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 성(熊本城)의 거대한 이시가키. |
[ruby(石, ruby=いし)][ruby(垣, ruby=がき)]
1. 개요
일본어로 이시가키(石垣)는 모든 종류의 돌담과 석축을 포괄하는 의미이다. 본 문서에서는 일본식 성곽에서 방어선(塁線, るいせん)을 이루는 두 가지 종류의 축대 중 하나에 대해 서술한다.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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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츠 시에 있는 야시마 성(屋島城)의 이시가키. | 후쿠오카 시에 있는 원구방루(元寇防壘)의 모습. | 마츠모토 시에 있는 하이바라 성(埴原城)의 이시가키. | 오미하치만 시(近江八幡市)에 있는 간논지 성(観音寺城)의 이시가키. | 오미하치만 시에 있는 아즈치 성(安土城)의 산록거관 이시가키. | 가라츠 시(唐津市)에 있는 히젠나고야 성(肥前名護屋城)의 이시가키. | 부산광역시(釜山廣域市)에 있는 부산성(釜山城)의 이시가키.[1] | 마츠야마 시에 있는 이요마츠야마 성(伊予松山城)의 이시가키. |
백강 전투(663)에서 백제·왜 연합군이 패배한 뒤 일본에서는 당나라 및 신라의 일본 열도 침공에 대비하여 망명한 백제계 도래인들의 기술을 이용해 기타큐슈 에서 세토내해 연안 각지, 그리고 기나이 지방 곳곳에 이른바 조선식 산성[2]을 쌓았는데, 이때 성곽에 이시가키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조선식 산성들은 판축토루 외에 부분적으로 이시가키가 잔존한다. 그러나 그 후 중세에 이르기까지 대규모의 이시가키를 쌓는 기술은 잊혀진 것으로 추정된다.
1274년 원나라의 일본원정 때, 1276년까지 하카타 만 연안에 이시츠키지(石築地) 또는 겐코보루이(元寇防塁)라고 불리는 대규모의 석벽이 구축되었다. 다만, 이시츠키지는 성이라기보다는 방벽의 형태로 쌓았기 때문에[3], 세키루이(石塁)라고도 한다. 그 후 대규모 이시가키는 다시 전국시대까지 자취를 감춘다.
무로마치 시대의 성곽에서는 2미터 정도의 소규모 이시가키가 잔존하고, 근세 성곽의 이시가키와 같이 방어의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니라 주로 구루와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강의 차원에서 사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중세의 이시가키 기술은 사원의 기단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그 기술이 근세 이후 성곽의 이시가키에 채택되었다.
16세기 중반, 일본에 조총이 전래된 이래 일본 성곽은 큰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국시대의 중세 성곽은 구루와(郭)를 가지고 토루나 절벽 등에 의한 방어 시설을 형성하는 것이 특징이며, 건물 자체를 방어하기보다는 대인(對人) 방어 시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조총이라는 관통력이 있는 중화기가 전래됨에 따라, 그 공격을 막는 중량(重量) 구조물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그 기초로서 이시가키가 채택된 것이다. 그 무렵 시가 현(滋賀県)의 간논지 성(観音寺城)에서 근세성곽 이시가키의 효시라고도 불리는 석축이 구축되었다. 이때 이시가키를 다룬 기술자 집단이 아노슈(穴太衆)다[4]. 아노슈는 오다 노부나가에게 고용되어 아즈치 성의 이시가키를 쌓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세성곽의 대규모의 이시가키 건축은 아즈치 성(安土城)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시가키라고 하는 튼튼한 기초를 얻음으로써, 중량 건축을 꼭대기까지 쌓아올리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런 건축 기법을 많이 사용한 것이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며, 이시가키는 초석 건물(礎石建物), 기와와 함께 쇼쿠호계(織豊係) 성곽의 특징으로 꼽힌다[5]. 쇼쿠호계 성곽은, 아즈치 성이나 도요토미 오사카 성, 히젠나고야 성으로 대표되듯 랜드마크가 되어 새로운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성하의 백성들에게 알렸다.
