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톤 전투 | ||
시기 | 기원전 490년 9월 12일 | |
장소 | 마라톤, 그리스 남부 아티카 | |
원인 | 이오니아 반란 이후, 아테네와 페르시아의 관계악화 | |
교전국 | 아테네 | 아케메네스 왕조 |
지휘관 |
칼리마코스 밀티아데스 |
다티스 아르타페르네스 |
병력 |
아테네군 9,000 ~ 10,000 명 플라타이아군 1,000 명 |
보병 25,000 명[1] 기병 1,000 ~ 2,000 명 |
피해[2] | 192명 | 6,400명 |
결과 | 아테네군의 승리 | |
영향 | 아테네 유산 시민층 입지상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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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C 49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1세의 1차 그리스 원정군과 아테네-플라타이아이 연합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맞붙은 전투이자 그리스군이 최초로 페르시아군과 야전에서 싸워 이긴 전투다.[3]
2. 전투 전 경과
이오니아 반란 때 아테네가 개입하여 명분이 생긴 다리우스 대왕은 이에 대해 응징을 결의하고 BC 492년에 마르도니우스의 지휘하에 원정군을 보내나, 폭풍우로 인해 함대의 절반을 상실하고 마르도니우스 자신도 트라키아 일대에서 부상을 입으면서 원정이 중지된다. 더 자세한 내용은 페르시아 전쟁 문서 참조.이후 다리우스 대왕은 BC 491년에 다시 사절단을 그리스 각지에 보내 복종의 의미로 흙과 물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는데, 여타 다른 국가들은 모두 이에 복종했지만 아테네는 이들 사절들에게 재판을 때리고 바위틈 속으로 던져버려 저항 의사를 표현한다.[4]
이에 다리우스 대왕은 재차 원정군을 보내 이오니아 반란 때 반란군을 도운 에우보니아 섬의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응징하고자 한다. 또한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후 그리스 정복의 거점 마련이란 목적도 있다고 한다.
이 원정군은 로도스, 사모스, 낙소스[5]를 거처 에우보니아 섬에 상륙, 7일 만에 에레트리아를 점령하고 아티카 반도로 기수를 돌려, 9월 1일에 마라톤 지역에 상륙한다.
이에 아테네는 스파르타로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나, 스파르타는 카르네이아 제전과 메세이나인들의 반란을 제압해야 한다는 이유[6]로 15일이나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했고,[7] 어쩔 수 없이 아테네는 마라톤에 먼저 가서 9월 3일 헤라클레이온이란 지역에 진영을 구축한다. 이후 에레트리아를 지원하러 움직였던 아테네 식민도시의 지원병들과 총동원령을 내려 아테네를 돕기로 결정한 플라타이아이인들 역시 마라톤에서 합류한다.
3. 전투
3.1. 양쪽 군대
페르시아 전쟁기 그리스군(左)과 페르시아군(右) |
9월 3일부터 9월 11일까지, 마라톤 일대에서 양군은 대치에 들어갔다.
아테네군은 대다수가 중장보병(호플리테스)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총 수효는 9천이었다. 이는 아테네 시민뿐만이 아닌 노예에게는 자유를, 외국계 자유민이나 해방된 노예들에게는 아테네 시민권을 제시해 가면서 모은 병력이다. 여기에 플라타이아이군 1천이 가세해 중장보병 1만의 전력을 보유했다.
아테네군의 총지휘관은 칼리마코스였고, 밀티아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 아리스티데스 등이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플라타아이아군 지휘관은 아림네스토스이다.
페르시아군은 대략 2만 5천의 육군과 600척의 함대를 마라톤 일대에 진출시켰다. 그러나 에레트리아 공성전 및 점령지와 진지에 일부 배치한 병력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손실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페르시아군의 편제는 크게 천인대(하자라밤)와 만인대(바이바라밤)로 구성된다. 궁병(탄바르바라)과 이를 엄호하는 방패병(스파라바라)으로 구성된 보병 바이바라밤, 그 외에 메디아인과 페르시아인으로 구성된 정예 창병(아르스티바라)과 사카족 도끼병(타카바라)으로 구성된 하자라밤이 서넛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 기병 2천을 보유하여 이를 다 합치면 대략 2만 5천 명이 된다.
그러나 11일 당일에 페르시아군은 일부 병력을 함선에 태워 아테네를 우회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며, 기병 전체와 보병 절반가량(1개 만인대)을 탑승시켜놓고 있었다.
페르시아군 지휘관은 다티스와 소 아르타페르네스이며, 이 중 아르타페르네스는 크세르크세스의 2차 원정군에도 참전한다.
결론적으로 볼 때 양군 모두 1만 내외였을 것으로 보이되, 페르시아군이 약간 더 많았을 가능성이 크다.
