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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4:26:09

채태인/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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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성 라이온즈, 넥센 히어로즈, 롯데 자이언츠, SK 와이번스 소속 내야수 채태인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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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환과 원투펀치를 이루던 부산상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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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입단 당시 시절 (출처: 포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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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오른쪽 인물이 동갑내기 친구 추신수였다. (출처: 포토로)

부산상고를 졸업한 그는 2001년 두산 베어스의 2차 10순위 지명을 받았으나 보스턴 레드삭스가 계약금 80만 달러의 조건으로 스카웃, 미국으로 진출했다. 이미 미국 진출이 거의 확정적인 상황이어서 두산에서 도박으로 픽한 것으로, 실제 미국 진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훨씬 상위 순번에서 뽑혔을 것이라고 한다. 사실 140km/h대를 던지는 좌완 투수가 흔한 것도 아니었고. 여담으로 채태인은 보스턴 입단식 때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쓰고 갔다고 한다. 당시 포지션은 투수.

여담으로 채태인과 동갑인 1982년생 야구선수들이 바로 추신수- 김태균- 이대호- 오승환- 정근우- 손승락. 참고로 추신수 역시 시애틀 매리너스와 계약할 때 투수로 계약했지만 정작 구단은 타자로 전향시켰다. 1982년생 부산 출신 프로야구 선수들이 많다. 부산고 추신수, 정근우, 김백만, 경남고 이대호, 장기영, 경남상고 김경언, 백승룡, 송산, 김덕윤, 그리고 부산상고 이승화, 차정민. 채태인과 이대호 그리고 장기영은 부산 대동중 동기다. 대동중 출신은 경남고로 주로 진학하지만, 채태인의 부친이 부산상고 졸업생이라 부산상고로 갔다고 한다.

보스턴 입단 후, 부산상고 시절 입은 어깨 부상으로 인해 수술을 받아 재활하게 되어 단 한 경기도 등판하지 못했다. 계속되는 재활과 향수병 때문에 결국 보스턴에서 임의탈퇴 공시된 후 귀국한 그는 2002년 말부터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한 후, 2005년 보스턴에서 공식적으로 방출되었다.

사실 여기에는 뒷사연이 있다. 지명 당시부터 정상이 아니었던 채태인의 어깨를 보스턴이 어떻게 판단하고 지명했느냐는 것. 여기에는 채태인의 은사인 김응용 감독의 공이 컸다. 김 감독은 채태인의 부산상고 선배이자 고교 시절부터 후견인[1]이기도 했는데, 보스턴 측에 채태인의 호투 영상만을 모아 보낸 것. 한국의 고교야구 3학년의 투구 영상까지 일일이 챙기지 않았던 것인지 보스턴은 그 영상을 보고 메디컬 테스트도 생략한 채 80만 달러에 채태인을 미국으로 불렀다.

그러나 보스턴의 기대는 빗나갔다. 채태인은 2번째 불펜 투구 만에 어깨 통증을 호소했고, 2001년 6월 관절 와순 손상 진단을 받았으며 왼 어깨 수술을 받아 기나긴 재활 장정에 올라야 했다. 한국에서 재활하던 채태인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건 2002년이지만 어깨 부상이 재발했고, 채태인과 구단은 별다른 절차 없이 이별하게 됐다. 그리고 상기한 대로 한국에서 공익복무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쳤다.

그렇다면 채태인은 왜 한국으로 돌아와 군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했던 것일까? 뒤에도 나올 내용이지만 해외 진출 선수에 대한 유예규정 때문이었다. 2002년 이별 후 보스턴에서 완전 방출된 것으로 생각했던 채태인은 공익 복무 후 2년 유예 기간을 채우고 프로에 복귀할 계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채태인의 생각과 다르게 그는 아직 서류상으로 보스턴 소속 선수였다. 2005년 공익에서 소집 해제된 그에게 보스턴은 "넌 아직 우리 선수다, 호주로 날아가서 극동지역 스카우트인 존 디블[2]을 만나라"고 통첩했다. 그러나 오랜 부상과 재활로 투수로 뛰기엔 채태인의 어깨가 멀쩡할 리 없었을 터, 디블은 채태인에게 "타자로 전향하지 않겠느냐"는 제안까지 하며 미국행을 다시 제안한다. 그러나 미국 생활에 질렸던 채태인은 존의 제안을 거절하고 보스턴과 완전히 계약을 해지하며 공식적으로 국내로 돌아오게 된다. 기나긴 방황 속, 그는 결국 미국 프로 무대에서 단 1경기도 뛰지 못한 채 맨몸으로 돌아온 것이다.[3]