1592년부터 1598년 사이의 임진왜란(壬辰倭亂)과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한반도에 왜성(倭城)이라고 불리는 실전형 성곽이 지어졌다. 단기간에 빠르게 쌓아올린 왜성은 에도 시대에 개축되어 쇼쿠호 시대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일본 본토의 성곽들과는 달리, 중세성곽이 근세성곽으로 변모하던 양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유달리 토루가 아닌 이시가키를 많이 사용한 왜성[6]은 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와 같은 중세성곽의 특징이 잔존하며, 치(雉)와 같이 조선의 성곽에서 나타나는 축성술을 일부 수용한 모습 또한 볼 수 있어 실험적인 성곽으로 평가된다. 왜성 축성의 경험은 이시가키의 확산을 촉진시켰으며, 이시가키는 쇼쿠호 정권의 중심이었던 중부・서일본을 중심으로 널리 퍼지면서 근세 성곽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근세성곽으로, 에도 막부가 재건한 도쿠가와 오사카 성의 이시가키는 일본 최대 규모이다.
한편 동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 이시가키를 가진 성은 적고, 특히 관동지방에서는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이나 이시가키야마 성(石垣山城), 닛타카나야마 성(新田金山城), 하치오지 성(八王子城), 에도 성, 센다이 성(仙台城) 정도를 제외하면 대규모 이시가키는 보기 힘들다[7]. '서국(西國)은 이시가키, 동국(東國)은 도루이(土塁)'라는 말이 있을 정도. 이것은 동일본에서 이시가키의 재료가 되는 화강암의 산지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인데, 반대로 화강암을 용이하게 채취할 수 있는 세토내해 연안에는 이시가키를 두른 성곽 건축이 많이 남아 있다.
에도 성 · 니조 성(二条城) · 가나자와 성(金沢城) 등지의 에도시대 초기의 이시가키에서는 표면에 끌을 사용하여 구멍을 뚫고 굴곡을 만들거나, 홈을 파는 등 장식을 하기도 했다. 이를 게쇼(化粧, けしょう)[8]라고 하는데, 가토 기요마사가 시초라고 한다. 돌을 조금씩 끌로 찍어내어 패인 홈을 하츠리(はつり)라고 하는데, 1cm씩 작은 홈을 골고루 내는 것을 하츠리 마감(はつり仕上げ)이라고 하고, 가지런하게 세로 방향으로 빗살무늬의 홈을 내는 것을 스다레 마감(すだれ仕上げ)이라고 한다[9]. 얕게 파인 홈은 이미 풍화되어 사라져 버린 곳이 많고, 에도 성이나 나고야 성의 천수대 등지에서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산기즈미(算木積み)로 쌓은 모서릿돌의 이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져 이시가키 꼭대기에서부터 바닥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고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마감법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구조
센고쿠 시대 이후의 이시가키는 주로 접착물을 사용하지 않고 돌로만 쌓는 가라즈미(空積み, からづみ)[10]가 사용되었다. 이와 달리, 점토와 모르타르 등을 반죽하여 돌과 돌 사이를 접착하여 쌓는 방법을 네리즈미(練積み, ねりづみ)라고 하는데, 주로 근대 공법에서 많이 쓰인다. 성곽에서 사용된 경우는 많이 없고, 시가 현의 가마노하 성(鎌刃城) 정도가 예외적이다. 또 가토 기요마사가 1610년에 쌓은 나고야 성 천수의 이시가키는 뒤채움에 시멘트(三和土)를 이용한 일종의 네리즈미이다.
이시가키의 석재는 이시가키의 모서리를 이루는 스미이시(隅石 ・ 角石, すみいし)[11]와 경사면의 표면을 이루는 츠키이시(築石, つきいし) ・ 히라이시(平石, ひらいし) ・ 즈미이시(積み石, づみいし)[12]로 구성된다. 가장 밑바닥의 초석을 네이시(根石, ねいし)[13]라고 하며, 최상부의 돌을 덴바이시(天端石, てんばいし)라고 한다.
