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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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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이전2. 아가 모하마드 칸
2.1. 이란 통일2.2. 조지아, 캅카스 정복2.3. 호라산 침공
3. 무능한 후계자들
3.1. 러시아 제국과의 연이은 전쟁
4. 계속되는 혼란과 쇠퇴5. 미약한 개혁의 움직임6. 외세의 이권 침탈과 그레이트 게임
6.1. 담배 불매운동6.2. 영국 러시아의 충돌
7. 입헌 혁명8. 레자 샤 팔라비의 쿠데타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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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건국 이전

당시 페르시아 지방은 꽤나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한때 오랫동안 패권을 유지하던 사파비 왕조는 이미 망해가고 있었고, 전쟁군주 나디르 샤가 급부상하고 있었다. 결국 나디르 샤는 사파비 왕조를 멸망시키고 아프샤르 왕조를 세웠다. 문제는 나디르 샤가 전쟁은 잘했지만 내치에는 큰 재능이 없던 탓에 그의 사후 아프샤르 왕조는 유명무실한 국가로 전락했고 결국 1대만에 망해버렸다. 이후 수많은 세력들이 등장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큰 세력은 카림 칸 잔드 왕조였다. 잔드 왕조는 이란 서부를 석권하고 이란 통일을 눈 앞에 둔 상태였다. 이때 등장한 세력이 카자르 일족이다.

카자르 일족은 몽골 침략 이후 카스피 해 남안에 정착한 튀르크 아제리계 부족으로, 사파비 왕조 건국에 공헌했던 키질바시 가문 중 하나였다. 카자르 일족은 사파비 왕조의 건국에 공헌한 덕에 아란 지방, 현재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하사받아 다스릴 수 있었다. 1554년 경에는 대도시 간자를 중심으로 아제르바이잔 남부를 통치하는 상당한 세력으로 발전했다. 카자르 일족은 16~17세기 들어 점점 힘을 키워나가다가 아바스 1세 시대에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고르간 일대에 많이 정착했는데, 나중에 간자 지방의 카자르 일족과 고르간 지방의 카자르 일족 사이의 결혼 동맹에서 태어난 이가 '파트 알리 칸'이었다.

파트 알리 칸은 꽤나 유능한 군사령관으로 사파비의 술탄 후사인과 타흐마스프 2세 재위기에 활약했다. 당시 사파비 왕조는 망하기 직전의 비실비실한 상황이었던지라 군웅할거의 시대였는데, 파트 알리 칸은 여기 휘말리는 바람에 새로 떠오르는 정복군주 나디르 샤에게 살해당하고야 만다. 파트 알리 칸의 아들 모하마드 하산 칸은 나디르 샤에게 쫓겨났지만, 나디르 샤가 암살당한 이후 아스트라바드 지방으로 돌아와 지역의 패권을 휘어잡고 신흥 잔드 왕조와 맞서 싸웠다. 모하마드 하산 칸은 처음에는 좀 승승장구하는 듯 싶었지만 1759년 잔드 왕조의 카림 칸에게 대패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 모하마드 하산 칸의 아들이 바로 카자르 왕조의 개국시조 아가 모하마드 칸이다.

2. 아가 모하마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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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ohammadKhanQajari.jpg
아가 모하마드 칸. 고자였기에 수염이 나자 않았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시작부터 다사다난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 모하마드 하산 칸은 나디르 샤가 죽고 난 직후 아프샤르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프샤르 왕조의 아딜 샤가 모하마드 하산 칸을 공격하자 하산 칸은 도망쳐야만 했는데, 이때 그의 아들 아가 모하마드 칸이 아딜 샤에게 사로잡히고야 만 것이었다. 아딜 샤는 원래 아가 모하마드 칸을 죽일 작정이었지만 자비(?)를 베풀어 궁형을 내리는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아버지 모하마드 하산 칸이 이후 잔드 왕조에게 패배해 죽은 이후에도 아가 모하마드 칸이 아닌 호세인 콜리 칸이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고자였기 때문. 이후에도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버지의 강역을 되찾기 위해 아스트라바드 지방을 침공하려 시도했지만 잔드 총독에게 사로잡혀 테헤란으로 압송당했다.

의외로 카림 칸은 아가 모하마드 칸을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세인 콜리 칸도 줄줄이 잡혀왔고, 카림 칸은 호세인 콜리 칸과 아가 모하마드 칸을 모두 포용했다. 1763년에는 둘을 쉬라즈로 보냈고,[1] 일부 카자르 일족들은 심지어 아스트라바드로 돌아가기까지 했으며 일부는 또 카즈빈으로 보내져 좋은 대접을 받았다. 쉬라즈로 보내진 아가 모하마드 칸은 뛰어난 정치력 덕분에 포로라기보다는 신하이자 조언가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오죽하면 카림 칸이 아가 모하마드 칸을 전설상에 등장하는 충성스러운 조언가에 빗댔을 정도였다. 1769년에는 그의 형제 호세인 콜리 칸이 담간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갔지만 그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2] 날뛰다가 살해당해버리면서 아가 모하마드 칸이 카자르 일족의 명실상부한 수장이 된다.

이렇게 카림 칸 아래에서 납작 엎드리고 있던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1779년 3월 1일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카림 칸이 6개월 간 시름거리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속보가 터졌던 것이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즉시 지지자들을 규합해 테헤란으로 떠났다. 그는 테헤란에 도착해 아버지의 원수였던 데벨루 부족과 평화 협정을 맺은 뒤 카자르 일족을 모두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애썼다. 다른 카자르 일족들이 당연히 고자인 그에게 순순히 항복할 리 없었으니,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의 형제들이던 레자 콜리와 모르테자 콜리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이후에야 겨우 마잔다란 지방을 수복할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잔드 왕조의 알리 모라드 칸이 마잔다란을 수복하려 시도했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이 극렬히 방어한 덕에 실패했다.

앞서 레자 콜리와 모르테자 콜리가 항복했다지만 속으로는 반발심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고자(...)였던 탓이 컸다. 레자 콜리는 1780년 가을에 반란을 일으켜 병졸들을 이끌고 아가 모하마드 칸의 저택을 포위, 몇 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아가 모하마드 칸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모르테자 콜리는 거병해 아가 모하마드 칸을 다시 풀어주고 평화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려 시도했다. 세 형제의 회담 결과, 아가 모하마드 칸과 레자 콜리는 어느 정도 타협을 찾았지만 모르테자 콜리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면서 반쪽짜리 회담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모르테자 콜리는 이후 이스파한으로, 나중에는 쉬라즈로 떠나가 몸을 의탁하다가 결국 아스트라바드 지방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반면 레자 콜리는 이후로도 두 번이나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반란을 일으키다가 결국에는 영토를 죄다 빼앗기고 쫓겨났다. 이로써 아가 모하마드 칸은 형제들의 내란을 모조리 진압하고 내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1781년에는 페르시아 지방에 교역 루트를 뚫으려 집적거리던 러시아 제국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고, 1783년에는 자신에 대한 동맹을 저버리고 잔드 왕조에 붙은 길란 지방을 공격했다. 길란 지방은 외교적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시도했지만 결국 수도 라쉬트까지 탈탈 털렸고, 승리에 취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형제 자파르 콜리 칸을 시켜 이란 서부 지방을 또다시 공격했다. 자파르 콜리 칸은 잔드 군대를 꺾고 카즈빈, 잔잔 등을 함락한 뒤 마잔다란으로 돌아왔다. 1783년 가을에는 아가 모하마드 칸이 이전부터 거슬리던 테헤란 공성에 나섰는데, 공성 도중 역병이 퍼지자 할 수 없이 군대를 물리고 마잔다란으로 퇴각해야만 했다.

잔드 왕조의 알리 모라드 칸은 아가 모하마드 칸에 대한 공격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그는 1784년 6월 6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보내 마잔다란을 공격했는데, 그의 15살 난 아들 셰이크 베이스 칸이 군대를 이끌었다. 6만에 달하는 대군이 다가오자 아가 모하마드 칸은 황급히 아스트라바드로 퇴각해 요새를 정비했다. 이때 잠시 마잔다란 지방이 잔드 왕조에게 함락당했으며, 게다가 아가 모하마드 칸의 형제였던 모르테자 콜리가 배신을 때리고 잔드 왕조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정말 끝장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가 모하마드 칸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틀어박혀있는 요새 주변에 청야전술을 펼쳐 공격군의 사기를 꺾었고, 기습으로 공성군 사령관이던 모하마드 자히르 칸을 잔혹하게 죽여버렸다. 11월 14일에는 마잔다란으로 진격해 셰이크 베이스 칸을 몰아내고 마잔다란을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알리 모라드 칸은 이후에도 아가 모하마드 칸을 죽이고 싶어했지만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1785년에 사망했다. 알리 모라드 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아가 모하마드 칸은 대희해 테헤란으로 진격했는데, 테헤란 시민들은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성문을 걸어잠그고 '이란의 왕'에게만 문을 열어주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테헤란 시민들이 생각하는 정당한 '이란의 왕'은 알리 모라드 칸의 후계자였던 자파르 칸 잔드였기에 아가 모하마드 칸이 테헤란에 입성하기 위해선 자파르 칸 잔드를 꺾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바로 움직여 자파르 칸 잔드가 머물던 이스파한으로 진군했다. 자파르 칸 잔드는 군대를 보내 맞섰지만 실패하고 5월에 쉬라즈로 도망쳤다. 이스파한에 입성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자파르 칸의 하렘과 그가 남겨둔 보물들을 발견했고, 도시를 잔인하게 약탈해버렸다.

