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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3:20:32

팽성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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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팽성대전/Pengcheng.jpg
파일:팽성.png
<colbgcolor=#c0c0ff,#2f2f52> 팽성대전
彭城之戰
시기 기원전 205년
장소 중국 장쑤성 쉬저우
원인 팽성을 빼앗긴 항우의 야간 기습.
교전국 한(漢) 초(楚)
지휘관 한왕 유방
위표(임시 대원수)
신양
사마앙
사마흔
동예
장이
번쾌
하후영
왕릉
서초패왕 항적
옹치
정공
항장
환초
계포
병력 약 56만 명 약 3만 명
피해 약 30만 명 전사. 피해 규모 불명.
결과 서초(西楚)의 대승
영향 한(漢)의 외교적 고립 및 형양 · 성고 전역 형성.

1. 개요2. 의의3. 발단
3.1. 진나라의 몰락과 군웅의 할거3.2. 서초패왕의 시대
4. 전개
4.1. 유방의 반격4.2. 다섯 제후왕과 팽성 점령4.3. 패왕의 귀환4.4. 살육의 날4.5. 기습공격의 용병술4.6. 유방의 도주4.7. 전력을 추스르는 한군
5. 결과
5.1. 재확인된 항우의 군사적 우위5.2. 한나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나?5.3. 제후들의 반응
6. 왜 유방은 패배했는가?7. 한신의 참여 여부8. 소설 초한지에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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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초한전쟁 시대인 BC 205년, 현재의 쉬저우 부근에서 벌어진 (漢)나라 대군과 (楚)나라 군대의 대결.

중국 위키백과 등에서 사용되는 표현은 팽성지전(彭城之戰). 국내에서는 '팽성 전투', '팽성대전', '수수 전투', '수수대전' 정도로 통한다.

2. 의의

팽성을 점령한 유방(劉邦)의 56만 제후 연합군을 항우(項羽)의 3만 별동대가 기습하며 벌어진 회전(會戰)으로,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의 전투다. 곤양대전, 비수대전(淝水大戰), 합비 공방전과 더불어 소수로 다수를 이긴 중국사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양군의 숫자 차이는 동진(東晉)이 18만을 동원했던 비수대전 당시보다 더 심하다. 심지어 비수대전은 양군의 피해에 대한 기록이 자세히 없어서 피해 규모에 대해 알 수 없지만 팽성대전에서는 한군 30만이 죽었다고 하니 초나라 병사는 1명당 10명의 한군을 죽인거다.

이 패전으로 한나라는 엄청난 군사를 잃고, 유방을 믿고 군사를 내어줬던 제후들의 불신으로 외교적 고립 상태에 빠졌으며, 유방의 가족들도 다시 항우에게 붙잡혔고, 유방 본인도 죽을 뻔하였다. 여러모로 항우를 다시금 전 중국 최강의 사나이로 각인시킨 전투.

더욱 놀라운 것은, 이토록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항우는 결국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나오겠지만, 한군은 이 패배를 제법 빠르게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전투이기도 하다.[1][2]

3. 발단

3.1. 진나라의 몰락과 군웅의 할거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대혼돈을 잠재운 것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진(秦)이었다. 그러나 시황제(始皇帝)의 시대부터 이어진 무리한 정책과 폭정으로 사람들의 불만은 엄청났고, 그 뒤를 이은 호해(胡亥)는 어리석은 암군에 불과했다.

결국 진승·오광의 난이 우연한 계기로 발생했고, 진나라의 천하는 뿌리부터 뒤흔들리고 말았다. 진승의 난은 진나라 최후의 명장 장한(章邯)이 진압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틈을 타 항량(項梁), 경구(景駒), 전담(田儋) 등의 군웅들이 자신들의 세력을 일구는 데 성공했다. 바야흐로 중국은 다시 한 번 군웅할거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고 있었다.

3.2. 서초패왕의 시대

파일:7PGh5Qv.jpg 그러나 장한은 최후의 저력을 발휘하여 위나라(魏)를 멸망시키고, 항량과 전담을 참살했으며, 조나라(趙) 역시 수하인 왕리(王離)를 보내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이 때, 항량의 뒤를 잇고 송의(宋義)를 참살하여 군권을 탈취한 항우는 경포, 포장군 같은 장수들과 함께 거록에서 압도적인 무용으로 진나라 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 인해 조나라는 구원되었고, 장한은 삽시간에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진여(陳餘) 등의 설득으로 장한은 항우에게 항복하였다. 이 시점에서 진나라는 이미 멸망한 셈이나 다름없었으며, 항우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전 중국의 최강자로 급부상하였다.

그럼에도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먼저 입성한 것은 항우가 아닌 유방이었다. 당초 초회왕(楚懷王)이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서쪽으로 파견할 사람을 항우가 아닌 유방으로 선택했기 때문. 거록에서 대승리를 거둔 항우는 서둘러 함양으로 진격했지만, 유방보다는 늦게 도착하였다. 바로 이 때의 이동 중, 항우는 진나라군 20만 명을 생매장하는 희대의 만행이자 실책인 신안대학살을 저지르고 만다.

유방은 잠시 항우와 대치를 이루는 듯했으나, 장한을 물리치고 중국 최강자가 된 항우와 단지 함양에 먼저 도착했을 뿐인 유방의 군세는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 뻔한 상황에서 결국 항백(項伯), 장량(張良) 등의 조언을 들은 유방은 항우에게 굴복하였다. 범증(范增)은 이 참에 유방을 죽이기 위해 홍문연에서 흉계를 꾸몄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장한에 이어 유방까지 굴복시킨 항우는 서초패왕의 자격으로 각지의 제후들을 봉분하였는데, 이로 인해 유방은 벽지인 파촉(巴蜀) 지방으로 쫒겨나고 말았다.[3] 그리고 이것이 바로 초한전쟁의 시작이었다.

4. 전개

4.1. 유방의 반격

당초에 파촉이라는 벽지에 처박히게 된 유방은 상심했으나, 소하(蕭何)는 이런 상황에서도 한신(韓信)을 추천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결국 이에 힘을 얻은 유방은 항우가 제나라 공략에 열중하는 사이 재반격을 감행했다.