성토(盛土)한 흙 또는 기존의 경사면을 계단 모양으로 절단한다. 이것을 기리츠치(切り土)라고 한다. 경사면의 뿌리(비탈끝)에 홈을 파는 네기리(根切り)를 하여 네이시를 늘어놓고, 자갈이나 구리이시(栗石, くりいし)[14]라고 하는 작게 부서진 돌을 이시가키 표면을 이루는 석재와 경사면 사이에 채운다. 이를 우라고메(裏込め, うらごめ)[15]라고 한다. 지반이 약한 경우는, 바닥에 판 홈에 소나무 말뚝(杭, くい)을 박고 그 위에 껍질 벗긴 통나무(丸太, まるた)로 하시고도기(梯子胴木, はしごどうぎ)라고 하는 기초를 깔았다.
소나무 말뚝은 물속에 가라앉으면 거의 썩지 않아 오래가기 때문에 하시고도기는 주로 미즈보리(水堀, みずぼり)[16]와 접하는 성의 이시가키 기초에 사용되었다. 츠키이시나 히라이시의 뒷채움 쪽에는 받침돌(飼石, かいいし)[17]을 받쳐 석축의 각도를 정한다. 이 과정에서 힘의 균형이 불안정해진 석재를 사카이시(逆石, さかいし)라고 하는데, 이는 미끄러지기 쉬워 배부름 현상의 원인이 된다.
표면 석재는 가공한 것도 쓸 수 있고, 가공하지 않은 것도 쓸 수 있다. 쪼갠돌쌓기(打込み接ぎ)나 깎은돌쌓기(切込み接ぎ)와 같이 가공석재를 이용하는 경우는 석재 사이의 틈이 좁아져 배수가 불량하므로 배수로나 배수구를 만든다.
4. 분류
가공 정도 | |||||
野面積み 막돌쌓기 |
打込み接ぎ 쪼갠돌쌓기 |
切込み接ぎ 깎은돌쌓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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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조 방법 |
乱積み 막쌓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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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 오카야마 성(岡山城) | 다카마츠 성(高松城) | |||
布積み 줄눈쌓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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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釜山城) | 마루가메 성(丸亀城) | 센다이 성(仙台城) | |||
축조 형태 | |||||
석 재 형 태 ・ 곡 률 |
亀甲積み 귀갑무늬쌓기 |
玉石積み 호박돌쌓기 |
谷積み 골쌓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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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가 성(佐賀城) | 요코스카 성(横須賀城) | 이와무라 성(岩村城) | |||
鏡積み ・ 笑積み 거석쌓기 |
寺勾配 ・ 扇の勾配 곡선경사 |
宮勾配 ・ 矩方 직선경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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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푸 성(駿府城) | 하기 성(萩城) | 쓰 성(津城) | |||
모 서 리 마 감 |
算木積み 산가지쌓기 |
縦石積み 입석쌓기 |
シノギ積み 둔각쌓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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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성(江戸城) | 나고야 성(名護屋城) | 나에기 성(苗木城) | |||
기 능 |
鉢巻石垣 상부보강석축 |
腰巻石垣 하부보강석축 |
球形巻石垣 구형보강석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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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자와 성(金沢城) | 히메지 성(姫路城) | 돗토리 성(鳥取城) | |||
登り石垣 능선방벽 |
櫓台 망루기단 |
天守台 천수기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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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코네 성(彦根城) | 아코 성(赤穂城) | 미하라 성(三原城) |
4.1. 가공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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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즈라즈미(野面積み, のづらづみ)
우리말로 막돌쌓기. 자연석을 그대로 쌓아 올리는 방법이다. 가공하지 않고 쌓아 올렸으므로 돌의 형태에 통일성이 없고, 돌끼리 맞물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틈새[18]나 돌출 부위가 생길 수 있어 적이 석축을 타고 오르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배수성이 뛰어나고 튼튼하다는 장점도 있다. 기술적으로는 가장 초창기의 축조 방식으로,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 나타나 본격적으로 이용된 것은 16세기의 센고쿠 시대이며, 그 다음으로 쪼갠돌쌓기, 깎은돌쌓기의 순서로 발전했다. 그러나 이 순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므로, 깎은돌쌓기 이시가키 이후에 쌓은 성에서도 막돌쌓기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막돌쌓기의 일종으로서 아노즈미(穴太積み, あのうづみ)를 드는 경우가 있지만, 아노즈미는 아노슈가 다룬 형태의 이시가키이며 특별히 막돌쌓기의 일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노슈의 높은 수준의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에도 시대 후기 이후에나 사용된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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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코미하기(打込み接ぎ, うちこみはぎ)
