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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8 15:53:11

부산포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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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성
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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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454F><colcolor=#fff> 부산포왜성
[ruby(釜, ruby=プ)][ruby(山, ruby=サン)][ruby(浦, ruby=ポ)][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usan Japanese Fortress
파일:ImageView1.jpg
이칭 동로부산왜채(東路釜山倭寨)
부산노왜채(釜山老倭寨)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
범천증산성(凡川甑山城)
부산적진(釜山賊陳)
증산왜성(甑山倭城)
소조천성(小早川城)
부영(釜營)
모성(母城)
형태 윤곽식 산성
면적 약 80,000m² 이상
건설 1592년 (선조 25년)
모리 데루모토 모리 히데모토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범일동

1. 개요2. 역사3. 위치 및 구조
3.1. 제4곽(四ノ郭) ・ 주곽부 주출입구(內大手口)3.2. 제3곽(三ノ郭)
3.2.1. 동측 제3곽3.2.2. 서측 제3곽
3.3. 제2곽(二ノ郭)
3.3.1. 치(雉) ・ 막힌 고구치(虎口)3.3.2. 스미야구라다이(隅櫓台)3.3.3. 정삼품통정대부부령김씨지묘(正三品通政大夫扶寧金氏之墓)
3.4. 제1곽(一ノ郭) ・ 천수(天守)
4. 데지로(出城)
4.1. 자성대왜성4.2. 박문구왜성4.3. 추목도왜성
5. 과거 모습6. 가치7. 교통8. 여담9. 외부 링크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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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 좌천동에 걸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제7군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쌓았다. 부산포왜성은 현재 본성(本城)과 데지로(出城) 1개소가 남아 있는데, 본 문서에서는 본성인 증산왜성(甑山倭城)에 대해서 다루기로 한다.

2. 역사

[ 조선왕조실록 / 난중일기 보기 · 닫기 ]
> 왜구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첨사 정발은 마침 절영도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정발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咸聚釜山城內 官舍盡數撤去 築土造家己所巢穴多 至百餘戶 城外東西山麓 閭閣櫛比 連穡接屋 亦幾三百餘戶 皆是倭人 自作之家 其中大含層階 粉壁有若佛寺 原其所爲痛憤