항우는 유방을 저지하기 위해 삼진(三秦)을 배치해 두었으나, 유방은 한신의 제안에 따라 옛날의 길을 이용해 우회하여 옹왕(雍王) 장한(章邯)을 공격했다. 당시 한군은 파촉에 들어오면서, 장량의 건의에 따라 여러 절벽 등에 만들어놓은 잔도(棧道)를 모두 불태워버린 상황이었다. 잔도가 모두 불탔으니 한군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텐데...라고 생각했을 장한 등에게 한방을 제대로 먹일 수 있는 것이다.

장한은 이에 진창(陳倉)에서 한군을 막기 위해 달려나왔다. 진창은 현재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로, 사천 땅에서 관중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요지였다. 하지만 여기서 패배한 장한은 지금의 섬서성 건현(乾縣)인 호치(好畤)로 물러나서 다시 싸웠으나, 여기서도 또 다시 패배했다. 이에 장한은 폐구(廢丘)로 물러났다.

이후 유방은 장한을 폐구에서 포위하고, 다른 장수들을 시켜 옹 땅을 모조리 평정했다. 잠시 양하(陽夏)[4]에서 막혔던 한군은, 그러나 다음 해 다시 진격을 시작하여 색왕(塞王) 사마흔(司馬欣), 책왕(翟王) 동예(董翳),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 등을 모조리 격파하고 관중을 평정했다.

4.2. 다섯 제후왕과 팽성 점령

관중을 점령한 유방은 205년 2월경 한나라의 사직단(社稷壇)을 세우고, 3월에는 하수(河水)를 건너 진격을 시작했다. 한군의 기세에 위표는 알아서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유방을 따랐으며, 반항하는 은왕(殷王) 사마앙(司馬卬)은 하내(河內)에서 격파되어 사로잡혔다. 그리고 낙양 역시 함락시켰는데, 이때 신성(新城)의 삼로(三老)[5]였던 동공(董公)이라는 인물이 " 초회왕을 항우가 살해했다."는 천인공노할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에, 유방은 죽은 의제(義帝)를 위해 3일장을 치르고, 제후들에게 선포했다.
"천하의 제후들이 의견을 모아 의제를 세워 북면하여 왕으로 받들었다. 그러나 항우가 의제를 쫓아낸 다음 강남에서 기어이 죽였으니 참으로 대역무도한 자다. 과인이 의제를 위해 친히 상을 발하니 제후들은 모두 흰옷을 입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라. 과인은 관중의 모든 군사들과 하상(河上), 하남(河南), 하내(河內) 삼군(三郡)의 사졸들을 일으켜 장강(長江)과 한수(漢水)의 물결을 타고 남하하여 제후왕들과 함께 의제를 죽인 초나라의 항우를 토벌하고자 한다."

다섯 제후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돕게 했는데, 일단 한군의 세력 자체가 이 당시에는 무시할 수 없는 데다, 항우는 제나라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판이었고 무엇보다 초회왕 살해를 징벌한다는 명분까지 있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궁금해지는 것은 '다섯 제후왕' 들이 정확히 누구냐는 것이다. 일단 그중에 위왕 위표가 포함되는 것은 확실하다. 위표는 팽성까지 유방을 따라간 행적이 위표팽월열전(魏豹彭越列傳)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 역시 이 무렵에는 유방의 진영에 합류한 후였다. 다만 진여(陳餘)가 장이를 공격하여 자기 세력권을 상실한 상태였기에 얼마만큼 도움이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렇지만 일단 장이가 당대에 이름 높은 인물이었으므로 그를 추종하는 인물들이 많았을 수도 있다.

대왕(代王) 진여 역시 유방에게 군사를 보내 도와주었다. 당초에 진여는 장이와 원수지간이라[6] 장이를 죽이면 도와주겠다고 으름장을 날렸고, 유방은 자기에게 의탁한 장이를 죽일 수도 없어서 장이를 죽였다고 구라를 치고 진여의 군사를 빌렸다. 또, 진여는 조나라의 왕이었던 조헐(趙歇)의 후원자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때문에 조나라 역시 한군을 도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이전에 항복한 색왕 사마흔, 책왕 동예, 하남왕 신양 같은 인물들도 있다. 또, 유방이 하남에 이를 무렵 한왕 신은 본래의 한왕(韓王)이었던 정창(鄭昌)을 물리쳐서 한왕이 되었다. 그렇다면 유추해볼 수 있는 인물들은 이렇게 된다.

여기에, 한왕 유방으로 이루어진 것이 당시 한군이었다. 아예 그냥 '다섯 제후왕'이라는 표현이 수사적인 표현이라는 의견도 있는 듯. 전국시대 기준의 일곱 나라 중 초나라와 제나라는 전쟁 상태이니 빼고, 나머지 나라들을 전부 말하는 의미에서 천하의 군사가 모두 한군에 붙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수많은 제후들의 군사가 한군에 합류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병력의 총 합계는 무려 56만.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 압도적인 군세는 4월경 초나라의 수도인 팽성으로 아무런 문제 없이 진입했고, 간단하게 점령에 성공했다.

적의 본거지인 수도를 함락하고, 수많은 제후들이 어울리고 있는 데다 병력은 수십만에 달하는 상황. 몸에 피 대신 철이라도 흐르지 않고서야 그 누구라도 승리와 영광과 성취의 기쁨에 도취될 수밖에 없으니, 팽성의 보물 미녀들까지 일찌감치 접수해 한껏 들뜬 유방은 열석한 제후들과 함께 나날나날을 에브리바디 에브리데이 파티데이로 보내며 그 영화로움을 흠뻑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아주 착실한 사망 플래그였다.

4.3. 패왕의 귀환

당시 항우는 제나라에서 힘겨운 전투를 치르고 있던 참이었다. 제왕 전영(田榮)을 물리치기 위해 시작한 싸움이었는데, 사실 전영 자체는 단 한번의 회전으로 격파한 후, 평원(平原)의 백성들이 전영을 살해해서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다.