3. 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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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시절
▲ 채태인 삼성 시절 응원가

하지만 그는 야구선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교인 부산상고에서 후배들과 계속 몸을 만든 것. 프리 배팅을 하면 10개 가운데 9개를 넘기는 등 좋은 타격감을 보이자, 프로 스카우트들 사이에 그의 이름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해외파 선수 특별지명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2007년)이었는데, 1999년 이후 국외리그 진출자 중 5년이 넘은 선수들을 대상으로 8개 구단이 한 명씩 국외파 선수들을 지명을 하기로 한 것. 8개 구단 스카우트들이 일제히 부산 개성고 채태인을 찾았다.

그러나 삼성을 제외한 7개 구단 스카우트들의 눈앞에서 채태인은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훈련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고의 태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산 것, 이미 김응용 사장과 삼성이 지명하기로 모의가 돼 있어서 저러는 거라는 루머까지 나왔다.

이에 대해 김응용 사장은 훗날 "우연히 부산상고에 갔더니 채태인이 타격 훈련을 하고 있더라고. 보니까 괜찮게 치는 거 같아. 그래 당시 삼성 스카우트였던 장효조한테 '저거 놀고 있으니까 경산 2군 훈련장으로 불러와서 훈련 좀 시켜보라'고 했지. 삼성에 오든 다른 팀으로 가든 아까운 인재니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고."라고 이야기했다. 또 경산에서 며칠 훈련시킨 다음에 삼성 스카우트들에게 다 물어봤어. ‘채태인이 어떠냐’고. 내가 독단적으로 결정하면 스카우트들이 속으로 ‘자기 고교 후배라고 억수로 챙기네’ 할 거 아니야. 그런데 스카우트 중에 한 사람도 ‘나쁘다’는 사람이 없었어. 다들 ‘적응 기간만 잘 거치면 꽤 좋은 타자가 될 거 같다’고 하더라고. 그래 해외파 특별지명 때 우리(삼성)가 채태인을 지명한 거라고.”라는 말도 함께. 어쨌든 그렇게 채태인은 삼성의 유니폼을 입었다[4]

어쨌든 이런 과정을 통해 모교를 찾은 김응용 사장의 눈에 띄어[5]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기로 합의했다.[6]

하지만 '1999년 이후 한국프로야구를 거치지 않고 해외로 진출한 선수는 2년 간[7] 국내에 복귀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해외파 특별 지명 제도로 구제받은 2007년까지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지 못했다. 투수에서 타자로 전향한 것도 그 때쯤이지만, 그를 기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종두 타격코치가 그의 타격 재능을 읽고 있었던 것. 부산상고 시절 화랑대기 우승 때 채태인이 타점상을 받은 적이 있었고, 어깨 부상도 있고 해서 타자로 전향하는 것이 더 좋다고 본 이종두 코치가 그를 타자로 전향시켰다. 그리고 이종두 코치의 예상은 잘 맞았다.

3.1. 2007~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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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번은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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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로 복귀한 후 2007년의 모습

2군에서 외야수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뜬공을 놓치는 일이 잦아 1루수로 전향했다.[8] 2군에서 중심 타자로 활약하며 시즌 중반 잠시 1군에 올라왔지만 삼진만 당하고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반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2007년에 처음 열린 2군 올스타전에서 MVP를 받게 된 것. 그 뒤 시즌 후반 1군에 다시 올라와 8월 2일 대구 LG전 8회에 대타출전해 우규민에게 1군 데뷔 첫 홈런을 때렸다.[9] 이전까지 1승 0패 24세이브, ERA 1.20에 WHIP가 1도 되지 않는, 오승환과 세이브왕 경쟁을 하고 있던 우규민이 이 한 방 이후 블론 세이브의 왕이 되었다. 영상 참고로 이때의 우규민은 세이브만 오승환에게 1개 차로 뒤지고 있었지... 세이브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록을 앞서고 있었다. 이후 그는 조영훈을 밀어내고 삼성의 중심 타선이 되었다. 부상과 맹장 수술로 인해 빠진 적은 있지만, 그래도 2008 시즌에는 두 자리수 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으며 최형우, 박석민과 함께 삼성 타선에서 세대교체의 한 축이 되었다.[10]

무엇보다도 놀라운 사실은 방망이를 본격적으로 잡은 지 3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 전에는 군 복무와 유예기간 공백으로 3년 이상 제대로 된 프로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선수였다는 것. 그럼에도 1루 수비 능력은 이미 리그 최고 수준인데다 타격도 준수했다.[11] 그래서 채천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2008년 시즌 종료 후 도박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2009 시즌을 앞두고 5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후, 2009년 4월 10일 KIA전에 복귀했다. 참고로 인터넷 도박에서 5,000만원을 땄다고 보도되었는데 채태인 본인이 거짓기사라고 밝혔다. 따기는 커녕 크게 잃었으며, 와이프에게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이때 돈을 땄다는 루머로 인해 얻은 별명이 '채타짜'다.

