적할 만한 선수들도 많았던 시기라 충분히 전성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로만 레인즈는 능력이 존 시나에 미치지 못했고 주변 인물들 중에서도 로만에 필적할 만한 명성을 가진 선수가 없었다. 아니, 키우지를 않았다.
[33]
사실 존 시나가 존나세니 뭐니 해도 결코 무적인 선수는 아니었다. 트리플 H나 언더테이커같은 선수와는 상대전적에서 밀리고 랜디 오턴이나 에지, CM 펑크, 대니얼 브라이언과도 서로 승패를 주고받았다. 물론 존 시나는 WWE의 얼굴이었기에 승이 패보다 훨씬 많은 건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 자체는 그렇게까지 큰 문제도 아니었다. 또한 존 시나는 WWE에서도 가장 많은 라이벌리를 가진 선수이기도 해서 그가 참여하는 각본 중에는 재밌는 것도 굉장히 많았다.
[34]
사실 진더 마할은 프로레슬러로서 실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거기다 스테로이드를 얼마나 복용한 건지 티가 날 정도였다보니 도저히 오래 갈 만한 선수가 아니었다.
[35]
기존의 크리스 제리코, 루크 하퍼, 미로, FTR 등도 있었지만 2021년이 되면서 말라카이 블랙, 브라이언 대니얼슨, 루비 소호, 애덤 콜같은 알짜배기 선수들을 WWE가 손놓고 있는 사이 데려와서 제대로 써먹고 있다.
[36]
물론 이건 그 선수들의 문제가 아니라 WWE의 오너인 빈스 맥마흔의 판단미스로 보인다. 사실 선수들이 빠져나가는 것 자체는 어차피 WWE 내부에서도 많은 유망주들을 보유하고 있어서 큰 문제는 아니지만 팬들의 바람을 무시하고 로만 레인즈나 브록 레스너같은 몇몇 레슬러만을 총애하는 독선적인 모습에는 골수팬들도 진력을 내고 있는 중이다.
[37]
거기다 2021년에 들어서는 아무리 그래도 너무 많은 선수들을 해고하고 있는 상황이라 문제가 되고 있다. 단순히 선수 해고로 쓸만한 선수들이 나가는 것 뿐 아니라 선수들의 회사에 대한 신용이 사라지고 있다는 게 진정한 문제다. 당장 계약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선수들이 대부분 AEW나 임팩트로 옮기려고 하는 게 그 증거. 특히 WWE에서 성장한 진골들이 아닌, 인디 출신들은 대부분 계약기간이 끝나면 WWE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
[38]
디 엘리트 선수들을 먼저 비난한 것도 CM 펑크이며, 이에 항의하려는 디 엘리트에게 먼저 물리적 공격을 가한 것도 CM 펑크로 알려진 상황인데, 디 엘리트 선수들은 단체에서 요직을 맡고 있으며 현재 로스터를 구성하는데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선수로서도 좋은 활약을 보이며 지금의 AEW가 존재하는 것에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사건이 발생할 때쯤 디 엘리트 소속의 영 벅스가 WWE로 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면서 CM 펑크가 이들의 WWE행을 부추기는 꼴이 된 것 아니냐며 유망한 단체를 나락으로 보내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심지어 휴가가 잡혀있던
존 목슬리가 중징계를 받은 선수들 때문에 급하게 출전해야 되는 상황이 생겨 휴가가 취소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기에 CM 펑크는 만인의 적이 되고 말았다. 사실 MJF 역시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고, 잠깐 쉬다가 복귀하는 것 말고 별다른 조치가 없어 난리가 났지만 CM 펑크에 비해 부족한 인지도나 CM 펑크의 전적 때문에 묻힌 편이다.
[39]
물론 부정적 이슈라도 화제성이 높으면 단체 성장에 활용할 수 있고, 또 이목이 집중되는 것이 프로레슬링이기에 현재의 상황을 AEW가 어떻게 대처할지에 대해 전문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일단 시청률은 화제성 덕분에 상승한 상황이지만 부정적 이슈만으론 유지하기 어렵고, WWE 역시 후술할 이유로 인해 시청률이 상승한 상황이다.