이미 신안대학살 등으로 쓸데없는 잔인함을 보인 적이 있던 항우는 제나라 공략전에서도 제나라의 성곽과 가옥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항복한 포로들을 생매장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포로 신세가 되게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백성들은 고분고분해지기는커녕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는 심정으로 항우에게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또, 이런 분위기를 틈타 전영의 동생이었던 전횡(田橫)은 수만 명의 병사들을 또 다시 모아 성양(城陽)에서 버티면서 항우를 성가시게 하였다.

항우는 성양을 수차례 공격했지만 도저히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 유방을 위시로 한 제후 연합군이 팽성을 점령했고, 그 소식은 항우에게도 전해졌다. 제나라에서 발이 묶인 탓에 싸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본거지를 내어준 것이다.

이는 거꾸로 말하자면, 본거지가 함락된 상황에서도 항우의 전력은 건재하다는 사실이 된다. 물론 현재 초나라의 군사는 제나라 원정에 동원하는 중이라 모두 팽성으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이에, 항우는 휘하 부하들에게 성양에 대한 공격은 계속 하도록 하고, 본인은 단지 3만의 전력만 따로 추려냈다(최정예로만 추려냈을거라고 추정되고 있다). 그 3만 명의 병력을 통솔하여 56만이 버티고 있는 팽성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파일:XcHwdIm.jpg
항우의 귀환로

4.4. 살육의 날

한(漢)군은 무너져 내려 모두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망치다가 곡수(穀水), 사수(泗水)에 빠지고 말았다. 항우(項羽)는 이 싸움에서 한군 10여만을 죽였다. 남쪽으로 달아난 한나라 패잔병의 뒤를 초(楚)가 추격하여 영벽(靈壁)의 동쪽 수수(睢水) 강안에 이르렀다. 한군이 퇴각하여 초군에게 쫓기게 되자, 수많은 군사들은 떼죽음을 당했고, 그중에 10여만의 군졸들은 수수로 뛰어 들었다. 이로써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가득찼고, 물조차 흐르지 못하였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파일:AgKHMdV.jpg

성양을 공격하던 항우는 노현(魯縣)[7]을 지나 호릉(胡陵)[8]을 거쳐 새벽 무렵에는 팽성의 서쪽인 소현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곳에서부터 계속해서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눈에 보이는 한군을 개미 잡아 죽이듯이 박살내었다.

마침내 항우의 군대는 팽성에 이르렀고, 정오가 될 즈음에는 한군을 완전히 개박살내버리게 된다.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진 한군은 동쪽으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달아났고, 팽성의 동쪽에 있는 곡수(穀水)와 사수(泗水) 부근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항우는 이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무참하게 짓밞아 버렸고, 이 싸움으로 한군 10만 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동쪽이 아닌 남쪽으로 달아난 한군도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영벽(靈壁)[9]에 이르기까지 초군은 한군을 사냥감처럼 추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셀 수도 없는 한군이 무참하게 짓이겨졌다. 게다가 영벽 동쪽에 있는 수수(睢水) 강안에 이르자, 완전히 몰린 한군의 병사들은 아예 수수에 몸을 던지는 병사들까지 있었다. 이 싸움으로 또 다시 한군 10만 명이 죽었다. 그리고 수수는 죽은 한군의 시체로 흐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

4.5. 기습공격의 용병술

항우가 이토록 완벽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기습이라는 용병술을 모범적이라 할 정도로 적절히 구사했기 때문이다. 병력의 질적 차이 또한 컸는데, 항우의 병력은 비록 3만에 불과했으나 이들은 항우가 선두에서 직접 지휘하는 초나라의 최정예군이었다. 거록대전에서 보여줬듯이, 초나라의 전사는 한 사람이 열 명을 능히 상대할 만큼의 강병이었다.

또한 팽성은 항우 자신의 도읍이었기에 항우는 전장의 지형을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유방의 병력이 북쪽으로 습격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북쪽만 대비할 때, 항우는 팽성 서쪽으로 우회하여 퇴로를 차단하는 방식으로 동쪽으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취했고, 당연히 북쪽만 방비하고 있던 유방의 병력은 무참히 살육을 당했다. 더군다나 공격당했을 시는 심야 시각이었으니, 혼란이 걸린 군대가 제대로 싸울 리 만무하다.[10]

야간 기습은 통신과 조명 여건이 비교할 수 없을만큼 뛰어난 현대전에서조차 섣불리 시도하기 어러운 전술이다. 모든 병력 운용을 주간 작전보다 열 배는 더 세심하게 설계하는 꼼꼼함에 더불어 리스크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낼 용기까지 겸비한 정상급 지휘관이 필요하고, 이에 더해 정상급 지휘관이 설계한 작전을 수족처럼 이행할 수 있는 완벽하게 훈련된 정예군까지 필요하다. 이 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되려 적군은 탄탄한 방어선을 유지하는데 아군만 자중지란에 휘말려 성대한 자폭으로 끝나는게 야간 작전이다.

물론 이런 심각한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공하기만 한다면, 적은 병력으로 큰 성공을 노릴 수 있는 전술이 야간 기습이며, 압도적인 수적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최강의 정예군과 지형을 이용한 뛰어난 용병술을 통해 기습을 성공할 수 있었으니, 팽성대전은 항우가 당대 최고의 지휘관임을 스스로 증명함과 동시에 유방의 호색호주(好色好酒)와 방심이 어우러진 엄청난 결과였다.

4.6. 유방의 도주

병졸들이 이렇게 참혹하게 개죽음을 당하는데 총사령관이라고 무사할 리가 없었다. 초나라 병사들은 이내 유방이 속해 있는 부대를 무려 삼중으로 포위했고, 유방은 이제 꼼짝없이 사로잡히게 될 것처럼 보였다. 이때 갑자기 초군의 서북쪽에서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부러지고 모래와 돌이 휘날려 시야가 어두워졌다. 유방을 비롯한 장수들은 천우신조의 기회를 놓칠세라 돌파를 시도했고, 간신히 수십 명만 빠져나올 수 있었다.

팽성의 서쪽에서는 초나라의 장수 정공(丁公)이 유방을 거세게 몰아붙였고, 유방은 심지어 정공과 칼을 맞대고 싸우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위급했는데, 이때 정공에게 "우리 둘 다 현능한 사람인데, 어떻게 서로를 해칠 수 있는가!"라고 말하자 정공이 유방을 보내주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유방은 초한대전 승리 후, 정공을 처단한다.

