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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9:32:30

장수 이씨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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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水 李氏 (長川 李氏)
장수 이씨 (장천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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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05050> 관향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1]
비조 이알평(李謁平)
시조 이임간(李林幹)[2]
중시조 이을진(李乙珍)
집성촌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
경상남도 함안군
경상남도 하동군
경상남도 남해군
황해북도 금천군
황해북도 수안군
평안남도 평원군
인구 16,940명(2015년)

1. 개요2. 역사3. 분파4. 집성촌5. 항렬자6. 인물
6.1. 고려6.2. 조선6.3. 일제강점기6.4. 대한민국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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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수 이씨(長水 李氏)는 전북특별자치도 장수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2. 역사

파일:20231008_195750.jpg
장수이씨 시조 이임간 상상화

장수 이씨의 시조 이임간(李林幹)[3]은 원종 3년(1262)에 경주 이씨 이편(李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경술년(1310)[4]에는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원에 공경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천조(天朝)의 많은 군소제후(群小諸候)들이 엄하게 꾸짖자 상소로 음양(陰陽)과 화이(華夷)를 나누어 소통하여 다스리기를 진론(陳論)하였다. 또 말하기를 "황명을 비롯한 일을 제가 먼저 응보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황제가 이를 가상히 여겼고 만조(滿朝)[5]의 모든 현군(賢群)들이 아첨하지 않는 자들이 없었으며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 또한 없었다고 한다. 후에 귀국하여 장수현에서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결 800묘를 하사 받았다. 충선왕 때 평장사(平章事) 정승(政丞)[A]을 역임하였으며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에 봉해졌고 관향을 장천 이씨[7]라고 하였다.

2세 이원만(李元萬)은 이임간의 장남으로 충혜왕 때 소부(小府) 사복정(司僕正) 정승이었고, 평생토록 군신의 득실과 사람의 장단점 및 평치를 말하지 않으니 이름이 온세상에 알려졌고 늙어서는 두발이 희지 않았다고 전한다.

3세 이길상(李吉祥)은 이원만의 장남으로 군기시윤(軍器寺尹)을 역임하였고 공민왕 때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4세 이을진(李乙珍)은 이길상의 장남으로 고려 우왕 때 장수로 활동했다. 일찍이 통산군(通山君)[8]에 피봉되었으며, 시조 이임간의 장천부원군을 습봉하였다. 공민왕 때에는 문하시중을 역임했다고 전하며[9], 우왕 5년(1379)에 충주단양도병마사(忠州丹陽道兵馬使)를 거쳐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및 지문하사(知門下事)[B]를 지낸 뒤 우왕 11년(1385)에는 강릉도원수(江陵道元帥)를 역임하였다.

이렇게 4대가 정승을 역임하면서 집안은 한순간에 명문가가 되었는데 그러던 중에 우왕 14년(1388)에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  최영 요동정벌을 할 때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 휘하로 들어가 참전하였고 그후 이성계가 우왕을 폐위시키자 우왕을 복위시키려던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유배가거나 곤장을 맞았다. 조선 건국 이후에는 직첩이 회수되어 또 유배를 가게 되면서 연달아 정승을 역임하던 것은 이때 끝나게 된다.

5세 이종화(李從華)[11] 이종무(李從茂)는 각각 이을진의 장남과 차남으로 이 두 사람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시대에 활동한다. 이종화는 식년시 합격 후 승정원 주서(注書)를 역임하고 사간원에서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지군사(知郡事)[12]를 지냈다. 이종무는 고려말부터 아버지 이을진을 따라 무인으로서 활동을 이어왔으며 2차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4등구충대좌명공신(四等救忠戴佐命功臣)호를 받았다. 아버지 이을진의 장천부원군을 습봉하였으며, 대마도 정벌을 하는 등의 공적을 세웠고 세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치며 정종의 부마가 되면서 집안은 점점 커져갔다.

이종화의 손자 이임(李任)과 이종무의 장남 이승평(李昇平), 차남 이사평(李士平)은 세조의 즉위를 도와 원종공신이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이희급(李希伋)이, 병자호란 때는 이희계(李希啓)가 활약했다.

3. 분파

장수이씨의 파는 크게 이을진의 장남 이종화를 파조로 하는 정언공파(正言公派)와 이을진의 차남 이종무를 파조로 하는 양후공파(襄厚公派)로 나뉜다.

4. 집성촌

5. 항렬자

《장수이씨대동보(1998)》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재(在)○ ○호(鎬) 홍(洪)○ ○근(根) 용(容)○ ○기(基)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진(鎭)○ ○한(漢) 주(柱)○ ○희(熙) 지(址)○ ○종(鍾)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순(淳) 상(相)○ ○열(烈) 원(遠)○ ○상(相) 우(雨)○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집(集) 섭(燮)○ ○교(敎) 정(鼎)○ ○낙(洛) 주(柱)○
○칠(七)

인터넷에서는 이런 항렬자들이 떠돌아 다니는데 이유는 모른다.
17석 18세 19세 20세 21세
문(文) 신(臣) 재(在) 석(錫) 영(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환(煥)/찬(燦) 배(培)/기(基) 석(錫) 홍(洪) 조(早)
27석
두(斗)

6. 인물

나무위키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 과거 급제한 인물, 사원(祠院)[20]에 위패가 모셔진 인물, 공신, 독립운동가, 판서 이상의 직위에 있는 인물, 파시조(派始祖) 및 기타 유명인 등을 기재한다.

