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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28:09

푸쭤이

파일:중국 국장.svg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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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
(1949년-1954년)
주더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펑더화이 청첸 린뱌오
가오강 류보청 허룽
천이 뤄룽환 쉬샹첸
녜룽전 예젠잉
중화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부주석
(1954년-1975년)
주더
(제1기)
펑더화이
(제1ᆞ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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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ᆞ2ᆞ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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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ᆞ2ᆞ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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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ᆞ2ᆞ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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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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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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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ᆞ3기)
뤄루이칭
(제3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1983년-)
쉬샹첸
(제6기)
예젠잉
(제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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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ᆞ7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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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ᆞ9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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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ᆞ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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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ᆞ1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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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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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ᆞ1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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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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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기)
쉬치량
(제12ᆞ13기)
장유샤
(제13ᆞ14기)
허웨이둥
(제14기)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
파일:35군군장부작의.jpg
중화인민공화국 수리부장관
정체 傅作義
간체 傅作义
한국식 독음 부작의
영문 Fu Zuoyi
의생(宜生)
출생 1895년 6월 27일
청나라 산서성 영하현
사망 1974년 4월 19일 (향년 78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바오딩 군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관료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기타5. 매체에서6. 관련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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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5년 산서성 영하에서 태어났다. 바오딩 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옌시산의 휘하에 들어갔다. 옌시산이 중국국민당에 가입한 이후 국민혁명군으로 편제되어 국민혁명군 제3집단군 6군 4사단장에 임명, 장쭤린 봉천군벌과 탁주 전투에서 싸워 용맹히 분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포로가 되었고 이후 탈출하여 다시 옌시산에게 합류했고 14군 4사단장에 재임명되었다. 국민혁명 완수 이후 톈진 경비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9년 편견회의의 결과에 따라 3집단군 5군을 축소개편한 43사단의 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옌시산 중원대전을 일으켜 장제스에 대한 반기를 들자 산동반도 공략에 나서 한푸쥐 군을 격파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을 들어 참전하면서 망해버렸다.

1931년 만주사변이 터진 후에 열하사변에서 일본군에 맞서 분전했으며 수원성 주석 겸 35군 군장에 임명되어 1936년 내몽골을 병탄하려던 일본군의 수동사변을 격퇴했다. 수동사변에서의 승리로 중국 전역이 환호했으며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도 푸쭤이에게 친전을 보냈다. 이를 계기로 중국 공산당과 군사적으로 교류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2.2. 중일전쟁

파일:부작의.jpg
중일전쟁 시기의 푸쭤이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2전구 산하 7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5개 사단, 9개 여단을 지휘하여 차하얼 성에서 하북을 병탄하려는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 베이핑 탈환전에 시도했으나 7집단군 전적총지휘 겸 13군 군장 탕언보의 중앙군이 패퇴한 이후 쑹저위안과 함께 싸우지 않고 퇴각했다. 이후 수원성과 차하얼이 함락되면서 산서성으로 퇴각했다.

1937년 9월, 일본군이 옌시산의 산서성을 공략하기 시작하자 산서성 방위를 위한 좌익군에 배치되었고 평형관 함락 이후 예비대로 편성되어 타이위안 방어를 시도했지만 한푸쥐의 적전도주로 낭자관이 함락되고 11월 8일 타이위안이 일본군의 손에 함락되었다. 푸쭤이는 2천명의 잔존병력을 거느려 퇴각했다.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서 주사오량의 8전구에 소속, 8전구 탈환에 참가했으나 일본군의 강렬한 저항에 퇴각했다. 일본군이 여세를 몰아 오원을 점령하자 1940년 3월 20일, 35군을 지휘하여 일본군 마즈카와 고레오 중장을 포함 4천명의 일본군을 전멸시키고 3월 22일 오원을 점령했다. 이에 주몽군 사령관 오카베 나오자부로 중장의 지시로 일본군 26사단과 2개 기병대대가 오원을 점령했으나 푸쭤이는 이들을 재차 격퇴하고 오원을 탈환했다.

1939년 청천백일장을 수여받았고 종전 이후 4개군을 지휘하여 수원성과 차하얼의 구이쑤이, 지닝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장자커우에 이르렀다.

