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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지급행정구 지급시 13 |
현급행정구 시할구 55, 현급시 21, 현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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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시 성도 南京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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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시 无锡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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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저우시 徐州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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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저우 시가지. 중앙은 전파탑 |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의 지급시 | |||||
[ruby(徐州, ruby=Xúzhōu)][ruby(市, ruby=Shì)] 쉬저우시 | Xuzhou C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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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부 소재지 |
장쑤성 쉬저우시 윈룽구 쿤룬다다오1호 江苏省徐州市云龙区昆仑大道1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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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화둥 | ||||
면적 | 11,259km² | ||||
하위 행정구역 | 5구 3현 4현급시 | ||||
시간대 | UTC+8 | ||||
인문 환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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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0> 인구 | 9,083,790명 (2018) | |||
인구밀도 | 807명/km² | ||||
HDI | 0.776 (2016) | ||||
서기 | 쑹러웨이(宋乐伟) | ||||
시장 | 왕젠펑(王剑锋) | ||||
GRDP | <colbgcolor=#ee1c25><colcolor=#ff0> 전체 | $1,276억 8,070만 (2020) | |||
1인당 | $14,056 (2020) | ||||
상징 | 시화 | 배롱꽃 | |||
시목 | 은행나무 | ||||
차량번호 | 苏C | ||||
행정구역 약칭 | 苏 | ||||
행정구역코드 | 320300 | ||||
지역전화번호 | 516 | ||||
우편번호 | 221000 | ||||
ISO 3166-2 | CN-JS-03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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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룽 호수에서 바라본 시가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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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장쑤성 북서부에 위치한 지급시이다.2. 설명
회하 이북에 위치하고, 면적 11,765㎢, 인구는 2018년 기준 880만명 (이 중 시구[1] 335만명)으로 장쑤성 내에서는 쑤저우시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허난, 산둥, 안후이, 장쑤성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여 고대부터 교통의 중심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삼국시대와 국공내전 등 역사상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한편 쑤저우와 표기나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되는 일도 많다.춘추전국시대, 초한쟁패기, 삼국시대, 남북조시대, 금나라와 몽골 제국이 침공, 원명 교체기 등 전근대 시기 남중국과 북중국 세력 간에 수없이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운하와 황허, 화이허, 장강의 범람으로 많은 홍수와 기근을 겪었다. 그럼에도 수운 교통의 중심이었기에 꾸역꾸역 재건되었으며, 명대에는 운하의 선박들을 노리는 도적떼가 들끓었다. 20세기 들어서는 중일전쟁 시에 격전지였고, 국공내전 때에도 화이하이 전역이 벌어지는 등 현대사 시기에도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따라서 역사가 유구한 도시임에도 시내 지상에는 옛 흔적이 별로 없다. 다만 쉬저우 박물관에 가면 엄청난 규모의 한대의 유적을 볼 수 있다. 그외에 화이하이 전역 기념관이 있으며, 운룡산 흥화사 등의 고적이 남아있다.
3. 지리
지리적으로는 장쑤성 북서쪽 거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강 이남의 난징ㆍ 쑤저우(苏州)에서 멀 뿐만 아니라 장쑤성의 다른 도시보다 산둥성 지닝시, 짜오좡시나 안후이성 화이베이시, 쑤저우(宿州)시 등이 더 가깝다. 특히 장쑤성이 지도상으로는 옛 서주를 베이스로 하되 강남의 쑤저우ㆍ난징 등 일부가 포함된 형태이지만, 현대로 올수록 영역상으로는 강북의 옛 서주에 비해 훨씬 작은 강남 지역이 점점 잘 나가게 되어 장쑤성 하면 대표적으로 연상되는 곳들은 강남 지역이나, 양저우처럼 강북이라도 간발의 차이로 강북일 뿐 당연히 장강 하류에 포함되는 곳들이 대다수이고, 그 너머의 중원과 가깝고 장강과는 제법 먼 강북 지역은 다소 묻힌 감이 있다. 특히 이 곳 쉬저우시는 이름부터가 그 서주(=쉬저우)로서 당연히 옛 서주의 중심지였는데도 영역상으로 서주의 후신 격인 장쑤성에서는 강남 지역에 밀려서 존재감이 생각보다 약하다.(...)[2] 어쨌든 시내에는 황하가 12세기에서 19세기 말까지 유로가 바뀌었을 시기의 옛 본류가 남아 있다.
