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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목록/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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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클럽

1.1. 프리미어 리그

1.2. 라리가

1.3. 세리에 A

1.4. 분데스리가

1.5. 리그 1

1.6. 기타

2. 리그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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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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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성기 당시 멤버였던 빌리 브렘너는 홈구장 엘런드 로드에 동상이 세워져 있다. [2] 은하 군단 초기. [3] 챔피언스리그 4회 우승 및 3연패. [4] 루이스 수아레스 미라몬테스 라슬로 쿠발라, 졸탄 치보르, 산도르 코츠시스가 활약하던 시절 [5] 요한 크루이프가 활약하던 시절 [6] 요한 크루이프 감독의 드림팀 시절 [7]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 하에 호나우지뉴 사무엘 에투가 활약하던 시절 [8]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며 전관왕(트레블)을 달성한 펩 과르디올라 감독 시절 [9] 다시 한 번 더 5관왕(트레블)을 달성한 루이스 엔리케 감독 시절 [10] 1935-36 시즌 직후 강등 예정이었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 오비에도가 안방 구장 파괴로 복구하느라 참가하지 못해 오사수나와 1939-40 시즌을 앞두고 강등 플레이오프전을 펼치고 구사일생으로 잔류했다. 스쿼드의 질이 수직상승하여(이 과정에서 프랑코 군부와 결탁했다는 논란이 있다.) 2연패를 거두며 발렌시아, 바르셀로나와 함께 1940년대를 주름잡은 주요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한편 레알 마드리드는 주축 선수들이 프랑코 정권으로부터 추방당하며 최악의 암흑기를 맞이했다. [11] 라도미르 안티치 감독의 더블 시즌 [12] 이 시기의 도르트문트는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워 정상급 선수들을 놓고 독일 안팎의 구단들과 쩐의 전쟁을 벌여 수 차례 승리하였고. 같은 기간에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이 이들을 지도하여 1994-95, 1995-96 시즌 연속 분데스리가 우승과 1996-97 시즌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3] 빅이어를 영구 소장할 권리를 가질 조건은 유러피언 컵/챔피언스리그(단, 유러피언 컵이 챔피언스리그로 개칭된 이후에 3연패를 한 팀은 이미 유러피언 컵 창설 직후 다섯 시즌 연속 우승한 레알 마드리드밖에 없다. 따라서 다른 구단이 챔스 3연패를 했을 경우, UEFA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미지수. 그리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후술.) 3시즌 연속 우승을 하거나 유러피언 컵 및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섯 번 째 우승했을 때에만 주어진다.(그러나 UEFA는 빅이어를 영구히 소장할 수 있는 제도를 폐지하기로 했고, 이는 2014-2015 시즌에서 FC 바르셀로나가 구단의 5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면서 영구 소장 조건을 갖춤과 동시에 발효되었다.) 현재 UEFA 소속 클럽들 중에서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만족시킨 구단은 FC 바이에른 뮌헨을 포함해서 레알 마드리드(13회 우승), AC 밀란(7회 우승), 리버플 FC(6회 우승), 레알 마드리드, AFC 아약스(4회밖에 우승하지 못 했으나, 유러피언 컵 시절 대회 3연패 달성), FC 바르셀로나(5회 우승) 5팀 뿐이다. 이들 중 유러피안 컵 3연패는 FC 바이에른 뮌헨(1973-1974, 1974-1975, 1975-1976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과 레알 마드리드(1955-1956, 1956-1957, 1957-1958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AFC 아약스(1970-1971, 1971-1972, 1972-1973 시즌 유러피언 컵 우승) 세 팀 밖에 없다. 