유방은 도망치는 와중에 패현(沛縣)에서 가족들을 챙기려고 했는데, 항우도 유방의 가족을 잡기 위해 패현에 사람을 보냈고 가족들도 난리를 피해 도망친 와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달아나는데, 도중에 유방의 아들인 유영(劉盈)(훗날 혜제(惠帝)가 된다)과 장녀인 노원공주(魯元公主)가 길거리에 버려져 있는 것을 보고 이들을 자기가 타고 있는 수레에 태웠다.

얼마 가지 않아, 저 멀리서 초군의 추격군이 보이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지친 유방은 수레의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수레 밖으로 던져 버렸다. 이때 수레를 몰고 있던 하후영(夏侯嬰)은 그때마다 수레를 멈추고 아이들을 태운 후에야 다시 달렸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아이들을 목에 매달고 일부러 천천히 달리다가, 아이들이 진정하고 난 후에야 다시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 짓을 3번 반복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유방은 10번이나 하후영을 찔러서 죽이려고 했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11][12] 이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몇 번씩이나 당한 하후영도 분이 치밀어 유방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이런 온갖 우여곡절 끝에 유방은 간신히 초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었고, 두 아이들도 무사히 풍읍(豊邑)으로 올 수 있었다. 유방은 그 후에 하후영에게 기양(祁陽) 땅을 식읍으로 주었다. 어찌되었건 하후영 때문에 자식들을 살릴 수 있었으니...

불행하게도, 유방의 아버지인 태공(太公)과 마누라가 되는 여후(呂后)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라는 인물은 이 둘을 호위하면서 어떻게든 유방과 만나려고 했지만, 오히려 초군을 먼저 만나 꼼짝없이 사로잡히고 말았고 초군은 태공과 여후를 항우에게 바쳤다.[13] 항우는 이들을 군중에 두어서 데리고 다녔다. 이유야 당연히, 유방을 협박하기 위해서이다.[14]

4.7. 전력을 추스르는 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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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하읍(下邑) 지역[15]에 여후의 오라버니인 주려후(周呂侯) 여택(呂澤)이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었다. 유방은 샛길을 통해 여택과 합류했고, 조금씩 병력을 수습하면서 형양(滎陽)으로 이동했다.

관영(灌嬰)은 옹구(雍丘)에 주둔하면서 병사를 수습하고, 번쾌(樊噲)는 광무(廣武)를 지켰다. 조참은 이 틈에 반기를 든 왕무(王武), 정처(程處) 등을 평정했다. 한신 역시 패잔병을 수습하면서 형양에서 유방을 만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하(蕭何)가 전적에도 없는 관중의 노약자들을 모두 징발하여 형양으로 보내면서 한군의 사기는 다시 크게 샘솟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유방이 지원군을 요청하는 명을 내리기도 전에 이미 10만의 지원군이 깃발을 휘날리며 행군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즉 소하가 팽성 패전 이전에 이미 보충병력을 출발시켰다는 이야기이니 그의 출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초군은 승승장구하면서 한군을 계속 추격했는데, 형양의 남쪽 경읍(京邑)과 색읍(索邑)에서 벌어진 경색 전투에서 한군이 초군을 크게 물리치면서 재반격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당장의 위기는 모면하고 패전을 어찌어찌 수습할 수 있었다. 이후 한동안 한군과 초군은 형양을 기점으로 형양 · 성고 전역에서 대치하게 된다.

5. 결과

5.1. 재확인된 항우의 군사적 우위

항우는 이 전투를 통해 승승장구하던 유방과 당시 제후들에게 작금의 천하 최강은 초나라라는 것을 확실하게 일깨워 주었다.

엄청난 승리가 가능했던 것은 물론 항우 본인의 전술적 능력도 있겠지만, 한군의 구성에도 문제가 많았다. 한군은 56만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실제로는 여러 제후들이 모이면서 뭉친 연합군적 성격으로, 지휘계통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적지 않았다.

수십만 대군이라고는 하지만 어차피 이 당시의 병사들은 '수십만의 군대'라기보다는, 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기 좀 들고 전쟁터에 나선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한군은 팽성을 점령하고 지도부인 유방을 비롯한 사람들마저 잔치를 즐기면서 완전히 마음을 놓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니 별안간에 기습을 당하고, 개중에 일부만 전투불능 증세를 보여도 병사들은 통제에서 거의 벗어나고 말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비하면, 항우의 병력들은 거록대전과 제나라에서의 싸움을 거친 베테랑 병력이었고 성양을 공략하던 병사 중에서 최정예만 추린 병력이었으니, 이 병사들은 다른 초나라 군사들에 비해서도 특히 강력한 전력이었다. 항우는 이 싸움에서 초나라의 전 병력을 동원한 것이 아닌 3만의 최정예 병력만 동원하여 호릉에서부터 각개격파로 치고 올라가며 연쇄작용으로 적을 궤멸시키는 효과를 냈다.

5.2. 한나라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팽성대전의 그 엄청난 패배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한군은 이 패배를 상당히 만회하는 데 성공한다.

병력 규모의 차이만을 보면 항우의 최대 군사적 업적은 거록대전보다도 바로 이 팽성대전이었다. 그런데, 이 두 싸움 이후에 벌어지는 전개는 꽤나 차이가 있었다. 거록대전의 패배 이후 진나라군의 전투 의지가 완전히 바닥나고, 결국 장한이 항복하여 항우가 완벽한 승자가 되었던 거록대전에 비하면 팽성의 싸움은 당장의 한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이 차이는 우선 조고의 농간으로 지원이 완전히 끊긴 장한에 비해, 이 시점의 유방은 비교적 확고하게 기반을 닦아 놓은 후였다는 점이다. 유방은 소하의 도움으로 파촉에서 기반을 쌓아 이를 바탕으로 삼진을 평정했으며, 관중을 장악한 후에도 소하의 먼치킨스러운 능력으로 행정 제도를 꾸려 체제를 이루었다. 관중 지방과 파촉 지방은 과거 전국시대 진나라의 영역 그 자체였고, 진나라는 그 생산력만으로 다른 모든 열국을 압도했다. 게다가, 진나라 사람들은 신안대학살과 함양 입성 후 항우가 저지른 만행으로 인해 항우에 대한 적대감이 하늘을 찔렀기에, 소하가 구축한 국가 총동원 체제에 초한전쟁이 종결될 때까지 기꺼이 따랐다.

