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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20:54:45

포템킨 반란

러시아어: Восстание на броненосце 《Потёмкин》
영어: The uprising on the battleship "Potemkin"
한국어: 포툠킨(포템킨)함 반란

1. 개요2. 당시 상황3. 진행4. 최후5. 의의6. 이후의 행적7. 번외: 열악한 함상 생활

1. 개요

1905년 6월 27일[1]에 일어난 반란 사건. 러시아 제국 해군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포템킨(포툠킨, Потёмкин)[2]에서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난 계기가 수병들의 불합리한 처우이며 식량 문제로 반란이 촉발되었다는 점에서 임오군란과 비슷하다.

2. 당시 상황

당시 러시아 제국은 오랜 기간 누적된 갖은 국가 내부의 모순으로 사회적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폭발 직전까지 몰렸다. 더구나 1904년부터 시작된 러일전쟁의 전황이 점점 불리해지며 국민들의 불만은 커져만 갔고 여기에 차르의 궁전 앞에서 평화적인 시위를 벌이던 노동자 행렬이 무차별 사격당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벌어지면서 민심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포템킨이 소속된 러시아 제국 해군 수병들에게 비인간적인 생활을 강요하면서 기본적인 권리조차 보장하지 않는 열악한 함상 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템킨의 수병들 사이에서 쓰시마 해전에서 발트 함대가 괴멸당하자 다음에는 자신들이 소속된 흑해 함대의 차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까지 폭증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6월 27일 훈련을 위해 출항한 포템킨에서 식사당번들은 수병들의 식사 재료가 될 쇠고기들을 건조대에서 내리다가 고기가 썩어 구더기가 득시글대는 모습을 발견했다. 이들의 외침을 듣고 수병들이 달려와 고기의 꼴을 보고는 고기들을 폐기하고 새 고기를 달라고 원성을 높였다. 문제의 고기들은 포템킨 함의 함장 예브게니 골리코프 대령의 지시로 출항 전날인 26일에 포템킨과 함께 있었던 소형 어뢰정 이즈마일의 정장 클로트 폰 유르겐스부르크 대위가 항구의 푸줏간에서 구매한 것이었다.

수병들이 소란을 피우자 군의장(함내 최선임 군의관) 스미르노프 군의 대위가 부식 검수를 하고자 나왔다. 그는 고기들의 질이 좋고 식초 소독하여 먹으면 별 탈 없다며 배식토록 했다. 하지만 수병들은 분노하여 이 고기로 끓인 보르시를 먹는 걸 거부했고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호밀빵만으로 식사를 했다.[3] 조리 이반 다닐룩에게 이 사태를 보고받은 부장 이폴리트 길리아롭스키 중령은 직접 취사장과 수병들의 점심식사 장소인 갑판[4]에 가서 과 물만 먹는 수병들에게 '보르시를 먹지 않으면 항명행위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으나 되려 수병들에게 "썩은 고기 너나 실컷 쳐먹어라."는 야유만 받았다. 그는 함장 골리코프 대령에게 수병들이 항명한다고 보고했다.

보고를 받고 함장 골리코프 대령은 승조원들을 후갑판에 집결시킨 뒤 정 못 믿겠으면 시료를 채취해 육상에 보내 검수시키겠다고 말함으로써 수병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그러나 부장 길리아롭스키 중령은 함장의 관대함이 승조원들을 버릇없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는 평소에도 수병들에게 가혹행위를 일삼으면서 인간 대우를 해 주지 않아 증오를 한 몸에 받던 참이었다. 수병들이 어느 정도 진정되어 함장이 자리를 떠난 뒤 해산하려고 하자 갈리아롭스키 중령은 병력들을 재집결시키고 본보기로 수병 몇 명을 총살시키려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해군에서 수병을 사형에 처하기 위해서는 함장의 명이 필요했으므로 정말 총살형을 집행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단순히 수병들에게 겁을 줘서 군기를 잡으려고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당연히 당시 러시아군에서도 일개 영관급 장교가 말단 사병을 살해하면 범죄로 처벌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장의 의도와 달리 정작 이를 본 수병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뒤이어 일어난 폭력행위는 곧 함선 전체를 반란으로 몰아넣었다. 처음엔 단 7명이 소동을 일으켰으나 여러 불만이 누적된 다른 수병들이 계속 합류하면서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이들을 통제해야 할 하사관들은 기세에 눌려 이를 방기했다.[5]

3. 진행

주모자인 7명 중 하나인 그리고리 바쿨린추크 수병이 소총으로 부장 길리아롭스키 중령을 쐈으나 빗나갔으며 부장이 권총으로 반격하여 바쿨린추크가 총알에 맞아 쓰러지자 다른 주모자인 아파나시 마튜셴코 어뢰 수병장이 소총으로 부장의 머리를 맞춰 즉사시켰다. 즉사한 부장 길리아롭스키 중령 근처에 있던 리벤초프 사관후보생도 마튜셴코의 총에 맞아 즉사했으며 총 소리를 듣고 나온 포술장 네우파코예프 대위, 통신관 막시밀리아노프 대위도 차례로 사살당했다. 장교들이 차례로 사살당하자 쳐다보기만 하던 다른 수병들도 덩달아 병기고로 들어가 총을 꺼내 왔다. 머지않아 전함에 있었던 700명에 가까운 수병 모두가 반란에 가담하면서 장교들에게 지옥이 열렸다. 이 난리통 와중에 바흐틴 후보생은 수병 2명을 사살했으나 수병들의 분노가 담긴 약 20여발의 총알을 온 몸에 얻어맞으면서 호되게 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피투성이인 채로 물로 뛰어들어 함께 훈련 중이던 어뢰정 이즈마일로 헤엄쳐가 반란 사실을 알리고 그곳에서 숨을 거뒀다.