그리고 빅이어를 소장하기 위한 두 조건 모두 달성한 팀은 FC 바이에른 뮌헨(1974~1976년 유러피언 컵 3연속 우승 및 챔스/유러피언 컵 6회 우승)과 레알 마드리드(1956년~1958년 유러피언컵 연속 우승 및 챔피언스리그 최다 우승 횟수인 14회 우승.), 단 둘 밖에 없다. [14] 또한 빅이어를 영구히 소장할 자격을 얻은 구단은 UEFA 영예의 배지를 달 자격 역시 갖춘다. 즉, FC 바이에른 뮌헨은 UEFA 소속 프로축구 클럽들 중에서 단 6팀밖에 없는 UEFA 영예의 뱃지를 수여받은 클럽들 중 하나이다. [15] 주로 포칼 탈락이 원인이었다. 게다가 분데스리가에서는 뮌헨과 같은 시기에 전성기를 맞았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게 밀린 것도 있다. [16] 오히려 1974-1975 시즌 분데스리가에서는 최종 10위까지 내려가며 구단이 차지한 리그 순위 중 뒤에서 공동 2등으로 기록되었을 정도.(바이에른 뮌헨이 최종 10위를 차지한 또 다른 시즌은 1991-1992 시즌. 참고로 뒤에서 1위는 1977-1978 시즌에 기록한 최종 12위.) [17] 다만 로이터와 콜러는 월드컵이 끝나고 약 1년 후에 유벤투스로 갔다가 1992년에 도르트문트로 이적한 후에 거기서 10년 넘게 뛰다가 은퇴한데다가 이 시기에 챔스 우승까지 경험했기 때문에 도르트문트 레전드로 보는 경향이 더 강하며, 톤은 1994년에 샬케로 돌아간 뒤에 8년동안 뛰다가 은퇴하였다. 다만, 톤은 샬케에서 유스 시절을 보낸 후에 프로데뷔까지 했기 때문에 당연한 선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나마 아우겐탈러와, 아우만, 퓔글러는 선수시절의 전부 내지 절대다수를 바이에른 뮌헨에서 보내긴 했다.(아우겐탈러는 프로선수로 지냈던 기간 전부를 뮌헨에서 보냈고, 아우만은 선수 말년에 터키로 이적해서 1년간 뛴 것을 제외하면 프로선수 기간 거의 전부를 뮌헨에 바쳤다. 그리고 퓔글러는 SE 프라이징 시기와 공백기를 포함한 7년을 제외하면 나머지 16년을 바이에른 뮌헨과 리저브 팀인 바이에른 뮌헨 II에서 뛰었다.) [18] 다만 포칼은 32강에서 만난 마그데부르크와의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두 가지 아이러니한 사실은, 해당 시즌의 포칼 우승팀은 샬케 04였으며, 8강까지 올라간 마그데부르크를 떨어뜨린 팀도 바로 샬케였다. [19] 다만 1970년대에 열린 메이저 대회들에서 독일에게 우승을 안겨준 바이에른 뮌헨 출신 국대 멤버들은 1974년 월드컵 당시에 벤치멤버로만 나온 카펠만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국가대항전에서 뛰던 시기와 소속 클럽에서 뛰던 시기가 대체로 같았던 반면(적어도 이들은 1972년과 1974년에 열린 두 메이저대회의 우승 멤버 명단에 포함되어 있었다.), 2006년에 열렸던 자국 월드컵과 유로 2008 당시 당시에 뛰던 독일 국대 선수들 중 훗날 바이에른 뮌헨의 트레블에 공헌했던 선수는 람과 슈바인슈타이거가 전부였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에서 뛰던 선수로 범위를 넓힌다면 미로슬라프 클로제 미하엘 발락도 포함되기는 한다. 참고로 저 둘은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으며, 심지어 발락은 유로 2000에서도 뛰었다. 다만 발락은 자국 월드컵 종료 이후 첼시로 가서 뛰다가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레버쿠젠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은퇴했으며, 클로제는 2011-2012 시즌부터 라치오 소속으로 뛰다가 은퇴하였다.) 람과 슈바인슈타이거가 2006 월드컵에서 뛰던 당시에 고메스는 VfB 슈투트가르트 소속이었으며, 해당 대회가 끝난 이후에 국대에 첫 소집되었다. 노이어는 이제 막 샬케 성인팀에 데뷔하던 때였으며, 뮐러와 크로스, 보아텡, 바트슈투버는 모두 자국에서 개최한 2번째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 클럽과 국대 성인팀에 데뷔하였다. 이후에 열린 남아공 월드컵 당시 보아텡은 맨시티, 노이어는 샬케 소속이었다. 그리고 크로스는 브라질 월드컵 이후에, 슈바인슈타이거는 2015년에 각각 레알과 맨유로 이적해버리는 바람에 유로 2016부터는 바이에른 뮌헨의 선수가 아니게 되었다. 또한 람은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을 끝으로 독일 국대를 떠났다.(참고로 람처럼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 이후 독일 축구 국대팀을 은퇴한 선수가 바로 그와 함께 바이에른과 국대에서 뛴 동료이자 해당 대회에서 호나우두를 제치고 월드컵 득점왕으로 등극한 미로슬라프 클로제였다.) 그나마 이 6명은 월드컵에 나가서 우승이라도 해봤지, 트레블 이후 바이에른을 떠나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던 고메스는 브라질 월드컵에 참여하는 독일 국대 선수 명단에서 제외되고 말았던데다 본인이 선수 시절에 유일하게 참여했던 러시아 월드컵에서는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비극을 몸소 겪고 말았다.