4. 역사
한대 초왕의 무덤에서 출토된 병마용
상고시대에는 상 시대엔 팽나라가 있었고 서주(西周) 시대엔 서나라의 영역이었으며, 춘추시대에 들어와 서나라가 오나라에 복속되면서 중원의 세력권에 편입된다. 고대 9주에서는 서주(徐州)에 속했다. 전국시대에는 초한쟁패기 항우의 근거지로 익숙한 팽성(彭城)으로도 불렸고 BC 205년 발생한 전쟁사상 유명한 팽성대전의 현장이었다. 한편 유방의 출신지인 패현 풍읍 중양리(沛縣豐邑中陽里)도 시 북서부의 펑현 중심지에 있다. 현재 팽성과 중양리는 각각 쉬저우시 중심지(펑청 가도)와 펑현 중심지(중양리)에 각각 행정 지명으로 남아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삼국시대에는 서주자사 도겸이 조조의 부친 조숭의 죽음을 막지 못하여 조조의 침공을 받았으나 유비의 도움으로 이를 격퇴하였다. 도겸의 사후 유비가 서주 자사가 되었으나 휘하의 여포에게 빼앗겼고, 여포는 다시 조조에게 패하였다.
서주를 정복한 조조는 하비에 치소로 두었으나, 위문제가 팽성으로 옮겼다. 5호 16국 시대 현지 주민들은 남쪽 회남 방면으로 피난하였고, 그중 팽성 출신의 유씨가 두각을 드러내어 유송을 건국하기도 하였다. 408년 서주를 수복한 송무제는 이를 북서주와 서주로 나누었고, 기존 팽성은 전자의 수도였다. 다만 10여년 후 북서주는 서주로, 서주는 남서주로 개칭되었다. 이후 팽성현은 명대 초엽까지 계속 서주의 중심으로 남았다. 당나라 들어 안정을 되찾은 서주는 번영하였고, 639년의 2만에서 742년 20만으로 한세기 만에 인구가 10배 증거하였다. 781년에는 당에 반기를 든 평로 번진의 고구려계 절도사 이납이 서주를 공격하였고, 819년 당에게 토벌될 때까지 대운하가 불안정을 겪으며 일대는 침체를 겪었다.
4.1. 연이은 혼란
송대부터 세워진 운롱산 싱화사 (운룡산 흥화사)
8세기 말엽 서주에는 무녕 (武寧) 절도사가 설치되었다. 다만 832년부터 병사들이 불복하기 시작하였고 849년, 859년, 862년에는 군란이 일어나 두 절도사가 축출되었다. 이후 부임한 왕식은 주동자를 처형하고 나머지를 해산하며 반란을 잠재웠는데, 해산된 이들이 도적떼가 되며 문제가 되자 조정에서는 864년 사면을 내리며 재입대하는 자에 대해 일정 기간의 복무 후 북방의 더 나은 진영으로 배치해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3천명이 응하였지만, 계속 무녕에 머물자 서약을 어겼다고 여겨 868년 방훈의 주도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수천의 농민들 역시 반군에 가담하여 함께 팽성을 점령하였고, 수탈을 일삼던 장교들을 학살하였다. 다만 869년 반란은 진압되었고, 무녕은 위문의 의미인 감화 (感化)로 개칭되었다. 송대에 서주는 별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1129년 서주는 27일의 저항 끝에 금나라에 점령되었고, 항복을 거부한 자사 왕복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조립이 남은 병력과 함께 저항하여 두 달 후 도시를 회복하였다. 다만 그 역시 전략적으로 후퇴하였고, 서주는 금의 지배를 받았다. 한편 그 무렵 황허가 인근 화이허 방면으로 진로를 옮기며 서주는 자주 홍수에 시달렸고, 서주는 더더욱 쇠락했다. 그러던 1232년 몽골 제국에 의한 금의 멸망이 가시화되자 장군 왕우와
원나라 말기인 1358년 8월 서주는 홍건적에게 점령되었다. 원의 토곤 테무르는 항복 시 사면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듬해 봄 토크토아 휘하의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1349년 가을 서주는 점령되었고, 몽골군은 다수의 주민을 학살하였다.
