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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0:52

자오헝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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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호남성 성장
정체 趙恒惕
간체 赵恒惕
한국식 독음 조항척
영문 Zhao Hengti
염오(炎午)
이오(夷午, 彝五)
출생 1880년 1월 12일
청나라 호남성 형산현
사망 1971년 11월 23일 (향년 91세)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호남성장
재임기간
1920년 11월 23일 ~ 1926년 3월 11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호법전쟁2.3. 호남을 장악하다2.4. 호남 자치 선포와 쑨원의 북벌2.5. 담조전쟁과 호남자치의 실패2.6. 탕성즈의 집권과 몰락2.7. 말년
3. 주요 경력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호남성장을 지내며 호남성 헌법을 제정, 호남성 연성자치를 실시했으나 담조전쟁으로 세력이 쇠퇴했고 탕성즈의 도전으로 권좌에서 쫓겨났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0년 호남성 형산에서 태어났다. 과거 시험을 보아 거인이 되었으며 1905년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6년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후 1908년 일본육군사관학교 20기 포병과 6기를 졸업했다. 광서신군감독처회판, 광서신군 협통을 역임했고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리위안훙에게 좌익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중화민국 건국 이후 호남성장 탄옌카이의 요청에 따라 광서군을 이끌고 호남에 와 신해혁명 과정에서 5만명 규모로 폭증한 호남군을 해산시켰고 자오헝티 휘하의 계군은 위수군으로 편제되었다.

위안스카이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을 일으켜 전횡을 일삼자 1913년 계축전쟁에 참여하여 위안스카이 타도를 도모했으나 체포되어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호국전쟁이 일어나자 석방되었다. 이후 청첸 등과 함께 호국전쟁에 참여하여 1916년 장사에서 호남호국군 1군 1사단장에 추대되었고 호남을 다스리던 북양군벌 탕향명은 도주했다.

2.2. 호법전쟁

호국전쟁 이후 자오헝티는 다시 집권한 탄옌카이의 신임을 받게 되었는데 탄옌카이는 청첸계 부대를 숙청하는 한편 자오헝티 계열의 부대는 호남 군사력의 중추로 재편시켰다. 이로 인하여 호남군의 여러 사단이 해체되어 자오헝티 산하에 편입되었고 자오헝티는 2사단장이 되었다가 1917년 개편 과정에서 다시 1사단장이 되었다. 호남의 각 부대를 1개 사단, 1개 독립여단만 남기고 해산시키겠다는 돤치루이의 재병 계획에 대처하여 탄옌카이가 자신이 신뢰하던 자오헝티의 부대를 재병 대상으로부터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때 루디핑, 탕성즈, 예카이신(葉開鑫, 섭개흠) 등 훗날 상계군벌의 주요 인물들이 되는 장령들이 단장 및 영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1917년 부원지쟁 장훈복벽 끝에 쑨원이 광저우에서 호법정부를 수립하고 돤치루이가 이를 토벌하기 위해 호법전쟁을 일으킨 이후 안휘군벌의 푸량쭤가 호남독군으로 파견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탄옌카이 정권은 다시 붕괴되었다. 이 시기 자오헝티는 상중이라 부재 중이라서 푸량쭤는 손쉽게 호남군을 장악하고 호법군 토벌을 준비했다. 이에 임수매, 유건번 등이 반발하여 독립을 선언하고 청첸을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푸량쭤는 장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임수매와 유건번을 토벌하려 했으나 자오헝티가 독립을 선포하고 호법에 가담하여 푸량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결국 11월 하순, 자오헝티, 청첸, 유건번, 임수매가 장사를 점령했다.

