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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전길남 全吉男 | Kilnam Ch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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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3년 1월 3일 (80세) |
일본 제국 오사카부 오사카시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컴퓨터과학자 |
분야 |
컴퓨터과학 정보통신학 |
학력 |
오사카대학 (
전기공학 /
학사) UCLA ( 컴퓨터공학 / 석사) UCLA ( 컴퓨터공학 / 박사)[1] |
경력 |
미국 록웰 인터내셔널(Rockwell International) NASA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 한국전자기술연구소 KAIST 전산학과 교수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특임교수 |
훈장 |
체육훈장 기린장 국민훈장 동백장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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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컴퓨터 과학자. 세계 3번째, 아시아 최초이자 대한민국의 인터넷을 최초로 개발한 인물로 위대한 업적을 정리할 수 있다.
1943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 대학을 졸업 한 후 미국 UCLA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컴퓨터 시스템 설계자로 일하다가 1979년에 한국으로 와서 한국전자통신연구원에서 일했다. 이후 1982년 ~ 2008년까지 KAIST에서 교수로 있었다.
2. 경력
2.1. 학술인으로서
1974년 UCLA의 컴퓨터공학과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링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1976년 NASA의 제트추진연구소에 입사했다. 보이저 1호, 보이저 2호가 제작될 시기에 시스템 엔지니어로써 활동했다.
미국에서 아파넷의 책임자였던 레너드 클라인락 교수 밑에서 수학했으며 이후 미국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던 중 한국이 한참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던 1979년에 입국하여 전자기술연구소 부장을 역임했다. 당시 정부는 해외에서 활동 중인 한국 과학자들을 파격적인 조건으로 스카우트 하고 있었는데[2] 전길남도 이때 입국했다.
원래 전길남은 단순히 컴퓨터 개발을 위해 전자기술연구소 컴퓨터 시스템개발부장으로 컴퓨터 국산화 프로젝트를 위해 초빙되었지만 네트워크 기술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알아채고선, 1979년, 전자기술연구소에 부임하면서부터 '시스템 개발 네트워크(System Development Network, SDN)'를 진행시켰다. 이후 1982년에 구미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를 연결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터넷 프로토콜 패킷 통신 네트워킹을 만들었다. [3] 1200bps로 매우 적은 데이터 양이지만 세계에선 세 번째로 이루어진 일이다. 즉, 한국을 전 세계 세 번째이자 일본도 앞선 아시아 최초의 인터넷 구축국가로 만든 것이다.[4]
독특한 점은 이 SDN을 운영한 방식이다. 연결을 희망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이상 대부분의 희망하는 대학과 연구소에 운영 체제와 지원을 제공했다. 1983년에 KAIST가 SDN에 연결되었다. 1984년에는 10곳, 1985년에는 20여곳으로 확장되었다.
여담으로 1980년대 중반, 서울과 부산의 헌책방 거리를 중심으로 이어지던 한국 오덕 문화[5]가 서울대와 KAIST 두 곳의 기숙사(...)를 중심으로 비로소 활짝 꽃피었던 것도 저 SDN 연결이 혁혁한 공(?)을 세운 덕이다. 일부 부잣집 자제들의 전유물이던 미국과 일본의 서브컬처 문화가 서울대와 KAIST 두 곳의 전산망을 통해 복제되어 공유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케텔- 천리안- 하이텔로 이어지는 초기 한국 PC통신망의 계보로 이어진다.
미국에서 라우터 기술을 공개하지 않자 소프트웨어로 독자적으로 라우터를 구축해 미국과 전산망을 연결했다. 1986년 8월, 한국의 SDN은 TCP/IP기반인 NSFNET에 접속하기 위해 필요한 IP 주소 블록 [6]을 할당받았다. 이시기에 한국의 국가 코드 도메인 네임 'kr'도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를 아시아 주변국에 전수함으로써 인터넷의 세계적 확산에 공헌했다. 1987년 아시아넷의 탄생에도 영향을 끼쳤다.
1984년 2월 싱가포르에서 열린 유네스코 워크숍에서 아시아넷을 구축하자는 제안을 시작으로, 이듬해 아시아넷 추진 모임이 만들어졌다. 기술 제공을 오스트레일리아가 필리핀을 맡고, 한국이 인도네시아를, 그리고 전길남이 인도네시아, 태국, 홍콩, 대만, 말레이시아를 담당해 아시아넷에 연결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인터넷 소사이어티에서 전길남을 인터넷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2012 명예의 전당 목록(Kilnam Chon) 전길남 박사 소개 페이지 그리고 이걸 뉴시스는 킬남 콘으로 개명해 적었다. # # pdf 버전 마지막 수정이 2016년이고 킬남 콘이라는 실수가 발견된 것이 최소한 2014년인데도 불구하고 # # 여전히 수정되지 않았다.
KAIST 교수 퇴임 이후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객원교수로 재임 중이며, 한국의 정보인권 단체인 오픈넷과 아프리카 인터넷 전반의 문제에 조언하는 아프리카 프로젝트 국제 모임에 참여하고 있다.
[정보화 리더십 탐구]③ 전길남 KAIST 명예교수...한국 인터넷과 벤처의 스승
네이버 캐스트:전길남
대한민국 인터넷 아버지 전길남 박사
2.2. 산악인으로서
뛰어난 산악인이다.- 1971년 미국 본토 최고봉 휘트니 산을 등정
- 1977년 북미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봉 등정
- 1978년 요세미티의 엘케피탄 암벽등반
- 1980년 마터호른 북벽 한국 초등자 등반대장[7]을 맡았으며 알프스의 3대 북벽인 마터호른 북벽, 아이거 북벽, 그랑드조라스 북벽을 모두 등반하여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훈받은 바 있다.
3. 기타
- 부인은 전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 조한혜정 교수이다.
- 아들은 카이스트 녹색성장지속가능대학원 전해원 교수이다( 관련 기사). 1998년경 고교 중퇴 후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경제학부에 일찍 진학해 화제를 모았고, KMTV에서 'VJ 해원'으로 활동하였다( 동아일보). 셰일가스와 기후변화 등에 대한 논문을 출간하였다( 경향신문, 중앙일보).
- 상기의 알파니스트로서의 업적으로서도 알 수 있듯, 나름 이름을 남긴 탐험가이기도 하다. 특히 1970년대 대한민국의 스쿠버 다이빙 초창기의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NAUI(National Association of Underwater Instructors)에서 한국인 최초로 강사자격을 취득하기도 했다.
[1]
박사 학위 논문 :
Optimal regulation policies for single and series reservoir systems = 단일&연속 비축 시스템의 최적 규정 방책에 관하여(1974).
[2]
전용운전기사에 자동차, 아파트까지 약속했다.
[3]
TCP/IP방식을 사용한 방식이다. 이때 서울대의 PDP11/44 중형 컴퓨터와 전자기술연구소의 PDP 11/70 중형 컴퓨터가 연결되었다.
[4]
진짜 두 번째 인터넷 구축국은
영국. 한국보다 9년 앞선
1973년 영국의 UCL이 미국의 ARPANet과 연결됐다.
[5]
주로 수입 서적을 통해 알려졌다.
[6]
128.134.0.0
[7]
원정대 부대장
[8]
다만 김정주는 당시에 넥슨 창업 때문에 전길남 박사 눈밖에 나버리면서 쫓겨나게 됐고
이광형 교수가 그를 거둬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