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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
1978년 크라쿠프 역사 지구 Stare Miasto w Krakowie |
1978년 비엘리치카와 보흐니아 왕립 소금 광산 Królewskie Kopalnie Soli w Wieliczce i Bochni |
1979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 나치 독일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 (1940 ~ 1945) Auschwitz-Birkenau. Niemiecki nazistowski obóz koncentracyjny i zagłady (1940–1945) |
1980년 바르샤바 역사 지구 Stare Miasto w Warszawie |
1992년 자모시치 옛 시가지 Stare Miasto w Zamościu |
1997년 토룬 중세 마을 Średniowieczny zespół miejski Torun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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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말보르크의 독일 기사단 성 Zamek Krzyżacki w Malborku |
1999년 칼바리아 제브지도프스카, 마니에리스모 건축과 공원 단지 및 순례 공원 Kalwaria Zebrzydowska – manierystyczny zespół architektoniczny i krajobrazowy oraz park pielgrzymkowy |
2001년 야보르와 시비드니차의 자유 교회 Kościoły Pokoju w Jaworze i Świdnic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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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소폴란드 남부의 목조 교회 Drewniane kościoły Południowej Małopolski |
2004년 무스카우어 공원 (무자코프스키 공원) Park Mużakowski (Muskauer Park) |
2006년 브로츠와프의 백주년관 Hala Stulecia we Wrocławi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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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카르파티아 지역의 목조 체르크바 Drewniane cerkwie regionu Karpackiego w Polsce i na Ukrainie |
2017년 타르노프스키에구리 납, 은, 아연 광산과 지하수 관리 시스템 Kopalnia rud ołowiu, srebra i cynku wraz z systemem gospodarowania wodami podziemnymi w Tarnowskich Górach |
2019년 크제미온키의 선사 줄무늬 부싯돌 광산 Krzemionki pradziejowe kopalnie krzemien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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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유산 |
1979년 비아워비에자 삼림 지대 Białowieski Park Narodowy |
2021년 카르파티아 및 유럽의 기타 지역에 생육하는 고대 및 원시 너도밤나무 숲 Pradawne i pierwotne lasy bukowe Karpat i innych regionów Europy |
크라쿠프 Kraków Cracovia라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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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휘장 | |||||||
Cracovia urbs celeberrima Kraków miasto najwspanialsze 가장 멋진 도시 크라쿠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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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쿠프의 위치 | ||||||||
행정 | ||||||||
국가 |
[[폴란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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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 UTC+1 | |||||||
IATA | KRK | |||||||
주 | 마워폴스키에 | |||||||
하위 행정구역 | 18 구[1] | |||||||
인문환경 | ||||||||
면적 | 326.8㎢ | |||||||
인구 | 804,237명[2] | |||||||
인구밀도 | 2,461명/㎢ | |||||||
홈페이지 |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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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
[[무소속(정치)| 무소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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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체크 마이흐로프스키 Jacek Majchrowski (Jacek Majchrowski / 초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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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회 | ||||||||
12석 / 4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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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석 / 4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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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석 / 43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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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크라쿠프 역사 지구 |
영어 | Historic Centre of Kraków | |
프랑스어 | Centre historique de Kraków | |
국가·위치 | 폴란드 크라쿠프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8년[3] | |
등재기준 | (iv)[4] | |
지정번호 | 29 |
1. 개요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다음가는 폴란드 제2의 도시로서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이 도시의 기원은 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서 깊다. 크라쿠프는 전통적으로 폴란드의 학문[5], 문화, 예술[6]의 중심지였다. 또한 50여개의 다국적기업이 활동하는 폴란드 경제의 요충지며 마워폴스키에 주의 주도이다. 1040년 ~ 1596년에는 폴란드의 수도이기도 했다. 시 자체의 인구는 약 80만명으로서 폴란드 제3의 도시인 우치보다 인구가 약 15만명 많다. 1978년에 유네스코는 이 도시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하여 구 시가지 전체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그 밖에도 가까운 거리에 볼거리가 많아 폴란드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7]수도 바르샤바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도시 전체가 파괴되어 구시가지를 포함한 도심지 전체가 다 재건된 것인 반면, 크라쿠프는 폴란드 침공 당시 시장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Stanisław Klimecki)의 용감한 행동(그의 행적은 '역사' 장에 후술), 그리고 폴란드 총독부의 수도가 되었다는 점 덕분에 전면적인 파괴는 면할 수 있었다. 때문에 폴란드의 최고의 관광도시는 바르샤바가 아니라 이곳 크라쿠프이며, 세계의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폴란드 도시이다.
한편 이러한 관광도시의 이미지와는 대조적으로, 크라쿠프는 북부 이탈리아의 공업 지대[8]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대기오염이 심한 지역이기도 하다. 이는 공산 정권 시절 이 지역이 철강 지대로 집중 육성된 점도 한몫하지만 대부분의 난방이 석탄과 나무로 이뤄지고 있고 푸스타 분지의 존재로 인하여 바람이 잘 안 불기 때문이다. '크라쿠프에서는 창문을 열면 바깥을 환기시킨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크라쿠프 시청도 이 심각성을 잘 알고 있고, 집안에서 석탄과 나무를 태우는 가정에 벌금을 매기는 등의 정책을 도입하고 있다.
2. 언어별 표기
폴란드어 | Kraków[9] |
영어 | Kraków [ˈkrækaʊ, -koʊ] |
프랑스어 | Cracovie |
독일어 | Krakau |
스페인어 | Cracovia |
이탈리아어 | Cracovia |
라틴어 | Cracovia |
리투아니아어 | Krokuva |
헝가리어 | Krakkó |
러시아어 | Краков(Krakov) |
세르비아어 | Краков(Krakov) |
이디시어 | קראַקאָוו |
중국어 | 克拉科夫(Kèlā kē fū) |
일본어 | クラクフ |
문화어 | 크라쿠프 |
3. 지리
지리적으로는 폴란드 남부에 위치하며 비스와강에 접해 있다. 고풍스러운 유럽 문화를 간직한 도시이면서도 동시에 5개의 자연 보호구역을 가진 도시다. 생태학적인 가치 때문에 이들 구역은 법으로 보호받고 있다.비스와 강과 데브니키 다리. 출처 : 위키피디어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서안 해양성 기후(Cfb)를 띠므로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가장 추운 1월 최저 기온의 평균이 −5.3 °C, 가장 더운 7월의 최고 기온 평균이 24.2 °C 이다. 이는 서울의 -5.9 °C / 29.6 °C 에 비하면 겨울은 약간 덜 추우면서도 여름은 꽤 서늘한 기후다.
4. 역사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옛 수도 중 가장 유명한 도시이다. 근세 이후의 폴란드 역사가 바르샤바,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중세와 근세 초기 폴란드 역사는 대부분 크라쿠프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폴란드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수도로 기능했던 도시였으며, 수도의 지위에서 벗어난 이후 잠시 침체를 겪었다가 다시 중부유럽의 아름다운 도시로서 번영했다. 끔찍한 전쟁의 화마에서 어느 정도 비켜나 있었기에 바르샤바나 그단스크보단 현대사의 기구함이 덜하지만, 옛 바르샤바, 그단스크와 함께 폴란드의 잘나가던 시절을 상징하는 도시로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중세 폴란드의 수도였던 만큼 이 도시 자체의 역사와 중세 폴란드 역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항목에선 되도록 크라쿠프 자체의 역사를 서술하되 배경이 되는 중세 폴란드의 역사는 주석이나 항목링크로 보완한다.4.1. 도시의 건립과 초기 역사(4c ~ 1040)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다른 역사적인 도시들보다 훨씬 더 역사가 긴데, 크라쿠프의 바벨 언덕에 4세기경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크라쿠프의 건립과 관련하여 ' 바벨의 용' 전설이 전해진다.[10] 이 지역은 크라쿠스(Krakus)라는 왕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의 통치기, 바벨 언덕 아래 동굴에는 무시무시한 용(Smok Wawelski)[11]이 살고 있었다. 이 용은 매일 기어나와 집을 파괴하고 가축들을 잡아먹었는데, 이 용을 달래기 위해 왕은 어쩔 수 없이 용이 좋아하던 처녀들을 용에게 재물로 바쳤다. 그런 한편 전국의 용사들에게 용을 물리치는 자에게 큰 상을 주고 딸인 반다 공주와 결혼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많은 용사들이 용을 상대했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스쿠바(Skuba)라는 신발 제작공이 왕을 찾아와 양가죽과 유황을 부탁했다. 그는 유황을 양가죽에 넣고 용의 동굴 앞에 두었다. 용이 동굴에서 나와 이것을 잡아먹자, 엄청난 갈증과 고통이 엄습했다. 그래서 동굴 앞에 있던 강물을 허겁지겁 퍼마셨는데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그만 배가 터져 죽었다고 한다. 왕은 약속대로 신발장이에게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했고, 그 뒤 스쿠바는 왕의 이름을 따 크라쿠프라는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12]
다만 이 전설은 다른 버전이 있는데, 크라쿠스 왕에게 반다말고도 자신과 동명인 크라쿠스와 레흐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이 둘은 크라크 스쿠바처럼 유황이 가득 찬 양을 스모크에게 줘 동일하게 스모크를 퇴치하는데 성공하나 공적이 눈이 먼 크라쿠스가 형제 레흐를 죽였고, 아버지의 왕위를 이어받게 되지만 결국 나중에 해당 사실이 발각되어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반다 공주가 여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가 암시하듯 초기 이 마을은 평화롭지만은 않았는데, 현재의 해석으론 이 이야기의 용은 6세기 후반 이 일대를 침입했던 아바르인을 상징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어쨌든, 960년 경 폴란드 국가가 형성되기 전까지 크라쿠프는 서슬라브계 비스와 부족(Wiślanie)의 수도로 기능했고 짧은 기간 동안 대 모라비아 공국(833 ~ 약 907)[13]에 지배되기도 했다. 대 모라비아 왕국이 동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마자르족에 의해 파괴되자 크라쿠프는 잠시 보헤미아 공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 마을 또는 도시가 (현재까지 남아있는)역사서에 처음으로 크라쿠프라는 이름으로 기록된 것은 966년이다. 세파르딤 유대인[14] 여행자 이브라힘 빈 야쿱(Ibrahim ibn Yaqub)[15]은 일대기에 크라쿠프가 중요한 상업 중심지이면서 보헤미아 공작의 지배 하에 있었다고 서술했다.