하지만 1918년 1월 차오쿤이 지휘하는 직예군벌 소속의 3사단과 5개 혼성여단이 남하하고 장징야오가 7사단을 이끌고 악주를 공격하면서 호남은 16만이나 되는 북양군벌의 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3월에 악주, 장사가 함락되고 호남군은 퇴각길에 올랐다. 이에 자오헝티는 유건번 등과 힘을 합쳐 우페이푸의 정예군 대신에 상대적으로 약한 산동군과 봉천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우페이푸의 남진에 결국 퇴각길에 올라야 했는데 돤치루이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많았던 우페이푸가 정전하면서 전멸의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이후 1918년 장징야오가 독군에 부임하면서 호남은 다시 북양군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3. 호남을 장악하다

1919년 6월, 청첸이 북양군벌과 결탁했다는 혐의를 받고 실각하면서 자오헝티는 청첸의 병력을 흡수했다. 1919년 7월 탄옌카이가 상군총사령 겸 호남독군에 취임하면서 호남에서는 수탈을 일삼는 장징야오 타도 운동이 벌어졌다. 1920년 우페이푸 쉬수정, 취퉁펑의 변방군 견제를 위해 북상하기 시작하면서 호남군벌들은 이를 틈타 장징야오 정권을 붕괴시키고 호남에서 장징야오를 완전히 축출시켰다. 강력한 군공을 세운 자오헝티의 위세는 크게 상승했다. 이를 경계한 탄옌카이는 각 여장 및 각 구역의 책임자들을 자신의 심복으로 임명하여 자오헝티를 견제하려고 했고 자오헝티는 단장급 군장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포섭작업을 하면서 맞섰다. 이때 탕성즈, 예카이신 등이 자오헝티의 심복이 되었고 자오헝티는 상군의 최대 실력자가 되었다.

1920년 11월, 청첸계 장령들이 봉기한 평강정변이 일어나 탄옌카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오헝티는 지지를 촉구하는 탄옌카이의 요구를 묵살하며 중립을 취했다. 결국 11월 23일 탄옌카이가 하야하자 자오헝티는 상군총사령관 직을 계승했다. 청첸계 장령들은 탄옌카이를 몰아낸 여세를 몰아 자오헝티까지 몰아내려 했으나 자오헝티는 탄옌카이 계파와 합세하여 12월 24일 청첸계 장령 8명을 처형하여 청첸계를 완전히 숙청했다. 이후 탄옌카이 세력들은 모두 자오헝티에게 복속되어 공식적이며 실질적인 호남의 최고통수권자가 되었다.

자오헝티는 군사개혁을 실시하여 1여단과 3여단을 각각 1사단과 2사단으로 확대개편하고 2단, 4단은 1혼성여단으로 병합하였으며 각 병단을 2혼성여단으로 통합했다. 하지만 탄옌카이의 잔여 세력이 각 지방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안심할 수는 없었으며 자오헝티가 호남성을 장악하였을 때 호남성에서는 연성자치론과 평화통일론이 동시에 주장되고 있었다. 자오헝티의 권력기반은 연성자치론자들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자치를 선포했다간 다른 군벌들의 어그로가 끌려 다구리 맞기 딱 좋은 판이었으므로 자오헝티는 이를 절충하여 성헌제정, 재정사무의 군민분치, 서남연합파 군벌과의 연합전선 결성이라는 방면으로 나아갔다.

자오헝티는 호남제헌주비처를 설립하여 연성자치론을 주장했으나 연성자치론의 급진화를 차단하고 자신이 연성자치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1921년 4월 호남성헌초안이 완성되면서 자오헝티는 호남성 의회에서 호남독군에 선출되었고 11월 호남성장이 되었다. 1922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호남성 헌법이 공포되었다. 또한 군민분치의 명분에 따라 행정사무를 성장이 맡을 것이며 군인이 이에 간섭하며 또다시 정변을 일으게 하지 말 것을 각 사령들에게 통전했다. 이를 위해 1921년 1월 군관들의 추천을 요구하는 의무규정을 삭제하는 등 군인들의 정치적 권력을 축소했다. 또한 1921년 3월 재정선언을 발표, 군인들의 수탈과 징수사무에 대한 간섭을 막고 재정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또한 사천의 류샹과 광동의 천중밍과 연합하여 소요에 공동대처하자는 군사동맹을 수립했다. 그리고 쑨원이 1921년 봄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기존 군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를 버리고 명백히 반대했는데 이는 쑨원의 북벌을 반대하는 천중밍과의 연계 때문이었다. 또한 호북독군 왕잔위안 축출을 위한 호북자치운동을 원조하기 위해 1921년 7월 20일 호북자치전쟁에 참전하여 성외 진출을 주장하는 군부의 욕구를 해소하고 호남성을 단합하고자 했다. 그리고 8월 11일 한커우 등지에서 성자치와 연성정부 수립을 위한 국민대회 소집을 주장하는 전문을 전국에 통전했다. 하지만 호북자치전쟁에서 호남군은 우페이푸에게 패배하여 자오헝티의 영향력은 도리어 축소되었다.

