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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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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민해방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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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 사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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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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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원) 초대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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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제7대 제8대
주룽지 리란칭 황쥐
제9대 제10대 제11대
리커창 장가오리 한정
제12대
딩쉐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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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제1ᆞ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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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천윈
린뱌오 펑더화이 덩샤오핑
덩쯔후이 허룽 천이
우란푸 리푸춘 리셴녠
제2기
천윈
린뱌오 펑더화이 덩샤오핑
덩쯔후이 허룽 천이
우란푸 리푸춘 리셴녠
녜룽전 보이보 탄전린
루딩이 뤄루이칭 시중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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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
(제3ᆞ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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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윈 덩샤오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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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푸춘 리셴녠 탄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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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구이셴 왕전 위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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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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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1949년-1954년)
주더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청첸 린뱌오
가오강 류보청 허룽
천이 뤄룽환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주석
(1954년-1975년)
주더
(제1기)
펑더화이
(제1ᆞ2기)
린뱌오
(제1ᆞ2ᆞ3기)
류보청
(제1ᆞ2ᆞ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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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ᆞ2ᆞ3기)
천이
(제1ᆞ2ᆞ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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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ᆞ2ᆞ3기)
예젠잉
(제1ᆞ2ᆞ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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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차이팅카이
(제2ᆞ3기)
뤄루이칭
(제3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1983년-)
쉬샹첸
(제6기)
예젠잉
(제6기)
양상쿤
(제6ᆞ7기)
자오쯔양
(제7기)
류화칭
(제8기)
츠하오톈
(제8ᆞ9기)
장완녠
(제8ᆞ9기)
후진타오
(제9ᆞ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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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ᆞ11기)
차오강촨
(제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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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ᆞ11기)
시진핑
(제1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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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기)
쉬치량
(제12ᆞ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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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ᆞ14기)
허웨이둥
(제14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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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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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1937년-1949년)
주더
(제6ᆞ7기)
저우언라이
(제6ᆞ7기)
왕자샹
(제6ᆞ7기)
류사오치
(제6ᆞ7기)
펑더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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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1954년-)
린뱌오
(제8ᆞ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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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ᆞ9ᆞ10ᆞ11ᆞ1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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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ᆞ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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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ᆞ9ᆞ10ᆞ1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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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ᆞ9ᆞ10ᆞ11ᆞ12기)
예젠잉
(제8ᆞ9ᆞ10ᆞ11ᆞ12기)
덩샤오핑
(제10ᆞ11기)
양상쿤
(제12ᆞ1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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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ᆞ1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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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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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웨이둥
(제20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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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국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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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펑더화이 린뱌오 예젠잉
제4대 제5대 제6대
쉬샹첸 겅뱌오 장아이핑
제7대 제8대 제9대
친지웨이 츠하오톈 차오강촨
제10대 제11대 제12대
량광례 창완취안 웨이펑허
제13대 제14대 제15대
리상푸 둥쥔 - }}}}}}}}}}}}}}}
<colbgcolor=#ce1126><colcolor=#ffde00>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제2대 국방부장
린뱌오
[ruby(林, ruby=Lín)][ruby(彪, ruby=Biāo)](林彪, 임표) | Lin Biao
파일:Lin_Biao_in_NRA_uniform.jpg
본명 린위룽 (林育蓉, 임육용, Lín Yùróng)
출생 1907년 12월 5일
호북성 황강
(現 중국 후베이성 황강시)
사망 1971년 9월 13일 (향년 63세)
몽골 인민공화국 온드르항
(現 몽골 헹티주 온드르항)
묘소 수브라가 계곡
재임기간 제2기 국무원 부총리
1954년 9월 29일 ~ 1959년 4월 27일
제3기 국무원 부총리
1959년 4월 27일 ~ 1965년 1월 3일
제4기 국무원 부총리
1965년 1월 3일 ~ 1971년 9월 13일
제2대 국무원 상무부총리
1954년 9월 28일 ~ 1971년 9월 13일
제8기 중앙위원회 부주석
1958년 5월 25일 ~ 1969년 9월 6일
제2대 국방부장
1959년 9월 17일 ~ 1971년 9월 13일
제9기 중앙위원회 부주석
1969년 9월 6일 ~ 1971년 9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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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e1126><colcolor=#ffde00> 양춘 (阳春)
부모 아버지 린밍칭
어머니 린첸
자녀 장남 린리궈
장녀 린샤오린
차녀 린리헝
학력 황포군관학교
종교 무종교 ( 무신론)
최종 계급 원수 ( 중국 인민해방군)
주요 참전 제1차 국공내전
중일전쟁
제2차 국공내전
중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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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초기이력2.2. 국공결렬 이후2.3. 항일전쟁 및 제2차 국공내전2.4. 1950년대2.5. 국방부장 취임 및 문화대혁명2.6. 쿠데타 음모 및 죽음
3. 평가4. 주요경력5. 가족6. 기타7. 매체에서8. 참고문헌

[clearfix]

1. 개요

중화민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인, 정치가.