검찰이 그 당시 인터넷 불법 도박을 매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 사건 전에 이미 강병규 사건이 터졌다.

그럼에도 2009년에는 첫 규정 타석을 채움과 동시에 풀타임 주전 1루수로 활약하면서 좋은 수비와 함께 0.293의 타율과 17홈런, 72개의 타점을 기록하면서 최형우, 박석민과 더불어 작년에 비해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삼성 팬들은 채태인이 앞으로도 삼성의 중심 타선으로 맹활약해 줄 것이라 기대하였으나...

3.2. 2010 시즌

2010년 4월 15일 LG전에서 2회 이병규의 1루수 직선타를 다이빙캐치로 잡아낸 후 착지하다가 왼손목을 접질리는 부상을 당했다. 5월 7일 대구 SK전에서는 4-3으로 역전한 5회 말 2사 뒤 타석에서 1루 땅볼을 친 뒤 1루를 밟는 과정에서 오른쪽 발목을 접질렸다. 1루수 박정권의 토스를 받기 위해 달려온 투수 게리 글로버와의 충돌을 피하다가 베이스의 가장자리를 밟다가 부상당했다. 하지만 끝까지 긴장 안하고 별생각없이 1루로 뛰어간 채태인도 문제지만 글로버가 1루 커버한 후 주자선상에서 비켜주지 않은 것은 비매너에다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채태인이 부상당해서 이탈하면 팀이 지고, 복귀하면 이기고, 또 부상으로 이탈하면 지고, 돌아오면 이기고 하는 기현상이 벌어진 탓에 승리의 요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0 시즌 초, 장타보다 단타 위주의 타격을 해서 채똑딱이라는 굴욕적인 별명을 얻었으나 이후 홈런포를 자주 쏘아 올리면서 거포 이미지를 되찾는 듯 하다 결국 시즌 끝나고 타점개수가 신명철에게도 뒤지는 우스운 결과를 만들어냈다.[12]

2010년 7월 7일, 문학 야구장에서 SK 와이번스를 상대로 3연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내며 이 부분 기록을 가지고 있던 박경완 당시 SK와이번스 포수의 기록과 타이를 노릴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그것도 송은범 정우람에게. 다만 삼성 라이온즈가 1점 차이로 앞서던 7회 2, 3루에서 벤치 싸인으로 고의사구를 기록하며 1루로 나갔다. ##

10월 7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는 팀이 스코어 0:1로 앞선 2사 2루 상황에서 볼넷을 얻어 1루로 출루한 뒤 다음 타자이자 5번타자인 최형우의 2루타가 나왔을 때 홈으로 뛰는 무리한 주루 플레이를 하다가 부상을 당하면서 페이스가 떨어져버렸고, 결국 5경기 내내 부진한 타격감을 보이며 14타수 2안타 1볼넷 1타점, 타율&장타율 .143, 출루율 .200에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부진은 계속되어 5타수 무안타, 출루율 0에 그쳤다. 무엇보다도 택도 없는 공에 따라나가 헛스윙으로 삼진되는 경우가 많았을 뿐더러 삼구 삼진의 비율이 높았다. 상대팀은 대놓고 위기상황에서 앞타자 거르고 채태인을 상대하기도 했다.

채태인은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19타수 2안타 1볼넷 1타점, 타율&장타율 .105, 출루율 .150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3.3.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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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시작전 새로운 짤방을 제조했다.

2011년 광주구장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3삼진 후 극적인 역전 만루홈런을 터뜨리며 단기 까방권을 받았다. 이어서 다음 경기에서도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시즌 이틀째긴 하지만 홈런 공동 1위였다. 그리고 정말로 내려왔다. 그 후에는 5경기 동안 16타수 1안타를 기록하며 매우 부진하다가, 4월 13일 경기 전 훈련 도중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채태인은 2010년 8월 뇌진탕 부상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아직 그 후유증이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다. 다행히 CT 촬영 결과 별 이상은 없었지만, 정밀검사를 더 해보기 위해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된 후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알려진 것과 달리 정말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목욕 도중에도 반쯤 의식이 나갈 뻔한 적도 있었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다. 다만 뇌진탕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증세인지를 보여주는 대목. 4월 29일 1군으로 복귀했다.

