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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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의 고향인 장쑤성 쑤첸에 있는 기념 공원과 동상 |
항우의 생애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어린 시절
항우는 팽성에서 태어났으며, 항우의 가문은 할아버지가 초나라 최후의 명장 항연(項燕)이었고, 그 집안인 항 씨는 항(項)[1]에 봉해져서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항우가 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조국이 멸망하고 난 후였다.하지만, 항우와 같이 살고 있던 작은아버지 항량(項梁)[2]은 지역에서 상당한 명망을 가진 지방의 유지였고, 그 땅에서 유명한 사대부들은 모두 항량 밑에서 나왔다고 할 정도의 인맥이었으니 생활에 큰 부족함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항량은 이 조카를 위해 공부를 시켰는데, 항우는 글 공부를 했지만 전혀 진전이 없어 때려치웠다. 그러자 이후에는 칼을 다루는 검술을 가르쳤지만, 항우는 여기에서도 대략 그 뜻만 알고 끝을 보지 못했다. 이것도 안 한다, 저것도 안 한다고 하자 항량도 화가 나 항우를 꾸짖었지만, 항우는 이렇게 항변했다.
"글이라는 것은 본래 자기 성과 이름을 쓸 줄 알면 족할 뿐입니다. 검술 역시 한 사람과 싸워 지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둘 다 배우기는 충분치 못하니,
만인(萬人)을 상대해서 이길 수 있는 학문을 배우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항량은 조카가 큰 인물이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여 항우에게 병법을 가르쳤는데, 이에 항우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공부를 하긴 했지만 대략 "이해했다"고 느끼자 또 지겨움을 느끼고 때려치웠다. 한마디로 이것 조금, 저것 조금씩만 하다가 뭐 하나 진득하게 끝까지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얘기다. 훗날 보여주는 전술을 넘어 전략의 차원에서 보여주는 항우의 역량 부족은 이게 원인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물론 공부 자체를 시작조차 안했던 유방이 뛰어난 안목과 판단력으로 최후의 승자가 된걸 보면 항우가 단순히 공부를 중간에 접었다는걸 항우의 실책의 원인으로 볼 수도 없다.[3]
어느 날, 진시황(秦始皇)이 회계 땅으로 순수(巡狩)[4]를 하러 나와 절강(浙江)을 지날 때, 흔치 않은 구경거리라 항량도 항우를 데리고 나와 구경을 했다. 그때 구경하던 항우는 불쑥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해야지!"[5]
이 말을 들은 항량은 기겁하며 항우의 입을 틀어막고 "우리 다 목이 달아나면 어쩌려고 그러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내심 속으로는 이 맹랑한 꼬마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다. 항우는 나이가 자라면서 키가 8척을 넘었고[6] 힘도 장사라 큰 솥을 번쩍 들었을 정도였다. 그렇다 보니, 오 땅의 자제들은 모두 항우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그 외에 특이사항으로는, 사마천(司馬遷)은 "내가 듣기로는 항우는 눈동자가 두 개인 중동자(重瞳子)였다."고 언급했다.[7] 그러면서 과거의 " 순 임금도 눈동자가 두 개였다고 하는데, 혹시 항우는 순 임금의 후예가 아닐까?"라고 상상을 덧붙이기도 했다. 물론 그 다음에 (그렇게 잔인한 일을 했던 항우가) "어떻게 순 임금의 후예이겠는가?"라는 식으로 넘어가긴 했지만.
3. 은통을 죽이고 거병하다
항우가 장성했을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진시황(秦始皇)의 시대부터 이어진 폭정으로 백성들은 신음했고, 이세황제(二世皇帝) 영호해는 환관 조고(趙高)에게 일을 맡긴 채 사치와 방종에 빠졌다. 결국 폭탄은 터져버려 기원전 209년, 진승(陳勝) 등이 처음으로 저항을 시작한 진승·오광의 난이 발발했고, 진승 등은 장초(張楚)를 건국했다. 이에 여러 군현의 백성들도 모두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봉기에 동참했다. 진승과 오광의 난은 진나라의 명장 장한의 활약으로 추진력을 잃었지만, 이미 진승이 휩쓸고 간 중원은 진나라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진나라가 멸망시킨 옛 전국시대 6국을 다시 세우려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일었다.진승과 오광이 거병한 지 두 달 정도 지난 9월, 회계 태수 은통(殷通)은 지방의 유력자였던 항량을 회유해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항량은 초나라의 영웅 항연의 아들로, 항씨 가문이란 이름값만으로도 주목을 받고 명망이 높았기 때문에 은통 입장에서는 그를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일수만 있다면 초나라 부흥이라는 명분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
하지만 항량은 은통 따위의 인물이 품기에는 너무 거물급 인사였고, 제안을 받은 항량은 차라리 자신이 반란의 주력이 되기로 작정한다. 항량과 은통이 회담을 하는 도중 항량의 조카 항우가 갑자기 난입해서 은통의 목을 베어버렸고 항량은 직접 회계의 전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항우의 공이 지대했는데, 항우는 은통의 목을 베었을 뿐 아니라 저항하는 군사들 백여 명을 베어 죽여 은통의 남은 세력을 굴복시킨다. 여기서 선즉제인(先則制人)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이후 항우는 비장(裨將)이 되어 아직 복종하지 않은 관하의 현(縣)들을 돌아다니면서 복종시켰다.
4. 반(反) 진 전쟁
이후 소평(召平)[8]의 말을 들은 항량이 회계를 떠나 움직이기 시작하자 장수로서 종군했다. 항량의 여러 전쟁에 함께 참여했는데, 이 무렵의 독자적인 전투로는 별동대를 이끌고 양성(襄城)을 공격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의외로 항우는 이 전투에서 결사항전하는 양성 주민들 때문에 상당히 힘든 싸움을 했고 결국 생각보다 늦게 양성이 함락되었다. 이에 분노한 항우는 전투가 끝난 후 분풀이로 성 내 사람 5,000여 명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고 죽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항우의 잔인하고 참을성 없는 성품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이로 인해 항우는 이후에 그 출중한 군사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계속 견제를 받게 된다.어찌 되었건 항우와 항량은 초나라를 부활시키고, 진나라 치하에서 숨어살던 초나라 왕족인 초 회왕(楚懷王)을 옹립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반란군들을 제압하기 위해 진의 명장 장한(章邯)이 이끄는 군대가 재건된 위(魏)를 멸망시키고 제(齊)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항량은 북상해서 장한과 교전을 벌여 승리했다. 그 직후 항우는 패공(沛公) 유방과 함께 별동대를 이끌게 하고 성양(城陽)을 공격하였는데, 훗날 두 사람의 사이를 생각하면 꽤 흥미로운 일이다. 별동대는 이후 여러 성을 함락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그런데 정작 항량의 주력은 이후 장한이 심기일전하여 펼친 역습 때문에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고, 심지어 항량마저 전사하고 말았다. 이에 항우와 유방은 일단 퇴각했다.
잠시 초나라가 숨을 돌리며 패전의 충격을 극복하는 사이, 항량을 죽이고 북상한 장한 때문에 조나라(趙)는 최악의 형세에 몰렸고,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자신들의 차례가 될 수밖에 없기에 여러 제후들도 구원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초 회왕은 항량의 죽음을 이용해 아첨한 송의(宋義)를[9] 상장군으로 임명한 후에 항우를 차장(次將)으로 삼아 조나라 구원에 나서게 하였다.
그보다 앞서, 초 회왕은 "진나라의 중심지인 관중(關中)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이 그곳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엄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장수들은 관중으로 향하는걸 꺼리고 있었는데, 항우만은 아버지나 마찬가지였던 항량이 진나라 군대에 살해된 일에 격분하여 유방과 함께 서쪽으로 향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오매불망 서쪽으로 향하고 싶었던 항우를 조나라로 향하게 만든 것은 여러 늙은 장수들이 항우를 꺼린 탓이었다. 초 회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항우가 얼마 전 양성에서 사람들을 잔인하게 파묻었던 것을 지적하면서 잔혹한 성품의 항우를 관중으로 보내면 민심이 모두 돌아설 것이기 때문에, 군사적 역량은 떨어지지만[10] 차라리 성품이 관대한 유방을 대신 보내는 것이 낫다고 초회황을 설득했던 것. 앞서 진승이나 항량이 힘으로 진나라에 맞섰지만 오히려 패하고 죽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결국 서쪽으로 먼저 향하는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 되었다.
