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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5 00:48:07

정공(초한쟁패기)


생몰년도 미상
1. 개요2. 생애3. 창작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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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초나라(楚)의 장수이자 계포(季布)의 외삼촌으로 후대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대표격이 되었다. 고전 문학에서 '정공도 사형당했는데 네 처지를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라'라는 표현이 나온다.

2. 생애

팽성대전에서 항우(項羽)의 군대가 제후 연합군을 모조리 격파하면서 한(漢)나라군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때 팽성 서쪽에서 정공은 유방(劉邦)을 완전히 궁지에 몰아넣었다. 유방은 칼을 들고 직접 교전을 치를 정도로 대단히 위급했다. 마음이 다급해진 유방은 "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찌 서로를 해칠 수 있습니까!" 하고 소리쳤고, 자신이 천하를 통일하면 정공을 1순위 공신으로 지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정공은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유방을 살려주었다.

초한대전이 끝난 후 정공이 유방을 찾아오자 유방은 정공을 데리고 군중을 돌아다니면서 이렇게 말했다.
항왕의 신하로서 나를 풀어주어 항왕에게 불충함으로 해서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만든 자는 바로 정공이다.
그후 정공을 사형시켰다.

한고조가 아랫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는 알겠지만 정공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할 수 밖에 없다. 정공은 유방이 큰 위협으로 생각했던 이성왕도 아닌데 숙청당한 드문 경우이다. 유방 밑에는 항우를 배신하고 유방에게 귀순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항복해 온 항씨 일족이나 옛 항우의 부하들은 좋은 대접을 받았다. 정공의 조카 계포도 유방에게 중용되었다. 그런데 정공은 처형했으니 일관성이 없는 처사라 생각할 수 있다.

사마광은 정공의 일을 이렇게 평했다. 유방이 다른 도망친 사람이나 배신자를 받아들인 경우가 많았음에도 정공을 처형한 이유는 전란의 시기와 안정된 시기의 차이 때문이다. 천하를 두고 다툴 때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등용하였다. 천하가 안정된 시기에는 신하의 덕목이 우선이기에 주인을 배신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찾아온 정공을 사형시켰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따지면 홍문연에서 유방을 몰래 살려 보내준 진평도 사형감이다. 항우 밑에 있었으면서 유방을 위해 계속해서 엑스맨 행위를 했던 항백도 사형감이다. 기준이 오락가락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옹치의 사례까지 생각하면 정공을 사형시킨 일이 더 이상해진다. 유방을 대놓고 배신해서 유방이 가장 미워했던 옹치는 결국 옛 일을 용서받고 봉작을 받았다.[1]

항백은 유태공을 보호하기도 했고, 초한쟁패기 내내 초나라 내부의 적이었으며 유방에게 계속 이득을 가져다준 사람이기에 정공이랑 직접 비교하기 애매한 부분도 있다. 정공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했다면 항백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엑스맨 이미지라서. 대신 이것은 이미지일 뿐, 사기를 비롯해서 다른 역사 사료를 살펴보면 항백이 항우의 명을 따르지 않았던 불충의 사례는 찾기 힘들다. 거꾸로 생각하면 장량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서로 적대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갚기 위해 애썼던 의인(義人)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항우가 몰락한 뒤에 투항한 것도 거꾸로 생각해서 마지막까지 항우를 따랐다고 해석할 수 있다.

종합해보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유방을 찾아온 타이밍이 문제였을 것으로 보인다. 항우가 아직 살아있을 적에 유방에게 확실히 귀순해 왔다면 좋은 대접을 받았을 수도 있다.

3. 창작물에서

사실 이득을 가져다 주었음에도 의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버림 받는 경우가 삼국지연의에서도 등장한다. 마등 황규 조조를 죽이기 위해서 모의하자, 황규의 애첩 이춘향과 황규의 처남 묘택이 암살 모의 계획을 조조에게 전해준다. 이에 마등과 황규는 처형당했고, 조조는 묘택 역시 매부의 을 노리고 배신한 의롭지 못한 자라며 처형한다. 삼국지연의같은 소설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꽤 있다. 칭기즈 칸에게 자무카를 넘겨준 그의 부하들은 오히려 칭기즈 칸에게 처형당했고 제왕건을 꼬셔서 제나라 멸망시킨 후승 역시도 진시황에게 죽었으며 심지어 조나라 멸망에 큰 도움을 주고도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곽개조차 최후가 비참했던 까닭에 쓰일대로 다 쓰이고 버린 것 아니냐는 말도 있다.

[1] 일단 옹치에게 상을 내린 것은 다른 장수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장량의 계책이었다. 의도적으로 이용된 케이스로 봐야 옳겠으나 비록 정치적으로 이용은 되었어도 유방이 죽을 때까지 나름 대접해준 것도 명백한 사실이며 정공과 다르게 천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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