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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6:41:25

폭소문제

파일:폭소문제.jpg
폭소문제
爆笑問題
출신지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멤버 다나카 유지, 오오타 히카리[1]
결성년도 1988년
활동시기 1988년 ~ 1990년, 1994년 ~
동기 사마~즈, 에가시라 2:50
사무소 오오타 프로덕션 (1988 ~ 1990) → 타이탄 (1993 ~)

1. 개요2. 역사
2.1. 결성과 첫번째 전성기2.2.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독립 및 암흑기2.3. 타이탄 프로덕션 설립과 제 2의 전성기
3. 개그 스타일4. 콤비 관계5. 게닌 빅 3와의 관계6. 다운타운과의 관계

1. 개요

1988년 결성된 오와라이 콤비로 오오타 히카리(보케, 네타 작성. 1965년 5월 13일 ~ ), 다나카 유지(츳코미, 리더. 1965년 1월 10일 ~ )로 이루어져 있다.

일본의 모든 방송국에서 메인 MC를 담당하는 프로그램을 런칭한 경력이 있는 유명 게닌이다. 또한, 정상급 게닌이 되면 자신들이 진행하는 칸무리 방송에만 출연하는 경향이 많지만 폭소문제는 바쁜 와중에도 다른 예능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게스트 출연을 하고 있다.

2. 역사

2.1. 결성과 첫번째 전성기

오오타 히카리, 다나카 유지 두 사람은 1983년 말, 니혼 대학 예술학부 연극학과 시험장에서 처음 만났다. 시험장에서 다나카는 시험관을 웃기고 있는 오오타를 본 후 "만약 합격해도 저 애랑은 어울리면 안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오오타는 야구 유니폼을 입은 채 시험을 치루는[2] 다나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학에 합격하여 84학번 신입생이 되었고 화장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 때 다나카가 오오타에게 "너도 합격했구나!"하고 놀라자 오오타는 시험장에서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점잖게 답변을 했다고 한다. 이후 둘은 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두 사람 모두 대학 생활에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아서 학점이 매우 낮았고 대신 <미친 개들>이라는 개그 서클 활동에 집중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프로 게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1988년 3월,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개그 콤비 폭소문제를 결성한다. 콤비 이름은 당시 프로그램 편성표에 자주 쓰이던 '폭소'라는 문구와 책에 쓰인 "문제"라는 문구를 합쳐서 오오타 히카리가 지었다고 한다. 원래는 Crow라는 이름으로 데뷔하려 했다고 한다.

폭소문제는 인기 게닌 와타나베 마사유키가 개최한 라 마마 신인 콩트 대회로 처음 데뷔했고 그 자리에서 오오타 프로덕션에 스카웃되었다. 그 결과 폭소문제는 1988년 7월 12일 방송된 후지 테레비의 심야 프로그램 『 웃음의 전당』에서 처음 TV에 데뷔했다. 이후 폭소문제는 출연하는 TV 프로그램을 순조롭게 늘리면서 오와라이계의 새로운 기대주로 성장한다. 다만, 일각에서는 폭소문재의 개그가 너무 과격하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 오오타는 "당시 나는 너무 어려서 자신의 개그로 경직된 방송계 문화를 바꿀 것이라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2.2.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독립 및 암흑기

그렇게 상승세를 타고 있는 폭소문제는 1990년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독립을 선언하며 소속사를 나온다. 두 사람이 훗날 밝힌 바에 의하면 폭소문제를 오오타 프로덕션에 스카웃한 직원이 소속사에서 독립하라고 두 사람을 꼬드겼고 때 마침 오오타 히카리가 같은 소속사 모델 출신의 게닌 마츠나가 미츠요와 결혼했던데다가 소속사로부터 개그 스타일을 더 순하게 바꾸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기에 독립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독립은 오오타 프로덕션 측과 상의 없이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그만둔 형세가 되어 오오타 프로덕션의 노여움을 샀고 그 결과 폭소문제는 TV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3]

오오타는 당시에 대해 "우리의 상황은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우리들의 개그가 재미만 있다면 직장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기간 동안 다나카는 주로 미니스톱 편의점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했으며 오오타는 아내 미츠요를 돕거나 파칭코 파치슬롯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했다. 다나카는 부모님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일도 너무 잘해서 같이 일하던 파트 타임 근로자조차도 "왜 당신은 정식 직원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을 정도였던 반면 계산대의 아르바이트를 하던 오오타는 암산이 매우 서툴렀고 손님으로부터 불평을 듣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거스름 돈을 많이 주다가 결국 아르바이트에서 잘리고 집에 틀여박혀 패미컴 게임을 하며 소일했다.

