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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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소비에트공화국 (1931~1935) 中華蘇維埃共和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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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소비에트인민공화국(1935~1936) 中華蘇維埃人民共和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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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소비에트민주공화국(1936~1937) 中華蘇維埃民主共和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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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全世界無産者,聯合起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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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1월 7일 ~ 1937년 9월 22일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소비에트 지구 | ||
국가 | 인터내셔널가 | |
위치 | 장시성을 위치로 한 중국 각지 | |
수도 | 루이진(瑞金) | |
정치 체제 | 사회주의, 일당제, 공화제 | |
국가원수 | 중앙집행위원회 주석 ( 마오쩌둥)[1] | |
통화 | 공채권(公債券)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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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1년부터 1937년[2]까지 중화민국 장시성을 거점으로 3번이나 국명을 바꿔가며 존속했던 국가였다.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프로토타입이 되는 국가며, 소련의 지지를 받았다. 다만 중국 대륙 전체를 차지하지 않고 일부 지역만 차지한 탓에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마오쩌둥의 여러 행적 중 하나로 가르치지 전신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또한 동아시아에 있던 유일한 소비에트 공화국(Soviet Republic)이었다.
2. 역사
1921년 중국공산당이 수립된 이후 1922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은 국민혁명을 위한 통일 전선을 형성했다. 1차 국공합작이라고도 불리는 이 관계는 설립 때부터 불안했고 쑨원 사후 크게 흔들렸지만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왕징웨이와 미하일 보로딘이 국공합작에 반대하는 국민당 우파들을 대거 숙청함으로 적어도 광저우 중앙 내부에서는 흔들리지 않았다.[3]그런데 북벌을 주장하던 장제스와 북벌을 반대하던 공산당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다가 1926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고 국민당은 장제스가 장악했다. 장제스는 북벌 반대파들을 추방하고 1926년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국민혁명군은 승승장구했으나 국공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결국 1927년 장제스는 국공합작의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기존의 우한 국민정부에서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가 떨어져 나가는 청당에 나서게 되었다.
이후 코민테른이 국민당을 장악, 개조하고 노동자와 농민을 무장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도 국공합작을 파기함에 따라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이에 공산당원들은 국민정부를 탈퇴하여 난창 폭동 등 무장 투쟁에 나섰다.
중국 공산당은 8.7 긴급회의를 통해 천두슈를 우경 기회주의자로 규정해 축출한 이후 취추바이가 주도한 추수폭동, 광저우 폭동을 비롯한 취추바이 노선, 리리싼이 주도한 창사 폭동을 비롯한 리리싼 노선을 전개했으나 전부 실패로 끝나면서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1929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당원들과 함께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장시성, 푸젠성 일대에 혁명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한다. 이후 중국 전역에 혁명 근거지가 설립되었다.
1930년 11월에 중국 공산당은 혁명 근거지를 '소비에트 특구'로 분리하고 특구들을 통치하기 위해 중앙 소비에트구를 설정하였다. 동년 중앙 소비에트구는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를 얻기 위해 토지 분배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중국 농촌의 고유한 특성을 무시한채 '땅 가졌다 = 더러운 부르주아 반동'으로 등치시킨 스탈린주의 토지 개혁론[4]의 기계적인 적용은 수많은 유혈 사태와 부작용을 일으켰다.
거기에 마오쩌둥이 국민당 스파이 조직이라는 AB단을 색출해야 한다는 구실로 1930년 12월 부전사변을 일으켜서 소비에트의 지주, 부농에서부터 공산당 간부와 홍군 지도부를 상대로 대대적인 숙청을 감행하여 10만 명을 처형했다.
1931년 11월에 장시성 루이진(瑞金, 서금)에서 중화 소비에트 전국 대회가 열리고, 중화 소비에트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전국 대회에서는 '중화소비에트공화국 헌법 대강(中華蘇維埃共和國憲法大綱)'과 함께 토지법, 경제법, 노동법이 채택되었다.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기초로 한 법들이었다. 또한 마오쩌둥을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중앙 집행 위원회와 인민 위원회 주석이자 홍군 총사령관으로, 장궈타오를 부주석으로 선출하였다. 중앙 혁명 군사 위원회에는 주더가 책임자로 선출되었다. 전성기에는 100개현, 1200만의 인구를 통치했다. 휘하 병력인 홍군의 규모도 15만으로 확장되었다.
12월에는 국민당의 탄압으로 붕괴된 상하이 당 중앙의 저우언라이가 루이진으로 이동했고 임시 당 중앙과 코민테른 대표 오토 브라운 등도 넘어왔다. 국민당에 대한 공세적인 전략을 요구하는 당 중앙의 목소리 때문에 마오쩌둥은 국민당의 초공 작전에 대해서 효율적인 방어를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인 지휘를 문제 삼아 좌천되었다. 총정치 위원은 저우언라이로 대체되었고 군사 고문엔 오토 브라운이 임명되었다. 1932년 국민정부의 제4차 초공작전이 발동되었으나 열하사변으로 중단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의 내부 분열 와중에 국민당이 제5차 초공작전을 발동, 토치카 작전으로 소비에트 공화국을 압박함에 따라 혁명 근거지가 궤멸되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농민과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소비에트 정권을 사수하기 위해 국민당에 대한 봉기를 호소했으나 인민들의 호응은 없었고 1934년, 중국 공산당과 홍군은 중앙 소비에트구를 포기하고 대장정에 오르게 된다. 이후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은 대장정 이후 수도를 즈단(바오안)으로 옮기고 1937년까지 명목상 유지되었다가 1937년 9월 22일 해체되었다.
3. 구성 공화국
4. 관련 문서
4.1. 인물
4.2. 사건
- 국공합작
-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 중산함 사건
- 국민당의 1차 북벌
- 난징 사건
- 4.12 상하이 쿠데타
- 국공결렬
- 난창 폭동
- 8.7 긴급회의
- 추수폭동
- 광저우 폭동
- 창사 폭동
- 부전사변
- 초공작전
- 복건사변
- 대장정
[1]
1933~1935년에 28인의 볼셰비키가 사실상 권력을 장악.
[2]
1934년에
대장정을 거치며 사실상 멸망했다.
[3]
하지만 국공합작에 완강히 반대하다가 숙청된 국민당 우파들은
서산회의를 개최하여 상하이 당 중앙으로 독립해 나가버렸다.
[4]
농촌의 집산화를 농업 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레닌과 트로츠키의 토지 개혁론인데, 스탈린은 본인과 관료 집단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일국 사회주의론에 입각하여 닥치고 농촌 집산화를 빠르게 진행하여야 한다면서 농촌 집산화를 억지로 밀어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