우리말로 쪼갠돌쌓기. 면석의 모서리와 면을 두드려 평평하게 만들어서 돌 사이의 틈을 줄이는 방법이다. 이름에 들어가는 하기(接ぎ, はぎ)란, 잇댄다는 의미이다.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쪼갠돌쌓기가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가공하는 데 시간이 걸리지만, 막돌쌓기보다 높고 가파른 경사를 조성할 수 있다. 근세성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축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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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코미하기(切込み接ぎ, きりこみはぎ)
4.2. 축조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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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즈미(乱積み, らんづみ)
우리말로 막쌓기. 크기가 다른 자연석 또는 가공한 돌을 면석으로 삼아 불규칙하게 쌓아 올리는 축조법으로, 란소즈미(乱層積み, らんそうづみ)라고도 한다. 쇼쿠호 시대 이후에 사용되었다. 줄눈쌓기가 발전한 형태로 여겨지는, 세이소란즈미(整層乱積み, せいそうらんづみ)도 있다. 크기가 다른 직사각형의 돌을 사용해, 줄눈을 맞추지 않기 때문에 줄눈쌓기보다 튼튼하다. 막쌓기로 쌓을 때는 직사각형과 다각형의 돌을 동시에 사용할 수도 있지만, 균형을 잡기 어렵기 때문에 쌓아올리는 데 수준 높은 기술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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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노즈미(布積み, ぬのづみ)
우리말로 줄눈쌓기. 주로 사각형으로 깎은 비교적 큰 돌을 줄눈이 가로로 맞추어지도록 쌓아올리는 축조법으로, 세이소즈미(整層積み, せいそうづみ)라고도 한다. 높이를 맞추기 위해 돌을 같은 형태로 가공하는 번거로움이 발생하지만, 수준 높은 기술이 없어도 비교적 쉽게 쌓을 수 있다. 줄눈을 맞추기 때문에 별로 튼튼하지 않아 비교적 무너지기 쉽다.
4.3. 축조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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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코즈미(亀甲積み, きっこうづみ)
우리말로 귀갑무늬쌓기. 석재를 육각형으로 가공하여 쌓아올리는 깎은돌쌓기의 일종이다. 이름은 거북이 등딱지 모양처럼 보이는 데서 유래했다. 중력이 균일하게 분산되기 때문에 잘 무너지지 않지만, 잘 이용되지 않았는지 에도 시대 후기에 그리 높지 않은 이시가키에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막쌓기의 형태로 오키나와의 구스쿠에 쓰였을 때는 아이카타즈미(相方積み, あいかたづみ)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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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이시즈미(玉石積み, たまいしづみ)
우리말로 호박돌쌓기. 수마석(水磨石)을 이용한 축조법으로, 튼튼하지 않기 때문에 이시가키를 높이 쌓는 것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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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즈미(谷積み, たにづ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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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미즈미(鏡積み, かがみづ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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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이(勾配, こうば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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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기즈미(算木積み, さんぎづ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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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테이시즈미(縦石積み, たていしづ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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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기즈미(シノギ積み)
우리말로 골쌓기. 정사각형의 면석을 마름모꼴로 세워 모퉁이를 위로 향한 뒤 대각선이 수직 방향이 되도록 쌓아올리는 축조법으로, 오토시즈미(落積み, おとしづみ)라고도 한다. 직사각형의 면석을 사용하는 예도 있다. 1800년대 중기 이후에 나타나며, 성곽 이시가키의 골쌓기는 대부분이 근대의 것이라고 한다.
거대한 카가미이시(鏡石, かがみいし)[19]를 중심으로 모양과 크기가 다른 돌을 틈새 없이 쌓아 올리는 축조법으로, 쇼쿠호계 성곽에서부터 나타나 근세 성곽으로 이어지는 특징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큰 돌 주위에 작은 돌리 둥글게 둘러져 있는 경우에는 와라이즈미(笑い積み, わらいづみ)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상당히 위태로운 구조이며, 따라서 매우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축조법이기도 하다. 카가미이시는 성주의 권력이나 재력을 가시적으로 과시하기 위해서 주로 성의 출입구가 되는 고구치 주변에 많이 설치했다[20]. 히젠나고야 성, 나고야 성 등에 남아 있으며 일본 최대의 카가미즈미는 오사카 성의 다코이시(蛸石, たこいし)이다[21].