이스파한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85년 여름 이스파한을 떠나 원정을 계속했다. 그해 9월 테헤란이 결국 성문을 열고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항복했고, 1786년 3월에는 테헤란을 자신의 수도로 삼았다. 이때 이미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자신을 사실상의 이란의 왕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라는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건 삼갔다. 자칫 '샤'라는 칭호를 잘못 사용하다가는 온갖 세력들의 주의를 다 끌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

이후에도 아가 모하마드 칸은 영지 곳곳에서 일어나는 소규모 반란들을 진압하고 길란 지방을 재평정하면서[3] 기반을 공고히 했다. 한편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전에 한 번 패퇴시켰던 자파르 칸 잔드를 끝장내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는데, 자파르 칸이 쉬라즈를 요새화시키고 그 안에서 절대 나오지 않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실망한 아가 모하마드 칸이 북쪽의 테헤란으로 돌아가자 자파르 칸은 다시 군대를 모아 아가 모하마드 칸을 공격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이스파한을 공격, 잠시 함락하는 데에도 성공했으나 아가 모하마드 칸이 공격해오자 이스파한을 버리고 다시 쉬라즈로 후퇴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 역시 다시 쉬라즈에 시간을 허비하는 걸 꺼렸기에 이스파한을 수복하고 바로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갔다.

자파르 칸 잔드는 국력을 회복하려 시도했으나 1789년 1월 23일에 측근에게 암살당해 죽어버렸다. 자파르 칸이 죽자 수많은 잔드 왕조의 왕자들이 내전을 벌여 그의 뒤를 이으려 했는데, 이 내란의 승리자가 미소년 군주로 유명한 로트프 알리 칸이다. 로트프 알리 칸은 일단 다게스탄으로 후퇴해 그 지방 토후들의 지지를 얻어낸 뒤 사예드 모라드 칸을 몰아내고 5월에 쉬라즈로 재진입했다. 잔드 왕조가 내전을 벌이며 알아서 망해가는 와중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직접 이란의 로 즉위했다. 대관식을 치르진 않았지만 스스로를 사실상 이란의 군주로 선언하고 조카 바바 칸, 훗날의 파트 알리 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란 역사학계는 1789년을 아가 모하마드 칸의 즉위 원년으로 보기도 한다.

2.1. 이란 통일

자파르 칸 잔드가 죽고 어린 로트프 알리 칸이 즉위하자 아가 모하마드 칸은 기회를 틈타 잔드 왕조를 멸망시키려 들었다. 그는 1789년 6월 쉬라즈 인근에서 로트프 알리 칸과 격돌했는데, 로트프 알리 칸이 견디지 못하고 쉬라즈로 후퇴하자 쫓아가 공성했지만 공성은 실패로 돌아갔다. 1790년 5월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다시 쉬라즈를 침공했다. 파르스 지방의 잔드 총독이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항복하자 기겁한 로트프 알리 칸은 다시 쉬라즈에서 나와 아가 모하마드 칸과 맞서 싸우러 나갔는데, 아가 모하마드 칸은 로트프 알리 칸과 바로 맞설 여유가 없었다. 원정 도중 내부적으로 가장 유력한 후계자들 중 하나였던 자파르 콜리 칸과 마찰이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후계 구도를 확실히 해놓지 않으면 자신의 사후 잔드 왕조 꼴이 날 수 있겠다고 짐작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자파르 콜리 칸을 죽여버렸다. 로트프 알리 칸 역시 도중 케르만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러 군대를 돌리면서 싸움은 흐지부지된다.

로트프 알리 칸이 케르만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아가 모하마드 칸은 아제르바이잔 지방에 신경을 쏟았다. 그는 후계자로 점찍은 바바 칸을 보내 아제르바이잔에 흩어져 있던 여러 칸국들을 흡수 통합하고 아르다빌, 타브리즈까지 함락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아제르바이잔으로 가있는 사이 케르만을 진압한 로트프 알리 칸은 이스파한을 재공략하려 시도했지만.... 중간에 쉬라즈의 총독 하지 에브라힘이 반란을 일으켜 로트프 알리 칸의 뒤통수를 치는 바람에 모든 게 꼬이고야 말았다. 하지 에브라힘은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사절을 보내 쉬라즈를 헌납했고, 크게 기뻐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그를 파르스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트프 알리 칸은 이를 갈며 대군을 모아 쉬라즈 탈환을 시도했다. 그는 쉬라즈 전체를 포위하고 도시 전체를 굶기려 시도했고, 심지어 싸움에 직접 나가 싸우며 사기를 높이기까지 했다. 로트프 알리 칸에게 승기가 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아가 모하마드 칸은 7천 명에 달하는 기병을 보내 쉬라즈를 지키던 하지 에브라힘을 구원하도록 했다. 로트프 알리 칸은 카자르의 구원병과 하지 에브라힘의 군대 모두 꺾는데 성공했지만 쉬라즈 탈환은 실패했다. 게다가 상황은 로트프 알리 칸에게 너무나도 불리했는데, 쉬라즈와 파르스 지방 모두 몇년에 걸친 전쟁 탓에 황폐하기 짝이 없었고 잔드 왕조의 군대 역시 지나치게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아가 모하마드 칸은 직접 군대를 모아 쉬라즈로 진군했는데, 로트프 알리 칸은 페르세폴리스 근처에서 대담한 야습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4] 결국 로트프 알리 칸은 케르만 지방으로 도망갔고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92년 7월 21일 드디어 쉬라즈에 진입했다.

거의 모든 걸 잃어버린 로트프 알리 칸은 케르만으로 도망쳐 재기를 도모했다. 그는 타바스 부족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아발쿠, 스타바나트, 키르, 네이리즈 등의 도시들을 수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다랍을 공성하던 와중 카자르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듣자 어쩔 수 없이 케르만으로 후퇴해야만 했다. 로트프 알리 칸이 아프간 부족들의 도움을 받아 끊임없이 카자르 왕조를 몰아낼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전해들은 아가 모하마드 칸은 직접 케르만으로 진군했다. 5월에 시작된 케르만 공성전은 무려 4개월이나 지속됐다. 어찌나 격렬하게 공성을 치렀던지 케르만 인구 상당수가 죽어나갔고, 수적 열세를 이기지 못한 로트프 알리 칸은 10월 24일 밤 지방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밤 지방의 군주가 로트프 알리 칸을 사로잡아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바쳤고,[5] 아가 모하마드 칸은 케르만의 2만 인구를 싸그리 잡아죽이며 잔드 왕조를 완벽히 끝장냈다.

2.2. 조지아, 캅카스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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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군대와 아가 모하마드 칸의 격돌. 이 전투에서 아가 모하마드 칸이 승리하며 조지아 군대는 치명타를 입는다.

조지아 지방은 1502년 이래 페르시아의 영향력 아래 놓여있었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가 망하고 그 뒤를 이은 아프샤르 왕조가 휘청거리자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란의 재통합을 외치던 아가 모하마드 칸의 눈에 조지아가 따로 놀고 있는 모습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나디르 샤 시대까지만 해도 멀쩡한 이란 영토였고 잔드 왕조 시기의 혼란기가 돼서야 독립한 세력이었기에 당연한 이란의 영토로 보았던 것이다. 조지아를 이란 본토의 일부로 취급하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나디르 샤의 위업을 이어 조지아와 캅카스 지방을 다시 이란에 편입시키려 시도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조지아의 헤라클리오스 2세를 협박해 러시아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 이란의 질서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가장 큰 장애물이던 오스만 제국 역시 무려 400년 만에 이란의 대(對) 조지아 영향력을 인정한 상태였기에 조지아가 이란 밑으로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이란 밑으로 가기 싫었던 헤라클리오스 2세는 예카테리나 2세에게 요청해 최소 3천에 달하는 구원병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6] 이란의 최후통첩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야 만다.

격노한 아가 모하마드 칸은 7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로 진군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좌익은 에리반 방향으로, 우익은 카스피 해를 따라 다게스탄과 쉬르반을 향했으며 중앙은 샤한샤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이끄는 중앙군은 카라바흐 칸국의 수도 슈샤를 포위공격했다. 조지아는 왕세자 알렉산드레를 보내 카라바흐 칸국을 지원할 정도로 열성이었지만 카자르 군대를 견디지 못한 카라바흐 칸국은 결국 항복하고야 말았다. 카자르의 우위를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는 대신, 카자르 군대가 슈샤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는 조건이었다. 물론 아가 모하마드 칸의 입장에는 썩 맘에 차지 않는 조건이었지만 주 목표가 카라바흐 칸국도 아닌 조지아 왕국이었던지라 별말없이 수용했다. 한편 카자르 군대의 좌익은 간자 칸국을, 우익은 에리반 칸국을 항복시켰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중앙군을 우익과 합류시킨 다음 1795년 9월에 최후통첩을 다시 보냈다.