생각해보면, 이 시점에서 다른 제후들을 제외하고 초나라와 한나라만을 비교했을 때 한나라는 딱히 열세로 밀릴게 없었다. 팽성대전 이전의 전황은 '항우만 없다면 초나라는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라는 점만큼은 증명시켜준 셈이고, 이후 유방이 위기상황에서 오히려 군사를 쪼개 다른 쪽을 타격하는 대담한 시도를 내릴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전부 성공을 거두었다.

팽성에서의 패배 이후 계속 몰리던 한군은 바로 그 소하의 지원 이후 초군을 격파하면서 당장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한군의 56만이라는 전력의 실체가 제후들의 연합이라는 점도 패배의 여파에서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56만의 한나라 병사들이 격파당한 것이 아니라 연합군의 병력이 격파당한 것이다. 당연히 50만이 넘는 부대가 격파당했다고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한나라에 미치는 여파는 50만이라는 숫자에 비해 적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엄청난 패배를 당했는데 여파가 전혀 없다고 하면 말이 안되는 소리고, 그 이전까지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한군은 이 패전 이후 형양에서 항우의 공세를 간신히 견뎌내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전까지의 승리도 결국은 항우가 제나라 전역에 신경을 쓰느라 빈집털이를 한 셈이라고 보면, 주력을 이끈 항우와 격돌하는 순간 이전까지와는 전황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가장 큰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한때나마 거의 모두 한군에 붙었던 제후들이 항우의 기세에 겁먹은 나머지 편을 바꿔 먹었다는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대패에도 불구하고, 한군이 끝내 최종승리한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제후들의 이반과 뒤따라 이어지는 정벌로 인해 한의 기반은 더욱 공고해지기도 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팽성대전 직후로 생각해 본다면 엄청난 위기상황이었다.

5.3. 제후들의 반응

그렇게 편을 바꿔 먹은 제후들 중, 먼저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는 한나라에서 도망쳐서 초나라로 가버렸다. 애시당초 항복을 해서 복종을 한 케이스이기도 하고, 사마흔은 항량과 친분이 있어 항우에게도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진여는 이 패배의 와중에서 장이가 사실은 죽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진여가 유방을 돕는 조건이 '장이의 처형'이었으니, 사기를 당한 걸 깨달은 진여는 곧바로 한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진여의 뜻이 곧 조헐의 뜻이나 다름없으니 조나라도 이 시점부터는 한나라와 적대하는 셈이나 다름 없었다. 가장 황당한 경우는 위왕 위표인데, 어머니 병문안을 간다고 구라를 치고는 도망쳐서 그대로 한나라를 배신했다. 유방이 역이기(酈食其)를 보내 설득했지만 결국 듣지를 않았다. 한군 전력의 직접적인 피해보다, 이런 제후들의 이탈이야말로 팽성대전에서 한군이 입은 가장 큰 피해였다. 이들이 대부분 국사무쌍의 포스를 보여주던 한신에게 격파당해서 그렇지,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상당한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를 보자면 상산왕 장이의 경우, 어차피 자기 근거지도 날아간 참이라 유방을 배신하지 않았다. 이후 한신의 북벌 과정에서 협력해서 상당한 공훈을 세웠고, 아들인 장오(張敖)가 조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한(韓)나라는 항우가 세운 한왕 정창이 그냥 역사에서 이탈했고 새 한왕 한신은 유방이 세워준 데다 항우가 친척인 전 한왕 한성을 죽인 데 대한 원한도 있었는지 계속 유방 편에서 활동했다. 처음부터 항우와 적대하던 제나라의 경우, 항우가 형양에서 한군과 대치하느라 제나라에 신경을 못 쓰는 사이 세력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가장 큰 변수는 바로 구강왕(九江王) 영포였다. 그전까지 항우와 보조를 같이하며 거록대전 등에서 눈부신 활약을 한 영포는 항우가 제나라를 공격할 때도 참전하지 않았고, 팽성대전의 싸움에서도 항우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유방은 둘 간의 사이가 멀어지는 틈을 타 수하(隨何)를 보내 영포를 자신의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6. 왜 유방은 패배했는가?

팽성 전투는 일견 항우의 초월적인 능력과 유방의 방심으로 간단히 요약된다. 하지만 그에 다다르는 경위는 훨씬 복잡하다. 먼저 팽성 전투 이전까지 항우와 유방의 상황은 정반대였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8제후왕 분봉 이후, 항우에 대한 제후와 군벌들의 평가는 문자 그대로 바닥을 친 데다 실질적으로 제나라 전씨 일족의 리더나 다름없던 전횡에 의해 발생한 반란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항우 본인의 초월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제나라의 반란을 토벌할 수도 있었으나, 항우 특유의 심각한 잔혹성에서 비롯된 학살과 제대로된 회유 전술을 쓸 수도 없고 고려조차 하지 않는 정치적 무능은 역설적으로 제나라 군민들의 결속을 강화시켜 쉽게 끝날 토벌을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게 만드는 심각한 원인이 된다.