부산진성 안을 취하여 관아를 모두 헐어 버리고 그 자리에 흙을 다져 지은 집이 많아 일백 호에 이르렀습니다. 성 밖 동쪽과 서쪽의 산기슭[1]에 집이 즐비한데 담장[2]을 이어 접한 가옥 또한 3백여 호입니다. 모두 왜인(倭人)이 스스로 지은 집인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층계 위에 들어선 것[3]은 벽에 분을 발랐고 마치 불당 같았습니다. 그곳을 보니 통분하였습니다.
이순신이 올린 부산포 해전 관련 장계, 1592년 9월경
9월 초1일 밤 2시에 출항하여 몰운대에 이르니, 경상우수사가 먼저 그가 거느린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와, 다대포 앞바다로 돌아가 대었습니다. 우수사 이억기(李億祺) ∙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더불어 서로 약속하고서 절영도 남쪽 바다에 이르러 부산을 바라보니, 좌우 산기스락에 적선이 무수하게 줄지어 대어 있을 뿐 아니라 좌우의 산중턱과 성안에 초가를 지어 흙을 쌓고 담 쌓는 것이 가득 하거늘 저는 울분을 참지 못했습니다.
난중일기 수록 서신 中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하였다. "왜적이 전에는 가지고 있던 우마를 전부 팔아 버리더니 이달 20일부터는 진주를 공격하려고 밤낮없이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전일에 팔아 버린 우마를 도로 사들입니다. 부산 · 동래 · 서평(西平) · 다대포(多大浦) 등지에는 지역을 구획하여 성을 쌓으려고 성터를 설계하는데 주위가 대략 50여 리는 됩니다. 동래창(東萊倉)의 곡식을 부산포로 옮겨두고 일본 군량은 부산 앞바다의 아차도(阿次島)에 운반해 놓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2월 18일 기사
이 대신들에게 전교하기를, "(...) 또 내가 몹시 걱정되는 것이 있다. 적들이 부산에 웅거해 있으면서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고 있는데 중국군이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철수한다면 어떻게 하여야겠는가?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
조선왕조실록 1593년 5월 28일 기사
명나라의 위세로 비록 서울에 있는 왜적은 물러갔으나 밀양 이동은 아직도 다시 모여 있으며 방화와 약탈을 자행함이 전보다 더욱 심합니다. 심지어는 부산을 자기들의 옛 소굴이라 일컬으며 돌을 세워 경계를 표시하여 명장을 속이면서 조금도 바다를 건너려는 뜻이 없으니 현재의 사세가 매우 위급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6월 1일 기사
이 정원에 하교하였다. "내가 오늘날의 사태를 관망해 보니, 만분의 우려만 있지 일호의 희망도 없다. 대체로 적추 평수길(平秀吉)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키고 나서 다음으로 중국을 엿보려하니, 이는 그 뜻이 처음부터 범연한 도적에 비할 바가 아니다. (...) 지금 왜적은 경성을 버리고 부산에 소굴을 만들고서 호남 등에 군침을 삼키고 있으니, 그 흉모와 비계(秘計)는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중국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강화를 청하기를 마치 비굴한 자와 같이 하였다. 그러니 수길과 같은 악독한 자가 어찌 넘보지 않겠는가. 복종하여 꼬리를 칠 리가 만무하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6월 29일 기사
평안도 우방어사 김응서(金應瑞)가 치계하였다. "신이 독포사(督捕使) 박진(朴晉), 좌방어사 정희현(鄭希玄),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 등과 합병(合兵)하여 경상도 밀양 땅에 진을 치고 있으면서 근일 적세를 탐지해 보니 양산·울산 등지의 적이 '''부산· 동래 · 서생포 · 제포 등지로 진(鎭)을 옮겨 널리 퍼져 둔취(屯聚)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7월 18일 기사
이 비변사에 전교하였다. "전일 중국 조정의 품첩(稟帖)에 '7월 22일에 왜적이 다 바다를 건너갈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22일에 보낸 관찰사의 서장을 보건대 왜적이 여전히 둔취해 있고, 19일에 왜적이 부산포 산 위에 성을 쌓고 있는 것을 정탐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중국 조정에서 물러갈 것이라고 통보한 말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조선왕조실록 1593년 8월 9일 기사
송 경략(宋經略)에게 이자(移咨)하여 진주사(陳奏使)로 떠난 배신(陪臣)을 속히 발송(發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자문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달 10일에 받은 배신 이영(李瑛) 등의 치계에 의하면 '7월 15일에 서(徐)·사(謝) 두 명사(明使)가 일본에서 돌아왔기에 신들이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와 더불어 두 명사를 따라 22일에 함께 부산진을 출발하여 돌아오면서 보건대, 왜적이 연해(沿海)의 8성(城)에 소혈(巢穴)를 이루고서 여전히 머물러 있고 돌아가지 않았으니, 그 흉모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하였고, (...)"
조선왕조실록 1593년 8월 13일 기사
이 이르기를, "둔취한 난민이 어디 있소이까. 소서행장(小西行長)은 부산포에 있고 가등청정(加藤淸正) 서생포에 있으니 적이 주둔하고 있는 것은 대인들도 모두 알고 있지 않소이까. 왜적이 이미 바다를 건너 모두 돌아갔다면 심 유격(沈遊擊)이 어찌하여 적진으로 들어갔겠소이까. 그리고 전후 주문(奏聞)한 것이 비일 비재하였으나 모두 중도에서 저지당하여 상달되지 못하였소." 하니,
조선왕조실록 1594년 1월 14일 기사
현재 머물고 있는 일본군의 수효는 서생포에 5천, 임랑포에 3천, 기장에 3천, 동래에 1천, 부산포에 1만, 양산의 구법곡에 3천, 좌수영에 3백, 김해에 1만 8천, 안골포에 2천, 가덕에 7백, 웅천 · 제포에 4천, 거제에 7천여 명인데 귀국에서 만일 2 ~ 3월 이전에 기회를 타서 거사하면 다행히 초멸할 수 있겠지만 만일 그 시기를 놓치고 일본의 정병 예졸이 4 ~ 5월 사이에 모두 나오면 조선의 병마가 비록 천만이라 하더라도 아마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1594년 3월 18일 기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晉)의 치계에는 '해 함안군수(該咸安郡守) 안옥(安沃)이 「3월 26일 도망쳐온 남자 허영명(許泳溟)이, 지난 해 4월 중에 적에게 잡혀가 일본국 낭고야(郞古耶) 지방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은 바로 적추(賊酋) 풍신수길이 있는 곳이었다. 지난해 8월 3일 수길이 본국으로 돌아가고 이름을 모르는 추왜(酋倭)가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고서 부산 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들과 6개월에 한 번씩 교대를 시켰다고 공칭하였다. 」는 내용의 비보를 하였다.’고 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 1594년 10월 10일 기사
소조천(小早川)은 바로 모리요원(毛利耀元)의 조카이며 (...) 임진난 초에 모리요원은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釜山)에 가서 머물고 소조천은 군사를 거느리고 호남을 침범하였다가 고산(高山)·금산(錦山)에서 패전당한 뒤에 개성(開城)에 머물렀었는데,
조선왕조실록 1594년 11월 11일 기사
병부(兵部)가 공경히 성유(聖諭)를 받든 일로 이자(移咨)하였다. "(...) 지금 특별히 관원을 보내어 격문(檄文)을 전하니, 조선의 군신은 성심으로 소국을 사랑하시는 황상의 인자한 마음을 우러러 받들어 적당한 배신(陪臣)을 차견하여 앞서 부산에 가서 직접 행장을 만나서 중국 조정의 은위(恩威)를 유시하고 두 나라가 서로 수호하여 이왕의 잘못한 죄악을 생각지 말고, 저 부산의 왜적이 다 철수해 가고 책방(柵房)이 소훼(燒毁)된 뒤 성지(聖旨)에 따라 사실대로 주보(奏報)해서 책사가 강을 건너가 봉왕하는데 편리하게 하며 혹시라도 지의(遲疑)하여 스스로 후환을 끼치지 말기 바랍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1월 4일 기사
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 부산에는 아긴노산소우(阿緊奴山小于)[4], 울산[5]에는 모리유긴로가미(毛里有緊老加未)[6]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2월 10일 기사
그후 각처의 장관(將官)이 보고한 것은 「부산 · 동래 등처의 적의 군영과 둔책(屯柵)은 전과 같이 그대로 있으며, 중국의 사신이 오기를 기다려 철회하겠다고 말하는데 별달리 왕래하는 행적은 없다. 」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4월 6일 기사
각 진영의 왜병 수목(數目)은, (...) 부산 산휘원(山輝元) 2만, (...) 이것이 일본에서 원래 들어온 수목입니다. 그 뒤에 줄거나 늘어난 것이 일정하지 않으니, 행장의 한 영을 보면 그 밖의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갖추어 아룁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6월 8일 기사
소서행장이 여안(如安)에게 보낸 편지에 「26일 신시(申時)에 이미 돌아왔다. 관백 풍신정성(豊臣正城) 등 두 사람을 차견하여 방옥(房屋)을 불사르고 접대하는 등의 일을 분담하게 했는데, 각 진영에 통보하여 점차로 철수시킬 것이다. 첫 번째로 철수하는 부대는 부산에 있는 대장(大將) 문돈(門敦)과 그의 소속, 둘째 부대는 가등청정과 그의 소속, 셋째 부대는 각 진영의 소장(小將)들 순이다. 각처의 방옥은 철수하는 즉시 불사르되, 다만 부산의 방옥만은 남겨둘 것이다. 내가 그곳으로 이주하였다가 명사(明使)를 기다려 동시에 건너갈 것이다. 」고 하였는데, (...)
조선왕조실록』, 1595년 7월 2일 기사
부산 평행장의 진영 안은 전후 수만여 호이고, 왜추(倭酋)가 중국 사신 및 유격(遊擊)을 위하여 큰 집 두 채를 지었는데 매우 장려(壯麗)하였습니다. 적의 진영은 높은 데에 의지하고 험준한 데에 의거하였으며,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해 있는데 배 5백 ~ 6백 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동래와 부산의 20리 길에는 벼가 무성하였습니다. (...) 대개 16개 진영 중에 반수 이상은 도해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두모포 · 동래 · 부산 · 죽도 · 가덕 · 안골포 6개 진영이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9월 28일 기사
부산을 탐심하였더니, 머물러 있던 적은 다 도해하고 행장이 이곳으로 진을 옮겨 하장(下將) 6인을 거느리고 있는데 각기 수천 명을 거느렸으며 혹은 포수 · 검수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배의 수효는 6백 80여 척이었습니다. 또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왜인 정성(正成)이란 자가 동쪽에 들어가 살고 있는데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으며 사신이 부산에 이른 지 거의 10일이나 되었는데도 와서 뵙지 않았다 합니다. 수축한 신성(新城)은 주위가 6∼7리이고 또 시장을 개설하여 왜적의 남녀 및 우리 나라 백성들이 날마다 물화(物貨)를 교역하고 있었습니다. 동평(東平)으로부터 범천(凡川)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거접하는 자는 3백여 호나 될 정도로 많았습니다. 좌자천(佐子川) 근처에 포작(鮑作)하며 거접하는 자가 또 1백여 호나 되었습니다. 주산(主山) 위에 석성을 쌓아 3층각을 지어놓고 왜적이 사람을 금지하여 들어가 보지 못하도록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군기 등의 물건을 들여놓았으므로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 11월 2일 기사