960년 피아스트 왕조 초대 왕 미에슈코 1세에 의해 역사에 처음으로 폴란드 국가가 들어섰다. 미에슈코 1세는 재위기간 내내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였고,[16] 재위 말 980년 경 보헤미아와 전쟁을 벌여 크라쿠프와 그 일대의 소폴란드(마워폴스카, Małopolska) 지역도 손에 넣었다.[17] 폴란드의 영토가 된 크라쿠프에는 수많은 벽돌건물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왕궁이 될 바벨 성도 이때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들도 올라왔다. 1034 ~1039년[18] 이교도 반란과 보헤미아의 침입으로 폴란드가 혼란에 빠진 사이 수도이던 포즈난이 파괴되자, 혼란 중 쫓겨났다가 돌아온 카지미에시 1세(Kazimierz Karol I, Casimir I the Restorer)[19]는 1040년에 파괴를 면했던 크라쿠프를 왕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4.2. 폴란드의 수도 (1040 ~ 1596)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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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8년부터 1320년까지 폴란드가 분열되어 극도의 혼란기로 떨어지는 바람에 도시는 여러 공작들에 의해 뺏고 뺏기는 쟁탈의 장이 되었다. 도시를 차지한 공작은 크라쿠프 공작이자 폴란드의 고공으로서 폴란드를 대표하는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이 타이틀을 얻기 위해 공작들은 이 도시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퉜다.[20] 그러던 1241년, 폴란드까지 침공한 몽골군은 크라쿠프 근방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무방비상태가 된 도시를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했다.[21] 도시는 1257년 이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재건되었고 마그데부르크 법에 의거해 도시 특권까지 부여받았지만 단 2년 뒤 1259년 폴란드를 다시 침공한 몽골군에게 또다시 파괴되었다. 1287년 몽골군은 3번째로 폴란드를 침공했지만 원정이 실패함에 따라 크라쿠프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폴란드가 1300 ~ 1306년까지 보헤미아 왕국 프르세미슬 왕조와 동군연합으로 묶였기 때문에 크라쿠프도 잠시 보헤미아 왕국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는데, 이때 체코인, 독일인들이 도시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동군연합이 끝나고 새로 즉위한 보헤미아 룩셈부르크 왕조의 얀 루쳄부르스키는 폴란드 고공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의 사주로 독일인이었던 크라쿠프 시장[22] 알베르트가 1311년 도시 내 체코인들과 독일인들을 선동해 당시의 고공이던 브와디스와프 1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도시를 차지하고 보헤미아와 병합하려 했지만 1년에 걸친 포위 끝에 결국 진압되었고 도시내에서 독일인들의 영향력은 크게 줄었다.
1320년 폴란드 왕국의 혼란이 끝난 뒤 폴란드가 카지미에시 3세(이하 카지미에시 대왕으로 칭함)의 통치 아래에서(1333~1370년) 안정과 번영을 누릴 때, 크라쿠프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왕의 거처였던 바벨 성이 거대하게 증축되었고 성의 나무부분이 모두 석재로 바꾸어졌다. 또한 이 시기 중앙 광장에 지금까지 남아있는 랜드마크들이 세워졌다. 기존에 있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모승천성당이 독특한 폴란드 고딕양식으로 재건되었고 1358년엔 중앙 광장의 목재로 지어진 시장이 고딕양식의 직물회관으로 탈바꿈했다. 이 직물회관에서 상인들이 회의를 하거나 각종 업무를 보았고 크라쿠프와 중부유럽 일대의 직물, 그리고 근처의 비엘리츠카 암염광산에서 대량으로 산출되던 소금이 동방의 비단, 향신료 등과 교환되었다.[23] 1364년에는 크라쿠프에 프라하에 이은 중부유럽 두번째 대학교인 크라쿠프 학당[24]이 세워졌다. 이 무렵 약 1370년 경, 크라쿠프는 한자동맹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다만 한자동맹과는 매우 느슨하게 연결되었는데, 회원비를 내지도 않았고 동맹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도 않았다고 한다.[25] 한자동맹에서의 위치와는 별개로 14세기 후반~15세기 초, 크라쿠프는 중부유럽의 주요 무역 중심지였고 수많은 장인들이 찾아와 길드를 세웠다. 또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동군연합을 이루게 된 뒤, 강력한 국가의 수도로서 예술 과학 분야의 많은 신문물이 이 도시로 들어왔다. 14세기 말 크라쿠프는 3,500명의 독일, 체코인을 포함 인구 15,000명을 자랑하는 중부유럽의 대도시였다. 이 시기 크라쿠프는 전형적인 중세 말 유럽 대도시의 성장 양상을 보여준다.
특이하게도, 당시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를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던 흑사병(대략 1346~1353까지 유행)이 크라쿠프에는 큰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이것은 폴란드의 다른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대략 다음과 같은데 당시 폴란드의 왕이었던 카지미에시 대왕이 현명하게 국경을 봉쇄하고 여행자들의 이동을 막았다는 점, 당시 폴란드의 인구밀도가 매우 낮았고 무역이 지중해 연안이나 발트해, 북해 연안보다 적었다는 점, 그리고 (확실치 않지만) 폴란드인들이 고양이를 싫어하지 않아 쥐가 적었다는 점 등이 있다. 한편 흑사병 유행기간동안 유럽 전역에서 사회 혼란을 조장한다는 의심을 받고 끔찍한 박해를 받던 유대인들은 이 시기 유대인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던 카지미에시 대왕의 폴란드로 대거 이주했다. 크라쿠프에도 수많은 유대인들이 들어왔으며 이들은 크라쿠프 시가지 남쪽의 왕의 이름을 딴 '카지미에시(Kazimierz)'[26]라는 구역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중순부터 크라쿠프는 폴란드가 르네상스를 받아들이는 창문으로서 기능했다. 이 시기부터 1596년까지 크라쿠프에는 수많은 이탈리아 예술가들이 찾아와 도시는 문화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프란체스코 피오렌티노(Francesco Fiorentino), 산티 구치(Santi Gucci) 등 이탈리아의 화가들이 도시로 들어와 도시 곳곳에 자신의 작품을 남겼고 도시 자체도 수많은 지성인과 예술가들을 배출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이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에서 공부한 코페르니쿠스(1473~1543)였다. 독일 출신의 예술가도 종종 들어왔는데, 뉘른베르크 출신의 바이트 슈토스(Veit Stoss)는 1489년 성 마리아 성당의 정교하기 그지없는 대제대(High Alter)를 완성시켰다. 1500년에는 인쇄소가 등장해 수많은 인문저작들이 발간되었다.