2. 생애

2.1. 초기이력

1907년 후베이성 황강의 방직공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졸업 이후 1924년 공산당원인 사촌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1925년 겨울 황푸군관학교에 입학하면서 군문에 들었다.[1][2] 1925년 말에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군관학교 졸업 이후 공산당원 예팅의 연대에 배속되었다. 1926년 7월, 중국국민당 소속으로 국민당의 1차 북벌에 참여해 공을 세우면서 고속승진해 나갔다. 소대장이었던 계급이 불과 몇 달만에 대대장에까지 올랐고 이듬해에는 대령까지 진급했다.

파일:external/www.sjsu.edu/linbiao1.png

2.2. 국공결렬 이후

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 점령 직후 공산당원을 대거 학살하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킨 후 우한마저 분공을 결정해 국공결렬이 일어나자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난창에서 공산당의 난창 폭동에 가담했지만 중과부적으로 패배했다. 이후 주더와 함께 유랑하다가 정강산 투쟁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마오쩌둥을 만났고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펑더화이와 함께 홍군 최고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렸다. 이후 강서 소비에트로 건너가 국민정부 초공작전이 시작되자 1930년의 제1차 초공작전에서 담도원의 병력을 섬멸시켰으며 1931년의 제2차 초공작전, 제3차 초공작전에서도 활약했고 1932년부터 1933년까지의 제4차 초공작전, 1933년에 시작된 제5차 초공작전 중에 활약했으나 5차 초공작전에서는 결국 중과부적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이후 대장정에 참여해 옌안까지 가게 된다.

2.3. 항일전쟁 및 제2차 국공내전

2차 국공합작이후, 1937년 9월 린뱌오는 팔로군 115사단장이 되어 산시성 핑형관에서 일본군 제5사단 21연대 소속 치중부대를 매복공격해 궤멸시키는데 이것이 백단대전과 함께 공산당의 양대 승전으로 유명한 평형관 전투다. 하지만 핑싱관 전투 자체는 엄청난 승리로 언론에 선전된 것과 달리 공산당의 전과가 그렇게 보잘것 없었고 이런 핑싱관 전투 규모의 싸움조차 공산당은 후에 벌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38년, 말을 타고 국민당군의 수비 지역을 지나가다가 그를 일본군으로 오인한[3] 국민당군 초병의 사격으로 큰 부상을 입고 옌안으로 후송되었다가 치료를 위해 모스크바까지 간뒤 1942년까지 요양해야 했다.[4] 이후 부상 후유증[5]으로 전선에서 활약하지는 못하고 항일군정학교와 중앙당교의 교장으로 일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 일어난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은 본부인 옌안이 함락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린뱌오가 다시 전선에 투입되어 동북항일연군을 개편한 둥베이 인민해방군의 총사령관을 맡아 1948년 만주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린뱌오는 1948년 10월, 창춘 공방전에서 창춘에 농성중인 국민당군을 포위했는데, 포위망에서 민간인 피난민의 도피를 막으면서 식량이 떨어지게 하는 전법을 사용하여 민간인 아사자가 수만 명이 발생했고,[6] 식량이 떨어진 국민당군은 결국 항복했다. 이렇게 되자 국공내전은 공산당쪽으로 흐름이 기울게 되었고 린뱌오는 100만 대군을 이끌고 1949년 베이징을 함락시킨데 이어 1950년에는 광시성까지 내려가 장제스 대만으로 쫓아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 공으로 린뱌오는 당과 군에서 고위직에 올랐지만 부상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크게 활약하지는 못했다.