2.3. 국공내전 중국공산당 합류

국공내전이 발발한 이후 12전구 사령관에 임명, 수원성에서 중국 공산당 진자치군구, 진쑤이군구 소속 5만 3천명의 병력과 교전을 벌였으나 패하여 1만 2천명을 잃었다. 1946년 7월에 반격하여 지닝과 다퉁을 탈환한 후 쑨롄중과 연합하여 평수철도를 따라 장자커우를 공격했다. 10월 상순에 홍군의 격렬한 저항으로 1만의 병력을 잃어가며 10월 11일 장자커우를 점령했다. 1947년 1월에 차하얼 성 정부주석, 1947년 11월 화북초비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산서, 하북, 차하얼, 열하, 수원 5개 성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1947년 12월~1948년 1월에 걸쳐 홍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8천명의 병력을 잃었으며 3월에 차하얼, 수원을 빼앗기고 5월에 베이핑으로 철수했다. 이에 장제스가 직접 베이핑으로 와서 9월에 웨이리황, 푸쭤이와 대책을 논의해서 산동의 7개 사단을 증파하고 총 11개 사단으로 동진병단을 조직해 만주 전선에 투입시켰다. 하지만 요심 전역에서 국민혁명군은 전멸했고 푸쭤이는 3개 보병사단, 2개 기병사단을 동원해 석가장 중공중앙 기관을 습격해 만회하려 했으나 11월에 중도 철수했다.

11월 4일, 난징을 방문해 장제스로부터 잔여병력 50만명을 장강 이남으로 철수시키란 지시를 받았으나 숙청당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따르지 않고 베이핑과 톈진을 사수하였다. 푸쭤이는 신병을 조직하며 평진 일대의 주요 도시들을 사수할 수 있을 것이라 보았지만 린뱌오가 지휘하는 100만에 가까운 동북, 화북 야전군이 남하하면서 곧 위기에 처했다. 1949년 1월 15일 톈진이 함락된 이후 25만의 잔여병력을 이끌고 섭영진, 하룡에게 포위된 베이핑을 수비하다가 공산당원인 딸의 설득으로 중국공산당과 화평교섭에 들어갔다. 이를 알게 된 장제스 쉬융창, 정개민, 장웨이궈를 파견해 베이핑에 주둔한 직계 부대라도 칭다오로 철수시켜달라고 요청했으나 푸쭤이는 거절했다. 후스 등 일부 학자들이 국민정부가 파견한 비행기를 타고 난징으로 철수했다.

이후 1949년 1월 21일 베이핑을 평화적으로 해결하자는 협약을 맺고, 1월 31일 병력을 시에서 철수시키면서 중국 공산당에 투항하였고 중공군은 베이핑에 무혈입성했고 푸쭤이는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에 참여했다. 투항할 당시 푸쭤이는 '나에겐 죄가 있다(我有罪)'라는 말 한 마디만 했다는 야사가 있다.

1949년 4월 1일 리지선, 선쥔루, 황옌페이, 담평산 등과 함께 장즈중, 사오리쯔, 황샤오훙, 장사조, 이증 등 국민정부의 화평대표들과 만났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국민정부의 사실상의 투항에 가까운 평화협정을 제출한데다가 홍군이 장강을 도하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파일:1962년의부작의.jpg
1962년 춘절, 저우언라이, 장즈중 등과 함께 사진을 찍은 푸쭤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수리부(1958년 수리전력부로 개칭) 장관에 임명되어 1974년까지 사망할때까지 25년 동안 재직했다. 정치협상회의에 참여,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맡기도 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저우언라이가 작성한 반드시 보호해야 할 간부 목록에 들어가 있던 덕분에 자신은 보호되었으나 가족들은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당했고 1974년 사망했다.

3. 참고문헌

4. 기타

아들 푸헝은 베이징대 화학과를 나와 중국과학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딸 푸동쥐는 인민일보, 신화통신에서 언론인으로 근무했다. 손자 푸촨은 컴퓨터기술의 전문가로서 14기 전국정협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 매체에서

파일:건국대업부작의.jpg
영화 건국대업의 푸쭤이. 중국배우 수종적(修宗迪)이 분했다.

호이4에서 waking the tiger DLC가 발매된 이후 후쭝난, 장쉐량 등과 함께 국민혁명군 장성으로 등장한다.

추축국이 승리한 대체역사물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여러 번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충칭에서 패배하고 옌시산이 항복하자 일본에 항복하여 산시성을 차지하고 있다. 허잉친과 달리 그가 중국을 배신한건지는 작중에서도 평이 갈리는 듯.

6. 관련문서