2.4. 호남 자치 선포와 쑨원의 북벌

호북자치전쟁에서 패한 이후 우페이푸와 체결한 평화조약에 따라 악주에 직예군벌이 주둔하여 호남은 직계의 감시 아래에 들어갔다.

토비와 패잔병들이 약탈을 벌여 호남성이 혼란해지자 호남의 연론은 자오헝티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며 호남개조를 요구했다. 1921년 9월 18일, 공인단연합회가 <호남각공단촉행헌법대회>를 열고 군대를 1만명 규모로 감축하며 성헌 중 인민의 기본권 조항과 군사 조항을 앞당겨 시행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또한 공단 대표들은 재병위원회를 설치해 재병을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학계가 호응하여 쌍십절 시민대회에서 시민운동이 정점을 이루었다.

이러한 압박 때문에 자오헝티는 1922년 1월 1일 호남성헌법을 공포하고 호남이 남북정부로 이탈한 자치성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이어 성헌에 따라 성의회를 구성하고 9월에 자오헝티를 정식 성장으로 선출하여 성무원 내각이 구성되었다. 1월 14일 자오헝티는 연성자치야 말로 시대를 구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침임을 확인하고 경제개발과 재병을 실시하겠으나 1만명 규모로의 감축은 대내외 정세상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며 성헌의 실질화, 내실화를 주장하며 투쟁을 전개하는 학생들의 정치참여에 대해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 상황에서 쑨원까지 북벌을 추구하면서 대표를 파견해 호남의 북벌 참여를 독려했다. 자오헝티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으며 악주에 주둔한 직군의 동요까지 걱정하여 천중밍과 연계하는 한편 호남의 각 공단으로 하여금 북벌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쑨원은 자오헝티에게 호남군이 스스로 악주로 출병하여 직군을 몰아내거나 북벌군과 같이 강서로 출병한다면 호남 대신에 강서로 진출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에 자오헝티는 차오쿤 우페이푸에게 쑨원 군대를 호남에 들이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직군의 철수를 요구했으나 직계는 거절했다. 이에 자오헝티는 호남성 먼로주의를 표방하며 직계와 교섭하는 한편 쑨원에게 강서로 북벌하라고 설득했다.

1922년 2월 3일, 쑨원이 전식으로 북벌 동원령을 내리자 호남의 인사들이 북벌 중지를 호소하는 시국건의를 발표했고 각 공단도 호응했다. 결국 쑨원은 강서로 진군하게 되었으나 쑨원은 지속적으로 호남의 참여를 요구했다. 5월 10일 자오헝티는 장사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해 북벌 참여, 북방 가담, 중립을 묻는 투표를 실시했고 장령들은 대다수 북벌에 찬성하여 탄옌카이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여 같이 북벌할 것을 강요했다. 자오헝티에게는 다행으로 1922년 6월 영풍함 사건이 일어나 쑨원이 몰락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 와중에 우페이푸가 구국회와 약법 회복을 선포하자 자오헝티는 7월 1일 '동전'을 발표, "법통회복의 의와 국회의 자유집회는 훼손될 수 없는 것이며 (...) 시세의 요구에 상응하는 것이다. (...) 국가 백년의 대계는 제일 먼저 국헌을 완성하고 각성에 자유제헌의 권한을 부여하여 성헌의 대강을 국헌 안에 편입시켜야 한다."라고 찬성을 표하며 호남성헌이 호남을 중화민국의 자치성으로 규정하였을 뿐 국헌에 저촉되지 않았음을 강조하여 자신이 통일을 방해하며 자치를 명분으로 사익을 추구하려 한다는 비난에 대해 해명했다. 우페이푸는 회답을 보내 자오헝티의 연방제를 비판했지만 어디까지나 방법론의 차이 정도에 불과했고 이후 자오헝티는 차이허썬 등에게 자치를 포기하려 한다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직예파에 접근하였다.