2011년 5월 3일 사직에서 펼쳐진 롯데와의 주중 3연전 첫 경기에서 경제적인 주루플레이를 보여주고 아웃처리되었다.[13] 구체적으로는 1루에서 2루 베이스를 밟은 뒤 다시 1루로 되돌아 가다가 3루로 잔디를 가로질러 간 것. 플라이도 아니고 2루를 밟았는데 왜 돌아간 건지는 확실치 않으나 공을 보면서 돌아가다가 잡지 못한걸 보고 다시 뛴걸 보면 플라이일줄알고 1루로 가다가 급하게 다시 진루했을 가능성도 있다. 2루를 밟았는데 3루로 갔다고 누의 공과가 된 이유는 야구규칙상 베이스를 밟았다 해도 돌아갈 행동을 취한 순간 루의 점유권이 소멸되며, 즉, 2루를 밟지 않은 것과 같이 되므로 추가진루를 하고자 한다면 2루를 다시 밟은 뒤 3루로 진루해야 한다.

이 병맛 플레이를 본 디씨 갤러들은 그에게 ' 채름길', ' 채단횡단', '채단 횡단보도', ' 채럼버스', '채단거리', '3루급행(열차)', '채수작' 등의 별명을 붙였다. 동영상 당시 상황 캡처

결국 얼마 못 가 3루 급행 짤방이 나와버렸다.

사실 이전에도 선행 주자를 앞질러 아웃된 적이 있다. 주루플레이는 정말 병맛.

그후 2군으로 떨어졌는데, 뇌진탕 후유증으로 추정된다. 최희섭이나 김태균의 예에서 보듯 긴 휴식이 필요할 수 있다.

8월 초쯤 1군에 복귀하였고 이후로는 평균은 했다. 다만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는 8월 18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투런홈런을 한 방 쳐서[14] 이겼다는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경기가 끝난 후, 문학구장은 무법지대가 되었다.

그 후 시즌이 끝날 때까지 류중일 감독의 변함없는 신뢰를 바탕으로 출전하여 꾸준히 삽을 펐고,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0타석 15타수 2안타 4볼넷 1사구(死球) 9삼진 1득점 타율 .133, 장타율 .133, 출루율 .350을 기록하며 12타수 무안타를 기록한 박한이와 함께 쌍으로 나노 단위로 까였지만,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하였다.

3.4.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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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의 국내 복귀로 백업이나 2군으로 밀려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류중일 감독이 양아들로 밀어주면서 시즌 초반부터 꾸준히 출장했다. 하지만 부진을 털어내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5월 6일의 뇌수비[15]로 역적 등극.

여름이 된 후로도 계속 삽질하다가 결국 2군으로 내려간 후 그대로 시즌을 마쳤으며, 2012년 한국시리즈에도 출전하지 못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2012 시즌이 끝난 후 류중일 감독은 구단 프런트에 "채태인의 연봉을 5,000만 원으로 삭감해라. 대신 태인이도 가족이 있는 선수니까, 나머지 분은 경기에 출장하면 다 받아갈 수 있도록 옵션으로 처리해 달라"고 강수를 두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이 신의 한 수가 되었는지, 2013년에 채태인은 맹구에서 천재로 거듭나는 저력을 보이게 된다.

3.5.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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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어깨 부상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진 못하였으나, 0.381의 높은 타율과 함께 OPS 1.001을 기록했다.[16]

3.6. 2014 시즌

타율은 그런대로 찍어주고 있지만 작년과 달리 볼넷이 크게 줄어들었다. 5월 19일 기준으로 볼넷은 고작 8개인데 삼진은 28개로 비율이 많이 좋지 않다.

5월 29일 잠실 LG트윈스 전에서 임창용이 흔들리고 있던 2:4 2점차 1사 만루에서 조쉬 벨의 1루쪽 강습 타구를 하이점프캐치로 잡아내고 더블아웃을 잡아내서 경기를 끝냄으로써 과 임창용을 구해냈다.

2013년의 괴물같은 타율만큼은 못하지만, 후반기에 대폭발하면서 연일 자신의 한 경기 최다 안타,[17] 타점[18]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7월 25일 기준 타점은 69타점으로 전체 5위이자, 이승엽의 71타점에 이은 팀내 2위 성적. 타율도 3할을 훌쩍 넘기고 있다. 작년[19]에 비해서 BABIP은 0.350으로 정상 범위 안으로 돌아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채태인은 2013년을 기점으로 한 단계 높은 타자가 되었다고 보여진다.