곧이어 기관장 나자로프 중령, 보급관 마카로프 대위가 부상을 입은 채로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서 N267호정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항해장 그리고리예프 대위는 헤엄쳐서 달아나던 도중 어느 수병이 쏜 총에 머리를 맞아 즉사했다. 수병들과 장교들의 총격전이 마구 벌어졌을 때 뒤늦게 어뢰실에서 나온 어뢰관 빌헬름 트라실로프 톤 대위가 권총을 들고 반란을 당장 멈추라고 일갈했다. 톤 대위는 평민 출신으로서 수병들을 아껴준 드문 장교였기에 수병들은 멈칫했지만 이내 주모자 마튜셴코 수병장이 소총을 들었고 톤 대위와 마튜셴코 수병장은 거의 동시에 서로를 사격하여 마튜셴코 수병장은 가벼운 부상을 입었고 톤 대위는 사망하였다.

주요 장교들이 죽거나 도망가던 와중에 수병들은 2명의 장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바로 함장인 예브게니 골리코프 대령과 식초 운운으로 수병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군의장 스미르노프 대위였다. 도망가지 못한 몇몇 장교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했기 때문에 군의관인 갈렌코 중위와 함장 전속부관인 알렉세예프 대위를 찾아낸 마튜셴코는 함장과 군의장이 어디 있는지를 캐물었고 이들은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을 말해 주었다. 수병들은 배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하였고 얼마 안 가 총성과 함께 함장과 군의장이 피투성이로 끌려 나왔다. 먼저 군의장 스미르노프 대위는 자기가 했던 '저 고기는 좋은 고기이며, 식초로 소독하여 먹으면 별 탈 없다'는 헛소리를 그대로 되돌려받아 썩은 고기가 억지로 입에 처박힌 채 수병들의 욕설과 구타를 당하다 얼마 안 가 사살당해 바다에 버려졌다. 함장은 다른 장교들보다는 관대하게 수병들을 대해 왔기 때문에 함장의 처분을 두고 논란이 일었으나 얼마 전에 드미트리 시로프 수병에게 사소한 잘못을 두고 이등수병으로 강등이라는 엄벌을 가한 것이 문제시되었다. 결국 골리코프 대령은 시로프의 손에 사살당했다. 대령의 시신도 역시 바다에 버려졌으나 어뢰정 이즈마일에 인양되었다.

이제 포템킨에 남은 장교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딱 2가지, 죽거나, 협력하거나 뿐이었다. 평민 출신으로 수병들과 사이가 좋던 안톤 코발렌코 기관대위[6]와 칼룬니[7] 후보생은 수병들이 총을 겨누었으나 마튜셴코 수병장은 코발렌코 대위가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의를 표했던 걸 기억하여 그들을 죽이지 말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코발렌코 대위와 칼룬니 후보생은 계급장 역할을 하던 견장을 떼어 버림으로써 반란에 동참하였고 함장 전속부관 알렉세예프 대위도 같이 동참했다. 군의관 갈렌코 군의중위는 반란에 동참하지는 않았으나 도망치지도, 항복하지도 않고 부상당한 장병들을 치료했고 수병들로서도 의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갈렌코 중위를 내버려뒀다. 그러나 제일 처음 총에 맞아 중태에 빠진 바쿨린추크 수병은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다만 사망 직전 의식을 겨우 되찾아 마튜셴코 수병장에게 "배는 어찌되었나?"라는 질문을 던졌고 성공했다는 대답에 미소지으며 "잘했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그 외에 군종관[8] 파르멘 신부 역시 수병들에게 약간의 구타를 당하긴 했으나 살해당하지 않고 사자에 대한 종교 의식 등을 집전해 주었다.

한편 포템킨에서 겨우 도망쳐 온 장교들을 통해 반란 사실을 감지한 어뢰정 이즈마일의 정장 유르겐스부르크 대위는 당황했다. 어뢰를 발사할까도 생각해 봤으나 아무리 그래도 최신예 전함을 함부로 공격하는 건 무리라고 여겨 뱃머리를 돌려 현장을 빠져나가려 들었다. 하지만 포템킨을 장악한 마튜셴코 수병장의 지시로 포템킨에서 속사포를 겨눠 발포했다. 당연히 체급에서부터 절대 포템킨의 상대가 되지 않는 이즈마일은 혼비백산했으며 여기의 수병들도 이대로 죽느니 같이 뜻을 따르자는 것을 본 정장은 백기를 들어 항복했다. 그리고 어뢰정의 장교들도 묶여 감금되면서 포템킨과 이즈마일은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의 손에 들어갔다. 일단 이 시점에서 반란의 첫 페이지는 성공적이었다. 다만 항해나 전투를 위한 전문 기술들은 장교와 하사관 없이 수병들만으로는 구사하기 힘들어 반란에 협조한 장교, 하사관들을 위주로 제한적인 지휘권을 보장했고 당직 등도 평시처럼 돌아갔다.