6.1. 고려

6.2. 조선


세대미상

6.3. 일제강점기

6.4. 대한민국


세대미상

7. 기타

1964년 이전《장수이씨세보》혹은 이삼로가 작성한 《고산실기》등에서는 3세 이길상과 4세 이을진의 항렬이 바뀌어져 있었다. 그래서 《국조방목》같은 기록을 보면 5세 이종화의 아버지가 3세 이길상으로 나오는 등의 오류가 있었지만 1998년 《장수이씨대동보》 기준으로 이것이 수정되었다.

1902년 장수이씨세보 이임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영천 이씨 이영간과 행적이 유사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이임간이 이영간(李靈幹)으로 이름을 바꾸어서 생긴 오류로 현재는 고쳐져 있다.

[1] 장천(長川)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장수군의 옛 이름이다. [2] 개휘(改諱)하여 이영간(李靈幹)이 되었으나 여러 문헌에서는 옛 휘를 쓴다. [3] 개휘해서 이영간(李靈幹)이지만 보통 초휘였던 이임간을 쓴다. 경주 이씨 족보에서는 이직간(李直幹)이라고도 하는데 이직간은 이임간의 첫째 형이다. [4] 《장수이씨대동보(1998)》에서는 병술년(1286)이라고 나오고 이임간유허비 등에서는 경술년(1310)이라고 나오는데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는 기록을 보면 경술년이 맞다. 왜냐하면 1310년 음력 1월 1일에 충선왕이 에 머물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5] 온 조정(朝政) [A] 고려사에는 기록이 없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정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7] 장천(長川)은 지금의 장수군으로 후에 장천 이씨는 후에 장수 이씨로 바뀌었다. 하지만 묘비에서는 장천이라고 많이 쓴다. [8] 차남 이종무는 이름이 비슷한 통원군(通原君)에 피봉되었다. [9] 족보의 기록으로 기타 사료에는 역임했다는 기록이 없다. [B] 문하부의 종2품 관직. [11] 《태종실록》 및 《세종실록》그리고 《국조방목》등에서는 이종화(李種華)라고 나온다. [12] 지금의 군수와 같은 관직. [13] 이종화가 사간원 정언을 역임하여 정언공파라는 이름이 붙혀졌다. [14] 이종무의 시호 [15] 장수 이씨의 본향이기도 하며, 이종무의 장남 이승평(李昇平)의 자손들이 많이 살고 있다. [16] 이종무를 따라 대마도 정벌에 참전한 뒤 돌아오면서 남해에 들어왔다고 전한다. [17] 집성촌이 된 계기가 황당하다. 장수 이씨 부부가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대도리에 밀려와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다. [18] 이종무의 묘가 이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이종무의 후손 또한 이곳에 많이 살고 있다. [19] 대표적으로 화가 이중섭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물론 당시 이중섭이 태어난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는 숙천군 송덕리가 되었다. [20] 사당(祠堂)과 서원(書院) [A] [22] 《장수이씨대동보(1998)》에서는 우왕 병진년(1376)에 급제하여 태조 병자년(1396)에 사망했다고 나오지만 국조방목의 기록을 보면 1396년이 맞다. [양후공파2세손] [C] 족보의 기록으로 조선왕조실록 등에서는 증직된 기록이 없다. [양후공파2세손] [C] [양후공파2세손] [C] [양후공파2세손] [정언공파3세손] [정언공파4세손] [32] 성화1년을유1월 일생원진사시방목에 의하면 아버지의 前 관직과 이름이 사직(司直) 이 임(李 任)인데 족보에서 이임의 관직이 사직이라고 나오며 거주지가 남해, 즉 장수 이씨 정언공파의 집성촌으로 나온다. 해당 방목에서는 본관이 미표기 되어 있지만 거주지와 아버지의 성명 및 직책을 미루어 보아 이수림이 맞다고 볼 수 있다. [정언공파5세손] [34] 초명은 이세걸이지만 연산군 때 이세걸과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이 있다고 하여 연산군이 직접 이충걸(李忠傑)로 개명시켜 주었지만 후에 이충순(李忠純)으로 강제 개명시켰다. [정언공파5세손] [양후공파5세손] [양후공파6세손] [정언공파7세손] [39] 그때 받은 공신녹권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정언공파] 8세손 [정언공파7세손] [정언공파7세손] [양후공파7세손] [양후공파8세손] [양후공파8세손] [정언공파8세손] [정언공파10세손] [양후공파12세손] [양후공파13세손] [양후공파21세손] [양후공파23세손] [정언공파15세손] [정언공파17세손] [54] 13회, 33회, 34회 역임 [정언공파18세손] [56] 10대, 12대 [정언공파18세손] [58] 본명 이영곤 [정언공파19세손] [양후공파29세손] [61] 본명 이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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