2.3. 타이탄 프로덕션 설립과 제 2의 전성기

그렇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각종 행사를 뛰며 먹고 살던 폭소문제는 1993년 10월, NHK 신인 연예 대상에 출전하여 대상을 받으면서 재기했고 이를 계기로 오오타의 아내 미츠요가 1993년 11월, 자신을 대표로 하는 타이탄 프로덕션을 설립했다.[4]

1994년, 폭소문제는 <GAHA 킹 폭소왕 결정전>에서 80년대 만담붐을 이끌었던 콤비 B&B의 멤버 시마다 요시치(島田洋七)의 극찬을 받으며 10주 연속 우승하여 첫 챔피언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개그계에 복귀했다. 이후 1997년 < 타모리의 SUPER 어휘 천국>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브레이크하여 제 2의 전성기를 맞았고 2024년 현재까지 별다른 부침없이 쭉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1999년에는 테레비 아사히의 심야 예능 프로그램인 폭소문제의 보스캐릭터 왕(爆笑問題のボスキャラ王)에서 MC를 맡았는데 이 방송에서 네코지루우동을 바탕으로 한 네코지루 극장이 방송됐다. 여러모로 네코지루 시리즈의 팬에게는 꼭 시청하기를 추천하고 싶은 애니메이션이다. 그나마 네코지루소우보다는 가볍게 볼 수 있다.

2000년 9월 11일, 다나카는 고환암에 걸려 고환 중 하나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게닌이 웃기지 않으면 안된다고 두 사람이 상의한 결과, 오오타는 기자회견에서 다나카에 대한 일련의 개그를 하며 사람들을 웃겼다.

2009년 10월 2일 다나카 유지가 부인과 이혼했음을 발표했다. 이혼 발표 후 1달도 채 안된 10월에 다나카의 전 부인이 아이를 출산했는대 그 아이의 아버지가 다나카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었다. 그러나 일본법률상 이혼 후 300일 이내에 태어난 아기는 전남편 아이로 인정되기 때문에 다나카가 법률상 친부가 된다고 한다. 아이의 친부가 누군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다나카는 "아내의 외도가 이혼의 원인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2015년 다나카가 탤런트 야마구치 모에와 재혼한다는 것을 발표했다.

2018년 8월, 주식회사 신쵸샤에서 발행하는 주간지 주간 신쵸가 「오오타 히카리는 니혼 대학 예술학부 연극학과에 부정 입학했다.」 라는 내용을 보도하여 일본 대중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다. # 이에 폭소문제의 소속사 타이탄 프로덕션이 해당 내용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신쵸사에 대해, 명예훼손에 근거하는 손해배상 청구와 해당 기사의 삭제를 요구했다. 2022년 1월 7일에 상고 기한이 경과하여, 1심 판결의 내용인, 신쵸샤가 원고 측에 440만엔(별도 지연 손해금)의 지불을 명하는 취지의 판결이 확정되었다.

2022년 1월 다나카 유지가 뇌경색으로 입원했다가 # 무사히 치료를 마치고 퇴원했다. #

3. 개그 스타일

4. 콤비 관계

5. 게닌 빅 3와의 관계

타모리는 폭소문제가 아직 무명이었던 시절에도 함께 방송을 했고 『 타모리 클럽』, 『 타모리의 SUPER 어휘 천국 』에 출연하여 폭소문제가 일본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타모리를 존경한다고 한다. 폭소문제의 라디오 방송 『 폭소문제 카우보이』 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 타모리 클럽 』을 꼽기도 했다.

