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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4:35:51

테르모필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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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테르모필레 전투
Μάχη των Θερμοπυλών
시기 BC 480년 8~9월
장소 그리스 남부 테르모퓔라이[1]
원인 이오니아 반란 이후, 지속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갈등.
교전국 그리스 연합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 아케메네스 왕조
지휘관 레오니다스 1세
데모필로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 크세르크세스 1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 히다르네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Standard_of_Cyrus_the_Great_%28Achaemenid_Empire%29.svg.png 마르도니오스
병력 헤로도토스 주장
5,200 명+@ 4,700,000 명
현대 사가(史家) 추정
10,000 ~ 20,000 명 70,000 ~ 300,000명
피해 헤로도토스 주장
4,000 명 20,000 명
결과 페르시아 승리. 페르시아의 보이오티아, 아테네 점령

1. 개요2. 배경
2.1. 전쟁의 시작2.2. 크세르크세스의 원정2.3. 그리스의 대응2.4. 페르시아의 도착
3. 병력구성
3.1. 페르시아군3.2. 그리스 병력
4. 정치, 전략적 배경5. 전투 시작
5.1. 전투 첫날5.2. 전투 둘째 날5.3. 전투 셋째 날
6. 그 후7. 의의
7.1. 반론
8. 김경천 장군의 청산리 전투와의 비교9. 창작물에서의 묘사 및 모티브

[clearfix]
ὦ ξεῖν', ἀγγέλλειν Λακεδαιμονίοις ὅτι τῇδε
κείμεθα τοῖς κείνων ῥήμασι πειθόμενοι.
여행자여, 당신은 라케다이몬 사람들에게 전하라!
명령을 충실히 따르다 우리가 여기에 누워있다고.
세모니데스Sēmōnidēs 119E[2] (《고대 그리스 서정시》, 김남우 옮김, 민음사, 2018, p.118)

1. 개요

테르모필레 전투, 또는 테르모퓔라이 전투는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 중 페르시아의 2차 그리스 원정 때의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다. 대중에게는 영화 300이 흥행하면서 많이 알려졌다.
파일:Thermopylae_ancient_coastline_large.jpg
테르모필레 지형
스페르케이오스 강과 인근 온천의 퇴적 작용으로 인해 현대에는 해안선이 상당히 밀려나있지만 전투 당시에는 산과 바다의 거리가 100m 이하로 가까웠다고 한다. 사진에 보이는 도로의 위치가 당시의 해안선의 위치와 비슷하다고 하며, 실제 전투가 있었던 자리는 현재 약 20m가량의 퇴적물 아래 묻혀있다고 한다.[3]

헤로도토스의 전승에 의하면 가장 좁은 구역은 전차(마차) 한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라고 하며, 현대 학자들도 지질학적 근거를 토대로 제일 좁은 구역의 폭은 15에서 20미터 남짓일것이라 추정하고 있다.[4] 거기에 바위, 나무 등의 장애물도 존재하고, 이 통로가 직선으로 곧지 않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헤로도토스의 말마따마 직선으로 이동하는 마차들이 한번에 하나만 간신히 통과한다는 말은 신빙성이 꽤 있다.

이런 지형적 특수성을 감안하면 페르시아군이 본인들의 비장의 무기였던 카타프락토스(마갑기병)로 정면돌파를 시도하지 못하고 보병들만 던졌는지, 어떻게 전투가 3일이나 지속됐는지,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도대체 뭘믿고 존버를 했는지도 지례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참고로 저렇게 좁은 곳에서 니가와를 시전하면 순차적 돌격으로 그리스측의 피로를 누적시키려 해도, 쌓여가는 시체와 널브러진 병기들 때문에 돌격 자체가 성립이 안됐을 것이므로, 보병의 질적 부분에서 비교열세였던 페르시아 입장에선 정말로 복장이 터졌을 것이다.

참고로 미디어나 게임등의 매체에서는 자주 묘사되지 않지만, 저런 다리나 통로를 지키는 병목(chokepoint)에서 전투를 치를때는 시체가 쌓이기만 해도 전진이 불가능해져서 싸움이 질질 끌리곤 했고, 다음 돌격을 위해서라도 전장을 청소하는 작업이 선행되야 했다. 영화처럼 페르시아군이 쉼없이 공격하는걸 그리스군이 계속해서 막아낸건 아니고, 실제 충돌은 몇번 안되었을 공산이 크다.

2. 배경

2.1. 전쟁의 시작

페르시아 전쟁의 발단은 이오니아 반란에서부터 시작했다. 이 지역은 키루스 2세 시절에 페르시아에게 정복된 지역이었으나 페르시아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것이 여러 가지 요인과 어우러져 결국 반란의 원인이 되었다 전해진다.

BC 499~BC 493년에 걸처 일어난 반란은 다리우스 1세의 강경 진압에 의해 정리되었다. 이때 아테네와 에레트리아가 이오니아 반란세력을 도운 것을 빌미로 491년에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각지에 사신을 보내 땅과 물(페르시아의 지배권을 받아들이겠다는 상징적인 내용)을 요구한다.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은 이를 받아들였지만 단 두 도시국가,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사신을 처형하는 것으로 응수한다. 아테네는 사신들에게 재판을 때려서 처형을 판결한 다음 바위틈으로 던져버렸고, 스파르타는 재판 같은 것도 없이 그냥 우물 안으로 차 넣었다. 우물로 차넣으면서 스파르타가 사신들에게 했다는 말이 '거기 얼마든지 있으니 마음대로 가져가시오'였다고.[5] 페르시아에 대한 적대세력이 어떤 국가들인지를 파악한 다리우스 1세는 일단 아테네에게 응징군을 보내나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인해 실패한다.

이에 복수를 단단히 결심한 다리우스 1세는 단순히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응징군 성격이 아닌, 그리스 전역을 제압할 생각을 가지고 준비에 들어가나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이는 연기되었고, 다리우스 1세가 이집트로 행군하는 도중 사망하여 그 아들인 크세르크세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이 군사원정을 그대로 수행하여 이집트를 격파하여 반란을 진압, 이후 연기되었던 그리스 공격 계획에 다시금 착수한다.

2.2. 크세르크세스의 원정

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원정 준비는 중간중간에 일어난 반란으로 인한 지연에도 불구하고 계속되었으며, 결국 크세르크세스는 BC 480년, 보병 180만 명, 기병 10만 기, 해군 50만 명, 함선 1200척에 달하는 대군을 편성한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아시아의 전차대, 아라비아의 낙타부대까지 합쳐 무려 230만의 이례적인 대군단이 조직된 것이다.(당연히 실제로는 그만큼 많지 않았다.) 물론 아테네라고 그동안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고, 테미스토클레스의 주도하에 자체적으로 200여 척의 해군을 육성함과 동시에 여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해 힘을 합쳐 막아내고자 계획한다.

공격하기 일 년 전인 481년 크세르크세스는 그의 아버지처럼 사절을 그리스 도시들에게 보내 복종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였는데, 아테네 스파르타에는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10년 전 아버지가 보낸 사절을 살해한 두 도시들에게는 복종을 요구하지 않고 무조건 공격하겠다는 표시였다.