1507년 왕으로 즉위한 지그문트 1세는 1499년 화재로 파괴된 바벨 성을 기존의 토대 위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피렌체의 건축가였던 바르톨로메오 베레치(Bartholommeo Berecci)의 지휘 하에 약 30년에 걸쳐 성을 아름답게 다시 지었다. 이 성에는 17세기 중반 바로크 양식의 궁전도 들어섰는데, 이 때문에 여러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이 밖에도 미처 서술하지 못할만큼 많은 문화적 성장이 이루어 졌으며 중앙 광장은 여전히 상인들로 붐볐다. 현재 크라쿠프에 남아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주요 랜드마크들의 원형은 대부분 14~16세기가 원형이다. 카지미에시의 유대인 공동체도 왕국의 관용 아래 번영했다. 이 시기 카지미에시에 지어진 시나고그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들로서 남아있다. 하지만, 약 300여년의 번영을 누리며 중부 유럽의 보석으로 빛나던 크라쿠프에 점차 몰락의 그림자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4.3. 명목상의 수도 (1596 ~ 1795)
1569년 연방이 결성되었을 때, 크라쿠프는 남쪽으로 좀 많이 치우쳐 있었다. 바사 가문의 지그문트 3세가 연방의 왕이었던 시기, 연방은 1592년부터 1599년까지 스웨덴과 동군연합을 이뤘는데, 폴란드 공주 출신이었던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27]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로 자란 지그문트 3세는 루터파 국가였던 스웨덴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특히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으로부터 스웨덴 왕위를 위협받았다. 바르샤바는 크라쿠프와 빌뉴스 사이에 있어 연방 내 주요도시들과 연결성이 좋았고 지그문트 3세가 스웨덴의 상황에도 재빨리 대처해야 되었기에, 1595년 바벨 성에 불이 난 것을 계기로 1596년 지그문트 3세는 왕궁을 바르샤바로 옮겼고 1611년부터 계속 거기서 거주했다. 정부기관들도 왕궁을 따라 바르샤바로 이전하면서 크라쿠프는 실질적인 수도로서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공식적인 수도는 폴란드 2차 분할 (1793년)때까지 크라쿠프였고 왕의 대관, 장례식 등 각종 왕사(王事)는 크라쿠프 바벨 대성당에서 시행되었다.수도의 기능을 빼앗긴 뒤, 크라쿠프는 천천히 쇠락하기 시작했다. 1652년 두 차례의 재앙이 도시의 쇠락을 가속화했다. 1652년 도시에선 페스트가 번져 수천명이 사망했고 같은 해 큰 홍수(문자 그대로의 의미)까지 발생해 도시를 파괴했다. ' 대홍수' 시기 폴란드 상당부분이 루스 차르국군과 스웨덴군에게 점령당할 때, 크라쿠프도 1655년 스웨덴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도시는 약탈당했고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조금씩 폐허가 되어가던 바벨 성도 이 점령으로 많이 부서졌다. 18세기 초 대북방전쟁 때 크라쿠프는 1702년 다시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에 함락되었고 1707~1710년까지 역병이 또 발생하여 수만명이 죽었다. 173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때는 러시아 제국군에게 점령당했다. 17~18세기동안 크라쿠프보더 더 많이 쟁탈의 장이 되었던 바르샤바는 수도로서 기능했기에 재건의 기회를 많이 부여받고 점점 더 아름다워졌지만 크라쿠프는 빠르게 재건되지 않았다. 폴란드 분할 직전에 이르기까지 크라쿠프의 이야기는 많지 않다.
1794년, 폴란드 민족에게 크라쿠프가 가지는 중요성을 다시 각인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2차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인이 분노에 빠졌을 때, 미국 독립전쟁에서 돌아와 연방군의 중장으로 재직 중이던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는 러시아군이 잠시 크라쿠프를 빠져나가자[28] 3월 23일 크라쿠프 중앙 광장의 직물회관 앞에서 봉기를 선언했다.(코시치우슈코 봉기) 곧 6,000여명의 봉기군을 모집한 그는 바르샤바로 진격을 개시했고 4월 4일 크라쿠프 근방 라츠와비체(Racławice)에서 4,000의 러시아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로 인해 봉기는 연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러시아군이 빠르게 대처에 나서고 프로이센의 지원까지 이어지면서 봉기는 실패하고 만다. 코시치우슈코 본인도 마치에요비체 전투에서 패해 러시아군에 사로잡혔다.[29] 봉기가 진압된 뒤 1794년 6월 15일 프로이센군이 도시로 들어왔다. 이들은 곧 바벨 성의 왕실 보물고도 점령했고 보물들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지시하에 비밀리에 베를린 왕궁으로 옮겨졌다. 180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폴란드 왕들의 레갈리아[30]를 모두 녹여 금화로 만들어 폴란드의 보물을 훼손했다. 따라서 현재 남아있는 폴란드의 레갈리아는 모두 복원품이다. 다시 돌아와서, 봉기에 놀란 주변 3국은 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연방을 지도에서 지워버렸고 크라쿠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귀속되었다.
4.4. 오스트리아의 지배 (1795 ~ 1918)
나폴레옹 전쟁이 전 유럽을 휩쓸때, 구 연방영토의 폴란드인 다수 거주지역에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고, 공국이 오스트리아에 속한 폴란드 영토를 일부 회복함에 따라 1809년 크라쿠프도 공국에 속한 도시가 되었다. 나폴레옹이 패배한 후, 빈 회의에 따라 바르샤바 공국 대부분이 러시아와 강제로 동군연합으로 묶인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넘어갔지만, 크라쿠프는 부분적인 독립국으로서 1815년 약간의 근교 지역과 함께 크라쿠프 자유시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호령인 가운데 자유시는 상당한 자치를 누렸지만, 이후 수차례 폴란드 독립운동의 중심으로서 기능했다. 폴란드 전역을 휩쓴 1830년 11월 봉기 때 크라쿠프는 러시아의 영향에 있지 않아 봉기 현장이 되진 않았으나,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무기를 밀반입하는 창구로서 입헌왕국을 크게 도왔다. 이 때문에 크라쿠프의 행위에 분노한 러시아의 요구로 이 도시 또한 자치가 크게 제한되었다. 경찰은 오스트리아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시민들이 뽑은 시장은 주변 3국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당연히 시민들의 분노는 커져갔고, 1846년 2월 20일 자유시의 주권을 넘어 공화국의 형태로 나라를 되찾고자 공화주의자 귀족, 지주, 중산층을 중심으로 크라쿠프 봉기가 일어났다. 도시의 봉기가 성공하면 또다시 폴란드 전역에 봉기가 퍼질 것으로 생각한 봉기군은 도시의 정치가였던 얀 티소프스키의 지휘 하에 오스트리아와 맞섰다. 하지만 초급 장교들이 이끌던 11월 봉기와 달리, 크라쿠프 봉기군의 지원자들은 훈련되지 않았고 무기도 형편없었다. 결국 크라쿠프 근교에서 벌어진 그도프 전투(Battle of Gdów)에서 참패했고, 봉기의 지도층이던 귀족, 지주들에 불만이 많던 근교의 농노들도 오스트리아를 도와주면서[31]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봉기 진압 후 1846년 11월 16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협약을 맺어 자유시를 없애버리기로 했고 결국 자유시는 오스트리아의 구성국인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Kingdom of Galicia and Lodomeria)의 일부로서 크라쿠프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제국에 편입되었다. 도시의 정치적 입지가 줄어드는 가운데, 1850년 대규모 화재까지 도시를 덮쳐 약 10%의 시가지가 전소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를 지나고 나서 크라쿠프는 외세의 지배를 받고 있었음에도 제 2의 전성기라고 할 만큼 다시 번영하기 시작했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내에서 점점 끓어오르던 민족주의의 위협에 시달렸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867년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결성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재탄생했다. 제국은 헝가리를 독립시킨 것 뿐 아니라 보헤미아, 갈리치아 등 시스라이타니아로 설정된 영토에 향상된 자치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갈리치아의 크라쿠프도 예전만큼은 못하지만 광범위한 자치를 부여받게 되었다. 시 정부와 의회, 학교에선 다시 폴란드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러시아령 폴란드나 독일령 폴란드에선 상상하기 힘든 특혜였다. 크라쿠프는 나라 잃은 폴란드 민족의 문화적, 예술적 상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많은 폴란드인들이 모여들어 크라쿠프 황금기 시절의 유산들을 도시에 모아두었고 예술가와 학자들이 이곳에 거처를 두고 활동했다.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도 이 도시에서 다시 전개되기 시작했다. 후에 폴란드 군단을 이끌며 독일과 오스트리아 편에서 러시아와 맞서 싸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오스트리아의 묵인 하에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두고 세력을 불렸다.
자치의 기간 동안 도시는 새롭게 단장했다. 그간의 쇠퇴, 1850년의 화재로 말미암아 도시의 시가지 상당부분은 노후하고 낡은 건물들, 폐허로 채워져 았었다. 시 정부는 도시의 낡은 부분을 새롭게 개축했고 새로 칠을 하거나 당시의 건축양식으로 건물을 올리기도 했다. 너무 낡거나 도시의 기능 향상을 가로막는 건물은 헐어버리기도 했다. 낡아서 점차 버려져가던 직물회관도 이때 깔끔하게 재건축되었다. 도시는 다시 아름다워졌다. 현재 크라쿠프의 구시가는 이때 새단장한 거리가 원형이며, 거리를 걷다 보면 적당히 오래되었으면서도 깔끔하게 잘 조성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밖에도 1901년 상수도 시스템이 도입되었고 전차가 개통되며 현대적인 도시기능이 추가되었다. 근교에는 크라쿠프 요새가 건설되어 도시의 방어력을 증대시켰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제였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그의 재위 기간동안 크라쿠프를 여러 번 방문했는데, 이때마다 자치를 부여해 준 것에 감사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제1차 세계 대전 기간 중에 크라쿠프는 1914년 겨울 러시아의 공격을 받았다. 시 정부는 많은 시민들을 모라비아 변경백국으로 대피시켰지만, 전투는 대부분 새로 지은 크라쿠프 요새 주변에서 치러졌고 다행히 도시에 포탄이 쏟아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1918년 11월 3일, 전쟁을 견디지 못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항복하면서 도시에 주둔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은 떠났고 크라쿠프는 다시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4.5. 전간기와 2차 세계대전 (1918 ~ 1945)
폴란드 독립과 함께 크라쿠프도 다시 폴란드의 영토가 되었으며 폴란드의 주요한 도시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 시기 크라쿠프에도 유대인 인구가 크게 늘었는데, 많은 시나고그들이 새롭게 지어지고 시오니즘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도시도 발전했다. 1930년 바벨 성 박물관이 오픈했고 1931년에는 크라쿠프 필하모니가 생겨났다. 인구도 늘어 1910년 15만이었던 인구는 전쟁 직전까지 약 26만으로 늘었고 그 중 대략 4분의 1인 68,000명이 유대인이었다.1939년 9월 6일 독일 국방군이 크라쿠프에 입성하기 직전, 당시 크라쿠프의 시장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클리메츠키(Stanisław Klimecki)[32]는 용감한 행동으로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막았다. 그는 도시로 진격해오는 독일군 사령부에 직접 찾아가 도시는 무방비 상태이므로 자신이 인질이 될 테니 도시를 파괴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덕분에 크라쿠프는 나치의 침공 중에 폴란드 내에서 이례적으로 파괴를 면한 주요 도시가 될 수 있었다. 나치의 점령 뒤 크라쿠프는 11월 4일 폴란드 총독부의 수도가 되었다. 총독부는 독일의 전쟁수행을 위한 공급기지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나치는 도시의 인프라를 파괴할 이유가 없었다. 총독 한스 프랑크(Hans Frank)는 재임 중 전쟁 전에 마련한 계획에 따라 크라쿠프를 독일의 전쟁수행을 위한 기지로서 개발하기까지 했다.