2.4. 1950년대

그러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중국의 참전에 관여하였던 총참모부 작전참모 뇌영부는 회고록에서 린뱌오가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낙점받았음에도 참전에 결사반대했으며 칭병하여 모스크바로 달아났다고 썼고, 많은 학자들이 그의 회고록을 인용하면서 이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이 때문에 1971년에 비명횡사한 후에는 우직한 펑더화이와는 다르게 병을 핑계로 모스크바로 달아난 비겁한 인간이라는 매도도 당했다. 39군 군장 오신천의 회고록에도 마오쩌둥이 원래 만주에서 4야전군을 지휘하여 한반도 사정을 잘 아는 린뱌오를 보내려 했지만, 병 때문에 보내지 못했다고 쓰고 있다. 린뱌오의 부하로 4야전군의 참모들인 홍학지, 두평, 섭자용 역시 펑더화이가 린뱌오는 소련에 가야 했고 마오쩌둥이 결정적인 순간에 펑더화이 밖에 없다고 자신을 지목했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7]

하지만 중국 문서고의 비밀자료들이 공개되면서 이러한 주장에는 의문점이 생겼다. 우선 마오쩌둥이 사령관으로 지목한 인물이 린뱌오가 아니라 대만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제3야전군의 쑤위(粟裕)로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쑤위가 병을 이유로 사령관 지명을 거절하자, 마오쩌둥은 병은 휴양해서 치료하면 그만이니 속히 베이징으로 오라고 재촉했다. 하지만 쑤위가 아프다는 것은 구라가 아니었고, 고혈압, 위장병, 메니에르병을 앓던 쑤위는 얼마 못 가 쓰러져서 칭다오의 병원으로 실려갔다. 이걸 본 마오쩌둥은 7월 17일, 쑤위의 사령관 임명을 철회했다. 이 때문에 동북군관구 사령관 가오강이[8] 임시로 동북변방군을 지휘하게 한 다음에 야전군 사령관급 경험이 있는 장령들을 물색하였다. 앞서 언급된 쑤위와 더불어 린뱌오와 쉬샹첸은 와병 중이라서 지휘가 불가능했고, 류보청은 육군대학을 설립하는 중이라서 임명이 불가능했으며, 천겅은 이미 베트남에 파견되어 호치민을 돕고 있었다. 즉, 남은 후보는 펑더화이밖에 없었다. 결국 8월 27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베이징에 와서 시국 대처를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린뱌오의 병세로 말할 것 같으면 중국 자료와 소련 자료에서 모두 교차검증이 되는데, 두통, 요통, 불면증에 시달리며 빛과 바람도 무서워하는 괴증상을 보였으며, 조용하면 잠을 못자서 그를 차에 태우고 시끄러운 자갈길에서 차를 달려야 겨우 잠들었다고 한다. 그의 병세가 위중하여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뤄룽환, 황커청 등이 모두 자주 문병왔을 정도다. 결국 치료를 위해 소련 의사들을 초빙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급기야 린뱌오를 직접 소련에 보냈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스탈린의 승인이 필요했으므로 린뱌오의 소련행은 중국의 파병이 결정되기 전부터 정해진 것이었다. 션즈화 교수는 린뱌오가 참전에 반대했을 가능성은 높다고 보지만, 문제는 린뱌오 말고 다른 장군들도 다 반대했고, 심지어 펑더화이도 가슴이 아프지만 장비의 차이가 너무 심하여 조선이 망하게 둘 수밖에 없다고 처음엔 반대론을 펼쳤다. 그리고 정작 린뱌오는 마오쩌둥이 참전을 결정하자 파병 계획에 적극 관여하였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는 자신이 북한에 파견될지도 모른다면서 우한에 있던 참모들을 베이징으로 소환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오쩌둥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옳다고 찬양하던 성격의 린뱌오가 마오쩌둥이 참전을 결정했는데 망할 일 있냐고 쇠고집으로 버텼다는 것부터가 린뱌오의 성격을 고려하면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최종적으로는 참전할 사정이 되었던 펑더화이가 사령관으로 낙점되었다.[9]

6.25 전쟁 이후에도 린뱌오는 1950년대 내내 특별한 돌출행동 없이 은인자중하는데, 여기에는 가오강(高崗) 사건도 영향을 마쳤다. 국공내전은 물론 6.25 전쟁 기간에도 후방 병참기지로 동북지방을 잘 관리하여 '동북왕'으로 위세를 떨친 가오강은, 1953년에 당과 군부 인사들을 포섭하여 류사오치를 밀어내고 정권을 잡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때 덩샤오핑과 함께 포섭을 제안받은 천윈 마오쩌둥에게 이 사실을 밀고하여, 가오강은 오히려 역공을 받고 권총자살을 시도한 뒤 1954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최초의 숙청인 가오강-라오수스 사건으로 비화된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국공내전기 동북에서 교분이 깊었던 린뱌오에게 가오강과 한패인지 추궁했고, 린뱌오는 마오쩌둥에게 굳건한 충성을 맹세하면서 겨우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니 마오쩌둥의 성격을 잘 아는 린뱌오로서는 바짝 몸을 낮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파일:external/www.chinatoday.com/cpc_9th_congress_mao_lin.jpg
마오쩌둥과 린뱌오