난리가 난 조지아 궁정은 둘로 쪼개졌다. 주화파와 주전파가 나뉘었지만 결국 헤라클리오스 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특사를 보내고 직접 전쟁터로 나가며 끝까지 저항할 것을 선택했다. 그와 동시에 아가 모하마드 칸은 군대를 절반으로 쪼개 직접 트빌리시로 진군했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약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터무니없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죽을 힘을 다해 싸웠다.[7] 하지만 결국 카자르 군대가 간신히 쿠라 강을 건너며 트빌리시 바로 인근까지 진군하고야 말았고, 조지아 군대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모든 게 끝났다. 헤라클리오스 2세는 150여 명의 수행원과 함께 겨우 산악 지방으로 도망쳤다. 한편 카자르 군대는 트빌리시에 입성해 보이는 모든 것을 죽였다. 카자르 군대는 15,000여 명의 포로를 끌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 채로 이란으로 돌아갔다.[8]

2.3. 호라산 침공

조지아를 완벽히 작살낸 아가 모하마드 칸은 호라산 지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호라산은 나디르 샤의 손자이자 늙은 장님이었던 샤로크 샤가 다스리고 있었다. 샤로크 샤는 두라니 왕조 아흐마드 샤 두라니의 봉신이었지만, 아흐마드 샤가 죽자 아프샤르 왕조였던 마슈하드를 중심으로 나름 세력을 구축한 인물이었다. 샤로크 샤를 가만 놔둘 생각이 없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일단 아스트라바드를 거쳐 마슈하드로 향했다. 이란 전체를 통합한 아가 모하마드 샤에게 대들어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달은 마슈하드 일대의 부족장들은 순순히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항복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 족장들에게 테헤란으로 인질을 보낼 것을 요구했고, 이들 모두가 그 명령을 따랐다. 한편 샤로크 샤는 아가 모하마드 칸의 야영지로 먼저 찾아가 고개를 숙였고, 아가 모하마드 칸의 조카 호세인 콜리 칸이 그를 따뜻하게 환대해주었다.

샤로크 샤가 먼저 굽히고 들어오자 아가 모하마드 칸도 괴팍한 성격을 부리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마슈하드에 평화적으로 입성했고, 시민들에게 호의를 베풀기까지 했다. 마슈하드 입성 하루 후에는 아바스 1세의 선례를 따라 걸어서 이맘 레자 사원를 순례했고, 눈물을 흘리며 땅에 입을 맞췄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무려 23일 동안이나 마슈하드에서 순례를 했는데 이때만 해도 마슈하드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의 잔인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는 나디르 샤의 시체를 파내 테헤란으로 재이장하도록 시켰고, 샤로크 샤에게 나디르 샤 소유였던 보물 전체를 바칠 것을 요구했다. 샤로크 샤는 갖고 있던 재산 거의 대부분을 아가 모하마드 칸에게 바쳤지만 그는 샤로크 샤를 끊임없이 의심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샤로크 샤가 나디르 샤의 보석들을 어딘가에 몰래 숨겨두고 있다고 의심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직접 샤로크 샤를 고문하기 시작했는데, 한 번은 심지어 그를 의자에 묶은 채 머리를 깎고 두꺼운 관을 씌운 채 그 관 위에 녹인 을 붓는 짓까지 저지르기도 했다. 기겁한 마슈하드 주민들과 샤로크 샤의 신하들이 샤로크 샤를 살리기 위해 탄원했고, 아가 모하마드 칸은 겨우겨우 그를 풀어주었지만 샤로크 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3. 무능한 후계자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카림 칸 이래 이란을 재통일한 업적을 남긴 분명한 영웅이었다. 하지만 그는 잔인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었고 그가 가는 곳에서는 피비린내가 끊이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1796년 테헤란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카자르 왕조를 개창했다. 그해 러시아가 데르벤트와 바쿠 일대에 다시 영향력을 넓히려 시도했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캅카스 일대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을 재확인했다.

하지만 이렇게 카자르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1797년 암살당하고야 마는데, 이는 앞서 말한 그의 잔혹하기 짝이 없는 성격과 상관이 있었다. 아가 모하마드 샤가 조지아 2차 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슈샤의 군용 막사에 머무르는 동안, 조지아계 하인 '사데그 고르지'와 또다른 시종 '코다다드 에 에스파니'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꽤 목소리를 높이며 시끄럽게 싸웠던지 이 소리를 듣고 짜증났던 아가 모하마드 칸은 둘을 모두 죽여버리라고 명령했다. 에미르와 신하들이 형을 낮춰줄 것을 간청했지만 기분이 상해버린 샤한샤는 들을 생각이 없었다. 다만 마침 그 날이 성스러운 금요일이었기에 사형 집행을 하루 뒤로 미뤘는데, 멍청하게도 이 하인들을 하루 더 그대로 업무를 보도록 시켰다. 당연히 내일 죽을 운명임을 깨달은 하인들은 절망했고, 결국 밤에 몰래 막사로 침입해 아가 모하마드 칸을 단검과 칼로 죽여버렸다. 몇 십년에 걸쳐 페르시아를 통일한 영웅의 끝으로는 너무나도 허망한 최후였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허무하게 암살당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조카였던[9] 파트 알리 샤가 제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는 이 파트 알리 샤 재위기부터 러시아 제국에게 온통 털려나가기 시작한다. 파트 알리 샤는 아가 모하마드 칸이 죽었을 당시 파르스의 총독이었는데, 그가 죽자마자 샤 자리에 올랐다. 그의 재위기 내내 페르시아 문화가 꽃을 피웠고 극도로 엄격한 궁정 문화가 발전했지만 정작 외치는 최악이었다. 그는 그의 사촌 에브라힘 칸을 황폐해진 케르만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상태가 좋지 못했고, 특히 호라산 지방에서는 나디르 샤의 증손자 나데르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호라산 지방에서 카자르 왕조의 영향력이 어찌나 제한적이었는지 1800년~1801년 카자르 왕조의 세무기록을 보면 그 많은 호라산의 주들 가운데 겨우 2개만이 카자르 정부에 세금을 납부할 정도였다.

3.1. 러시아 제국과의 연이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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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붉은색으로 빗금 쳐진 부분이 러시아 제국에게 빼앗긴 페르시아의 영토들이다.

이미 이전부터 조지아, 다게스탄 일대를 노리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아가 모하마드 칸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발빠르게 움직였다. 사실 조지아는 예로부터 이란의 속국으로 살아왔지만 사파비 왕조 이래 하도 많이 탄압을 당해왔던터라 이란에서 떨어져 러시아에 붙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그랬기에 아가 모하마드 칸을 배신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이 너무 호전적이어서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이 죽자 러시아는 슬금슬금 조지아로 재진입했고, 심지어 전통적으로 이란의 일부로 여겨지던 다게스탄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게스탄 침공은 대놓고 페르시아의 영유권을 무시하는 행위였기에, 파트 알리 샤는 러시아가 간자를 함락해 수많은 페르시아인들을 강제로 몰아낸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1804년 파트 알리 샤는 대군을 모아 조지아 침공을 명령했다. 시아파 성직자들 역시 러시아에 대한 결사항전을 주장했기에 명분은 차고 넘쳤다. 전쟁은 초반에는 페르시아의 승리로 장식되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페르시아에게 불리해졌다. 러시아가 카자르 군대에게는 없는 근대식 대포와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술적으로 우위를 점한 러시아는 신나게 카자르 군대를 밀어붙였다. 열세에 몰린 파트 알리 샤는 예전에 영국과 맺은 군사 협정을 근거로[10] 근대식 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그 조약의 대상이 프랑스가 적일 때에만 한정된다는 핑계를 대며 카자르 왕조를 도와주기를 거부했다.