그래도 얘는 장기 부상으로 브라질에 못 간 데다가 국대에 복귀하자마자 또 큰 부상을 당해서 2015년 이후 국대로 선발되지 못 한 홀거슈투버 보다는 사정이 낫다 다만 두 명 모두 축구 선수로 뛰던 기간에 딱 한번 나갔던 월드컵에서 고메스는 험한 꼴을 당하고 돌아온 반면, 그가 못 나간 남아공 월드컵에서 교체 자원으로 출전한 바트슈투버는 3위를 찍고 돌아왔던 것이 함정 그리고 2013-14 시즌부터 바이에른 뮌헨에 합류한 마리오 괴체는 브라질 월드컵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넣어 독일을 우승으로 이끌긴 했으나, 정작 뮌헨에서의 커리어는 남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 한 채 타 팀으로 떠나고 말았다. [20] 단, 2020년 클럽 월드컵 대회는 코로나로 인해 2021년 2월에 개최되었다. [21] 결국 시즌 후 열린 이적시장에서 FC 바르셀로나에 판매되면서 구단을 떠났다. [22] 특히 두 윙어인 자네와, 그나브리, 새로 영입한 마네의 부진이 후반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또한, 뮐러는 노쇠화와 연계 플레이를 해줄 스트라이커의 부재로 득점력이 줄었으며, 무시알라도 전반전과 같은 득점력을 뽑아내지 못 하고 있다. [23] 2023-24 시즌에 돌풍을 일으키면서 무패 우승을 거둔 레버쿠젠에게 패배한 것은 이해한다고 쳐도 2위로 끝낼 수 있었던 기회조차 호펜하임 홈에서 2:4로 참패를 당하는 바람에 같은 시즌의 레버쿠젠처럼 돌풍을 일으킨 팀이자 최종전에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4:0으로 이긴 VfB 슈트트가르트와의 준우승 경쟁에서 승점 1점 차이로 밀려서 3위로 내려갔다. [24] 단 포칼은 60년대와 90년대에 한 번씩 우승하기도 하였다. [25] 실제로 1970년대에 보루시아 묀헨글라트가 리그에서 우승한 횟수가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에서 우승한 횟수(3회)보다 더 많다.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2013년 이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 [26] 바이에른은 강등된 적은 없지만 통합리가 창설 멤버에 들지 못했다. 통합 분데스리가가 63년 시작됐지만 DFB가 1부리가 기준을 충족하더라도 같은 연고지의 2팀을 넣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당시에는 바이에른보다 TSV 1860 뮌헨이 더 강팀이었다. 남부 오베르리가에서 1860은 우승, 바이에른 뮌헨은 3위를 해서 참여 자체는 문제가 없으나 연고지가 같아서 거부되었다.) 참여하지 못하였고, 2년 후인 65-66시즌부터 분데스리가에 군림했다. [27] 그것도 크루이프가 감독으로 다시 돌아오고 난 뒤에야 달성했다. [28] 이때부터 시작된 거대 자본을 가진 구단주들이 5대 리그에 쓰는 돈이 많아지면서 모든 상황이 이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자연히 중소 규모의 에레디비시는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빅클럽 관계자들이나 거대 자본을 가진 구단주들이 중소규모 리그의 선수들을 해당 국가에서 유망주 취급을 받는 시절부터 찜해놓고 데려가는 방식으로 바뀌는 바람에 에레디비시가 중계무역으로 얻는 수입이 크게 감소하였다. 그렁다고 해서 에레디비시가 내수 시장만으로 버틸 수 있는 규모는 아닌데다가 리그의 소속된 선수들의 질적 저하로 인해 경쟁 동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29] 이 중 고든 스트라칸은 후에 퍼거슨 감독을 따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다. [30] 다만 우승 자체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결승에서 축구 역사상 최강의 팀들 중 하나인 매직 마자르를 상대로 혈투 끝에 이기는 베른의 기적을 쓰면서 처음으로 이루긴 했다. 허나 이때는 독일 축구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된 때로 봐야 맞다. 그 전까지 나간 월드컵 대회의 수는 딱 두 번 뿐이었으며 그마저도 각각 3위 및 1라운드 탈락으로 그쳤으며(무엇보다 독일이 처음으로 출전한 1934년 월드컵은 무솔리니가 자국과 파시스트 사상으로 무장한 동맹국인 독일이 우승과 준우승을 나눠먹도록 조작을 시도한 대회였으나 준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한테 패배한 탓에 이렇게 된 것이고, 4년 뒤에 열린 월드컵에서는 안슐루스로 인해 해당 월드컵에 오스트리아가 강제로 나오지 못 한 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합병한 독일 소속으로 뛰어야 한다는 구 오스트리아 국대 출신 선수들이 불만을 갖고 벌인 태업으로 저런 결과를 맞이한 것이다.), 무엇보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는 자신들이 일으킨 2차대전으로 인해 국제대회가 중지되어 버린데다 그에 대한 벌로 전후 메이저 대회 출전 금지라는 제제를 받아 1954년 월드컵까지 국제 대회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 실제로 스위스 월드컵 우승 이후에 열린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3위를 했는데,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뒤에 열린 칠레 월드컵에서는 8강이라는 충격을 겪었다. 