행장이 심 유격(沈遊擊)에게 준 서신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풍신행장(豊臣行長)이 노야(老爺)께서 천사(天使)보다 먼저 바다를 건너기를 요구하였으나, 노야께서 사체로 인하여 오랫동안 지연시키시며 감히 믿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의논하여 약조를 맺고 노야의 약속을 따른 후에 바다를 건너기로 하고 또 다시 두세번 어렵게 요구하자, 노야는 비로소 유첩(諭帖)을 썼습니다. 이제 앞서의 약조에 의하여 노야의 존명(尊命)을 따를 것입니다. 다만 청정이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가덕 · 안골포 · 김해 등의 진영이 모두 부산으로 집결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노야께서는 명호옥(名護屋) 지방에 도착하여 대합(大閤)을 보던 안 보던 간에 각 진영의 병마를 다 철수한 후에 노야가 몸소 부산에 이르러 천사를 청하여 바다를 건너기를 바랍니다. 두번 다시 털끝만한 다른 말도 없을 것으로서 노야께서는 절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행장 역시 반드시 소인들의 말을 들어 스스로 좋은 일을 그르치지 않겠습니다. 만약에 황당한 말이 있으면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어 내려다 볼 것입니다. 유격 심 노야 대전(臺前). 풍신행장."
조선왕조실록』, 1596년 1월 22일 기사
'왜서(倭書) 한 장을 얻어 보았는데 그 내용에는 「고려수번장(高麗戍番將)으로 부산포 소서진주수(小西津州守), 서생포 하산주계수(賀散主計守), 죽도(竹島)는 갈도가하수(鍻嶋加賀守), 가덕 도진병고(島津兵庫), 안골포는 일번(一番)에 삼이기(森伊紀), 이번(二番)에 흑전갑비수(黑田甲非守)이다. 」는 등의 글자가 있었으므로, 원서(原書)를 가지고 귀국하여 바친다.' 하였고 (...)
조선왕조실록』, 1596년 12월 29일 기사
적장 행장 정성(正成)이 이미 책사(冊使)가 돌아올 적에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동래(東萊)와 부산(釜山)의 옛 진영에 둔거(屯據)하였고, (...)
조선왕조실록』, 1597년 4월 15일 기사
제장을 모아놓고 관백이 약속하기를 「조선이 매번 이처럼 나를 속이고 있으니 내가 분함을 참지 못하겠다. (...) 행장 고성, 의지(義智) 거제, 죽도의 왜는 창원(昌原)과 죽도와 부산, 다른 왜장은 기장, 안골포의 왜는 가덕도, 가덕도의 왜와 청정 서생포, 이런 식으로 8개 지역에 나누어 둔거하고, 그 나머지는 다시 그 나라 안으로 들어가라. (...) 만약 내 말을 듣지 않으면 너희 처자를 모두 죽이겠다. 」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6월 14일 기사
유격이 말하기를, "지금 남원에 왜적이 주둔하고 있습니까? 부산에 있는 왜적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하니, 이 이르기를, "보고가 왔습니다만, 숫자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습니다. 부산은 그들의 본거지이기 때문에 많은 적이 주둔해 있고 남원은 이미 철수하였습니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7년 10월 22일 기사
도원수 권율이 요여문(要汝文)이라고 하는 항왜를 올려보냈는데, 그의 공초(供招)를 입계합니다. 이 왜노를 야여문(也汝文)에게 맡겨 함께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의 공초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이는 30세이고 박다주(博多州)에 사는데 심안돈오(沈安頓吾)의 군졸로 임진년에 바다를 건너 이곳으로 나와서 부산에 머물러 있다가 3년 후에 본토(本土)로 돌아갔다. 금년 1월경에 다시 나와 부산포(釜山浦)에 머물고 있었다. (...) 현재 부산에 남아 있는 남녀 조선인의 숫자는 각각 2천여 명이고, 식량은 대개 인원수를 계산해 총괄하여 지급하기 때문에 실수(實數)는 알 수 없다. (...) 조선 사람에게는 모두 요패(腰牌)를 지급하여 진영(陣營)을 출입하게 하고 있는데 요패가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죄가 있으면 즉시 죽인다. 현재 부산의 두 곳에 성(城)을 수축(修築)하고 있는데 군졸을 역사시킬 때는 하루에 세 끼니를 먹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역사가 끝나지 않았다. 지난번 울산에서 중국군과 접전할 때 심안돈오는 부산에 있었는데, 접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3백여 명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거느리고 울산을 향해 떠났다가 중도에서 돌아왔다. (...)"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5월 5일 기사
정경세가 또 아뢰었다. "왜적의 다소(多少)와 허실(虛實)을 막연히 알 길이 없어 신이 늘 분개해 왔었습니다. 지난번에 아병(牙兵) 30여 명을 깊이 들여보내 정탐케 했더니, 영장(領將) 길운(吉雲)의 치보(馳報) 내에 "동래 선암사(仙巖寺)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김해와 죽도가 환히 눈에 들어왔는데, 부산의 왜진(倭陣)은 3분의 1이 철수하여 돌아갔다. 대개 들으니 청정 죽도에 합진(合陣)할 일로 7월 20일에 들어갔는데 죽도의 왜적은 그 무리가 심히 많다 하며, 또 7월 8일에 적장의 사위가 일본에서 나왔다고 사승(寺僧) 탄웅(坦雄)과 각선(覺仙) 등이 와서 통지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8월 13일 기사
우선 각처의 초보(哨報)에 의거하면, (...) 부산포에 약 4천 ~ 5천 명이 있고, 양산군에 약 4천 ~ 5천 명이 있으니 곧 갑비수(甲斐守)가 거느리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9월 28일 기사
미시(未時)에 이 형 군문(邢軍門)[7]의 관사에 나아갔다. (...) 군문이 말하기를, "왜적이 이미 도망쳤으니 국왕은 기쁩니까, 기쁘지 않습니까? 부산의 왜적도 이미 진채를 불태웠다고 합니다." 하니, 이 말하기를, "기쁨을 이루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군문이 말하기를, "2백 척은 모두 이미 바다를 건너갔고 남은 왜적이 조금 있다고 합니다. 만약 오래 머물러 있을 계획이라면 어찌 진채를 불태웠겠습니까. 제가 이미 3로의 장수에게 분부하여 일시에 군사를 집합시켜 섬멸하게 하였습니다. 귀방의 수군 총병(水軍摠兵)은 누구입니까? 속히 내려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신임 총병은 이시언(李時言)입니다. 지금 전라도 지방에 있는데 즉시 달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하니, (...)
조선왕조실록』, 1598년 11월 26일 기사
서 급사(徐給事)의 접반사 신점(申點)이 아뢰었다. "급사와 어사 및 왕 안찰(王按察) · 마 제독(麻提督)부산에 도착하여 동 · 서편의 적채(賊寨)에 올라가 조망하였습니다. 그때 여러 공들이 모두 말하기를 "외채는 공파할 수 있어도 내성은 천연적인 요새니 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성에 다가가면 인명만 애석할 뿐인데 적이 물러갔으니 이는 곧 천운이었다." 하자, 마 제독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와 같기 때문에 나로서도 쳐부술 수 없었다."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8년 12월 29일 기사
이 사례하고, 이어서 묻기를, "대인이 몸소 부산 · 도산(島山) 및 연해의 적채(賊寨)까지 가셨었는데, 형세가 어떠했습니까?"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이번에 왜적이 물러간 것은 관백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듯합니다. 조만간 다시 쳐들어 올 것인데 그 해독은 반드시 더욱 심할 것입니다. 그러니 방수(防守)하는 데에 십분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적채의 배치와 형세의 험난하고 평이함은 배신이 직접 보았으니 제가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1월 9일 기사
이광정(李光庭)이 아뢰기를, "(...) 우도(右道)는 전부가 비어 있으니 반드시 별도로 조처해야 하는데 동해는 극히 험난하여 적이 침범하지 못하니 동해안 진보(鎭堡)의 군사를 부산으로 옮긴다면 좋을 듯합니다. (...)" 하였다. 이 이르기를, "적의 성채(城寨)가 매우 험난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쌓았던가?" 하니, 이광정이 아뢰기를, "성을 쌓은 돌이 아주 무거워 운반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성의 토대는 대단히 넓었으니 윗부분은 차츰 뾰족한 모양이었으며, 성문의 길은 구부러져[8] 곧장 달려 들어가기가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석성(石城)의 높이는 2장(丈)이고 석성의 위에 또 토벽(土壁)[9]을 1장 높이로 쌓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성을 함락시키기 어렵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에 한 말인가?" 하니, 이광정이 아뢰기를, "성이 견고한 데다 철환(鐵丸)을 비오듯 쏘아대므로 함락시키기가 어려운데 부산과 서생포에 있는 성이 모두 그렇습니다. 적이 물러가던 날 신의 군관(軍官)들이 바라보니, 전선이 온 바다를 뒤덮고 가는데 바닷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그 중에 한 척이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가는데 중국 사람인 듯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적의 성은 우리 나라 성의 제도와 너무도 다르다. 우리 나라는 서쪽에 있는 성채가 극히 볼 것 없으니 우리 나라 사람은 지모가 없다고 하겠다. 왜인을 우리 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2월 2일 기사
진린이 말하기를, "부산성은 성곽이 불완전하여 적을 막을 수 없으나 만약 20 ~ 30만 냥의 은자(銀子)를 가지고 무기를 보완하고 용사를 모집한다면 적이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이곳은 대마도와 가까와 순풍을 만나면 하루에 오갈 수 있어 적이 오는 길목이니 굳게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이 나라를 이처럼 깊이 생각하시니 감격스럽습니다." 하고, 상이 윤돈(尹暾)에게 이르기를, "부득이 부산성을 개축한다면 왜적의 옛 보루를 철거하고 쌓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돈이 아뢰기를, "그래야 합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9년 2월 7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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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 「부산진지도」에 나타난 부산포왜성과 부산고기(釜山故基)
임진왜란 왜군 한반도에 1차적으로 지은 왜성들 가운데 하나로,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왜군의 총사령부, 구심점이자 최후의 보루로서 기능했던 성이다. 본래 이 지역은 부산진성(釜山鎭城)[10]이 있던 곳이다.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인 부산진 전투가 일어났던 곳으로, 정발(鄭撥) 장군이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을 보면 선조 25년(1592) 4월 옛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곧바로 축성을 시작하여 불과 넉 달 만에 기본만 축성한 듯하다.[11] 그러나 일본 쪽 기록을 보면 축조는 선조 26년(1593) 3월부터 8월까지 약 5개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성에는 왜군 1만여 명과 배 400여 척이 상시 주둔했는데 최후방의 본진답게 교대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때에 따라 주둔하는 왜장들의 이름이 달라진다.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가토 기요마사,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등 수많은 왜장들이 이 성을 거쳐갔다.