2.3. 그리스의 대응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페르시아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고 대표단이 코린토스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연합을 결성키로 결정한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이 진군을 개시한 기원전 480년 봄에 다시 모여 어떻게 방어를 해야하는지를 논의하였고 그 논의 끝에 1만여의 호플리테스 보병을 템페 계곡에 보내 방어키로 한다. 하지만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인 알렉산드로스 1세가 이 계곡을 우회하는 루트가 있음을 알려왔으므로 이 보병은 템페 계곡을 포기하고 뒤로 후퇴한다.

곧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리스 연맹은 아테네의 대표인 테미스토클레스의 제안대로 테르모필레 계곡에서 요격키로 결정한다. 그리고 페르시아군이 해군을 이용해 테르모필레를 지나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스의 해군이 아르테미시움이라는 해협에서 페르시아 해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을 한 그리스 연맹은 이 작전이 실패할 경우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고 아테네 시민들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이주하기로 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hermopylae_%26_Artemisium_campaign_map.png
테르모필레(Thermopylae)와 아르테미시움(Artemisium)의 위치[6]
한편 봄에 진군을 개시한 페르시아군은 8월이 되어서야 드디어 테르모필레로 접근한다. 이때 스파르타는 카르네이아 축제를 개최할 때였고 또한 올림픽이 열리는 해였다. 스파르타 법에 따르면 이 축제가 열리는 해엔 모든 군사행동이 금지되어있었다. 이때 스파르타의 최고 행정관(에포르(Ephor))들은 상당히 위기상황이므로 이 법을 무시하기로 결정하였고 그 결과 스파르타의 두 왕 중 하나였던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에서 천 삼백 명의 보병을 소집한 뒤 출동한다. 이 보병은 레오니다스와 3백 명의 그의 호위병들, 그리고 1천 명의 스파르타 외부자유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기에 9백 명의 노예계급인 헤일로타이가 동행하였다.

왕이 직접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은 병력을 동원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테르모필레라는 곳이 워낙 좁은 계곡이라 방어할 때 대군이 필요하지 않았고, 둘째로 그리스군을 구성하는 자유시민들은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는데 장거리 원정을 떠나게 되면 이들이 자신들의 농지를 장시간 관리하지 못하는 까닭에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7]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의 파견 병력도 4천여 명에 불과했는데, 보이오티아 북서쪽에 위치한 테르모필레는 펠로폰네소스 지역 도시국가들이 중심인 그리스에겐 대단히 멀었고, 아르테미시움 전투에 동원된 함대 규모 및 운용 인력까지 계산한다면 300여 척의 함대와 함께 4천여 원정군을 파견한 것이므로 결코 적은 병력은 아니었다.

스파르타 왕인 레오니다스는 행군하면서 많은 그리스 동맹군을 합류시킨다. 레오니다스는 행군하기 전 델포이에서 신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러하다.
O ye men who dwell in the streets of broad Lacedaemon!
Either your glorious town shall be sacked by the children of Perseus,
Or, in exchange, must all through the whole Laconian country
Mourn for the loss of a king, descendant of great Heracles.

오, 광활한 들판의 라케다이몬[8]의 주민들이여, 그대들의 운명을 들을지어다.
그대들의 훌륭하고 위대한 도시가 페르세우스의 자손들에게 파괴되든지
아니면 헤라클레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이 죽어
라케다이몬의 전 주민이 애도하게 되리라.

톰 홀랜드, 페르시아 전쟁 403~404p, 책과 함께

즉, 왕이 죽거나 도시가 함락되거나. 헤라클레스가 죽어서 시체를 불태우고 신들에게 영혼을 바친 장소가 테르모필레 협곡 위, 오이타 산 봉우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적중률이 대단하다.

스파르타군이 행군하면서 언제나처럼 펠로폰네소스 동맹군을 동원하여 코린토스 지협을 나섰을 때는 4~5천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한다. 레오니다스는 테르모필레에 도착한 뒤, 예전 포키스 인들이 세워놓은 성벽을 수리하고 보이오티아 일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합류를 받으면서 페르시아군의 도착을 기다린다.

2.4. 페르시아의 도착

파일:attachment/테르모필레 전투/termo.jpg

마침내 페르시아군이 모습을 나타내자 그리스 연맹은 다시 모여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들은 페르시아군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인 것을 보고 혼란에 빠졌고 테르모필레를 포기하고 코린토스 지협으로 철수해 이곳을 방어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나왔다. 이에 테르모필레 인근에 도시국가를 형성한 포키스인들과 로크리스인들이 격렬하게 반대하자, 레오디나스는 테르모필레를 사수하면서 주변 도시에 사절을 보내 증원을 청하자는 안에 찬성했다.[9]

크세르크세스 1세는 싸우기에 앞서 사절을 보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제시한다. 그는 "항복하면 그리스의 자치를 보장해 줄 것이며 페르시아인의 친구라는 타이틀을 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더 비옥한 땅으로 이주하게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에 응할 리 없었던 레오니다스 1세는 거부하였고 이때 페르시아 사절이 레오니다스에게 무기를 내려놓고 대화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자 레오니다스는 사절을 쫓아내며 "와서 가져가라!(μολὼν λαβέ/몰론 라베)"[10]라는 유명한 대사를 한다. 협상이 결렬된 뒤 크세르크세스는 4일간 공격을 멈추고 지켜보았는데 이는 소규모의 그리스군이 겁먹고 달아나길 기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군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3. 병력구성

3.1. 페르시아군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이 군인만 210만, 잡역부를 합쳐 470만이라는 초월적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역사가들도 이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80만이라고 줄여잡기도 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숫자의 군인이 공격에 투입된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소전쟁인데, 인구 8천만의 독일+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등의 각 추축국 군사력을 끌어모아도 소련 침공군은 350만을 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지금보다 인구가 훨씬 적은 2천 년 전에 단독으로 210만의 순수 군인을 확보했다는 사실은 터무니 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세계 인구 항목을 참조해 보면 당시 세계 인구는 약 1억 명이었는데 남성을 5천만 명으로 보면 약 10분의 1을 이동시킨 것이나 다름이 없다. 또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위생과 의료 및 필수품 생산량 증가 등의 여러 학문들의 발전에 의존하는데 그러한 분야에서 현대와 엄청난 차이가 나는 고대 사회가 그 많은 인구를 가지기란 무리가 좀 크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리스인들이 그들의 승리를 부풀리기 위해 과장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추정은 7만에서 50만으로 다양하다. 현대에는 대체로 12만에서 30만 정도로 추정한다. 이렇게 규모 예상치가 널을 뛰는 이유는 어디까지가 정규전투병력이고 어디까지가 수송 및 보조 병력, 군대의 가족인지 애매하다는 것이다. 마케도니아의 페르시아 원정 시기 마케도니아군은 실제로 전투를 벌였지만 기록상으로는 정규군의 보조전력으로 참가하던 이들조차도 머릿수에서 제외한 반면에 페르시아는 머릿수 과장 차원에서인지 비전투 병력마저도 머릿수에 포함시키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더구나 이 경우는 페르시아가 원정을 온 상황이기 때문에 해상수송을 고려하더라도 치중대가 적은 숫자일 리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크세르크세스가 당시로선 상상도 하기 힘들 수준의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 이에 맞서는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전쟁의 최후의 대전인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역대 최대의 병력[11]을 동원하는데 이때의 병력이 3만~8만 사이로 추산된다.