고바이는 '경사', '기울기'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이시가키의 경사에도 종류가 있는데, 이시가키 경사면의 가장 꼭대기에 덴바이시가 수직이 된 곳을 아메오토시(雨落とし, あめおとし)라고 하며, 그 아래로 이시가키가 곡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것을 데라코바이(寺勾配, てらこうばい) 또는 오기노코바이(扇の勾配, おうぎのこうばい)라고 한다[22]. 이때의 곡선을 소리(反り)라고 하며, 이시가키를 굽어지게 만들 때는 급경사를 조성하기 위해 가장 밑에서부터 절반까지는 완만한 직선으로 축조하고, 나머지 윗부분에 소리를 넣는 것이 통상적이다. 데라코바이로 유명한 것이 구마모토 성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쌓았기 때문에 세이쇼류 이시가키(清正流石垣, せいしょうりゅういしがき)라고도 불린다. 위로 올라올수록 점점 경사가 가팔라지기 때문에 오르기 어렵고, 따라서 데라코바이는 무샤가에시(武者返し, むしゃがえし)로도 불렸다.
아메오토시가 없고 이시가키가 일직 대각선으로 쭉 내려오는 것을 미야코바이(宮勾配, みやこうばい) 또는 노리카타(矩方, のりかた)라고 한다. 도도 다카토라가 즐겨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미야코바이로 유명한 것은 이가우에노 성(伊賀上野城), 이마바리 성, 쓰 성(津城) 등이다. 급경사가 있는 데라코바이보다 축성이 더 효율적이지만, 비교적 방어력은 낮다고 한다.
이시가키의 우각부(모서리)를 처리하는 축조법이다. 장방체 모양의 모서릿돌의 긴 변과 짧은 변을 엇갈리게 교대로 쌓는데, 이 때 긴 변이 짧은 변 바로 옆에 있는 스미와키이시(隅脇石, すみわきいし)를 꽉 지탱하게 함으로써 이시가키의 강도를 높였다. 산가지를 엇갈려 쌓는 것과 닮은 모양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1605년 전후에 완성된 이후 근세성곽에서 주로 관찰되나, 중세성곽에서 이시가키가 등장했을 무렵부터 이미 태동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3] 그 후, 석재의 가공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산기즈미도 세련되어 갔고,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축성(築城) 붐이 일어 석재 가공 기술이 발전했으며 산기즈미의 형태도 최종적으로 정립이 되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가(家)가 패배한 뒤 평화기가 찾아오자 중앙집권화를 위한 에도 막부의 강한 통제에 의해 새로운 축성은 물론 성의 개축조차 엄격히 제한되게 되어[24] 다른 축성 기술과 함께 석재의 가공 기술도 쇠퇴하게 되었다. 에도시대에 수축된 산기즈미는 이전과는 달리 긴 변이 짧은 변의 1.5배 정도의 길이가 되어 버렸다.
모서리의 석재를 세워서[25] 쌓아올리는 특수한 축조 방법. 일반적으로 붕괴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잘 사용되지 않았지만 고구치나 낮은 야구라다이(櫓台)에서 제한적으로 관찰된다. 대표적인 예시로는 웅천왜성(熊川倭城)과 히젠나고야 성이 있다.
이시가키의 모서리가 직각보다 큰 둔각을 이루고 있는 것을 말한다. 중세 이후 대규모 이시가키가 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모서리를 직각으로 처리하는 기술이 아직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둔각으로 처리한 이시가키가 많다.
4.4.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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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이시가키(巻石垣, まきいしが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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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보리이시가키(登り石垣, のぼりいしが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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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台, だい)
기존의 이시가키나 도루이(土塁)에 덧붙여 보강하는 이시가키. 하치마키 이시가키(鉢巻石垣, はちまきいしがき)와 고시마키 이시가키(腰巻石垣, こしまきいしがき)로 나뉜다.