선조 31년(1598) 8월 18일 히데요시가 사망하여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10월 15일 다섯 다이로(大老)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앞으로 명령서를 보내 '울산이 공격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지시했다.

10월 27일, 다섯 다이로 중 하나이자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구로다에게 명령서를 내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협의 하에 서생포왜성에서 부산포왜성으로 퇴각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11월 24일 가토 구로다는 부산포왜성을 소각(燒却)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왜란이 끝난 후 현재 좌천동에 있던 부산포첨절제사영(釜山浦僉節制使營)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에 다시 설치되었고, 본래 부산포왜성의 본성이었던 증산(甑山)의 성곽은 버려졌다. 세월이 흘러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 한반도를 점령한 일본인들은 자기들 조상이 쌓은 것이니만큼 증산왜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에도 큰 문제 의식 없이 유지됐다. 1963년 1월 21일에는 부산일본성(釜山日本城)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35호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1969년 8월 1일 '보존가치가 없다.'는 사유로 사적 지정이 해제됐다. 그 이후 문화재 등급을 부여받지 못하고 별다른 보존조치 없이 대체로 방치되어 오다가, 현재는 산노마루 부분까지가 증산공원(甑山公園)이 되었다. 가장 아래의 곡륜(曲輪) 위에는 좌천시민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부산포왜성을 쌓은 산의 모습이 마치 떡시루나 솥뚜껑같이 생겼다고 하여 증산(甑山),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이곳의 포구 이름은 부산포(富山浦)였다. 왜란 직전 부산포(釜山浦)로 바뀌기 때문에 맞는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와전의 역사가 짧지 않은지, 고종 9년(1872) 지방지도에도 증산왜성이 부산고기(釜山故基)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일부 학자들은 부산(富山)이라는 이름이 고려시대 때부터 이곳에 있었던 부산 부곡(部曲)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3. 위치 및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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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실측 부산지도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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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 제국대학 도서관 소장 『부산성도(釜山城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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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왜성 일대 항공사진 (1950)
한국에 남아 있는 왜성 중에서 범위가 가장 넓다. 동래왜성(東萊倭城), 박문구왜성(迫門口倭城),[12] 영도왜성(影島倭城), 자성대왜성을 지성(支城)으로 두었을 것이다. 지성을 제외하고서라도 좌천동 행정복지센터에서 구세군 부산영문교회 언저리까지 감싸는, 방대한 소토구루와(外郭)를 운용했다고 추정한다.