항우는 딱히 군사적 성과도 없는 송의 따위의 휘하로 들어가라는 조치에 당연히 불만을 품었지만 일단 분을 참고 초회왕의 명령에 따랐다. 그러나 조나라를 돕겠다는 명분으로 조나라에 도착한 송의는 아들을 제나라로 보내 교섭하여 제를 회왕의 측근으로 끌어들이려는 공작만 할 뿐 거록의 장한에겐 관심도 없이 붙박이처럼 머무르며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항우가 항의하자 '칼이야 당신이 나보다 잘 다루겠지만 작전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시오? 상대가 지치면 그때 공격하면 될 일이오'라며 면박만 주었다.
말이야 그럴 듯했으나 군사력 측면에서 진나라와 상대가 되지 않는 조나라가 진나라의 힘을 빼주면 얼마나 빼줄지 의문이었다. 하릴 없이 시간만 흘러 겨울이 닥쳐왔고, 전쟁이 일찍 끝날 것으로 생각해서 월동 대비가 부족한 병사들은 오들오들 떠는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송의는 자기 아들의 생일 축하연을 열면서 병사들이 추위에 떨도록 방치해 두었다.
"모든 힘을 다해 진군을 협격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한 곳에 머물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 그 기회를 놓치고, 이제는 세상에 기근이 들어 백성들은 굶주리고 사졸들은 콩잎을 먹으며 연명하고 있을 정도로 군중에는 군량미마저 동이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은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으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하수(河水)를 건너 조 땅의 식량을 먹이고 조군(趙軍)과 함께 힘을 합해 진군을 공격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들의 피로함을 엿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릇 강한 진나라가 새로 건국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 세가 아마도 조나라를 압도할 것이다."
"조나라는 결코 강한 진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음에도 어찌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얼마 전에 우리의 군사들이 진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좌불안석이 된 왕은 경내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 장군에게 내어주어 나라의 존망은 이 한 번의 출격에 달려 있음에도, 오늘까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그 사사로움만 구하고 있으니 송의라는 자는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신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식은 호화로운 연회를 열어 음주가무를 즐기고 있으면서 군사들을 이끌고 하수(河水)를 건너 조 땅의 식량을 먹이고 조군(趙軍)과 함께 힘을 합해 진군을 공격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그들의 피로함을 엿보고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릇 강한 진나라가 새로 건국한 조나라를 공격한다면 아마도 그 세가 아마도 조나라를 압도할 것이다."
"조나라는 결코 강한 진나라의 상대가 될 수 없음에도 어찌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얼마 전에 우리의 군사들이 진군에 의해 패함으로써 좌불안석이 된 왕은 경내의 모든 군사들을 내어 장군에게 내어주어 나라의 존망은 이 한 번의 출격에 달려 있음에도, 오늘까지 사졸들을 돌보지 않고 그 사사로움만 구하고 있으니 송의라는 자는 사직을 지킬 수 있는 신하가 아니다!"
병사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 항우는 어느날 새벽에 송의를 기습하여 살해하고 사람을 보내 송의의 아들까지 살해했다. 이어 송의가 초나라를 저버리고 모반하려 했으므로 초 회왕의 명령으로 참했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장수들은 감히 반박하지 못하고 본래 초나라는 항량이 일으킨 것이니 항우가 옳다고 말했다.[11] 항우는 초회왕에게 이 쿠데타의 결과를 사실상 일방통보 형식으로 통보했고 초회왕은 항우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송의가 갖고 있던 상장군직을 넘겨준다.
송의의 자리를 차지한 항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출정하여 자신의 지휘 아래 조나라로 진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포, 포장군과 함께 왕리(王離)가 이끄는 진나라 대군을 거록 지역에서 격파하고 전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등극한다.
이후 항우는 진나라의 주력군을 이끌던 장한을 항복시켜 사실상 진나라의 멸망을 결정지었고, 곧바로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5.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
그러나 이때 항우는 매우 치명적인 실책을 하게 되는데, 당시 200,000명에 이르는 진나라군 포로들이 함양에 빨리 가는 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낙양[12]에 있는 신안(新安)에서 이들 모두를 생매장해 죽인 것이었다. '모두'라는 건 과장이 아니라 실제 항우의 발언이다."여전히 수가 많은 진나라 항졸들이 아직도 마음속으로 우리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 관중에 들어가서 그들이 우리들의 명을 듣지 않는다면 일이 매우 위험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여기서 그들을 습격하여 모조리 죽이고
장한, 장사(長史)
사마흔, 도위(都尉)
동예(董翳) 등 세 사람만을 데리고 진나라에 들어가야 되겠다."
《사기》 <항우본기> 中
《사기》 <항우본기> 中
대학살 이후 다시 서쪽으로 진군한 항우는 함곡관(函谷關)에서 잠시 막혔으나, 유방이 이미 진나라의 항복을 받고 수도 함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노했다. 회왕의 약속대로라면 중원의 알짜배기인 관중의 왕은 유방이 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항우는 휘하의 영포를 시켜 함곡관을 뚫어버리고, 관중에 들어와 희수(戱水) 서쪽에 주둔했다. 변절한 조무상(曹無傷)의 이야기를 들은 항우는 400,000명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하여 유방을 박살내버릴 생각이었으나, 숙부인 항백(項伯)이 유방을 따르던 장량과 인연이 있어서 장량에게 갔다가 유방의 부탁으로 중재를 시도해 일단 싸움을 멈추고 유방과 회담을 치르게 되었다.
홍문연 문서 참조.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范增)은 훗날 두고두고 골치 아플 유방을 이 회담장에서 바로 암살할 심산이었으나, 정작 항우는 유방에게 화가 나긴 했어도 별 명분 없이 죽일 생각까진 없었기 때문에 범증은 주군인 항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니, 아예 묘사를 보면 다들 분위기를 파악한 상태라 심각한데 항우만 '역시 술자리엔 검무가 있어야지!', '장사로다! 술을 내려라!', '돼지 다리도 드시오.' 같은 식으로 혼자 어린애마냥 해맑게 구는 극도의 눈치없음을 자랑한다.
결국 유방이 살아서 도망가자 분통이 터진 범증이 "어린애와 함께 거사를 도모할 수 없다! 이번 기회를 날려먹었으니, 이제 우린 유방한테 다 죽었다!" 라고 항우에게 크게 일갈했다. 범증이 항우보다 나이가 많았긴 하지만 엄연히 주군한테 저 정도 폭언을 저지른 셈인데, 그러나 의외로 항우는 이런 말을 듣고도 범증을 죽이거나 벌하지 않았다. 항우가 원래 자신의 최측근이나 혈육인 항씨 가문 사람들에게는 매우 관대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관대함보다 진짜 중요한 문제는 코앞에서 놓쳐버린 숙적 유방이었다. 그리고 범증의 말대로 어린애 같은 항우의 방심은 끝내 파멸을 불러온다.
유방은 앞서 진왕 영자영의 항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함양을 약탈하지 않은채 그냥 두었으며 진왕 자영의 안전도 보장했는데, 늦게서야 들어와 유방의 자리를 거의 뺏다시피 한 항우는 함양에 입성해서 성 안의 백성들을 학살하고, 이미 항복했던 진왕 자영을 죽였으며, 진나라의 궁궐에 불을 지르고 모든 것을 불태워 버렸다. 궁궐은 장장 3개월에 걸쳐서 불타올랐는데 그러는 동안 머물면서 어찌나 파괴하고 백성들을 죽였는지, 유방이 북진한 해에는 그 풍요로웠던 관중 땅에 대기근이 돌아서 사람들이 서로 뜯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소하가 백성들을 파촉 땅으로 내몰아 먹을 것을 캐도록 해서 연명시켜야 했다. 항우가 관중을 버리다시피 한 이유 중 하나도 남은게 폐허 뿐이라서 살기가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여러모로 항우의 전략적인 무능함을 옅볼 수 있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후 항우는 중원을 다스리기 좋은 입지인 관중에 남을 것을 충고하는 간의대부 한생의 반대도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랑해야 한다는 이유로 관중을 버리고 먼 동쪽의 팽성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기가 막힌 그 한생이 항우를 일컬어 관을 쓴 원숭이 꼴이라고 조롱하자 그걸 듣고 한생을 삶아서 죽였다. 후술하겠지만, 항우의 이 관중 포기는 신안대학살, 후초의 의제 시해와 더불어 항우가 초한전쟁에서 파멸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평가된다.