17세기 들어 명조의 쇠퇴를 틈타 도적떼가 들끓자 조정에서는 기존 운하에 평행하는 계운하를 신설하여 위험을 분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기존 관개 시설이 교란되고 홍수가 잦아졌고, 특히 1624년의 대홍수 시에는 도심이 4m 아래의 물에 잠기기도 하였다. 명청 교체기에 서주는 홍광제 정권이 청군의 장강 도하 저지를 위해 설치한 강북사진 (江北四鎮) 중 하나였다. 남명의 병부상서 사가법은 기존 도적떼 두목 고걸에게 수비를 맡겼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암살되었고, 후임인 이성동은 청군이 남하하자 도주해버렸다. (1645년 여름) 따라서 청나라 장수 도도 ( 누르하치의 15남)가 무혈입성하였고, 얼마후 사가법은 양저우에서 결사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 청대에도 서주는 대운하의 초관 도시로 번영하였다. 다만 1688년에 대지진이 벌어져 많은 이가 사망하고 시내의 주택 중 절반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4.2. 20세기의 전란
1938년 5월 쉬저우에 진주한 일본군
1850년대에는 장강이 수로를 북쪽 산동 방면으로 트는 과정에서 연이은 홍수와 그로 인한 기근을 초래하였고, 서주의 수로 대부분이 무력화되었다. 신해혁명 후에는 장쉰이 잔병과 함께 쉬저우로 도주하여 1911년 12월 5일에 입성하였다. 난징정부의 3차례 토벌 끝에 장쉰은 1912년 2월 북쪽으로 패주하였다. 다만 1913년 계축전쟁 (2차 혁명) 당시 북진에 나선 혁명군은 패하였고, 7월 24일 북양정부가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그후 장쉰이 돌아와 재차 거점으로 삼았고, 1917년 6월 베이징으로 진격해 장훈복벽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축출되었다. 남겨진 쉬저우 수비대는 폭동을 일으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후 쉬저우는 직예 군벌의 수중에 남아있다가 1924년 가을 2차 직봉전쟁 당시 3만 병력과 진군한 장쭝창에게 점령되었다. 이에 반격에 나선 쑨촨팡은 1925년 11월 8일 쉬저우를 자악하였다. 그리고 국민당의 2차 북벌 시인 1927년 6월 17일 장제스가 입성하였다.
하지만 쑨촨팡과 장쭝창이 연합하여 반격, 6월 24일 쉬저우를 점령하였다. 이는 강남 여론의 분노로 이어졌고, 장제스의 첫 사임으로 이어졌다. 반격에 나선 국민당군은 12월 16일 쉬저우를 수복하였고, 이듬해 북벌을 완수하였다. 중일전쟁 당시에는 60만의 중국군과 24만의 일본군 사이에 쉬저우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 각각 10만, 3만의 전사자가 발생한 후 1938년 5월 19일 장제스는 쉬저우 포기를 지시하였다. 다만 일본군의 포위 섬멸 작전은 실패하였고, 살아남은 중국군은 우한 방어전에 투입되었다. 난징에서 만큼은 아니었지만 일본군은 쉬저우에서도 학살을 자행하였다.
5. 교통
시내 교통으로는 쉬저우 지하철이 있으며, 현재 1~3호선이 운행중이다. 장거리 철도는 도심 쉬저우역에서 기존 징후철도( 베이징- 상하이)와 룽하이철도( 롄윈강- 란저우)를, 외곽 쉬저우둥역에서 징후고속철도와 쉬란고속철도(쉬저우-란저우)를 탈 수 있다. 공항은 시내 동남쪽에 위치한 쉬저우관인국제공항(IATA: XUZ)을 사용할 수 있다. 이전 2015년에 제주항공에서 인천국제공항 발 정기편을 취항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운항하지 않는다.
[1]
현급 단위에 '구'로 편성된 지급시의 중심 시가지 지역. 중국의 지급시는 현도 인구가 100만명을 넘는 곳이 많고 현의 중심지 또한 수십만의 시가지가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실제 도시화 인구는 훨씬 많다.
[2]
사실 옛 서주에서 북부 지역은 산둥성, 서부 일부는 안후이성으로 편입되고 남은 지역들 남쪽으로 옛 양주 북부가 붙여진 형태가 현대의 장쑤성이라 옛 서주보단 전체적으로 장쑤성은 동남쪽에 위치한다. 즉 현대의 장쑤성 북부 대부분 지역들은 사실 옛 서주의 남부 지역인 회하 인근, 회하 남부 지역들이다.
삼국시대 당시 서주를 기준으로 하면 동관, 낭야, 동해 대부분은 현재의 산둥성이고 팽성(쉬저우), 하비, 광릉, 동해의 일부분(
롄윈강시)만 장쑤성인 셈. 이러다보니 안 그래도 현재 시점에선 롄윈강,
쑤첸과 함께 장쑤성에서 회하 북쪽에 있는 몇 안되는 도시이며 그 중에서도 장쑤성 서북쪽에 외따로 위치해 사실
산둥성과 안후이성에 더 가까운 쉬저우가 다른 장쑤성 지역들보다 이질감이 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하비 (피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