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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D700><colcolor=#fff> 예루살렘 왕국 알레라미치 왕조 제2대 국왕
콘라드 1세 Conrad I |
|
이름 | 코라도 델 몬페라토 (Corrado del Monferrato) |
출생 |
1145년~
1147년경 이탈리아 몬페라토 변경백국 몬페라토 |
사망 |
1192년
4월 28일 예루살렘 왕국 아크레 (향년 45~47세) |
매장지 | 예루살렘 왕국 티레 구호기사 교회 |
가문 | 알레라미치 가문 |
배우자 | 테오도라 앙겔리나 (1186년 결혼) |
이사벨 1세 (1190년 결혼) | |
자녀 | 마리아 |
부모 |
아버지 몬페라토 후작 굴리엘모 5세 어머니 바벤베르크의 유디트 |
형제 | 굴리엘모[1], 보니파초, 페데리코, 라니에리, 아그네스, 아잘라이 |
종교 | 로마 가톨릭 |
재위기간 | 1190년 11월 24일 ~ 1192년 4월 28일 (1192년 4월에야 공식 선출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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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라드 1세(Conrad I, 11??년 ~ 1192년 4월 28일) 몬페라토 변경백국 출신.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국왕으로 공식 선출되고 며칠 후 암살되었다. 교단 어쌔신의 흉기에 암살당한 제3차 십자군의 주역 중 한 명. 통칭은 콘래드. 영웅적인 활약으로 이슬람 측에서는 후작이란 뜻인 알 마루키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2. 동로마 제국에서 활약
콘라드는 이탈리아의 몬페라토 변경백국을 통치하던 알레라미치 가문 출신이다. 1179년, 몬페라토 변경백과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 콤니노스와의 동맹에 따라 콘라드는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제국의 내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빈번한 황제 교체로 정세가 안정되지 못했다. 1185년에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가 즉위한 후, 제국의 내란은 끊이질 않았다.1186년 겨울,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콘라드에게 자신의 누나 테오도라를 아내로 맞이해달라고 요청했다. 콘라드는 동로마를 떠나 십자군에 참가할 생각이 있었기에 앞날의 편의를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황제의 매형이 된 콘래드의 위신은 한층 더 높아졌고, 카이사르를 수여받았다. 이후 알렉시오스 브라나스 장군의 반란을 진압으나, 브라나스를 존경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원성을 사자 위협을 느끼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났다.
3. 티레 방어
1187년 7월, 그는 자신의 목표였었던 십자군에 종군하기로 결심하고 예루살렘 왕국으로 근거지를 옮긴다. 예루살렘 국왕 기 드 뤼지냥은 크게 기뻐하며 콘래드에게 항구 도시 티레의 수비를 맡겼다.하지만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다. 아이유브 제국의 살라흐 앗 딘은 지중해 연안 도시들을 휩쓸고 있었고,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국군은 개박살이 난 상태였다. 수도 예루살렘 함락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콘래드는 티레에 육박한 살라딘의 군대에 맞서 시민들을 고무, 이탈리아 상선단의 도움을 받고, 해안 지형을 잘 이용하여 살라흐 앗 딘의 대군을 격퇴했다.
결국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같은 해 11월, 티레는 예루살렘에서 피난 온 난민들로 가득 했다. 살라딘은 다시 육지와 바다의 양면으로 티레를 공격했다. 콘래드는 놀랍게도 육로에서 성을 잘 지키는 건 물론 약점이라 할 수 있는 해안선에서 엄습해 오는 아이유브 왕조의 선박 또한 화계로 격퇴하며 몇 주를 버텼다. 살라딘은 결국 티레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티레가 지중해에서 보급이 끊이지 않는 상륙 거점으로서 갖는 이점을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다. 콘래드는 국왕 기 드 뤼지냥이 포로로 잡힌 상태에서 최후의 항전으로써 왕국 최후의 항구를 지켜냈다. 콘래드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100년 가까이 더 존속할 수 있었다. 그의 왕국에 대한 구심력은 당연히 대단했다.
4. 예루살렘의 왕위를 둘러싼 싸움
1189년 예루살렘의 국왕 기 드 뤼지냥은 살라딘에게 석방되었다. 하나 남은 예루살렘 왕국의 영토인 티레로 간 기는 성문을 열어달라고 청했다. 콘래드는 기에게 하틴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왕국을 빈사상태로 만들어놓고 무슨 낮짝으로 찾아왔냐면서 그가 왕의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기와 그의 아내이자 예루살렘의 정식 왕위 계승자인 시빌라의 입성을 거부했다.[2]기는 티레 성벽 밖에서 얼쩡대다 제3차 십자군 원정군이 도착하자 합류하여 아크레 공성전에 참여하였는데,[3] 공성전 와중에 1190년 시빌라와 그녀와 기의 두 딸들이 병사하면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고 콘래드도 이 싸움에 뛰어든다.
각지에서 아이유브 제국군을 격퇴하고 용맹을 떨친 콘래드는 고위층의 지지를 받게 되었다. 유럽 본국에 있는 친척들의 지원도 받은 콘래드는 마침내 예루살렘 왕국 아모리 1세의 딸이자 시빌라의 이복 여동생으로 다음 왕위 계승자 이사벨 1세와 결혼했다. 본처 테오도라가 아직 살아 있었기 때문에 중혼 여부가 문제될 수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그를 상대로 이혼 신청이 동로마 쪽에서 있었기에 그다지 큰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다. 콘래드는 예루살렘의 왕이 될 자격을 손에 넣었지만 여전히 기의 파벌이 그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즉위는 할 수 없었다.
5. 제3차 십자군 원정 종군
1189년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자 콘라드는 항구를 십자군의 상륙 거점으로 제공했다. 제3차 십자군은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대립하여 진군이 지지부진하는 와중에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세력 앞에 연전 연패했고, 시리아에서도 티레를 제외한 도시 전체가 살라딘에 빼앗기는 등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콘래드는 약간의 병력과 함께 티레에 들어가 전군을 지휘 살라딘의 대군을 물리 친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받고 있었다. 그는 리처드 1세와 함께 함선으로 아크레 공격을 감행했고 1191년 7월에 성밖에서 공격하던 기를 도와 아크레를 함락시키고 성 예루살렘 왕국의 깃발을 세웠다.십자군에 참가한 기사들은 대립을 계속하고있는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아니라 콘래드를 십자군의 지도자로 해야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와 예루살렘 왕국의 부활도 제후의 인정을 받게되었다. 이에 대해 리처드 1세는 기를 애초에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반대했지만 콘래드를 만나 그 능력과 성격을 알게되자 왕위 계승을 승인하였다.
6. 암살
그러나 코라도의 존재는 살라딘을 비롯한 이슬람 측에게는 위협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 및 리처드 1세를 비롯해 성전 내부와 왕국 내부에 예루살렘 왕위를 둘러싼 적도 많았다. 이슬람 측 또는 십자군 측 또는 누구의 요청에 의한 것인지 지금도 불분명하지만, 1192년 4월 니자리 아사신은 콘래드의 암살을 계획하고 콘라드 1세는 예루살렘 왕으로 즉위 후 아사신 자객에게 습격당해 암살되고 말았다.이사벨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복자 딸 마리아는 나중에 이사벨 1세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여왕이 되고 장 드 브리엔과 결혼했다. 동생 보니파초 1세 델 몬페라토(Bonifacio I del Monferrato)는 제4차 십자군에 참전하여 테살로니카 왕국을 건국하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