반란 수병들이 완벽하게 장악한 포템킨과 이즈마일은 노동자 계층의 상징인 붉은 깃발을 걸고 반란을 일으킨 그날 밤 10시에 흑해 연안의 러시아 최대 항구 도시인 오데사에 도착했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정부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대대적인 파업과 시위가 벌어지던 중이었는데 오데사도 그러한 곳 중 하나였다. 반란 수병들은 시위하던 시위대에 합류해 오데사 장악을 시도할까도 고려했지만 흑해 함대에 소속된 다른 배들이 자신들과 같은 편에 합류할 때까지 일단 항구에서 대기하기로 결정했다. 대신 시위대의 주관으로 반란을 주도했다가 사망한 바쿨린추크 수병의 장례식이 오데사에서 거행되었다. 그러다가 6월 29일 오후 시위대가 대거 참가한 바쿨린추크 수병의 장례식이 대규모 폭동으로 번지자 시위를 진압하던 육군이 장례식에 가담한 수병들을 체포하려고 시도했는데 보복으로 포템킨은 고위급 장교들의 대책 회의가 열릴 예정이던 오데사 시내의 극장에 함포 2발을 발사했다.[9]

한편 세바스토폴의 흑해 함대에서는 포템킨의 반란 소식을 듣자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전함 5척을 오데사로 급파했다. 6월 30일 아침 트리 스뱌티텔랴(Три Святителя), 드볘나드차티 아포스톨로프(Двенадцать апостолов),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Георгий Победоносец), 로스티슬라프(Ростислав), 시노프(Синоп)의 전함 5척이 오데사에 도착했고 포템킨은 자신들의 편에 합류할 것을 권유하기 위해 5척과 접선을 시도했으나 아직 충성파 장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던 5척 모두에게 거부당했다. 함대의 지휘를 맡은 사령관 대리 알렉산드르 크리에게르 중장은 포템킨을 공격할 것을 명령했으나 심적으로는 포템킨에게 동조하던 수병들이 포템킨을 포격할 것을 거부했다. 함대의 분위기가 좋지 않자 크리에게르 중장은 일단 물러나라고 명령했으나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 함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하고 아예 포템킨 측에 합류해 버렸다. 애당초 출발할 때 반란이 우려된다고 하여 함내 분위기가 안 좋은 전함 1척은 두고 갔음에도 상황은 이렇게 흘러갔다.

4. 최후

그러나 반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수병들과 분위기에 휩쓸려 따르기는 했으나 반란 자체에는 미온적이었던 수병들 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었는데 전함 게오르기 파베다노세츠는 포템킨 쪽에 가담한 지 하루만인 7월 1일 아침 충성파 수병들이 배를 다시 장악해 오데사로 뱃머리를 돌렸고 그 길로 바로 정부에 항복했다. 상황이 여의치 않자 포템킨과 이즈마일은 오데사를 떠나 루마니아의 콘스탄차로 향했다.

콘스탄차에 도착한 포템킨과 이즈마일은 루마니아 측에게 물자 보급을 요청했으나 루마니아 측에서 이를 거부했다. 결국 포템킨과 이즈마일은 콘스탄차를 떠나 크림 반도 페오도시야로 뱃머리를 돌려야 했고 7월 5일 페오도시야에 도착했다. 하지만 보급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페오도시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음식 이외의 다른 물자는 보급해 주는 것을 거부했다. 이에 포템킨에서는 다음 날인 7월 6일 아침 수병 30명을 보내 항구에 정박 중이던 석탄 운반용 바지선을 나포해 석탄을 확보하려고 시도했으나 오히려 러시아 육군의 기습을 받아 30명 중 22명을 잃는 피해를 입었다. 그 와중에 맨 처음 반란을 일으킨 7명 중 하나인 표도르 미키시킨 수병은 즉사, 또 다른 7명 중 하나인 일리야 카디로프 수병은 부상을 당해 붙잡히는 등 반란 수병을 이끄는 지도부의 피해도 컸다. 결국 페오도시야에서도 물자 보급에 실패한 포템킨과 이즈마일은 다시 콘스탄차로 배를 돌렸다.