이는 당시 국대 축구의 근간이 되는 리그 축구를 개혁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분데스리가였다. 결정적으로 스위스 월드컵 결승전 당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이 메스엠페타민을 먹고 뛰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63년까지는 약물 관련 규정이 없어서 넘어갔을 뿐, 지금 같았으면 우승 취소는 기본에 최소 몇 년간 메이저 대회와 A매치 출전 금지 처분을 받는 것이 확정될 게 뻔하다. 그리고 위법성 여부와 도의적인 비난은 차지하더라도 결국 약물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상대를 정당한 방법으로는 이기지 못 한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다.(실제로 해당 대회 조별리그에서 무려 3-8로 졌었다. 다만 해당 대회의 대진이 특이했던 것을 파악한 제프 헤어베어거 감독이 일부러 헝가리에게 패배하고자 2군 정도의 선수들만 내보내서 치르게 한 것. 자세한 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항목과 베른의 기적 항목 참조. 물론 이것도 약물을 사용한 것 만큼 비난받아야 할 사안이 아닐 뿐, 스포츠 정신을 위배한 것은 분명하기 때문에 잘한 행동은 아니다.) 따라서 저 때를 전성기로 봐줄 이유는 더더욱 없다. [31] 그나마 1982년에 열린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하기는 했으나 히혼의 수치로 인해 의미가 크게 퇴색되었다. [32] 그래도 1996년 유로 우승, 2002년 한일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긴 했다. 그러나 후자는 월드컵 유럽예선에서는 PO까지 밀리며 탈락할 위기에 처하다가 간신히 한국행 티켓을 얻는 추태를 보였으며, 무엇보다 본선에서는 조별리그부터 준결승까지 자기네보다 훨씬 약한 팀들만 상대하다 결승전에서 브라질을 만나 침몰한 거기 때문에 암흑기를 끝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2년 뒤에 열린 유로에서는 조별리그에서 광탈하고 만다. [33] 심지어 이들이 아시아 원정을 와서 경기를 치렀던 2004년 당시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1-3으로 패배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게다가 해당 경기에 나섰던 독일 선수들은 분데스리가에서도 정예로 꼽힌 이들이었던 반면, 상대였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은 박지성이나 이영표와 같은 유럽파가 빠진 1.5군급 전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34] 이 될 뻔 했으나 규정 변경으로 인해 다음 시즌에도 리그 A 소속으로 나오게 되었다. [35] 이마저도 포르투갈을 2-4로 털지 않았다면 프랑스전 패배와 헝가리전 무승부에 발목이 잡혀 탈락할 뻔 했다.(게다가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헝가리전에서 독일이 패배했다면 탈락 확정이었다.), 그리고 16강 상대인 잉글랜드는 역대 전적에서 우위를 가지고 있는데다 경기 장소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독일이 수십 년이나 패배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경기 내내 한 골도 못 넣은 채로 졸전만 펼치다 후반전에 두 골을 내리 얻어맞고 패배하면서 탈락했다. [36] 게다가 같은 조에 배속된 잉글랜드 상대로 이탈리아가 1승을 거두고 헝가리는 아예 2승을 거둘 때 독일 혼자 2무를 거뒀으며, 해당 조에서 제일 약체로 예상되었던 헝가리 상대로는 원정에서 비긴데다 홈에서는 아예 패배하는 바람에 결선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한 최대 원인이 되고 말았다. [37] 단 1962년 월드컵에서는 펠레가 대회 초반에 부상당했으나 가린샤와 같은 국대 동료들이 그의 빈자리를 잘 메워준 덕분에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자국을 우승시키려는 잉글랜드의 계략에 제일 큰 걸림돌 중 하나인 브라질에게 온갖 태클과 편파판정을 시전한 끝에 조기탈락을 당해서 제외. 