1955년 인민해방군이 계급제도를 도입하자 그간의 공적을 인정받아서 10대 원수에 임명되었다. 10명의 원수를 한번에 임명했기 때문에 10대 원수라고 부른다. 린뱌오 이외에 나머지 9명은 주더, 펑더화이, 류보청, 허룽, 천이, 뤄룽환, 쉬상첸, 녜룽전, 예젠잉.

가오강과 라오수스 사건 이후 정치국에 결원이 생기자 1955년 4월, 7기 5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56년 9월, 8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유임, 1958년 5월, 8기 5중전회에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및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승진하였다.

2.5. 국방부장 취임 및 문화대혁명

건강 때문에 정치나 군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지 않던 린뱌오는 1959년 루산회의(庐山会议)에서 펑더화이가 몰락하자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루산회의에서 린뱌오는 펑더화이가 흐루쇼프의 첩자라고 암시하는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펑더화이에 따르면 나는 순장(인민공사, 토법고로 등등)을 일삼아 후손이 끊어진 처지나 다름 없네? 펑더화이 때문에 내 아들이 조선에서 죽었고 남은 아들 하나는 미치광이다!" "펑더화이는 수정주의에서 고작 3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수준의 폭언까지 쏟아붓던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더욱 총애하게 된다. 마오쩌둥은 자신을 비판한 펑더화이를 축출하고 펑더화이가 맡던 국방부장직을 린뱌오에게 주게 된다. 이때부터 린뱌오는 마오를 잘 잡아야 권력이 온다라는 신념이라도 생겼는지 본격적으로 마오의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이 당시 그가 마오쩌둥에게 아첨하기 위해 펴낸 책이 그 유명한 마오쩌둥 어록[10]이다. 이 서문에서 린뱌오는 "마오쩌둥 주석은 천재이며, 그의 한마디는 다른 사람의 만마디의 말에 맞먹는다."라는 소리를 했다.

이런 가운데 1962년 중국과 인도 사이에 국경분쟁( 중인전쟁)이 발생하고 양측이 충돌하자 린뱌오는 다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해 인도군을 격파했다. 린뱌오는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 이후에도 오글거릴 정도의 마오쩌둥 숭배를 멈추지 않는 인물이었으며 마오쩌둥의 견해는 계속해서 추종하였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의 후계자로서 실권을 발휘하고 싶었던 류사오치는 린뱌오를 제거하기 위해서 허룽 및 뤄루이칭과 연합하려 했고 린뱌오가 곧 국방부장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암시하는 발언을 하였다. 마오쩌둥은 이를 포착하고 린뱌오와 연합하여 류사오치를 회칠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5년 해서파관 사건을 계기로 문화대혁명이 발발하자, 린뱌오는 재빨리 문혁파의 선두에 서서 당내의 마오 반대파에 대한 공격에 앞장섰다. 린뱌오는 "해서파관의 저자 우한은 마오주석에 반대하는 반동이며, 그를 옹호하는 자들 역시 모두 반동이다"라며 베이징 시장 펑전을 비롯한 베이징 시 당위원회와 베이징 대학 당위원회, 문화혁명 오인소조를 공격했다. 1966년 8월, 중국공산당 제8기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유일한 부주석으로 선출되면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등극하였으며, 자신을 몰아내려 한 류사오치를 1967년부터 물고 늘어져 결국 류사오치를 실각시키는데 성공했다. 결국 마오는 1962년 이래 잃었던 정권을 되찾았으며, 이로 인해 마오는 린뱌오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져 그를 후계자로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2월 역류, 7.20 사건 등 굵직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며 2인자 자리를 굳혔다. 한편 마오쩌둥은 류사오치는 몹시 미워했지만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했고 덩샤오핑에게 린뱌오와 같이 자신을 숭배하고 류사오치와 단절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덩샤오핑은 생존을 위해 린뱌오와 접촉했지만 주석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자기 하나이길 원했던 린뱌오는 덩샤오핑을 인민의 적으로 공박하였다.