영국에게 청한 도움의 손길이 좌절당하자 파트 알리 샤는 프랑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핀켄슈타인 조약'을 맺고 군사 원조를 요청했는데, 막 나폴레옹이 무기를 준비해서 보내주기 직전에 프랑스와 러시아가 휴전 협상을 맺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당연히 무기 원조는 허사로 돌아갔다. 그나마 영국이 마음을 바꿔서 카자르 왕조를 지원해주나 싶었지만 이마저도 무위로 돌아갔고 영국은 오히려 카자르 왕조에게 조지아를 포기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전쟁을 끝내며 한숨돌린 러시아는 페르시아 전선으로 군대를 쏟아붓기 시작했고, 전쟁은 이란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1813년 초반에 러시아 군대가 란카란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고 같은 해에 타브리즈까지 다다랐다. 전쟁에서 패퇴한 카자르 왕조는 그해 '굴리스탄 조약'을 맺어 조지아의 모든 영토, 캅카스 다게스탄 남부, 아제르바이잔 거의 전체를 러시아에 뺏겼다. 러시아는 파트 알리 샤가 죽으면 그가 지정한 후계자 아바스 미르자 왕자를 샤로 지지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파트 알리 샤와 카자르 왕조에게 굴리스탄 조약은 역사에 남을만한 엄청난 치욕이었다.[11]

굴리스탄 조약이 체결된지 13년이 지난 1826년, 파트 알리 샤는 지난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결심한다. 영국의 조언가들이 계속 샤의 귀에 러시아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았기 때문. 파트 알리 샤는 왕세자 아바스 미르자 왕자에게 3만 5천에 달하는 대군을 맡기고 7월 16일 전쟁을 선포했다. 초반에는 저번 전쟁과 마찬가지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쿠, 쿠바, 렌코란 등 아제르바이잔 지방의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석권하는 데 성공했고, 저번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하지만 겨울이 닥치면서 상황이 또 역전됐다. 1827년 5월에는 러시아의 캅카스 총독이던 이반 파스케비차가 역으로 돌격하기 시작하며 다시 영토를 빼앗더니 10월 1일에는 예레반까지 뚫어버렸다. 예레반 함락 14일 후에는 타브리즈도 함락당했다. 1828년 1월에는 페르시아 내륙까지 진출해 러시아군이 우르미아 호수까지 진격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바스 미르자 왕세자는 눈물을 머금고 1828년 2월 2일 황급히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투르크만차이 조약은 일전의 굴리스탄 조약보다 더 페르시아에 괴멸적인 결과를 몰고 온 조약이었다.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동부에 위치한 예레반 칸국, 나흐츠반 칸국, 아제르바이잔 남동부의 타일리시 칸국, 오르두바드와 무간 지방이 통째로 러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 이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캅카스 영토 전부를 러시아에게 헌납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은 페르시아가 먼저 러시아를 침공한 것이었기에 1천만 루피의 금을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었다. 러시아는 대신 아바스 미르자 왕자를 파트 알리 샤의 후계자로 인정해주었는데, 이는 연이은 전쟁 패배로 하도 파트 알리 샤와 아바스 미르자 왕자의 권위가 흔들리는 통에 러시아의 지지마저 없으면 파트 알리 샤 사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던 탓도 컸다. 이 조약으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란에서 캅카스 지방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1795년부터 이란으로 강제로 끌려와 살고 있었던 아르메니아인들 대부분이 사실상의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물론 반대로 카자르 왕조와 페르시아의 힘은 날로 약해졌다.

두 번이나 러시아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파트 알리 샤는 이후 러시아에 바싹 굽히면서 지냈다. 심지어 1829년 러시아 외교관이자 극작가였던 알렉산드르 그리예도프가 테헤란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쿠스라우 미르자 왕자를 직접 니콜라이 1세에 파견해 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보내고 그가 가진 보석들 중 가장 거대한 '샤 다이아몬드'를 전달할 정도였다. 고작 외교관 하나 죽었다고 이 정도로 사과하는 건 페르시아의 권위가 얼마나 실추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4. 계속되는 혼란과 쇠퇴

파트 알리 샤가 죽은 이후에도 상황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악화되는 모습만 보였다. 파트 알리 샤가 죽고 즉위한 모하마드 샤 카자르[12]는 몇 달간의 짧은 내전을 끝내고 새로운 샤로 즉위했다. 그는 자신의 어릴 적 교사였던 카'엠 마캄을 재상으로 임명했는데, 이미 카'엠 마캄에 대한 샤의 신뢰가 점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카'엠 마캄의 행보 역시 적을 수없이 만들었기에 정세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카'엠 마캄은 모든 왕자들에게 모하마드 샤에 대한 충성 맹세를 강제했고 따르지 않는 자는 재산과 영지를 몰수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역시 모하마드 샤의 내란 진압 과정에서 그를 지원했기에 상을 바라고 있었으나 카'엠 마캄의 반대로 아무 것도 떨어지지 않자 그에게 원한이 쌓인 상태였고, 모하마드 샤의 삼촌 알라야르 칸 야세프 역시 카'엠 마캄의 충성 맹세 강요로 그에 대한 비호감도가 최고치를 막 찍던 상태였다.

카'엠 마캄은 러시아 제국과 영국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그러자 그의 정적들은 당장 모하마드 샤에게 달려가 카'엠 마캄이 월권을 시도하고 있다고 일러바쳤다. 정적들이 끊임없이 샤한샤를 설득하자 홀랑 넘어간 모하마드 샤는 결국 1835년 6월 카'엠 마캄을 체포하고 옥에 가두어버렸으며 4일 후에 아예 죽여버렸다. 대재상을 죽여버린 모하마드 샤는 몇 달동안 재상 없이 국정을 운영하다가, 어릴 적 종교적 스승이자 수피즘 신자 '하즈 미르자 아카시'를 새 재상으로 임명했다. 신하들의 반대가 빗발쳤지만 어릴적부터 아카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워낙 굳건했기에 그냥 씹어버렸다.[13] 혼란상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았다. 1837년에는 혼란스러운 케르만 지방을 안정시키라고 보낸 아가 칸 1세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14]

야심차게 추진한 헤라트 원정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하마드 샤는 즉위 직후부터 아프가니스탄 헤라트 일대를 먹으려 시도했다. 아프가니스탄 고원 지대에 사는 페르시아계 부족들을 통합하고 그 곳에 사로잡혀있던 수많은 이란인들을 해방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허나 이는 인도 제국을 다스리고 있던 영국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페르시아는 일전의 투르크만차이 조약 11조에 따라 러시아에게 국경 내에 무역로를 내준 상태였는데, 이 페르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먹어버린다면 이는 곧 러시아인들이 아프가니스탄을 마음대로 왕래할 수 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했지만 1837년에 결국 전쟁이 터졌다. 모하마드 샤는 8만 대군을 이끌었고, 헤라트의 캄란 샤는 여러 수니파 부족들의 연합군을 모아 그에게 맞섰다.

전쟁 초기에는 헤라트의 추위, 식량 부족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군대가 분전했다. 이미 분열될대로 분열된 아프간 부족 연합군은 페르시아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일부 부족들은 페르시아에 항복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헤라트 함락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헤라트는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카자르 군대에 맞서 싸웠는데, 이때문에 공성전이 지나치게 길어지자 카자르 병사들이 물자 부족과 추위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외세의 간섭이었다. 헤라트 침공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던 러시아는 그새 말을 바꿨고, 영국은 처음에는 협상을 제안했지만 모하마드 샤가 이를 거절하자 대놓고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봄베이에서 출발한 영국 함대가 이란 해안가의 섬을 강점하고 암묵적으로 페르시아를 협박했으며 페르시아 본토 곳곳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영국의 외교적 압박이 날로 거세지자 모하마드 샤는 눈물을 머금고 철군해야만 했다. 칸다하르 지방의 아프간 군벌 일부가 페르시아에 충성을 유지하긴 했지만 모하마드 샤의 헤라트 원정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이와중에 이스파한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매우 부유하고 저명한 성직자였던 모함마드 바게르 샤프티가 천대받는 하층민족인 루티인들을 규합해 1838년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라마잔 샤'라는 새로운 왕을 세웠던 것이다. 그는 심지어 라마잔 샤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하는가 하면 옛 사파비 왕조의 후손의 지지를 얻어내기까지 했다. 특히 그동안 천대받던 루티인들은 바게르 샤프티에게 열렬히 동참했고, 덕분에 바게르 샤프티는 1838년부터 1840년까지 약 2년여에 걸쳐 이스파한을 다스릴 수 있었다. 소식을 전해들은 모하마드 샤는 격노했다. 그는 6만 대군을 이끌고 헤라트에서 이스파한으로 되돌아갔고, 종교 성지로 여겨지던 이스파한에 포격을 불사하며 반란군을 쓸어버리고자 했다. 수많은 대군이 몰려오자 겁에 질린 바게르 샤프티는 이스파한의 북문을 열었고 대부분의 루티인들은 남문으로 도망쳤다. 이스파한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한 모하마드 샤는 루티인들을 몰살했고 샤프티의 아들을 아스트라바드로 유배했다.[15] 이스파한의 반란 진압으로 헤라트의 뼈아픈 패배를 잊고 싶었던 그는 자신에게 '이슬람의 전사'라는 뜻의 '가지' 칭호를 하사한다.