오죽했으면 펠레가 선수 보호 제도를 만들지 않으면 다음 월드컵은 불참하겠다고 했을 정이며, 실제로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를 은퇴했다가 주변의 설득과 제도 정비 덕분에 간신히 돌아왔을 정도. [38] 다만 2001년 코파 아메리카 콜롬비아에서는 8강 온두라스전에서 0-2로 패배하는 바람에 11개국 중 6위라는 중위권 성적으로 대회를 마쳤으며, 이를 증명하듯 한일월드컵 남아공 예선에서는 부진했다. 게다가 본선에서 만난 팀은 잉글랜드와 독일, 벨기에를 제외하면 죄다 브라질보다 한 두 수 이상 처지는 팀들이었다. 그래도 7전 전승으로 우승하는데 성공하면서 전성기의 정점을 찍었으며, 한일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 열린 2004년 코파 아메리카 페루에서는 또 한 번 더 우승컵을 들어올리면서 전성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2006년 이전까지는 말이다. [39] 그래도 2007년 코파 아메리카 베네수엘라에서는 우승을 차지함과 동시에 연속 우승 기록을 또 세웠다. [40]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의 마크에 별이 4개인 이유는 월드컵이 생기기 이전에 치른 올림픽 축구종목에서 2번 우승했기 때문이다. 우루과이만 유일하게 올림픽 우승도 월드컵 우승과 동급으로 치는데 당시 우루과이의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월드컵 우승 경험은 2번인데 별이 4개인 것에 대해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이다. 문제는 1950년 월드컵을 끝으로 4강이 최대성적이라는 게 문제. 그나마도 지역예선 광탈이 더 많았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당시에는 플레이오프에 떨어져서 코스타리카와 맞붙어서 겨우 올라오는 바람에 지역예선을 포함해서 월드컵 역사상 최다경기 기록팀(총 27경기)이라는 기록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나마도 에콰도르가 칠레를 이기면 플레이오프의 기회조차 없었다. 위의 프랑스는 2006년 월드컵에서 준우승이라도 했다. [41] 근데 이 대륙간 플레이오프는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부터 4대회 연속이다. [42] 단 조별리그 2경기 만에 탈락한 코파 아메리카 센타나리오는 예외. [43] 그 1골도 1차선 상대인 독일 소속 선수 마츠 후멜스가 자책골이었다. 즉, 프랑스는 해당 경기에서 자력으로 필드골을 넣기는 커넝 프리킥이나 페널티킥 골 조차 없었다. [44] 정확히는 헝가리 인민 공화국 성립~ 1956년 헝가리 혁명 이전. [45] 하지만 그렇다고 1934년 이탈리아, 1978 아르헨티나 대회만큼 막장은 전혀 아니었고, 잉글랜드가 오심의 피해를 본 부분도 많았다. [46] 해당 월드컵이 개막한 다음 날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마지막 방어선인 포트 스탠리의 텀블다운이 함락되며 패전하였다. 이러한 소식은 군사독재정권이 통제하던 아르헨티나 본토에서는 언론의 보도제로 인해 차단되고 조작되어 자기들에게 유리한 내용만 전달되었으나, 월드컵이 열리던 스페인에서는 당연히 언론의 보도통제 같은 건 전혀 없이 제대로 된 전황이 송출되고 있었다. 문제는 조국의 패배라는 진상을 알게 된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의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된 실력 발휘를 할 수 없었고, 결국 탈락으로 이어진 것. 그리고 월드컵 중계를 통해 전쟁 결과를 알게 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인 라울 알폰신의 당선으로 인해 군부독재정권은 붕괴하고 만다. [47] 단, A조 2위로 강등은 면했다. [48] 우카시 피슈체크, 야쿠프 브와슈치코프스키 [49] 아르카디우스 밀리크, 크시슈토프 피옹테크, 그제고시 크리호비아크 [50]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톱시드를 차지했을 당시 폴란드의 피파랭킹은 6위였고 월드컵 직전까지는 8위였다. [51] 당시 폴란드가 파피랭킹 상위권을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로 2016에서 8강 진출과 러시아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비교적 쉬운 조에 편성되어( 덴마크를 제외하면 딱히 경쟁력 있는 팀이 없었다.) 승승장구 하게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52] 이 시점 2,3위인 UAE와 일본은 서로 비겨버리면서 겨우 승점 8점과 7점에 그치고 대한민국 자력 1위를 확정시켰다. [53] 특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혼자서 두 골을 넣으면서 결승전 공식 MOM에 선정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