다만 국방부장으로 있었으면서도 후계자 자리를 굳히기 위해 문화대혁명파와 홍위병이 인민해방군과 군부 실세를 공격하는데 방관하거나 협조함으로서 아들 린리궈가 지배하고 있던 공군을 제외한 군내 영향력은 줄어든다.

2.6. 쿠데타 음모 및 죽음

이 당시 린뱌오는 중국언론에 의해 "마오쩌둥의 친밀한 전우"라는 호칭으로 지칭되었으며, 이는 마오의 공식적인 후계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방부장으로서 마오의 방대한 저서들에서 명구절만 모아서 만든 마오주석어록이라는 소책자를 전국적으로 배포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자신이 쓴 서문에서, "마오주석의 말 한 마디는 다른 사람의 말 천 마디에 맞먹는다"라는 아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당시 중국 인민들은 이 마오주석어록을 항상 휴대하고 다니며 암송해야 했으며, 각국어로 번역되어 68 혁명 등 서방까지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하지만 1967년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 등 조반파의 난동이 심각 수준에 치달으면서 중국은 외교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마오쩌둥은 중앙문혁소조의 과격파를 대독초라 부르면서 이들을 제어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때 린뱌오의 군부가 대대적인 질서 안정 차원에 들어갔고 각 지방의 인민해방군들이 홍위병의 소요를 진압했다. 린뱌오는 이 시점에서 더 이상 문혁을 지속하다가는 중국이 결딴날 수도 있다고 인식,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와 연합하여 문혁 중단과 경제개발을 주장했다. 하지만 장춘차오, 야오원위안을 비롯한 4인방은 경제개발보다는 계급투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1969년 중국 공산당 9차 당대회 정치보고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4인방을 지지함으로 린뱌오와 천보다는 일단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1969년 중국-소련 국경분쟁을 겪고 나서 충격을 받은 중국 지도부가 미국과의 화해를 꾀하자 이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가 마오쩌둥으로부터 고립주의자, 대국 쇼비니스트라는 비난을 들었다.

이듬해인 1970년 8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9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에서 린뱌오와 천보다는 국가주석직 부활과 천재론이라는 카드를 내놓음으로 4인방을 견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에 천재론을 존치할 것을 주장함으로 천재론 삭제를 주장하던 장춘차오를 몰아내려 한 것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직 부활과 천재론에 대해서 모두 분명하게 반대를 표명했고 8월 31일, 천보다를 숙청해버렸다. 마오쩌둥 입장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상징인 장춘차오를 내칠 수도 없었고 천보다의 경제안정론은 너무 이르다고 판단했다. 이 사건은 대단히 린뱌오에게 큰 타격으로 다가왔는데 마오쩌둥이 린뱌오를 문화대혁명과 자신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당내 이론가 천보다와 군사 실력자 린뱌오의 결합은 마오쩌둥에게 자신의 권위에 치명타로 다가올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그동안 린뱌오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것은 린뱌오가 문혁을 계속 옹호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는데 9차 당대회와 9기 2중전회를 계기로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경계 대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천보다가 마오쩌둥에게 난타당하고 숙청당한 것의 본질이 린뱌오에 대한 견제라는 것은 중국 정가에서는 다 아는 일이었고 중국 정치계에서 린뱌오의 권위는 계속 축소되었다. 위기를 느낀 린뱌오는 1971년 3월에 공군부장으로 있던 아들 린리궈, 아내 예췬, 이외 수하들과 함께 마오쩌둥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571 공정이라 불리는 쿠데타 계획을 수립했다. 같은 해 9월 마오쩌둥이 지방 도시들을 시찰하고 있는 틈을 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실패했다.[11]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다급해진 린뱌오는 소련으로 망명하기 위해 호커 시들리 트라이던트 1E 비행기[12]에 올랐는데, 비행기 조종사의 실수[13] 몽골 영공에서 추락하면서 린리헝을 제외한 일가족과 함께 64세를 일기로 숨졌다.[14] 이를 9.13 사건이라고 한다.