오스만 제국과의 뿌리깊은 국경분쟁도 지속된다. 오스만 제국은 사파비 왕조 시절부터 페르시아와 국경 분쟁을 해온 오랜 라이벌이었다. 당연히 이 국경분쟁이 카자르 왕조 시절까지 내려오게 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오스만 제국의 바그다드 총독인 알리 레자 파샤가 1837년 코람샤흐르 지방을 약탈한 것에서 시작됐다. 격분한 카자르 왕조는 바로 오스만에게 격렬히 항의했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와 오스만 사이의 해묵은 국경 갈등이 재점화됐다. 1842년에 에르주눔에서 협상이 시작되었고 약 5년 가까이 이어졌다. 각종 사건사고들이 터지며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다가, 결국 샤트 알 아랍과 코람샤흐르가 페르시아의 소유로, 조하브와 술라이마니야가 오스만의 소유로 확정된다. 러시아와 영국의 중재로 결국 이렇게 협상안이 타결되나 싶었지만... 오스만 정부가 몰래 3개의 조항을 추가하고야 말았다. 이 조항에 따르면 페르시아는 샤트 알 아랍의 영유권을 빼앗겼고, 코람샤흐르에 대한 소유도 제한된다. 당연히 페르시아가 이를 받아들일 리가 만무했다. 모하마드 샤는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지만 그가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었다.[16]

1840년대에는 페르시아만에서 노예무역이 금지되었다. 이같은 배경에는 영국의 압력이 있었다. 1840년대까지만 해도 약 4~5000여 명의 노예들이 매년 페르시아에서 거래되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영국 측에서 페르시아에 압력을 넣었던 것. 모하마드 샤는 영국의 제안에 부정적이었지만 영국이 오스만의 노예무역 폐지를 예시로 들면서 끊임없이 설득하자 결국 제안에 설득당했다. 그로써 1840년대 말에 페르시아 만의 노예 거래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노예 소유 자체와 육지에서의 노예 거래는 여전히 유지되었다는 한계는 있었다. 대재상 아카시는 전국에서 노예 거래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람들은 그의 뜻에 잘 따라주지 않았다. 대다수의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노예 무역이 신의 뜻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해석했고, 대부분의 페르시아인들은 노예무역 폐지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아카시는 제 입맛에 맞는 율법학자들을 골라 홍보하는 등 노예무역 폐지에 힘을 기울였다.

모하마드 샤는 말년에 끔찍한 통풍에 시달렸다. 하도 고통이 심하자 샤는 국정에 관심을 잃어버렸고, 모든 권력은 그가 가장 총애하던 권신 아카시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아카시는 탐욕스럽기 짝이 없었던 인물이었으며 아편에 찌든 인간이었다. 제대로 국정이 돌아갈 리가 없었지만 모하마드 샤는 죽을 때까지 아카시에 대한 통제를 하지 않았다. 왕위 후계구도도 흔들렸는데, 자신의 건강을 우려한 모하마드 샤가 세워놓은 섭정 바흐만 미르자가 왕세자 나스레딘 왕세자를 내쫓고 왕위에 오를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스레딘이 결혼동맹으로 기반을 공고히 하며 이같은 혼란은 수습되었지만 카자르 왕조의 권위는 더욱 약해졌다.

5. 미약한 개혁의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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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르 카비르 대재상 페르시아 최초의 근대식 대학 '다르 올 포눈'
전근대적인 사회제도와 후진적인 행정시스템으로 망해가던 카자르 왕조는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재위기에 미약한 개혁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1848년 아버지 모하마드 샤가 드디어 세상을 떠나자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수석 가정교사이자 조언자였던 아미르 카비르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개혁주의자 아미르 카비르를 재상으로 세웠고, 1846년부터 시작되어왔던 하산 칸 살라르의 반란을 종결지었다. 당시 카자르 왕족이던 하산 칸 살라르가 모하마드 샤의 건강이 위중한 틈을 타 마슈하드와 호라산 지방 대부분을 장악해버렸는데,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중앙군이 1850년 봄에 마슈하드를 포위해 공성에 성공하면서 결국 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다. 이후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아미르 카비르와 함께 페르시아의 첫 근대적 개혁을 시도하면서 국내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가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비교 사건이 터졌다. 평범한 상인 계급 출신이던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어느 날부터 자신을 마흐디, 곧 새로운 시아파 이맘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를 불리면서 나중에는 스스로를 신의 전령이라고 주장했다. 카자르 왕조의 폐단과 부정부패에 지쳐있던 사람들은 그 곁에 구름처럼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아랍어로 '문'을 뜻하는 '바압'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바비교도'들이라고 불렸다. 그는 페르시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교리를 설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 개혁을 제시했는데, 당연히 이런 그의 모습의 기존의 시아파 성직자들에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성직자들은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하루빨리 감옥에 처넣으라고 탄원했고, 이를 견디다 못한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그를 체포한 뒤 감호소를 바꾸어가며 여러 곳에 수감했다. 다만 그를 따르는 신도들이 워낙 많았던 탓에 차마 죽이지는 못했다.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타브리즈에서 배교죄로 재판받아 채찍질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그는 타브리즈에서 체리크 요새로 이송 수감되었다가, 1850년 중반에 아미르 카비르 재상에 의해 총살형으로 살해당했다. 2년 후에야 사형이 집행된 이유는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에 대한 사람들의 지지도가 확연히 떨어졌기 때문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일부 바비교도들이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암살을 시도했던 탓이 컸다. 이렇게 되자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의 신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고 수 만명이 끌려가거나 학살당했다. 한편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타브리즈로 다시 끌려와 1850년 7월 9일 병영 뜰에서 수 십명의 병사들에게 총을 맞아 죽었다. 사이이드 알리 무함마드가 죽자 그의 추종자들은 두 분파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 무리인 아잘리파는 카자르 왕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1905년 혁명에 동참했고, 두 번째 분파는 수피 지도자였던 바하올라를 추종하면서 지금의 바하이교의 시작을 알렸다.[17]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재위 초반부에 야심찬 근대식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반쯤 파산 상태나 다름없는 위치였는데, 재정을 메꾸기 위해서 정부 지출을 최대한 줄이는 한편 정부 예산과 샤의 개인용 자산을 구분했다. 지방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쳐부수며 기반을 다진 아미르 카비르는 조세 제도 개편을 통해 누락되는 세금을 모조리 거둬들이려 시도하기도 했다. 아미르 카비르는 성직자들의 사법부 개입 권한을 억제했고 여러 군사 공장들을 건설했으며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페르시아 최초의 근대식 신문을 발간하는 업적을 남겼다. 개혁의 동력이 떨어진 치세 중반부에도 나라 곳곳에 전신과 우편 서비스를 깔고 테헤란에 그랜드 바자르를 세우는 등 인프라를 확충했고, 국가 직속의 상비군을 늘렸으며 '페르시아 코사크 여단'[18]을 창설하며 근대식 군사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 재위기 가장 큰 업적은 1851년 최초의 서양식, 근대식 교육 기관인 '다르 올 포눈'의 설립이다. 사실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업적이라기보다는 아미르 카비르 대재상의 업적에 더 가깝지만 어쨌든 다르 올 포눈은 중동과 페르시아를 통틀어 최초의 현대식 대학이었다. 서양식 근대 교육에 관심이 많던 샤는 경제학, 언어학, 의학, 수학, 법률, 지리, 역사 등 다양한 과목들을 가르치도록 했고, 나중에 추가적인 확장을 할 수 있도록 다르 올 포눈을 도시 외곽에 지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아미르 카비르는 저멀리 에서부터 직접 유럽인 교수들을 초청할 정도로 다르 올 포눈 창립에 열성적이었다.

하지만 아미르 카비르의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대표적으로 재정 개선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연금 수급자들의 연금 지급을 중지한 일은 수많은 기득권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벌인 일이었고, 울레마[19]들이 자신의 모스크나 사원에서 범죄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하고자 한 시도는 엄청난 반대 끝에 반쯤 무산되고야 말았다. 마찬가지로 사법부에 대거 분포한 성직자들의 입김을 억누른 것도 아미르 카비르에 대한 여론을 악화하는 또다른 요인이 되었다. 결국 대왕대비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반대파들의 연합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나스레딘 샤 카자르를 살살 꼬셔서 결국 아미르 카비르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하고야 만다. 페르시아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개혁에 열심이었던 아미르 카비르가 1852년 1월 10일 살해당하고 말자 페르시아의 이른 근대화의 기회는 완전히 물건너가고야 말았다.