3.2. 그리스 병력

그리스군의 구성은 300명의 스파르타 완전 시민, 1000명의 스파르타 외부 자유민, 3000명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시민, 그리고 3000명의 테살리아, 아카디아인(즉 코린토스 지협 밖의 펠로폰네소스가 아닌 그리스 대륙 시민들) 등 총 7,300명 정도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900명의 헤일로타이(스파르타 노예 계급)들도 있었다고 추정되는데, 이들이 전투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스파르타군의 시중을 드는 역할만 했는 지는 알 수 없다.

헤로도토스는 5천 명으로 추정하나 그는 합류된 많은 수의 동맹시민군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병력의 기록을 누락하였고 이를 종합해 본다면 대략 1만 1천 명이라고 추정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7천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테르모필레를 방어하는 것은 당시로선 최선이라고 현대학자들은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페르시아군이 대군이라 보급에 곤란을 겪고 있으며 따라서 이들은 반드시 전진하면서 현지 조달을 같이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테르모필레는 소규모의 군대로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이었고 아르테미시움과 곁들이면 육로와 해로 동시에 진군을 봉쇄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결국 아르테미시움과 테르모필레를 방어해 낼 수 있다면 이 시기 소극적인 그리스 국가들 역시 승산과 후방의 안전함을 느끼고 참전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살라미스 해전만 봐도 알 수 있다. 해당 해전은 페르시아 군대의 입장에서는 할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전투를 괜히 했다가 패배한 것으로, 정석적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리스 연합군과 페르시아군은 코린토스에서 최후의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코린토스 지협 이북은 모두 페르시아의 손에 들어간 상태였고 실제로 살라미스에서 승리하기 전에 이미 아테네는 불탔다.

더군다나 테르모필레는 정면에서 매우 강력한 그리스군의 주력인 호플리테스 팔랑크스의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장소였으며, 페르시아군의 장점을 살리기 힘든 지역이었다. 이는 그리스군의 좌우가 각각 벼랑과 산+성벽으로 막혀있었고 페르시아군의 포진 지역에서는 다수의 궁병을 집중시켜 사격을 퍼붓기 힘들었기 때문. 물론 기병도 쓰기 힘들다.

따라서 이곳을 돌파하기 위해서 페르시아군은 자신의 장점인 대규모 병력, 다수의 궁병, 기병 등이 모두 봉쇄된 상태로 좁은 지형+성벽이라는 엄폐물까지 지닌 그리스군의 정면에 들이받아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꽤나 가볍게 무장했던 페르시아군이 녹아내릴 것은 분명하였다.

4. 정치, 전략적 배경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바와는 다르게 당대 페르시아군의 핵심 병력은 귀족 중심의 카타프락토스(마갑기병)와[12] 주로 평민들로 구성된 궁병이었고, 그리스의 주력은 잘 알려진대로 밀집방진을 이루는 호플리테스였다.

중보병을 위주로 군대를 운용하는 그리스 입장에서는 페르시아의 자랑인 기병이 매우 위협적이기 때문에 탁 트인 지역에서의 회전을 피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지형을 끼고 페르시아군의 이동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전쟁을 최대한 질질 끌 필요가 있었다.[13] 테르모필레는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핵심 보급루트인 한편 그리스군 입장에선 진격을 지연시킬 좋은 위치였기에 자연스럽게 전투가 성사되었다고 볼수 있다.

사실 기병의 정면돌벽이 불가한 지역에서 소수의 호플리테스가 방패벽을 믿고 니가와를 시전하면 페르시아 입장에선 궁병으로 쓸어버리면 그만인데, 왜 굳이 보병들을 돌격시키면서 전력을 낭비시켰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제일 자주 거론되는 이론은 정치적, 전술적 가성비가 안맞았다는 의견이 주류의견을 이루고 있다. 기병과 궁병은 양성에 시간과 자원이 많이 소모되며 보급도 까다로운 병종이였기 때문에,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지상 보급로를 확보해야 할 상황인데다, 본격적인 공세를 펴기도 전해 주력전력을 소모하기는 정치적 부담도 큰 상황이였다. 뿐만아니라 크세르크스 입장에서는 거의 정찰대 수준의 규모의 그리스군을 보병 돌격으로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남은 전쟁은 어떻게 이길것이냐라는 의구심을 잠재워야 할 의지도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그리스 입장에서는 비록 페르시아군의 공세를 저지할 필요는 있었지만, 대군을 투입하기는 매우 부담스러운 상황이였다. 여러 도시국가들관의 정치적 상황과 이해관계는 둘째치더라도, 방어선이 뚫리면 페르시아의 자랑인 기병에 모든 병력이 도륙당할것이 너무나도 뻔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레오니다스는 '몰살당해도 타격이 크지 않을 규모의' 소수병력으로 지형의 힘을빌려 지연전을 펼치는것을 택한것이다.

이런 이해관계가 맞물려 페르시아군은 우회로가 확보될때까지 막대한 핸디캡을 가지고 억지 전투를 속행하여 지금 아는 결과로 끝마치게 되었다.

5. 전투 시작

5.1. 전투 첫날

4일간 기다린 뒤, 크세르크세스는 드디어 공격명령을 내린다. 그는 우선 메디아인들로 구성된 병력을 보낸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그리스군은 어깨를 나란히 한 뒤 거대한 방패를 들어 맞섰다고 하는데 이는 팔랑크스의 대형을 묘사한 것임이 틀림없다.
파일:Phalanx2.jpg 파일:Sparta_Hoplete.jpg
그리스의 방진(左)과 스파르타 시민군의 무장(右)
그리스군은 싸우면서 계속 전방의 병사와 후방의 병사를 교대했는데 이는 계속된 전투에 병사들이 지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완벽한 지형 보정과 높은 훈련도와 무장수준, 그리고 철저한 규율을 지닌 그리스군에게 페르시아군은 예상대로 녹아내렸다. 이에 크세르크세스는 매우 당황하여 그가 앉은 의자에서 세 차례나 내려왔다고 한다. 이때 최정예군인 스파르타군의 희생은 두 명 정도에 지나지 않을 정도의 일방적인 싸움이라고 한다. 다른 그리스 연맹군의 희생도 있을 것이나 스파르타군의 희생을 보면 그 수는 미미할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희생을 보다 못한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최정예인 아타나토이(이모탈)를 투입하였다.
파일:Persian_Immortal.jpg 파일:Immortals_3.png
페르시아 이모탈의 무장(左)과 재현(右)
비록 이모탈이 기존 징집병에 비해 중무장했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의 갑옷 또한 궁병 사격에 대응한 얇은 수준이었기에 접근전에서는 메디아 징집병과 마찬가지로 그리스군에게 취약했다. 이때 그리스군은 후퇴를 가장하여 많은 수의 이모탈을 끌어들인 뒤 돌진하여 피해를 급증시키는 전투기술까지 선보였으며, 이로인해 이모탈도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이모탈 역시 앞서 투입되었던 메디아인들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 뒤 패주한다.