이 시기 자오헝티는 상하이의 탄옌카이를 회유하여 호남에 돌아오게 하려 했으나 탄옌카이는 북양정부의 내무총장직 제의를 거절하고 영풍함 사건 이후 상하이로 오게 된 쑨원을 만나 가을에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이 시기에 호남성에는 성장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탄옌카이는 친담파 의원들과 정객들의 추대를 받아 호남성장에 출마했다. 1922년 8월 상중선후협회와 상중의원구락부는 성장후보로 탄옌카이 등 6인을 추대하였다. 선거 결과 자오헝티가 당선되었으나 1922년 호남성장 선거는 호남에서 탄옌카이 세력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탄옌카이는 1923년 광저우로 이동하여 대본영 비서장 겸 건설부장에 임명되었다. 이로 인하여 호남에 잔류한 탄옌카이 세력이 국민당의 영향을 받게 되었으며 학계와 공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오헝티를 천중밍과 우페이푸의 교량 역할로 비판하던 중국공산당도 1924년 1차 국공합작으로 국민당과 연계되어 자오헝티 정권을 더욱 위협하게 되었다.

2.5. 담조전쟁과 호남자치의 실패

마침내 1923년 6월, 세금 수취 문제로 탄옌카이 파 장령들이 아편에 대한 세금 문제로 타조군을 조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자오헝티는 토벌령을 내리고 군사적 대응을 하려 했으나 호남에서 재집권을 노리던 탄옌카이는 호남성장 겸 상군총사령의 자격으로 호남에 출병하였다. 탄옌카이 파 장령들이 속속 탄옌카이에게 합류하면서 자오헝티는 최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자오헝티는 스스로 호헌총지휘에 취임하여 탄옌카이와 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8월 31일, 자오헝티의 주력부대가 탄옌카이에게 투항하면서 자오헝티는 장사를 잃고 북으로 퇴각하고 탄옌카이가 장사에 입성하자 탄옌카이의 장사 입성을 환영하는 시민대회가 열렸다.

자오헝티는 반격을 가해 9월 13일 장사를 탈환했으나 화의가 결렬되고 중립을 지키던 루디핑이 탄옌카이에게 합류하면서 자오헝티는 이대로 몰락하는 듯 했다. 결국 자오헝티는 우페이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우페이푸는 악주에 양호경비총사령부를 설치하여 탄옌카이를 축출하고 자오헝티 정권을 회복시켜주었다. 세력을 회복한 자오헝티는 탄옌카이 파에 대한 철저한 숙청을 감행하고 탄옌카이에 합류한 군장과 의원들을 제명했다. 또한 탄옌카이에게 지원을 했던 상회에 대해 탄압을 가해 상회 회장과 부회장을 재선을 요구했다. 그리고 학생과 노동자 단체들에 대해 기존의 유보적인 입장을 버리고 가혹한 유혈탄압을 가했다.

자신의 생존을 도운 직군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받게 된 것은 물론이었다. 우페이푸는 자오헝티에게 호남자치 취소를 강요했고 1924년 4월 직계 장령들이 호남성헌을 공격하면서 자오헝티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결국 자오헝티는 1924년 4월 15일 성헌은 유지하되 개헌여부를 민의에 따르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아 11월 20일 성헌을 개헌했다. 이에 따라 1923년 회선 사건 이후 발표된 차오쿤 헌법에 호남성헌이 편입되어 호남의 독립적 지위는 크게 약화되었다. 이로 인해 호남의 연성자치운동은 실질적으로 완전히 몰락했다. 자오헝티는 1924년 북경정변 이후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들어서자 1925년 선후회의 회원에 임명되었다.