페르시아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는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성향도 한몫했다. 기본적으로 그의 개혁은 독단적이고 남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방향이었기에 수많은 반대 세력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는 국민들에 대한 완전한 통제력을 장악하는 데에도 실패했고 국민들이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납득하게 만드는 데에도 실패했다. 게다가 왕가의 권위도 너무나 약했다. 페르시아는 특성상 부족들이 지역을 휘어잡고 있는 상태였고 이들은 모두 자치적인 군대를 데리고 있었다. 반면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친위군은 즉위 당시 겨우 3,000여 명에 불과했다. 개혁에 가장 필수적인 무력이 부족했으니 당연히 제대로 개혁이 이루어지기란 불가능에 더 가까웠다. 그가 개교시킨 다르 올 포눈은 입학 정원이 너무나도 적었으며, 조세 개혁은 했지만 징수원의 숫자 부족으로 기껏 거둬들인 세입이 재무부가 아닌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뒷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세리들은 세금을 남용했고 정부는 썩어빠졌다는 평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6. 외세의 이권 침탈과 그레이트 게임

6.1. 담배 불매운동

아미르 카비르를 실각시킨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전형적인 암군의 면모를 보이며 국내 이권을 외세에 거리낌없이 팔아넘겼다. 개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병크가 바로 이 담배 사건이었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1890년 3월 20일 50년 동안의 담배 전매권을 영국의 G. F. 탈버트 소령에게 팔아치웠다. 그 대가로 탈버트 소령은 연간 이익의 4분의 1을 샤에게 납부하고 자본에 대한 5%의 배당금과 연간 15,000파운드, 현재 가치로 31억 원 정도를 매년 바치면 되었다.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 전국민이 골초인 나라에서 담배 전매권을 팔아치운 미친 짓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페르시아에서만 나는 희귀한 담배 품종들은 상당한 가치를 가진 산업이었는데, 이 품종들을 수출할 길이 막혀버렸다. 게다가 페르시아의 모든 담배 농사꾼들은 먼저 전매회사에 강제로 담배를 매매해야 했고, 페르시아인들은 그 회사에서만 담배를 사서 피울 수 있었다. 담배 회사가 판매하는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해결 방법은 없었다.

당시 담배 농업에 종사하는 페르시아인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하지만 샤가 멍청하게 담배 전매권을 팔아버리면서 이들의 생업에는 치명타가 가해졌고, 페르시아 농부들의 평균 수입은 수직하락했다. 이제는 자신이 재배한 담배의 가격을 마음대로 정할 수도 없었고 키우는 담배의 양도 일일이 통제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샤가 대중들 몰래 체결한 이 조약이 국민들에게 공개되자 당연히 엄청난 분노가 터져나왔다. 샤는 조약을 밀어붙였지만 테헤란, 이스파한 같은 주요 대도시들에서는 플래카드와 함께 대중 시위들이 벌어졌다.

1891년 봄부터 본격적인 시위들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소농민과 일부 담배 판매업자들을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성직자들이 가담하자 그 규모가 생각도 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불어나게 된다. 성직자들도 만약 샤가 이 정도의 양보를 해준다면 외세가 페르시아에 더욱 깊숙이 침투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조약이 코란에 나온 일할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주장하며 조약을 당장에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성직자 계급들이 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자 시위는 거세게 불어났다.

시위는 1891년 12월 페르시아의 최고 이슬람 권위자인 미르자 하산 시라지가 담배 사용을 금하는 칙령 즉 '파트와'를 발표하면서 정점으로 치달았다. 테헤란의 시민들은 담배 불매운동을 펼쳤고 이 불매운동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사람들은 바자르와 시장들의 문을 닫았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시도했지만, 만일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시 안그래도 영국의 페르시아 담배 산업 독점에 불만을 품고 있던 러시아 제국이 이를 빌미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우려에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어찌나 불매운동이 강력했던지 심지어 샤의 하렘에 머무르던 여인들조차 담배를 끊었을 정도였다. 평소 페르시아인들이 수입의 3분의 1을 담배 구매에 썼고 라마단 기간에도 을 안먹을지언정 파이프에 담배 채우는 일만은 꼬박꼬박 지켰던 걸 생각하면 이는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지자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1892년 1월 결국 담배 전매권 판매를 취소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담배 전매권 판매가 취소되었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는 조약 파기로 인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만 했는데, 약 50만 파운드, 인플레이션을 넣어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무려 1016억 원에 달하는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국민들에게 강제로 굴복했다는 모욕감에 더더욱 폐쇄적인 성격이 되었고, 재위 말기에는 어떠한 형태의 서양 여행이나 서양식 교육도 모두 금지하는 등 개혁과는 백만 광년 정도 거리가 있는 망한 정책들만 골라서 펼쳤다.

6.2. 영국 러시아의 충돌

나스레딘 샤 카자르가 알아서 내정을 개판으로 만들고 있던 와중, 한창 전세계를 두고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 러시아 제국은 페르시아에서 가장 활발하게 외교적 전쟁을 벌였다. 서로 페르시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나마 개혁 성향이던 아미르 카비르 대재상이 집권하고 있었을 당시에는 이같은 상황이 덜했다. 그는 영국이나 러시아나 둘다 신뢰하지 않았으며 둘 사이에서 외줄타기 외교로 실리를 추구했다. 아미르 카비르는 러시아와 영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려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러시아인들이 아스트라바드 지역에서 병원과 무역소를 운영할 수 없게 만드는가 하면 카스피 해 남동쪽의 아슈라데 섬을 불법점거하던 러시아인들을 쫓아냈다. 영국에게도 마찬가지라 페르시아 만을 통과하는 페르시아 선박에 대한 영국의 취조권을 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미국, 오스트리아 등 페르시아와 접점이 없었던 국가들과 우호 관계를 수립하려 노력했지만... 이를 고깝게 보던 영국과 러시아가 힘을 합쳐 아미르 카비르를 몰아내면서 페르시아의 외교 상황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집권 초기인 1856년에 헤라트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파트 알리 샤 시절에 러시아에 빼앗긴 캅카스 지방을 되찾기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기에 헤라트라도 다시 먹어보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영국이 이에 극렬히 반발했다. 이미 카자르 왕조가 반쯤 친(親) 러시아 세력이라 보고 있었던 영국이 페르시아의 헤라트 공격은 곧 인도 제국에 대한 위협이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카자르 왕조에게 헤라트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으나 나스레딘 샤 카자르가 이를 듣지 않자 바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를 '앵글로-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른다. 영국은 페르시아 만을 공격해 강을 따라 도시들을 연달아 함락하며 북상했다. 화들짝 놀란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그제서야 강화 협상을 시작했고, 3월 4일 '파리 조약'을 맺는 굴욕을 맛봤다. 카자르 왕조는 파리 조약으로 인해 헤라트에서 철군해야만 했고, 아프가니스탄 왕국을 인정해주는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페르시아의 대(對) 아프가니스탄 영향력이 모조리 날아간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1873년, 1878년, 1889년 유럽을 연달아 방문하면서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근대 페르시아 군주'라는 타이틀을 달기도 했다. 그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서양의 발전된 근대적 문화를 즐겼지만 정작 개혁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첫 유럽 순방을 떠나기 1년 전인 1872년에는 영국의 줄리어스 데 로이터 남작에게 페르시아 전역의 도로, 제분소, 전신, 공장, 자원 등에 대한 통제권을 팔아넘겼다. 로이터는 그 대가로 5년 간의 매출과 20년 간의 순이익의 60%에 해당하는 금액을 나스레딘 샤 카자르에게 지불했다. 물론 페르시아 국민들에게는 엄청난 손해였지만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그딴건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시아에서 로이터 남작 개인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질것을 우려한 영국 정부에서 이를 중단시키면서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실패했다. 허나 확실한 건 이따위 조약을 좋다고 맺을 정도로 당시 카자르 왕실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나스레딘 샤 카자르와 그의 아들 모자파르 앗딘 샤의 재위기는 한창 그레이트 게임이 가장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로서, 카자르 왕조는 그레이트 게임의 가장 대표적인 희생국들 중 하나였다. 러시아는 1828년 체결된 투르크만차이 조약 이래 야금야금 페르시아 영토를 먹어갔다. 카자르 왕조가 곧 멸망할 수준까지 약해지자 러시아는 나중에 전략을 바꿔 페르시아를 지원해주는 척 하며 물밑에서 조종하는 수법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방법으로 거의 1세기 가까이 페르시아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영국도 만만치 않았다. 러시아의 남하를 신경질적으로 경계하던 영국도 페르시아에 가까이 접근했는데, 페르시아 궁정은 결국 러시아와 영국의 은행가들에게 시달리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1879년에 러시아 장교들이 페르시아 궁정에 진입한 이래 90년대에는 러시아인들이 대놓고 궁에서 설쳤고, 영국인들도 이에 질세라 페르시아의 주권을 무시한 채 활보했다. 영국과 러시아는 19세기 내내 경쟁적으로 페르시아에 전신, 철도 등을 깔며 이권 침탈을 가속화했다. 외세의 간섭이 이어지자 카자르 왕조의 인기는 바닥을 쳤는데, 오죽하면 영국인들이 영국 정부에게 '우리가 나가면 이 왕조는 바로 엎어질 것이다'라고 보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7. 입헌 혁명

나스레딘 샤 카자르는 1896년 암살당했다. 앞선 1891년 샤는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를 담배 불매운동을 선동한 혐의로 추방했다. 아프가니는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지만 오스만의 황제와도 마찰을 빚으면서 이스탄불에서 허망하게 사망했지만,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아프가니의 추종자였던 미르자 레자 케르마니가 나스레딘 샤 카자르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평소 나스레딘 샤 카자르를 증오하던 미르자 레자 케르마니는 1896년 5월 1일, 나스레딘 샤 카자르가 테헤란 인근 사원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노리고 그를 총으로 쏴 암살해버렸다.[20] 나스레딘 샤 카자르가 죽자 그의 후계자 모자파르 앗딘 샤 카자르가 새로운 페르시아의 샤한샤로 즉위했다.