크게 의도한 대전략이라고는 볼 수 없으나, 전횡을 비롯한 제나라 군민들의 전략적 대응이 효과적이었고, 이와 비슷한 대전략으로 유방이 항우를 분쇄시켰다는 점은 굉장히 의미심장하다. 이미 거록대전을 통해서 야전사령관이자 선봉대 지휘관으로서의 항우의 역량은 중국 전쟁사에 공히 기록될 정도의 수준이라는 점이 증명되었다. 그 와중에 생존을 위한 결사항전을 위해 제나라 군민들은 각 성을 중심으로 공성전을 펼치는 한편, 전횡 등의 지휘에 따라 정면대결을 피하면서 철저히 출혈을 요구하는 유격전을 개시한다.[16]

백전불패의 강동자제 8000명과 항우 직속의 초군들은 회전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으나, 공성전에서 만큼은 그만한 역량을 많이 발휘하지 못함이 이를 통해 증명되었다. 물론 수도 많고 잘 정비된데다, 교전 및 공성 경험이 많은 항우는 그때도, 그 이후에도 어떻게든 공성을 성공시키는 모습은 보여주었으나 문제는 시간과 병력/군량의 소모였다. 결국 계속해서 초나라의 군사력을 더 투여하면서 제나라 토벌은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그 와중에 생긴 병력의 공백을 한군은 그야말로 기막히게 잘 이용했다. 항우에 비해 정치적 식견도 한 수 위인데다, 현실적인 성격인 유방은 이미 관중을 놓고 항우와 겨루기를 할 때부터 유화책을 잘만 써먹었고, 분봉을 통해 발생한 서초내 제후들과의 갈등까지 제대로 포착하면서 초나라 지역을 문자 그대로 날로 먹게 되었다. 여기서 그러면 유방을 비롯한 한군의 당시 전략이 무엇인지는 명확하다. 모든 병가에서 말하듯이 머릿수에는 장사가 없고, 굶은 병사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제나라로 섣불리 지원군을 투여해서 성급하게 전면전을 펼치는 상황을 피하고, 서초 지역을 단숨에 장악해 원정 중인 항우의 보급 역량을 파괴하는 한편, 50만이 넘는 제후군을 앞세워 정면 대결을 펼쳐서 수의 우위로 항우군을 압사시킨다는 것이 한나라의 전략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팽성지역을 장악한 이후 움직이지 않은 것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금의환향이라는 고사를 만들었을 정도로 열혈 초나라인이었던 항우를 제나라에서 굶주리고 지친 상태에서, 급히 회군하게 만들어 한편으로는 제나라를 구한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상황 또한 한군에 대단히 유리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보였다. 시일과 병력의 소모가 더 심할 것이라 생각되었던 초나라 원정은 너무나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성공했고, 생각외로 제나라가 아주 단단하게 버텨주면서 너무나 많은 시간과 병력이 제나라에 발이 묶인 상태였다. 원래대로라면 항우가 그 상황에서 급하게 팽성을 수복하기 위해 전군을 모아서 회군하게 되면, 제나라는 당연히 기각지세인 현 상황에서 농성에서 풀려나 초군의 뒤를 치게되고, 그러면 그러한 대규모 병력의 이동이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희박하니 제에서 싸우든, 군사를 몰아서 제나 초 아무곳에서나 유리한 고지를 정하든 한군은 앞뒤로 병력을 몰아쳐 항우를 포위해서 죽일 수도 있었고, 그것도 아니면 아예 회군 거리를 확 늘려 팽성에서 단단히 준비하면서, 빠르게 회군하느라 지친 초군을 많은 수의 병력으로 깨부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항우의 뛰어난 전술이 빛난다. 대전략에 있어서는 천치레벨의 항우였으나, 거록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보여지듯이 그 때 그 때 현장과 상대방의 전력을 분석하여 대응하는 능력만큼은 하늘이 내려준 수준이었던 그였다. 그는 제나라의 공격을 범증등에게 맡겨놓은 상태에서 그의 핵심 정병이며, 최후까지 같이 했다는 강동자제를 비롯한 최정예군 3만만으로 한군에 대응한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상식적으로 항우의 전투는 일반적인 병가의 섭리를 철저히 무시하는 또라이짓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의 병력들의 성격, 항우의 군사적 역량, 그리고 그가 거느린 강동자제를 비롯한 정예병의 파괴력이 더해지자 그아말로 신의 한수가 된 것이다.

팽성대전의 승리는 분명 야간을 틈탄 항우의 기습이었지만, 해하전투에서도 드러났고, 이전까지의 모든 상황에서 증명되었듯이 항우 본인은 만인지적이라 불릴 정도로 전술가로서는 뛰어났다. 야습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지라도, 어떤 식으로든간에 56만이라는 대인원을 분쇄하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항우 본인의 자신감,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실력이 아니었다면 이런 전술은 애시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항우 본인이 진나라 장함의 20만 대군을 신안대학살로 학살한 이래로, 중원에서 정예병다운 정예병을 양성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대단히 힘든 상황이었고, 또 그렇게 하기에는 시일도 부족했다. 특히 분봉이 이뤄진지 그렇게 오랜시간이 지나지 않아 중원의 제후들 밑에 속한 병사들은 문자 그대로 무기만 든 유민에 가까웠다. 반면 항우는 본인 스스로가 이런 유민군들을 정병으로 격파하는데 이골이 나있었고, 항상 모든 전선에서 진두지휘하며 용맹을 뿜어낸 까닭에 그가 직접 지휘하는 병력들의 정예화 버프까지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거기에 후일 유방의 총력전에 의해 항우 또한 휘하의 강동자제 등을 비롯한 정예병들을 장기화된 공성과 농성 등으로 너무 많이 소모하여 그 역량이 약해지긴 하나, 팽성 전투 당시만 해도 그들의 힘은 아직까지 건재했다.

유방의 병력은 역설적으로 너무나 많은 수의 병사들을 팽성 지역이라는 한 곳에 몰아넣음으로써 항우를 상대로 가장 효율적인 무기 중 하나인 농성이라는 카드를 쓸 수가 없었고, 쓸 생각도 없었다. 결국 평야지역 군데군데 제대로 통제도 되지 않고, 지휘통제도 먹히지 않는 군대가 그저 여기저기 퍼져있는 격이 되었다. 거기에 설마 소수정예로 이 대군을 들이친다는 생각조차 못한 탓에 항우의 기동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했으니 그 피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항우는 상대방의 방어선을 우회하여 적의 후방을 기습한다는 간단한 전술만으로 제후들의 느슨한 연합으로 구성된 한군의 약점을 제대로 찔렀다. 제대로 통제되는 군대조차도 후방에서 갑작스레 불어닥친 기습에 대응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인데, 유민군이 절대다수인 한군의 입장에서는 마치 드물게 발생하는 압사사고처럼 혼란과 공포에 휩싸여 병력이 병력의 뒤를 몰고, 지휘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린 것이다. 거기에 항우는 일일이 병력의 수를 줄이는 것보다는 전선 자체를 밀어붙이면서 압도적인 파괴력과 속력으로 상대가 상황파악할 여유조차 주지 않고 병력을 위압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는 정말로 효과적으로 작용하여 무수히 많은 적병이 적군이 아니라 아군에게 등이 떠밀어져 익사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7. 한신의 참여 여부

