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명 전 이름이 '조현명'인 야구선수에 대한 내용은 조현우(야구선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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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91년
11월 ~
12월 경 (음력 숙종 17년 10월)[1] |
사망 |
1752년
6월 8일 (향년 60세) (음력 영조 28년 4월 26일) |
묘소 | 충청남도 보령시 장암면 점상리 산 168-20 |
재임기간 | 제168대 영의정 |
1750년
4월 17일 ~
11월 27일 (음력 영조 26년 3월 11일 ~ 10월 29일) |
|
봉호 |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 |
시호 | 충효(忠孝) |
본관 | 풍양 조씨 |
자 | 치회(稚晦) 또는 시회(時晦) |
호 | 귀록(歸鹿), 녹옹(鹿翁) |
부모 |
부친 - 조인수(趙仁壽) 모친 - 광산 김씨 김만균(金萬均, 1631 ~ ?)의 딸 |
[clearfix]
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아버지는 도사 조인수(趙仁壽)이며, 어머니는 김장생의 증손자인 김만균[2]의 딸이다. 집안의 당색은 서인이었고, 뒤에는 소론에 속했다. 또한 그의 외가는 전통적인 노론 가문으로서 그는 노론과도 일정한 연계를 맺을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박세채의 문인이었으며, 그도 박세채의 파붕당설의 영향을 받아 탕평을 지향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니게 되었다.
2. 생애
1713년(숙종 3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719년 증광 문과에 급제, 검열을 지냈다. 1721년(경종 1년) 연잉군(뒤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자, 이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격심하게 대립한 신임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그는 겸설서로서 송인명(宋寅明)과 함께 세제보호론을 주창, 소론의 핍박으로 곤경에 처해 있던 왕세제 보호에 힘썼다. 영조 즉위 후 용강현령·지평 등을 지냈으며 이때 탕평을 주장하는 만언소를 올렸다.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 당시에 오명항을 따라 종사했으며 오명항이 군율을 어긴 자들을 용서해주자 "군은 위엄으로 엄하게 다스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3]1740년 이광좌 사후에 송인명과 더불어 소론의 영수였다. 송인명이 삼수의 옥을 임인국안으로 후퇴시키는 타협안을 제시하자 말도 안된다고 항의하는 것을 보아 송인명보단 강경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현명이 그렇게 항의하는 논리가 탄탄했기에[4] 삼수역옥이 완벽하게 복권 되는 건 늦출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영조는 조현명의 동의를 얻기 위해 1741년(영조 17년) 9월에야 김용택 등 5인을 역안에 두는 걸 전제로 삼수역안을 불사를 수 있었다.[5]
1742년 양역사정청을 다시 설치하게 했고, 문란한 양역 행정의 체계화를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군액 및 군역 부담자의 실상을 파악해 이를 1748년〈양역실총 良役實總〉으로 간행하게 했다.
1750년 영의정에 올라 균역법의 재정을 총괄하고 감필에 따른 재정 손실을 보충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민폐의 근본이 양역에 있다" 하여 군문·군액의 감축, 양역재정의 통일, 어염세의 국고 환수, 결포제 실시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렇게 군액을 줄이고, 진보를 없애며, 재용을 절약한다는 안을 계속 추진했으나 왕과 여러 신하들의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결국 조세 감소를 메꾸는 것이 좌절되자, 감필에 따른 재정 손실의 책임을 묻는 대사간 민백상의 탄핵을 받아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
1751년 좌의정에 전임, 균역청 당상으로서 박문수와 함께 그 구체적 절목을 결정하여 양역의 합리적 개혁을 보게 했다. 그러나 곧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하여 부친의 묘를 지키다가 1751년 조카딸인 현빈 조씨가 죽고 난 다음 해(1752년) 죽었다. 그의 사망 후 중량감 있는 인사를 배출하지 못한 소론은 노론의 공세로 정계에서 서서히 밀려났다.
[1]
사전에는
1690년생으로 되어 있으나
신도비에 따르면
숙종
신미(1691)년생으로,
임신(1752)년 사망 당시 나이가
세는나이로 62세[壽六十二\]라고 하므로, 문집인 귀록집(歸鹿集)의
서지정보에 따라
1691년(숙종 17) 출생으로 서술함.
[2]
서필원의 공의, 사의 논쟁을 유발한 문신으로
이일상의 사위이다. 이일상은 연안 이씨로 노론계이다.
[3]
그러자 오명항은 "그 말이 맞으나 전란이 없었는지가 어언 100년이라 군율이 해이해진 것은 당연한데 무작정 가혹하게 몰아붙히면 병사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원망만 품을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4]
"자신도 처음엔 무고로 의심했으나 체결한 정상이 낭자하며, 숙종 조의 일로 모역의 정절을 알 수 있다(= 경종이 세자로 있는데 연잉군을 앞세운 건 모반이 맞다)"
[5]
물론 영조는 "경자년(경종 즉위년) 이전에라도
삼종의 혈맥(= 영조)을 위한 것이라면 충이라고 여긴다"라고 내심 불쾌해 했다. 그러나 김용택의 신원은 영조 말년인 1776년(영조 42년)에야 이뤄졌다. 조현명의 결사적인 저항이 노론의 소론 토역 명분을 25년이나 늦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