현재 남아 있는 증산왜성만 따지면 윤곽식 산성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미 소실된 여러 데마루(出丸)와 데지로(出城)들을 합하면 평산성에 가깝다. 부산포를 끼고 자성대를 둘러싼 채 동천(東川) 하구까지를 긴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로 감싸 왜군 본영(本營)다운 규모이다. 대부분 내탁(內托)을 다졌으나,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북서측 방면은 협축으로 쌓아 긴 도베이(土塀)와 야구라(櫓)가 설치되었던 듯하다. 규슈제국대학(九州帝國大學)에서 제작한 부산성도(釜山城圖)를 보면 본성의 서북측 바깥에 데지로(出城)를 설치했으므로, 북서쪽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의 동선을 고려한 것 같다. 이시가키는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는 메쌓기(野面積み), 석축의 열을 맞추어 쌓은 줄눈쌓기(布積み) 기법을 취하였다.

그러나 구한말부터 도심으로 개발되어 이시가키가 많이 파괴되었고, 그마저도 1950년대 이후 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본성 이외의 부가적인 시설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또한 본성도 증산공원으로 꾸며지면서 협축(夾築)으로 쌓았던 부분을 삭평(削平)하거나 고구치(虎口)를 메워 버리는 등 상당히 변형되었다.

3.1. 제4곽(四ノ郭) ・ 주곽부 주출입구(內大手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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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왜성의 상징이 된 고구치의 이시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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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천체육단련장 기단에 잔존하는 이시가키 측면
현재 좌천아파트와 좌천동 체력단련장이 들어서 있는 곳은 한때 증산왜성의 전면 방어를 맡았던 부곽(副郭) 자리였다. 현재는 콘크리트 기초와 성토(盛土)로 인해 그 윤곽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지만, 좌천어린이집의 옆에 높이 5m가량 되는 이시가키(石垣)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이시가키는 제4곽으로 진입하는 전면부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의 우측 석축이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길이 좁아 꽤 위압감을 준다.

좌천체육단련장 콘크리트 기단 아래에는 제4곽의 우각부가 남아 있다. 왜성의 모서리에서 자주 보이는 산기즈미(算木積み)가 뚜렷하게 남아 한눈에 관찰할 수 있다. 이곳은 작은 등산로의 옆으로 내려가야 볼 수 있는데, 밭으로 활용되는 부지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답사에 주의해야 한다.

3.2. 제3곽(三ノ郭)

부산포왜성의 제3곽은 동측과 서측으로 나뉜다. 가운데의 제4곽에서 양쪽의 제3곽을 거쳐 제2곽으로 올라가는 구조이다. 동측 제3곽은 현재 좌성초등학교가 자리한 큰 골짜기를 감싸듯이 증산 동쪽 봉우리까지 길게 뻗어 이 골짜기가 일종의 해자(堀, ほり) 노릇을 하였다. 지금은 매립되었지만 이 골짜기는 좌천동의 이름의 유래가 된 좌자천(佐自川)이 발원하는 곳이기도 하다. 양측 제3곽의 끄트머리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와 부산포왜성의 외곽을 이루던 노보리이시가키는 현재 소실되었으나, 1950년 위성사진을 보면 당시까지는 육안으로 확인할 만큼 명확하게 유적이 남아 있었다.