5.2. 전투 둘째 날

크세르크세스는 그래도 단념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군에게 그래도 어느 정도의 피해는 입혔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보병을 보내 싸우게 하였는데 그리스군은 약해지긴커녕 전투 첫날의 성과로 사기가 크게 오른 상태라 더 강해져 있었다. 첫날과 마찬가지로 싸움은 그리스군의 일방적인 학살이었고 크세르크세스는 매우 당황하여 싸움을 중단한다.

그런데 그날 밤, 페르시아 왕은 희소식을 전해듣는데 트라키니아인이었던 에피알테스라는 자가 방문하여 우회로가 있다는 것을 전한 것이었다.[14] 에피알테스는 이로써 전설이 되는데, 그의 이름이 그리스어로 ' 악몽'(εφιάλτης, 현대 그리스어로도 악몽)이라는 뜻이 되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게 된 것이다. 에피알테스는 많은 포상을 기대하였는데 뒤이어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의 대패로 인해 페르시아군이 철수하자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했다. 그리스에서 살기 어려워진 그는 테살리아로 달아났는데 그리스 연맹측은 그의 목에 많은 현상금을 걸었다. 결국 그는 아테나데스라는 사람에게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의 지휘관이었던 히다르네스에게 2만여 병력을 주어 이 루트를 통해 테르모필레를 우회한다. 이 병력엔 이모탈도 동행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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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전투 셋째 날

에피알테스가 알려준 길에는 1,000명의 포키스인 중무장보병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들은 레오디나스에게 우회로 지키겠다고 자청했는데, 연합군의 후위를 지키는 것 외에도 자국을 방어할 목적이 있었다.[15]

포키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올라오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고, 페르시아 역시 이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 히다르네스는 그들이 스파르타인일까 두려워 했으나 에피알테스가 사실확인을 해주자 전투대형을 갖추었다. 포키스인들은 화살이 쏟아지자 산꼭대기로 이동하여 결전을 준비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이들을 무시하고 고갯길을 지나갔다.[16]

우회로에 페르시아군이 진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레오니다스는 장교들을 모아놓고 대책회의를 한다.[17] 그리스인들은 서둘러 후퇴해야 한다고 했는데 레오니다스는 자신은 남아서 최후까지 싸우겠다고 하였다. 그는 그리스인들에게 남아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후퇴할 것인지 선택권을 준다. 700여 명의 테스피아인들은 스파르타인들과 남아 같이 싸우겠다고 한다. 그리고 400명의 테베인들 역시 남아 싸우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질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왜 남아 싸워 몰살당하기로 하였는지는 논란이 많다. 단지 '스파르타인은 후퇴하지 않는다'라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1천 500명의 희생은 상당한 손실이었다. 스파르타 완전시민 단 200여 명이 포위되어 항복한 것만으로도 모든 해군을 포기할 정도로 자기 시민들을 아꼈던 훗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의 스파르타인들을 생각하면 이는 더더욱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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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유력하다. 즉, 레오니다스가 상황을 파악했을 때 이미 페르시아군의 접근이 상당히 진행되었고 따라서 누군가가 남아 후방을 지켜 남은 그리스인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때까지의 시간을 벌어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페르시아인들에겐 상당수의 기병이 있었으며, 만일 레오니다스가 전군과 함께 후퇴했다면 이 기병에게 곧바로 따라잡혀 모두 죽음을 당하는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레오니다스는 1천 5백 명을 남겨 후방을 지키고 남은 6천의 병력을 보존시켜 훗날의 싸움에 대비하게 하는 선택을 한 것이라고 한다.

이 1500명 중 테베인들과 테스피아인들은 왜 남아서 같이 죽는 길을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는데, 일단 테베인들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400여 명의 테베인들이 인질이라서 그렇게 됐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그렇다면 테베인들만 인질로 잡혀 테르모필레 전투에 동행했다는 설명이 이상해진다. 즉, 이들 테베인들은 페르시아군에게 협력하기로 한 테베의 결정에 반발해 스파르타 진영에 합류한 강경파 시민들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들은 테베로 돌아가봤자 권력을 쥔 친페르시아 세력에 의해 숙청당할 것이 분명하니 돌아갈 곳이 없는 신세였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동맹시 출신 병력의 탈출이라도 엄호해줘서 페르시아의 발목을 잡기로 한 것이다. 다른 700명의 테스피아인들의 경우엔 완전히 깨끗한 희생정신으로 남아 싸우기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이 테스피아 시가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의 호플리테스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놀라운 결정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그리스 측에서 모든 결정을 내린 뒤, 곧 페르시아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리스군은 사방에서 몰려온 페르시아군들과 싸워야 했고 하나라도 많은 적을 죽이기 위해 진형을 넓힌 뒤, 앞으로 전진하였다. 이 싸움은 격렬하여 그리스군은 그들의 창이 부러질 때까지 싸웠고, 창이 부러지자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싸웠고, 칼이 부러지면 땅에 떨어진 돌을 주워 싸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 싸움에서 페르시아 측의 장교들이자 크세르크세스의 동생들인 아브로코메스와 히페르안테스도 전사했다고 한다.

레오니다스 역시 전사하였는데 레오니다스 왕의 시체를 지키기 위해 그리스군은 이 근처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이때 이모탈이 투입되자 그리스인들은 전투에서 밀려 성벽쪽으로 내몰렸다. 테베인들은 고립되었고 따라서 이들은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한다. 테베인들은 나중에 포로로 잡힌 뒤 페르시아 측에 의해 낙인이 찍힌다. 테베인들을 제외한 남은 병력은 칼을 들어 맞섰고 칼이 못쓰게 되자 주먹과 이빨로 저항했다고 한다.

크세르크세스는 지겨워서 이에 자신의 궁병대를 투입해 그리스군 전원이 사망할때까지 화살을 퍼붓는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화살공격에 그리스군은 당해내지 못하고 그야말로 전멸한다. 훗날 1939년의 고고학 발굴을 통해 이 장소에서 상당한 양의 청동 화살촉이 발굴되어 이 설명을 뒷받침해주게 된다.