린뱌오 일가가 몰락한 후 황융성, 우파셴, 리쭤펑, 추우이쭤를 비롯한 린뱌오의 측근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감행되었다. 특히 린뱌오의 개인왕국이었던 공군은 수뇌부 전체가 조사를 받거나 수감되었다. 마오쩌둥은 초기에 이들이 과오를 인정한다면 관대하게 처분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들이 관련 자료를 인멸하면서 죄를 숨기려 하자 격노하여 모조리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이로 인해 상당수의 인사들이 당에서 제명되고 수감되었으나, 린뱌오의 측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몇달 후 석방되었고, 린뱌오의 측근들도 사형같은 극형은 받지 않았고, 10여년 후에 덩샤오핑이 새로히 집권한 이후 전원 석방되었다. 이렇게 비교적 관대한 처분이 내려진 데에는 공군 인력을 대체하기가 어렵다는 현실적 이유가 크게 작용했다. 린뱌오 쿠데타 음모 이후 공군 간부들이 연루유무에 상관없이 모조리 체포되어서 공군이 마비될 지경이었다고 한다. 이후 비림비공운동이 일어나면서 린뱌오는 공자와 함께 격하당했다.

유일한 생존자가 된 딸 린리헝은 권력에서 축출되어 살아남았고 2006년 중앙일보 보도로 호텔 주인으로 살아있음이 보도된 바 있다. 오빠인 린리줜과 반목했고 가족이 소련으로 튀려던 걸 밀고했던 바 있다.

3. 평가

"린뱌오는 전장(戰場)과 초연(硝煙), 선혈과 생명이 오가는 곳을 갈망하는, 당대의 한신(韓信)이다.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공을 세울 날이 멀지 않았다. 청사에 남을 공을 세울 테니 두고 봐라."
장제스, 1937년 제2차 대일(對日) 국공합작 당시 군사회의 석상에서
전쟁에 있어서는 매우 뛰어난 장군이었고 전략적인 식견도 있는 인물이었다.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내성적, 소극적 성격이어서 용장(勇將)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지장(智將)으로서의 면모는 탁월했다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 뛰어났지만 토사구팽 당한 점은 한신을 연상시킨다. 린뱌오의 경우 논란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섬기던 주군(마오쩌둥, 유방)을 상대로 반란을 도모하려다 실패하여 최후를 맞았다는 점도 비슷하다.

국공내전 당시 린뱌오가 도시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펑더화이는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마오가 린뱌오의 손을 들어 도시에서 철군해 농촌으로 이동한 뒤 농촌의 지주들을 숙청하면서 농민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이로 인해 결국 국공내전의 흐름이 바뀐 일을 보더라도 그의 식견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린뱌오를 "장군 15명을 합쳐도 린뱌오 한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고 극찬했고, 적이었던 장제스"저놈은 전쟁의 마귀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장제스는 사실 황푸군관학교 교장 시절부터 린뱌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황푸가 배출한 가장 우수한 군사가는 4기생 린뱌오"라고 했다.[15] 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945년 5월에 린뱌오가 동북( 만주) 지방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린뱌오가 갔다면, 앞으로 동북은 편할 날이 없겠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린뱌오는 동북지방을 초토화시켜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주도권을 잡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군사적으로는 천재였지만, 정치적 안목과 역량은 상당히 부족하였다. 린뱌오는 마오쩌둥의 카리스마, 저우언라이의 중후함, 덩샤오핑의 비전 같은 것을 갖추지 못했다. 펑더화이에 비해서도 정치적인 안목이 떨어지기는 마찬가지인데, 펑더화이는 인민을 걱정해서 마오에게 쓴소리를 하다가 실각한 반면에 린뱌오는 마오의 충실한 개 노릇을 하다가 자신의 안위가 위태로워지자 마오를 배신했다가 실패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되기 힘들다.

그래서 펑더화이는 마오 사후 복권되었으나 린뱌오 및 그 일당은 아직까지도 반혁명집단으로 남아있다.[16]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도 린뱌오에 대해 '복권은 안 되어도 펑더화이처럼 어느 정도 능력적인 부분은 재조명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 때문인지 80년대만 해도 린뱌오는 각종 항일영화나 국공내전 관련 영화에서 그 활약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90년대부터는 그래도 나오는 편이다.

4. 주요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국방부장
파일:중국 국장.svg
1대 2대 3대
펑더화이 린뱌오
( 1959년 9월 17일 ~ 1971년 9월 13일)
예젠잉

5. 가족

아내가 둘이며 첫째 부인은 딸을 낳았고 둘째 부인은 아들( 린리궈)과 딸을 낳았다. 둘째 부인의 딸은 칭화대학 전자공학과를 다니다가 베이징대학 중문학과로 편입했고 중국사회과학원에서 일했다.