그날 오후 포템킨과 같이 따라다니던 어뢰정 이즈마일의 두 기관장교 알렉세예프 대위와 칼룬니 후보생은 몇몇 수병들을 설득하여 반란을 일으킨 수병들에 맞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 어뢰정의 수병들은 일단 겁을 먹고 반란에 가담하긴 했으나 전함이나 순양함 등 큰 함정들과 달리 구축함이나 어뢰정 등 작은 함정에선 장교나 사병이나 모두 열악한 환경에서 함께 근무하여 신분 간 갈등이 적었고 보다 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편이었기 때문에 장교들을 포템킨 함으로 넘기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등 가담 정도가 소극적이었다. 포템킨 수병들의 기세에 억눌려 어쩔 수 없이 반란에 가담했으나 자기들 편에 합류할 거라고 기대한 다른 배들은 반란을 포기했고 보급은 보급대로 받지 못하던 와중에 수병들 사이에 갈등은 악화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으니 이대로 가면 끝장이라고 판단하고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들은 이즈마일을 장악하여 세바스토폴로 회항해 정부에 항복하려고 시도했으나 반란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이즈마일은 포템킨에 이끌려 다시 콘스탄차로 돌아왔다.

7월 7일 밤 11시 콘스탄차로 돌아온 포템킨과 이즈마일에게 루마니아 측에서 "무장을 해제하고 함선을 인도하면 수병들의 망명을 받아주겠다"고 제안했고 이즈마일은 루마니아 측의 제안을 거절한 후 정부에 직접 항복하기 위해 세바스토폴로 회항했으나 포템킨은 격렬한 논쟁 끝에 수병들의 투표 결과 루마니아 측의 제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다음날 정오 포템킨은 루마니아 국기를 게양하고 콘스탄차 항에 도착했으며 부두에 정박하기 전 반란 수병들은 멀쩡한 배를 러시아 정부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해수 밸브를 열어 배를 자침시켰다.

포템킨이 콘스탄차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러시아 정부는 피사렙스키 해군 소장을 대표로 한 대표단을 루마니아로 급파했다. 루마니아 정부와의 협상 결과 배는 러시아에게 넘겨주고 반란을 주도한 수병들은 러시아로 송환하기로 합의하였다. 수병들이 자침시킨 포템킨은 쉽게 인양되었으나 바닷물에 담가져 있는 동안 엔진 계통이 완전히 망가지는 바람에 자력 항행이 불가능하여 예인을 통해 7월 10일 콘스탄차를 출발하여 7월 14일 세바스토폴로 귀항했다. 또 러시아로 송환된 수병들 중 반란 주동자 61명은 재판에 회부되어 핵심 인물인 마튜셴코 수병 등 7명은 교수형, 19명은 시베리아 유배형, 35명은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사형수들은 1905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유배형을 선고받은 이들 중 펠트만 수병과 파블로 수병은 시베리아를 탈출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달아났다. 이 중 펠트만 수병은 러시아 혁명 소련으로 돌아와 영화 전함 포템킨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5. 의의

사실 반란 자체는 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에 가깝고 이후에도 경과를 보면 반란의 진행 방향을 놓고 우왕좌왕하다가 용두사미로 끝난 감이 있다. 하지만 국가의 중요한 전략무기인 전함에서 반란이 일어나 체제를 위협했다는 점[10]을 생각해 보면 사실상 러시아 제국 붕괴의 시초를 알린 사건으로, 12년 후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포템킨 반란사건 12년 후 1917년 10월 혁명에 가담한 아브로라의 이야기도 나오며, 공산권 국가에서 해군은 사회주의의 선봉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소련 건국 이후로 아브로라 반란 사건도 포템킨에 버금가는 영웅사로 추앙받았다. 덕분에 공산권 국가의 해군 장병들이 전반적으로 잘 대우받는 계기가 되었다.[11] 혁명의 상징이 된 것도 있지만 포템킨 함 반란사건의 원인이 수병들에 대한 부실한 대우였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도 반란 당시에도 제정 러시아 해군은 모병제였지만, 이후 들어선 소련 해군도 모병제로 해군을 운용하면서 이 사건을 반면교사 삼아 해군에 더욱 더 신경을 써주었다. 국가 차원의 선전(=사기) + 실질적인 혜택(=복지)이 시너지를 낸 덕분에 냉전기 소련의 육군 징집병이 2년 의무복무를 하고, 수병은 3년을 의무복무를 함에도 육군보다 해군에 자원입대자가 더 몰릴 정도로 인기가 많아졌다. 소련-러시아 혼란기를 극복한 현 러시아 해군에도 그 기조가 그대로 이어져 인적자원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준이 되었지만... 러시아의 경제와 부정부패가 까발려지면서 다시 문제점이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6. 이후의 행적

이후 반란의 무대가 된 포템킨은 1905년 10월 12일 판텔레이몬(Пантелеймон)[12]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분노한 니콜라이 2세가 비하적인 명칭을 붙였다는 설이 미국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떠도는데[13] 기본적으로는 잘못된 이야기다. 아무리 당시 러시아가 막장이었다지만 몇 안 되는 금쪽같은 전함에 굳이 비하적인 명칭을 붙여서 사기를 떨어트릴 이유는 없다.

포템킨 반란 사건이 실패로 끝난 지 얼마 후 러시아 해군에서 또 다른 반란 시도가 일어났는데 1905년 11월 포템킨 반란에 참여했던 수병들 중 일부가 판텔레이몬으로 이름이 바뀐 포템킨과 방호순양함 카굴(Кагу́л)에서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하려고 시도했다가 진압당했다.