3.2. 병력 배치 및 전투
아테네와 페르시아는 바다에 수직으로 포진했다.[8] 병력 양에서 우세한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정예 보병들과 지휘관이 위치했고, 좌우익에는 궁병과 방패병으로 이루어진 일반 보병을 배치했다. 아테네는 이에 전열의 길이를 같게 하기 위해 보통 8열로 이루어지는 방진을 중앙 부분은 4열로 줄이고 그만큼 좌우로 페르시아군과 전열을 맞추어 포진했다. 플라타이아군은 최좌익에 위치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아테네군은 걸어서 전진하다가 페르시아군의 화살 공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200m 정도 거리서부터는 뛰어서 돌진해 맞붙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전투는 장시간에 걸처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때 중앙의 페르시아 정예 보병대는 상대적으로 얇은 아테네군 중앙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고, 아테네군 중앙은 훗날 소로스가 세워진 지역까지 후퇴한다. 그러나 페르시아군 우익이 플라타이아군과 아테네군의 좌익에 의해 무너져 내렸고, 이후 페르시아군 좌익도 마찬가지로 붕괴했으며, 그 후 아테네군은 밀고 들어온 페르시아군 중앙을 집중 공격해 격파하는 데 성공한다.
페르시아군 우익은 전열이 붕괴한 이후 지형에 대한 무지로 인해 후방의 대습지 방향으로 도주했다가 이후 쫓아온 아테네군에 전멸당했고, 페르시아군 중앙과 좌익은 함대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다. 아테네군은 이를 추격했지만 함대 정박지에서 벌어진 난전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함대가 출발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페르시아군 함선 7척 손실).
아테네군은 이 함대가 아테네로 우회해 공격에 나설 것이라 생각하고 서둘러 아테네로 돌아왔는데 이들은 중무장을 한 채로 30km 떨어진 아테네까지 3시간 만에 주파,[9] 간발의 차로 먼저 도착한 아테네군이 방어에 나서자 페르시아 함대는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아테네군은 192명의 전사자(플라타아이아인과 노예 제외)를 냈고, 페르시아군은 6,400여 명의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
마라톤 전투가 5천 명의 아테네군과 4천 명의 페르시아군 후미가 맞붙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10] 이 주장대로라면 페르시아군은 아테네 우회공격을 위해 승선한 상태였고, 남아있던 페르시아 후미가 숫적으로 우세해진 아테네군과 싸웠으며, 후미정리대까지 승선을 함으로써 비로소 전투가 완료된 것이라는 식이다. 그러나 현재의 전투 발생 추정지점은 페르시아군 정박지에서 깊숙히 들어간(그 사이에 습지도 하나 있다) 내륙지점인 데다 전투 직후 패주한 페르시아군 일부가 길을 잘못 들어 습지로 들어갔다가 전멸했다는 기록도 있어서 딱히 신뢰도 있는 주장은 아니다. 정박지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리라 보았던 과거의 전투 추정지점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 그저 '이설' 중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의의
마라톤 전투의 승리로 인해 페르시아의 1차 원정은 아테네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후 10년 뒤의 2차 원정이 있을 때까지 아테네는 안전하게 되었다.수적으로 밀려도 전술과 작전이 뛰어나면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증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아테네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하여 대단히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승리로 유산시민층을 중심으로 하는 중장보병의 입지가 높아졌다.[11]
그러나 페르시아는 포기하지 않았고, 10년 뒤의 2차 원정으로 아테네를 불태우는 데 성공한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렇게 크고 중요한 전투는 아니었다고도 볼 수 있다.[12] 본문에도 나오듯 거의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에게 굽히고 들어갔고 뻗댄 3개 도시국가들(에레트리아, 아테네, 스파르타)을 군사적으로 뭉개기 위해 온 것인데 에레트리아는 이미 박살냈고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해 아테네까지 뭉개놓았다면 거기서 더 나가봐야 스파르타만 남은 상황이었다. 여러모로 투르-푸아티에 전투와 비슷한 형상이다.[13]
그러나 마라톤 전투 바로 직전까지 그리스 지역의 수십 개의 폴리스 가운데 겨우 3개의 폴리스 만 항복을 거부하고 나머지는 전부 항복할 정도로 페르시아의 입지는 강력했지만, 마라톤 전투로 이런 입지를 부수고 2차 전쟁부터 본격적으로 그리스인들이 연합해 페르시아 제국과 맞서 싸워 최종적으로 승리를 가져오게된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결코 무시할 정도의 전투는 아니다
5. 후일담
- '마라톤'이라는 이름은 전투가 벌어졌던 들판에서 자라던 회향에서 유래했다.