6. 기타

권력욕이 있는 인물인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좀 고독한 기질도 있었다고 한다. 린뱌오의 평생 모토가 한밤 중의 외로운 처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었다고 하며, 그래서 공산 정권 수립 이후 열린 원수 진급식에도 아프다는 핑계로 불참했고 옛 부하들이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1970년 루산회의에서 천재론을 내세우다가 장춘차오에게 패배했을 때도 마오쩌둥이 자아비판 정도면 용서해주겠다고 하는 것을 북대하에 칩거하면서 따르지 않을 정도였고 이것이 그의 완전한 몰락으로 이어졌다.

이런 성격은 그가 타고난 약골이었던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황푸군관학교 재학 시절에도 새벽 구보에서 걸핏하면 낙오해서 따귀를 얻어맞는 고문관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정치부 교관이던 녜룽전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부터 "말수가 적고 매사에 소극적이었다. 웃거나 찡그리는 법이 없고, 돌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이런 기질이 더욱 심해진 것은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큰 부상을 입은 뒤 모르핀 과다투여로 중독된 탓으로 여겨진다. 이로 인한 신경 이상으로 한동안 물과 바람, 햇빛을 두려워했고 산수화조차도 보기 싫어했다고 한다. 그 뒤로도 일상적인 수분섭취조차 어려워해서 궁여지책으로 아내가 찐빵에 물을 적셔서 준 것으로 수분을 보충할 정도였다. 비서들의 증언에 의하면, 물과 접촉하기 싫어한 나머지 1년에 발을 2번밖에 안 씻었다고도 한다. 심지어 바람이 무서워서 면전에서 비서들이 서류 넘기는 것을 싫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밖에 고기, 생선과 해산물, 과일까지 피했다고 하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 이러한 특징을 보았을 때, 모르핀 중독에다 2인자를 노렸다는 점에서 나치 독일 헤르만 괴링과 비슷하다. 거기다가 아들 린리궈가 공군을 개인왕국처럼 지배했다는 점에서도 괴링과 비슷하다.

중국내 애연가들이나 애주가들에게 부관참시(?)당하는 신세이기도 하다. 이유인 즉슨 장쉐량, 덩샤오핑, 마오쩌둥은 술과 담배를 즐기고도 각각 100세, 90세, 80세 넘게 장수했는데[17] 린뱌오는 술과 담배를 멀리했는데도 60대까지밖에 못살았다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단순히 술과 담배를 멀리해서 오래 못 산건 아니고, 비록 사고로 죽었다고 해도 1971년 당시 중국의 평균수명이 6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오래못산 수준도 아닌지라 일종의 핑계거리나 농으로 언급되는 것이기는 하다.

모자를 쓴 사진이 대부분인데, 탈모인이다.

7. 매체에서

파일:건국대업임표.jpg

1980년대 중반까지 중국에서 무수히 만들어진 중일전쟁-국공내전 선전영화에서 린뱌오는 기록말살형에 쳐해져서 거의 나오지 않다가, 199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어느정도 복권되어 비중없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2010년대 들어서는 비중있게 나오기 시작한다.

영화 건국대업의 린뱌오. 배우 유립평(由立平)이 분했다.

파일:건군대업임표.jpg
영화 건군대업에 나온 린뱌오. 배우 마천우( 마톈위, 馬天宇)가 분했는데...배우 보정이 너무 심하다. 이 영화에서 린뱌오는 쑤위와 함께 19세의 국민당군 쫄병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는 그당시 두명 모두 이미 영관급 장교였다.[18]

호이4에서 중국 공산당 장군으로 등장한다. 원래 운남성의 군벌 룽윈과 초상화를 공유하고 있었으나 1.5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오면서 룽윈이 고증에 맞춘 초상화를 갖게 되었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한국으로 망명 요청을 한 인민해방군 원수 및 중국공산당 부주석으로 나온다. 다만 한국이 인도에 보내고 그 인도에서 이스라엘로 이동하며 결국 패튼vs린뱌오의 빅매칭이 시작되었다(...)