6. 서초패왕 항우
함양을 점령한 항우는 결국 잠깐이지만 중국을 무력으로 통일한 사내가 되었고 이후 초 회왕을 왕에서 황제로 지위를 높여주고, 존호를 의제(義帝)로 올렸는데, 이는 회왕을 공경한다기보다는 자기가 초나라 왕이 되고 싶어서 행한 조치였다. 항우는 노골적으로 " 의제는 아무런 공도 세운 게 없고, 진나라 멸망은 나와 장수들이 다 한 일"이라고 발언하며 여러 제후들을 각지에 분봉했으며, 자신은 서초(西楚)란 땅을 가지고 팽성(彭城)을 도읍으로 삼아서 항우 자신의 왕국 서초를 건국하고 스스로를 서초패왕(西楚覇王)으로 칭하게 되었다. 의제는 당시 매우 저개발 깡촌 중의 깡촌인 남쪽 저 멀리 장사(長沙)의 침현(郴縣)[13]으로 옮겨가게 하여 대놓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하였고, 의제의 주변에서 서서히 사람들을 치워나갔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낭중(郎中)의 벼슬을 하고 있던 한신도 초나라군에 있었다. 한신은 이미 그때부터 항우에게 몇 차례 제안을 올렸지만 항우는 한신을 우습게 보고 이 제안들을 철저하게 무시했고, 이에 상심한 한신은 유방의 진영으로 달아나 버렸다.
유방은 당시 중국에서 서쪽 끄트머리 변방이라 할 수 있는 한중, 파촉 땅에 보내 한왕으로 봉해 뒀다. 그런데 한신을 얻은 유방이 그해의 여름도 되기 전에 파촉의 험지를 넘어 삼진을 뚫고 장안을 탈환했다. 이에 항우는 일단 정창(鄭昌)을 한왕(漢王)으로 삼아 유방을 막게 했으나, 그와 동시에 제나라에서 변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7. 초한전쟁
7.1. 제나라 공격
항우의 분봉 조치는 모든 제후들의 요구 조건을 맞춰 주지 못했고, 특히 제나라의 전영(田榮)은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전담 일족이 재건한 제나라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건국 과정에서 진승의 장초나 항량의 서초에 도움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았다. 전담이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전사했을 때 항량이 자신을 도와줘 목숨을 건지고 본국으로 돌아가 실권을 잡을 수 있긴 했는데, 이후 전영에게 반대한 세력의 망명을 항량이 받아줘 전영과 항씨의 사이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제나라는 항량을 지원하지 않는 것으로 적어도 항우의 입장에서는 숙부 항량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기여했고, 항량이 죽은 후엔 사신을 통해 회왕에게 송의를 칭찬하며 항우가 한번 실권을 빼앗기는 상황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 전영이 항우에게 불만이 있는 것만큼이나 항우 역시 전영에게 불만이 있었다.
더군다나 이 당시 제나라 내부의 사정상, 항우가 제나라를 전부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다. 전담 일족의 제나라 재건은 완전하지 못했고, 제북군 일대에는 마지막 제나라 왕 전건의 손자 전안이 독자적인 세력을 일구고 있었다. 항우의 동맹군 중에는 전도(田都)라는 제나라 장수가 이끄는 제나라군이 있었는데, 앞서 말했듯 항씨를 싫어하는 전영은 항우에게 군대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으나 전도는 전영에게 반기를 들고 조나라 구원에 나섰다. 전안과 전도는 이후 항우를 위해 공적을 세웠다. 전담이 죽었을 때 제나라에서는 전건의 아우 전가를 왕으로 세웠으나 전영이 전가를 내쫓았는데, 전가는 항량에게 망명해 초나라 신세를 지고 있었다.
즉 항우와 전영의 사이도 나쁜 데다, 전영에 반대하는 제나라 세력은 항우의 산하에서 항우를 위해 싸웠고, 이제는 그 콩고물을 받아먹을 때가 됐다고 여겼다. 항우는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삼고, 전영이 세운 허수아비 왕 전불을 교동왕으로 삼았으며 전안을 제북왕으로 삼았다.
그러나 전담 일족의 세력은 역시 제나라 최강이었다. 전영은 전도의 입국을 저지해 초나라로 내쫓았고, 전영에게 추대되었지만 겁을 먹은 전불은 도망치다 이를 눈치챈 전영에게 잡혀 즉묵(卽墨)에서 살해당했다.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된 전영은 여기서 더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해서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까지 살해하여 삼제(三齊)를 망라한 세력이 되었다.
여기서 멈추지도 않고 팽월(彭越)을 회유하여 양나라 땅에서 초나라를 흔들게 만들고, 비슷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진여(陳餘)[14]에게 군사를 주어 장이를 날려버리는 등, 항우가 세운 천하를 죄다 흔들어버리는 수준의 분탕질을 해내기에 이른다.
항우는 소공각(蕭公角)을 파견해서 팽월을 상대하게 했으나 그는 팽월에게 격파당하고, 이후 " 유방이 그저 관중을 먹으려 할 뿐이지, 더 욕심은 없다"는 장량의 기만책에 속아 유방을 내버려두고 전영을 먼저 제압하기 위해 북진했다. 이때 항우는 영포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영포는 병을 핑계로 수천 명의 병사만 부하 장수에게 딸려 보내는 적당한 시늉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의제가 전씨 혹은 유방에게 내응할 것이 우려되었는지 기어코 사람을 시켜[15] 장강 한가운데서 죽이고 만다. 이젠 뭐 명분상의 군신 관계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제나라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는데, 항우는 성양(城陽)에서 벌어진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전영을 완전히 박살내고 전영은 도망치다 평원(平原)에서 백성들에게 잡혀 죽었다. 이렇게 해서 전영 자체는 순식간에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잠깐 동안은 장량의 말대로 행동하는 척 하던 유방이 항우가 제나라로 비교적 깊숙히 들어간 틈을 노려서 봄이 되자 동진을 개시한 것이다. 항타와 용저 등이 저지하려 했으나 격파당하고 사로잡히거나 도주하는 등 한나라와의 국경선의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방이 미친 듯이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을 때 항우는 '제나라를 확실하게 정리하고 가기 위해서' 난데없이 북진을 계속하며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항복한 전영의 군사들은 생매장을 하는 한편, 힘 없는 여자들이나 늙은이들을 밧줄로 묶어 포로로 삼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의 행진은 북해(北海)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그 행진 동안 수많은 사람들과 마을들은 초나라군의 진격 루트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몰살되었다. 항우가 이토록 엄청난 짓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는데, 아마도 항량의 죽음을 제나라의 탓이라 여겨 저지른 앙갚음이었거나, 혹은 민초들의 공포심을 부추겨 더 이상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나타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의도에서 벌인 일이라면 항우의 행동은 완전한 실책이었다.
항우의 이런 충격과 공포 수준의 만행을 목격한 제나라 사람들은 겁을 먹고 버로우를 타기는커녕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은 심정으로 모여서 반기를 들며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죽은 전영의 동생인 전횡(田橫)은 여기에 도망친 제나라 군사 수만 명을 수습해서 성양에서 저항을 계속하였다. 항우는 성양을 깨기 위해 수 차례 공격을 퍼부었으나 워낙 저항이 완강하여 도저히 함락이 되질 않았다.