나치는 이 도시와 게르만족의 연결성을 찾아 헤맸고 끊임없이 도시를 독일 민족의 도시로 바꾸려 했다. 도시 시설의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나치는 도시의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게슈타포 크라쿠프 지부의 장으로 새로 임명된 브루노 뮐러(Bruno Müller)는 폴란드 엘리트 제거 정책의 일환으로 11월 6일 '존더악티온 크라카우(Sonderaktion Krakau, 크라쿠프 특별작전)'를 실행했다. 바르샤바 대학과 더불어 폴란드 최고의 대학이던 크라쿠프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의 교수들과 학자 그리고 이들을 다시 조직하고 이끌던 '전임'시장 클리메츠키 박사[33]까지 184명을 야기엘론스키 대학교(Uniwersytet Jagielloński)의 본관인 콜레기움 노붐(Collegium Novum)에 불러모은 뒤, 총독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학기를 실행했다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이들을 현장에서 체포하고 작센하우젠 집단수용소로 보냈다.
너무나 스케일이 큰 사건이었기에 세계의 지성계에 이 사실이 널리 알려졌고 바티칸 사람들이 국제적인 항의를 이끈 끝에 체포된 사람들 중 클리메츠키를 포함해 40세 이상의 교수 101명이 3개월만에 풀려났다. 이 기간동안 12명의 나이 많은 교수들이 수용소의 끔찍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게슈타포는 풀려난 이들도 차례차례 다시 체포해 크라쿠프 근교의 숲에서 살해하였다.[34] 영웅적인 행동으로 도시를 보존하고, 교육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클리메츠키 역시 1942년 12월 11일 처형되고 만다.[35] 살아남은 교육자들은 1942년 '지하 대학'[36]을 설립해 학생들을 계속 가르치며 나치에 저항했다. 크라쿠프 지하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생 중 하나가 나중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는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37]였다.
한편 다른 폴란드 내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크라쿠프의 유대인에게도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1940년 4월 총독 한스 프랑크는 수도인 크라쿠프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인종적으로 깨끗해야' 한다며 도시의 유대인들을 쫓아낼 계획을 실행했다. 자발적으로 도시를 떠나는 유대인들은 짐을 챙겨갈 수 있게 했고 이에 따라 23,000명의 유대인들이 도시를 떠났다. 5월에 총독부는 아직 떠나지 않은 유대인들을 노동자 유대인과 그 가족 16,000명만 남기고 모두 강제 추방했다. 1941년 3월에 크라쿠프 관구의 통치자였던 오토 베히터(Otto Wächter)의 지시에 따라 크라쿠프 게토가 생겼다.
원래 3,000명의 유대인이 살던 지역에 크라쿠프에 남아 있던 16,000명의 유대인들을 몰아넣었다. 방 하나를 다섯명이 넘는 사람들이 써야 했고 하루 식량 배급은 바르샤바 게토와 마찬가지로 187kcal로 극히 적었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질병과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속출했다. 총독부가 크라쿠프 주변의 유대인들도 지속적으로 이곳 게토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인구는 곧 2만 명이 넘게 되었고 과밀은 심해져 갔다. 1942년 5월 수용소로의 첫 이송이 시작되어 11,000명의 유대인이 베우제츠 절멸수용소(Bełżec extermination camp)로 보내졌다. 1943년 3월 13일에는 SS 해골부대[38]의 하급돌격대장(Untersturmführer, 소위에 대응) 아몬 괴트(Amon Göth)의 지휘하에 끔찍한 게토 '정리(liquidation)'가 이루어졌다. 그는 일할 수 있는 유대인 8,000명을 자신이 건설을 감독하던 프와시프 노동수용소(Płaszów labor camp)로 보냈고[39] 일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2,000명의 유대인들을 게토의 거리 위에서 그자리에서 쏴죽였다. 남은 유대인들은 전부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아몬 괴트로부터 1,200명의 유대인을 구해낸 오스카 쉰들러(Oskar Schindler)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크라쿠프 법랑공장[40]의 공장장이던 그는 크라쿠프가 나치에 점령되었을 때 한 밑천을 잡아보고자 이곳에 온 사업가였다. SS 친위대에게서 유대인 노동력을 공급받던 그는 돈을 밝히는 사업가였지만 크라쿠프 게토가 형성된 이후 그는 의도치 않게 게토에서 굶주리던 그의 1,000명에 달하는 유대인 노동자들의 식량 공급자가 되었다. 게토의 참상을 알게 된 그는 점차 유대인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1943년 게토가 소거되자 그의 노동자들도 공장에서 2.5km 떨어진 아몬 괴트의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괴트가 쉰들러의 공장도 자신의 수용소 안으로 넣으려 하자 쉰들러는 인맥과 뇌물로 이를 막아냈다. 그런 뒤, 괴트를 설득해 공장 근방에 소규모 캠프를 세워 노동을 견디기 힘들어하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450명의 유대인을 관리하며 이들이 무작위로 처형당하는 것을 막아주었다.[41]
1944년 말 소련의 진격이 빨라지자 나치는 전선과 가깝던 노동수용소들을 폐쇄하고 제소자들을 모두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로 보내기 시작했다. 프와쇼프 수용소의 제소자들도 아우슈비츠로 보내질 위기에 처했고 아몬 괴트는 이 작업에 엄청난 열의를 보였다. 그러자 쉰들러는 자신의 고향인 주데텐란트 내 브륀리츠(Brünnlitz)에 있는 자신의 공장을 운영하는데 유대인들이 필요하다며 사재를 모두 털어 아몬 괴트와 베를린의 고관들을 매수한 뒤, 그 유명한 ' 쉰들러 리스트'[42]에 따라 그의 공장에서 일하던 약 1,000명의 노동자들과 율리우스 마드리치(Julius Madritsch)[43]의 직물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60명을 구해냈다. 특히 행정착오로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300명의 여성들은 구해내기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새 공장으로의 이송은 직통으로 이루어지진 않았는데, 쉰들러의 노동자들은 그로스-로젠 수용소에서 격리되어 각종 위생검사를 받은 뒤 브륀리츠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로스-로젠에 시설이 부족하자 수용소측에선 300명의 여성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버렸다. 아우슈비츠에서 검사를 받으라고 보낸 것이었지만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이 여성들을 가스실로 보내려 했다. 쉰들러는 비서를 보내 온갖 암시장 물품과 다이아몬드까지 공여한 끝에 이들을 모두 구해냈다. 그는 종전까지 남은 재산으로 이들을 끝까지 보호해 주었다.[44]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는 말년을 가난하게 보냈고 1974년 사망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그의 유해를 예루살렘의 성스런 시온 언덕에 묻어주었고 1993년엔 그와 그의 아내[45]를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the Nations)'으로 선정해 불멸의 명예를 안겨 주었다.
전쟁 기간 중 파괴는 면했지만 68,000의 유대인 중 대부분이 사망했다. 1945년 1월 17일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크라쿠프는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4.6. 전후 (1945 ~ )
크라쿠프 인구추이 [2000-201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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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758,71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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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
756,62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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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
756,18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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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
761,06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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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
779,11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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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정부 시절 믿어지던 크라쿠프의 해방에 관한 신화가 있다. 폴란드의 독일군들은 자신들이 떠나갈 때, 폴란드 도시의 상당부분을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후퇴했다. 하지만 크라쿠프는 그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반 코네프[46]의 천재적인 작전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코네프는 독일군의 예상과는 달리 서쪽에서 도시를 공격했고 패닉에 빠진 독일군이 미쳐 도시를 파괴하지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빠져나오는 바람에 도시가 온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인민정부 시절 크라쿠프 공식 가이드에도 이렇게 기술되어 있었고, 이것이 사실인 것처럼 믿어졌다. 하지만 냉전 후 다시 조사한 결과, 도시가 온전했던 건 이런 영웅적인 이유가 아니었다고 한다. 독일군이 후퇴할 시간은 충분했고, 당시 독일 본토였던 슐레지엔 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독일군은 오로지 전략적인 움직임에만 관심을 보였기에 도시를 파괴하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해 도시에 지뢰를 여럿 매설했지만 이것들 또한 도시의 전면적인 파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도시 해방 후 시내에 세워졌던 코네프의 동상은, 냉전 후 사실이 알려지자 1991년 철거되었다.