2.6. 탕성즈의 집권과 몰락

한편 호남성에서는 국민당의 세력이 강화되고 있었는데 1925년 5월 25일부터 6월 1일까지 국민당 호남성당부 1차 전성대표대회가 열려 국민당 호남성지부가 설립되었고 5.30 사건 이전까지 2700명 규모의 당원이 확보되어 8월에 21개 현에 당부가 설립되고 당원수는 5천명을 돌파했다. 이 시기 담조전쟁 중에 바오딩 군관학교 출신 군관들을 규합하여 자오헝티를 지원했던 탕성즈가 두각을 보였다. 담조전쟁 이후 탕성즈는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정규 4사단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계양, 영흥 등 상남 지방을 장악하여 지역 소군벌들을 흡수,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자오헝티의 측근 정치와 군사개혁에 불만을 품은 탕성즈는 국민당에 복종하는 계계군벌 리쭝런, 바이충시, 황샤오훙과 합작하여 국민당에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계계군벌은 탕성즈에게 자오헝티를 대신하라고 부추겼다. 여기에 국민당 호남성집행위원회가 탕성즈에게 합작을 촉구하였고 이에 탕성즈는 연합전선 참가를 타진하고 국민당이 송금한 군비를 받았다.

5,30 사건 이후 호남에서 북벌, 반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학생, 노동운동을 탄압한 자오헝티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다. 1926년 3월 9일, 국민당 호남성 당부는 3만명 규모의 시민대회를 개최하여 자오헝티 타도를 요구했다. 탕성즈가 노골적으로 병력을 집결시키며 장사 진격을 준비하자 자오헝티는 3월 11일 탕성즈에게 호남성장과 내무부장 자리를 대행시키고 장사를 떠나 거의 6년 만에 호남성의 지배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어려운 시국을 맞아, 군사, 치안, 재정 문제에 아무러 대책을 내지 못하고 물러날 것을 결심하였으니,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호남이 성헌을 제정한 것은 원래 국내의 분규를 해결하고 지킬만한 법을 만들고자한데 있었으며 이에 근거해 본인이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금년 6,7월 개선 기일이 가까워짐에 인민들이 그동안 감정에 치우쳐 선거에서 연임하는 상황을 염려하니 수락한다면 인민들에게 고통을 증대시키는 일이 될 것이고,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또한 헌법을 어기는 일이 될 것이므로 개선이 임박하여 사직을 앞당기는 것이다. 둘째, 외부에 연치가 사익을 위한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본인이 일찍 사퇴함으로써 국내 인민들에게 연치법도가 상대적으로 우월하고 함께 이 길을 쫓으면 국가는 화평통일을 이룰 수 있음을 명백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본인이 떠난 후 헌법규정에 의거해서 제4사단장 탕성즈를 내무부장으로 임명하고 성장의 직권을 대행하도록 한다. 탕성즈가 상남에서 거둔 업적에 대해서는 모두 알고 있는 바이고 호헌애민하고 일을 처리함에 주도면밀하니 취임 후 정치가 궤도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탕성즈가 호남성헌법 53조에 따라 3월 26일 성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우페이푸로부터 토역연군상군총사령관에 임명된 예카이신이 탕성즈를 공격하게 되면서 호남내전이 벌어졌다. 5월 초, 예카이신은 창사를 점령하고 자오헝티 복직 운동을 벌였으나 이미 정권 탈환의 뜻을 단념한 자오헝티는 예카이신의 복직 요청에 응하지 않고 봉천군벌의 수령 장쭤린에게 몸을 의탁했다.

2.7. 말년

국민혁명 이후 상하이에 거주하다가 중일전쟁 중에 국민당 군사위원회 상장군사참의관(上將軍事參議官), 1945년 호남성 의회 의장을 역임했으며 1948년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청첸을 중화민국 부총통으로 지지했다. 국부천대 이후 국민정부를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1951년 총통부 국책고문, 총통부 자정을 역임했다.

1971년 사망했다.

3. 주요 경력

호남성 역대 지방장관
3대 호남독군 상군총사령관 겸 호남독군[1] 민선 호남성장
탄옌카이 자오헝티
( 1920년 11월 23일 ~ 1922년 10월)
자오헝티
상군총사령관 겸 호남독군 1대 호남성장[2] 2대 호남성장
자오헝티 자오헝티
( 1922년 10월 ~ 1926년 3월 11일)
탕성즈

4. 참고문헌

5. 관련문서


[1] 호남독군 당선은 1921년 4월. [2] 1922년 1월 호남성 성헌 발표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