7.2. 팽성대전
그 무렵, 삼진을 완전 평정한 유방은 관중을 지배 영역으로 확고하게 다지고 다섯 제후들을 모아 5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세로 동진을 시작했다. 중간에 가로막는 제후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모조리 박살이 나버렸고, 제후 연합군은 별다른 문제도 없이 제나라 공격을 나가서 텅텅 비워진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을 장악하였다.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나라의 결사항전에 발이 묶여있는 항우도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항우는 부하 장수들에게 성양의 공격을 맡긴 채, 정예 3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엄청난 속도로 남하, 야간에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고 그때부터 다시 동쪽으로 진군하면서 눈 앞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처럼 밞아 죽였다. 이때 양군의 전력차는 무려 19배 정도. 그가 인솔한 3만명이 최정예였을 가능성을 감안해도 팽성 일대는 항우의 홈그라운드였으니 지리적 익숙함은 당연히 항우가 앞서서 북쪽으로의 기습만 대비하고, 그외는 군기 빠진 채로 대비가 되지 않은 한나라 연합군의 빈곳을 제대로 찌른데다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인 야간전을 능숙하게 성공시킨지라 한나라 연합군은 무참히 살육당했고, 새벽에 시작된 기습전은 정오가 되기도 전에 초나라군의 압승으로 끝나버렸다. 이 귀신에 홀린 듯한 결과에 공포에 질린 연합군은 장수고 병사고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穀水)와 사수(泗水)에서 10만여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수수(睢水)에서 무참하게 살육당하여 10만여 명이 물귀신이 되었다.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이 아예 수수에 몸을 던져 자살하기까지 해서 피해가 더욱 컸다. 수수는 한군의 시체 때문에 물이 흐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항우는 이 싸움에서 유방을 완전히 끝장내는데 실패했다. 유방을 사로잡을 기회가 두 번 정도 있었으나 한 번은 모래 폭풍 때문에, 또 한 번은 정공(丁公)이 유방을 보내주어 놓치고 만 것이다. 이후 유방은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의 군세와 합류해서 전력을 추스리고 형양(滎陽)으로 이동했고, 때마침 소하가 미친 듯이 보급을 해주어 한숨을 넘기게 되었다. 초군은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후방에 도착한 한신이 이끄는 한군[16]에게 패배해 추격을 멈추어야 했다. 그 뒤로도 한군의 보급로를 심심찮게 약탈하긴 했으나, 팽성의 코앞에 있는 구강의 왕이었던 영포가 수하의 말빨에 넘어가서 항우에게 칼을 들이미는 바람에 이쪽이 정리될 때까지 항우는 꼼짝없이 초나라 본진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에 유방은 후방을 깔끔하게 정리한 뒤 형양에 방어선을 탄탄하게 굳혔다. 이렇게 기회를 놓친 대가로 항우는 제나라 때와도 비교도 안되는 늪에 빠지고 만다.
결국 이 싸움이 항우의 엄청난 대승이라는 사실은 분명한데, 항우는 '팽성의 수복' 외에 목표를 완벽하게 달성하지는 못했다. 유방을 죽이거나 재기불능으로 만드는 데 실패했고, 한군은 형양을 기점으로 계속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고, 후방에 관중과 파촉이라는 확고한 근거지가 있어 그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 결정적으로 항우가 직접 지휘하는 군대에 대해서는 승산이 없지만, 그가 없는 초나라 병력을 상대로는 승산이 있어서 양동작전, 게릴라 등이 좀 더 적극적으로 발휘될 여지를 제공했다. 그나마 유방 밑으로 집결했었던 제후/군벌들을 와해시키거나 아군 쪽으로 전향시켰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이다. 그 성과를 자기의 정치력 부족으로 머지 않아 다 말아먹어서 그렇지(...).
또한, 항우가 남쪽으로 돌아간 틈을 타 전횡은 초나라의 세력을 제나라 땅에서 대부분 몰아내고, 전영의 아들 전광(田廣)을 왕으로 추대하여 다시 한 번 제나라를 부활시켰다. 즉 제나라에서 벌인 그동안의 싸움이 거의 의미가 없게 되었던 것. 다만 이 싸움의 결과로 한군에 붙었던 여러 제후들을 다시 초나라의 세력으로 끌어올 수는 있었다. 사실, 제나라가 항우 군에 대하여 워낙 결사항전으로 나왔기 때문에 설사 제나라를 점령했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제나라는 다시 부활했을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결사항전한 이유야 당연히 항복하나, 항전하나 결과적으로 죽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7.3. 형양 함락
유방(劉邦) |
그러나 서초군이 한군의 군량을 끊어버리자 농성은 한계에 봉착했고 기원전 204년 5월, 형양은 거의 함락 직전이 되었다. 유방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항우에게 강화 요청을 하고, 형양의 이서 지역을 경계로 하여 서초와 한나라의 국경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항우는 처음엔 솔깃했지만 범증(范增)은 유방이 위험한 인물이니 강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항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욱 강하게 형양을 공격했다.
이에 진평(陳平)은 항우의 고질적 문제였던 인색한 포상을 이용, 그간 그렇게 공을 세웠는데도 왕 자리는커녕 봉토 한 줌도 주지 않는 항우에게 불만을 품은 종리매, 계포, 용저, 범증 등이 유방과 내통해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휘하 제장들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작전을 실행했다. 항우가 이들에게 뒤늦게라도 포상을 베풀어 다독이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해하고 눈총을 주며 분위기가 무거워지던 중, 한군 진영에서는 초나라의 사자가 오자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는 뒤늦게 깜짝 놀라는 체하며 "어, 우린 범증의 사자가 온 줄 알았는데 항우의 사자구만?" 이런 소리를 하며 대접한 음식을 모조리 빼앗고 그냥 평범한 음식을 내주었다. 그런데 항우는 이런 간단한 수작에 넘어가 범증을 의심했고, 갑자기 형양성 공격에 소극적으로 변한 항우의 태도에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항우한테 실망하고 분노한 범증은 사임하며 항우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그리고 범증은 얼마 되지 않아 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하지만 범증이 죽었다고 당장 형양을 포위한 서초 군사들과 항우까지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에 진평은 2천여 명의 여자들을 갑옷을 입혀 병사로 위장한 뒤, 성 밖으로 내보내 눈속임을 하고, 기신(紀信)이 스스로 유방 행세를 하여 성 밖으로 나가 초군에 항복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유방은 그곳을 탈출했다.
속임수에 당한 것을 깨달은 항우는 기신을 불태워 죽였다. 주가가 죽어라 버티는 형양을 일단 내버려두고 성고를 함락시킨 항우는 완읍에 주둔한 유방을 쫓아갔지만, 유방은 버티며 방어만 할 뿐이었다. 항우가 유방에게 붙잡혀 시간을 날리는 사이, 슬금슬금 서초 지역으로 숨어들어간 팽월은 초나라의 동아(東阿)[17]를 공격해서 초나라의 장수 설공(薛公)을 죽여 서초 군대를 크게 무찌르고 급기야 수도인 팽성에까지 들이닥칠 기세로 움직였다. 이런 상황을 내버려 둘 수 없었던 항우가 팽월을 잡으러 떠나자마자 유방은 재빨리 나와 성고를 탈환하고 그곳에 주둔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팽월을 격파한 항우가 다시 형양으로 돌아와 주가(周苛), 종공(樅公), 한왕 신이 지키는[18] 형양을 함락시켰다. 항우는 주가를 회유해보고자 했으나, 주가가 황당해 하며 "너 따위는 우리 한왕의 상대가 안 된다. 지금이라도 당장 항복하면 포로 신세는 면할 것이다!"라며 조롱하자 분노하여 주가를 팽형으로 죽이고 종공도 같이 죽였다. 한왕 신은 거짓으로 항복했다가 나중에 한군으로 탈출했다.[19]
유방은 성고가 함락되기 전에 하후영과 함께 도망쳐 한신의 군영으로 이동하여, 한신이 잠자는 사이 강탈한 군대로[20] 다시 항우를 상대하려 했다. 하지만 그 사이 성고는 이미 함락되었고, 마침내 항우에게 거칠 것 없이 서쪽으로만 진격하면 지긋지긋한 유방과 한나라를 끝장낼 기회가 눈앞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이 시점에 미쳐 날뛰는 팽월의 활약으로 항우는 절호의 기회를 잃고 만다. 유방이 항우와의 결전을 포기하는 대신[21] 서초 후방으로 잠입시킨 유가, 노관의 군대와 합류한 팽월은 작정하고 서초 군대를 박살내며 무려 성 17개를 함락시키기에 이르렀는데, 팽월이 입히는 피해가 워낙 막대하다 보니 항우는 하필 조금만 더 나아가면 이기는 상황에서 팽월을 막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게 된 것. 항우가 대사마 조구에게 가만히 성만 지키라고 신신당부하였으나, 당초엔 공성(鞏城)[22]에서 항우의 서진을 저지하려 했던 유방에게 역이기가 "먹을 것이야말로 하늘 위의 하늘인데, 항우는 어리석게도 성고에는 고작 죄수부대를 두어 가로막으며 광무산을 굳게 지키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이 준 기회이며, 승패를 가르지 못하고 마냥 전쟁이 길어지면 백성들도 지쳐버려 당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때다."라고 간언했고, 유방이 이를 받아들여 수비가 아닌 공격을 선택, 조구를 욕설로 꼬여내어 쳐부순 뒤 성고를 다시 수복했고, 곧 형양으로 돌진해 종리매를 쫓아낸 후 광무(廣武)(지금의 하남성 형양시 동북의 광무산(廣武山) 또한 탈환한 뒤 그곳에 주둔하면서 오창(敖倉)의 양식을 확보, 장기전을 벌일 수 있는 기반을 재차 손에 넣었다. 성고를 탈환하긴 했지만 이제까지의 험난했던 전투로 인해 성벽이 많이 훼손돼서 방어하기에 적당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오창을 지킬 수 있고 지형지물을 이용할 수 있는 광무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23]
이렇게 기껏 잡은 승기가 멀어지는 사이 팽월을 잡으러 간 항우는 동쪽으로 나아가 진류(陳留)와 외황(外黃)을 공격했지만 외황은 생각보다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밤을 틈타 팽월이 도망치자 외황 사람들은 성문을 열고 항복했는데, 항우는 이들이 자신을 기만한다고 여겨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성 안의 장정들을 모조리 생매장해서 죽이려고 했다. 그때 13살 남자아이가 항우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팽월이 우리를 죽이려고 하여 외황의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다가 짐짓 항복한 척하고 대왕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왕이 오시더니 외항의 백성들을 모두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려고 하십니다. 어찌 백성들이 대왕께 몸을 의탁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곳 외황 동쪽 양나라 땅의 10여 개 성은 모두 두려워하여 필사적으로 항거하며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항우는 그럴 법도 하다고 하여 죽이지 않고 그냥 항복을 받아들였는데, 이전에 사람들을 죽일 때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던 성들이 그 소문을 듣고 줄줄이 항복해 왔다. 그러나 항우가 교훈을 얻기에는 일이 너무 늦어버렸다. 항우가 이러는 사이 유방이 조구를 죽였다는 소식이 들어갔고, 항우는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귀환했다.
