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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20:18:03

여택

고조공신후자연표(高祖功臣侯者年表第六) 후제(侯第)
열외 중여영무후 여택
<colcolor=#ece5b6>
呂澤
여택
시호 <colbgcolor=#fff,#000>영무(令武)
작위 주여후(周呂侯)→도무왕(悼武王)[1]
여(呂)
(澤)
생몰연도 ? ~ 기원전 198년

1. 개요

중국 진나라 말기 ~ 전한 초기의 인물로, 전한 고조의 외척이며 고황후 여씨의 오라버지이다.

2. 생애

한고조 유방의 거병 때부터 함께해 고조가 한왕이 되고서는 후작에 봉해졌고, 삼진을 평정할 때는 함께했다. 이후 팽성전투가 벌어질 당시에는 하읍에 주둔하고 있다가 항우에게 패주하던 고조를 맞이했다. 이외에도 고조의 중국 통일에 공헌하여 한고조 6년인 기원전 201년에 주여후에 봉해졌다.

3. 사후

아들 여태가 여(呂)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죽으면서 자신도 여나라의 도무왕(悼武王)으로 추증되었다.

4. 여담

한고조가 여후의 아들인 태자 유영 대신에 척부인의 아들인 유여의를 태자로 정하려 하자, 누이 여후와 함께 의논하여 장량을 협박해 유영을 위해 계책을 내게 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기록된 사기의 유후세가와 한서의 장진왕주전에서는 여택의 작호인 주여후가 아닌, 여택의 아우 여석지의 작호인 '건성후'로 나온다. 이 때문에 이 부분의 여택은 여석지를 잘못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


[1] 아들 여태가 여나라 왕에 오름에 따라 추증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