고우영 초한지나 여러 초한지 관련 소설에서는 바로 이 부분에서 한신에 대한 묘사가 실제 사서와는 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데, 바로 한신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시기한 유방이 위표를 대신해 대장군의 자리에 올리고 한신이 자진해서 군사지위권을 넘겨준 후 한나라가 팽성에서 처절하게 패배를 당하고, 이후 한신이 뒷수습을 다 해준다는 묘사이다. 소설 상의 묘사 때문에 실제로도 그렇게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이는 사기나 한서같은 정사의 기록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이런 언급은 대부분 소설 초한지 등에서 한신의 무적지장 이미지를 지키고, 이후 팽성 탈출 때 보여준 유방의 찌질함의 복선 격으로 집어넣은 에피소드라 보여진다.

실제로는 팽성대전 시점에서 유방이 한신의 지휘권을 박탈한 적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점 이후에 한신의 지휘권을 박탈하긴 하지만, 적어도 팽성 전투를 전후로 한 시점에서 지휘권을 박탈했다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한신이 이 전투에서 관련되지 않았다는 기록도 찾아보기 힘들다. 관련 기록[17]을 모두 살펴 보아도 딱히 둘이 독자적으로 움직였다고 볼 만한 근거는 없다.

한신이 본격적으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던 것은 안읍 전투 이후이다. 이때 한군은 유방 본인이 지휘했다. 즉 이때는 한신에게 지휘권 자체가 없었다. 한신이 독립된 군대를 지휘한 것은 안읍 전투 이후 북방의 조나라 등을 평정하러 갈 때부터다.

전쟁 후 한신이 패잔병을 수습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방 등도 패잔병을 수습하는 일은 하고 있었고 회음후열전에서도 유방과 한신이 형양에서 만나 적을 격파했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항우 본기나 하후영 열전 등에서도 유방이 형양에 도착한 뒤에 패잔병들을 모두 모을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패잔병을 모으고 수습한게 한신만의 공은 아니다.

정리를 하자면 패전의 이유가 한신의 유무나 유방의 지휘권 박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분열된 연합군의 당시상황과 수적으로만 우세할 뿐 질적으로 부실한 병력등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사의 기록을 보면 한신 또한 이 전투에 참전한 건 확실해 보이지만 후에 있는 유수 전투나 정형 전투 때와는 다르게 전쟁의 총책임자는 유방이었기 때문에 패전의 결정적인 책임을 한신의 심각한 판단 실수에 물을 수는 없다.[18]

이문열의 초한지에서는 한신이 참전은 했으되 이 시기에 뭔가 느낌이 안 좋은데, 자기가 봐도 뭐가 안 좋은지 명확히는 안 보이니까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사실상 전장에 있지만 어떠한 영향도 못 미치는 상태로 그려지는 등 고우영의 초한지보단 그럴 듯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전쟁 대패 후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절대 패배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으로 불패장군 한신의 전설이 시작된다.

초한전기에서는 한신이 항우의 공격 시기는 예측하지만, 공격 경로는 잘못 예측하는 바람에[19] 기습을 허용함으로 한신의 능력과 책임을 적절히 배합하여 묘사하였다.

와이파이 초한지에서는 의외로 간단하게 보았다. 한신이 분명 참전하긴 했지만, 유방이 팽성으로 향하기에 앞서 장군들에게 수많은 군사들을 조금씩 쪼개줘서 개별적인 싸움을 허락하는 족족 승전을 거두니, 자연스레 유방의 더 부각되고 장량과 한신이 나설 기회가 줄어버린 것. 항우라는 변수도 그렇고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는 장량과 한신. 결국 숙손통을 위시한 유생들의 항복으로 무혈입성한 팽성에서 안일하게 띵까띵까 하다가 항우의 공격에 박살난다.

8. 소설 초한지에서의 모습

초한지에서는 꽤나 전개가 다른데 눈에 띄는 부분은 항우의 용맹과 용병술에 대한 것과 바로 위에 언급한 한신에 대한 묘사이다.

유방은 자만심에 의해 아직 병력의 기강이 제대로 서지 않았고 군열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간언한 한신에게서 지휘권을 빼앗고는 그걸 서위왕 위표에게 준 후, 화가 뻗칠대로 뻗친 항우를 상대로 병사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맞붙을 정도로 자만에 빠진다.
우희와 우자기가 항우에게로 도망쳐 오고, 단단히 빡친 항우는 휘하 부하 몇에게 제나라의 공격을 맡기고는 직접 3만 군사를 휘몰아쳐 수수에 진을 친다. 항우가 보내는 전서(戰書. 간단히 말해 도전장)를 받은 유방은 비웃으며, 위표의 작전에 따라 다섯 부대로 나누어 항우에 맞선다.즉, 항우가 야간 기습을 감행했던 실제 역사와 다르게 전면전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단숨에 선발대의 은왕 사마앙을 죽여버리고 2합에 2대를 이끄는 하남왕 신양을 죽이면서 지휘권을 무너트려버리고 지휘권이 무너져 우왕좌왕하는 군대를 뚫고 3대의 하후영 왕릉마저도 그걸 저지하지 못하면서 4대를 이끄는 유방에게까지 칼이 닿게 된다. 번쾌가 그걸 막아서면서 유방이 해를 입지는 않았으나 진영은 삽시간에 붕괴되어 5대인 위표마저 중상을 입게 되었고 번쾌 또한 얼마 못 가 패퇴하면서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 그 순간 갑자기 돌풍이 불어 유방이 도주하게 되는데 성공, 항우는 그것에 대해 아까워했지만 어디까지나 그 돌풍의 혜택을 입은 건 유방 한 명뿐이었으며 연합군은 60만 대군 중 40만 명이 죽고 10만 명이 수수강을 건너려다 죽는 참패를 겪게 된다.