하치마키 이시가키는 도루이 위에 쌓은 이시가키이다. 도루이는 이시가키와 달리 흙을 가지고 굳히므로 비교적 불안정하여 그 위에 건축물을 세우기 어려우므로, 토루 상부의 내구성을 높여 건축물을 올릴 수 있도록 보강한 것이다. 하치마키(鉢巻き)는 머리띠를 가리키는 낱말로, 이시가키의 형태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반면 고시마키 이시가키는 토루나 이시가키의 하단에 만들어진 이시가키이다. 미즈보리나 강 등에 접하고 있는 토루는 물에 의해 토루가 침식되어 붕괴할 우려가 있으므로 수면보다 높은 위치까지 이시가키를 둘렀고, 산성은 축대의 무게를 떠받치기 위하여 기존 축대 밑에 이시가키를 두르기도 했다. 무로마치 시대의 성곽에 사용된 이시가키는 주로 2m 내외의 고시마키이시가키이다. 마키이시가키로 유명한 곳은 에도 성과 히코네 성이다. 또한 특이한 예시로, 돗토리 성(鳥取城) 덴큐마루(天球丸, てんきゅうまる)의 마키이시가키는 현존하는 유일한 구형 이시가키이다.
평산성이나 산성 등에서 능선을 깎거나 흙을 쌓아 평평하게 만들지 않고[26], 기울기를 따라 올라가게끔 쌓아 방벽 역할을 하는 이시가키. 산기슭에서 산 정상을 향해 만들어져 산복을 횡단할 수 없도록 이시가키가 종단으로 막고 있는 상태이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고, 왜성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유명하다. 대부분의 왜성은 일본으로 연결되는 보급로가 될 선소를 확보하기 위해 해안이나 하천에 가까운 곳에 지어졌는데, 혼마루와 천수는 전망이 좋고 방어의 거점이 되는 작은 언덕이나 산꼭대기에 있었지만 군졸이 거주하는 건축군은 선소에 가까운 산기슭과 평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로 적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혼마루와 선로를 이어 둘러싸도록 산기슭 양쪽에 이시가키를 축조했다. 즉, 노보리이시가키는 전투원 보호를 위한 국지적인 시설이었다. 일본군의 철수 후 왜성의 천수나 야구라 같은 목조건물은 소실되었지만 이시가키 부분은 아직 남아 있고, 따라서 일본 본토에서는 보기 힘든 노보리이시가키가 왜성에 다수 잔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장 장대한 노보리이시가키는 웅천왜성과 서생포왜성에 가면 볼 수 있다. 특히 수풀이 우거져 전체적인 모습을 조망하기 어려운 웅천왜성과 달리 서생포왜성의 노보리이시가키는 나무가 없는 산기슭에 길게 뻗어 있으므로 전망이 좋아 아주 웅장한 느낌을 준다. 일본에서도 이 노보리이시가키를 보러 한국에 일부러 방문하여 서생포왜성을 찾아가는 이들도 있다. 왜성의 노보리이시가키는 후대에 지어지는 일본 본토의 근세 성곽들에서 나타나는 노보리이시가키의 시발점으로 알려져 있다[27].
일본에서는 흔히 노보리이시가키의 쓰임새를 만리장성에 비교하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의 산성[28]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한결 수월하다. 최근에는 중국·한국·일본의 축성술 교류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서 우리나라에서도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안골포왜성에 주둔했던 가토 요시아키와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한반도에서 귀국한 다이묘들이 일본 본토에서 새로 성을 짓거나 성을 보수할 때에 노보리이시가키를 채택했다고 하는데,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과 메이지 유신 전후로 폐성되어 파괴된 것들이 많은 관계로 노보리이시가키의 존재 양상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다. 가장 규모가 큰 노보리이시가키는 이요마츠야마 성에 남아 있고, 그 외에 노보리이시가키가 남아 있는 성은 히코네 성, 스모토 성(洲本城), 다케다 성(竹田城), 요나고 성(米子城), 나가이와 성(長岩城) 등이 대표적이다.
도루이의 경우 다테도루이(竪土塁, たてどるい)가 같은 역할을 하며, 이를 노보리도루이(登り土塁)라 칭하기도 한다.