왜 처음부터 그냥 궁병을 투입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제일 유력한 이유로는 활과 화살 자체가 소모품이기 때문에 전력을 아껴야 했던 점과, 사기 유지를 위해서라도 근접전에서 승리해야 했다는 크세르크스의 의지가 주로 언급된다. 애초에 그당시 페르시아군의 기본 전략은 공격적인 기병의 돌격으로 전열을 흔든 뒤 보병을 투입해서 전황을 엎는 것이었다. 이게 먹히지 않는다면 크세르크스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불리해질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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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종료되자 페르시아군은 드디어 그리스 본토로 진입할 수 있는 루트를 확보하게 된다. 페르시아군의 총 전사자는 2만여 명으로 기록되었는데, 헤르도토스가 페르시아군이 2백만이 넘는다고 서술한 것을 조금 감안해 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리스군의 전사자는 전멸당한 수를 포함하여 2천여 명이었다. 결국 4천여명 정도가 패주하여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인데, 병력 차이와 페르시아군에 기병이 존재한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정도 손실은 대단히 양호한 결과물이다.

끝으로 본 전투에서 결사대의 무훈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졌다.
우리는 그리스를 위하여 다함께 싸웠고 다함께 죽었나니, 나그네여, 스파르타에 가거든 이 말을 전할지어다.

6. 그 후

레오니다스의 시체를 발견한 페르시아군은 그의 머리를 자르고 몸을 십자가 형에 처한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페르시아가 전사한 적장에게 이러한 처우를 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페르시아인은 용감한 적장에게 예우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 풍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시신은 훗날 페르시아군이 철수한 뒤, 그리스군이 수습하여 그 자리에 묻고 사자상을 세워 레오니다스의 용기를 기린다. 그로부터 40년 뒤, 스파르타인들은 그의 뼈를 스파르타에 가지고 와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고 해마다 그의 죽음을 기리는 스포츠 행사를 열게 된다.

테르모필레가 페르시아군에 의해 점령되자 아르테미시움에 머물던 그리스 해군도 철수한다. 그 뒤 보이오티아 지역에 전진한 페르시아군은 저항하는 도시들은 파괴하고 그렇지 않은 도시들에게는 항복을 받으면서 진군한다. 그리스인들의 인명피해는 얼마 없었는데 보이오티아 일대의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친페르시아 성향이 있었고, 이는 위의 전투 종반에 테베군이 남은 이유로 꼽히는 것이 자국 도시 안에 친페르시아 성향 시민이 더 많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쉽게 답이 나온다. 물론 페르시아 편을 안 든 도시들은 8개월 간 페르시아군이 진군하는 동안 이미 시민들을 피신시켜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코린토스 지협에서 페르시아군을 저지하기 위해 병사를 소집한다. 그리고 그 지협에 성벽을 건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페르시아군이 해군을 통해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한다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맞서서 이들의 진격을 저지해야만 했다. 그런데 아테네의 지도자인 테미스토클레스는 단지 저지하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페르시아 해군과 적극적으로 싸워 격파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에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한 뒤 격파하였으며, 그로 인해 펠레폰네소스의 가장 큰 위협이 제거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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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린토스 지협
해군이 괴멸되자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군이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다리를 파괴하여 페르시아군을 본토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을 대단히 우려하였다. 특히 크세르크세스가 페르시아 본토로부터 차단된다면 페르시아는 왕의 공백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원정을 중단하고 페르시아로 귀환하기로 한다.

그런데 페르시아는 코린토스 지협 동쪽의 대륙을 점령한 상태였으므로 자신의 장군인 마르도니우스에게 상당한 병력을 남기고 이곳을 지킴과 동시에 그리스 원정을 계속 수행할 것을 지시했으며, 이 마르도니우스는 다음해에 다시 한 번 아테네로 진격해 도시를 불태운다.

이때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었던 대다수의 그리스인들은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입지가 강화된 아테네인들의 압력을 받아 코린토스 지협을 나와 페르시아군과 적극적으로 맞서기로 결정한다. 그리스인들은 중장보병만 수만에 이르는 대군을 조직하였고 아티카에 있는 페르시아군과 싸우기 위해 전진하였으며, 이에 평야가 많은 보이오티아 지역으로 철수한 페르시아군과 플라타이아이시 근방에서 대치한다.

플라타이아이는 오랫동안 아테네와 밀접한 동맹이었던 보이오티아의 작은 도시국가로, 아테네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라톤 전투에 참전한 유일한 도시국가이다. 뒤이어 벌어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페르시아군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동시에 터키 서부의 미칼레 지역에 머물고 있었던 페르시아의 잔여 해군까지 격멸시켜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을 완벽하게 실패로 돌렸고, 이후 페르시아 전쟁은 페르시아의 그리스 공격이 아닌 그리스의 페르시아 공격 국면으로 전환되게 된다.

7. 의의

Aussi y a il des pertes triomphantes à l’envi des victoires. Ny ces quatre victoires sœurs, les plus belles que le soleil aye onques veu de ses yeux, de Salamine, de Platées, de Mycale, de Sicile, oserent onques opposer toute leur gloire ensemble à la gloire de la desconfiture du Roy Leonidas et des siens, au pas des Thermopyles.
그래서 승리 못지않은 당당한 패배도 있다.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이, 미칼레, 시칠리아 전투에서는 일찍이 태양이 그 두 눈으로 목격한 가장 훌륭한 승리가 있었지만, 그 네곳의 영광을 다 합해도 테르모필레 협로에서 궤멸당한 레오니다스 왕과 그 부하들의 영광에는 감히 견줄 수가 없을 것이다.
미셸 드 몽테뉴 『에세』 1.31 중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패를 가른 큰 전투는 해전이었고 지상전은 거의 병풍이었다. 사기를 고양시켰다고 보는 것도 무리인데, 이후 페르시아가 코린토스 동쪽 영토를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휩쓸고 쉽게 아테네를 손에 넣은 걸 보면 알 수 있다. "과연 스파르타군이 몇시간 정도를 못 버텼어도 아테네 해군이 정비를 완벽히 끝낼 수 있었는가"는 이견이 있다.

특히 과거까지 칭송받던 스파르타의 마지막 전투는 합리주의의 정착과 역사적 연구가 거듭되면서 그 평가가 갈리게 된다. 당시 레오니다스가 끌고 가 소모시킨 300명의 군대는 아들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했는데, 대를 이을 자녀까지 있었으면 거의 4~50대 이상의 중년층으로 당시 스파르타의 특성상 이정도 사람들은 대부분 장교급 인사들이란 소리다. 페르시아의 대규모 병력에 맞서기 위해 매우 중요했던 이 지휘관 인재풀을 아주 박살을 내버린 것이다. 이것 때문인지 기록과 후술할 아리스토데모스의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1년 가까이 스파르타는 전투다운 전투를 못 치른다. 다만 당시 축제 기간이었던 스파르타가 전력을 쓰지도 않았고, 페르시아 전쟁 내내 소심하게 대항한 스파르타가 이후 프로파간다로 아테네급 발언권을 얻게 되니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보면 오히려 좋은 판단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테르모필레 전투의 전쟁사적 의의는 오히려 스파르타가 아닌 그리스 연합군이 활약한 1~2일 전투부분에서 전략전술 측면에서 재평가되는 편이다. 페르시아가 나아가야 하는 유일한 길목이자, 팔랑크스 양식에 가장 적합한 지형이 테르모필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랑크스의 대표적 약점인 측면을 사수하면서도 좁은 고개를 봉쇄할 수 있었고, 유일한 약점이었던 산악로 샛길엔 포키스군을 배치했다. 비록 현지인 중에 배신자가 나오고, 페르시아군이 넘어 왔을 때 포키스군이 마침 자던 중이라 무의미였지만... 훈련, 장비, 지형의 이점을 살려 병력의 차이를 극복하려 한 고대 전투의 대표적 예시로 쓰인다.