[40]
거기다 안티 WWE인 프로레슬링 팬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인기와 인지도가 높은 WWE 출신 베테랑 프로레슬러가 이런 신진 단체에 와서 갑질을 하는 것인데 그런 짓이 현재 CM 펑크에 의해 되풀이되고 있고 박힌 돌인 케니 오메가와 엘리트들을 빼내는 모습을 보기 싫어하고 있다. 거기다 아예 케니 오메가와 영 벅스는 2024년 계약이 만료되면 WWE로 이적할 거라는 말이 파다할 정도.
[41]
다만 결과적으로는 케니 오메가와 영 벅스는 AEW에 재계약을 성공하면서 잔류했고 CM 펑크는 AEW를 떠나 WWE로 넘어가게 되었다.
[42]
다만 이걸 전부 다 CM 펑크의 탓만으로 돌릴 수 없다는 의견도 대두되고 있다. 사실 애시당초 가장 큰 원인은 행맨 페이지의 시멘트 새그먼트였기 때문. 그렇다보니 펑크도 행맨 페이지를 신용할 수 없게 되었고 행맨을 두둔하는 케니 오메가나 영 벅스와도 분쟁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거기다 엘리트 선수들이 떼로 몰려가기도 했으니 펑크 입장에서는 이놈들이 나를 다구리치려고 몰려왔구나 오해했어도 이상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43]
이 인물과 존 라우리나이티스가 가장
트리플 H와 대립하던 임원들이었다.
[44]
빈스와 함께 주간 쇼를 생방송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하였고 또, 레슬매니아를 고안해 내기도 하는 등, 빈스에게 가려져 있었을 뿐 프로레슬링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45]
일반적으로는 80년대 인터뷰어이자 '브라더 러브 쇼'를 진행하던 브라더 러브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또, 언더테이커의 첫번째 매니저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언더테이커의 매니저로 본격적으로 활동했고 팬들에게도 잘 알려진 인물은 폴 베어러지만 1990년 언더테이커의 데뷔전에 함께 등장했던 첫 매니저는 이 사람이었다.
[46]
이 자리는 원래
트리플 H가 맡았고 이때 진행하던 것이 바로 NXT였으나 이후
트리플 H가 건강을 해쳐서 잠시 물러난 사이 존 라우리나이티스가 이 자리를 맡게 되었고 NXT를 싫어하던 케빈 던과 존 라우리나이티스는 NXT의 역할을 축소하고 대부분의 특급 인재들을 방출해 버렸다.
[47]
사실 엄밀히 말하면 여기서 나온 특급 인재란 주로 인디에서 활동하던 유명 프로레슬러들을 으미한다. 그런데 이런 선수들은 대체로 나이가 많고 부상을 많이 입은 경우고 또, 메이저 단체에 익숙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메인 쇼에 콜업된다고 해서 정말로 성공할 거라는 보장이 있을 지는 사실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인재들인 건 사실인데 이런 선수들을 주로 로만 레인즈나 브록 레스너의 한끼 식사로 내주고 방출하는 것을 결코 잘하는 짓은 아니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선수를 대하면 WWE에 대한 신뢰도 자체가 떨어지기 때문.
[48]
존 목슬리나 대니얼 브라이언같은 인재들이 빠져나갔고 그 중에서도 존 목슬리는 빈스의 방식에 학을 떼고 나와서 AEW로 옮기면서 이에 대해 큰 비판을 했을 정도다.
[49]
대표적으로 24/7, RAW 언더그라운드같은 것들.