-
질 것 같던 절망적인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의 전령 페이디피데스(Pheidippides)가 이 승전보를 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엄청난 거리를 달려 아테네에 승전보를 전한 뒤 숨을 거둔 것을 기리기 위해서
마라톤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 이야기는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이 근대 올림픽을 만들 때 지인 중 한 명인 프랑스인 문헌학자 미셸 브헤알(Michel Breal)이 신설종목으로
마라톤을 추천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페이디피데스의 일화를 감동적인 스토리로 각색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각색한 다른 이유로는 당시 유럽의 고민이 사회주의, 군국주의, 전체주의였기 때문에 마라톤이 위에서 나온 아테네군이 페르시아군의 상륙을 막기 위해 행군한 것을 기리기 위해 시작되는 것보다는 애국 청년의 죽음을 기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것이 나아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 마라톤 승전보를 알렸던 이 전령은 원래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놀랍게도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약 246km 거리를 2일 만에 주파했다고 한다. 하루에 123km를 뛰어서 이동한 것으로 현대 마라톤 완주 거리의 거의 3배에 달하는 구간을 뛴것이므로 정말 놀라운 체력이다. 이러고도 페이디피데스는 다시 마라톤 평원에서 뛰어서 아테네까지 돌아왔다. 애초에 그는 군연락병으로, 원래 그런 일을 하는 병사다. 다만 페이디피데스 본인한테도 쉽지는 않았는지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 헛것을 볼 지경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스파르타는 성벽도 필요 없었을 정도로 험준한 산악 지대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도중에 헛것을 볼 지경이었다는 말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오히려 그만큼 몸을 혹사했음에도 무사히 귀국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의 체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대단히 뛰어났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그리스군(!)은 곧바로 아테네를 방어하기 위해 36.75km 떨어진 아테네까지 33kg 완전 군장을 한 채 3시간 만에 주파(시속 12km)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 한편 올림픽 마라톤과 비슷한 이유로 아테네에서 스파르타까지 246km를 구간을 뛰었던 연락병 페이디피데스의 기록에 착안하여 Spartathlon 이라는 육상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1982년에 처음 개최되었을 시 36시간으로 주파에 성공하였고, 이후 거듭해서 성공하는 사람이 늘자 매년 그리스에서 열리는 울트라 마라톤 종목이 되었다. 현재 세계기록은 남자 19시간 55분 15초, 여자 22시간 35분 31초다.
- 이 전투로 인해 페르시아의 후예인 이란에서는 이 전투의 치욕을 잊지 않아서 마라톤을 보이콧한다는 속설이 있으나, 1956 멜버른 올림픽에 Ali Baghbanbashi가 이란 마라톤 선수로서 출전한 뒤,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8 서울 올림픽,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등에서 이란은 마라톤 종목에 꾸준히 얼굴을 비춰왔다. 참고 다만 이란이 개최한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 종목을 제외했다. 해외에서 하면 참가는 하지만 자국에서만큼은 열지 않겠다 정도인 듯.
- 야사로 마라톤 전투 당시, 뒤늦게 지원하러 온 스파르타군이 전쟁이 이미 아테네의 승리로 끝난 뒤라서 그냥 닭 쫓던 개신세가 되었는데 여기서 한 아테네 병사가 페르시아 병사 머리를 던지며 조롱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물론 야사이기에 사실인지 불명.
-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하면 에피젤로스라는 아테네 병사가 백병전에서 죽을뻔하자 부상을 입지 않았는데도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눈이 멀어버렸다고 한다. PTSD, 정확히는 전환장애가 기록된 사례로 후세에 추정된다.
- 300: 제국의 부활에서는 초반부에 잠깐 묘사된다. 역사와는 달리 막 상륙해서 교두보를 구축하던 페르시아군을 기습한 형태로 나온다.
[1]
고대 사료에서는 20만에서 60만까지 다양한 설이 있으나, 최근 개설서들은 대부분 2만 5천 정도로 추정한다. 이 중 보병 1만과 기병은 아테네를 우회공격하기 위해 승선한 상태였으므로 실제 전투에 참여한 것은 보병 1만 5천 정도다.
[2]
헤로도토스의 주장에 따른다.
[3]
그 이전에 그리스 계열 군대인 이오니아 반란군과 페르시아군이 붙었을 땐 야전에서는 매번 지기만 했다고 한다.
[4]
그 외에 저항의사를 표현한 유일한 국가는 스파르타로, 300에서 묘사되었듯 그 안에 얼마든지 있으니 알아서 가져가라면서 우물 안으로 던져버렸다.
[5]
에게해의 섬들
[6]
플라톤의 이 주장은 별도의 화폐를 사용했던 흔적과 금석학적 증거가 있다고 한다.
[7]
다만 플라톤의 주장과 별개로 스파르타는 전투가 불리하다 싶으면 종교적 핑계를 대며 발뺌하는 경우가 잦았다.
[8]
과거에는 바다에 수평으로 포진하지 않았을까 했지만 최근의 연구로는 바다에 수직이다.
[9]
참고로 아테네군의 군장은 약 30kg였다.
[10]
권터 블루멘트리트 저, 《전략과 전술》, 한울 출판사, 1994.ISBN 89-460-2163-2 94920.
[11]
하지만 그 입지는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페르시아 전쟁의 핵심이 된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에는 3단 노선 트리메라에서 노를 젓던 수군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12]
다리우스가 동원한 병력은 최대로 잡아도 3만 미만이었고, 실제로 페르시아가 승리하였더라도 워낙에 제한적인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였기 때문에 그리스 전체를 휩쓸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드 헨슨은 기껏해야 과거 페르시아에 우호적이었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후손들로 하여금
참주정을 부활시키는 정도로 페르시아가 만족하였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13]
서양을 공격해 온 동양의 군세를 막아내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의 규모 예상수는 적어지고 전쟁 자체의 의미도 축소되는 경향이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