모자파르 앗딘 샤는 나스레딘 샤 카자르를 능가하는 암군이었다. 그는 35년 간이나 왕세자 지위에 있었지만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아 국가의 주요 중대사에 제대로 참여하거나 배울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사치와 향락에 몰두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나름 근대화를 시도해보기라도 한 나스레딘 샤 카자르와도 비교도 힘들 정도로 무능한 인간이었다. 그가 즉위할 당시 이미 페르시아 궁정은 파산할랑 말랑한 아슬아슬한 상태였는데, 모자파르 앗딘 샤는 이를 갚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더더욱 부채를 늘렸다. 그는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더욱 많은 빚을 내서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몰두했고, 나중에는 빚을 내서 기존의 빚과 이자를 갚는 데에도 벅찬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렸다. 막대한 부채의 이자를 갚고 조금 여윳돈이 생긴다고 해도 이를 경제 개발에 투자할 생각도 않고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으로만 모든 재화를 탕진했다.

1901년에는 페르시아에서 석유가 터졌다. 잘만 하면 대박을 칠 수 있는 기회였지만 모자파르 앗딘 샤는 그 기회를 한 방에 날려먹었다. 이란의 북부 5개 주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하여 60년 간의 석유 채굴 독점권을 영국인 사업가 윌리엄 녹스 다시에게 넘긴 초대형 사고를 쳐버린 것이었다. 초기에는 윌리엄 녹스 다시가 유전 탐사에 실패하며 개인 재산을 소진했지만, 마침내 1908년에 이란 남부의 마스제드 솔레이만에서 유전을 발견해냈고 이를 바탕으로 1909년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를 세우며 상상을 초월하는 이득을 그대로 챙겨갔다. 카자르 왕조는 그때서야 석유의 중요성을 절감했지만 이미 독점권을 헌납해버렸던 탓에 회사의 연간 수입의 16%만을 가져갈 수 있었다. 자원의 중요성을 몰랐던 무능한 정부의 한계였다. 1914년 영국-페르시아 석유회사의 지분 51%가 영국 정부에게 매각되며 카자르 왕조는 영국 해군의 주요 연료 공급처 신세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샤가 허구한 날 개인의 향락을 일삼으며 사고를 치고 다니자 국민들의 지지는 땅에 떨어졌다. 샤의 유럽 여행 자금을 조달하겠답시고 러시아로부터 두 건의 거대한 차관을 지원받질 않나, 서양이 찔러준 약간의 뇌물을 받고 도로 건설 독점권, 수입품에 대한 관세 징수권 등을 있는대로 팔아넘기자 왕가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외세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은 무슬림 성직자, 귀족들, 평민들 등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퍼져나갔고, 샤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에 대한 제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는 결국 1906년의 입헌 혁명을 불러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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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처음 개회한 페르시아의 첫 의회 '마즐리스(Majlis)'.

1905년 샤의 개인 여행 비용을 충당키 위해 관세를 물리자 이에 폭발한 상인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그해 12월에 상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자르를 닫아걸었고, 테헤란 일대 전체에서 시위대들이 들고 일어났다. 깜짝 놀란 샤는 총리를 교체하고 자신의 권력을 일부 '정의의 집'에 이양하는 데 동의하며 한발짝 물러섰다. 하지만 시위대가 해산하고 샤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시위대는 1906년 여름에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상인들이 주도하는 1만 명에 달하는 인원이 영국 대사관 안에 결집했다. 시위대는 의회 결성을 요구했고 그해 1906년 8월에 샤는 요구안을 받아들였다. 그해 가을에 165명의 의원들을 뽑는 첫 의회 선거가 치러졌으며 압도적 다수의 의원들이 테헤란, 상인 계급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롭게 구성된 의회는 1906년 10월에 처음 개회했다. 이미 늙어 지쳐버린 모자파르 앗단 샤는 1906년 12월 30일에 헌법 제정안에 서명했고, 그가 5일 후에 승하하며 이 것이 그의 거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 되어버렸다.

모자파르 앗딘 샤가 황제의 권한을 일부 의회에 양도하고 헌법 제정을 통해 제한적인 테두리 내에서 언론, 집회, 결사, 자유, 생명, 재산권을 보장했다지만 그의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 카자르는 이걸 그대로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죽하면 자신의 즉위식에도 단 한 명의 입헌파도 초대하지 않을 정도였다. 모자파르 앗딘 샤 사후 즉위한 새 황제 모하마드 알리 샤는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받아 헌법을 폐지하려 시도했다. 그는 1908년 6월 의회 건물을 폭격했고 12월에 국회의원들을 체포했으며 국회를 폐쇄했다. 하지만 샤에 대한 신뢰도는 이미 땅바닥으로 떨어진 채 오래였다. 의원들은 이스파한, 타브리즈 등에서 재결집해 민중군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격했다. 1909년 7월 민중군이 샤를 폐위시키고 헌정 질서를 재건했다. 모하마드 알리 샤는 러시아로 도망갔다가 1925년 4월에 이탈리아에서 망명 중 쓸쓸히 사망했다.

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의회 세력은 본격적인 입헌군주정 도입을 하려 시도했다. 의회는 1909년 7월 16일 모하마드 알리 샤의 아들 아흐마드 샤 카자르를 새 샤한샤로 올리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의회 세력은 곧 심각한 난관에 부닥쳤는데, 입헌 혁명과 내전이 페르시아의 국력을 심각하게 약화시켰으며 무역은 거의 사라진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도망친 모하마드 알리 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황좌를 되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입헌파의 모든 희망은 영국과 러시아가 대놓고 페르시아에 개입하며 허무하게 날라갔다. 영국은 페르시아 남쪽을, 러시아는 페르시아 북쪽을 영유권으로 삼고 중간에 완충지대를 두는 안에 양국이 합의해버린 것이었다.[21] 카자르 왕조는 이 합의로 인해 나라가 여러 조각 나버렸고, 거의 반쯤 무정부 상태가 되는 최악의 상태에 직면했다.

나이 어린 아흐마드 샤가 제위에 앉아 있었기에 왕실 최고 어른 아조드 알 물크가 섭정을 맡았다. 그는 여러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근대화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미국인 자문가 '모건 슈스터'를 재무부 장관으로 영입하는 파격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하지만 모건 슈스터가 세금을 거두기 위해 러시아의 영향권이 미치는 지방에 세리를 파견하자 러시아가 발끈했고, 결국 러시아와 영국이 힘을 합쳐 슈스터를 파면하라는 압력을 넣자 아흐마드 샤는 그대로 굴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 군대는 슈스터 사건을 빌미로 타브리즈에 군대를 파견해 의회를 닫아걸었으며 주요 입헌파 인물들을 숙청했다. 1914년 6월에 이르자 러시아 군대는 거의 페르시아 북부 일대는 자신의 영토로 삼다시피 했고, 영국도 이에 질세라 남쪽의 부족들에게 독자적으로 충성 맹세를 받는 등 페르시아를 사분오열시켰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페르시아는 여러 열강들의 치열한 싸움터였던 것이다.

8. 레자 샤 팔라비의 쿠데타와 멸망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유럽과 휘말리기 싫었던 카자르 왕조는 즉각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반쯤 망한 상태의 왕조가 중립을 선언한다고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전쟁 발발 직후 카자르 왕조를 침공했다. 가장 큰 이유는 1910년부터 러시아 군대가 페르시아 북부에 대규모로 주둔하고 있었는데,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서로 적국이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군대와 오스만 군대는 1917년까지 약 3년여에 걸쳐 치열하게 페르시아 땅에서 전쟁을 벌였다. 오스만 제국이라면 치를 떨던 아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의용군들이 러시아의 편을 들어 맞서 싸웠다. 하지만 그러던 중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터졌고 더이상 대전쟁에 개입할 여유가 없어진 러시아는 모든 군대를 페르시아에서 철군했다. 러시아가 빠지자 살판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의 빈자리를 채워 전쟁이 끝날 때까지 페르시아 북부를 실효지배했다. 이때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만 군인들은 수없이 많은 아르메니아인, 아시리아인들을 탄압했는데 이게 그 유명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페르시아에서는 역대급 규모의 대기근이 일어났다. 영국과 러시아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면서 모든 식량의 이동을 엄격히 통제했고, 심지어 러시아의 경우 러시아 군용식량이 아니면 모든 식량의 이동을 금지했을 정도였다. 밀 100kg의 가격이 20개의 금화를 주고 사야 할 정도로 비싸졌고 페르시아 내부의 식량 대부분은 영국과 러시아의 군용 식량으로 반출됐다. 1916년의 심각한 가뭄까지 겹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1918년부터는 대규모 기근이 돌기 시작했다. 테헤란을 포함한 대부분의 대도시들에서 빵집과 제분소에 대한 약탈이 벌어졌다. 인플루엔자, 콜레라, 티푸스 같은 역병들도 창궐했지만 카자르 왕조는 이를 방어할 역량이 없었다. 이 기근으로 200만 명에 달하는 페르시아인들이 굶어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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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최후의 군주 ' 아흐마드 샤' 레자 샤 팔라비 1921년 쿠데타 도중의 레자 칸과 사예드 자아웃딘 타바타바이
나라는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지만 영국은 러시아가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페르시아를 집어삼킬 생각만 가득했다. 그나마 러시아와 영국의 견제로 형식적으로나마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 허울마저 벗어던지려 시도한 것이다. 영국은 페르시아산 석유에 대한 독점권을 더욱 강화하고 안정적으로 석유를 수급하기 위해 1919년 8월 아흐마드 샤를 협박해 '영국-페르시아 협정'을 체결했다. 사실상 페르시아를 영국의 속국으로 만드는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이 조약으로 카자르 왕조는 영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으며 영국은 이란 내 모든 유전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미국 등 여러 서구 열강들이 영국의 행태를 비판했고, 특히 이란 의회의 비준마저도 받지 않은 불법적인 조약이었으며 여론이 워낙에 안좋았기에 1921년 6월 22일에 슬그머니 폐기되어 버렸다.