최형우가 부상으로 빠지고 박석민도 제 컨디션이 아닌 후반기에는 4번 타자로 출전하여 끝내기 안타만 2번을 기록하는 등 선전하고 있다.[20] 박석민이 선발 라인업에 재합류하고 나서도 5번으로 밀리고 채태인이 4번을 계속 치는 중.

2014년 8월 12일 기준 이승엽과 팀내 타점 1위 경쟁을 할 정도로 타점 생산 능력이 매우 좋다. 특히나 득점권 타율은 무려 .372.

10월 14일에도 타점을 기록하며 기어이 시즌 97타점을 기록. 3경기 남은 시점이라 경기당 1타점만 적립해도 100타점 기록이 가능한 상황이다. 시즌 최종전에 주자 2루 상황에서 안타를 때려냈으나 박해민이 들어오지 못하는 바람에 결국 99타점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되었다.

시즌 최종 성적은 124경기 출장하여 492타수 156안타 타율 0.317 14홈런 99타점 69득점 1도루.

2014 한국시리즈에서는 6경기 모두 출장하여 24타수 6안타(2루타 1개)에 3타점, 그리고 볼넷도 4개 얻어내며 타율 0.250, 출루율 0.357을 기록했고, 팀이 KBO 사상 전무후무한 통합 4연패의 기록을 세우며 왕조를 굳건히 이룩한 주전 1루수로써 영광을 함께 했다.

3.7. 2015 시즌

무릎 부상으로 개막전에 합류하지 못했다. 승짱은 이제 불혹을 넘겼고 잔부상도 있기에 수비까지 맡기에는 무리고, 때문에 신인인 구자욱이 개막부터 1루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내야가 흔들리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구자욱이 거의 1경기 1실책의 페이스로 수비 불안을 나타내면서 잠실 LG 3연전을 계기로 팬들은 채태인의 1군 복귀를 갈망하기 시작했다.

4월 10일 KIA 타이거즈전을 앞두고 1군에 합류하였다. 하지만 당일 경기 도중 옆구리에 통증을 호소했고, 결국 하루 만에 다시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류중일 감독에 의하면 왼쪽 옆구리 근육이 6cm 정도 찢어졌으며 3~4일정도 휴식을 취한 후 일본[21]에서 치료를 받을 예정이고, 복귀에는 한 달 이상 소요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다.

당초 예상과 달리 치료 경과가 좋아 5월 7일 2군 경기에 출장하기 시작해, 5월 12일 김태완과 함께 1군에 복귀했다. 복귀 첫 날에 3번타자 겸 1루수로 선발 출장, 홈런 1개를 포함해 5타수 3안타 2타점 1득점으로 맹활약했으나 팀은 졌다. 수비도 여전히 건재하다. 하지만 무릎에 물이 차는 증상이 있어 이젠 풀타임 1루 출장은 힘들고 수비가 개선중인 구자욱이 주로 1루 백업을 보고 있다.

6월 19일 SK전에서 팀이 3대 2로 뒤지고 있던 8회 초 무사 만루 상황에서 김정혁의 대타로 나와 3타점 결승 적시 2루타를 쳐내고 대주자 김재현으로 교체되었다. 팀은 7대 3으로 승리해 시리즈 첫 경기를 가져갔다.

7월 23일 기준으로 49경기에 나와서 타율 0.349에 출루율 0.417, 장타율 0.474, 3홈런, 22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7월 들어서 부진하다. 게다가 몸이 안 좋은지 1루 수비도 별로라는 지적이 있다.

9월 18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4타수 3안타 1홈런으로 맹활약. 그 외에도 베이스에서 발을 뗀 상태로 장비를 벗고 있던 오재원을 몰래 태그아웃시켰다. 영상 PC 힐끗 보더니 공을 빨리 달라고 제스처를 취하는 모습이 인상적.

시즌 최종 성적은 104경기 출장하여 333타수 116안타 8홈런 49타점 35득점에 타율 0.348, 출루율 0.408, 장타율 0.447을 기록했다. 시즌 초 부상 및 구자욱과의 포지션 중복으로 인해 경기수 및 타수가 다소 줄어들었음에도 WAR이나 WPA 부분에서는 여전히 건재함을 보였다.