인민정부의 통치 하에서 크라쿠프에는 한가지 큰 변화가 생겼는데, 도시 근교에 폴란드 최대의 제철공장이 생긴 것이었다. 크라쿠프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대규모 공장이 생긴것에 대해서, 인민정부가 일부러 도시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이미지를 지우고 노동자 도시의 이미지를 씌우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인식되기도 했다. 실제 의도가 어떻든 공장은 크라쿠프의 경제력을 크게 향상시켰고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인구가 크게 성장했다. 전쟁 직전 26만이던 인구는 1974년 66만명으로 불어났다. 늘어나는 인구와 제철소의 노동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도시 외곽 노바 후타(Nowa Huta)에 새로운 공산주의식 도심이 깔끔하게 조성되었다. 하지만 크라쿠프의 다른 외곽지역은 마구 지어올린 성냥갑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한편, 종교적으로는 큰 경사가 일어났다. 1978년 크라쿠프 추기경 카롤 보이티와가 455년만에 비 이탈리아인으로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되었다. 교황은 이후 폴란드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미친다.
전후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남은 시가지는 도시의 큰 자산이 되었다. 1978년 유네스코는 바벨 성을 포함한 크라쿠프의 구시가지 전체를 그 엄청난 역사성을 인정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인민정부의 통치기 제한된 동서방 교류 때문에 빛을 드러내지 못했던 크라쿠프는 냉전이 끝나자 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 중 하나가 되었다. 현재 크라쿠프는 폴란드의 명실상부한 문화 수도로서 세계 각지에서 매년 약 1,000만명의 사람들이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느끼러 찾아온다. [47]
5. 관광
상술했듯 크라쿠프는 폴란드 최대의 관광도시이다. 하지만 중부유럽의 다른 관광지들에 비하면 인지도가 살짝 떨어지는 편이라 여행,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면 프라하나 부다페스트는 알아도 크라쿠프는 모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유럽 전체를 짧은 시간(보통 3주)에 여행하려는 것이 아닌, 중~동부 유럽을 여행하고자 하는 관광객이라면 크라쿠프는 꼭 일정에 넣어야 할 도시다. 크라쿠프는 하루를 꼬박 걸어야 다 둘러볼 수 있는 넓은 구시가지를 가지고 있고 도시 남쪽에는 유럽 최대규모의 유대인 문화 구역이 있다. 또한 도시 근교에도 관광지가 많기 때문에 크라쿠프 여행은 최소 1박이 필요하고, 볼것 다 보려면 2박도 부족하다.5.1. 시내
- 바르비칸&성 플로리안 문
바르비칸은 일종의 외성으로 도시의 주 성벽에서 바깥쪽으로 떨어져 나와 적들의 주 성벽, 정문 공격을 어렵게 해 방어의 효율을 높이는 역할을 했다.[48] 중세말~근세 초 유럽의 요새화가 잘 된 도시들은 대부분 바르비칸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재까지 원형이 이렇게나 잘 보존 된 것은 크라쿠프가 유일하다. 현재의 것은 약 15세기 중반 개축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폴란드의 축성 양식을 잘 보여준다. 소정의 입장료를 내면 들어가 구경할 수 있다.
성 플로리안 문은 바르비칸 바로 뒤에 있는 구시가지의 북쪽 정문으로 성문 양 옆으로 과거 도시를 방어하던 성벽이 조금 남아 있다. 바르비칸과 성 플로리안 문은 크라쿠프에 도착하면 만나게 될 첫 관광포인트로 크라쿠프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 중앙 광장&직물회관(수키엔니체,Sukiennice. Cloth Hall)
유럽의 도시들은 중심부의 광장을 구심점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크라쿠프에도 역시 그런 광장이 있다. 구시가의 중심부에 있는 중앙 광장은 유럽의 여러 광장들 중에서도 가장 큰 축에 속해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광장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넓은 광장이다. 주변에는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여럿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크라쿠프 여행의 시작과 중심이 될 만한 장소다.
중앙의 건물은 직물회관으로 과거 크라쿠프가 중부유럽의 무역 중심지로서 번영했음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1358년 고딕양식으로 지어졌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개축한 끝에 현재는 1870년 리모델링한 것으로 남아있다. 1층은 기념품시장, 2층은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뒷편의 시계탑은 시청 시계탑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시청건물이 달려 있었지만 19세기 중반 도시를 재단장하는 과정에서 구 시청사는 시의회가 철거했다. 시계탑도 철거하려 한 것을 크라쿠프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청원한 끝에 남겼다고 한다.
광장 주변, 구시가 곳곳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다. 폴란드에선 아이스크림을 로디(lody)라고 하는데 아주 맛이 좋으므로 크라쿠프에 갈 일이 있다면 한번쯤 맛을 보자. 폴란드 아이스크림은 도대체 뭘 넣었는지 크라쿠프 뿐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파는 것도 아주 맛이 좋고 가격도 저렴하다. 여름철 폴란드를 여행하는 여행객이라면 아주 아이스크림을 달고 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성모승천 성당은 독특한 폴란드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특히 높이가 서로 다른 2개의 첨탑이 특징적이다. 성당 내부에도 12세기~19세기의 유물들이 있으며 내부는 여전히 푸른색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나타낸다. 내부의 성상들은 전부 목조품에 금칠을 한 것이다.[49]
이 성당의 첨탑에서는 매시간마다 나팔수가 나팔을 부는데, 황당하게도 잘 연주하다가 중간에 연주가 끊긴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과거 몽골이 쳐들어왔을때 모두 혼비백산하는동안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경보나팔을 울렸던 한 나팔수를 기리기 위함이다. 그는 결국 활에 목이 꿰뚫려 사망했고, 연주가 끊기는 지점은 그가 사망한 지점이다.
- 바벨 성
구시가지의 남쪽 끝, 비스와 강에 면한 곳에 바벨 성이 있다. 바벨 언덕 위에 솟아있는 바벨 성은 예로부터 크라쿠프의 중심이었고 오랜기간 동안 폴란드의 중심이기도 했다. 크라쿠프의 첫 마을이 이곳 바벨 언덕에 생겼으며 이 언덕을 중심으로 도시는 확장해 나갔다. 11세기 초에는 왕궁이 생기고 성벽이 둘러쳐져 바벨 성의 원형이 되었다. 1499년 성이 화재로 크게 파괴되자 16세기 초 지그문트 1세는 성을 기존의 토대 위에 최신 건축양식인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했고 17세기에는 바로크 양식의 궁전도 지어졌다. 따라서 현재 바벨 성은 중세 폴란드 성의 모습에 르네상스양식, 바로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는 독특한 성이다.
이 곳의 바벨 대성당에는 역대 폴란드 왕들의 영묘가 있고 성당 입구에는 역사 장에서 상술했듯 ' 바벨의 용'의 것이라고 믿어지는 뼈 세 점[50]이 쇠사슬로 걸려 있다.[51] 바벨 성은 현재 국립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 내부에는 폴란드 중~근세의 갑옷, 검, 초상화 등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성에서 언덕 아래 동굴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도 있는데 이 통로를 나오면 재미있게 생긴 용의 동상이 있다.
- 카지미에시&쉰들러 법랑공장
카지미에시는 크라쿠프의 유대인 문화 구역이다. 상술했듯 크라쿠프에는 14세기부터 유대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았는데, 2차 세계대전기 이곳의 유대인 대부분이 나치에 희생된 아픈 기억이 있고 이 때문에 크라쿠프의 유대인이 사라져버려 이곳은 한동안 방치되고 말았다. 하지만 인민정부 붕괴 후, 폴란드 정부는 이곳의 문화적 가치에 주목해 이곳에서 유대인 문화 축제를 열고 유대인 식당을 열게 하는 등 '유대인 없는 유대문화'중심지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을 보고 유럽에 일부 남은 유대인들이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정착해 살면서 현재 카지미에시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유대인 문화가 잘 살아있는 곳이 되었다.
이곳의 골목을 누비면 확실히 크라쿠프의 메인 구시가와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데, 오래된 건물들이 회칠이나 리모델링을 전혀 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 그 분위기가 남다르다. 이곳에 남아있는 레마 시나고그(Remah Synagogue)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나고그 중 하나로 소정의 입장료(5 즈워티)를 내야 하지만 충분히 들어가 볼 가치가 있다. 거리에는 가끔 유대인 복장을 하고 가이드를 해 주는 사람들도 볼 수 있는데, 아마 현지 여행사들을 잘 찾아보면 영어 가이드도 받을 수 있을 듯 하다. 크라쿠프에 간다면 꼭 둘러보아야 할 장소이다.
카지미에시 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비스와 강을 건너가면 33개의 빈 청동 의자가 놓여 있는 게토 영웅광장(Ghetto Heroes Square)이 있다. 절대로 앉아서 쉬라고 놓인 의자가 아니고 크라쿠프 게토에서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의자다. 이 광장은 과거 크라쿠프 게토의 중심부로, 유대인들은 절멸수용소로 이송되기 전 이 광장에 모였다. 일부 나이 많은 유대인들은 의자를 가지고 나와 앉아서 이송을 기다렸는데, 이들이 모두 죽음의 수용소로 떠나간 후 광장에는 나치가 빼앗은 유대인들의 물품, 빈 의자들이 쓸쓸하게 남았다고 한다. 전후 이 가슴아픈 이야기를 기리기 위해 폴란드 예술가 표트르 레비츠키(Piotr Lewicki)와 카지미에시 라텍(Kazimierz Latak)이 이 광장에 의자 조형물을 만들어 두었다고 한다. 이곳을 지나는 크라쿠프 시민 일부는 의자 앞에서 성호를 긋거나 꽃을 놓아주기도 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몇 백미터 걸어가면 오스카 쉰들러가 운영하고 절멸수용소에 보내질 위기에 처한 유대인을 구했던 법랑공장이 있다. 이제는 박물관이 된 공장은 공장에서 일하던 유대인들의 생활상, 나치의 만행과 게토의 참상, 쉰들러의 영웅담을 조명하고 있고 공장 뒤에는 그가 살던 집도 있어 쉰들러의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쉰들러 법랑공장의 경우,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데다 시간별로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있어, 오후 늦게 예약 없이 방문하면 문 닫기 전인데도 티켓 구매가 어려울 수 있다.