이후 유방은 다급하게 한신을 찾았고 복귀한 한신은 새로운 수레(車)[20]라 불리는 부대를 편성해 항우를 유인해내 평원 회전에서 큰 타격을 입혀 어느 정도 되갚아준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하지만 정사가 아니라 소설이나 만화에 나오는 내용이고 근거가 적으므로 정확성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1] 이 점은 서양에서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한니발과 로마가 대결했던 칸나이 전투와 비슷하다. [2] 항우는 마지막 해하 전투를 제외하고는 자기가 참전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그것도 한두 번 친정했던 게 아니라 반진전쟁에서 초한전쟁에 이르기까지 장성한 이후 일생 내내 항우는 전장에서 살다시피했고, 그만큼 수많은 전투를 치러왔다. 이 크고작은 모든 전투에서 항우는 전부 승리했고, 패배는 오직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만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패배조차도 항우가 곧바로 몸소 달려가 전황을 뒤집기를 반복했지만, 끝내 항우는 앞선 전투에서 전부 승리하고도 인생 최후의 전투인 해하 전투에서는 뭘 해보기도 전에 이미 패배한 채로 전투를 시작해버려서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3] 하지만 장량과 항백을 통하여 항우를 설득해, 한중 지역까지 차지하는 일은 성공했다. [4] 하남성 태강현(太康縣). [5] 진나라가 만든 제도로써 말단 지방행정기관에는 10리(약 5km)마다 정(亭)을 두고 그 장을 정장(亭長)이라 했고, 매 10정마다 향(鄕)을 두고 그 장을 향장이라 했다. 즉 향은 100리(50km)마다 1개가 있었으며 매 향에는 또한 삼로를 두어 그곳 백성들의 교화를 담당하게 했다. 삼로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3명이었으며 해당 지방에서 인망이 높거나 현명했던 노인들에게 주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6] 원래는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거록대전과 이후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을 기점으로 이를 가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7] 현재 산동성 곡부시(曲阜市) 경내. 공자가 태어난 곳으로 유명하다. [8] 산동성 위타이현. [9] 지금의 안휘성 숙현(宿縣) 서북. [10] 전투가 시작된 시간은 새벽이며 끝난 시간은 정오이다. 불과 반나절만에 모든 상황이 끝난 것이다. [11] 재밌게도, 이때 진짜로 하후영을 찌르려고 했던 유방은 결국 한 번도 찌르지 못했는데, 옛날 건달로 지내던 시절에 하후영과 장난치다가 실수로 찔러버렸고, 이 때문에 상해죄로 유방이 잡혀갔다. 그리고 하후영은 유방이 찌른 게 아니라고 했는데 거짓말이라는 게 들통나서 위증죄로 깜빵에 갇히고 수백 대나 맞았다고 한다. 그와중에도 하후영은 절대로 유방을 신고하지 않아 유방은 크게 벌을 받지 않고, 하후영은 1년간 빵살이를 하고 나온 이후 유방이 측근으로 둘 정도로 의리가 강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도 자기 목숨 위험한데 자식(심지어 유방 본인의 자식) 챙긴다고 찔러 죽이려 하는 것으로 유방의 성격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12] 이 일화가 과장이나 와전된 것이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달리는 수레에서 연약한 어린아이를 내던지면 아이들이 무사하기 힘든데 아이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기록 없이 그저 하후영이 아이들을 다시 태웠다고만 언급된다. 그래서 아직 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추격군이 보이자 자식들을 내버리고 자기와 하후영만 달아나려는 걸 하후영이 반대하자 무기까지 꺼내들만큼 살벌하게 실랑이 끝에 하후영의 설득에 반박을 못한 유방이 결국 자식들까지 데리고 도망친 것이 아니냐는 내용. 물론 사실이던 아니던 유방이 자기 살겠다고 자식들을 팽개친 건 분명해보인다. [13] 심이기는 이 때 여후를 보호한 공으로 여후 집권기에 승상에 오르게 된다. 여후와 심이기가 각별했던 것을 두고 사람들은 그들이 초나라의 포로 시절부터 간통했다고도 보고 있다. 심이기도 당연히 여후 사후 몰락한다. [14] 정작 여후는 그 성깔이 어디 안 가다보니 붙잡히고도 항우 면전에서 항우는 내 남편 상대가 아니니 어디 죽일 테면 죽여보던가 마음대로 해보라는 말을 내뱉어서 같이 포로로 잡힌 시아버지는 물론 항우조차도 할 말을 잃었다고 한다. [15] 안휘성 탕산 [16] 이는 전술/전략 레벨에서 한니발에 뒤쳐진다고 스스로를 판단한 로마군이 파비우스를 내세워 진행했던 청야전술과 대단히 유사하다. [17] 고조본기, 항우본기, 회음후 열전, 하후영 열전, 관영 열전, 유후 세가, 조상국 세가, 한서 고제기, 한서 한신전, 자치통감 등. [18] 연합군의 제후들과 한나라의 군결정권자들이 당시 연합군 초나라군의 전력을 오판한 것이라고 봐야한다. [19] 매복하기 적합한 팽성 남쪽에 척후 역할로 1만을 주둔시키고 자신은 나머지 1만을 거느리고 팽성 서쪽에 주둔하며 항우가 오면 박살을 내주겠다고 괴철과 술까지 마시며 득의양양해 있었다. 동쪽은 지형이 험하고 웅덩이가 많아 기껏해야 수천 명밖에 진입할 수 없는지라 항우가 죽으려고 거기로 오겠냐며 배치하지 않았는데 항우는 계포와 우자기에게 1만, 1만 5천을 나눠주어 한군을 유인하게 한 다음 겨우 5천으로 동쪽에서 진입해 제후군을 박살내버린다. [20] 장기(車). 소설에서 묘사되는 형태는 전차(채리엇)이 아니라 전투 마차(역시 전차라고 부름)에 가까우나 이런 무기는 400년 뒤인 삼국시대의 무기이며, 그나마도 보통 묘사하는 쇠로 된 전차는 훨씬 후대의 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