3.2.1. 동측 제3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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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공원 게이트볼장 북동측의 고구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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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도서관 기단에 잔존하는 이시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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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곽 남측 절벽의 이시가키
부산포왜성의 동측 제3곽은 그 흔적을 찾기 쉽지 않다. 성의 동쪽 부분으로 길게 돌출되어 동구도서관이 있는 봉우리의 정상까지 뻗어 있었던 부곽은 주차장과 동구도서관을 조성하며 그 이시가키가 대부분 묻혔다. 현재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아데 그마저도 아주 유심히 봐야 알 수 있다.

동구도서관 방면의 증산공원 입구로 들어서면 우측에 게이트볼장으로 이용되는 제2곽으로 올라가는 나무 데크가 있는데, 그 나무 데크 기둥 아래에 완전히 수풀로 뒤덮여 석축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고구치의 좌측 이시가키가 남아 있다. ㄷ 자 모양으로 꺾인 협축 형태인데, 제3곽과 제2곽이 만나는 경계점이자 제3곽으로 들어오는 고구치의 기단 역할을 했다. 그리고 동구도서관 좌측에 있는 나무 데크를 타고 도서관 앞 전망데크로 나가면, 데크 아래 기단에 남아 있는 제3곽 끄트머리의 이시가키를 관찰할 수 있다.

동구도서관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내려가 우측으로 꺾으면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등산로가 나오는데, 이쪽을 따라가다 보면 제3곽 남측 이시가키를 비교적 잘 관측할 수 있다. 제3곽의 흔적을 거의 온전하게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3.2.2. 서측 제3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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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장 기단을 이루는 이시가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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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장 측 제3곽 고구치의 우각부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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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장 서측 이시가키
부산포왜성의 서측 제3곽은 현재 족구장으로 활용된. 석축 위로 족구장 주변을 도는 산책로와 나무 난간이 설치되었는데, 정말 일부지만 고구치의 우각부도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족구장의 서쪽에는 비교적 온전하고 높이도 꽤 높은 이시가키가 일부 구간 남아 있다. 그러나 이곳은 통하는 길이 없기 때문에 증산 둘레길 옆으로 빠져 수풀을 헤치면서 가야지만 볼 수 있다. 겨울에는 겨우겨우 볼 수 있겠으나 여름에는 우거진 수풀과 진드기, 거미가 득실대는 곳이며 경사도 꽤 있기 때문에 다칠 수가 있으므로 되도록이면 무리하지 않기를 추천한다.

3.3. 제2곽(二ノ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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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조성으로 일부 훼손된 제2곽 이시가키
부산포왜성의 제2곽은 현재 증산공원의 중심부로서, 게이트볼장, 원형 광장, 각종 운동기구 등이 올라앉아 있다. 이렇게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원래 제2곽 안쪽으로 마스가타(枡形)를 두었던 고구치를 새로 석축을 쌓아 막아버리고, 협축으로 쌓아올렸던 야구라다이(櫓台)와 도베이(土塀)의 기초를 삭평해버린 흔적이 곳곳에 있으나 대체로 이시가키가 다른 부분에 비해 제법 온전하다. 공원 위에서는 가장자리에 난간이 둘러져 있고 수풀이 우거졌기 때문에 관찰하기 어렵고, 제2곽을 한 바퀴 도는 증산 둘레길에서 장대한 이시가키를 관측할 수 있다.

3.3.1. 치(雉) ・ 막힌 고구치(虎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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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곽 북측의 치와 고구치 전경
부산포왜성에는 조선식 성곽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치(雉)가 서너 군데 존재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현재 부산포왜성의 치가 남은 곳은 제2곽 북측이 유일하다. 이러한 모습은 서생포왜성과 웅천왜성 등 여러 왜성들에서 나타난다. 본래 제2곽으로 들어가는 내승형(內枡形) 고구치의 좌측에 연이어 돌출되어 있는 치형 야구라다이(櫓台)는 현재도 그 모습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고구치는 공원의 조성과 함께 현대의 마름모꼴 석축으로 메워져 그 흔적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점은 왜성이 조선식 성곽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경관이라고 할 수 있다.

3.3.2. 스미야구라다이(隅櫓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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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위에 위태롭게 자리한 야구라다이 우각부
제2곽의 서측 모서리에는 규모가 큰 야구라다이가 남아 있다. 증산 둘레길을 돌다 보면 이 야구라다이가 암반 위에 올라앉은 장대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이 부분도 부산포왜성의 상징과도 같은 모습으로, 증산왜성을 찍은 사진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시설이다. 이 역시 원래는 공원 바닥보다 높이 솟아 있었을 테지만 현재는 삭평된 채 남아 있다.

3.3.3. 정삼품통정대부부령김씨지묘(正三品通政大夫扶寧金氏之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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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마루에 위치한 묘역 전경
제2곽 위의 놀이터 한가운데에 뜬금없이 무덤이 한 기 조성되어 있다. 묘비에 적혀 있는 바에 따르면 명예관직인 통정대부(通政大夫)라는 직함을 받은 부령 김씨의 무덤인데, SBS 방송에 따르면 묘비의 주인은 부안 김씨 김재성이라 한다. 본래 무덤은 용두산공원 자리에 있었는데 1920년대에 그 자리를 개발하면서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왜성들이 폐성이 되면서 이렇게 성 위에 무덤이 올라앉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극단적인 예시 중 하나가 구포왜성인데, 성 위에 무연고자 묘가 90기가 넘게 자리를 잡았다. 오죽하면 파묘 및 이장을 권유하는 광고 플랜카드가 산 곳곳에 걸려 있을 정도.