포템킨 함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Борец за свободу"(바레츠 자 스바보두, 자유를 위해 싸우는 전사) 함으로 또 새롭게 이름을 바꿔서 참전했지만 러시아의 수상함대 전력이 지리멸렬한 데다 적국인 오스만 제국도 사정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다지 활약의 기회는 없었다. 다만 1915년 오스만 제국 해군의 순양전함 야부즈 술탄 셀림 함[14]과 포격전을 벌여 엄연히 드레드노트급인 야부즈 함을 상대로 분전하면서 명중탄을 내는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

이후 러시아 혁명과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여기로 넘어갔다 저기로 넘어갔다 하면서 이름도 몇 번씩 바뀌는 고생을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1919년 영국- 프랑스 해군에게 나포되어 폭파 처분되는 불운을 맞았다.

워낙 손상이 심했기 때문에 다시는 전열에 복귀하지 못하고 세바스토폴 항 외부에 방치되다가 결국 1923년부터 해체 작업에 들어갔다. 최종적인 퇴역 처리는 1925년에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구조물만 떼어내 기념관에 보존하였다. 무사히 살아남았다면 방호순양함 아브로라[15] 함 못지 않게 대접을 받을 수 있었겠지만...

7. 번외: 열악한 함상 생활

포템킨의 반란은 수병에 대한 가혹한 대우가 원인이었는데 당시에는 생활수준이 다소 낙후된 러시아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들의 함상 생활이 전체적으로 참담했다. 포템킨의 썩은 고기가 특이한 게 아니고 당시의 저장 기술로는 항해가 오래되면 저장해 둔 식재료들이 썩어서 곰팡이가 생기거나 벌레가 생기는 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해군 특성상 항구에 기항하기 전까진 보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탓에 바다에서 일하는 것은 기피되었으며 당장 조선 수군만 하더라도 칠반천역으로 여겨져 수군 입대를 피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 난중일기 등의 기록에 남아 있다.[16][17] 특전 U보트에서는 식탁에 오르는 고기의 상태가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이 잘 묘사되며[18] 오래되어 상한 보급품의 썩은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먹는 장면도 나온다.

보급의 난해함과 후달리는 저장 기술이 문제였으므로 전세계 최강인 영국 해군조차도 염장고기를 오크통 속에 잔뜩 쌓아 놓는 게 현실이었으며 굶을 수는 없으므로 녹색 곰팡이가 피든 말든 배고프면 꺼내먹어야 했다. 염장고기에 곰팡이가 생기는 건 보존기술의 한계상 병조림 통조림이 나오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신선한 야채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주식으로 먹던 건빵은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더럽게 딱딱하기 그지없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영국 해군의 군율에는 "식사시간에 전우에게 절대 건빵을 던지지 말 것"이라는 조항이 있을 정도로 거진 벽돌 취급을 했다. 뿐만 아니라 물조차도 오래되면 썩었기 때문에 항해가 길어지면 물 대신 장기 보존에 유리한 을 마셔댔다. 왜 하필 럼이었냐면 설탕 산업의 부산물인 사탕수수 찌꺼기로 만든 가장 저렴한 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선, 해군[19] 가릴 것 없이 모든 종류의 선원들은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렸으며 채소나 과일을 장기간 먹지 못해 나타나는 비타민 C 결핍으로 괴혈병에 시달리기까지 했다.[20]

다만 20세기까지 이 짓을 한 러시아 해군이 낙후된 것은 맞다. 영국 해군은 범선시절 말기에 이미 통조림을 개발해 보급해서 구더기와 염장 고기 시절은 졸업했고 괴혈병도 끝났다. 사실 당시 영국 해군은 세계 최고 강대국의 해군이라 돈과 기술력에선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밀린 것도 컸다. 이 반란이 일어난 시대에는 상당수 나라들의 해군이 러시아와 차이가 없었다.

이렇게 선상 생활이 막장이니 선원들을 모집하면 세상 물정을 모르는 멍청이들이나 매우 가난한 극빈층, 공짜로 술을 준다는 얘기에 들어온 부랑자들이나 지원했지 대부분은 당연히 기피하였다.

해군 강국인 영국은 되려 타국 해군보다 수병 처우 개선이 늦어서 전함들조차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공식 수병 거주구역이 따로 없었다. 수병들은 잠을 잘 때면 복도에 해먹을 걸고 올라가 잤는데 이 해먹조차 부족하여 해먹 1개를 교대로 써가면서 잠을 자야 할 정도였다. 이와 반대로 당시만 해도 장교는 귀족급이라는 인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개인 침대와 공간이 허락되었다. 위생도 개판이라 넘쳐나는 쥐를 때려잡을 고양이는 반드시 군함에 태우고 다녔다.[21]

이런 생활로부터 조금 자유로운 함선이 그나마 인권과 개인의 자유에 대한 인식이 일찍부터 있었던 미 해군 함선 정도였다. 그나마 자유롭다는 미 해군에서도 여러 크고 작은 일[22]을 겪으면서 차근차근 고쳐나갔다. 남북 전쟁 당시의 기록을 봐도 북군이나 남군이나 해군 환경이 막장이라 백인, 흑인 가리지 않고 수병이 되었고 이 열악한 극한환경 속에서 백인과 흑인이 차별 대우를 받지 않고 어울려 지내기도 하였다.[23] 오죽하면 서로 죽어라 싸우던 적국의 해군들이 전투가 끝나면 아군, 적군 관계 없이 입수자의 목숨만은 살려주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뱃사람이라는 고된 일을 한다는 동질감 때문이다.