이 전투의 핵심은 마라톤 전투에 이어서 중장보병이었다. 유산시민층을 주축으로 하는 중장보병 신화라는 점에서 테르모필레는 마라톤과 더불어서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실제 페르시아 전쟁이 결국 살리미스의 3단 노선의 수부들의 힘에 의해서 결정이 되었으며 그 결과 무산시민층이 성장하게 되지만, 단적으로 플라톤은 《법률》에서 살라미스 전투를 "그리스 군인들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다"라고 평가하며,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불행한 사건"으로 표현할 정도의 반발로 인해 중장보병의 위대함을 보여준 전투들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유사한 것이 미국의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민병대 신화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사실 마지막 전투에 참전한 스파르타 군인들 중 3명이 생존했는데 이들의 이름은 판티테스, 유리투스, 아리스토데모스이다. 판티테스는 테살리아에 사자로 가느라 자리에 없었으나 스파르타로 생환한 이후 비겁자로 칭해지며 억울함을 호소하다 결국 자살했다. 유리투스와 아리스토데모스는 안질을 앓고 있어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으므로 레오니다스의 명령에 의해 본국으로 후송되었다. 유리투스는 귀환하던 중 자신을 인도하던 노예를 위협해 테르모필레로 돌아가 전사했고, 아리스토데모스만이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전투 수행이 불가했고 왕의 지시로 후송된 점이 참작되어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겁쟁이 아리스토데모스"로 불리며 누구도 말을 걸거나 불을 빌려주지 않았다. 이후 그는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명예 회복을 위해 팔랑크스 진형에서 뛰쳐나가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다만 스파르타인들은 죽기 위해 뛰쳐나가 세운 공적이라 일반적인 공적과 같이 평가할 수 없다 했다고 한다. 스파르타가 어떤 국가인가 보여주는 사례다.

메세니아 농노들도 "너희 나라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겠다!"는 스파르타의 말을 믿고 참전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도 스파르타의 피지배층에 대한 대우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당연히 메세니아는 이에 분노하고 민란이 지속된다. 스파르타가 영토 확장을 못한 이유가 바로 메세니아라는 내부적 문제 때문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테베는 제일 먼저 스파르타의 밥줄인 메세니아를 독립시켰다. 이후로 메세니아는 절대로 스파르타와 손 잡지 않고 먹히지도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지역감정이 좋지 않다.

그리고 훗날 20세기가 되었을때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가 아닌 로마의 후예들을 상대로 테르모필레에서 한 번 더 전투를 치르게 된다.

7.1. 반론

물론 전투 자체론 큰 피해를 준 것도 아니기에 전황엔 큰 영향이 없었지만 다른 면에서는 당연하게도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고 하긴 어렵다.

일단 무엇보다도 스파르타가 주축이 된 그리스 연합 육군이 아티카 북단으로 진출해서 페르시아군의 진군을 조금이라도 늦춘 덕분에 아테네 해군이 정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고[18] 사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으니, 바로 아티카와 나아가서 그리스 전 지역의 그리스 시민들을 소개할 시간을 벌어줬다는 것이다.

테르모필레에서 전멸한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비록 스파르타에서도 전투 경험이 풍부한 중요 전력이었기에 이들의 희생은 매우 뼈아픈 것이었지만 이들의 희생이 아니었다면[19] 아테네까지는 사실상 대적할 세력이 없었기에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빨리[20] 아티카 전역이 불바다가 됐을 것이다. 인구 자체가 페르시아에 비해 매우 적은 그리스가 페르시아군의 침공으로 여자나 아이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가는 상황은 무너지면 다시 지으면 되는 도시가 불타는 것보다 훨씬 끔찍한 시나리오임은 자명하다. 그렇기에 이들의 희생은 명예로운 희생인 것이다.

거기다 어디까지나 결과만 보니 별 성과가 없는 전투가 됐을 뿐이지, 사실 에피알테스의 배신만 없었다면 그리스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페르시아를 패퇴시킬 찬스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우회로가 있다곤 했지만 페르시아가 이를 눈치챌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으며, 보급의 단점이 컸던 페르시아군을 고려하면 더 시간이 끌려 소모될대로 소모된 이후에 우회로를 찾아봤자,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함을 체감하고 후퇴할 가능성도 있었다. 즉, 에피알테스의 배신만 없었으면 오히려 이 전투가 제 2차 페르시아의 결정적인 전투였을지도 모르는 셈이다.

또한 스파르타는 노예나 다름없는 피지배층들을 소수의 완전 시민들이 가혹한 무력으로 다스리고 있는 구조인 만큼 원정시엔 적어도 외적의 침공에 본토를 방위하고 피지배층의 반란에 대응할 다수의 군사를 남겨 뒀다. 그렇기에 통념과 다르게 실제로 테르모필레에서 대부분의 가용 가능한 스파르타 시민병이 죽은 것은 아니었다.[21]

결론적으로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의 중요 전력이 장렬하게 시간을 벌고 전멸하는 것보다 나은 시나리오가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페르시아 대군이 이미 그리스 입구까지 왔고 마케도니아, 트라키아와 이오니아의 그리스계 식민도시들이 크세르크세스에게 무릎을 꿇은 시점에서 그리스 본토 평야로 가기 전에 마지막 험지인 테르모필레 말고는 페르시아군에게 지연전을 수행할 장소가 있었다고 하긴 어렵다. 그리스 연합은 비록 스파르타의 중요 전력 손실이라는 부정적인 결과가 있었지만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할 수 있다.