7.4. 광무 대치
팽월을 물리친 항우는 다시 돌아와 형양 동쪽에서 포위당해있던 종리매을 구원하고 수 개월 동안 광무에서 주둔했지만 산 위에 틀어박힌 유방을 물리치기도 곤란했고, 또다시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며 보급선을 끊어버리는 팽월 때문에 항우는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판사판으로 항우는 큰 도마를 만들고, 그 위에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을 올려놓고 " 항복하지 않으면 삶아서 죽이겠다!"며 엄포를 놓았다. 조금만 생각해도 상당히 막무가내식의 인질극인데, 당시 항우가 얼마나 초조해져 있었는지 볼 수 있는 부분.그러나 유방은 이런 충격과 공포 급 제안에 "우리가 예전에 의형제를 맺었는데, 지금 우리 아버지를 죽이면 너는 네 아버지를 스스로 죽이는 거다. 그래도 죽이려면, 네놈 아비의 국물을 나한테도 한 사발 다오!"라고 더욱 충격적인 발언으로 응수했다. 이에 항우는 격분하여 정말 태공을 죽이려고 하다가 항백의 만류로 그만두었다.[24]
하지만 항우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 지금 천하가 혼란한 건 우리 둘 때문인데, 차라리 우리가 맞짱 한 번 떠서 이 싸움을 끝내자"고 제안했다. 물론 일기토로 포장된 자살행위에 관심 없던 유방은 "난 힘이 아니라 지혜로써 싸우려고 한다"고 무시했다.[25] 이러자 항우는 장수 하나를 내보내서 시비를 걸었는데, 잠시 동안은 못본 체 하는 것처럼 굴던 한군은 그 장수가 세번째로 나왔을 때 다짜고짜 누번(樓煩)이라는 활 잘 쏘는 인물을 내보내서 서초의 장수를 쏘아 죽였다.[26] 이에 화가 난 항우는 완전 무장을 하고 누번에게 달려들었고, 누번은 항우에게 활을 쏘려고 하다가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는 소리에 식겁하고 그대로 한군의 진영으로 도망쳐 와 버렸다. 유방은 튀어나온 장수가 항우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고 한다.
항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나가 유방에게 말을 걸었고, 유방 역시 항우와 마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유방은 항우가 지금까지 저지른 10가지의 죄목을 열거하며 항우를 비판했다.
"하나, 팽성에서의 약속을 위반했다. 당초에 초 회왕과 제후들이 먼저 관중에 입성한 자가 관중의 왕이 될 것이라 서로 굳게 약속하였지만 스스로의 욕심으로 이러한 제후들과 회왕의 맹약을 묵살하고 최초로 관중에 진입한 자신을 협박하여 파촉으로 쫓아버렸다."
"둘, 주군인 초 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써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 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례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 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 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 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 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아홉, 의로써 우리 모두가 초 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 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한낱 도적놈을 토벌하려는 것뿐이니, 너 따위는 내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죄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으로도 충분하다!"
"둘, 주군인 초 회왕이 직접 임명한 송의를 왕명을 사칭하여 살해함으로써 상전에 칼을 들이밀었고 초 회왕과 그의 군신들의 위엄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이 이를 갈게 만들었다."
"셋, 초 회왕이 진나라에 들어가 폭행과 노략질을 하지 말 것을 엄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살로 함양성을 피로 물들이고 아방궁을 불살라 파괴만을 일삼으며 시황의 능묘를 파헤쳐 진나라의 보물을 착복하고 죽은 자마저 모독했다."
"넷, 대의에 따라 명을 받고 조나라를 구원하였으나 스스로의 욕심으로 마땅히 그 결과를 회왕에게 보고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지 않고 제후들을 협박해 관내로 들어갔다."
"다섯, 진왕 자영이 이미 투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멋대로 죽여버렸다."
"여섯, 투항한 진나라 병사 20만 명을 속여 신안 경내에서 하룻밤 사이에 이들을 살아있는 채로 땅에 묻어 유례없는 대학살을 벌이고 그들의 장수인 장한과 사마흔을 보란 듯이 왕에 봉하니 진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자아내게 했다."
"일곱,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사로이 좋은 땅을 주고 왕에 봉하며, 공이 있음에도 아랫 사람들을 농락하며 유배지를 주었다. 원래의 제후들은 벽지로 내쫓아버리고 그들의 장수들은 중요한 땅의 왕으로 삼아버리니 군신의 법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모든 지역의 신하들이 앞다투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덟, 진의 도읍을 불태운 후 자신의 마음대로 팽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그곳에 초 회왕을 의제로 지칭하며 끌고 와 감금하였다. 한왕의 봉지를 빼앗고 양나라와 초나라 땅을 마음대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아홉, 의로써 우리 모두가 초 회왕을 섬기기로 맹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추악한 성품으로 결국 강남에서 의제를 살해해 버리고 그 시체를 장강에 처넣으니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칠 지경이다."
"열, 군주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치를 함에 공정함이 없고, 약속을 초개처럼 버렸다. 신하된 자로서 군주를 시해하고 이미 항복한 자를 죽였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신의를 저버리니 이야말로 천하가 용납하지 않는 대역무도함이다."
"나는 정의로운 군대를 이끌고 한낱 도적놈을 토벌하려는 것뿐이니, 너 따위는 내가 직접 나설 것도 없이 죄지어 군역을 하는 천한 자들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나하나 다 사실이라 반박하기 어려운(...) 신랄한 공격을 받고서, 항우는 토황소격문을 받아든 것마냥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미리 숨겨놓은 쇠뇌를 쏴서 유방을 맞혀 버렸다. 쇠뇌를 숨기고 있다 기습적으로 저격을 시도했다는 걸 보면 항우는 처음부터 말싸움 결과와 무관하게 유방을 암살하여 전황을 뒤집어보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지만 가슴팍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이를 참으며 또 다시 한 술 더 떠 "저 도둑놈이 내 발가락을 맞히네!"라고 능청을 떨면서 달아났다. 당연히 쇠뇌에 가슴을 맞았으니[27] 유방의 부상이 가볍지는 않았지만 허세를 부려서 무마한 것. 이 때가 항우가 승리할 수 있었던 사실상 마지막 기회였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막무가내 제안과 기습은, 역으로 당시 항우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항우는 어떻게든 기책으로 난국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항우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7.5. 몰락의 길
한신 |
그나마 항우에게 한 번 더 기회가 오긴 했다. 그건 바로 역이기가 제나라를 언변으로 복속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한신이 괴철의 꼬드김에 넘어가 동맹 성사 직전 제나라를 공격 한 덕에, 뒤통수를 맞은 제나라 잔존 세력이 크게 분노하여 역이기를 죽이고 원수 항우와 손을 잡는 강수를 택한 것. 이에 응한 항우는 용저(龍且)에게 20만이라는 대군을 주어 제, 초 연합군을 결성해 대항하게 하였다. 항우가 직접 가면 좋았겠지만, 결국 직접 가지는 못 했다. 다만 고작 보름 정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유방에게 조구가 패배해 모든 게 틀어졌으니 같은 행동을 하기가 불안했을 수도 있다. 소설 같은 매체의 영향으로 유방의 군사적 능력이 폄하되는 편이지만, 유방은 결코 군사적으로 무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항우와의 싸움을 제하면 유방은 자신이 나선 거의 대부분의 싸움에서 승리했던 지휘관이다. 한신이 북벌할 동안 직접 항우를 상대로 계속 판을 이끌어나갔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사실 항우도 직접 가지만 않았을 뿐이지 20만이라는 대군을 보낸 데다가 자신이 신임하는 용저를 보냈고 그와 더불어 부관으로 주란이 함께 있었고 제왕 전광과 더불어서 전광이 모아온 제나라의 남은 병력까지 합해져 있었던 만큼 한군에 비해 결코 불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한신은 오히려 유수 전투에서 용저가 이끄는 제, 초 연합군을 격파하고 용저를 참살하였다. 이로써 화북의 대부분이 한신의 통제 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한신은 사실상 항우, 유방과 맞먹는 거대한 세력권을 가지게 되었다.