- 기타
율리우시 스워바츠키(Juliusz Słowacki) 극장. 출처 : 위키피디어
기차역도 멋지게 잘 지었다. 최근엔 바로옆에 거대한 쇼핑몰을 세우면서 역사 내부 인테리어도 최신식으로 갈아엎은듯 하다.
크라쿠프 중앙역.
5.2. 근교
-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
↑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의 지하 성당. 암염을 깎아 만들었으며 여러 부조물과 샹들리에 역시 암염과 소금으로 만들었다.
크라쿠프를 방문했다면 역시 안 보고 갈 수 없는 관광지로 현재 폴란드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으는 단일 관광지 중 하나이다.
↑ 소위 '죽음의 문'으로 불리는 비르케나우의 정문[52].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를 상징하는 악명높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가 크라쿠프 주변 오시비엥침에 있다. 크라쿠프 버스 터미널에서 약 한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면 도착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 쳉스토호바
↑야스나 고라 성당
↑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
쳉스토호바는 크라쿠프에서 기차/버스로 약 1시간 반쯤 떨어진 곳으로 폴란드 최고의 가톨릭 성지이다. 도시 자체는 크게 볼 것이 없지만 이 도시의 야스나 고라 성당에는 폴란드 최고의 성물인 '쳉스토호바의 검은 성모'라는 성상이 모셔져 있다. 이 성화를 직접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매년 수백만의 사람들이 야스나 고라 성당을 찾아 온다. 2011년 한 해 80개국에서 320만명의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그 중 143,983명은 폴란드에서 직접 발로 이곳까지 찾아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이 성화의 제작 연도는 추정하기 어렵다고 하는데, 1430년에 후스파에 의해 파손된 후 그 위에 손상된 부분을 다시 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성녀 헬레나가 326년 예루살렘에서 발견했다고 전해지며,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벨즈(Белз)를 거쳐 14세기 경 오폴레 공작에 의해 쳉스토호바로 모셔졌다고 한다. 이 성화는 여러차례 기적을 일으켜 야스나 고라 성당과 폴란드를 지켜주었다고 믿어진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대홍수'로 신음할 때, 연방을 침공한 스웨덴군이 쳉스토호바까지 내려와 1655년 야스나 고라 성당을 포위하자 250명의 수도자들과 지원자들이 4,000명의 스웨덴군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것이 검은 성모상이 가져다 준 기적이라고 믿었으며 더 나아가 대홍수 시기 전쟁의 양상까지도 바꿔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는 이듬해 1656년 4월 1일 르부프( 르비우)의 성당에서 검은 성모 마리아를 폴란드의 여왕이자 수호성인으로 "대관"했다. 현재 성화의 얼굴에는 2개의 흉터가 있는데, 이 흉터에 관한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져 내려온다. 1430년 후스파가 야스나 고라를 약탈할 때 이 성화도 가지고 가려 했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말들이 도통 움직이질 않자 열받은 일당 중 하나가 이 성화를 땅에 매다 꽂고는 칼질을 두어 번 했는데, 3번째 칼질을 하려던 순간 땅바닥에 쓰러져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었다고 한다. 이후 수많은 화가들이 이 흉터를 없애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이 칼자국이 다시 드러나 지금에 이른다고 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거나 한 나라의 수호성물을 직접 보는 데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당일치기로 방문할 만하다. 직선거리는 아니지만, 바르샤바에서 오고 가는 길에 방문도 가능하다. 새벽 6시에 성화의 unveiling이 있는데, 팡파레와 함께 엄숙하게 진행된다. 휴일에는 순례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를 한 유저라면 시작 화면에서 얀 소비에츠키 3세의 초상화를 본 적 있을텐데 왕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건물이 바로 야스나 고라 성당이다.
- 자코파네 & 하이 타트라 산맥
↑ 모르스키에 오코 호수
폴란드는 평지 일색인 나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놀랍게도 폴란드의 최고봉은 높이 2,503m의 리시(Rysy)산이다. 이 산을 비롯해서 폴란드는 2,000m가 넘는 봉우리를 70개나 가지고 있는데, 전부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을 형성하는 타트라 산맥에 있다. 폴란드는 이 산맥의 약 30%를 점유하고 있는데, 자코파네는 폴란드에서 타트라 산맥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도시다. 크라쿠프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한시간 반쯤 가면 도착하는 곳으로 열차가 자주 있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이 도시에는 알프스의 마을처럼(그렇지만 알프스와는 또 다른) 나무 오두막같이 지어진 건물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고 이 지역에서만 파는 특징적인 치즈를 굽는 냄새가 난다. 도시 뒤쪽으론 타트라 산맥이 병풍처럼 들어서 있다. 매일 평지만 보고 사는 폴란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휴양지라서 여름에 가면 미어터진다. 자코파네로 왔다면 꼭 보고 가야 하는 곳이 있는데 "바다의 눈"이라는 뜻을 가진 모르스키에 오코(Morskie Oko) 호수다. 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어서 버스를 타고 주차장 까지 간 후 약 7km정도 흙길을 따라 트레킹을 해야 한다. 흡사 알프스, 로키산맥의 호수와 같이 아름다운 호수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중~동부 유럽 여행중에 오스트리아의 할슈타트를 미처 가지 못했다면 자코파네를 당일치기 하거나 1박정도도 추천할만 하다. 타트라 산맥은 알프스만큼은 못해도 그 풍광이 충분히 아름다운데, 깎아지른 암벽, 암벽이 없는 공간을 빽빽히 메운 침엽수림, 그리고 숲과 봉우리 사이에 놓인 거울처럼 깨끗한 호수 등 있을 건 다 있다. 타트라 산맥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주로 슬로바키아의 포프라드[53]에서 들어가는데, 한국 배낭 여행객이라면 대부분이 일정상 이유로 브라티슬라바만 하루 들렀거나 아예 슬로바키아를 지나쳤을 확률이 높다. 이런 케이스라면 자코파네가 그 동안 도시만 보던 배낭 여행객에게 잠시나마 여유를 안겨줄 것이다.
- 마워폴스카의 목재 성당들
↑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6개 목재 성당 중 셍코바의 성 필립과 야쿱 성당(Kościół św. Filipa i św. Jakuba w Sękowej).
↑ 역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비나로바의 대천사 성 미카엘 성당(Kościół św. Michała Archanioła w Binarowej )
크라쿠프가 속한 마워폴스카 일대에는 15~16세기에 지은 동슬라브 지역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목재 가톨릭 성당이 여럿 남아있다. 이들 성당에는 목재이면서도 폴란드 고딕 양식, 후에는 로코코양식까지 조금씩 가미되어 대단히 독특한 모습으로 남아있는데, 유네스코는 2003년 다른 지역의 건축과는 확실히 차별된 로마 가톨릭 성당으로서 이들 중 6개 목재 성당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수수하고 담백하면서도 상당히 특징적인 모습을 가진 성당들인데, 몇몇 성당들은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화려하다. 마워폴스카 지역의 여러 작은 마을에 흩어져 있는지라 대중교통으로 갈 수는 없고 크라쿠프에서 하루 렌터카를 이용해 둘러보거나 투어를 이용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곳에서 가장 먼곳까지의 거리가 약 150km 정도 되기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6개 성당 모두 둘러보려면 하루 렌트로는 부족하다. 접근성 때문에 근교 옵션 중 가장 선택 가능성이 낮겠지만 장기여행을 계획중이라면 참고할 만 하다.
6. 기타
폴란드의 프로 축구 구단인 비스와 크라쿠프의 연고지이다.바르샤바에 비해 외국인 체류자 인구가 적은 편이다보니 크라쿠프 어린이들이 동양인을 보면 신기해하는 경우가 많다.[54] 웃으면서 인사해서 기분을 밝게 만들어주는 경우가 더 많지만, 칭챙총 등등이라고 외치며 약올리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날 유럽은 아동은 항상 보호받아야 한다는 개념이 있기 때문에[55] 인상 쓰고 호통 치는 등 리액션을 할 경우 향후 일정이 힘들어지는 수가 있다. 폴란드 어린이들이 놀리면 그냥 철이 없어서 그러려니 넘어가는 게 좋다.
스타크래프트 2의 최상위 프리미어 대회인 2015 WCS Season 3 결선무대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그레고리 코민츠는 폴란드 사람으로, 고국 팬들에게 엄청난 환호를 받았다. 그리고 이 날 공허의 유산 시네마틱 영상이 세계 최초로 공개됐다.
세계 가톨릭 청년들의 최대 행사인 세계청년대회가 2016년 7월 말 이 곳에서 열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곳을 방문 했었다.