8. 김경천 장군의 청산리 전투와의 비교

김경천 장군은 청산리 전투와 테르모필레 전투를 비교하며 청산리 전투의 독립군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일기에 밝히고 있다.
청산리 전투가 발생하기 전 일본이 중국군에게 한국군에 대하여 압박을 가하자 중국군대는 독립군을 해산하라고 한다. 그런데 김경천 장군은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며 독립군한테도 잘못이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10월 4일...전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북간도 한국군을 일본의 부추김을 받은 중국군대가 해산하라 한단다. 이는 우리 독립군에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러나 그 독립군의 경거함에도 원인이 있다.
김경천,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학고방, 2019), 121.
번역자는 소련-러시아의 고려인 역사학자의 역사서를 인용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1920년 10월에 만주 북동부 훈춘분지 일대에서 우리 한인들이 일제에 맞서 봉기를 하였다. 한인들은 10월 4일 훈춘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두 차례 습격했고 항일봉기의 불길은 만주전역으로 번져갔다. 여기에는 중국인들도 참여했다. 즉각 일본은 중국정부에 대고 봉기한 한인들에게 가장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요했고 중국정부는 만주의 불안전한 지역에 일본군을 투힙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이에 일본은 2개 사단을 투입해 간도전역에서 이른바 간도토벌을 단행하게 된다. 이로 인해 1920년 11월부터 1921년 2월까지 '훈춘 대학살'이라는 참변이 자행되어 무수한 한인이 학살과 전대미문의 잔혹행위를 당했다. 그러자 수천 명에 달하는 만주지역 항일빨치산 부대들이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 아무르주로 이동했다. (보리스 박·니콜라기 부가이(김광환·이백용 옮김)의 같은 책 199-200쪽)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122.
보리스 박 이란 역사학자는 1979년부터 활동한 소련-러시아의 고려인 역사학자이다. # 소련-러시아의 연구에 의하면 한인들이 훈춘 영사관을 습격했다고 하는데, 이는 한국에서는 21세기에 들어서야 겨우 논문으로 나오고 일반인들은 여전히 훈춘 사건을 예전 학설대로 보고 있다. 반대로 말하면 한국에서도 20년은 된 연구지만, 논문 하나에서 시작해 학계가 바뀌고 대중에 전파되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그리고 김경천 장군은 '청산리 대첩'이란 보도를 읽고 매우 분노한다. 김경천 장군이 '청산리 대첩'을 보도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왜 김경천 장군이 부정적으로 비판했는가에 대해선 인터넷 어디에도 제대로 인용하고 있지 않다.
3월 21일...상해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 군무부에서 출판한 북간도군정서 총재 서일군의 격고문 및 북로군 전투상보라 하는 것이 왔기에 나는 큰 희망으로 읽어보니 심장을 끊어지게 하는 매우 통분한 어구도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좀 과도한 난리를 당한 일이 있는가 한다. 물론 이번 북간도 사건은 나도 대개 아는 것이다. 그 상보에 씌었기를 일본군은 죽은 자가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장교이하 1254인, 부상자가 장교이하 200여인이라 하며 그 군정서 군대는<총 숫자가 400여명이다> 죽은 자 1인이요 부상자가 5인이요 포로 된 자 2인이라 한다. 그런즉 이 군대는 능히 400으로 적의 연대<혼성으로 포병과 포 몇 문이 있다>와 접전하며 400의 3배 이상을 전멸시킨 것이라. 동서양전쟁사에 그런 예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이 군대는 일본군의 공격과 포위를 당해서 도피한 것인가 하였더니 이같이 공개할만한 승리를 얻은 것이라 한다.

나는 우리 민족이 허례를 좋아하며 실행이 여기에 따르지 않는 인성이 있음을 한하는 바러니 지금도 역시 그렇다. 우리의 앞길이야말로 실로 딱하다 할 수 있다. 아아, 저 그리스 왕 레오니다스는 600명의 군인을 이끌고 본대를 떠나 적진 깊숙히 들어가 외로이 성을 지키다가 수만 명의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당해 전멸할 때까지 악전하였으므로 전 그리스민족에게 대 분노를 일으키며 대 단체를 짓게 하여 그리스인이 문득 대군을 모아 페르시아군을 대파하고 그 왕 레오니다스 및 부하가 전사한 곳에 비를 세우고 새겼으되

"그리스인아 우리는 너희를 위하여 그 명령대로 죽노라"하였다.

아아 이 전례와 군정서의 조란이 어찌 같은가. 이것뿐 아니라 이전부터 외지에 나와서 나라의 일을 도모하는, 우리보다 먼저 온 무리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일을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아무 하는 일 없이 상심만 한다. 깊이깊이 우리 명심할 것이다. 우리 민족같이 일에 단련 없는 민족은 세계에서 드물다. 공명하고 올바른 성질은 매우 적다. 무엇을 하든지 정직하지 않고 허명에 만족한다. 나는 이로써 장래를 많이 염려한다.

...왼쪽 여백의 글: 북간도에서 이 군정서가 당한 난리를 친히 겪고 들어온 사람을 만나서 자세한 소식을 들으니 청산리에 우리 민가가 10호인데 여기에 독립군이 있는 줄 알고 일본병사가 들어오기에 독립군이 미리 알고 아래로 피하니 일본병사가 와서 주민에게 탐문한즉 위로 갔다 하니 일본병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아래에 있는 독립군이 후방에서 사격하고 도망하니 일본병사가 그 주민이 자기를 속였다 하여 그 동네에 여자 7명만 남기고 싹 죽였다 하니 아아 무슨 범벅인지.
경천아일록 읽기(탈초 및 현대어역 김병학), 133-134.

김경천 장군 기록의 요지는, 스파르타의 왕 레오디나스는 그리스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압도적인 병력 차의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전멸할 때까지 전투하여 그리스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에 비해 청산리전투의 독립군은 주민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독립군만 살자고 도피한 주제에 청산리 대첩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 시각 때문에 청산리대첩이라 과장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민족주의 시각 때문에 대첩이란 과장에 분노하는 것이다. 이렇듯 테르모필레 전투를 본받을 만한 예시라고 인식하는 경우에서는 청산리 전투를 좋지 않게 평가하기도 한다.

다만 각국의 기록을 모두 확인할 수 있는 현대에 들어 확인된 바에 의하면 훈춘 사건은 청산리 전투로부터 불과 9일 전에 있었던 일이고, 일본은 이미 한 달 전부터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화계획을 세우고 19사단과 28여단, 기타 관동군 부대를 동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일본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훈춘 사건 때문에 격동되어서 군대를 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초토화작전을 목표로 군대를 전개하고 있는 상황에서 훈춘 사건이 일어나 핑계를 제공한 것에 가까우므로 한국 측에 청산리 전투나 간도 참변의 책임을 묻기는 어려워졌다.

또한 테르모필레 전투는 달랑 600명이 적진 한복판에서 외로이 치른 싸움이 아니라 후방에서 주민들을 소개시킬 행정력을 가진 폴리스들이 있는 상황에서 페르시아군의 전진을 막아 시간을 벌기 위해 7000여 명의 그리스 연합군이 길목을 막고 지연전을 펼치던 중 우회로가 발각되자 1500여 명이 남아 후위를 지킨 싸움인데, 레오니다스 왕과 1500 결사대의 행적이 영웅적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들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세력 간 전면전에서 아군 후방의 행정력이 발휘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선 싸움이었다. 독립군처럼 후방도 없고 행정력을 가진 기관도 없는 게릴라와는 상황이 다르며, 오히려 게릴라 전술에서 가장 피해야 할 것이 정규군 주력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소모되어주는 것이다.