『 다케시, 산마의 유명인이 모이는 가게』(후지 테레비 계열) 출연 때 두 사람은 타모리와 같은 BIG 3인 비트 다케시와 아카시야 산마와의 토크에서 타모리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오오타는 『 A-Studio』(TBS계) 출연했을 때 "평소에는 얌전한 타모리 선배님이 우리들의 개그를 보고 웃으면 기분이 좋다."라는 발언도 한적이 있다.

1997년 부터 폭소문제가 본격적으로 브레이크 하게 되자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후지 테레비 계열)의 출연도 많아졌고 결국 2000년 4월부터 수요일 레귤러로 활동하게 됐다. 이후 폭소문제는 수요일 레귤러진의 리더,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의 최고참 레귤러로 기록을 갱신 중이었으나 2012년 4월 제작진의 변동으로 다나카가 월요일로 이동해서 정규 13년 만에 처음으로 콤비가 아닌 개인으로서 출연했다.
오오타 히카리는 비트 다케시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게닌으로 유명하다. "다케시 선배가 TV에 나올 때부터 마음속에 있는 말을 꺼내는 것이 얼마나 재미 있는지를 깨달았다"고 『 다케시의 일본 교육 백서』(후지 테레비)에서 말했다. 비트 다케시는 폭소문제 결성 당시 때 우연히 그들의 개그를 본 적이 있었고 "이놈들은 재미있는 콤비다. 네타의 단면이 투비트와 비슷했다"고 평가했다. 폭소문제가 『 다케시의 누구나 피카소』에서 다케시의 앞에서 직접 만자이를 펼쳤을 때에는 "좋아. 나와 감각이 비슷하다"라고 평했다. 오오타가 "코미디 영화를 찍고 싶다"고 다케시에게 상담했을 때 다케시는 "돈을 아낌없이 써서 제대로 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야 흥행에 성공한다."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2016년 2월 12일 개최한 타이탄 주최의 라이브 "TITAN LIVE 20YEARS anniversary"에서 다케시가 출연, 만담 "인정 사정"을 선보였다. 이 라이브에는 오오타의 권유로 쿠와타 케이스케, 하라 유우코 부부도 객석에서 관람했고, 종연 후 쿠와타는 "정말 멋졌어요. 다케시 씨가 나온 때에는 거룩하고. 베개에 눈물을 글썽였어요 " 같은 메일을 오오타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케시의 제자인 아사쿠사 키드와 사이가 나쁘고 특히 오오타와 스이도바시 하카세는 견원지간이라고 여겨진다. 하기와라 마사히토가 간 경화로 입원하고 있었을 때 병원에서 폭소문제와 아사쿠사 키드가(이 시기, 폭소문제와 아사쿠사 키드는 하기와라의 입원 생활을 서포트하고 있었다.) 서로를 견제하고, 하기와라가 자고 있는 병실에서 오오타와 스이도바시 하카세가 드잡이 싸움을 시작해서 병을 앓고 있는 하기와라가 개그를 쳐서 분위기를 겨우 수습한 적도 있었다. 그 뒤 하기와라의 아내가 두 사람을 불러서 같이 술 마시러 가자고하며 화해시켰다.

다만 『 Quick Japan』 76호에 수록된 요시다 고우에 의한 "폭소문제 롱 인터뷰"에 따르면 "뒤의 '싸움'은 개그 소재로 쓰인것이고 실제로는 불화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오오타가 밝히길 두 사람은 서로의 저서를 교환해서 라디오에서 평가하는 사이며, 스이도바시 하카세는 오오타에게 편지로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아카시야 산마는 폭소문제가 오오타 프로덕션 소속이었던 시절부터 두 사람을 높이 평가했으며, 처음으로 공동 출연한 1990년경의 『 첫 참배! 폭소 히트 퍼레이드』에서는 폭소문제를 칭찬하면서, "앞으로는 폭소문제의 시대"라고 확신했다고 한다.[8] 한편 두 사람도 학창 시절부터 『 산마의 올 나잇 닛폰 』의 팬이었다고 밝혔으며 "『 비트 다케시의 올 나잇 닛폰』과 함께 목요일의 낙이었다"고 말했다.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에 산마가 금요일 레귤러로 출연했을 무렵에는 신인이었던 폭소문제가 여러 차례 산마와 같이 출연한 바 있다.