[50]
오스틴 시어리같은 경우 원래부터 빈스의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너무 빠른 푸시를 주다보니 선수의 성장이 거기에 따라가지 못해 허우적대던 상황이었는데 트리플 H가 집권하고 나서는 푸시 속도를 조절하고 더 준비가 된 다음 제대로 된 푸시를 줌으로써 이전보다 더 나은 선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도미닉같은 경우도 한번은 WWE를 떠났던 그의 아버지 레이가 제대로 키우기 위해 다시 WWE로 돌아오면서 도미닉까지 데려온 거지만 빈스 밑에서는 그냥 레이의 금붕어똥 이상은 되지 못 했고 동갑내기(오스틴 시어리, 브론 브레이커) 중에서도 가장 성장이 늦다는 말을 들었는데 트리플 H 집권 이후 아버지 레이를 배신하고 새로운 스테이블인 '저지먼트 데이'에 가입시키고 싸가지없는 후레자식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에디 게레로의 뒤를 잇는 새로운 라티노 힐 스타일을 부여받게 되었고 현재는 악역으로 잘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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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현재 WWE 회장직은 공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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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아직 성추문 사건은 아직 덮어진 것도 아니고 WWE 매각 업무에 몇몇 주주들의 소송도 방어해야 하므로 개입할 여력은 없는 듯하다. 나이 문제도 있고 WWE 직원 및 선수들의 반발도 만만찮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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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빈스는 쇼 운영도 자신이 맡을 생각이었으나 WWE 내 선수 및 임직원들의 반발을 받아서 후퇴했다고 한다. 그 빈스가 고집을 꺾을 정도였다면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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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대놓고 권한을 가져가려니 반발이 심해서 뒤로 빠졌을 뿐 이후 행보들을 보면 전형적인 반대파 숙청작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으로 빈스가 만장일치로 이사회 의장이 되자마자 스테파니 맥마흔의 갑작스러운 사임이라든지 최근 트리플H와 가까이 지내던 관계자 2명이 별다른 이유없이 해고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빈스와 같이 이사회밖으로 쫓겨났던 최측근들이 회사로 잇달아 복귀하는등 겉으로는 보이지는 않지만 내부에서의 빈스세력의 권력 장악을 위한 작업과 암투가 실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회사 매각준비때문에 그렇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런거치고는 빈스와 반대쪽에 서있는 이들만 나가고 빈스 측근들은 다시 들어오는건 단순히 매각때문이라기에는 석연치 않은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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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트리플 H가 쇼를 주도하고 빈스 맥마흔이 가끔 쇼에 간섭하는 정도로 고착되었다. 팬들이나 WWE 직원들은 이런 체제를 불안하게 여기고 있지만 어쨌든 대주주고 경험이 많은 건 사실이라 간섭이 전혀 없기도 어렵기 때문. 문제는 이런 방식을 레슬매니아 39에도 밀어붙이는 바람에 결국 로만 레인즈가 코디 로즈를 꺾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코디 로즈가 승낙했다고는 하지만 빈스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러 트리플 H와 코디를 억누르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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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엔데버는 기업명을 TKO 그룹 홀딩스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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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인수희망 기업들은 전부 트리플 H가 운영할 것을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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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RAW는 세스 롤린스, 코디 로즈, 저지먼트 데이, 임페리엄 등 실력있는 선수들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평판이 좋은 편이고 스맥다운도 블러드라인의 스토리가 한참 절정에 달하고 있어서 나름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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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WWE 이사들에게 나눠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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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의 웬만한 PPV급 대회가 WWE의 주력 TV쇼인 RAW의 관객수보다 적으며 AEW 메인 쇼인 다이너마이트의 관객과 시청자 수는 RAW의 1/3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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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모기업인 TKO의 간섭 없이 현재 팬들에게 큰 지지를 받고 있는 닉 칸-폴 르벡 체제를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특히
폴 르벡 및 그 휘하 크리에이티브 팀은 사실상 프로레슬링 업계에서 대체할 자원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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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주 없지만은 않다. 레슬매니아 40 성공의 일등공신이 폴 '트리플 H' 르벡이긴 하지만 또다른 일등공신인 TKO 이사 드웨인 '더 락' 존슨 역시 경영 능력도 뛰어난 인물이기 때문. 물론 드웨인 존슨은 현직 영화배우이기도 하므로 항상 WWE에 붙어있을 수는 없지만 앞으로 계속 WWE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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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나 화이트의 발언이다. 다만 TKO에서는 은근히 노리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