2차 대전 직전 영국 해군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 중 하나는 영국 해군성이 수병 월급을 대폭 낮추자[24] 수병들이 거기에 대한 반대 표시로 단체 파업을 일으킨 사례가 있는데( 인버고든 항명) 하필 대규모 기동훈련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항구에 정박하는 배들마다 소식이 전해져 파업 규모가 점점 커졌다고 한다. 그러나 장교들이 슬기롭게 대처한 덕에 파업은 평화롭게 진행되었고 해군성은 곧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이후 주동자 처벌 등도 전혀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등 무난히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고 파업을 주도한 수병들을 전역시켰다.

이러한 수병들의 파업은 나름 영국 해군의 전통(?)이었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도 이런 대규모 파업이 있었다. 당시에도 영국 해군 수병들은 급여 인상이나 식단 개선 등을 내걸고 파업했지만 스스로 규율을 지켜 장교들에게 해를 가하지 않았고 전쟁 중이던 프랑스 해군이 나타나면 파업을 일시 중단하고 프랑스 함대와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하며 교섭을 벌여 일부 요구조건을 관철시켰고 주동자 처벌도 없었다고 한다. 단 같은 시기에 다른 곳에서 벌어진 파업에서는 주동자들이 되도 않은 정치적 요구[25]까지 하다가 최후에는 프랑스로의 도주까지 꾀해서 주동자들은 모두 처벌(처형당하거나 호주로 유형당하는 등...)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해외에서 작전 중이던 군함의 수병들이 봉급 지급이 행정착오로 제때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항의해 파업했고 영국 해군은 주동자 처벌 없이 봉급을 지급했으며 수병들도 바로 임무에 복귀한 사례도 있다. 즉, 수병들의 파업을 무조건 항명이나 반란으로 처벌한 게 아니라 요구조건을 내부적인 처우개선(봉급 인상 등) 정도로 국한하고 장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하지 않을 경우엔 해군 고위층과 정부도 일종의 정당한 권리주장 정도로 받아들였지만 이를 벗어난 무리한 요구나 폭력 등이 수반되면 단호하게 처벌했다.

수병들의 반란조차 해군 특유의 상황 탓이 컸다. 육군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주변 부대에서 파악하고 진압하러 오겠지만 장시간 고립된 상태로 항해하는 경우가 많은 해군은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키면 소수의 장교들은 어떻게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배를 점거당하기 쉬웠다. 그래서 가혹한 체벌로 수병들을 억눌러야 했는데 가혹한 체벌을 가할수록 수병들의 반발은 더 커질 테고 그러다가 한계를 넘으면 반란이 일어나는데... 그럴 때마다 강하게 처벌하면 또 해군 조직이 유지되기 힘들어진다. 따라서 불만에 못 이긴 수병들이 파업이나 반란 등의 형태로 그것을 표현할 경우 장교들에게 해를 끼치고 배를 점거하는 등 도를 넘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수병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며 가담자를 처벌하지 않고 불문에 붙이는 등 유화적으로 대응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범선 시대 영국 해군은 반란을 모의 중인 수병들은 밤중에 갑판에서 포탄을 굴린다는 전통이 있었다(...). 당연히 진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기보다는 갑판 밑에 위치한 장교 침실에 포탄 굴리는 소리를 들려주며 "우리 지금 화 많이 났다. 뒈지기 싫으면 처우 개선해라."고 시위하는 것에 가까웠다.

해병대가 창설된 주 원인 중 하나도 이것이었는데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장교들을 보호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수병들을 수감하는 등 일종의 헌병 역할을 맡기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해병들을 딱히 우대해 주거나 한 것도 아니고 되려 19세기 중반에 세일러복이 생기기 전까진 자유롭게 사복을 입었던 수병들과 달리 한여름에도 꽉 끼는 레드 코트 입고 각잡고 서 있어야 하는 등 개고생을 해야 했기 때문에 대우가 거지같으면 해병들이 되려 수병들과 합세해 장교들을 족치는 데 앞장서기도 했으므로 만능 해결책은 아니었다. 실제로 전술했던 인버고든 항명 당시에도 초기에 사태를 해결하려고 해병대를 투입해 보기도 했지만 해병들도 수병들이랑 똑같이 임금이 삭감되는 상황이어서 오히려 가담해 버렸다.