용저의 대패로 인해 항우는 결과적으로 초한전쟁의 패배자가 된다. 유수 전투를 단지 한신과 용저만의 전쟁이라기에는 병력 규모도, 양쪽이 얻은 이득도 피해도 어마어마한 셈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유수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신을 막았더라면 유방의 통일은 아마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중요한 전투였지만, 용저가 대패를 당했기 때문에 대세는 이미 유방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항우는 이 때문에 두려워하면서 수하의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설득하게 했지만, 한신은 "항우 그 자가 날 어떻게 대접했나? 유방은 밥 주고 옷 주고 장군 시켜주고 다 해줬는데 이제 와서 날 찬밥 취급한 항우의 편을 하라?"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며 거절해 버렸다. 한편 팽월은 이 와중에 또 튀어나와 양나라 쪽을 공격해 항우의 보급로를 끊어 놓았다.
이후 반년 정도 대치를 지속했지만 항우에겐 더 이상 상황을 바꿀 여력이 없었다. 한동안 가왕 신청 등으로 늑장을 부리던 한신도 202년 8월 즈음에는 초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7.6. 사면초가와 패왕별희
서쪽에는 유방의 세력이 건재하고, 북방은 한신이 모조리 평정해 버린 상황. 게다가 영포 역시 유방의 편을 들고 있고 후방에서는 팽월이 계속해서 날뛰고 있었다. 이렇다 할 패전도 없이 항우는 최악의 형세에 놓이고 말았는데, 한군은 오창의 보급을 통해 군량이 풍부한 반면 초군은 지독한 팽월의 후방 교란 때문에 보급도 충분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 즈음에는 근흡이 성고 부근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당장 코앞에서 형양부터 양읍에 이르는 보급로가 차단당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이때 유방은 후공(侯公)을 보내 천하를 양분하여 홍구(鴻溝) 서쪽은 한나라의 영토로 하고 동쪽은 초나라의 영토로 하자는 협약을 맺자고 했다. 형양 포위 때는 이러한 제안을 거절했던 항우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선 결국 어쩔 수 없이 제안을 승낙했고, 사로잡았던 태공과 여후를 보내주었다. 협약을 맺은 후 항우는 자신에게 아직까지 협력을 했던 제후들의 군사를 해산하고 팽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유방 역시 장안으로 돌아가려고 할 무렵, 장량과 진평은 그런 유방을 만류했다. 왜냐하면 지금이야말로 항우를 끝장낼 수 있는 최후의 기회라는 것. 이 말을 듣고 수긍한 유방은 다시 군사를 모아 돌아가는 항우를 기습하였지만, 오히려 고릉(固陵)(하남성 태강현(太康縣) 남쪽)에서 항우의 군대에게 또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마침내 성 밖으로 나온 유방에게 또 미련을 가진 사이 관영에게 팽성이 함락당하는 바람에 퇴로가 끊어져버렸다.[28] 게다가 관영은 지체없이 진성으로 향해 대치중인 항우의 후미를 쳤으며, 유방 또한 합공을 가하자 항우는 이번에도 소득없이 물러날 수 밖에 없게 되고 만다.
유방은 장량의 제안에 따라 팽월과 한신의 봉지를 넒혀주기로 약속하고, 항우의 대사마 주은(周殷)을 회유하였고, 수춘을 공격하던 경포(黥布)와 유가(劉賈)까지 합류시켰다. 한신과 팽월이 결국 유방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군대를 이끌고 오면서, 영웅들은 마침내 해하(垓下)에서 모두 집결하였다. BC 202년, 해하에서 집결한 연합군은 항우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결국 이 마지막 해하 전투에서 항우는 패배하였고, 산 위로 도주하여 농성하려 했다. 그러자 한군은 서초 군을 포위하고는 사방에서 초나라의 노래를 불렀다. 패배에 상심해 있던 항우는 이 노랫소리를 듣자 크게 놀라워했다.
"한군이 이미 초나라의 모든 땅을 점령했단 말인가? 어찌하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듯 그 수효가 많단 말인가?"
항우조차 이럴 지경이니, 대부분의 병사들과 심지어 항백, 종리매, 계포 등의 최측근에 이르기까지 더는 가망이 없다 여기고 한밤을 틈타 탈영해 버리고 만다. 마음이 복잡해진 항우는 우미인과 남아있던 신하들과 함께 밤중에 술을 마시면서 슬픔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ruby(力拔山兮氣蓋世, ruby=역 발 산 혜 기 개 세)]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었도다.
[ruby(時不利兮骓不逝, ruby=시 불 리 혜 추 불 서)] 하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ruby(骓不逝兮可奈何, ruby=추 불 서 혜 가 나 하)]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ruby(虞兮虞兮奈若何, ruby=우 혜 우 혜 내 약 하)]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항우, 〈해하가(垓下歌)〉
[ruby(時不利兮骓不逝, ruby=시 불 리 혜 추 불 서)] 하지만 시운이 불리하니 추(騅)도 나아가지 않는구나.
[ruby(骓不逝兮可奈何, ruby=추 불 서 혜 가 나 하)] 추마저 나아가지 않으니 난 어찌해야 하는가.
[ruby(虞兮虞兮奈若何, ruby=우 혜 우 혜 내 약 하)] 우희(虞姬)여, 우희여! 그대를 어찌하면 좋은가.
항우, 〈해하가(垓下歌)〉
항우가 노래를 부르자, 우희(虞姬)도 답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ruby(漢兵已略地, ruby=한 병 이 략 지)] 한군이 이미 천하를 다 빼았으매
[ruby(四面楚歌聲, ruby=사 면 초 가 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ruby(大王義氣盡, ruby=대 왕 의 기 진)]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ruby(賤妾何聊生, ruby=천 첩 하 료 생)]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우희, 〈해하가〉
[ruby(四面楚歌聲, ruby=사 면 초 가 성)]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은 초나라의 노랫소리
[ruby(大王義氣盡, ruby=대 왕 의 기 진)] 대왕의 의기가 다하셨다면
[ruby(賤妾何聊生, ruby=천 첩 하 료 생)] 천첩이 살아서 무엇하리요.
우희, 〈해하가〉
결국 그 패왕 항우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차마 항우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다고 한다. 정사에는 이후 우미인에 대한 기록이 없다. 초한지에서는 우미인 자신이 항우의 걸림돌이 된다며 이 직후 자결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워낙 극적인 장면이라서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각색된 경극이 장국영 주연의 영화로도 유명한 패왕별희다.
