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니콜슨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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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니콜슨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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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1c58> Tottenham Hotspur FC Hall of Fam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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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빌 니콜슨 OBE Bill Nicholson OB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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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윌리엄 에드워드 니콜슨 William Edward Nichol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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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9년 1월 26일 |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노스요크셔 주 스카보로 | ||
사망 | 2004년 10월 23일 (향년 85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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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축구 선수 (하프백 / 은퇴) 축구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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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001c58> 선수 |
노스플릿 유나이티드[1] (1938) 토트넘 홋스퍼 FC (1938~1955) |
감독 | 토트넘 홋스퍼 FC (1958~1974) | |
국가대표 | 1경기 1골 ( 잉글랜드 / 1951) | |
레거시 넘버 | 354 ( 토트넘 홋스퍼 F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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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잉글랜드)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스카우터. 55년을 토트넘에서만 보낸 인물이다.2. 생애
2.1. 어린 시절
니콜슨은 노스 라이딩 오브 요크셔 주 스카버러에서 9남매 중 8번째로 태어났으며, 글래드스톤 로드 초등학교와 스카버러 남자 고등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니콜슨은 졸업 후 세탁소에서 잠시 일했으며, 이후 영 리버럴스(Young Liberals)와 스카버러 워킹 클럽(Scarborough Working Club)을 거쳐 17살 때 한 달간 당시 2부 리그 소속이었던 토트넘 홋스퍼의 입단 테스트를 치렀다. 하지만, 니콜슨은 입단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해서 대신 구단 관리직원으로 토트넘에 고용되어 주급으로 £2를 받았다. 이때 그는 토트넘의 위성 유소년 클럽인 노스플릿 유나이티드 FC에서 뛰며 결승전에서 도버 FC를 꺾고 켄트 시니어 컵 우승을 차지했다.
2.2. 선수 경력
2.2.1. 클럽
선수 시절의 니콜슨 |
니콜슨은 18살 되는 해인 1938년 8월에 토트넘과 프로 선수 계약을 맺는데 성공했고, 1938년 10월 22일 블랙번 로버스와의 경기에서 첫 풋볼 리그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다음 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니콜슨도 영국군 체육 조교로 징집되었고, 그는 군 복무 기간에 뉴캐슬 유나이티드에서 임시로 19경기를 뛰었다. 전쟁으로 인해 니콜슨도 자신의 선수 커리어에서 반 가까이를 손해봤지만 그는 군복무 경험을 통해 인간 관리 기술을 배웠고 그것이 이후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줬기 때문에 군복무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6년에서야 니콜슨은 팀에 복귀할 수 있었고 이 때의 그는 센터 하프백으로 뛰었다. 1948년부터 니콜슨은 측면 하프백으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1949년에 아서 로우 감독[2]이 토트넘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그의 선수 커리어에 우승 기록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로우 감독은 푸시 앤드 런 전술[3]을 고안했고 이 전술로 토트넘은 잉글랜드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되었다.
로우의 지휘하에 토트넘은 1950년에 1부 리그로 승격했고 1951년에는 팀 역사상 첫 1부 리그 우승[4]을 차지했다. 니콜슨은 램지와 좋은 호흡을 보여주며 이 시기 토트넘의 주요 선수로 활약했지만 토트넘이 1부 리그에서 우승할 때 이미 그는 32세였다. 니콜슨은 이후 서서히 노쇠화를 겪었고 토트넘도 니콜슨의 대체자로 1954년에 대니 블랜치플라워를 영입했다.
니콜슨은 1955년에 은퇴했고 선수 시절 출장기록은 통산 314경기, 득점 수는 통산 6골이다.