포템킨 함의 반란에서 특이했던 점은 출항 전날 사 와서 출항 당일 배식한 고기에서 구더기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계절이 여름이고 저장기술이 미비하여 식재료가 방치되다시피 해서 맛이 가기 시작해 구더기가 나온 것이다. 물론 신선한 고기도 더운 여름에 그대로 방치하면 미처 썩기 전에 파리가 꼬여서 구더기가 생길 수 있다. 꼭 썩은 고기에만 파리가 꼬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출항 당일에 구더기가 생긴 것은 분명 상식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이 점에서 혹시 처음부터 싱싱한 고기를 사오지 않은 것 아닌가 하는 군수자금 횡령 등을 의심해야 할 여지가 생긴다. 즉 평소에 쌓인 불만이 누적된 것이 출항 당일부터 구더기가 생긴 고기가 나오자 터졌을 것이다. 수병 생활 원투데이 하는 것도 아니고 항해가 길어지면 썩은 고기가 나올 것 정도는 그동안의 경험으로 당연히 알고 있을 테지만 무려 출항 당일에 벌써부터 구더기가 들끓는 고기가 나오니 열받을 수밖에.

[1] 그레고리력 기준. 당시 러시아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6월 14일. [2] 억양을 살려서 제대로 발음하면 "빠쫌낀". 포툠낀이라고 표기하는 건 강세로 인한 모음 변화와 구개음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포템킨'은 영어 철자(Potemkin)를 표기한 것이거나 Потeмкин(ё를 e로 표기. Ё 참조.)을 잘못 읽은 것일 가능성이 높다. [3] 수병들과 장교들은 부식을 따로 조달하고 조리와 식사도 별도로 했기 때문에 수병들은 군의장이 지가 먹을 거 아니라고 검수를 대충 했다고 분노했다. [4] 당시 군함에는 장교들 외엔 식사 및 휴식 공간이 별도로 없어 러시아 해군 함정에선 수병들은 갑판 위에 접이식 탁자를 펼쳐 식사 후 다시 접고 함내 여기저기에서 해먹을 걸고 잤다. [5] 이 시기 러시아 제국군에서 부사관이란 귀족(=장교)에게 잘 보인 평민(=병사)라는 인식이 짙었다. 군 수뇌부도 그런 인식을 가지고 부사관 제도를 운영하니 부사관으로 선별임관 된 이들은 특권의식을 바탕으로 폭력을 행사하며 병사들 위에 군림하는 게 일상이었다. 때로는 같은 평민으로써 병사들 편에 서서 장교에게 조언하고, 때로는 장교와 같은 간부로써 무지한 병사들이 어떻게든 작전명령을 이행케 만든다는 근대적 부사관 이미지는 서구 유럽에서만 통용되었던 셈이다. 이러니 포템킨함에서 자신들의 뒤를 봐줬던 귀족 장교들이 쓸려나가자 부사관들도 힘을 잃고 갈팡질팡 하는 건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 없었다. 훗날 러시아 혁명에 이르러서는 육/해군 부사관들이 전부 귀족 앞잡이로 몰려 죽임당하는 일이 벌어지기에 이른다. [6] 공과대학 출신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 일찍부터 눈을 떴다. [7] 현대 러시아어 인명 표기법에서는 'ㅢ' 발음을 허용하지 않지만 발음 자체는 '깔룬늬'에 가깝다. [8] 당시 러시아군의 러시아 정교회 사제는 장교가 아닌 군무원이었다. [9] 영화에서는 시민에게 총을 발사한 군대에 대항하여 시민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 포를 발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10] 당시 전함은 그 전략적 비중 면에서 오늘날의 핵무기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자산이었다. 수만 톤의 강철을 쏟아부어 건조하고 나서도 엄청난 양의 연료와 각종 보급을 지속적으로 넣어 줘야 하지만 정치적 무게와 파괴력 면에서 그 모든 단점을 상회한 것이다. 흑해함대 전함 7척 가운데 2척이 반란에 참여했고 남은 전함들조차도 반란군에 대한 포격을 거부하기까지 했으니 이 정도면 반란 함정들의 위험성만으로 흑해 통행을 완전히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포템킨 반란이 유명한 이유도 이로 인해 흑해에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들간에 국제적 문제로까지 비화되었기 때문이다. [11] 다만 러시아 내전 이후 레닌 정권에 맞서 해군들이 주도한 비볼셰비키 좌파 봉기인 크론슈타트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외국의 경제봉쇄, 전후 기근, 볼셰비키의 무능한 정책 때문에 해군만 못 먹는게 아니라 전 인민들이 굶어 죽어갔으니... 당연하지만 소련 당국은 싹 쓸어 버리는 걸로 대응했다. [12] 디오클레티아누스 시절에 처형당한 초기 그리스도교 성인의 이름이다. 의사였기 때문인지 치유의 수호성인이다. [13] 미국 역사학자 리처드 휴가 쓴 전함 포템킨(2005년 한국에서도 정식번역)에서도 판텔레이몬의 의미를 '하층 농민'이라고 서술했을 정도다. [14] 원래 독일 몰트케급 순양전함 2번함 괴벤으로, 영국에 발주해 건조 중이던 전함을 1차 대전이 터지면서 대영제국 깡패에게 먹튀당해 열받았던 오스만 제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독일 황제인 빌헬름 2세가 지중해에 파견되었다가 1차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영국과 프랑스 함대를 피해 오스만으로 도주한 순양전함 괴벤과 경순양함 1척을 오스만 제국 해군에게 넘겼다. 