7.7. 영웅, 오강에 지다
항우는 그날 밤으로 말을 타고 자신을 따를 수 있는 병사 800여 명을 이끌며 한군의 포위망을 뚫었다. 날이 밝은 뒤에 항우가 달아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방은 관영을 시켜 5,000여 명의 기병으로 항우를 추격하도록 했다. 항우가 회수를 건넜을 때는 남은 수하가 겨우 100여 명밖에 없었다.이윽고 항우는 음릉(陰陵)[29]에 이르렀는데, 길을 잃어버린 그는 밭을 가는 노인에게 길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노인은 그가 항우임을 눈치채고 제대로 엿을 먹이기로 결심하며, 왼쪽, 왼쪽으로 가라(左左)고 구라를 쳤다! 그냥 지나칠 수 있지만 이 부분은 민심이 항우를 이미 떠났다는 복선이었다. 굳이 같은 글자를 두 번 씀으로써 항우에 대한 민중의 분노를 깊이 '새겨'넣은[30] 이 대목은 후세의 문인들에게 극찬을 받았다.
항우는 결국 늪지대에서 발이 묶여 한군의 추격군과 조우하고 말았다. 항우는 100여 명으로 한군 5,000명의 포위를 뚫는 괴력을 발휘하며 천신만고 끝에 동쪽으로 길을 뚫어 동성(東城)에 이르렀지만 수하엔 고작 28기(騎) 뿐이었다. 그리고 한군의 추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추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긴 항우는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고 있었던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다음부터의 기록은 사서치고는 묘사가 풍부한 《사기》에서도 거의 소설 수준으로 묘사가 살아있는 부분이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지금으로써 8년이 되었다. 그 동안 몸소 7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고, 내 앞을 가로막은 자들은 모두 목을 베어 죽였다. 나의 공격을 받은 성들은 모두 항복을 했고,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싸움에서 진 적 없이 천하를 제패했다. 그러나 오늘 내가 졸지에 이곳에서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그리고는 남은
기병들을 네 방향으로 달려나가게 하면서, 이렇게 소리쳤다.오늘 내가 한사코 죽음을 무릅쓰고 통쾌하게 싸워 반드시 세 번 싸워 모두 이김으로써, 너희들을 위해 한군의 포위망을 풀고, 적장들의 목을 베면서 적군의 깃발을 부러뜨려, 지금 내가 이런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된 이유는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지 내가 싸움을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증명해 보이겠다.
내가 그대들을 위하여 한나라 장수의 목을 베겠다!
이윽고 항우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고, 그 모습을 본 한나라 군사들은
모두 엎드려 버렸다. 난리통에 정말로 한나라 장수 한 명의 목이 달아났고, 마침 항우를 추격하던 적천후(赤泉侯) 양희(楊喜)는 항우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항우가 눈을 부릅뜨고 질책하자 양희와 양희가 타고 있던 말이 놀라서 몇 리를 달아나 버렸다.항우와 그 기병들이 다시 모일 무렵, 또 다시 한군이 포위하여 왔다. 그러자 항우는 말을 달려 한나라 도위 한 명을 죽이고 수십 명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한군 병사들을 죽이고는 기병들을 다시 모았다. 안 보이는 사람은 딱 둘 뿐이었다. 항우는 기병들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병사들은 모두 엎드려서 말했다.대왕의 말씀이 맞습니다.
항우는 계속 도망쳐서 오강(烏江)에 이르렀는데, 오강의 정장(亭長)[31]은 배를 타고 기다리다가 항우에게 말했다.강동(江東)의 땅은 비록 협소하다고 하나 사방 1,000리에 달하고, 백성들의 숫자는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어 가히 그곳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속히 배에 오르시어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이 강 안에는 오직 이 배밖에 없어, 비록 한군이 쫓아오더라도 강을 건너지 못할 것입니다.
항우가 말했다.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고 하는데, 강을 건너서 무엇하겠는가? 또한 옛날 내가 저곳 강동의 자제 8,000명과 함께 강을 건너 서쪽으로 나왔다가 모두 전사하고, 오늘 단 한 사람도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사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삼아 준다 한들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비록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항우 혼자만 부끄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32]
그리고는 가지고 있었던
오추마를 정장에게 주었다.나는 그대가 장자(長者, 현명한 자)임을 알겠다. 나는 이 말을 5년 동안 타고 다니면서 이르는 곳에는 대적할 사람이 없었고 하루에 1,000리를 달릴 수 있었다. 내가 차마 죽일 수 없어 그대에게 이 말을 맡기겠다.
《
초한지》 등의 설화에서는
오추마가 배 위에서 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나온다. 또한, 마지막까지 따르던 26명의 장병들은 끝까지 항우와 함께하려 했으나, 항우가 강제로 배에 태워서 도망치게 했다고 묘사한다. 《
문정후 초한지》에선 이 병사들을 항우의 거병부터 최후까지 수없이 많은 악전고투를 뚫고 바로 전날까지도 있었던 수많은
탈영의 기회를 전부 마다하고 버텨낸 전사 중의 전사들로 묘사했다. 그 외에 다른 《
초한지》의 판본에서도 이 장병들을 위에 언급한 강동의 자제 8,000명 중 마지막까지 생존한 정예 부대이자 처음부터 끝까지 항우를 섬긴 측근들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항우가 강제로 도망치게 할 때도 "주군의 명령을 거역할 셈이냐? 당장 배에 올라타라"고 말하고, 장병들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끝까지 명령을 따른다는 극적 묘사를 추가하기도 한다. 다만, 실제 역사 기록에는 항우의 명령으로 말에서 내린 뒤 짧은 무기만 들고 항우와 함께 한나라 추격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고 나온다.《 사기》와 《 자치통감》의 기록에 따르면[33] 항우는 말에서 내린 후, 한나라 추격군과 정말 최후의 싸움을 벌였는데, 항우 혼자서만 수백여 명의 한군을 죽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추격군은 관영이 이끄는 5,000명의 기병 부대였다는 것이다. 즉, 말도 없이 단신으로 기병 수백을 썰어버린 것이다. 관영은 유방의 장수들 중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맹장이었고 5,000명의 기병은 유방이 직접 엄선한 정예 기병대일텐데, 항우를 완전히 끝장내는 마무리 카드로 투입된 병력을 상대로 항우는 무쌍을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항우도 몸에 10여 군데가 넘는 상처를 입었는데, 그는 문득 여마동(呂馬童)을 발견하고 "너는 내 부하였던 녀석이 아니냐?" 고 물었다. 여마동은 차마 대꾸하기가 겸연쩍었는지 옆에 있었던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항우가 맞다"며 딴청을 부렸고, 항우는 그런 여마동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한왕이 내 목을 1,000금과 10,000호(萬戶)의 봉지로 사려 한다고 했다. 내 그대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겠노라.
그리고는 천하를 호령했던 패왕 항우는 자결하여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천하무적의 항우가 이렇게 죽자 왕예는 그 목을 베어 가졌고, 뒤이어 수십여 명의 한군 기병들이 서로 항우의 몸을 밟는 난리통 끝에 자기들끼리도 죽이면서 항우의 시신을 마구 토막냈다. 결국 양희, 여승, 양무, 여마동이 남은 조각들을 하나씩 취하고 상을 받았다. 이후 항우의 시신을 한 번 조립해서 맞춰 보자 딱 맞아떨어졌으므로 5명은 모두 책봉되어 열후가 되었다. <
고조공신후자연표>을 보면 고조 공신 열후 143인 중 양무가 서열 94위, 여마동이 서열 101위, 항우의 머리를 가져간 왕예가 서열 102위, 양희가 서열 103위, 여승이 서열 104위가 되었다.수많은 전선을 휘저으며 얻은 상처와 훈지를 뒤로 하고 이제 천하의 주인은 유방이 되었다. 둘의 악연을 생각하면 본래는 무덤 같은 걸 만들어 줄 생각은 없었겠지만, 항우의 나라인 서초 땅은 다 항복하는데 정작 한때 봉토였을 뿐인 노현 땅의 사람들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하려 하자 유방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항우의 목을 보여준 뒤 항복하는 것을 조건으로 항우를 노공(魯公)으로 봉하고 곡성에 안장해 주었다고 한다. 이 일 이후 항우의 장례식에서 울다가 돌아가기도 한 유방은 남아있는 항씨 일족과 투항한 초나라 인물들을, 노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름 관대하게 대우한 대신 항우 본인의 경우에는 이름을 막 부르며 왕 취급도 못하게 하는 유치한 형태로 복수를 했다.
하지만 후대에는 사마천에 의해서 <본기>에 기록되었고, 한고조의 라이벌인 패왕이라는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왕의 대우는 충분히 받게 되었다.
[1]
원래 춘추 때 지금의 하남성 저우커우시 선추현(沈丘縣)에 있었던 소 제후국의 이름이었으나, 노희공(魯僖公) 18년 기원전 643년
노나라에 의해 멸망당했다가 후에 다시 초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2]
다른 곳에서 사람을 죽여
오(吳)로 숨어들어 왔다.