2014년 1월 12일 『 폭소 문제의 일요일 선데이』의 300회 기념 게스트로서 산마가 출연하여 폭소문제와 14년 만에 같이 협연했다. 이후 산마는 폭소문제의 라디오 방송 『 폭소문제 카우보이』에 종종 게스트로 출연하고 있다. 좀처럼 남의 프로그램의 게스트 출연을 하지 않는 산마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산마가 폭소문제와 협연하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다나카의 작은 키"를 소재로 하거나 두 사람이 독립 후 고생했던 시절을 얘기한다.[9] 특히 독립 후 고생한 이야기에 관해서는 당시의 산마도 꽤 걱정했던 듯하며 폭소문제가 다시 팔리기 시작한 1998년경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에 출연시키고 『 다케시, 산마의 유명인이 모이는 가게 』에서는 오와라이 콤비로는 유일하게 폭소문제를 게스트로서 출연시키는 등 폭소문제가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사적으로도, 오오타는 산마를 가끔 "너"라고 부르기도 하고 오오타가 산마의 분장실을 찾아 코다이의 "나쁜 술 버릇"을 투덜대는 관계일 정도로 친하다. 방송에서는 산마가 그 일을 꼬집고 있다.

6. 다운타운과의 관계

오와라이계의 대표적 앙숙 관계였다.[10]

90년대 중반부터 오오타 히카리와 마츠모토 히토시간의 불화설이 거론되었는데 자신의 패션을 지적하는 오오타의 글[11]을 읽은 마츠모토가 무척 화를 내며 후배를 시켜 오오타를 끌고와서 "게닌 때려치든가, 의자로 쳐 맞든가, 둘 중에 하나를 골라라"하고 윽박질러서 오오타가 마츠모토에게 무릎 꿇고 사과했다는 루머가 유명하다. 실제로 2014년까지 두 콤비가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도 없었던데다가 서로에 대한 에피소드 등도 일절 말하지 않았기에 이러한 불화설이 사실로 여겨졌다.

2014년 3월 31일에 방송된 『 모리타 카즈요시 아워! 웃어도 좋다고! 그랜드 피날레 감사의 초특대호』에서 폭소문제는 다운타운, 톤네루즈, 웃쨩난쨩괴 함께 공연을 하여 화제가 되었다. 원래는 각자 15분씩 맡아서 따로따로 촬영하고 서로 만나지는 않을 예정이었는데 타모리와 산마 세대에서 자주 하던 난입 개그를 해 보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다운타운과 웃쨩난쨩이 난입[12]하고, 이 때 마츠모토 히토시가 "이 방송 보면 SNS가 난리난다"라는 말을 하자 톤네루즈가 "그래? 기왕에 그렇게 될 거면 우리도 가자"라고 해서 폭소문제에게 말하고 바로 난입[13]을 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다운타운(특히 마츠모토)과 폭소문제(중에서도 오오타)는 루머대로 진짜로 사이가 험악했던 관계였던지라 바깥에서 보고있던 다른 후배 게닌들도 모두 "진짜로 나왔어!"라며 전부 놀랐다고 한다. 실제로 톤네루즈가 "어이 폭소문제 너희들도 함께 나가자"라고 권하자 오오타가 엄청 당황했었다고. 결국 톤네루즈가 먼저 나가서 분위기를 잡아주자 폭소문제는 나중에야 나왔고, "니들은 왜 나왔냐?"며 눈치를 주는 다운타운에게 폭소문제는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라고 답했다. 그렇지만 방송이 끝난 후 뒷풀이 장소에서 마츠모토가 "(우리에게 맞춰줘서) 고맙다"라고 오오타의 어깨를 두드려줬고 오오타도 이를 계기로 선배와 화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2016년 11월 10일, 오오타의 아내 미츠요와 다나카의 아내 모에가 '다운타운 DX'에 게스트로 출연해 다운타운과 함께 대화를 나눴다.

2021년 8월 28일, 폭소문제는 다운타운이 진행하는 『 FNS러프&음악, 노래와 웃음의 제전,』에서 만담을 선보였고 그 후 토크 파트에서 약 7년 5개월 만에 마츠모토와 같이 대화를 나눴다.