8. 참고문헌



[1] 초대 교장이 장제스에 정치주임은 저우언라이였다.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 군벌을 막론하고 중국 현대사의 주요 인물을 다수 배출했으며 의열단을 비롯한 조선인도 상당수 여기서 공부했기에 우리 독립운동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참고로 린뱌오는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원봉과 동기생(4기)이다. 여기를 거쳐갔던 독립운동가로는 주로 북한쪽으로 간 이들이 많다. 6.25때 북한의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최용건은 여기서 교관을 지냈다. [2] 입학한 계기는 어느 유부녀에게 연서를 보냈다가 들켜서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나 '이렇게 된 거 군대나 가자'라는 생각에서였다(...). [3] 오인하게 된 경위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노획한 일본군의 외투를 입고 있어서 오해했다는 설, 안개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는 설 등이 있다. 여하튼 린뱌오가 해당 구역을 지나간다는 소식이 아래 병사들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은 동일하다. [4] 해당 병사는 문책당하여 총살당할 뻔했으나 린뱌오가 양해해서 넘어갔다고 한다. [5] 치료 과정에서 모르핀 중독에 빠졌다는 설도 있다. [6] 공산군이 6월부터 국민당군 10만 명을 포위했는데, 보급로가 끊긴 국민당군 사령관인 정동국(鄭洞國) 소장은 포위망 내의 민간인에게 식량을 징발했고, 민간의 식량도 다 떨어진 10월이 되어서야 9만 5천명의 포로를 남기며 항복했다. 국민당측에서는 많게는 60여만 명의 아사자가 났다고 주장하고, 한국의 밀-역덕에 많은 영향을 준 디쾨터같은 반중공-친장제스 역사가는 국민당측 소스를 인용하여 약 20만까지 잡고 있지만, 중공측은 포위망내 민간인 인구가 40만 명이었으며 약 5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 항복한 국민당군 사령관인 정동국은 이후 감옥에 갔다가 풀려나 중공 정부 수리부에서 일하면서 88세까지 장수했지만, 창춘 포위전에서 일찍 항복하지 않아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에 대해 매우 죄책감을 느꼈다고 한다. [7] 여기에 대해 션즈화 교수는 펑더화이가 자신과 연고도 없는 4야전군에 가서 다짜고짜 린뱌오를 욕했을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8] 가오강도 중국 인사들 회고록에서 전쟁 반대파로 많이 설명되었지만 정작 북한 인물들의 회고록에는 매우 열렬히 찬성한 인물로 나오며, 해금된 문서에서 참전파였던 것이 드러났다. [9] 어쨌거나 이런 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방에서는 린뱌오가 총사령관인 것처럼 오인되었다. 실제로 1970년대 이전에 나온 6.25 전쟁을 다룬 한국과 미국의 저작물에는 하나같이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을 임표(린뱌오)라고 적었다. [10] 정식 명칭은 마오주석 어록(毛主席语录). [11] 쿠데타의 범위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쿠데타 자체가 아예 공상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부터 나름 실제적인 계획이 있다는 설까지 다양하다. 대체로 린뱌오의 아들이 주도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며 린뱌오 본인도 여기에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12] 12년 후 중공 여객기 불시착 사건 때는 트라이던트 2E 모델이 주인공이 됐다. 이래저래 중국과 엮인 기종인 셈이다. [13] 중국내 사고조사보고서에는 청천기상에서의 알수없는 이유에의한 비행착각으로 추정하였다. [14] 린뱌오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기록들이 그나마 공정성을 가지고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다. 그 전에는 비행기 폭발 사고설, 소련 망명설, 밥먹다가 바주카포에 맞아서 일가 몰살했다는 설까지 하여간 별의별 설들이 돌았다. 1980년대 말 한국에서 나온 반공서적에는 비행기 사고는 페이크사실은 마오와 그 일당에게 천안문 지하로 끌려가 고문 당하다 죽었다라는 이야기도 실렸다. [15] 그래서인지 나중에 린뱌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장제스는 중공의 팔 하나가 잘렸다고 평했다. [16] 실제 중국 정부에서도 문화대혁명의 주요 책임을 마오쩌둥의 아내인 장칭이 주축이 된 4인방과 린뱌오에게 떠넘기고 있다. [17] 마오쩌둥은 담배만 즐기고 술은 멀리했다. 대신 여색을 엄청나게 밝혔다. 덩샤오핑은 술담배 모두 즐겼고 장쉐량은 술담배에 마약에 여자까지 다 해먹었다. 반대로 저우언라이는 술만 즐기고 70대에 죽었다. [18] 동갑내기이자 친구인 쑤위는 린뱌오에 맞먹는 지휘능력을 가졌다고 일컬어졌으나, 성격이 매우 겸손했고 결정적으로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1955년 당시 인민해방군 원수로 추대될 뻔했으나, 본인이 극구 사양해서 대장에 머물렀고, 정치에 별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에 반역자로 찍힌 펑더화이와 사이가 나쁜 탓도 있었지만) 험악한 시절을 평탄히 보내다 1984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