[3]
다만, 유방은 장량을 비롯해 여러 모사들의 조언을 적극적으로 구했고, 본인스스로도 그들 사이에 끼며 경험으로 체득함으로써 기량을 갖췄기에, 넓은 의미에서 공부를 안했다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장량은 유방에게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유방이 배운 걸 써먹는 걸 보고 감탄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물론 이 공부를 하게 된것조차도 유방의 인화력으로 인한 것이지만.
[4]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는 일. 가령
한국 곳곳에 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진흥왕이 순수하고 인증용 비석을 세운 것이다.
[5]
유방은 비슷한 상황에서 "사내라면 저 정도는 해 봐야지!"라고 말했다. 비슷하지만 살짝 뉘앙스가 다른데 심플하게 황제 자리에 대한 욕망을 표현한 항우와 달리 유방은 시황제에 대한 최소한의 경의가 담겼다.
[6]
당시 한 척은 약 23cm이므로 지금으로 따지면 약 184cm 정도다. 저 때 항우는
거인이었다. 저 당시 성인남성의 평균 키를 155cm라고 가정해보았을 때(명나라 시절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55cm정도로 알려져 있으므로 기원전 2세기에는 더 작을 것이다.) 184cm인 항우가 약 1.187배가 큰 것인데, 이를 현재
대한민국 성인 남성 평균 키인 173cm에 대입해보면 대략 205cm의 신장이 나오게 된다. 아마도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205cm인 남성보다도 훨씬 커 보였을 것이다.
[7]
실제로
동공과다증이란 질병에 걸리면 동공이 여러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정상적인 시력의 눈이 아니므로 역사에 꼽을만한 장수였던 항우가 이 질병을 앓았을 확률은 매우 낮으며 항우를 일반인과 다른 존재로 만들기 위한 묘사일것이다.
[8]
훗날
소하에게 몸보신의 계책을 귀띔해주었던 그 사람이다.
[9]
송의는 제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항량은 교만해 있어서 장한을 이기지 못할 거라고 예측했는데 마침 이게 맞아떨어져 항량이 살해당했고 이를 제나라 사신이 초 회왕에게 말해서 신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0]
물론 항우에 비하면 그렇다는 말이지 역량 자체는 충분했다.
[11]
다만 항우에게 명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초나라에서도 송의가 진나라와 전투를 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끌었던 것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다.
[12]
현재의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阳市)
[13]
후한 말의 계양 인근. 여기서 조금만 남쪽으로 가면 현재의
광둥성인데 당시 광동성 지역은
조타가
남월을 막 건국하는 시점이였다. 즉, 그래도 명목상 중국의 황제인 이를 이 시대 중국의 사실상 최남단으로 보낸 것이다.
[14]
원수가 된
장이는 항우의 결정으로 상산왕이 되었지만 진여는 왕이 되지 못했다.
[15]
초한지에서는 의제 시해를 계기로 유방이 거사를 일으킨 것으로 나온다. 여담으로 항우 본기에서는
공오(共敖)와
오예(吳芮)가 이 일을 한 것으로 나오는데, 경포 열전에서는 영포가 부하를 시켜 죽인 것으로 나온다.
[16]
패잔병들을 규합한 군대였으며 관영이 큰 활약을 했다.
[17]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동북의 아성진(阿城鎭).
[18]
본래
위표도 있었지만 주가와 종공에게 살해당했다.
[19]
한왕 신이 흉노로 배신한 후 하는 말을 보면 이때 일이 상당히 괴로웠던 듯.
[20]
물론 강탈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미 조나라 땅은 안정이 되었기 때문에 어차피 새로 병사를 모집할 수도 있었고 또, 유방이 데려간 병사들은 원래 유방이 장이에게 한신을 도우라고 하면서 딸려준 3만 군대였다.
[21]
당시 유방은 형양 및 성고의 방위에만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군대를 장수들한테 맡겨 활동하게 했고 본인은 형양 및 성고 전역에 집중했다. 당장 위에서 한신이 조나라에 가 있던 것도 이런 대전략의 일부였다.
[22]
지금의 하남성 공의시(鞏義市) 경내 서쪽 낙수(洛水) 서안에 있는 고을로, 중원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전략적 거점 중의 하나였다.
[23]
사실 이 조언이야말로 제나라 설득과 함께 역이기의 가장 큰 공이라고 할 수 있다.
[24]
항백은 다른 꿍꿍이가 있어서 말렸지만 이미 유방이 '협박은 씨알도 안 먹히니 어디 인질인 우리 아버지를 죽여봐라.'라고 선언한 이상 인질극도 의미없는데다가 정말로 분풀이로 유태공을 죽이면 패드립을 한 유방보다 항우가 더 욕을 먹을 것이 뻔한데다 한나라 장졸들은 분기탱천하여 더욱 이를 악물고 싸우려 들게 되는 등 일방적으로 손해보는 장사이기도 했다.
[25]
당연하지만 일기토를 하면 유방은 항우에게 찢겨져 죽는다.
[26]
누번은 정확히는 사람 이름이 아닌 당시 소수민족 중 하나였다. 아마 그곳 출신 인물이라 누번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27]
특히 쇠뇌는 활보다 위력이 더 강하다.
[28]
이상하게도 항우본기에선
광무 대치 즈음에
팽월에게 죽었다는
설공이 관영 열전에선 이때
관영에게 죽었다고 나온다.
[29]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서북
[30]
문자 그대로
죽간에 글을 새기던 시기였다. 새길 수 있는 글자의 수가 적고 휴대성도 별로였으니 당시 한문체는 간결 그 자체였다.
PC통신 시절 전화요금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말을 줄여서 쓰는
통신체가 발달한 것과 결을 같이한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똑같은 글자를 반복해 썼다면 집필자의 의도가 얼마나 들어갔을지 안 봐도 뻔하다.
[31]
진나라 때 가장 작은 지방 행정 단위로, 매 10리마다 정(亭)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 관리를 정장이라고 했다. 유방도 본래 정장 출신이었다.
[32]
참고로 강동은
후한 말기
오나라를 건국하는 손씨 일가가 자리를 잡아 개발의 시초가 되기 전까지 진짜 촌구석이었다. 정장이 강동은 협소하다고 한 표현에서부터 이를 알 수 있다. 이때 항우가 권유를 받아들여 강동으로 도주해 재기를 도모했을지라도 발달도 제대로 안 된 지역에서 예전만큼의 기반을 갖추는 건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해도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 이전에 한나라가 그냥 놔둘 리가 없다. 당장 여기서도 강동의 백성은 수십만 규모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육가 왈 한나라의 군 하나 정도가 된다. 한나라도 피폐해지긴 했지만 그 정도까지 여력이 바닥났다면 유방 생전의 제후왕들이나 한문제 집권 초기에 유흥거 등이 벌였던 반란들도 좀더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을 것 같다.
[33]
항우의 이 마지막 장면이 단순한 설화인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야사가 아니라 《
사기》와 《
자치통감》이라는 정식 역사서에 분명하게 나오는 기록이기는 하지만, 정작 《사기》에서는 그 다음에 항우가 '동성에서 죽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성에 도착한 이후 오강으로 갔다는 기록과 모순이 된다. 또한 동성에서 28기만이 남아있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사기》 <관영전>에서는 동성 및 역양에서 초나라 장병 12,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링크 <항우본기>의 내용상으로는 항우를 비롯해 오강까지 도주한 당사자들이 그 과정에서 모두 전사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끼리 나눈 대화를 사마천이 어떻게 알 수 있었는가 하는 부분도 약간은 미심쩍다. 사실 위의 링크에 달린 많은 질문에 무리수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동성에서 28기만이 남아있었다는 구절은 지휘 체계의 붕괴로 얘기해도 들어맞는다. 12,000명의 지휘 체계가 유지되었다면 관영 휘하의 한군 5,000철기는 되레 잡아먹힐 뿐이다. 동성 및 역양 인근에서 12,000명의 지휘 체계가 무너진 초군의 패잔병을 잡았다고 봐야 한다. 28기 이후 바로 오강으로 날아가며 구성이 듬성해지는 것은 여기까지 28기에서 사로잡은 인원의 진술을 바탕으로 쓰였으며, 이후 항우 이외의 인원의 이탈과 죽음 등으로 쓸 만한 기록이 남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