3.4. 제1곽(一ノ郭) ・ 천수(天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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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왜성 천수대
부산포왜성의 제1곽은 삭평되어 현재 너른 모래 운동장과 농구장이 자리하고 있다. 높이 솟아 있던 천수 기단이 깎여나가고 동남측의 고구치는 메워졌지만 제2곽과 마찬가지로 이시가키가 꽤 잘 남아 있는 편이고, 제2곽과 마찬가지로 서북측을 향해 도베이와 천수가 있었다.[13] 농구장이 있는 서측 귀퉁이가 천수 기단 터였는데 60년대까지 원형을 유지했다고 한다. 수백 명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데, 천수가 있었던 곳의 반대편을 향해 3층짜리 증산전망대가 세워져 있다. 전망대의 모습이 어딘가 일본 중세 성곽의 야구라(櫓)를 닮았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

4. 데지로(出城)

부산포왜성은 최대 규모의 왜성이자 일본군의 최후방 본진이었으므로, 그 크기에 걸맞게 주위를 방어하고자 일종의 전진기지인 데지로[14]를 여러 곳 배치시켰다. 부산포를 호위하는 3곳의 데지로는 물론, 크게 보면 동래왜성 경상좌수영성까지도 부산포왜성의 데지로를 겸하는 중간기지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 데지로에 해당하던 소형 보루들은 20세기에 부산 지역의 인구가 크게 불어나고 도시화와 난개발이 심하게 진행되면서 거의 멸실된 상태이다.

4.1. 자성대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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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박문구왜성

<colcolor=#fff> 박문구왜성
[ruby(迫, ruby=せ)][ruby(門, ruby=と)][ruby(口, ruby=ぐち)][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akmungu Japanese Fortress
파일:2022060209240140082_l.jpg
<colbgcolor=#01454F> 이칭 중앙동왜성(中央洞倭城)
출기단성(出崎端城)
목창왜채(木廠倭寨)[추정]
형태 왜성[상세 불명]
면적 미상
건설 1592년 (선조 25년)
모리 데루모토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부산광역시 동구 동광동, 광복동, 중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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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동래부지도」에 표현된
부산포 중심 지역과 중앙동 일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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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용미산신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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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구왜성이 있었던 지역의 모습(『초량왜관도』) 18세기 채색 초량왜관도 중 관수가 부분 확대
현재의 롯데백화점 광복점 자리에 솟아 있었던 동산(東山)[15]에 있었다고 전해지는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이다. 1593년 7월 27일 모리 데루모토가 절영도왜성과 함께 축조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다. 이미 17세기에 초량왜관이 들어섰고 19세기가 되면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로 변모했으며, 20세기에는 아예 부산부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시가지화되어 그 규모, 형태 등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 있다. 위치상 거제도 방면에서 다대포를 지나 부산포로 진입할 수 있는 절영도와 동산 사이의 해협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름의 박문구(迫門口)는 일본어로 세토구치(せとぐち), 즉 좁은 해협을 뜻하는 단어이다. 출기단성(出崎端城)이라는 별칭도 가지고 있었는데 출기의 훈독은 데자키(でざき)로, 툭 튀어나온 곶이라는 뜻이며 곧 동산을 의미한다. 『조선일본도설』「사로왜채총도」에는 해당 위치에 목창왜채(木廠倭寨)라는 성채가 등장해서, 이것이 곧 박문구왜성을 묘사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후대의 초량왜관을 묘사하는 다수의 회화자료에서 초량왜관의 수장이 거주하던 관수가(館首家) 뒤편에 방형의 축대가 관찰되는데 이것이 박문구왜성 천수대의 흔적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성이 있었다는 동산에는 용미산신사가 들어섰다가, 1932년 신작로를 닦으면서 사라졌다.

4.3. 추목도왜성

<colcolor=#fff> 추목도왜성
[ruby(椎, ruby=しい)][ruby(木, ruby=のき)][ruby(島, ruby=じま)][ruby(倭城, ruby=わじょう)] | Bakmungu Japanese Fortress
파일:5969967766_436be7769b_o.jpg
<colbgcolor=#01454F> 이칭 동삼동왜성(東三洞倭城)
절영도왜성(絶影島倭城)
한산왜채(閑山倭寨)[추정]
형태 연곽식 산성
면적 미상
건설 1593년 (선조 25년)
모리 데루모토
폐성 1598년 (선조 31년)
주소 부산광역시 영도구 동삼동 산 137
파일:스크린샷 2024-12-05 083855.png
부산지도에 묘사된 추목도왜성 석축 (1916)
파일:스크린샷 2025-01-06 090940.png
항공사진에 촬영된 석축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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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존하는 북서측의 석축 성돌로 추정되는 석축 잔해
절영도 동쪽 해발 약 74.2m의 일산봉(日傘峰)에 장방형으로 쌓은 데지로이다. 정상부는 대지상(臺地狀)을 이루고, 동쪽은 자연 경사면을 이루어 내려가다가 도로 부분에서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북쪽 능선을 따라 바닷가의 암반으로 이어진다. 동북쪽의 수직 해자로 추정되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경사가 급한 지형을 보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작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62.5m의 낮은 구릉이 있고, 남서쪽으로는 제1곽으로 추정되는 대지상의 지형과 연결되며 역시 구릉의 아래쪽은 급경사이다. 남쪽의 경우는 현재 태종대로 가는 도로에서 빌라로 들어오는 주 통로로 이곳을 제외하고는 역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어 사방이 대체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1916년 부산지도는 이 위치에 2단의 장방형 석축을 그리고 있는데, 그 형상이 안골포왜성의 중심곽과 거의 동일하다. 지금은 그 흔적을 알아보기 어렵고, 북측면에 성돌로 보이는 석재를 쪼개어 후대에 쌓은 석축만이 높이 1.5m 정도 남아 있다. 이 대지의 남쪽 끝에 있는 쓰레기장 주변도 단을 이루고 있으며, 성벽 돌로 보이는 석재가 간간이 눈에 띈다. 대지의 동남쪽 끝은 약 2m 정도로 경사져 동북쪽으로 연속되며, 서북쪽은 빌라 건물이 들어서면서 일부 삭평된 것으로 보인다. 동북쪽의 급경사 지점까지는 현재 계단식 밭으로 개간되어 있는데, 붕괴된 단의 단면에는 자갈돌과 직경 40~50㎝ 크기의 석재들이 산재해 있다. 1999년 부산박물관이 진행한 지표조사에서 보고되었다.