그러나 2015 한국시리즈에서 모종의 사건으로 어수선한 팀 분위기에 채태인 역시 이를 반전시키지 못하면서 두산에게 다소 어이없이 한국시리즈 패권을 내주었고, 이것이 삼성에서의 마지막 시즌이 되고 말았다.[22]

4. 넥센 히어로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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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센 히어로즈 시절
▲ 채태인 넥센 시절 등장곡 & 응원가

4.1.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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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김대우와 트레이드 되어 팀을 옮겼다.

4.2.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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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중에 입을 터는 바람에 혀갤러들에게 무수한 욕을 먹었다. 뼈에 금가서 장정석 감독이 조금 쉬다 오라고 2군 보냈더니, "염경엽 감독님은 나의 가치를 알아줬는데, 장정석 감독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는 내용의 인터뷰였는데, 배은망덕한 짓이라 욕을 먹었다. 후반기에 채태인이 보여준 걸 생각하면 미쳐버린다. # 결국, 채가놈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한없이 욕 먹었다.

5.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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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태인 롯데 시절 응원가

롯데가 사인 앤드 트레이드[23] 방식으로 좌완투수 박성민을 내주고 채태인을 영입했다. 넥센은 트레이드로 좌완 투수 수집에 열중이었는데 이로써 6명째 유망주를 얻어왔고, 롯데 역시 1루수와 지명타자가 가능한 채태인을 영입해서 이대호의 체력 안배와 동시에 좌타자를 얻어와 하위타순 고민을 덜었으니 서로 윈윈 트레이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채태인의 백넘버 17번은 기존 롯데의 17번인 이우민이 롯데에서 계약 의사가 없음을 밝힘에 따라 롯데에서도 달 수 있을 것으로 보였으나 작뱅이 먼저 가져갔다. 신본기가 7번을 주지 않아서 이병규가 17번으로 바꿨고 채태인도 17번을 뺏겨서 65번...

하지만 정규 시즌에서는 17번을 달 것으로 보인다. 이병규가 16번을 쓰는 것으로 보아, 늦게 팀에 합류한 채태인에게 양보한 듯.

5.1. 2018 시즌

파일:채태인 1000 안타.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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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2019 시즌

파일:채태인 200 2루타.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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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5시즌 중 가장 부진했던 시즌.

6. SK 와이번스

▲ 채태인 SK 응원가

2019년 11월 20일 공개된 2차 드래프트 결과 SK 와이번스로 이적하게 됐다. 박정권이 은퇴한 지금, 1루 수비력도 뛰어나고 장타 한 방을 기대해볼만한 선수이기에 1루 백업으로 기용될듯 하다. 현역 시절 줄곧 달아오던 17번을 쓰지 않게 되었으며, 2020시즌부터는 00번을 사용한다.[24]

근데 윤석민까지 데려온걸보면 그냥 염경엽이 넥벤져스 어셈블하는거 아니냐는 소리도 있다(...)

6.1. 2020 시즌

파일:채태인'20.jpg

시즌 초반 선발과 대타를 오가며 5경기에 모두 출장했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리고 5월 10일 롯데전에서 8회초 대타로 나와 타격 중 우측 늑간근 부상을 당했다. 재활까지는 6주가 소요될 전망.

복귀 후에는 3안타 경기가 있는 등 어느 정도 타격감을 회복한 듯했다.

7월 5일 SK전 정현의 대타로 나와 고의사구를 얻은 뒤 전력질주로 1루를 밟았으나 이내 대주자로 교체되었다.

7월 17일 8회말 2사 만루에서 오준혁의 대타로 출장해 바뀐 투수 조상우의 150km/h 초구를 받아쳐 결승타를 만들어냈다. 타율도 3할 1푼까지 상승.

8월 30일 상대 선발 투수 신민혁을 상대로 1사 1루 상황에서 투런 홈런을 만들어내 추격에 일조했다.

9월 4일 두통 증세로 말소되었고 남태혁이 등록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두통 증세가 완화되어 이현석을 밀어내고 다시 1군에 복귀했다.

시즌 종료 후 11월 5일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11월 6일에 이미 은퇴한 윤희상을 포함하여 박희수, 윤석민, 김재현과 함께 정식으로 방출된 것으로 오피셜이 났다. 그러나 한화에서 이용규에 옵션을 실행하지 않고 방출시키는 무리수를 두면서 묻혔다.(...)

2020년 성적에서 보듯 제한된 기회 속에서도 여전히 OPS 0.8 이상을 기록하며 일발장타력을 확실히 보여줬고 대폭망한 SK 타선에서 제이미 로맥, 최정, 김강민과 더불어 선수다운 성적이었다. 따라서 여전히 대타 자원으로는 쓸만한 자원이나,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그의 나이. 돈이야 별로 들지 않겠지만 1군 엔트리 하나를 40대 대타 전문 요원용으로 놔두기는 부담스럽다. 그럴 만한 자리가 있으면 보통 신인이나 로테이션 선수에게 기회를 주든지 주전 선수들의 체력안배용으로 쓰기 마련.