9. 창작물에서의 묘사 및 모티브

1962년작인 루돌프 마테 감독의 영화 300 스파르탄(The 300 Spartans)이란 영화에서 이 전투를 주제로 다룬다. 만화가 프랭크 밀러는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보고 이후 영감을 얻어서 만화를 그렸는데, 이 만화가 바로 그래픽 노블 300이다. 이를 원작으로 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도 유명하다. 다만 만화와 영화 모두 액션신의 묘사는 매우 훌륭하나, 역사 왜곡과 오리엔탈리즘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았다.[22]

본 전투에서 영감을 받은 격투기 단체, Thermopylae Team Combat(TTC)가 존재한다. 1:1로 진행하는 4:4 입식 타격기 싸움이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조정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알그렌이 "옛날 서양의 테르모필레라는 곳에서 스파르타의 전사들이 단 300명만으로 페르시아의 백만 대군과 맞섰던 적이 있었다"며 카츠모토에게 테르모필레 전투 이야기를 잠시 들려준다. 참호에서 조정군을 향해 본격적으로 돌격하기 직전 카츠모토가 "그때 테르모필레의 전사들은 어떻게 되었나(What happened to the warriors at Thermopylae)?"라고 묻자 알그렌은 "모두 전멸했지(Dead to the last man)."라고 대답하고, 카츠모토는 그럴 줄 알았지 만족스러운 듯 알그렌과 서로 웃음을 주고 받으며 다른 사무라이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진격에 나선다.

페르소나 시리즈에서는 '테르모필라이'라는 스킬이 등장하는데, 효과가 '아군이 적에게 포위되어(선제공격을 당했을 때) 있는 경우, 아군 전체의 공격/방어/명중/회피를 상승시킨다'이다.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매우 한정적이지만 작중 최고의 아군 버프 스킬이다.(포위당했을 때 스킬을 그냥도 쓸 수 있게 하는 특성과 조합해서 사용한다)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에서도 짧게 언급된다. 미미르가 크레토스에게 불의 문 에서의 전투에 참전했느냐고 묻자, 참가하지 못했던 크레토스는 그 전투에서 죽지 못했던 것을 후회해왔다고 답한다.[23]


[1] Θερμοπύλαι (thermopýlai). '뜨거운 관문'이란 뜻이다. [2] 'E'는 J.M. Edmonds, Lyra Graeca, Havard Univ. Press, 1963의 약어이다. [3] 소수로 다수를 막는데 적합한 지형임을 알 수 있다. 좌측은 깎아지른 절벽이며 우측은 물이기에 길목을 막고 버티면 뚫기 어렵다. [4] 한사람이 차지하는 폭을 양 0.5미터로 계산하면 40명이 서있을 공간이다. 그당시 직업군인과 징집병의 전투력 갭은 어마무시했기 때문에 진짜로 해볼만한 싸움이 성립됐다고 볼수 있다. 물론 우익에서 절벽을 옆에두고 선 사람은 좀 쫄았을지도. [5] 영화에서는 페르시아 사신을 레오니다스가 발로 차서 우물에 떨어트린 것으로 나오나, 당시 스파르타의 왕은 레오니다스의 형인 클레오메네스 1세(Κλεομένης , BC ~ 489)였다. [6] 교전기호가 표시된 지역, 절묘하게 육, 해로를 동시에 틀어막을 수 있는 지형임은 지도상으로도 확인 가능하다. [7] 그나마 이러한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했던 것은 애초에 막강한 경제력을 지닌 전성기의 아테네와 거대한 농경지를 지니고 헤일로타이를 부려먹는 데다 다수의 동맹국을 움직일 수 있었던 스파르타였다. [8] 당시 스파르타의 이름. 스파르타는 건국시조 라케다이몬의 왕비이다. [9] 포키스는 자신들의 영토을 노리는 도시국가 텟살리아가 페르시아에 가담한 상태였다; 헤로도토스, '역사'; VII권 207, p.740; 172, p732; 176, p.725 [10] 이 말은 현재 그리스 육군 제1군단 구호로 쓰이고 있다 [11] 말 그대로 무기 들 수 있는 성인 남자는 다 나왔다. [12] 페르시아에서는 그냥 기병이라 불렀고 그리스인들이 (갑옷으로) 뒤덥혔다 해서 카타프락토스라고 이름으로 불렀고, 이게 후대에도 이어져 흔히 아는 카타프락토이라는 표현으로 정착했다 [13] 그리스는 과거나 지금이나 말이 풀을 뜯고 목을 축일 여건이 나지 않는 지역이 대부분이라 장기전을 유도하기만 해도 페르시아군의 최대전력인 기병을 무력화시킬수 있다. [14] 에피알테스는 멜리스 출신으로 과거 멜리스인들은 포키스인들과 적대적인 텟살리아인들을 해당 우회로를 통해 길 안내를 한 사례가 있다; 헤로도토스, '역사'; VII권 213, p.744; 215, p.745 [15] 헤로도토스, '역사'; VII권 203, p.738; 217, p.746 [16] 테르모필레 전투 이후 포키스는 텟살리아인들의 안내를 받은 페르시아군에 의해 나라 전체가 유린되었고, 병력을 제공해야 했다. 일부 포키스인들은 파르낫소스 산을 근거지로 삼아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헤로도토스, '역사'; VII권 218, p.746; VIII권 32~3, p.766; IX권 17 p.850; 31 p.861 [17] 그리스 연합군이 포위된 상황을 처음 전파한 것은 탈주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연합군은 정찰병을 보내 사실여부를 확인했다. 헤로도토스, '역사'; VII권 219, p.746~7 [18] 물론 상술했듯이 아테네 해군의 정비가 육군이 시간을 벌어준 것과 큰 상관관계가 있는지에는 많은 이견이 있지만 고대 그리스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이 상관관계를 완전 부정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19]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군을 상대로 한 지연전은 일반 병력으로 할 수 없다. 일반 병력으로는 압도적인 전력차를 확인한 순간 다 도망가버려 군이 와해될 것이 뻔하기 때문. 제2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전쟁 후반 강력한 소련의 대군에 맞서 지연전을 하던 독일군이 무장친위대와 국방군의 정예사단이었음이 한 예가 될 수 있다. 스파르타가 나이는 있지만 전쟁경험과 끈기가 풍부한 군인들을 데려간 데에는 상술한 이유도 있다고 할 수 있다. [20] 테르모필레를 지나면 사실상 평원이나 다름없어서 페르시아의 진격 속도는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지날 때보다 훨씬 빨랐을 것이다. [21] 물론 지휘관급이 다수 사망한건 맞아서 이후 스파르타는 뚜렷한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애초에 이 전투 이후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가 대승을 거두자 페르시아는 급히 후퇴했고, 약해진 페르시아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이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박살냈던 걸 생각하면 해당 전투 이전까진 스파르타가 딱히 할게 없기도 했다. [22] 단적인 예로 크세르크세스 왕을 무슨 아프리카 원주민 추장처럼 만들어놨다. 페르시아는 오늘날의 이란인데 이란은 아리아인(독일계 백인)의 원조이므로 인종상으로는 백인에 가까운데도 저렇게 묘사했다. [23] 물론 북유럽 신화 시점에서의 인격적으로 성장한 크레토스는 과거의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기에, 더 이상은 그 일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