2016 EU LCS 서머 파이널이 이 도시에 있는 타우론 아래나에서 열렸다.
2017년 CS:GO의 11번째 밸브 공인 메이저대회인 PGL Major Krakow 2017이 개최된다. ESL에서 밸브의 손이 떠난 이후 카토비체에서 물러난 폴란드에서 메이저 대회를 다시 유치한다.
2017년에 창설된 폴란드군의 특수전사령부[56]의 사령부가 위치한 곳이다.
2023 크라쿠프 유러피언 게임 개최지이다.
더 미디움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다.
참고로, 크라쿠프에서 북서쪽으로 약 29km 정도 거리에 #수워쇼바(Sułoszowa)라는 #마을이 있는데, 6,0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이 9km에 걸쳐서 하나의 거리를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풍경으로, 해외 커뮤니티에서 유명하다.
폴란드의 싱어송라이터 야쿱 지테츠키의 출생지이다.
[1]
dzielnic
[2]
2023년 6월 30일 기준
[3]
2010년 수정
[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5]
코페르니쿠스가 이곳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을 나왔으며,
공산주의 시절에는
북한에서 유학생이 오기도 했다. 주로 채광기술을 배우러 왔다 한다. 그밖에도 곤충분류학이 세계최고수준이라고 한다.
[6]
연극으로 매우 유명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시 젊은 시절 이곳에서 연극을 했다.
[7]
이곳에서 1시간 반 거리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그리고 거대한 지하 성당으로 유명한 비엘리츠카
암염 광산 역시 가까운 거리에 있다. 폴란드 최고의 가톨릭 성지인 쳉스토호바 역시 시외버스로 1시간 반~2시간 거리에 있다.
[8]
밀라노,
제노바,
토리노 등
[9]
폴란드어에서 'ó'는 영어의 'u'처럼 읽는다. 이 때문에 영어식 발음인 '크라코우'로도 알려져 있다.
[10]
여느 전설이 그렇듯 버전이 많지만 여기엔 가장 많이 알려진, 16세기의 연대기 작가 마르친 비엘스키(Marcin Bielski)의 연대기에 기록된 전설을 소개한다.
[11]
바벨의 용. Smok은 폴란드어로 용을 뜻한다.
[12]
이 이야기의 현실성과는 별개로 바벨 성 아래에는 진짜 동굴이 있다. 성벽의 구석 모퉁이에 자리한 조그마한 문을 지나 아주 좁은 폭의 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갈 수 있다. 성에 입장할 때 설명을 읽지 않고 무심코 들어갔다가 바깥으로 나와버리면 다시 그 길로 돌아갈 수 없고 얄짤없이 다시 정문으로 돌아가야하니 성의 모든 관광을 마치고 들어가도록 하자. 동굴을 나오면 쇠로 만든 재미있게 생긴 용의 동상이 있는데, 이 녀석은 매 시간마다 하늘을 향해 불을 뿜는다. 한편, 중세시대에 이 동굴에서 매머드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뼈 3점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진짜 용의 뼈라고 믿고 이것들을 바벨 성당의 정문 위에 걸어두었다. 지금도 이 뼈는 문 위에 남아 있는데, 뼈가 땅으로 떨어지는 날엔 세상이 망한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13]
870년부터 멸망할 때까진 왕을 칭했다. 따라서 그때부턴 왕국이 된다.
[14]
이베리아 반도와 남프랑스를 기원으로 하는 유대인 집단으로 이스라엘에 사는 140만명을 포함, 전 세계에 220만명이 퍼져 있다.
[15]
코르도바 칼리프국(
후우마이야 왕조) 태생의 유대인이었다.
[16]
후술할 남폴란드 외에 동서
포메른, 마조프셰,
실롱스크까지 엄청나게 넓은 땅을 정복했다.
[17]
재위 중 966년 4월 14일, 미에슈코 1세는 세례를 받아 폴란드는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18]
1025 ~ 1034년 까지 폴란드를 지배한
미에슈코 2세 시기 국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에슈코 2세는 선대 왕들처럼 계속 공격적, 확장적 정책을 고수하여 주변국들의 분노를 샀다. 또한 그는 이복형제들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의 지원으로 자신을 향해 음모를 꾸민다고 생각해 그들을 추방했다. 그러자 이복형제들은 1031년 정말로 신성 로마 제국과
키예프 공국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끌고 쳐들어와 미에슈코 2세를 폐위시켰다. 일련의 사태 끝에 이복형제들이 모두 죽자 미에슈코 2세는 다시 복위했으나 곧 사망했다. 1034년 미에슈코 2세 사후 토속 신앙을 믿는 귀족, 농민들이 급속한 기독교화에 반발해 국가 전역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각지에서 이교를 믿는 귀족들이 독립했다. 이 틈에 폴란드는 그동안의 과확장으로 주변국들을 분노케 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는데, 수십년 전부터 폴란드에게 땅을 빼앗기던 보헤미아의
브르제티슬라프 1세(Břetislav I)는 1039년 폴란드를 대규모로 침공해 실롱스크와 대폴란드(비엘코폴스카) 대부분을 장악하고 수도인
포즈난(Poznań)과 전 수도였던
그니에즈노(Gniezno)를 파괴했다. 또한 수많은 폴란드의 초기 가톨릭 유물들을 파괴하고 미에슈코 1세의 무덤을 파헤쳤다. 이 시기 폴란드는 엄청나게 불안정해서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왕을 참칭하는 바람에 역사가들은 1034년부터 1039년까지 폴란드의 왕이 누군지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한다. 당시의 왕이 '잊힌 볼레스와프(Bolesław the Forgotten, Bolesław Zapomniany)'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 자는 존재 자체를 의심받고 있다. 많은 자료에선 이 시기를 공위시대(Interregnum)라고 한다.
[19]
미에슈코 2세의 유일한 아들로, 1031년 부왕이 자신의 이복형제에게 패해 퇴위를 강요당하자
쾰른 대주교령으로 피신했다. 1034년 부왕이 붕어했을때 그는 정당한 권리자였음에도 국내가 극도의 혼란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즉위할 수 없었다. 1037년, 1038년 어머니와 함께 독일에서 돌아와 빈 왕좌를 다시 차지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란만 더 확대시킬 뿐 모두 실패했다. 헝가리로 도망친 카지미에시는 1039년 보헤미아의 폴란드 침공이 끝난 뒤,
신성 로마 제국으로 가 그의 친척이었던
하인리히 3세에게서 1,000명의 중무장 군사와 많은 지원금을 얻어 1040년 폴란드로 돌아가 왕좌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20]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왕의 유언에 따라 네 아들들, 미망인이 폴란드의 땅을 나누어 가졌다. 그 중 크라쿠프가 있는 마워폴스카(소폴란드), 비엘코폴스카(대폴란드) 동부,
그단스크가 있는 포메렐리아 등 핵심지역은 '연장자령(크라쿠프 공작령)'으로서 자식들 중 최연장자가 자신의 영지에 더해 추가로 이 지역을 통치하고 전체 폴란드를 대표하는 고공(Maximus Dux)이 되도록 했다. 볼레스와프 3세는 아들들이 땅을 가지고 싸우지 않도록 유언에 여러 장치를 마련해 두었으나, 이것들은 곧 무시되었고 아들들은 '연장자령'을 가지기 위해 싸워댔다. 아들들의 대가 지나고 나서도 각 공국들은 이 지역에 있는 수도 크라쿠프, 그리고 고공의 타이틀을 놓고 다퉜으며 각종 외교적, 군사적 이유로 고공들이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잦았다. 이때의 폴란드 고공 중에는 3번이나 물러났다가 다시 복위하여 재위가 4파트로 나뉘는 산도미에시 공작 레셰크 1세, 대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3세 같은 자들도 있었다. 이 와중에 기존의 공국이 쪼개져서 새로운 공국들이 형성되기도 했고, 고공위을 차지한 마조프셰 공 콘라드 1세가 1226년 이 지역에 독일 기사단을 불러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혼란은 쿠야비야(Kujawia) 공 브와디스와프 1세가 크라쿠프와 폴란드 상당부분을 정복하고 1320년 폴란드 왕으로 대관하면서 끝났다. 아들 카지미에시 3세(카지미에시 대왕)는 1351년 마조비아 공국을 속국화하며 폴란드의 통합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보헤미아의 영향에 들어간 실롱스크 공국, 독일화 되던 그리핀 가문의 포메른 공국은 끝내 통합하지 못했다.
[21]
헝가리 왕국을 침입했던
몽골군 사령관 수부타이는 몽골군의 측면이 폴란드에 의해 위협받지 않기를 원했고 1240년 부장 바이다르(Baidar)와 오르다(Orda)에게 2개 튜멘(12,000 ~ 20,000명)을 붙여 폴란드를 침공케 했다. 몽골군은 기동력을 이용해 폴란드 각 공국의 군대가 연합하기 전에 각개격파하는 방식을 썼고 흐몔니크 전투(Battle of Chmielnik)에서 큰 승리를 거둬 크라쿠프를 무방비로 만들었다. 1달 뒤, 1241년 4월
레그니차 전투(Battle of Legnica)에서 폴란드 연합군은 전멸했고 폴란드 고공
헨리크 2세도 전사했다. 폴란드가 어떤 꼴을 당한 지 지켜본
보헤미아 왕국은 헝가리에 원병을 파견하지 않고 자국 방어에만 전념했다.