[1]
사진은
부산포왜성의 데지로(出城) 역할을 하는 자성대왜성(子城臺倭城)의 천수 기단의 모습이다.
[2]
키노조(鬼の城), 야시마 성, 오노 성(大野城) 등이 있다.
[3]
제주도의 환해장성(環海長城)이 비슷한 기능을 한다.
[4]
아노슈는
오미(近江)의
히에이잔(比叡山) 산기슭에 있는 아노노사토(穴太ノ里, 현재의
시가 현
오쓰 시(大津市) 사카모토 초(坂本町) 아노 지구) 출신으로, 고분 축조 등을 일을 맡았던 석공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본래 사원의 석축 공사를 맡았지만, 그 기술을 제공하여
아즈치 성의 이시가키를 시공한 것을 시작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에 의해 성곽 이시가키 조성에도 종사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에도시대 초반까지 많은 성의 이시가키가 아노슈의 지휘하에 만들어졌다. 이들은 일본 전역의 번의 부름을 받아 이시가키를 시공하였지만 아노슈가 축성에 참여했는지 불분명한 유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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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거성(居城)에서는 다카이시가키(高石垣), 금박 기와(金箔瓦,きんぱくがわら), 덴슈(天守)의 3요소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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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화강암이 풍부한 한반도의 지질환경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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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마저도 에도 성 역시 서북측에서 집중적으로 토루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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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그 '화장'이 맞다. 일본 성곽에 있어서는 석재의 마감 작업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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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다레(簾)는 주렴을 뜻한다. 세로로 가지런히 내려오는 모습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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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하면 '메쌓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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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모서릿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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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면석(面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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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기단석(基檀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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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뒷채움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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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로는 뒷채움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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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채운 해자. 반대로 물 없이 마른 해자는 가라보리(空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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胴石 ・ 胴飼石 ・ 介石 ・ 尻로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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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생기는 틈은 마즈메이시(間詰め石, まづめいし)라고 하는 잔돌을 채워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말로 '잔돌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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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기요마사의 전설이 있는
나고야 성의 기요마사이시(淸正石)가 워낙에 유명해서 그냥 기요마사이시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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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가미이시는 크기뿐만이 아니라, 거석(巨石)을 절단하여 설치한 석공의 수준 높은 기술을 드러내며 그런 기술 집단을 보유하고 있는 성주의 권력을 보여주는 효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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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 재팬 기준으로, 추정 무게가 무려 130톤에 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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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성곽으로 따지자면 규형(圭形) 또는 궁형(弓形) 성벽이라고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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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치 성의
천수 기단은 모서리의 일부분에 길쭉한 석재를 교차시켜 쌓았다. 그러나 이 시기는 석재를 채집할 때 가로변이 긴 석재를 우연히 얻을 수 때만 그때그때 모서리를 산기즈미로 보강하는 정도였다. 또한
임진왜란 시기의
서생포왜성이나
부산포왜성,
순천왜성 등에서도 완전히 정제되지 않은 산기즈미를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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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히로사키 성(弘前城)의 몬(門)은 몇몇 곳을 제외하고서는 모두 양 옆의 도루이와 연결되어 있지 않아 옆이 뻥 뚫린 상태이다. 당연히 방어력은 제로. 이는 에도 막부의 눈치를 보느라 일부러 형식적으로만 문을 세운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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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모서릿돌을 입석(立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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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구루와(曲輪)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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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부분은 논의의 여지가 있는 것이, 왜란 훨씬 이전에 지어진 중세성곽에서도 간혹 노보리이시가키의 흔적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나가이와 성(長岩城)이 대표적인 경우로, 거의 웅천왜성에 비길 만큼이나 장대한 노보리이시가키가 1개소 남아 있다. 물론 나가이와 성이 초축될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화기에 대한 방비시설이 있어 폐성된 이후로도 모종의 이유로 개축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한다. 이외에도 구마 성(熊城), 아마카자리 성(尼巌城), 네즈시 성(祢津城) 등에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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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문경새재, 작원관,
탕춘대성과 같은 관문성과 그 용도가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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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을 줄이기 위해 도루이나 이시가키로 이루어진 외곽선에 꺾임을 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