카자르 왕조의 상황은 날로 심각해졌다.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새로 들어선 소련이 이란 내의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해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우도록 도와주는가 하면[22] 곳곳에서 내란과 반란,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아흐마드 샤는 무능했고 몸도 병약했으며 의회 역시 나약하고 오합지졸이어서 이를 해결할 가망이 없었다. 이쯤 되자 카자르 왕조는 수도 테헤란 부근 외에는 통치력이 미치는 곳이 아예 없었으며 카자르 왕조가 망하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카자르 왕조 내의 유일한 근대식 군대는 코사크 여단 뿐이었는데, 이 여단의 지휘자가 바로 레자 칸 장군이었다. 레자 칸 장군은 1921년 2월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심했고, 그해 2월 18일 별 저항 없이 수도 테헤란에 입성했다.

레자 칸은 아흐마드 샤를 그대로 샤한샤 자리에 둔 채로 기존 정부를 해산하고 스스로를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사예드 자아웃딘 타바타바이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신정부를 꾸린 레자 칸은 1921년 소련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은 소련의 지원을 잃고 그대로 진압당했다. 레자 칸은 원하는대로 총리를 갈아치우며 사실상의 절대 권력자로 행세했다. 당연히 레자 칸에 대해 반대하는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레자 칸에게 모두 진압당했다. 아흐마드 샤는 건강상의 이유로 1923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쫓겨난 것에 더 가까웠지만... 레자 칸이 장악한 의회는 1925년 10월 31일 공식적으로 아흐마드 샤를 폐위하고 레자 칸을 레자 샤 팔라비라는 이름으로 새 로 추대했다.[23] 이로써 132년에 걸친 카자르 왕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페르시아 최후의 왕조인 팔라비 왕조가 시작된다.



[1] 이는 쉬라즈에 잔드 왕실 하렘의 일원이자 아가 모하마드 칸의 고모인 카디자 베굼이 있었던 덕도 있었다. [2] 당시 담간 지방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데벨루 부족은 모하마드 하산 칸의 죽음에 일조했던 부족이었다. 모하마드 하산 칸이 살해당한 직후 아스트라바드의 통치권을 따낸 부족이었기 때문. 당연히 둘 사이의 감정이 좋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3] 길란의 옛 지배자가 러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다시 길란을 재탈환하려 시도했는데, 지방 토후들이 그를 배신하고 아가 모하마드 칸에 붙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그는 옛적에 그가 가족을 몰살시켰던 한 토후에게 복수당해서 죽는다. [4] 로트프 알리 칸은 소규모의 정예병만을 이끌고 아가 모하마드 칸의 진지를 기습했다. 어느 정도 피해를 입혔다고 판단한 로트프 알리 칸은 야습을 중지한 채로 군대를 물렸는데, 그날 아침 날이 밝고 나자 정작 아가 모하마드 칸의 피해가 경미한 수준이라는 걸 알고 크게 허탈해했다. [5] 이때 로트프 알리 칸은 튀르크인 노예들에게 공개적으로 윤간을 당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후 눈알이 뽑힌 뒤 테헤란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가 결국 25세의 젊은 나이에 질식사로 죽임당했다고 한다. 어찌나 치욕스럽게 죽었던지 카자르 왕조의 샤들도 로트프 알리 칸이 어떤 고문들을 당했는지 적지 않았다. 군주의 위치에 있던 자를 그토록 잔혹하게 대했다는 것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6] 물론 무시당했다. [7] 어찌나 방어가 거셌는지 중간에 아가 모하마드 칸이 퇴각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간에 일부 반역자들이 조지아 군대가 더이상 싸울 여력이 없다는 사실을 누설했고, 아가 모하마드 칸은 귀환 계획을 취소하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향으로 전략을 수립한다. [8] 봉신국을 자처하던 조지아 왕국이 이렇게 비참하고 털려나갔으니 러시아 제국도 위신상 이란에 전쟁을 선포했다. 예카테리나 2세는 4월에 이란 국경으로 군대를 보냈지만 그해에 황제가 바뀌었고 새로 즉위한 파벨 1세는 그해 11월에 군대를 다시 물렸다. [9] 아가 모하마드 칸은 이미 어릴 적 거세당해서 자손이 없었다. [10] 나폴레옹이 유럽을 마구 휩쓸고 다니던 시절에 프랑스의 급부상에 위협을 느낀 영국이 페르시아와 체결한 상호보호조약이다. [11] 참고로 이 굴리스탄 조약은 그레이트 게임의 시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남쪽으로 진출하려 시도했는데, 굴리스탄 조약을 통해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가시화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대영제국이 본격적으로 러시아 견제를 시작한 것이다. [12] 왕세자였던 아바스 미르자 왕자가 아니다. 아바스 미르자 왕자는 아버지보다도 일찍 죽어버렸고, 1834년에 아바스 미르자 왕자의 아들 모하마드 샤 카자르가 새 왕세자로 임명된다. 그가 왕세자로 임명될 수 있었던 건 이전부터 아바스 미르자 왕자 아래에서 헤라트 원정에서 상당한 성과를 냈기 때문이었다. [13] 아카시는 모하마드 샤 재위기 내내 대재상직을 유지하며 굳건한 총애를 받았다. 그가 수피즘 신도였던 탓에 모하마드 샤 역시 수피즘을 탄압하지 않고 오히려 장려하기까지 했고, 이는 페르시아인들이 그 둘을 경멸조로 묶어부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4] 아가 칸 1세는 지역을 안정화하는데 성공했지만, 안정화 직후 샤가 자신을 교체하고 샤의 측근을 제 자리에 앉히려 한다는 걸 깨닫고 격분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자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압당했다. 아가 칸 1세는 1838년까지 연금당해 포로로 지내다가 그 후에 가족과 함께 여생을 보내도록 허락받았다. [15] 샤프티가 아무리 반란자일지라도 고명한 성직자였기에 함부로 죽일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잘못 그를 죽여버리면 전 무슬림들의 항의가 일어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16]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의 국경 분쟁은 오스만 제국이 망하고 난 후에도 계속된다. 오스만에서 독립해나온 이라크가 이란 간의 국경 분쟁을 그대로 이어갔기 때문. [17] 아잘리파가 결국에는 급진적인 해석을 포기하고 다시 12이맘파로 합류한 것과 다르게, 바하이교도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이슬람의 분파가 아닌 별개의 종교라고 창립 초기부터 주장했기 때문에 이슬람과는 아예 다른 종교로 분류되고 있다. 바하이교 신도들은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바압'이라고 부르며, 그가 예수와 후세인의 환생이라 주장한 적이 없고, 대신 에녹과 요한을 계승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18] 이름만 들어도 알겠지만 러시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19] Ullema. 이슬람 율법학자를 의미한다. 이들은 카자르 왕조 초기부터 왕조 자체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왕권 강화에 끊임없는 걸림돌이었다. [20] 살짝 멀리서 총을 쐈기 때문에 나스레딘 샤 카자르가 조금만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으면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유언은 '만약 내가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통치 방식을 바꿀텐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그대로 죽어버리면서 나스레딘 샤 카자르의 통치는 거기서 끝나버렸다. [21] 영국-러시아 협정이라고 해서 오랜 분쟁지역이던 아프가니스탄 티베트 등의 영토 문제를 마무리지으며 서로 화해했는데 여기에는 카자르 왕조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었다. [22] 1921년 소련과 카자르 왕조와의 관계가 진전되며 소련이 페르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끊자 공화국은 부질없이 멸망한다. [23] 아흐마드 샤는 그렇게 유럽 여행길이 그대로 망명길이 되어버렸다. 그는 5년을 더 살다가 193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동생이자 옛 왕세자였던 모함마드 하산 미르자가 카자르 왕통의 계승을 주장하지만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