다만 승무원들은 그대로 독일 해군 장병들이었다. 함명의 유래는 셀림 1세. 자세한 내용은 몰트케급 순양전함 문서 참고. [15]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에 포탄을 발사한 것으로 유명한 순양함. 흔히 영어 명칭인 오로라 함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기념함으로 보존 중. [16] 정확히는 천민이 아닌 양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일 말고 다른 일은 할 수 없는 신량역천에 해당된다. [17] 섬나라인 일본도 마찬가지라 수군을 모집하려고 하니 일반 서민 징집병들은 기겁하고 거부하기 일쑤라서 붙잡힌 왜구들을 극형에 처해야 하지만 수군으로 일하면 살려준다고 하여 때울 정도였다. 아니면 서구와 마찬가지로 죄수들을 수군으로 일하게 하든가. 이순신과 맞붙어 패한 쿠리 요시히데 같은 수군 장수조차도 왜구 출신이었다가 바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진압되어 원래는 참수당할 팔자였으나 그의 왜구 지휘 능력 및 배들을 이끄는 솜씨를 눈여겨본 오다가 수군 장수로 등용하여 살려준 것이다. 중국도 다를 게 없어서 명장 척계광도 수군을 채우는게 웬만한 해전 치르는 셈이라고 서술할 정도이다. 결국, 명나라도 죄인을 살려주고 수군으로 썼다. [18] 초반엔 꽤 고급스런 느낌이지만 나중엔 곰팡이가 슬어 있는 빵이 제대로 조리되지도 않고 나온다. [19] 해적이 럼을 달고 산다는 건 잘못된 인식이다. 일반적으로 해적은 물이 상할 정도로 오래 항해하지 않았다. [20] 원인과 해결책이 나오기 전까진 괴혈병이 왜 일어나는지 알 턱이 없었기 때문에 대책이 없는 괴혈병은 뱃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위협이었다. 1753년 영국 해군 군의관 제임스 린드(1715~1794)는 괴혈병을 앓던 수병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끝에 괴혈병이 채소나 과일을 먹으면 낫는다는 걸 입증하며 레몬을 수병들에게 보급하면 괴혈병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영국 해군성은 레몬이 비싸니 수병이 괴혈병으로 죽으면 신병을 뽑아 채워넣으면 그만이라고 하여 이 해결 방안을 거부하였다. 실로 어이없는 대책이었지만 지금과 달리 린드가 활동했던 시대에는 레몬이 전량 수입품이었기 때문에 매우 비싼 고급 음식이었다. 따라서 장기간 항해에 레몬을 지속적으로 배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시아에서는 를 먹으면 괴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았지만 유럽에선 회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괴혈병을 퇴치할 방법을 알았음에도 예산 문제로 괴혈병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린드가 살아 있을 때 같은 영국인인 제임스 쿡이 휘하 선원들에게 자우어크라우트와 과일을 지급해 세계 최초로 괴혈병 없이 세계 일주를 이뤄냈다. 이후 영국군은 레몬 대신 오렌지를, 더 나중에는 라임을 주어 해결했다. [21] 묘코급이 관함식 참여차 영국에 갔을 때 그 배를 둘러본 영국인들은 "일본 군함에 비하면 우리 군함은 호텔"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런 열악한 처우들 속에서도 딱 한 가지 예외는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야마토 호텔. [22] 1844년에 사관후보생이 열악한 대우에 불만을 나타내다가 럼에 취해 반란을 일으킬 거라는 농담을 했는데 이 말이 함장에까지 퍼져 관련된 3명이 처형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처형된 사관후보생은 당시 미 해군 장관의 아들이었는데 함장은 이후 보복성 인사조치로 한직으로 쫒겨나 제독이 되지 못한 채 군 생활을 마감해야만 했다. 당시만 해도 해군장교 후보생들은 현역 해군함에 타서 훈련 및 여러가지를 실습하면서 보조로 배우면서 등용하였는데 이게 어디까지나 함장의 마음대로 이뤄졌기에 이 사건을 계기로 해군사관학교가 생겼으며 해군의 대우와 관련된 인식이 거론되었다고 한다. [23] 당시 촬영된 사진을 보면 남군이나 북군 수병들이 흑인, 백인 따지지 않고 거리낌없이 어깨동무를 하거나 한 곳에 모여 찍혀 있다. 반면 당시 육군에서는 흑인과 같이 있는 것마저 재수없다고 여겨 사진 하나에 흑인과 백인이 같이 찍힌 것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24] 1차 대전의 엄청난 전비 부담 및 막대한 식민지 유지비용으로 전후 영국의 국가재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삭감 자체는 수병들도 납득했다. 서류상으로는 10% 삭감이었지만 급여 지급 기준이 같이 바뀌면서 실질적인 삭감폭이 25%로 매우 컸기 때문에 파업이 일어났던 것이다. [25] 의회해산이나 프랑스와의 강화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