일단 채태인은 현역 연장의 의지가 강하다고 하나 KBO 전 구단이 코로나 여파로 수익이 감소하면서 팀에 오래 있던 베테랑 선수들을 대거 방출하거나 2군 구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는 현실이기 때문에 채태인의 연봉까지 챙겨줄 구단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 Come back home~~

7. 은퇴

결국 소속팀을 구하지 못했는지 서동환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통해 2021시즌부터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에 참가하는 시흥 울브스의 홍보팀 이사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아울러 모교인 부산 개성고에서 재능기부 차원의 타격 인스트럭터 역할도 하고 있다. 그리고 2021년 1월 22일 공식적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다사다난했던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8.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07 삼성 31 77 .221 17 5 0 1 10 6 0 6 .325 .277
2008 68 248 .266 66 12 1 10 42 32 1 21 .444 .322
2009 118 368 .293 108 26 2 17 72 58 0 54 .514 .382
2010 102 356 .292 104 13 0 14 54 48 0 35 .447 .353
2011 53 182 .220 40 7 1 5 28 25 1 34 .352 .339
2012 54 135 .207 28 7 0 1 9 15 1 23 .281 .321
2013 94 299 .381 114 15 0 11 53 52 4 43 .542 .459
2014 124 492 .317 156 38
(2위)
1 14 99 69 1 43 .484 .368
2015 104 333 .348 116 19 0 8 49 35 0 36 .477 .408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6 넥센 124 370 .286 106 14 3 7 72 29 0 36 .397 .345
2017 109 342 .322 110 23 1 12 62 46 0 34 .500 .388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18 롯데 130 376 .293 110 18 0 15 75 44 0 34 .460 .356
2019 59 167 .251 42 11 0 5 29 11 0 13 .407 .30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2020 SK 71 160 .281 45 5 0 7 24 11 0 29 .444 .392
KBO 통산
(14시즌)
1241 3905 .298 1162 213 9 127 678 481 8 453 .454 .368