추목(椎木, しいのき)는 모밀잣밤나무속의 상록수를 칭하는 이름인데, 왜 이 지역에 이런 명칭이 붙었는지는 불명이다. 추목도와 절영도를 따로 보아 추목도성의 위치를 한국해양대학교가 위치한 조도(釣島)로 비정하는 시각도 있으나, 20세기의 실측지도와 항공사진에서 명확하게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일산봉으로 비정하는 것이 적당하다. 또는, 현재 영선동의 영도초등학교가 들어선 부지에 남아있는 석축을 왜성의 것으로 추정하는 연구도 있다. 일본의 성은 하나의 성에 여러 곳의 데지로가 딸린 경우가 흔하므로 모든 방향의 가능성이 열려 있다.

박문구왜성이 위치했던 중앙동 일대가 거제도 방면에서 진입하는 조선 수군을 차단한다면, 추목도왜성이 위치한 일산봉은 반대편의 광안리 방면에서 진입하는 적을 차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이 위에 올라서면 부산포, 감만포, 오륙도까지 절영도 동측 해로(海路)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현재는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어 접근성이 매우 떨어지고, 수풀이 어지럽게 자라난 밭 사이의 농로를 뚫고 등반하는 것 외에 진입로가 없는 상황이다.

5. 과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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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대박물관 소장 1956년 사진[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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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 성지에서 본 출성[17] (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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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 본환에서 본 이환[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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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에서 본 천수대와 본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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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동구 부산진지성에서 본 본환과 이환

6. 가치

부산포왜성은 왜군의 병력과 물자보급 및 본국과의 연락 등 일본 본토와 조선을 잇는 중요한 병참 기지로서 왜성 중 가장 먼저 축조되었다. 본래 왜군의 헤드쿼터로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던 왜성이었으나, 지속적인 난개발로 인하여 현재는 극히 일부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좌천동 체력단련장 아래에 남아 있는 이시가키에서 정연하게 맞춰진 산기즈미(算木積み)의 모습을 확연하게 확인할 수 있고, 니노마루의 북측에 조선 성곽의 치(雉)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야구라다이(櫓台)가 남아 있는 등 왜성의 특징이 여실히 나타나므로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왜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이순신 부산포 해전이 있던 곳으로 의의가 크다.

7. 교통

지하철로 갈 경우 좌천역에 내려 5번 및 3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정공단을 지나 골목길을 거쳐 제일아파트까지 올라가면 거기서부터 증산공원까지 2차례에 걸쳐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다. 다만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은 부산 원도심의 여느 동네와 같이 산복도로가 나 있는 미친 듯한 경사를 자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버스를 탈 경우 일반버스 38번이나 22번을 타 금성고등학교, 문화아파트, 나웅하이빌 중 한 곳에 내리면 된다. 금성고등학교 및 문화아파트 정류장에 내리면 바로 경사형 엘리베이터를 타고 좌천어린이집이 있는 아래쪽 구루와로 올라갈 수 있고, 나웅하이빌 정류장에 내리면 마찬가지로 가파르지만 비교적 짧은 계단을 올라 동구도서관이 있는 산노마루로 올라갈 수 있다.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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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용의 출현』에서 묘사한 부산포왜성

9. 외부 링크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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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전기 부산진성 터로 추정되는 정공단(鄭公壇)의 동쪽에 자성대가, 서쪽에 증산이 존재한다. [2] 穡은 墻의 오기(誤記)로 보인다. [3] 아마도 천수(天守)를 말하는 듯하다. [4] 모리 히데모토의 별칭인 하시바아키노사이쇼(羽柴安芸宰相)의 음차이다. [5] 이 당시에는 울산왜성이 아직 없었으므로, 울산읍성으로 추정된다. [6] 모리 요시나리의 성씨와, 작위였던 이키노카미(壱岐守)의 음차를 합친 것이다. [7] 형개(邢玠). [8] 마스가타 고구치(桝形虎口)를 이른다. [9] 도베이(土塀)를 이른다. [10] 조선 초기부터 왜란까지의 부산진성은 현재 일신기독교병원 주변을 감싸는 방형의 작은 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후기의 성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인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을 약간 개축하여 그대로 사용했다고 추정한다. [11] 웅천왜성(熊川倭城) 역시 축성에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2]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7가에 있었던 용미산(龍尾山)에 자리했다고 추정되나, 주변 지형이 깎여 나가 찾아볼 수 없다. [13] 여기에서 천수(天守)의 기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히메지 성, 오사카 성, 구마모토 성 등 유명한 일본의 성들을 보고 천수가 영주의 위세를 과시하는, 일종의 랜드마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천수는 그저 중심의 대형 망루의 역할을 하는 시설이다. 따라서 그 내부는 어둡고 난방도 되지 않아 주거에 적합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바와는 달리 다이묘(大名)가 거주하던 시설은 천수가 아니라 고텐(御殿)이었다. 만일 부산포왜성의 천수가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서북향이 아닌, 왜성의 안쪽을 향해 남향으로 지어졌어야 했다. 굳이 왜성 내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서북향을 택하였음은 서북쪽 방향에서 육로로 쳐들어올 조명연합군을 의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14] 한국어로는 지성(支城)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기도 한다. [15] 용미산(龍尾山)이라고도 불린다. [16] 정면에 보이는 흰색 부산일신기독병원의 배후산지에 왜성의 형태가 뚜렷하게 보인다. [17] 왜인지 제목이 거꾸로 달려 있다. 실제로는 데지로(출성)에서 본성을 바라본 사진이다. [18] 현재의 증산공원 중심부에서 동구도서관이 있는 동북측을 바라본 사진. [19] 현재의 성북고개 인근에서 증산공원이 있는 동남측을 바라본 사진. [20] 도베이(土塀)를 에도 시대에나 볼 법한 통석회 마감으로 처리한 것이나, CG 특성상 조악하게 보일 수 있는 공간적 왜곡 등 세세하게 파고들면 틀린 부분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