2.2.2. 국가대표
니콜슨은 1950년 월드컵에 잉글랜드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경기에 출전하진 못했다.니콜슨의 A매치 출전 기록은 1951년 5월 19일에 구디슨 파크에서 있었던 포르투갈전이 유일하다. 니콜슨은 경기 시작 19초 만에 첫 볼터치를 바로 득점으로 연결했고 잉글랜드는 스타트를 기분 좋게 끊을 수 있었다. 이 경기에서 잉글랜드는 포르투갈을 5대2로 제압했고 니콜슨 동서고금의 모든 A매치에서 데뷔 첫 볼터치를 득점으로 연결한 흔치 않은 기록의 보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니콜슨의 대표팀 경력은 부상등으로 인해 이 한 경기와 한 골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니콜슨이 대표팀을 위해 뛰는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5]도 그의 대표팀 경력이 단촐한 것에 영향을 끼쳤다.
2.3. 감독 시절
니콜슨과 위대한 스쿼드들 |
1963년 컵 위너스컵 우승 축하 당시 모습 |
은퇴 직전 시점에 니콜슨과 램지는 라이벌 의식으로 미묘한 갈등이 있었다. 나잇대가 비슷해서 같은 시기에 은퇴 시기를 조율하던 둘이 토트넘의 코치 자리를 놓고 경쟁을 했던 것이다. 그들의 감독이자 토트넘의 첫 1부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아서 로우는 두 선수를 모두 코치로 토트넘에 남기려고 생각했기에 처음에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55년, 로우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토트넘의 감독직에서 사임하자 토트넘은 둘을 모두 코치로 데려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갈등이 생긴 것이었다. 토트넘의 선택은 니콜슨이었다.[6]
니콜슨은 은퇴하자마자 FA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친정팀의 코치로 부임해서 지미 앤더슨 감독을 보좌했다. 1958년 월드컵 때에는 국가대표팀 코치로 월터 윈터보텀 감독을 보좌하기도 했고 1958년에 지미 앤더슨 감독이 물러나자 바로 토트넘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토트넘은 니콜슨의 감독 데뷔 경기였던 12라운드에서 대니 블랜치플라워와 모리스 노먼, 바비 스미스, 피터 베이커, 클리프 존스 등을 앞세워 에버튼에 10대4로 승리하며 새로운 스퍼스의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니콜슨의 감독 첫 시즌 리그 순위는 18위로 강등을 면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다음 시즌인 1959-60 시즌, 데이브 매케이가 합류한 뒤 토트넘은 3위로 순위를 수직상승시켰다. 그리고 토트넘의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시기가 왔다.
1960-61 시즌, 토트넘은 리그와 FA컵에서 우승하여 팀 역사상 처음으로 더블을 차지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토트넘은 "원대한 목표를 갖고 더 전진하라!"[7]는 빌 니콜슨의 의지로 1961-62 시즌에는 AC 밀란에서 네레오 로코와 불화를 겪던 스트라이커 지미 그리브스를 영입했고 그는 토트넘의 역사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남았다. 1961-62 시즌 토트넘은 유러피언컵에서 4강까지 가는 파란과 함께 FA컵에서 두 번째로 우승했고, 1962/63 시즌 UEFA 컵 위너스컵 결승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5-1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토트넘의 컵 위너스컵 우승은 영국팀들 중 최초의 유럽대항전 우승이었다. 니콜슨은 이후에 팀을 리그 정상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재임기간동안 팀에 FA컵 우승 1회(1967), 리그컵 우승 2회(1971, 73), UEFA컵 우승(1971) 트로피를 남겼다.
그러나 감독 말년의 니콜슨은 선수들의 몸값 인상과 훌리건들의 행패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다. 1974년에 토트넘은 UEFA컵 결승에 다시 진출해 페예노르트와 우승컵을 놓고 격돌했다. 1차전 홈경기에서는 2-2 동점을 기록했으나 2차전 스타디온 페예노르트 원정에서 2-0으로 졌다. 그런데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한 스퍼스의 서포터들이 페예노르트 서포터들을 상대로 폭동을 일으켜버렸다. 니콜슨은 이 폭동으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고 1974년 9월, 리그컵에서 미들즈브러에 0대4로 대패하자 토트넘의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렇게 니콜슨은 선수에서 감독까지 38년간에 이르는 스퍼스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니콜슨은 토트넘의 고문으로 클럽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토트넘은 고문 자리대신 £10,000의 보상금으로 니콜슨과의 관계를 끊었다.