[1] 덩치 크고 밥 잘 먹고 빠른 공 던지는 좌완투수라면 무조건 총애했던 김응용 감독의 눈에 들어 김 감독의 광주 집에서 1년 선배 강영식과 함께 생활했다. 관련 포스팅 [2] 호주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이기도 하다. [3] 훗날 비슷한 사례가 두차례나 더 등장하게 된다. 시카고 컵스 산하 마이너리거였던 김진영은 2013년 4월에 퇴단해 귀국했으나 마이너리그 홈페이지의 선수 정보에는 한동안 Active(활동 중)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2014년으로 해가 바뀐 뒤에야 김진영은 공식적으로 홈페이지에서 정보가 삭제됐다. 김진영은 당초 2015년 4월로 유예 기간이 끝나는 것으로 알고 2015년 8월 24일 시행되는 2016년도 신인 2차지명에 응할 계획이었으나 이런 연유로 무산되었고 1년 뒤를 기약하게 됐다. 그리고 2014년 4월 방출된 것으로 알려졌던 전 캔자스시티 로열즈 산하 마이너리거 신진호도 실은 임의탈퇴 상태로 있다가 2년이 지난 2016년 4월에야 계약 관계가 해지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2018년 8월 신인 2차지명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됐다. 결국 법원까지 가서 해석을 의뢰한 끝에 조건부로 트라이아웃에 참가했고, MLB 측에 계약 해지 시점을 문의해서 지명 대상이 되는지 여부를 가리게 됐다. 이후 두 선수는 각각 한화 이글스 NC 다이노스에 입단, 모두 KBO로 리턴한다. [4] 박동희의 네이버 스포츠 칼럼, '박동희의 야구인'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천재' 채태인 기사 참고. [5] 2005년 1월에 공식 방출되어 이미 2년 유예 기간을 채운 그가 해외파 특별 지명 대상에 뒤늦게 들어간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예 기간은 임의탈퇴 공시가 아닌 진짜 방출됐을 때가 기산점이다. [6] 2007년 초 경찰청 훈련에 합류해 운동했는데 그 때 사진들을 보면 삼성 라이온즈 언더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최형우와 이때 알게 되어 친해진 모양. [7]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이 완전히 종료된 시점으로부터 2년이다. 김선기의 상무 입대로 군경 팀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리기는 했지만, 김선기만이 예외일 뿐 이후에 입대하게 되는 대상 선수들은 퓨처스리그 출전이 불가능하며 군경 팀에 소속된 기간 동안에 유예 기간은 그대로 유지된다. [8] 본인의 어깨 사정도 한 몫했는데, 류중일 감독 부임 후 채태인을 멀티 포지션으로 외야수 수비를 시도한 적이 있으나, 어깨 부상으로 인해 송구가 도저히 안 된다고 판단하여, 다 멀티 포지션 훈련하는데 혼자 1루 수비만 연습하고 있었던 적이 있다. [9] 채태인은 시즌 후 인터뷰에서 "노리고 들어간것이 아니라 그냥 나가다가 띵~ 하고 맞은거라 맞는 순간 평범한 플라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상대 우익수 정의윤이 계속 뒤로 가길래 설마설마 했는데 넘어가더라"라고 밝혔다 [10] 삼성라이온즈 황금기의 중심타선을 이루는 채최박의 시작이다. [11] 본래 1루수로는 아쉬운 수준이라 외야수로의 컨버전 이야기가 나왔으나 2010 시즌 이후 채태인이 없는 1루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참고로 팬들 사이에서는 채태인을 최고의 1루수로 키운건 9할9푼이 3루를 보고 있는 박석민의 개발송구라는 설이 매우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12년 이후로는 박석민의 송구는 상당히 나아졌지만, 이번엔 유격수 김상수가 일렉트로닉 클럽 개발 송구를 남발하는지라... [12] 신명철 57타점, 채태인 54타점. [13] 사실 이 타석 바로 전 1루 주자였던 라이언 가코가 채태인이 친 2루수 직선 타구로 날아가는 공을 2루수 조성환이 당연히 잡을 거라고 생각하고 1루로 뒤돌아갔는데 조성환은 그 공을 놓쳤다. 그런데 가코는 그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대로 1루를 향해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시전. 뒤늦게 1루 주루코치의 손짓을 보고 2루로 갔지만 이미 아웃. 디씨 야갤은 가코의 환상적인 플레이에 다들 뒤집어졌으나, 이것이 바로 다음 타자였던 신명철이 타석에 들어선 지 몇 분도 안 되어서 벌어질 일의 예고편이 될 줄은... [14] 채태인의 투런홈런은 이날, 이 경기에서 유일한 득점이다. [15] 공을 받고 느긋하게 1루 베이스로 향했는데, 김경언이 방심한 틈을 타 재빨리 1루 베이스를 먼저 밟았다. 자세한 사항은 시즌 문서를 참조. [16] 이 시즌의 높은 타율은 0.472라는 비정상적으로 높은 BABIP을 바탕으로 기록된 타율이다. 이 BABIP은 1982년 KBO 출범 이후 역대 2위의 기록이다. 규정타석 미포함 시 1위였다가 2018년 전병우66타수 24안타 타율 .364 BABIP .525를 기록하며 순위에서 한단계 밀려났다. [17] 5안타, 7월 23일 부산 롯데전. [18] 6타점, 7월 25일 포항 NC전. [19] 0.472. KBO 리그 역사상 최고치이며 100년 역사의 MLB에서도 2위의 기록이다. 그야말로 우주의 기운이 채태인의 방망이에 몰빵된 시즌이라는 소리. [20] 특히 7월 30일 홈에서 열린 LG전에서는 봉중근 상대로 14구까지 가는 박빙의 승부 끝에 중견수 방면 끝내기 안타를 쳐내는 등 팀을 제대로 구했다. [21] 요코하마의 이지마 치료원이라는 곳에서 치료를 받는다. 2013 시즌 중 늑골 골절 부상 때도 요코하마로 갔으며 배영섭, 박석민, 최형우도 부상치료를 위해 이곳에 갔다와서 빠르게 복귀하였다. [22] 그리고 채태인이 삼성을 떠나자 팀은 귀신같이 득점력과 수비력 떡락을 동반하며 3차 암흑기라는 대재앙을 맞이하고 말았다. [23] KBO 트레이드 이면 계약 파문에 의해 뒷돈 2억원이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24] 프로 시절 동안 달던 17번은 현재 노수광이 달고 있는데(노수광은 현재 한화 이글스 소속으로, 현재 SK의 17번은 이태양이다.) 후배의 등번호를 뺏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17번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00번을 선택한 이유는 동기인 김강민과 붙어다니고 싶고, 자신이 좋아하는 곡이 빵빵(박상철의 노래)이라서 택했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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