[22]
1257년 도시 특권을 얻으면서 고공의 지배력을 줄이고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다.
[23]
당시 크라쿠프 직물회관은 지금 남아있는 것보다 규모가 더 커서 2개의 화물계량소도 별채로 달려 있었다. 하지만 이 건물들은 크라쿠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19세기 중반 확실치 않은 연도에 철거되었다. 한편, 직물회관은 크라쿠프 외에도 유럽의 내로라하는 무역도시들에도 여럿 세워졌다. 독일의 브라운슈바이크, 영국의 헬리팩스 등에도 아직 직물회관이 남아있는데 대부분 큰 특색이 있거나 하진 않다. 하지만 1304년 전형적인 브라반트 고딕양식으로 세워진 벨기에 이프르의 직물회관은 당시 플랑드르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하듯 크라쿠프의 직물회관만큼 크고 아름답다. 현재는 이프르 전투 기념관, 1차 세계대전 박물관(In Flanders Fields Museum)으로 쓰인다.
[24]
후에 폴란드 왕이 되는
브와티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의 이름을 따
야기엘론스키 대학교으로 개명되었다.
[25]
결국 1500년 경 아예 탈퇴한다.
[26]
현재 이 지역은 유대인 문화가 복원되어 있는 곳으로 크라쿠프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다.
[27]
지그문트 1세와 보나 스포르차의 막내딸.
[28]
1794년,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은 연방에 군대의 대부분을 해체하라고 종용했다. 남은 부대는 러시아군으로 편입되었다. 바르샤바에서는 혁명을 기획하던 저명한 정치인, 장군들이 체포되었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대처해야 되었기에 러시아군은 도시를 잠시 비울 수밖에 없었다.
[29]
코시치우슈코는 1817년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방부처리되어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안 성당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따로 유골함에 보관되어 스위스의 폴란드 박물관에 보관했다가 폴란드 독립 후 1927년 반환되었다. 2차대전 중 다행히 유실을 면했고 지금은 바르샤바 왕궁의 채플에서 볼 수 있다. 코시치우슈코는 폴란드 최고의 민족 영웅 중 한명으로서 폴란드 전역에서 그의 이름을 딴 구조물, 기념비 등을 볼 수 있다.
[30]
Regalia.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물품들. 주로 왕관, 왕홀, 왕구로 구성되며 검이나 박차 등이 추가되기도 한다. 보통 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 레갈리아를 만들어 썼다.
[31]
이때,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은 농노들에 의해 크라쿠프 자유시와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전역에서 1,000명 가까운 슐라흐타(폴란드 귀족), 지주들이 살해되었고 500개 이상의 장원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역사는 이것을 갈리치아 학살(Galician slaughter)이라 한다.
[32]
독일군이 들어오기 3일전에 시장이 되었다. 그의 전임 시장은 독일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9월 3일 급하게 도시를 떠나버렸고, 시 의회는 부시장이었던 그에게 시장직을 떠맡겼다.
[33]
나치 점령 직후 교육자들을 재조직하는 등 붕괴된 교육체계를 다시 재건하려 했으나 2주만에 게슈타포의 방해로 물거품이 되고 본인도 잠시 체포되었던 바 있다. 그때 총독부는 그를 시장직에서 해임했다.
[34]
게슈타포는 당시 점령지에서 폴란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 즉 리더들을 제일 적극적으로 처형하였다. 이 "리더"의 대상은 주로 관료, 장교, 유명인 그리고 지식인층이었다.
[35]
이런 행적 덕분에 그는 현재 크라쿠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명이다. 크라쿠프 시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로가 있다.
[36]
대학 뿐만 아니라 다른 레벨에서도 지하교육이 이루어졌다. 1942년 말, 폴란드 전역에서 지하교육으로 교육 받던 학생 수는 150만에 달했다.
[37]
크라쿠프 근교 바도비체(Wadowice) 출생
[38]
SS-Totenkopfverbände, SS 친위대 중 강제수용소의 관리를 담당한 부대.
[39]
건설이 완료된 뒤 상급돌격대장으로 진급해 소장이 되었다.
[40]
금속 용기에 유약을 발라 만드는 법랑(에나멜) 용기를 생산하는 공장. 1940년 1월 DEF(Deutsche Emaillewaren-Fabrik, 독일법랑용기공장)라는 이름이 붙었으나 노동자들은 이 공장을 보통 '에말리아(Emalia)'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41]
이 무작위 처형의 실상을 보고 싶다면 영화
쉰들러 리스트 참조.
[42]
1,098명. 여성 297명, 남성 801명
[43]
빈 태생의 사업가로 나치 점령 후 크라쿠프에 와서 직물공장을 운영했다. 쉰들러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잘 대해주기로 유명했으며 약 800명의 유대인을 고용해 공장을 운영했다. 게토 정리 후, 그는 그의 공장이 수용소 내부로 이동하는 것을 막진 못했지만, 그의 공장에서 새롭게 일하게 된 2,000명의 유대인들에게 자신의 권한 내에서 식량과 좋은 옷을 공급해줬다. 이때 그와 쉰들러는 친구가 되었다. 그 후 수용소가 폐쇄절차를 밟자, 그는 서쪽에 공장이 더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친구였던 쉰들러가 그의 노동자 중 60명을 구출해준다.
[44]
새 공장은 포탄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 에나멜 용기 정도면 어찌저찌 생산할 수 있었지만 정밀한 기술과 숙련된 노동력이 필요한 포탄은 비전문가인 유대인들 손으로 생산을 할 수가 없었고, 당연히 포탄 생산량은 바닥을 기었다. 감독관이 적은 생산량에 의문을 표하자, 쉰들러는 암시장에서 포탄을 대량 구매해 자신의 것인 양 나치 정부에 팔았다.
[45]
에밀리 쉰들러(Emilie Schindler). 1,100명의 쉰들러 리스트에 더해 100명의 유대인을 추가로 구조했다. 1945년 1월 폴란드 골레쇼프의 광산으로 이송되던 100여명의 유대인들을 광산측이 받지 않는 바람에, 기차는 그대로 서쪽으로 이동해 브륀리츠의 기차역으로 오게 되었다. 오랜 기간의 이동으로 인해 굳게 잠긴
화차 안은 매우 추웠고 사람들은 쇠약해져 갔으며 이미 12명이 사망해 있었다. 에밀리 쉰들러는 역장에게 뇌물을 공여해 이 기차를 확보한 뒤 공장에서 사람을 불러 문을 열고 이들을 구하도록 했다. 그녀는 이들을 공장의 임시 병원로 옮긴 뒤 종전 때까지 간호해 주었다.
[46]
Иван Конев. 소련군의 원수. 당시 제 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이었다.
[47]
크라쿠프가 속한 마워폴스카 주 통계로, 2015년 기준 1,005만명이 도시를 찾았다.
http://www.krakow.pl/ccb_en/hot/196351,251,komunikat,record_year_for_krakow_s_tourist_business.html
[48]
이런 방식이었다. 주 성벽 앞, 바르비칸 주위까지 모두 해자를 둘렀고 적들은 해자를 메우거나 바르비칸을 점령해야만 성벽을 공격할 수 있었다. 해당 그림은 19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당시에는 군사기술의 발달로 성벽이나 바르비칸이나 필요 없던 시기였기에 해자의 물은 빼버린 상태이다. 이후 크라쿠프 시 의회는 도시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아지자 바르비칸 주위에 일부만 남기고 해자를 모두 메웠고 그 상태로 지금에 이른다.
[49]
이를 두고 동양권(특히 불교의 불상)의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들도 있지만, 오해다. 중세 유럽에서도 금박을 입힌 목조상이 많았고, 이는 중세 독일어권 지역의 관습이었다. 또한 성당 내에 설치된 목조상들은 전체가 금박으로 입혀진 거도 아니고, 채색이 된 것이다. '존귀한 존재'에 값비싼 재료로 치장하는 것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상당히 많은 서양미술들에서 금과 푸른색 등이 그러한 용도로 활용되어왔다.
[50]
각각 갈비뼈와 다리뼈, 두개골이다.
[51]
현재는 가짜로 밝혀졌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52]
20년 1월 기준 보수 공사를 위하여 천막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다.
[53]
Poprad. 주변에 타트라 산맥과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2군데나 있고(레보차 마을, 슈피스 성) 어드벤쳐 트레킹을 제공하는 아름다운 슬로벤스키 라이(Slovenský raj. '슬로바키아의 천국'이란 뜻.), 그리고 도브신스카(Dobšinská) 얼음 동굴까지 있어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여행지다. 타트라 최고봉인 게를라호프스키 봉도 슬로바키아의 포프라드 근처에 있다. 타트라 산맥은 면적이 그리 크지 않아서 사나흘이면 주요 트레킹 코스를 모두 돌아볼 수 있다. 단, 슬로바키아 타트라의 트레킹 코스 대부분은 안전문제 때문에 6월 16일부터 10월 31일까지만 개방하기에 방문에 시간적 제약이 있다.
[54]
바르샤바의 경우 초등학생들이 소풍가는 와중에 베트남계 어린이, 흑인 어린이 등등도 눈에 띄는 편이다.
[55]
반면 인종차별 관련한 이슈는 미국이나 캐나다에 비해 이해도가 적은 편이다. 즉 엮이면 진다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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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육, 해, 공, 특수군으로 분류되며 4군 체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