1975년 신년 서훈명단(1975 New Year Honours)에 올라 대영제국 훈장 4등급(OBE)을 받았다. 관보링크
2.4. 은퇴 이후
은퇴 이후 론 그린우드 총감독의 제안에 따라 니콜슨은 웨스트햄의 고문으로 잠깐 일했다. 그러다가 1976년에 토트넘의 새 감독이 된 버킨쇼의 요청으로 니콜슨은 고문 자격으로 친정팀에 돌아왔다. 그는 1991년까지 활동하며 글렌 호들, 게리 마벗 등 팀의 기둥이 될 만한 이들을 영입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했고, 1991년부터 팀의 명예 회장으로 일하다가 2004년 10월 23일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2003년에 니콜슨은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99년에 화이트 하트 레인 근처의 길이 '빌 니콜슨 웨이'로 명명되기도 했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3.1.1. 선수
- 노스플릿 유나이티드 FC[8] (1938)
- 켄트 세니어 컵: 1937-38
- 토트넘 홋스퍼 FC (1938~1955)
- 풋볼 리그 디비전 1: 1950-51
- 풋볼 리그 디비전 2: 1949-50
- FA 채리티 실드: 1951
3.1.2. 감독
- 토트넘 홋스퍼 FC (1958~1974)
- 풋볼 리그 디비전 1: 1960-61
- FA컵: 1960-61, 1961-62, 1966-67
- 리그컵: 1970-71, 1972-73
- FA 채리티 실드: 1961, 1962, 1967[9]
- UEFA컵: 1971-72
- UEFA 컵위너스컵: 1962-63
3.2. 개인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3 헌액
3.3. 서훈
- 대영 제국 훈장 장교(4등급) OBE: 1975
[1]
토트넘의 위성 구단
[2]
그도 선수 시절을 토트넘에서 보냈다.
[3]
전술의 모티브는 축구 초창기였던 1870년대부터 존재했다. 팀 동료에게 재빨리 공을 주고, 수비수를 지나 달려가서 리턴 패스를 받는 것이 메인이다. 이 전술에는 유동적인 선수의 위치와 책임감이 요구되고 템포에 맞춰 움직이는 방법으로
토탈 풋볼의 태동에도 영감을 주었다.
[4]
프리미어 리그를 포함한 잉글랜드 1부 리그에서 현재까지 승격팀이 바로 우승까지 성공한 사례는 1905-06 시즌의
리버풀, 1931-32 시즌의
에버튼, 1950-51 시즌의 토트넘, 1960-61 시즌의
입스위치 타운, 1977-78 시즌의
노팅엄 포레스트까지 총 5번에 불과하다.
[5]
니콜슨은 자신의 의무는 대표팀이 아닌
토트넘을 위해 컨디션을 맞추는 것이라고 하며 토트넘이 그의 봉급을 주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6]
결과론이지만 이때 토트넘의 선택을 못 받은 램지는 후에
잉글랜드의
FIFA 월드컵 첫 우승과
입스위치 타운의 성공을 이끌어 니콜슨 이상의 감독으로 평가받게 된다.
[7]
더 정확하게 기술하면 "스퍼스에 오는 선수는 빅 사이닝으로 왔건 그냥 그라운드 스태프이건 간에 경기와 클럽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성과에 결코 만족해서는 안 되며, 지는 것을 싫어해야 합니다.(Any player coming to Spurs, whether he's a big signing or just a ground staff boy, must be dedicated to the game and to the club. He must never be satisfied with his last performance, and he must hate losing.)"이다.
[8]
토트넘 위성 구단
[9]
공동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