2022년 1월 30일 다운타운의 가키노츠카이야아라헨데에서는 마츠모토가 폭소문제와의 불화설을 토크 주제로 다루면서 오오타와 이미 오래전에 화해했음을 밝혔다. 그 해 9월 10일에는 폭소문제가 전년처럼 마츠모토, 나카이 마사히로, 나인티 나인이 메인 진행자인 『 FNS러프&뮤직 2022~노래와 웃음의 제전,』에 출연하고 만담을 펼쳤다. 토크 파트에서는 마츠모토가 오오타에게 " M-1 그랑프리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 어때?"라고 제의하기도 했다.

2024년 1월 8일, 마츠모토 히토시가 주간문춘이 자신을 성폭행범이라 보도한 기사를 내보낸 것에 대해 소송을 걸면서 주간문춘과의 재판에 주력한다는 이유로 연예활동중지를 선언하자 오오타 히카리는 "마츠모토 선배가 이런 방식으로 은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1] 각각 사진 좌측, 우측 [2] 시험에 불합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서 시험 전날 친구들과 야구를 하고 그 유니폼을 그대로 입고 시험을 치뤘다고 한다. [3] 일본의 연예계는 대한민국의 연예계와는 달리 소속사 중심의 문화가 강해서 연예인이 갑자기 소속사를 옮기는 것을 일종의 배신 행위로 취급한다. [4] 미츠요에 의하면 언젠가는 폭소문제가 오오타 프로덕션에 사과한 뒤 복귀 할 것이라고 생각, 자신은 오오타 프로덕션에 남아있었고 실제로 몇 년 뒤 오오타 프로덕션도 복귀를 인정했지만 오오타 히카리가 "(사무소를) 한번 배신한 사람이었기에 사무소에서 신용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복귀를 거부했다. 그래서 미츠요는 타이탄을 설립하는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5] 이런 콤비가 생각보다 매우 흔하다. 일본방송을 보면 자주 나오지만 대부분이 네타를 짜는 쪽과 안 짜는 쪽으로 나눠져있다. [6] 본래 일본에서는 '파트너와 사이가 좋으면 못 웃긴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개그맨들이 방송에서 사이 나쁜 모습을 보여주거나 서로를 험담하는 개그가 상당히 많다. [7] 일반적으로는 친한 사람이 아니면 뒤끝이 찝찝해 불만이 있어도 편하게 말을 못 한다. 특히 혼네와 다테마에가 나뉘어진 일본인의 특성상 더더욱. 그래서 여기서의 맘 놓고 싸워도 될 정도라는 표현은 서로 싸워도 나중에 훌훌털고 화해하고 쿨하게 넘길 정도로 뒤끝이 안남는 친한 사이를 뜻한다. [8] 『 산마의 그대로』에서. [9] 아카시야 산마는 폭소문제가 오오타 프로덕션에서 독립 후 한동안 방송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것도 개그 소재로 삼은 몇 안 되는 게닌이다. [10] 세간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는 절대 함께 공연하지 않을 사이라고 하던 톤네루즈 다운타운은 의외로 사적으로 친하진 않아도 공연 NG를 외칠정도로 소원한 관계가 아니었다고 한다. 단지 분위기상 업계에서 이들의 합동 공연을 막았을 뿐이라고. 실제로 다운타운과 톤네루즈는 방송에 함께 나온적이 몇 번 있다. [11] 1994년, 막 인기를 얻기 시작하던 오오타 히카리가 남성용 정보지 『 핫도그 프레스』( 고단샤)에서 연재하던 『"폭소 문제"의 양식 파괴 선언!?』에서 아디다스 저지를 입은 마츠모토 히토시를 보고 '아디다스 광고탑' 같다며 마츠모토의 패션 감각을 조롱한 적이 있었다. [12] 원래는 제작진 쪽에서 추진했는데 산마가 "타모리씨 방송인데 내맘대로 할 수는 없지"라며 거절했었다고 하는데 다운타운과 운난이 눈치채고 쳐들어간 거라고 [13] 원래 다운타운, 웃쨩난쨩 차례인 30분을 채운 후에 나올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